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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2일 10시 59분 등록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


오찬호, 개마고원, 2013.


1. 저자에 대하여


■ 오찬호 ■


 

활동분야

사회학 박사. 연구원, 강사

 

• 발 자 취 •  

• 저 서 •

서강대 대학원 사회학 박사

현재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

2007년부터 글로벌사이버대, 동덕여대, 목원대, 서강대, 서강대 공공정책대학원, 서경대, 세종대, 아주대, 안양대, 한국방송통신대 등에서 다양한 강좌 진행

개인 블로그 오찬호닷컴(blog.daum.net/och7896) 사회분야 우수 블로그로 선정(2008년, 2010년)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몇 년 전 임대주택에 당첨되어 서울에서 아파트 전세에 사는 것을 호사를 누리고 있다고 말하는, 몇 호선인지 모를 지하철 종점 부근에 살고 있는 두 아이의 아빠이다.

 오찬호는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여러 곳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인터뷰도 하고 글도 쓰고. 개인 블로그는 사회문화에 대한 비평을 주로 싣고 있으며 우수 블로그로도 선정되는 호사(?)를 누리고 있는 분이다. 그가 이러한 불로그를 운영하며 연구원으로 일하며 글을 쓰며 관심가지는 것은 “인간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에는 사회의 ‘지적 총량’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친다는 생각 아래, 현대사회가 개인의 생활스타일을 어떻게 창출하는지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한다.


참고자료


오찬호닷컴

yes24 저자소개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머리말_지금 이십대가 위험하다


p4~5 '88만원 세대‘ ’3포 세대‘ ’프리터족‘ ’캥거루족‘ ’잉여세대‘ ’취업난민세대‘…… 끝없이 이어지는 이 처절한 이름들, 그것으로 대변되는 이십대들의 안타까운 현실에 대해서는 물론 이런저런 진단과 분석이 이미 많이 나와 있다. 이십대가 뭉쳐서 정치적 행동에 나서야 달라질 문제라는 진단에서부터, 청춘이라 본디 아픈 법이며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느니 하는 위로, 나아가 국내외적으로 장기화되고 있는 경제 불황만 해소되면 이 모든 문제가 사라질 거라는 기대, 심지어 ’잉여‘라고 자조하지 말고 스스로 이를 적극 긍정해보자는 이야기까지 말이다.

프리터족이란 프리(free)와 아르바이터(arbeiter)의 합성어이며 본인에게 필요한 돈이 모일 때까지만 일을 하고, 지속적으로 일을 하지 않는 집단을 말한다. 이와 비슷하지만 구별되는 니트족(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 ; NEET)은 교육이나 훈련을 받지 않고 일도 하지 않으며 구직활동도 하지 않는 15~34세의 젊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있다. 이들은 취업에 대한 의지가 전혀 없다는 점이 프리터족과 차이점이다.


p5 내가 이들에게서 발견한 또다른 반쪽은 암울하기 그지없는 승자독식 사회에서 더 암울하게 변해버린 이십대, 다소 과격하게 말하자면 괴물이 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괴물이 되어버린 이십대이다. 부당한 사회구조의 ‘피해자’지만, 동시에 ‘가해자’로서 그런 사회구조를 유지하는 데 일조하는 존재란 얘기다.


p5~6 지금 이십대들이 보여주는 삶의 지향이나 행태는 획일화된 외곬으로만 치달은 나머지 살벌한 경쟁 자체가 ‘모범적인 삶’으로 바뀌어 있다. 사회가 어쩔 수 없으니 그렇게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그렇게 사는 것을 바람직한 사회생활로 이해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예컨대 평생학습을 학습능력 하나로 ‘단죄’받고 사는 시스템 따위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이를 문제시하기보다는 오히려 학력차별(학력위계주의)을 확대재생산하는 데 더 열심이고, 자기계발서를 인생 최고의 경전인 듯 떠받들며 안으로는 극단적 자기관리의 고통에 피가 마르면서도 밖으로는 사소한 경쟁우위를 위해 어떤 차별도 서슴지 않는 걸 ‘공정’하다고까지 여긴다. 도대체 무엇이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은 걸까?


1장 강의실에서 바보가 된 어느 시간강사 이야기


“날로 정규직 되려고 하면 안 되잖아요!”


p19~20 평소 시사문제에 제법 진보적인 성향을 보여주었던 학생들조차 이 이슈, 정확히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규직으로 전환해줄 것을 요구’하는 데는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대표적인 사회적 약자로 볼 수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다른 요구도 아닌 정규직이길 희망하는 것이, 이들 보편적인 이십대 대학생들에게는 인권의 범주에서 논의될 성질의 사안이 아닌 셈이었다. 나는 오히려 “그런 당위가 더 비윤리적이다” “민주주의가 만능열쇠냐!”라는 반론에 부닥쳐야 했다.


p21 이들에겐 나름의 분명한 논리가 있었고, 그런 만큼 확신도 강했다. 핵심은 ‘정규직이 되기 위해서 내가 고생하는데, 그런 고생도 거치지 않고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규직으로 전환해달라는 건 당연히 있을 수 없다’는 것인데, 도대체 이 생각, 그리고 이에 대한 확신은 어디서 비롯되었고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동병상련은 없다!


p21~22 대학생들이 비정규직들의 주장에 공감할 거라고 여겼던 이유는, 현재 이시백 처한 상황이나 KTX 여승무원들의 처지나 피차 마찬가지라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정규직 노동자가 좀 더 안정적인 삶을 위해 요구하는 ‘정규직 전환’을 동병상련의 입장에서 지지함으로써 이십대 본인들의 미래도 좀 더 안정적으로 만들어놓는 게 당연한 노릇이다. 하지만 이십대 대학생들의 반응이 그러하지 않으니, 나는 놀랐던 것이다.

⇒ 동병상련으로 생각하는 것과 그래서 지지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지 않을까. 충분히 공감되고 안타까운 일이며 변화되어야 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시험’으로 자격을 거쳐야 되는 경우와는 또 달리 생각해야 될 부분이 있지 않나 한다. 이십대의 생각과 같다고 반발하려나. 처음부터 이러한 구분이 만들어지지 않아야 하는, 그러한 구조가 되어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문제는, 정규와 비정규직의 구분이 없어져야 하는 것이고 일에 필요한 만큼의 적정인력을 채용하는 형태가 이루어져야 한다. 노동유연성으로 기업들의 입맛에 맞도록 할 것이 아니라.


p25 이십대가 힘든 사회구조적 이유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그렇게 힘들어하는 이유와 이렇게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이십대들이 그들에게 동병상련해주길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반응은 나타나지 않았다. 사회구조적 측면에서 이십대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피차 마찬가지 처지인데, 이십대들의 일상적 현실에서는 마찬가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비정규직인 건 자기계발 안 한 탓?


p26~27 지금의 상황은 단순히 개인이 좀 잘해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비정규직 노동자 처우가 좋아져야 한다는 목소리, 특히 정규직 전환과 같은 노동자 삶의 기본권을 보장해달라는 요구를 지지해주는 게 이십대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서도 당연히 좋은 일이다. 이러함에도 오늘날 이십대들에게는 그런 논리구조가 없다. 이들에게 그건 이유가 아니다. 정확히는 그것을 거부하는 논리구조가 있을 뿐.


