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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2일 23시 04분 등록

Book Review

피로사회

2015 2 2

 

1. 저자소개

 

고려대학교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한 뒤 프라이부르크와 뮌헨에서 철학과 독일 문학, 천주교 신학을 공부하고, 1994년 하이데거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2000년에는 스위스 바젤 대학에서 데리다에 관한 논문으로 교수 자격을 취득했다. 그 후 바젤 대학에서 철학과 강사로 재직하였다. 독일과 스위스의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으며, 독일 카를스루에 조형예술대학의 철학/미디어이론 교수를 거쳐 현재 베를린 예술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문분야는 18세기-20세기 철학, 윤리, 사회철학, 현상학, 문화철학, 미학, 종교철학, 미디어철학등이다.

 

  • Philosophie des Zen-Buddhismus.
  • 『권력이란 무엇인가? Was ist Macht?
  • 『죽음의 종류-죽음에 대한 철학적 연구 Todesarten. Philosophische Untersuchungen zum Tod
  • 『하이데거 입문 Martin Heidegger
  • 『죽음과 타자성 Tod und Alteritat
  • 『헤겔과 권력-친절함에 대한 시도 Hegel und die Macht. Ein Versuch uber die Freundlichkeit
  • 『시간의 향기-머무름의 기술에 대한 철학 에세이 Duft der Zeit. Ein philosophischer Essay zur Kunst des Verweilens
  • 『피로사회 Mudigkeitsgesellschaft
  • 『폭력의 위상학 Topologie der Gewalt
  • 『투명사회 Trans Parenz Gesell Schaft
2. 내 마음에 들어온 글귀

 

서문

6. 성과사회의 주체가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으며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라는 것이 이 책의 테제였다. 자기착취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기본원리로서 타자 착취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더 많은 성과를 올린다. 그러한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완전히 망가질 때까지 자기 자신을 자발적으로 착취하는 것이다.

 

17. 폭력은 부정성에서뿐만 아니라 긍정성에서도 나올 수 있다. 이질적인 것, 낯선 것 뿐만 아니라 같은 것도 폭력의 원천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보드리야르의 다음과 같은 진술은 바로 이러한 

긍정성의 폭력에 관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것에 의존하여 사는 자는 같은 것으로 인해 죽는다.” 보드리야르는 현존하는 모든 시스템의 비만상태를 지적하기도 한다. 정보 시스템, 커뮤니케이션 시스템, 생산 시스템 모두 비만상태라는 것이다. 지방은 어떤 면역 반응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보드리야르는 같은 것의 전체주의를 면역학적 관점에서 서술함으로써 이론적 약점을 드러낸다. ”…과잉의 시대에 이르면 문제는 거부와 배척이 된다. 보편화된 커뮤니케이션과 정보의 과잉은 인류 전체의 저항력을 떨어뜨릴 위험으로 작용한다.”

 

18. 긍정성의 과잉에 대한 반발은 면역 저항이 아니라 소화신경적 해소 내지는 겁 반응으로 나타난다. 과다에 따른 소진, 피로, 질식 역시 면역 반응은 아니다.

 

21. 세계의 긍정화는 새로운 형태의 폭력을 낳는다. 새로운 폭력은 면역학적 타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며, 바로 그러한 내재적 성격으로 인해 면역 저항을 유발하지 않는 것이다. 심리적 경색으로 이어지는 신경성 폭력은 내재성의 테러이다. 그것은 면역학적 의미에서 타자가 불러일으키는 공포와 근본적으로 구분된다….

 

긍정성의 폭력은 박탈하기보다 포화시키며,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고갈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직접적으로 지각되지 않는다.

 

규율사회의 피안에서

23. 21세기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했다. 이 사회의 주민도 더 이상 복종적 주체가 아니라 성과주체라고 불린다. 그들은 자기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이다.

