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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2일 11시 22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저자 한병철은 고려대학교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한 뒤 독일로 건너가 철학, 독일 문학, 가톨릭 신학을 공부했다. 1994년 하이데거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2000년에는 스위스 바젤 대학에서 데리다에 관한 논문으로 교수 자격을 취득했다. 독일과 스위스의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으며, 현재 독일 카를스루에 조형예술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피로사회』(2010)를 통해 독일에서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며 가장 주목받는 문화비평가로 떠올랐으며, 한국에서는 2011년 『권력이란 무엇인가』를 통해 처음 소개되었다. 『하이데거 입문』『죽음의 종류- 죽음에 대한 철학적 연구』『죽음과 타자성』『폭력의 위상학』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2.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6. 자기 착취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기본원리로서 타자 착취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더 많은 성과를 올린다. 그러한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망가질 때까지 자기 자신을 자발적으로 착취하는 것이다.

 

11. 21세기의 시작은 병리학적으로 볼 때 박테리아적이지도 바이러스 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신경증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신경성 질환들, 이를테면 우울증,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경계성 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이 21세기의 초의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12. 낯선 것은 무조건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면역 방어의 대상은 타자성 자체이다. 아무런 적대적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은 타자도, 아무런 위협을 초래하지 않는 타자도 이질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제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17. 폭력은 부정성에서 뿐만 아니라 긍정성에서도 나올 수 있다. 이질적인 것, 낯선 것 뿐만 아니라 같은 것도 폭력의 원천이 될 수 있는 것이다.

  

21. 긍정성의 폭력은 박탈하기보다 포화시키며,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고갈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직접적으로 지각되지 않는다.

 

22. 우울증도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나 소진증후군도 긍정성 과잉의 징후이다. 소진증후군은 자아가 동질적인 것의 과다에 따른 과열로 타버리는 것이다. 활동과잉에서 과잉은 면역학적 범주가 아니며, 다만 긍정적인 것의 대량화를 의미할 뿐이다.

 

23.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했다. 이 사회의 주민도 더 이상 복종적 주체가 아니라 성과주체라고 불린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이다.

 

24. 이제 금지, 명령, 법률의 자리를 프로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이 대신한다. 규율사회에서는 여전히 No가 지배적이었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26. 우울한 자는 컨디션이 완전히 정상이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에 부응하려고 애쓰다가 지쳐버리고 만다.

>> 나도 지나치게 자기 자신이 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은 아닐까

 

27.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로서 자기자신을 착취한다.

오직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명령이 아니라 성과를 향한 압박이 탈진 우울증을 초래한다. 그렇게 본다면 소진증후군은 탈진한 자아의 표현이라기보다는 다 타서 꺼져버린 탈진한 영혼의 표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30. 멀티테스킹이라는 시간 및 주의 관리 기법은 문명의 진보를 의미하지 않는다. 멀티태스킹은 후기근대의 노동 및 정보사회를 사는 인간만이 갖추고 있는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퇴화라고 할 수 있다. 멀티태스킹은 수렵자유구역의 동물들 사이에서도 광범위하게 발견되는 습성이다. 야생에서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기법이 멀티태스킹인 것이다.

  

35. 활동하는 자, 그러니까 부산한 자가 이렇게 높이 평가 받은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따라서 관조적인 면을 대대적으로 강화하려는 것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인간 성격 교정 작업 가운데 하나이다.

 

38. 아렌트에 따르면 근대사회는 인간을 노동하는 동물로 격하시키는 노동사회로서 행동의 모든 가능성을 파괴해버린다.

 

41. 왜 모든 인간 활동이 후기근대에 와서 노동의 수준으로 떨어지는가, 더 나아가서 사람들은 왜 그토록 초조하고 부산한 상태에 빠지는가 하는 물음은 다른 대답을 요구한다.

 

존재의 결핍 앞에서 초조와 불안이 생겨난다. 노동하는 동물이 어떤 유에 속하고 자신이 속한 유를 위해 노동하는 것이라며 여기에는 동물다운 느긋함이 생겨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기근대의 자아는 완전히 개별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죽음의 기술로서 죽음에 대한 공포가 덜어주고 지속의 감정을 불러일으켜야 할 종교도 이제 그 시효가 다 되었다. 세계는 전반적으로 탈사회화되었으며, 이로 인해 허무의 감정은 더욱 강화된다.