p32 아무리 봐도 지금의 자기계발 현상에는 ‘이렇게 하라!’는 주문만 있지 그로 인해 ‘달라진 결과’가 없다. 그렇게도 자기계발이 현상황을 극복한 유일한 진리라면, 그래서 여기에 한 개인이 ‘예스’라고 응답했다면 그로 인해 조직에 적응이 되는지, 자아가 구체적으로 치료되든지, 아니면 평생에 걸쳐 ‘즐길’ 어떤 기술이라도 연마되든지 해야 할 텐데, 지금 도대체 어떤 결과가 이십대들에게 있단 말인가. 오히려 지금의 청년들은 그런 결과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걸 특성으로 갖고 있지 않은가.


p33 문제는 자기계발과 성공의 간격이 이처럼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에’ 강조되는 것은 늘 자기계발이라는 점이다. 즉, 문제의 극복이 가능하다는 자기계발의 논리가 사실은 평생 ‘극복만 주문’받는 개인을 만들어버린다. 이십대는 불안하니까 자기계발 담론을 받아들여 위기를 넘어서려 하지만, 불행히도 그 불안한 상태는 계속 유지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도돌이표처럼 갇혀버리는 것이다. 모두가 이 자기계발의 수행에 동참하면 그 어마어마한 참여자들 덕택에 성공하는 ‘하나의’ 사례는 또 발견될 것이고, 이는 ‘가능성’의 객관적 증거로 활용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희박한 성공의 가능성이 표면화될 때,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수천수만의 사례는 ‘노력 부족’이라는 말로 간단하게 정리 처분된다. 이렇게 좌절하는 자아가 많아질수록 자기계발서 시장은 더 커진다는 건 두 말하면 잔소리. 노골적으로 말해, 자기계발서를 읽었다는 건 ‘낚였다!’의 다른 말인 것이다.


p35~36 다시 말해, 이십대들의 (내가 보기에는 냉정하고, 그들 입장에서는 지독히도 당연한) 낮은 사회적 연대의식에는 자기계발 시대의 그림자가 일종의 ‘밥그릇 싸움’의 형태로 짙게 드리워져 있는 걸까? 그래서 ‘나도 노동자가 되니까 정규직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식의 이해가 아니라, ‘저 사람들은 내가 들어갈 정규직 자리에 무임승차하고 있다!’고 받아들인 것일까?


이십대를 이해하는 것, 그래서 이십대에게 할 수 있는 말


p39 무의식적이라는 것은 특정한 행동과 생각에 의심할 여지가 없는 타당한 이유가 전제되어 있다는 뜻이다. 즉, 이십대가 그러한 모습을 보이는 데는 자신들만의 너무나도 당연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보기엔, 비정규직 노동자가 별안간 정규직이 되길 희망하는 건 공정하지 못한 반칙일 뿐이다. 그리고 이십대의 이런 반응은 어떤 의미에서 ‘불의에 대한 저항’이기조차 하다. 이 책은 이런 사고가 이십대 동년배 집단 전체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드러낼 것이다. 다시 말해, 그렇게 행동하는 건 이십대들이 공유하고 있는 특정한 신념 때문이며, 거기엔 빈약한 공정성 개념도 관련되어 있음이 밝혀질 것이다.


p40~41 이 책은, ‘자기계발 권하는 광기의 사회’가 어떤 인간상을 창출하는지를 일개 개인의 모습으로서가 아니라 분명한 집단적 특징으로서 보여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나오는 질문들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 요구에 반대하는 청년들을 만들어낸 시스템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이 시스템이 어떻게 견고히 재생산 되는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함이다. 이는 실업이 낯설지 않고, 취업은 늘 불안정한 것이 되어버렸으며, 그렇기에 해고의 공포를 인간 본연의 감정인 양 갖고 살아가는 현대사회에서 한국의 이십대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기도 할 것이다.


2장 자기계발서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


이십대의 자기계발 아이러니


p50 오동철: 너 아직도 노냐?

    한세진: 예? 노는 게 아니라.....

    오동철: 요새 취직하기도 힘들다는데.....불황 아니냐, 불황. 우리나라 백수 애들은 착해요. 텔레비전에서보니까 프랑스 백수 애들은 일자리 달라고 다 때려 부수고 개지랄을 떨던데, 우리나라 백수 애들은 다 지탓인줄 알아요. 지가 못나서 그런 줄 알고. 아휴~새끼들 착한 건지. 멍청한 건지. 다 정부가 잘못해서 그런 건데~~ 야! 너도 너 욕하고 그러지 마. 취직 안 된다고. 니 탓이 아니니까. 당당하게 살어! 힘내 씨발!

      -영화, 내 깡패같은 애인

⇒ 요렇게 말해도 아무도 안 듣는다. ‘잘난’ 사람이 어떻게 성공했는지를 얘기하는 것만 먹힌다.


p51~55 한국 사회의 이십대 대학생들이 자기계발에다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가 세 가지 측면에서 명료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이는 이십대들의 힘든 삶에 대해 “그건 너희탓이 아니야!”라고 말하고자 했던 내 방식의 위로가 매우 허망하게 들리게 되는 이유이기도 했다.

    먼저 첫째, 이십대 대학생들에게 자기계발이란 취업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의미가 있다는 점이다. (…) 하지만 이십대 대학생들은 ‘자기계발’이란 단어와 마주하면 당연히 이를 “취업준비로 무엇을 하고 계신가요?”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즉, 이들에게 ‘자기계발하기’란 당연히 외국어공부, 학점관리, 자격증 취득, 인턴, 봉사활동, 공모전 참가, 체력관리, 외모 가꾸기(심하면 성형도 불사), 자기소개서 작성 연습, 프리젠테이션 및 스피치 훈련 등을 말한다. (…) 그래서 이십대에게 자기계발이란 ‘성과를 얻기 위한 훈련의 과정’이며, 그렇기에 여기엔 고통스러운 ‘자기희생’이 따른다. 내 자신의 만족이 아니라, 외부가 만족할 수 있도록 하는 가운데 자아가 희생되는 까닭이다. 그 희생의 내용은 각종 자기통제다. 그중 시간에 대한 통제가 제일 강조된다.


왜 아무도 문제시 하지 않는 걸까?


p57 왜 자기계발이 ‘자기희생’과 동의어가 되는 걸까? 남을 따돌리거나 짓눌러서 우위에 서려는 경쟁을 당연히 여기는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리하여 그 사회를 굴려가는 수많은 톱니바퀴의 하나가 되자면 분명 한 개인으로서 자아를 희생시켜야 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이것이 왜 ‘자기계발’이란 멋진 단어로 포장되느냔 말이다.

    자기계발이 그 자체로, 수단이 아닌 목적인 게 더 바람직하다는 데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외부의 기분에다 자기 자신을 맞추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자기’의 ‘계발’을 위해서라면 그것이 등산이면 어떻게 드럼 배우기면 어떤가.


p59 그렇게 자아를 고통스럽게 하는 자기통제의 ‘자기계발’은 이십대에게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언젠가 잘 될 것이라는 작은 희망으로 버틴다. “고생 좀 하자! 그러면 좋은 일 있겠지”라며 자기희생을 합리화한다. 그러다 지치면 “조금 쉬다가 다시 달리자!”라는 누군가의 위로에 눈물 흘리며 다시 원래의 그 ‘길’에 올라선다.


p59~60 취업 때문에 택한 자기계발이 사실상 취업과 별 상관없다는 게 증명되고 있는데 왜 자기계발에 대한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 걸까? 그러니까 이십대의 취업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견고한 사회구조는 늘 그대로인 것 아닌가. 어떤 수정도, 변화도 없이. 그 누구도 문제 삼지 않으니 당연한 일이다. 사회가 견고히 버티고 있으니 개인에게서는 결국 또 자기계발 외엔 다른 대안이 없다. 이 괴로운 상황을 이십대들은 어떻게 버텨내는 걸까?