 

24. 이제 금지, 명령, 법률의 자리를 프로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이 대신한다. 규율사회에서는 여전히 No가 지배적이었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26. “우울증이라는 병은 권위적 강제와 금지를 통해 인간에게 사회계급과 성별에 따른 역할을 부여하는 규율적 행위 조종의 모델이 만인에게 자기주도적으로 될 것, 자기 자신이 될 것을 요구하는 새로운 규범으로 대체되는 순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우울한 자는 컨디션이 완전히 정상이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에 부응하려고 애쓰다가 지쳐버리고 만다.”  알랑 에렝베르

 

27.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로서 자기자신을 착취한다. 오직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명령이 아니라 성과를 향한 압박이 탈진 우울증을 초래한다. 그렇게 본다면 소진증후군은 탈진한 자아의 표현이라기보다는 다 타서 꺼져버린 탈진한 영혼의 표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로서 자기자신을 착취한다. 물론 타자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다.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발발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일과 능력의 피로이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힌 개인의 한탄은 아무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다는 의식은 파괴적 자책과 자학으로 이어진다. 우울증은 긍정성의 과잉에 시달리고 있는 사회의 질병으로서, 자기 자신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인간을 반영한다.

 

30. 멀티테스킹이라는 시간 및 주의 관리 기법은 문명의 진보를 의미하지 않는다. 멀티태스킹은 후기근대의 노동 및 정보사회를 사는 인간만이 갖추고 있는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퇴화라고 할 수 있다. 멀티태스킹은 수렵자유구역의 동물들 사이에서도 광범위하게 발견되는 습성이다. 야생에서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기법이 멀티태스킹인 것이다.

 

32.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는 과잉주의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져가고 있다.

잠이 육체적 이완의 정점이라면 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의 정점이다.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한다.

 

35. 그러나 예술이란 표현 행동이다. 존재를 의지로 대체한 니체조차 인간에게서 모든 관조적 요소가 제거된다면 인간 삶은 치명적인 과잉활동으로 끝나고 말 것임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평온의 결핍으로 인해 새로운 야만 상태로 치닫고 있다. 활동하는 자, 그러니까 부산한 자가 이렇게 높이 평가 받은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따라서 관조적인 면을 대대적으로 강화하려는 것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인간 성격 교정 작업 가운데 하나이다.”

 

38. 아렌트에 따르면 근대사회는 인간을 노동하는 동물로 격하시키는 노동사회로서 행동의 모든 가능성을 파괴해버린다.

 

40. 노동사회는 개별화를 통해 성과사회, 활동사회로 변모했다. 후기근대의 노동하는 동물은 거의 찢어질 정도로 팽팽하게 자아로 무장되어 있다. 그리고 이는 수동성과는 정말 거리가 먼 것이다.

 

41. 왜 모든 인간 활동이 후기근대에 와서 노동의 수준으로 떨어지는가, 더 나아가서 사람들은 왜 그토록 초조하고 부산한 상태에 빠지는가 하는 물음은 다른 대답을 요구한다.

 

존재의 결핍 앞에서 초조와 불안이 생겨난다. 노동하는 동물이 어떤 유에 속하고 자신이 속한 유를 위해 노동하는 것이라며 여기에는 동물다운 느긋함이 생겨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기근대의 자아는 완전히 개별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죽음의 기술로서 죽음에 대한 공포가 덜어주고 지속의 감정을 불러일으켜야 할 종교도 이제 그 시효가 다 되었다. 세계는 전반적으로 탈사회화되었으며, 이로 인해 허무의 감정은 더욱 강화된다.

 

43. 과잉활동, 노동과 생산의 히스테리는 바로 극단적으로 허무해진 삶,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반응이다. 오늘날 진행 중인 삶의 가속화 역시 이러한 존재의 결핍과 깊은 관련이 있다. 노동사회, 성과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며 계속 새로운 강제를 만들어 낸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모두가 자유롭고 빈둥거릴 수 도 있는 그런 사회로 귀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주인 스스로 노동하는 노예가 되는 노동사회를 낳는다. 이러한 강제사회에서는 모두가 저마다의 노동수용소를 달고 다닌다.