 

43.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모두가 자유롭고 빈둥거릴 수 도 있는 그런 사회로 귀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주인 스스로 노동하는 노예가 되는 노동사회를 낳는다.

 

47. 사색적 삶은 보는 법에 대한 특별한 교육을 전제한다.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교육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세 가지 과업을 거론한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보는 것을 배워야 한고,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 하며, 말하고 쓰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러한 배움의 목표는 니체에 따르면 ‘고상한 문화’이다. 보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눈을 평온과 인내, 자기에게 다가오게 하는 것에 익숙해지도록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눈으로 하여금 깊고 사색적인 주의의 능력, 오래 천천히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은 ‘정신성을 갖추기 위한 최초의 예비교육’이다. 인간은 어떤 자극에 즉시 반응하지 않고 속도를 늦추고 중단하는 본능을 발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아렌트는 활동성의 변증법을 인식하지 못한다. 활동성이 첨예화되어 활동과잉으로 치달으면 이는 도리어 아무 저항없이 모든 자극에 충동에 순종하는 과잉수동으로 전도되고 만다는 것이 바로 활동성의 변증법이다. 그것은 자유 대신 새로운 구속을 낳는다. 더 활동적일수록 더 자유로워질 거라는 믿음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49. 니체가 말한 중단하는 본능이 없다면 행동은 안절부절 못하는 과잉활동적 반응과 해소 작용으로 흩어져버릴 것이다.

 

53. 무의의 부정성은 사색의 본질적 특성이기도 하다. 예컨대 참선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들이닥쳐 오는 것에서 스스로를 해방함으로써 무의의 순수한 부정성, , 공에 도달하려 한다. 그것은 극도로 능동적인 과정이며 수동성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다. 참선은 자기 안에서 어떤 주권적 지점에 도달하기 위한 연습, 중심이 되고자 하는 연습이다.

 

61. 삶을 위한 모든 노력은 죽음으로 귀결된다.

 

65. 활동사회라고도 할 수 있는 성과사회는 서서히 도핑사회로 발전해 간다. 그 와중에 브레인 도핑처럼 부정적인 표현은 신경향상으로 대체된다. 도핑은 말하자면 성능 없는 성과를 가능하게 한다.

 

66. 성과사회, 활동사회는 그 이면에서 극단적 피로와 탈진상태를 야기한다. 이러한 심리 상태는 부정성의 결핍과 함께 과도한 긍정성이 지배하는 세계의 특징적 징후이다. 그것은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을 전제하는 면역학적 반응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해 유발되기 때문이다. 과도한 성과의 향상은 영혼의 경색으로 귀결된다.

 

67. 나는 그녀에게 ‘나는 너한테 지쳤어’라고 말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아니 그냥 ‘지쳤어’라는 말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함께 그렇게 외쳤다면 우리는 각자의 동굴에서 해방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토록 심한 피로 때문에 우리에게서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영혼이 다 타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피로는 폭력이다. 그것은 모든 공동체, 모든 공동의 삶, 모든 친밀함을, 심지어 언어 자체마저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런 종류의 피로는,. 본래 그럴 수 밖에 없었겠지만, 아무 말 없이, 필연적으로 폭력을 낳는다. 아마도 이러한 폭력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오직 타자를 일그러뜨리는 시선 속에서뿐이었을 것이다.

  

69. 근본적 피로는 오히려 특별한 능력으로 묘사된다. 그것은 영감을 준다. 그것은 정신이 태어나게 한다. 피로의 영감은 무의에 관한 것이다.

지친 오디세우스는 나우시카의 사랑을 얻었다. 피로는 젊음을 가져다 준다.

 

70. 한트케는 노동하는, 움켜쥐는 손에 놀이하는 손을 맞세운다. 놀이하는 손은 결연하게 움켜쥐지 않는다. 매일 저녁 여기 리나레스에서 나는 많은 꼬마 녀석들이 노곤해져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더 이상 탐욕도 없고 손에 움켜쥔 것도 없고, 그저 놀이만이 있을 뿐이었다.