    바로 여기에 이십대 자기계발하기의 세번째 특징이 있다. ‘자기계발에 열심이지 않은 게으른 자’와의 비교에서 자신의 현재에 대한 위안과 만족을 구한다는 점.


촛불 든 이십대, 사회에 눈 감다


p63 촛불시위의 대학생들 모두가 ‘촛불은 민주주의다’라는 전제에 동의한다? 오산이다! 지금 이십대들의 ‘결’은 매우 다층적이다. 누구는 촛불을 들며 ‘사회적 약자의 권리 쟁취’를 말하고, 누구는 자신의 촛불에 대해 그런 식으로 의미를 확대하는 데 분명하게 반대한다. 즉, 촛불시위에 긍정적이라고 해서 곧 ‘촛불은 민주주의’라는 담론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 안에는 시위에 참여하면서도 “촛불이 만고진리냐!”고 받아치는 이십대도 있다. 심지어 취업에 대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시외에 참가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느 집단에나 흔히 있을 수 있는 그런 소수들 이야기가 아니라, 무엇을 다수로 여길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소수들의 집합체랄까?


p65~66 우선 내가 미네르바 사건을 ‘표현의 자유’의 측면에서 바라보는 것을 독수리 5형제는 의아했다. 독수리 형제 3호의 다음 말은 나머지의 의견이기도 했다.

    “솔직히 전문대 출신 아닌가요? 그렇다면 그가 말한 것이 전문적이지 못하다는 것이 사실상 증명된 것 아닌가요? 표현의 자유가 무엇을 말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민주주의 사회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건 분명하죠. 하지만 비전문가가 전문가 행세를 할 표현의 자유가 전적으로 주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당당했다면 왜 처음부터 본인의 학력을 밝히지 못했나요? 지금이 많은 젊은이들이 ‘당당해지기 위해서’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데…….”

   이들은 하나같이 미네르바가 전문대 출신이므로 ‘비전문가’라는 것을 강조했다.


p68 이들은 미네르바 용산 철거민들이 ‘어떤 선’을 넘어선 주장을 한다고 강조했다. “스스로 만든 결과에 대해서 책임지는 자세가 필요하다!”면서 말이다. 그 책임감이라는 건 “전문대 주제에” 할 수 있는 말과 그렇지 않은 말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었으며, “본인이 그렇게 자영업자가 되었다면” 건물이 철거당할지도 모르는 위험은 어쩔 수 없이 감수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말로, “평소에 좀 더 노력했으면” 전문대를 가지도 않았을 것이고, 굳이 그렇게 임대업장에서 장사를 하지 않아도 되었으리란 것이다. 이 얼마나 명쾌한 논리인가.

⇒ 내가 어느 집에 태어나는지는 ‘노력’으로 될 일이 아니었건만.


차별과 해고를 정당하다 여기는 이유


p71 이들이 노동자의 요구를 부정하는 논리와 근거는 보수 언론의 논조에 물들어 나온 그런 종류의 시각이 아니다. ‘불법’이란 말을 강조하는 것도 아니고, 노조를 ‘강성’이라는 단어로 수식하지도 않는다. 단 하나, 취업을 위해 자신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치열한 현실에 비추어 노동자의 파업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p73~74 미네르바, 용산참사 그리고 쌍용자동차에 관한 이십대들의 반응과 지금 이 이야기의 골간은 사실상 거의 같다. 여기서도 앞서 KTX 여승무원의 정규직 전환 요구를 '정정당당하지 못한 도둑놈 심보'라고 부른 여타 이십대들의 논리가 그대로 반복되는 셈이다. 입사할 때 비정규직인 줄 알았으면서 나중에 가서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 정규직 지위를 요구하는 건 있을 수 없다고 했던 바로 그 논리다.

    시간강사에 대한 입장도 이와 마찬가지다. 시간강사가 '이런 대우' 받는다는 건 알았을 것이고, 교수라는 지위는 '이런 대우'를 받는 시간을 지나왔기에 얻을 수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강사들의 몇몇 요구는 일정한 선을 넘은 것이란 주장이다. 즉 '힘들다는 것 자체'가 어떤 요구로 이어져서는 안 됨을 분명히 했다. 그건 본인이 선택한 '결과'이고, 그 결과의 '무게'는 스스로가 짊어져야 할 몫이라는 것이다.


p76 "공부도 더 많이 한 분들도 아직 어려운데"라는 이유가 또 등장했다. 5호는 교직원(혹은 강사)와 환경미화원의 지위 차이를 분명한 판단 근거로 삼았다. 이는 '공부도 더 많이'라고 표현되었듯이 노력이 더 많은 쪽이, 즉 남들보다 시간관리를 더 잘 해온 사람이 사회적 우대를 받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결국 동일하게 주어진 시간을 더 가치 있게 효율적으로 잘 사용한 능력이 검증되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직급의 차별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차별이 근거가 정당하므로, 해고당하거나 비정규직이 될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차별도 정당한 것이다. 이걸 뛰어넘는 요구가 나오면 이십대들은 의아해한다. 게다가 자기들 생각에는 당연히 정규직이 되어야 할 사람들도 비정규직으로 살아가고 있는 판인데, 어떻게 '감히 부족한 사람'이 이런 요구를 할 수 있는지 개탄하는 것이다.

    이쯤이면 “날로 정규직 되려고 하면 안 되잖아요!”라고 했던, 그 강의실의 k는 오늘날 이십대의 보편적인 생각을 대변하고 있는 셈이다. 내가 만난 많은 이십대 대학생들은 노동자들이 파업하는 모습에는 “불쌍하다”는 느낌을 받지만, 노동자들이 파업을 통해 주장하는 내용에는 대체로 반대 입장에 섰다. 이유는 노동자들이 겪는 고난의 일차원적인 원인이 개인의 ‘노력 부족’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좀 더 노력했으면 그런 꼴 안 당했을 것인데, 왜 뒤늦게 이러쿵 저러쿵 요구를 하냐는 것이다.


p77 이처럼 이십대들이 노동자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마지노선이 있다. 이는 어쩌면 그만큼 이십대의 취업 현실과 이로 인한 심리적 불안감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뜻이다. 노동자들의 요구를 "인생을 날로 먹으려는 게으름뱅이나 루저들이라"고 간주하며, 취업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해가는 자기통제형 자기계발에 매진하는 이십대들의 박탈감과 불안감 알이다. 이 암울한 불안감이야말로 지금의 이십대를 설명할 수 있는 핵심 키워드요, 이것이 일종의 시대정신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시간관리, 자기 통제, 그리고 칼날


p78 지금 이십대 대학생들에게서 보이는 두드러진 특징은 ‘시간에 대한 집착’이다. 물론 이게 십대만의 모습은 아니다. 자기계발에 목매는 현대인을 모두 시간에 대한 책임의식을 강박적으로 갖고 있다. 심지어 ‘휴식’조차도 이 강박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p81 상식적으로 ‘열정’을 평가받겠다는 건 그 자체가 퇴행적이다. 열정, 의지, 성실성…… 이런 건 지극히 주관적 영역에서 평가되는 것이기에, 본원적으로 객관의 잣대를 들이댈 성질이 아니다. 즉, 겉으로는 ‘시간관리’이겠지만 사실 이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자신이 시간을 어떻게 관리하든 결국 그 평가는 이를 ‘열정’이라 인정하고 받아줄 권한이 있는 누군가의 주관성에 기초할 것이기 때문이다.