 

47. 사색적 삶은 보는 법에 대한 특별한 교육을 전제한다.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교육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세 가지 과업을 거론한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보는 것을 배워야 한고,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 하며, 말하고 쓰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러한 배움의 목표는 니체에 따르면 ‘고상한 문화’이다. 보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눈을 평온과 인내, 자기에게 다가오게 하는 것에 익숙해지도록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눈으로 하여금 깊고 사색적인 주의의 능력, 오래 천천히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은 ‘정신성을 갖추기 위한 최초의 예비교육’이다. 인간은 어떤 자극에 즉시 반응하지 않고 속도를 늦추고 중단하는 본능을 발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정신의 부재 상태, 천박성은 자극에 저항하지 못 하는 것 자극에 대해 아니라고 대꾸하지 못하는 것에 그 원인이 있다. 즉각 반응하는 것, 모든 충동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이미 일종의 병이며 몰락이며 탈진이다.

실상 활동과잉은 다름 아닌 정신적 탈진의 증상일 뿐이다.

 

49. 니체가 말한 중단하는 본능이 없다면 행동은 안절부절 못하는 과잉활동적 반응과 해소 작용으로 흩어져버릴 것이다.

 

50. 전반적인 가속화와 활동과잉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분노하는 법도 잊어가고 있다. 분노는 특별한 시간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전반적인 가속화 및 활동과잉과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가속화와 활동과잉은 넓은 시간적 지평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때 미래는 현재를 연장시킨 것 정도로 축소되고, 다른 것에 시선을 던질 수 있는 부정적 태도가 싹틀 수 있는 여지는 전혀 없다. 반면 분노는 현재에 대해 총체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분노의 전제는 현재 속에서 중단하며 잠시 멈춰 선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분노는 짜증과 구별된다. 오늘의 사회를 특징짓는 전반적인 산만함은 강렬하고 정력적인 분노가 일어날 여지를 없애버렸다.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오늘날 분노는 어떤 심대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짜증과 신경질만이 점점 더 확산되어간다. 사람들은 불가피한 일에 대해서도 짜증을 내곤 한다. 짜증과 분노의 관계는 공포와 불안의 관계와 유사하다. 공포가 특정한 대상에 과한 것이라면, 불안은 존재 자체의 문제이다. 불안은 현존재 전체를 붙들고 흔들어댄다. 분노 역시 하나하나의 사태에 대한 관한 것이 아니다. 분노는 전체를 부정한다. 분노가 보여주는 부정성의 에너지는 바로 여기에 있다. 분노는 예외적 상태이다. 세계가 점점 더 긍정적으로 되어가면서 예외적 상태도 더 줄어든다….  오늘날 사회의 전반적인 긍정화는 모든 예외상태를 흡수해 버린다.  

 

52. 인간이 부정의 존재라고 한다면, 세계의 전면적 긍정화는 무시할 수 없는 우험을 초래할 수도 있다. 헤겔에 따르면 부정성이야말로 인간 존재를 생동하는 상태로 지탱해주는 것이다.

 

53. 무의의 부정성은 사색의 본질적 특성이기도 하다. 예컨대 참선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들이닥쳐 오는 것에서 스스로를 해방함으로써 무의의 순수한 부정성, , 공에 도달하려 한다. 그것은 극도로 능동적인 과정이며 수동성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다. 참선은 자기 안에서 어떤 주권적 지점에 도달하기 위한 연습, 중심이 되고자 하는 연습이다.

이에 반해 긍정적 힘만을 가진 사람은 대상에 완전히 내맡겨진 신세가 된다. 역설적이게도 활동과잉은 극단적으로 수동적인 형태의 행위로서 어떤 자유로운 행동의 여지도 남겨놓지 않는다.

이것은 긍정적 힘의 일방적 절대화가 낳은 결과이다.

 

61. 삶을 위한 모든 노력은 죽음으로 귀결된다.

 

65. 활동사회라고도 할 수 있는 성과사회는 서서히 도핑사회로 발전해 간다. 그 와중에 브레인 도핑처럼 부정적인 표현은 신경향상으로 대체된다. 도핑은 말하자면 성능 없는 성과를 가능하게 한다.