 

72.. 신은 창조를 마친 뒤 일곱째 날을 신성한 날로 선포했다. 그러니까 신성한 것은 목적 지향적 행위의 날이 아니라 무위의 날,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인 것이다. 그날은 피로의 날이다. 막간의 시간은 일이 없는 시간, 놀이의 시간으로서 본질적으로 염려와 노동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 하이데거의 시간과도 구별된다. 한트케는 이러한 막간의 시간을 평화의 시간으로 묘사한다. 피로는 무장을 해제한다. 피로한 자의 길고 느린 시선 속에서 단호함은 태평함에 자리를 내준다. 막간의 시간은 무차별성의 시간, 우애의 시간이다.

 

81. 나는 또 하나의 재해석을 통해 이 프로메테우스 전설을 내적 영혼의 장면으로, 즉 오늘날 스스로에게 폭력을 가하며 자기 자신과 전쟁을 치르고 있는 성과주체의 심리적 기구에 관한 묘사로 파악하고자 한다.

 

82. 끝없이 다시 자라나는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먹는 독수리는 성과주체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제2의 자아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피로 속에서 자아는 세계를 믿고 거기에 자기를 맡긴다.

 

88.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타자와의 대립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는 것이다. 반면 나르시즘에서는 타자와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나르시시즘적 장애를 겪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 속으로 가라앉는다. 그리하여 타자관계가 소실되고 이에 따라 안정된 자아의 이미지도 형성되지 못한다.

 

95. 그는 자신에게서 걸어 나와 바깥에 머물며 타자와 세계에 자신을 맡길 줄은 전혀 모른 채 그저 자기 속으로 이를 악물 따름이다. 하지만 그 결과로 남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속이 텅 비어버린 공허한 자아뿐이다. 주체는 점점 더 빨리 돌아가는 쳇바퀴 속에서 마모되어간다.

 >> 나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다.

 

97. 우울증 환자는 자신의 자주성에 지쳐버린 사람, 즉 자기 자신의 주체가 될 힘을 상실한 사람이다. 그는 주도적이어야 한다는 요구의 끝없는 반복에 지쳐 있는 것이다.

  

102. 후기 근대의 성과주체는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는 더 이상 어떤 예속적 본성을 지닌 주체가 아니다 그는 자신을 긍정화하고 해방시켜 프로젝트가 된다.

 

103. 다만 타자에 의한 강제가 자유를 가장한 자기 강제로 대체될 따름이다. 이러한 발전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자본주의가 일정한 생산수준에 이르면, 자기 착취는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더 효과적이고 능률적이 된다.

 

성과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다. 성과주체는 완전히 타버릴 때까지 자기를 착취한다. 여기서 자학성이 생겨나며 그것은 드물지 않게 자살로까지 치닫는다. 프로젝트는 성과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날리는 탄환임이 드러난다. 

 

112. 니체라면 활동과잉의 인간을 역겨워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강한 영혼은 평정을 유지하고 천천히 움직이며 지나친 활발함에 대해 거부감을 품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거친 노동을 좋아하고 빠른 자, 새로운 자, 낯선 자에게 마음이 가는 모든 이들아. 너희는 참을성이 부족하구나. 너희의 부지런함은 자기 자신을 망각하려는 의지이며 도피다. 너희가 삶을 더 믿는다면 순간에 몸을 던지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너희는 내실이 부족해서 기다리지 못한다. – 심지어 게으름을 부리지도 못하는구나!

 

113. 성과사회는 그 내적 논리에 따라 도핑사회로 발전한다. 단순한 생명 기능으로 환원된 삶은 무조건 건강하게 유지해야만 하는 삶이다. 건강은 새로운 여신이다.

 

114. 그들은 죽을 수 있기에는 너무 생생하고 살 수 있기에는 너무 죽어 있는 것이다.

 

3. 내가 저자라면

1) 목차

이 책은 우리네가 겪고 있는 성과주의로 인한 피로 현상을 나열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2) 본받고 싶은 점

철학자인 저자의 전문성을 잘 살려, 신뢰성 있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전문가의 주장이니 책이 어려워도 그만큼 믿고 보는 부분이 생기는 것 같다.

 

3) 개선하고 싶은 점

문체가 다소 딱딱하고, 철학이나 신화에 대한 배경 지식이 없다면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도 일부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이에 조금은 더 일반인의 시각으로 실생활에서 겪을 수 있는 에피소드들을 많이 포함하면 더욱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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