p82 시간을 ‘나처럼’ 보내지 않은 사람을 결코 ‘나와 같은 급’으로 인정해서는 안 된다. 다 같은 노동자라고? 큰일 날 소리다. 나보다 ‘덜’ 노력한 사람은 그만큼 ‘덜’ 대우받아야 한다. 이렇게 ‘엄격한 시간관리'만이라도 평가받길 원하는 것이다.


p82~83 그러나 이 진심은 애석하게도 타인을 평가하는 애꿎은 집착으로 변질된다. 개인이 시간을 어떻게 사용했느냐를 기준으로 모든 세상사를 보게 만드는 것이다. 자기계발을 수행해야만 하는 상황이 세상을 바라보는 이십대의 눈을 만들어버렸고, 그 이십대의 눈은 곧 자기계발서 자체가 되어버렸다. 문제는 이십대 스스로 그 시각에 갇혀, 결국은 다시 자기계발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악순환에 빠진다는 것이다. 이십대가 자기계발을 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인정하지 않던 바로 ‘그 사람들’이 되기 싫어서다. 이것이 자신을 자기통제적인 자기계발로 몰아붙이게 하고, 덩달아 ‘시간관리’에 대한 신념은 더욱 강화되며, 이 신념은 타인을 평가하는 고정관념이 되어버린다. 이제 이십대는 살아갈수록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더 극단적으로 좁아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확언컨대, 이는 이십대 본인들에게 더 큰 부메랑이 되어 일상의 순간순간을 지배하는 ‘칼날’로 돌아올 것이다. 아니, 이미 돌아와 있다.


3장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


‘멋진 신세계’가 이룩한 재앙


p89~ 자기계발의 시대가 만들어내고 있는 이십대의 고유한 특징 몇 가지


첫째: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기

p90 개인이 사회적 원인으로 고통받는 상황이 늘고 있다는 게 현재 이십대가 처한 상황의 한 특징이라면, 이를 사회적 원인에서 비롯된 문제로 이해하지 않는 것 역시 지금 이십대가 지닌 특징의 하나로 보인다.  


p91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공감할 이유를 찾지 못하는 것은, 어쨌든 모든 건 자기 할 탓이라는 자기계발 논리에 길들여진 결과이다. 자기계발서는 측정할 수 없는 것을 측정하고자 했다. 고통이란, 한 개인이 특정한 현상에 반응하는 지극히 주관적인 감정 상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자기계발서는 고통을 객관적으로 비교 가능한 것으로 해석한다. 즉 A가 아파할 때 그보다 더 심한 고통을 이겨낸 B가 있다면 A의 고통은 참아야 되고, 이겨내야 하고, 사회적 요인과 무관한 것이 되어버린다.


p91 자기계발서의 저자들은 타인의 상활을 늘 자기 기준으로 평가하곤 한다. 그 근거로서 저자 자신, 혹은 유명 인사가 주인공으로 설정된다. 당연히 이 주인공이 겪는 고통의 총량은 무지막지하다. 그런데 성공했다. … 자기계발서의 저자는 그런 스토리 안에서 아파하는 이십대를 질타한다. 그 정도 수준은 많은 사람들이 겪는 웬만한 고통이니까 스스로 이겨낼 수 있는 거라면서. 그렇게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고 꿈을 이룬 주인공들을 접할 때마다, 이십대들은 십중팔구 ‘지금 내가 힘든 건 힘든 축에도 못 끼는구나’하는 자기 반성을 하게 된다. 취업준비 어렵다는 하소연은 한순간에 ‘입 닥쳐야 할 징징거림’이 된다. 이는 자연스레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을 저하시킨다. 그렇게 고통의 비교 법칙이 이십대를 통제한다.


둘째: 편견의 확대재생산

p93 고통에 대한 공감력이 떨어지면 필연적으로 특정 대상에 대한 기존의 편견이 더 강화된다. 기실 ‘공감’이란 단지 함께 느낀다는 점에서 중요한 게 아니라, 이를 시작으로 한 개인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의 오류를 발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권장된다. 그래서 타인의 상황을 깊고 넓게 이해할수록 당연히 타인을 섣불리 이렇다 저렇다 재단할 수 없는 이유를 발견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바로 이렇게 되는 걸 일컬어 ‘공감대가 넓다’고 하지 않는가.

⇒ 공감의 시대라며 공감을 강조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그 시대는 물건너 간 것인가.


셋째: 주어진 기존의 길만 맹목적으로 따라가기

p96 타인에 대한 공감이 부족하고, 자기 편견을 강화해온 이십대들ㄹ은 주어진 길만을 가는 데 익숙해진다. 문제는 자신이 추구하는 길만을 정도라 이해하고, 이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자체에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왜 학력위계주의가 문제인가

p99 사회적으로도 개인적으로 ‘모든 책임은 스스로가!’라는 모토를 받아들이고 살아가야만 하는 시대는 개인들을 정치적으로는 과거보다 보수화시킬 가능성이 높고, 생활 측면에서는 그 불안을 조금이라도 덜고자 좀 더 부모에게 의지하며 살아가는 ‘어른아이’ 캥거루족들을 많이 양성할 것이다.


덫에 걸린 대학생들의 자기방어


p108 지금의 이십대들이 수행하는 ‘학력의 위계화된 질서’에 관한 집착은 과거의 학력주의보다 훨씬 더 정교해졌고 자기내면화의 강도도 훨씬 높다. 이들에게 학력에 근거한 비교와 차별은 당연한 것이 되었고, 이를 의문시할 이유를 굳이 찾지 않는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타인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한다. 그 결과, 티끌만큼의 의문도 없는 ‘학력위계주의’가 이십대들에게 내면화되고 있었다. “결과를 책임져라!”는 자기계발을 권하는 사회의 시대정신을 발판삼아서 말이다.

⇒ 경쟁사회에서 그것이 경쟁이 되고 그것이 차별점이니까.

 

진리의 빛, 수능점수


p110 ‘지방대’라는 곳이 한국에서 가지는 함의에 대해 비판적 성찰을 꼭 하고 싶었다. 여기서 지방대란 특정 대학이 어느 지역에 있다는 식의 ‘지리적 의미’가 아니라, 대학서열상 한참 아래니까 수준이 낮다는 비하의 뜻을 지닌다는 건 누구나 알 것이다. 이 지방대에 대한 편견이 꼬리표처럼 따라붙어 한 개인에게 공정한 기회를 주지 못하는 현실, 그렇게 약자가 되어 온갖 부당한 요구를 들어야만 하는 이 나라의 비상식적인 모습을 생기발랄한 이십대들이 가차없이 비판해주길 바랐다.

 

‘떨어지는’ 동년배에 대한 무시 또는 배려


p111 이십대 대학생들이 동년배 취업준비생의 딱한 처지를 보고 눈물을 흘리다가도 현실에서의 차별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결국 지방대 학생들이 겪는 상황에 감각적인 반응은 하지만 그 상황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동정심은 들지만 그 이상은 아니라는 건 앞서 확인한 ktx 여승무원, 쌍용차 파업, 시간강사 자살, 교내 환경미화원 관련 에피소드들에 이십대들이 보여주었던 반응의 연장선상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이를 평가하는 좁은 잣대


p115 세상에 어떤 이도 자신이 편견에 사로잡혀 행동한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나름 근거 없는 행동이 아니란 얘기다. 대학생들이 학교가 어디냐에 따라 상대를 이토록 무시하는 것은 실제로 총체적 역량에서 차이가 난다는 확신을 가져서일 게다. 그렇지 않고서야 차별을 그렇게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p120 자기계발서의 상당수가 ‘성공한 직장인’들의 입을 통해 미리 알아두면 좋을 ‘사회상식’, 달리 말하면 사회적 ‘고정관념’들을 전달하기에 바쁘다. ‘사회는 어쩔 수 없다. 사회는 무지막지하다. 그런 현실을 인정하고 미리미리 준비하라!’는 것이다.