 

66. 성과사회, 활동사회는 그 이면에서 극단적 피로와 탈진상태를 야기한다. 이러한 심리 상태는 부정성의 결핍과 함께 과도한 긍정성이 지배하는 세계의 특징적 징후이다. 그것은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을 전제하는 면역학적 반응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해 유발되기 때문이다. 과도한 성과의 향상은 영혼의 경색으로 귀결된다.

 

67. 나는 그녀에게 ‘나는 너한테 지쳤어’라고 말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아니 그냥 ‘지쳤어’라는 말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함께 그렇게 외쳤다면 우리는 각자의 동굴에서 해방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토록 심한 피로 때문에 우리에게서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영혼이 다 타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피로는 폭력이다. 그것은 모든 공동체, 모든 공동의 삶, 모든 친밀함을, 심지어 언어 자체마저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런 종류의 피로는,. 본래 그럴 수 밖에 없었겠지만, 아무 말 없이, 필연적으로 폭력을 낳는다. 아마도 이러한 폭력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오직 타자를 일그러뜨리는 시선 속에서뿐이었을 것이다.

 

69. 근본적 피로는 오히려 특별한 능력으로 묘사된다. 그것은 영감을 준다. 그것은 정신이 태어나게 한다. 피로의 영감은 무의에 관한 것이다. 지친 오디세우스는 나우시카의 사랑을 얻었다. 피로는 젊음을 가져다 준다.

 

70. 한트케는 노동하는, 움켜쥐는 손에 놀이하는 손을 맞세운다. 놀이하는 손은 결연하게 움켜쥐지 않는다. 매일 저녁 여기 리나레스에서 나는 많은 꼬마 녀석들이 노곤해져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더 이상 탐욕도 없고 손에 움켜쥔 것도 없고, 그저 놀이만이 있을 뿐이었다.

 

72. 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적 힘의 피로, 즉 무위의 피로이다. 원래 그만둔다는 것을 뜻하는 안식일도 모든 목적 지향적 행위에서 해방되는 날,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염려에서 해방되는 날이다. 그것은 막간의 시간이다. 신은 창조를 마친 뒤 일곱째 날을 신성한 날로 선포했다. 그러니까 신성한 것은 목적 지향적 행위의 날이 아니라 무위의 날,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인 것이다. 그날은 피로의 날이다. 막간의 시간은 일이 없는 시간, 놀이의 시간으로서 본질적으로 염려와 노동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 하이데거의 시간과도 구별된다. 한트케는 이러한 막간의 시간을 평화의 시간으로 묘사한다. 피로는 무장을 해제한다. 피로한 자의 길고 느린 시선 속에서 단호함은 태평함에 자리를 내준다. 막간의 시간은 무차별성의 시간, 우애의 시간이다.

 

81. 나는 또 하나의 재해석을 통해 이 프로메테우스 전설을 내적 영혼의 장면으로, 즉 오늘날 스스로에게 폭력을 가하며 자기 자신과 전쟁을 치르고 있는 성과주체의 심리적 기구에 관한 묘사로 파악하고자 한다.

성과주체는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믿지만 실은 프로메테우스처럼 묶여 있다. 끝없이 다시 자라나는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먹는 독수리는 성과주체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제2의 자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프로메테우스와 독수리의 관계는 자기 착취의 관계인 셈이다. 피로란 스스로는 고통을 느낄 줄 모르는 간의 고통이라고들 한다. 따라서 자기 착취의 주체인 프로메테우스는 엄청난 피로에 빠지고 말 것이다.

 

82. 자아 피로는 고독한 피로, 세계가 없는, 세계가 부족한, 세계를 지워버리는, 개개인을 고립시키는 피로이며, 나르시시즘적 자기 관계의 대가로 타자와의 모든 관계를 파괴해버리는 피로다.

 

86. 타자로부터의 자유는 나르시시즘적 자기 관계로 전도되며, 이는 오늘날 성과주체가 겪는 많은 심리적 장애의 원인이 된다.