“내가 이룬 성과를 존중해달라”


p121~122 오늘날의 자기계발서 역시 이러한 성과를 기준으로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단순히 누군가가 악착같이 산 것만으로는 독자들과 결코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다. 주인공들의 전투적인 삶이 반드시 어떤 성과의 달성으로 이어져야만 ‘자기 계발’의 권장사례가 될 수 있다. 그래서 CEO도 되지 못했거나, 서울대에 합격하지 못했거나, 10억을 벌지 못했으면 자기계발의 스토리는 완성되지 않는다. 이때 나타난 성과는 그 자체가 존경의 대상이지 그 실현 가능성과 정당성은 의심할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공정한 경쟁에서 남들보다 더 노력한 개인이 얻어낸 정당한 보상으로 여겨진다.


p124 이십대들이 과거에 지나간 수능점수에 매우 집착하는 이유는 그것이 이들에게 가장 공신력 있는 ‘성과지표’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자기계발의 논리는 나타난 성과에 절대적인 비중을 두고 있다. 그래서 누구를 판단하는 근거로서, 이십대들에게 그만한 객관적인 기준이 없는 것이다.


p125~126 다양한 층위가 이십대를 어떤 세대라고 단정 짓게 되면 많은 논란이 따를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 이십대가 가진 동류의식 하나가 분명 존재한다. 그것은 ‘타인의 상승’에 대한 거부감이다. 그런 상승을 원칙적으로 봉쇄하겠다는 의지가 굳건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오늘날 한 개인이 경쟁에서 선택되지 않을 가능성이 과거에 비해 커졌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대학서열에 대한 무모한 집착


점점 단단해지는 기존의 편견

p139~140 이십대 대학생들에게 어떤 객관적 증거가 있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증거가 있든 없든 서열이 낮은 학교 다니는 학생들은 자신보다 능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든 자신이 소속된 대학보다 서령이 낮은 대학의 학생들을 낮게 평가하려한다. 아니 그렇게 평가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거의 조건반사적이다. 동시에, 서열이 낮은 대학 학생들을 보면 무조건 깔보고 드는 그만큼 자신의 대학서열보다 높은 대학을 바라볼 때는 자연스레 열등감을 느낀다.


p140~141 이렇게 우월감과 열등감을 동시에 느끼기에, 자신이 선택한 대학이지만 이 학교‘밖에’ 못 간 것을 아쉬워하는 방어적인 태도가 나오는 것이다. “그 정도밖에 못 갔어?”라는 멸시에 먼저 대응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억울해야’ 한다. 이때의 억울함이란 물론 잘못된 구조에 대한 분노가 아니다. 열등감이란 감정에 대한 억울함이다. 그래서 이러한 열등감을 무마해보고자 여러 구차한 방어술을 사용한다.


어두운 수능의 추억

p145 과거의 기억이 어떠했든, 현재 이들이 자기계발 시대를 살게 된 이상 그 기억은 이렇게 재구성된다. 수능배치표가 부여한 점수차는 타인과 자신을 구분・구별・차별해주는 객관적인 숫자가 된다. 그것은 ‘별 것 아닌 숫자’가 아니라, 한 인간이 ‘시간을 얼마나 성실하게 사용했는가’를 증명하는 지표이다. 자신의 경쟁력을 드러내고 강조하기 위해 포기할 수 없는 숫자인 것이다. 그렇게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되는 상황이다. 노력과 시간관리 등을 강조하는 ‘자기계발 논리’는 이들이 처한 절박한 상황에서 수능점수의 ‘가치’를 당당히 증명해준다.


학력위계, 끌어 내리기와 밟아 오르기


상품화된 개인, 그런데 ‘팔리지 않는’개인

p149 자기계발서를 한 번이라고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책들이 개인의 개성을 사회적 기준에 맞추기를 강요한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 강요는 주로, 사회가 원하는 인재상이 이러저러하니 평소 거기에 맞춰 잘 준비하라는 차원에서 이뤄진다. …이 모든 것은 ‘가장 상품성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로 정당화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시키는 대로 상품성을 갖추었는데, 판매는 잘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현상이 장기화될 때, 그에게는 어떤 변화가 나타날까?


학교 야구잠바의 사회학

p155 “수시생들은 대학입시의 힘든 점을 모르지”라면서 상대적으로 수능성적 비중이 낮은 수시 전형을 무시한다. 특히나 재외국인 전형, 사회통합 전형, 가톨릭 전형 같은 특별전형으로 입학한 학우들을 낮춰본다. 이유는 “그런 전형들은 수능점수처럼 공정한 잣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에서인지 어느 대학에서는 지역균형 전형으로 들어온 학생들을 ‘지균충’이라 부른다고까지 한다.

⇒ 생각할수록 이러한 사회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우울. 이십대를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까지도. 그러나 이십대만 그러한가. 세대를 초월하여 이러한 생각들이 만연하고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어 있는데.


p158 자기계발은 강요하면서 그 결과의 빈곤함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따지지 않는 이 사회에서, ‘자신의 특별함’을 최대한 드러내야 한다는 강박이 이런 두려움을 빚어내고 있었다. 이 특별함을 드러내기 위한 한 방편으로, 대학생들에게 원죄처럼 달라붙어 있는 “너 점수 맞춰서 왔지?”라는 색안경에 대한 ‘차별화 전략’도 나타난다. 그건 “적성 맞추어서”에 강세를 두고, “점수 맞추면 다른 대학 갈수도 있었지만 그걸 버리고” 이 집단에 있음을 강조하는 모습이 바로 그렇다.

    

p163 이십대 대학생들은 야구잠바를 ‘패션의 영역’에서가 아니라, 어떤 신분증의 개념으로 이해한다. 내가 연구대상으로 만난 대학생의 65%가 학교가 아닌 곳에서 학교 야구잠바를 볼 때 ‘일부러’ 학교 이름을 확인한다고 답했다. 학교 야구잠바가 신분 과시용 소품이라는 방증이다. 실제로 야구잠바를 입는 비율도 이에 따라 차이가 나서, 이름이 알려진 대학일수록 착용비율이 높았다. 낮은 서열의 대학생들이 학교 야구잠바를 입고 다니면 비웃음을 사기 십상이라 신촌으로 놀러오는 그쪽 대학생들은 자신들의 야구잠바를 벗어서 가방에 넣기 바쁘단다. 심지어 편입생의 경우엔 ‘지가 저거 입고 다닌다고 여기 수능으로 들어온 줄 아나?’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한다. 이처럼 학교 야구잠바는 대학서열에 따라 누구는 입고, 누구는 안 입으며, 누구는 못 입는다.


p164 사회적 차별이 강한 나라일수록 명품에 대한 집착이 과도하게 나타난다. 값비싼 명품가방을 들고 다니면 최소한 경제적 부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오는 무시는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편에 맞지 않아도 과도한 소비를 통해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문화가 생겨나게 된다. 자신이 부족하단 걸 그대로 보여줄 경우, 온갖 편견에 가득 찬 시선이 날아올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야구잠바를 잊지 못하는 저 친구들도, 자신들이 학교 이름을 대놓고 드러냈을 때 어떤 ‘취급’을 받을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된 이십대


p165~167 학벌이라는 개념에는 한국 사회의 집단문화를 읽어내는 중요한 키워드인 공동체성・연고주의 등이 연계돼 있다. 공동체성에 기반한 과거형 학벌은 그 집단에 속함으로써 얻을 긍정적인 효과가 미래에 존재하기에 그 집단의 논리에 순응하는 것을 전제한다. 단지 동문이라는 이유로 서로 돕는 것은 그 대학을 나오면 웬만하면 취업할 수 있는 현실이 존재하기에 가능했다. 서로를 경쟁자로 볼 필요가 없으니 어깨동무가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이십대는 ‘같은 학교 출신’이라는 이유로 선뜻 손을 잡아주지 않는다. 내 옆에 있는 친구가 같은 학교 학생이니까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것은, 모든 것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자기계발 시대의 의식이 확고한 오늘의 이십대들에게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일단 나부터 살고 보자!’가 최우선하니 동문을 챙겨줄 여유도 없다. … 그렇다고 학력주의・학벌주의가 사라졌을 리는 만무하다. 학교 이름 하나로 내가 돋보이는 시대는 비록 저물었지만, 나와의 차별화를 위해 남을 ‘밀어내는’ 전략으로는 여전히 유용하다. 여기선 무턱대고 차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저 친구는 객관적으로 능력이 부족하다!”는 식으로 나름의 설명이 필요하다. 그렇게 실질적 능력으로서의 학력이 차이 난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 그래도 아직 견고한 곳이 있다. 고소영 모르는가. 지금은 서강대로 바뀌었던가.


p167 과거엔 학벌이란 말에 공동체적 측면이 있었지만, 바로 그 점에서 학력위계주의는 약간 궤를 달리한다. 학벌이 형성돼 대학서열이 만들어지는 형태가 아니라, 그 존재하는 서열을 지킴으로 ‘학력’의 객관적 차이를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태도로 그 의미가 변형된 것이다.


p168 지금 대학생들은 ‘수능점수’의 차이를 ‘모든 능력’의 차이로 확장하는 식의 사고를 갖고 있다. 십대 시절 단 하루 동안의 학습능력 평가 하나로 평생의 능력이 단정되는 어이없고 불합리한 시스템을 문제시 할 눈조차 없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점은 본인이 당한 인격적 수모를 보상받기 위해 본인 역시도 이런 방식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더 ‘높은’ 곳에 있는 학생들이 자신을 멸시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기보다, 스스로 자신보다 더 ‘낮은’ 곳에 있는 학생들을 멸시하는 편을 택했다. 그렇게 멸시는 합리화된다.


p172 자기 계발의 논리는 자기 위치에 대한 집착과, 그로부터 비롯된 우월감과 열등감으로 작동하는 학력위계주의와, 이십대들의 와각지쟁을 초래했다. 그런데 이것이 다시 자기계발에 대한 집착을 강요하게 된다.


미래도 희망적이지 않다


원인1: IMF의 추억

p175 가 ‘살아남은’ 자들은 일상의 각오를 원점에서 다시 수정했다. ‘인생 막장 구렁텅이’로 가지 않기 위해서는 해야 될 일이 명확했다. 이들은 자녀들에게, 학생들에게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지를 절절하게 설명했다. 좋지 않은 조건을 가졌지만 악착같이 살아 물질적 혹은 명예로운 성공을 한 유명인들의 에피소드는 반드시 물려주어야 할 교훈으로서 안성맞춤이었다. 지금의 이십대들은 당시 ‘자기계발=성공’이라는 식의 설명을 수도 없이 들으면서 자랐을 것이다. 따라서 성공하지 못하는 원인을 이 과정의 부족으로 이해하는 것은 너무 당연해져버렸다.


원인2: 경영학과의 사회학

p176 미래가 희망적이지 않은 이유는 달라진 대학의 풍토와도 관련된다. 지금 대학들은 이십대들을 더 완벽한 자본주의적 상품으로 만들고자 혈안이 되어 있다.


p180 경영학이 ‘보편적’ 학풍으로 존재한다는 건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다. 자기계발 시대가 빚은 지독한 학력위계주의 모습이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경영학은 사실상 기업의 논리를 체득하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에, 개인의 사고력을 바탕으로 기존의 고정관념을 재해석하는 일이 인문사회 학문에 비해 원천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말하자면 ‘스스로 해석하라!’ ‘상상력을 발휘하라!’ 등의 주문이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


원인3: before/after의 덫

p183 미국의 사회학자 미키 맥기는 자기계발에 중독되는 현대인들을 분석하면서 ‘미국의 변신문화’를 논한다. 변신문화란 미디어가 끊임없이 자수성가의 성공 이미지들을 ‘고난극복기’ 스타일로 재생산하는 것을 말한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이 자기계발서들이 끊임없이 강조하는 새로운 자아의 모습 혹은 현재의 희생을 통한 미래의 성공이 마치 성형수술이나 다이어트 프로그램에서 추한 ‘Before'를 벗어나 화려한 ’After'로 변신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보았다.

    오늘의 한국 이십대들도 마찬가지다. 자기계발서는 ‘무기력한’ (Before) 현재를 ‘화려하게’(After) 변화시킬 매뉴얼을 제공한다.


p184 이십대는 이렇게 자기통제형 자기계발에 부화뇌동하게 되었고, 자기계발의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이십대들이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학력위계주의에 대한 집착은 자기계발의 논리와 공식을 그대로 따른 결과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자기계발서를 찾는 동력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런 과정 속에 ‘사회적 문제’는 논의의 저편으로 사라져간다.


4장 자기계발 권하는 사회를 치유하자!


‘원래 그런 세상’은 없다


p188 '피로사회‘라는 말도 있듯이 이 사회는 구조적으로 개인의 에너지를 소모시키고 있는데, 그런 사회구조에 대한 불만을 ’멈추면‘ 비로소 자신이 왜 부족한지를 알게 되고, 그러면 이 경쟁사회에서 사랑받는 비법이 ’비로소 보인다‘고 말하고 싶은 걸까? 이런 ’힐링‘은 사회적 압박으로 인한 고통을 치유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걸 고통으로 받아들이지 않게끔 한다. 당연히 사회구조는 늘 그대로다. 결국 이런 힐링서들에 “가장 열광하는 이들은 기업의 오너와 임원들” 아니겠는가.


p189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자기계발은 사람들을 성공으로 이끌지 못하고, 그런 좌절 속에서 사람들이 겪게 되는 아픔은 ‘힐링’으로는 힐링되지 않는다. 그래서도 지금 필요한 것은 바로 자기계발 권하는 사회, 그 자체를 치유하는 일이다.


p192 이십대의 상황을 분명한 사회문제라고 다들 동의하면서도, 이들에게 한다는 조언에는 어째서 하나같이 개인은 사회를 바꿀 수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가. 자기계발이 개인에게 다가가 기어코 얻어내고 마는 대답이 실상 ‘나는 사회를 바꿀 수 없다. 그러니 나부터 이기고 보자!’ 아닌가.


p192~193 인류가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하고 어린이를 교육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장애인의 권리를 인정하고 인종차별을 부당하게 여겨 철폐하고... 이런 변화는 기존의 사회가 문제 많다는 걸 직시한 개인들의 노력에서 시작된 일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다만 그것이 왜 문제인지, 또 문제라면 이를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를 모를 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원래의 것이 옳은 듯 착각할 뿐이다. 그러나 착각이 깨지면 그 사회는 절로 좋은 쪽으로 구성원들을 이동시킨다. 사회는 그렇게 '개인들'로 인해 변하는 것이다.


p194 사실 어떤 현상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을 논할 때 “그래서 대안이 뭔데?”라고 묻는 것이 문제제기 자체를 봉쇄하는 효과가 있다는 점이다. 효율적으로 시간을 관리하라는 자기계발 담론에 따르자면 가급적 기존의 룰에 충실한 것이 개인에게 훨씬 이득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회를 바꾸는 건 힘들고 불확실한 일이기 때문이다. 될지도 안 될지도 모르는 일에 자신의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건 개인에겐 큰 손해다. 자연히 자기계발이 성행하는 사회에서는 확실한 대안이 없으면 굳이 문제제기하지 않는 태도가 일상화된다.