 

타자와의 관계가 사라지면서 보상의 위기가 찾아온다. 인정으로서의 보상은 타자 또는 제 3자라는 심급을 전제한다. 스스로를 보상하거나 스스로를 인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타자관계의 부재는 보상의 위기가 발생할 수 있는 초월적 조건인 것이다.

 

87. 세네트 역시 보상의 위기가 온 원인으로 나르시시즘적 장애와 타자관계의 결핍을 들고 있다. “성격 장애로서의 나르시시즘은 뚜렷한 자기애와 완벽하게 대립된다. 자아 속으로의 침잠은 보상을 낳지 못하고, 오히려 자아에게 고통을 가한다.

 

88.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타자와의 대립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는 것이다. 반면 나르시즘에서는 타자와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나르시시즘적 장애를 겪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 속으로 가라앉는다. 그리하여 타자관계가 소실되고 이에 따라 안정된 자아의 이미지도 형성되지 못한다.

89. 어떤 목표를 달성했다는 느낌은 자아감정의 고양을 위해 의식적으로 회피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목표를 달성했다는 느낌 자체가 결코 찾아오지 않는 것이다. 나르시스적 주체는 완결에 이르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완결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93. 지칠 줄 모르는 우울증의 부상은 20세기 전반에 주체가 겪어내야 했던 변형의 두 차원을 관통한다. 이 두 차원이란 심리적 해방과 정체성의 불안정, 또는 개인의 주도권과 행동할 수 없는 무능력이다. 그것은 정신의학에서 신경증적인 갈등이 스스로의 부족함에 대한 우울한 자책으로 전도되는 데서 생겨나는 인간학적인 위험을 분명히 보여준다.     

 

94. 탈진과 우울 상태에 빠진 성과주체는 말하자면 자기 자신에 의해 소모되어 버리는 셈이다. 그는 자기자신으로 인해, 자기 자신과의 전쟁으로 인해 지치고 탈진해버린다. 그는 자신에게서 걸어 나와 바깥에 머물며 타자와 세계에 자신을 맡길 줄은 전혀 모른 채 그저 자기 속으로 이를 악물 따름이다. 하지만 그 결과로 남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속이 텅 비어버린 공허한 자아뿐이다. 주체는 점점 더 빨리 돌아가는 쳇바퀴 속에서 마모되어간다.

 

97. 우울증 환자는 자신의 자주성에 지쳐버린 사람, 즉 자기 자신의 주체가 될 힘을 상실한 사람이다. 그는 주도적이어야 한다는 요구의 끝없는 반복에 지쳐 있는 것이다.

 

101. 문제는 개인 사이의 경쟁이 아니고 경쟁의 자기 관계적 성격이다. 그로 인해 경쟁은 절대적 경쟁으로 인해 첨예화된다. 즉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과 경쟁하면서 끝없이 자기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강박, 자기 자신의 그림자를 추월해야 한다는 파괴적 강박에 빠지는 것이다. 자유를 가장한 이러한 자기 강요는 결국 파국으로 끝날 뿐이다.

 

102. 자아는 일단 도달 불가능한 이상 자아의 덫에 걸려들면 이상 자아로 인해 완전히 녹초가 된다. 이때 현실의 자아와 이상 자아 사이의 간극은 자학으로 이어진다. 

 

후기 근대의 성과주체는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는 더 이상 어떤 예속적 본성을 지닌 주체가 아니다 그는 자신을 긍정화하고 해방시켜 프로젝트가 된다.

 

103. 다만 타자에 의한 강제가 자유를 가장한 자기 강제로 대체될 따름이다. 이러한 발전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자본주의가 일정한 생산수준에 이르면, 자기 착취는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더 효과적이고 능률적이 된다.

 

성과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다. 성과주체는 완전히 타버릴 때까지 자기를 착취한다. 여기서 자학성이 생겨나며 그것은 드물지 않게 자살로까지 치닫는다. 프로젝트는 성과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날리는 탄환임이 드러난다. 