⇒ 대안을 내놓고 이야기를 하라고 하면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것이라는 말에 동감한다. 우리는 이야기를 꺼내다 보면 대안이 찾아지기도 한다. 이야기조차 하지 않는데, 대안이 나올 리가


긍정과 희망을 논하기 전에 우리가 알아야 할 것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무엇을 간과했을까

p196~197 가난은 단순히 물질적 결핍의 상태가 아니다. 그래서 단순한 정서적 위로로 해결되는 건 더더욱 아니다. 바우만은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정상의 삶’이라고 인정되는 모든 것에서 배제되었음을 뜻한다. 그것은 ‘기준에 미치지 못함’을 의미한다. 그 결과 자존감이 낮아지고 수치스러움이나 죄의식을 느끼게 된다. 가난은 또한 그 사회에서 ‘행복한 삶’이라고 여겨지는 기회들과 단절되고 ‘삶이 제공해야 하는 것’을 받지 못함을 의미한다.

⇒ 그래, 가난은 단지 정서의 문제가 아니다. 생존의 문제이기도 하고. 모든 가능성에서 배제되는 일이다.


공정성을 다시 생각하자

p205 개인이 한 행동에 대한 상과 벌은 그것이 정당할 때만 수긍할 수 있고, 그것을 위해 참고 버틸 수 있는 체력도 기를 당위가 생기는 것이다. 지난 대선 때, 한 후보가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라는 슬로건을 제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져야 하고, 경쟁의 과정은 공정해야 하며, 그 상태에서 결과의 차등적 분배가 정의롭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기회는 균등한가?


p209 누구나 힘들 거다. 그런데 누군가는 ‘더’ 힘들다. 사회는 그 힘듦의 불공정한 ‘차이’를 들여다봐야 한다. 이 차이를 만들어내는 ‘기회의 불균등’에 대해 사회가 아무런 문제제기를 하지 않을 때, 당사자들은 좌절에 빠진다.


p210 한 남학생이 질문을 한다. "왜 하위층만을 위한 정책을 펴는 것이 정당한가요? 능력에 따라 보상을 해주는 것은 정당합니다.“ 여학생이 반론한다. ”능력 위주라면 모두 평등한 위치에서 시작한다고 가정하는 건가요? 저처럼 노력한다고 누구나 하버드에 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샌델 교수가 말한다. ”능력 위주 사회에서는 기회가 공정하다고 해도 타고난 재능 덕에 자격 없는 사람이 남보다 앞서거나 보상을 받습니다. 노력은 노동윤리도 수많은 가정환경에 좌우됩니다. 가정환경은 우리 노력과 상관없습니다.“


p211~212 겉으로는 동일한 출발선인 것 같아 보여도, 이렇게 여러 상황과 조건에 따라 기회는 균등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공부에 대한 동기부여도 가족구조에 따라서 차이가 나며, 부모의 독서습관조차 자녀의 학업성적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 사실이다. 집안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가정 분위기가 나빠지면 자녀의 심리가 불안정해지면서 학업성적이 하락하기도 한다. 하고자 하는 열정조차도 마찬가지다.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조건을 누린 선수와,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는 조건에 처했던 선수는 같은 출발선에 섰다 하더라도 결코 동등한 상태에 있는 게 아니다. 긍정이나 희망이 마음먹는 대로 생기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p212~213 아버지의 학력은 아버지의 소득을 결정짓고, 그 소득은 자녀가 어떤 교육을 받는지 결정하고, 이는 자녀의 ‘꿈’으로 이어진다. 개인이 어쩌지 못하는 사회적 요인은 …‘개인의 희망’과 긴밀히 연결된다.


p214 누가 그랬던가, 가난하다고 꿈조차 가난할 수 없다고.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다. 그저 사람들이 '출발선에 함께 서 있다'는 것만으로 기회 균등이라 정당화할 수 없는 이유다. 할 수 있다는 각오, 그러니까 일종의 '동기부여'도 누구나 얻을 수 있는 만만한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투 스트라이크를 맞은 상태로 인생을 시작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3루에서 태어난 주제에 자기가 3루타를 쳤다고 생각하며 산다"는 말이 있다. 3루에 있는 사람은 홈이 바로 눈앞이니 홈인할 수 있다는 희망을 쉽게 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투 스트라이크에 몰린 사람은 그런 희망을 품기조차 힘들고, 마음이 쫓겨 삼진당할 확률이 높다. 이런 상황을 공정하다 할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희망을 품고 노력하라 말하면 될까? 희망, 그건 개인에게 강요할 것이 아니라 사회의 모순을 해결함으로써 자연스레 생겨나도록 해야 한다. 사회가 진정 공정해지면 절로 희망이 부풀기 마련이다. 기회의 균등은 그럴 때 '실재'할 수 있는 것이다.


과정은 공정한가?


p215 민주주의 사회가 자리잡아가는 도정에서 ‘과정의 공정성’은 반칙하지 않는 걸 의미했다. …한국 사회에서는 혈연・학연・지연이 대표적으로 이런 과정의 공정성을 훼손하는 요소였다. 한국사회에서 이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자기계발서는 이를 착시하게끔 한다. 사회에 만연한 반칙과 장애물은 건너뛰고, 그런 대로 공정한 룰에 따라 돌아가는 사회를 전재로 얘기한다. 자기계발서가 나름의 성찰을 개인에게 주어 열심히 살아가게끔 하는 동력도 바로 여기서 나온다. 왜냐하면 독자들은 자신과 유사한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성공한 케이스를 보기 때문이다.


맷집의 사회학

p220 주변의 시선이 개인의 역량 발휘에 뭐가 그리 중요하냐는 사람들에게는 ‘피그말리온 효과’가 답이 될 수 있겠다.


CPA의 사회학

p221 나는 학교별 역량 차이가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실제로 고시 합격률, 대기업 합격률 순위는 대학서열에 거의 비례한다. 하지만 그 수치가 차별을 정당화할 근거일 수는 없다. 왜? 그런 차이에는 이미 불공정한 과정이 개입돼 있기 때문이다.


p224~225 사회는 늘 최종적인 결과가 곧 ‘개인적 역량 차이’가 객관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본다. 그렇게 CPA 합격률, 고시 합격률, 대기업 취업률, 토익점수를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주어진 상황과 환경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경쟁력을 그 사람의 절대적 경쟁력으로 간주해버리는 건 분명 불공정한 일이다. 이런 문제점들을 뭉개버린 채 그저 ‘능력차이’를 이야기한다는 건 부당한 일이다.


결과는 정의로운가?


p227~228 온갖 공정하지 못한 기회와 과정으로 인해 나타난 결과의 피해자들이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자기 스스로 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비정규직이 피해를 입는 것은 그들이 못나서고, 대학생들이 학교서열에 따라 멸시와 차별을 받는 것도 그들의 능력이 부족해서다. 우리는 이런 부당한 상황을 앞에서 이미 숱하게 봐왔다.


맺음말_그따위 위로는 당장 멈춰라!


p231 자기계발의 세계에서 말하는 ‘치열해지는 것’을 모두에게 강요하는 건 굉장히 어리석은 짓이다. 이건 간단한 이치다. 어떻게 하면 원하는 회사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자기계발은 전체 역량의 평균값을 상승시키는 결과가 분명 있다. 하지만 기업은 이십대들을 ‘절대평가’하지 않는다. 어느 수준에 이른다고 누구나 받아주지 않는다. 애초부터 그 문을 통과할 사람은 가장 위쪽의 일부뿐이다.


p232 그저 사람답게 살기 위해 ‘초인’이 되어야 하는 사회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사회다. 그런데도 초인적 노력으로 사회구조의 장벽을 뚫은 그 미세한 확률에다 사람을 몰아넣는 자기계발의 이야기들이 판치고 있는 세상이다. ‘자기계발서’라는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 이십대들은 자기통제의 고통을 참아내고자 스스로에게 방어막을 친다. 자신이 경험하는 차별이 부당하다고 말하는 순간 ‘자기계발의 패배자’로 낙인찍히는 사회를 살아야 하는 이십대들은, ‘사회적 차별’을 수긍할 수밖에 없다. 그 차별에 자신이 당하는 것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남을 차별하는 것 역시 정당화한다. 그렇게 위계화된 학교서열에 대한 집착은 이십대에게 가장 통속적인 자기 방어기제가 되었다.

⇒ 차별을 정당화하고 차별이 생존임을 강조하는 시대에 살아가는 자의 당연한 반응이겠지.



3. ‘내가 저자라면’


■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의 목차 및 전체적 뼈대


 

머리말 | 지금 이십대가 위험하다

 

1장 강의실에서 바보가 된 어느 시간강사 이야기

“날로 정규직 되려고 하면 안 되잖아요!”

동병상련은 없다!

비정규직인 건 자기계발 안 한 탓?

이십대를 이해하는 것, 그래서 이십대에게 할 수 있는 말

 

2장 자기계발서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

이십대의 자기계발 아이러니

왜 아무도 문제시 하지 않는 걸까?

촛불 든 이십대, 사회에 눈 감다

차별과 해고를 정당하다 여기는 이유

시간관리, 자기 통제, 그리고 칼날

 

3장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

‘멋진 신세계’가 이룩한 재앙

첫째: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기

둘째: 편견의 확대재생산

셋째: 주어진 기존의 길만 맹목적으로 따라가기

왜 학력위계주의가 문제인가

덫에 걸린 대학생들의 자기방어

진리의 빛, 수능점수

‘떨어지는’ 동년배에 대한 무시 또는 배려

다른 이를 평가하는 좁은 잣대

 “내가 이룬 성과를 존중해달라”

대학서열에 대한 무모한 집착

본질에서 벗어난 평가

점점 단단해지는 기존의 편견

어두운 수능의 추억

학력위계, 끌어 내리기와 밟아 오르기

상품화된 개인, 그런데‘팔리지 않는’개인

학교 야구잠바의 사회학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된 이십대

미래도 희망적이지 않다

원인1: IMF의 추억

원인2: 경영학과의 사회학

원인3: before/after의 덫

 

4장 자기계발 권하는 사회를 치유하자!

‘원래 그런 세상’은 없다

긍정과 희망을 논하기 전에 우리가 알아야 할 것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무엇을 간과했을까

공정성을 다시 생각하자

기회는 균등한가?

과정은 공정한가?

맷집의 사회학

CPA의 사회학

결과는 정의로운가?

 

맺음말 | 그따위 위로는 당장 멈춰라!

 

 

 

  세대담론으로서 이십대가 현 사회를 살면서 가지는 생각과 태도를 바라본다. 기본적으로 이십대가 사회에 대해 가지는 생각을 파악하고 이들이 생각하는 사고의 틀이 어떻게 틀을 자리잡게 되었는지를 파악한다. 저자는 총 4장으로 나누어 1장에서는 이 글의 발단이 된 이십대의 생각들이 무엇인지를 살펴본다. 2장에서는 이십대가 처한 현실을 3장에서는 이십대가 왜 그러한 생각을 가지게 된 원인들을 사회학적 관점에서 고찰하고 있다. 그리고 4장에서는 이러한 현실,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며 이십대를 위해 해야 할 일, 이십대가 가진 문제의 원인을 치유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십대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 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경쟁논리에 갇혀 무수히 자기계발을 통해 이 길을 벗어나고자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은 개인적인 자기계발로 바뀌어질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 저자가 가지는 기본 생각이다. 무엇보다 이십대는 현재 극심한 불안에 놓여 있고 그로 인해 사회의 문제들을 자기 일로 생각하기보다 외면해 버리고 개인의 생에만 집착하는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로 인해 지방대, 학벌 등 학력 차별을 당연시하며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구분에 대한 관심도 적다. 이것은 사회구조적인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노력’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차별을 당연시하며 ‘차별’을 하고 있는 이십대를 지배하는 담론을 벗어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노력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 감동적이었던 장절

 

 요즘엔 이십대를 직접적으로 만나기 어려워 이십대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맞닥뜨리니 놀라울 뿐이다. 유머 반 진담 반으로 가장 무서운 것은 10대라는 말이 있었는데, 여전히 있지만, 나도 갈수록 어린 세대와 공감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끔 된다. 서로의 생각의 차이, 방향의 차이가 크다. 하지만, 이것은 저자가 말했듯이 슬픈 현실이고 분명 바뀌어져야 할 것이고, 바뀌어야 한다고 본다. 그 길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p232 그저 사람답게 살기 위해 ‘초인’이 되어야 하는 사회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사회다. 그런데도 초인적 노력으로 사회구조의 장벽을 뚫은 그 미세한 확률에다 사람을 몰아넣는 자기계발의 이야기들이 판치고 있는 세상이다. ‘자기계발서’라는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 이십대들은 자기통제의 고통을 참아내고자 스스로에게 방어막을 친다. 자신이 경험하는 차별이 부당하다고 말하는 순간 ‘자기계발의 패배자’로 낙인찍히는 사회를 살아야 하는 이십대들은, ‘사회적 차별’을 수긍할 수밖에 없다. 그 차별에 자신이 당하는 것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남을 차별하는 것 역시 정당화한다. 그렇게 위계화된 학교서열에 대한 집착은 이십대에게 가장 통속적인 자기 방어기제가 되었다.


■ 보완점


 이십대에 대한 담론을 펼치는데 저자는 학생들과의 대화에서 시작하고 대화를 통해 생각을 이끌어낸다. 대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기에 직접적으로 그들의 생각을 들을 수 있었고 의문에 대한 토론까지 이어진다. 이십대를 피상적으로 보며 논의를 펼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방적이지 않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십대의 전부가 대학생은 아니기에 부분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십대에 대한 담론이라고 보기보다 오히려 대학생들의 담론이라고 보는 것이 더 어울릴 듯도 싶다. 어쨌든 핵심은 자기계발이 강요되는 사회에 대해 말하며 이 담론에 갇힌 이십대 대학생들의 생각들을 파헤치고 있다. 

 그래도, 사회는 젊은 청춘들에 기대를 건다. 어쩌면 그러한 기대에 대한 부담이 클 수도 있겠다. 그래서일까 이십대들의 말은, 이해가 어렵다. 이해가 어렵다기보다는 그들에 대한 기대로 ‘어찌 그렇게 생각할 수가’가 되는 것일 게다. 그들의 생각이 안타깝고 답답하기 그지없다. 물론 모두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진 않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 한들 무엇이 달라질까. 사회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는데. 이십대의 생각의 편린을 통해서 개인이 아닌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이끌어 내고 그에 대한 의견을 펼치는 것, 지속적으로 우리 사회가 가져야 할 문제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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