 

104. 21세기의 대표 질병인 소진증후군이나 우울증 같은 심리질환은 모든 자학적 특징을 나타낸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폭력을 가하고 자기를 착취한다. 타자에게서 오는 폭력이 사라지는 대신 스스로 만들어낸 폭력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러한 폭력은 희생자가 스스로 자유롭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더 치명적일 수 있다.

 

105. “우리 현대인이 정치적 공간을 시민권, 자유으지, 사회계약의 개념으로 생각하는데 반해, 주권의 관점에서 볼 때는 오직 벌거벗은 생명만이 진정한 방식으로 정치적이다.” “죽음에 내버려진 생명원초적인 정치적 요소이며 호모 사케르의 벌거벗은 생명을 생산하는 추방이야말로 정치의 근원 현상인 것이다. 주권과 벌거벗은 생명은 각각 질서를 이루는 경계성의 양극단에 서 있다. 주권자 앞에서 모든 인간은 잠재적으로 호모 사케르이다.

 

109. 오늘날의 폭력은 적대적인 이견에서보다는 순응적 합의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버마스에 반하여 합의의 폭력을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112. 니체라면 활동과잉의 인간을 역겨워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강한 영혼은 평정을 유지하고 천천히 움직이며 지나친 활발함에 대해 거부감을 품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거친 노동을 좋아하고 빠른 자, 새로운 자, 낯선 자에게 마음이 가는 모든 이들아. 너희는 참을성이 부족하구나. 너희의 부지런함은 자기 자신을 망각하려는 의지이며 도피다. 너희가 삶을 더 믿는다면 순간에 몸을 던지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너희는 내실이 부족해서 기다리지 못한다. – 심지어 게으름을 부리지도 못하는구나!”

 

자본주의 경제는 생존을 절대화한다. 자본주의 경제의 관심은 좋은 삶이 아니다. 이 경제는 더 많은 자본이 더 많은 삶을, 더 많은 삶의 능력을 나을 거라는 환상을 자양분으로 발전한다

좋은 삶에 대한 관심은 생존의 히스테리에 밀려난다.

 

113. 성과사회는 그 내적 논리에 따라 도핑사회로 발전한다. 단순한 생명 기능으로 환원된 삶은 무조건 건강하게 유지해야만 하는 삶이다. 건강은 새로운 여신이다.

 

114. 그들은 죽을 수 있기에는 너무 생생하고 살 수 있기에는 너무 죽어 있는 것이다.

 

역자 후기

 

121. 피로는 성과주체의 만성질환이다.

 

3. 내가 저자라면

 

오랫동안 눈 여겨 보았으나 맘먹고 읽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 여러 부분에서, 내가 수년간 어쩌지 못했던 부분에 대한 답이 보였다. 뭐 답이 있다고 늘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나의 문제가 어디에서 연유했는가를 아는 것은, 그것이 온전한 나의 탓만은 아니라는 것은 얼마나 깊은 안도감을 주는가. 피로사회보다 더 많은 울림이 있었던 것은 우울사회다. 실은 피로사회는 우을사회로 가기 위한 밑작업처럼도 느껴졌다. 피로사회의 결론이 곧 우울사회라고 생각했다. 참 단순하게, 간결하게 쓰인 책인데, 그만큼 지방과 살은 생략하고 뼈대로만 짜인 것 같은 강골함과 대담함이 이 책의 전반적인 기조다. 간만에 재미있는 리뷰였다. 나는 그 중에서도 우울의 기조가 현대의 새로운 트렌드임을 설명하는 전반적인 내용, 그리고 분노의 특성과 분노가 불가능해진 원인에서 꽂혔다.  나는 물론 지금 이런 책을 쓰지는 못할 것이다. 언젠가 커뮤니케이션과 권력에 대해 쓸 때 이 책에서 활용할 만한 부분을 눈 여겨 봐두었다.    

 

피로사회

  • 신경성 폭력

  • 규율사회의 피안에서

  • 깊은 심심함

  • 활동적 삶

미주

  • 보는 법의 교육

  • 바틀비의 경우

  • 피로사회

미주

우울사회

역자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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