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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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2015. 2. 4
나는 며칠씩 일에 파묻혀 있을 때 누가 옆에서 챙겨주지 않으면 먹는 것조차 (잊은 듯하면 좋겠지만) 귀찮아서 끼니를 거르는 것이 다반사다. 현관문 한번 나가지 않고 일주일씩 칩거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근래 마감이 닥친 일들이 제법 몰려 있다는 핑계로 두문불출 칩거하면서 새벽까지 이곳저곳에서 끌어온 자료들을 편집하느라 토가 나올 지경이다. 급하게 몰아치는 것은 내 스타일이 아니다.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사전작업을 길게 해야 한다. 생각이 익어야 어떤 일이든지 시작 할 수 있다. 대신 일이 시작되면 모질게 하는 편이다. 생각이 긴 반면 행동은 짧고, 재작업이 필요치 않거나 최소한에 그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고초려에 거절하지 못하고 일정에 쫓겨 두서없이 일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건 내 스타일이 아니야!” 하루에도 몇 번씩 외친다.
이러다 폐인 되겠다. 아이들이라도 있으면 눈치 보느라 밥차려 먹이느라 제때 씻기도 하고, 마중 나간답시고 바깥바람이라도 좀 쐬고 하련만 녀석들이 영어마을 캠프에 참여한 이번 주는 대놓도 곰팡이 짓을 하고 있다. 이러다 안 되겠다 싶어 벌떡 일어섰다. 후다닥 샤워부터하고 산책준비를 하다가 장롱 문고리에 걸린 바지가 눈에 띄었다. 옷 한번 사면 면바지조차 십년씩 입어 버리는 통에 옷 살 일이 별로 없는데 며칠 전에 정장바지를 하나 사 두었던 것이 눈에 띄였다. 허리사이즈가 늘어나는 만큼 키는 왜 그대로인지 몹시 불만스럽지만 새 옷이니 바짓단은 맞춰 입어야지. 삽작밖을 나갈 핑계꺼리까지 생겼다.
아내에게 물어 수선 집을 알아냈다. 이 동네 산지가 몇 년인데 수선집이 어디 있는지도 모른단 말인가! 관심을 두지 않는 것에는 백치미가 만발하는 어중이가 바로 여기 있다. 바지 기장을 가늠해서 클립을 채우고 곱게 접어 들고 현관문을 나섰다. 일주일쯤 시동한번 걸려보지 못한 애마가 먼지를 뽀얗게 덮어쓰고 있다. 대문밖 풍경이 생경하다. 낯선 바람이 끼얹듯 쏟아졌다. 오늘 제법 차구나!
“아지메! 바지 기장 좀 줄여주소.”
“네~~다 맞춰 왔네. 나뚜고 가이소.”
“집사람이 꼭 이 집 가라 카던데 잘 맞춰 주소. 삼대 구년만에 바지하나 산기구마.”
“걱정마이소. 내일 오시면 됩니데이.”
(나가려다 말고)“허리도 쪼매 늘이까 싶은데…….”
“어떤데예?”
“허리가 아리까리해요. 쪼매 쫄리는데 이참에 살을 좀 빼까 싶기도 하고…….”
“큰 걸로 바꾸지 그캅니꺼?”
“아~~이 키에 허리 맞춰 옷 사면 못 봐줘요.”
“알았으예. 쪼매 늘카드리께예”
그렇다. 한사이즈 큰 것은 도저히 살 수 없었던 것이다. 젠장!
아내가 하던 말이 생각났다.
“자기야. 여자들 옷장에 안입는 옷이 왜 많은지 알아?”
“응?”
“살빼서 입겠다고 희망 사이즈나 처녀적 사이즈 사 놓고 못입어서 그렇게 된거야.”
“그 짓을 왜 하나?”
“그런게 있어.”
이제 난 그 마음을 십분 이해하게 되었다.
나선 김에 동네 한 바퀴 돌아 들어가기로 했다. 내가 사는 동네는 오래되었다. 걸어서 5분쯤 거리에 대학교가 있고, 차로 5분쯤 거리에 역과 공항이 있다. 걸어서 1분쯤 거리에 오래된 작고 허름한 재래시장도 있는데, 시장 상가건물은 적어도 50년은 된 듯 슬럼화 되었고 2층과 3층엔 아직 사람이 사는 듯 빨래가 군데군데 걸려있다. 벽에는 떨어져 너덜거리는 간판이 몇 개 걸려있으나 간판 주인이 떠난 지 오래된 것들이다. 페인트조차 떨어져 뻐굼뻐굼한 곳에 독서실과 문구점 글씨간판은 겨우 알아볼 만큼 흔적이 남았고, 교회 십자가 간판만이 외눈박이처럼 반짝인다. 그리고 그 계단 밑에는 뻥튀기 할아버지가 종일 앉아있다.
동네에서 우리 집은 제법 좋은 건물이었다. 불과 십여년만에 비슷한 집들은 대부분 헐려서 원룸이 들어섰고, 옛날 건물이 되어버린 우리 집과 그 사촌들은 이제 근동에서 손으로 꼽을 수 있게 되었다. 동네엔 이제 모르는 사람들과 모르는 차들이 넘쳐난다. 원룸 촌이 되면서부터 아이들을 밖에 내보는 것이 제법 신경쓰인다. 동네는 빠르게 변했다.
한손에 카메라를 꺼내들고 어슬렁어슬렁 걸었다. 여전히 몇 남지 않은 벽돌집들이 허물어지고 있고, 새집을 짓느라 포클레인이 바쁘게 움직인다. 며칠 전까지 있던 집들이 그사이 허물어지고 없다. 그 사이 커피집도 두 개나 더 생겼다. 이런 곳에 생기는 커피 집을 볼 때면 사는 게 다들 힘든가보다 싶다. 오랜만에 편의점에 들러 로또 이천원치를 샀다. 이집 늙은 여자는 늘 돌씹은 표정을 하고 있다. 장사도 잘 되는 것 같더만.
막창골목을 지나 큰길로 나섰다. 고래등 같은 희멀건 건물이 십여년째 주인도 없이 비어있다. 빌딩 벽엔 유치권 행사 중이니 건들지 말라는 플랜카드가 펄럭이는 365일 을씨년스런 건물이다. 건물에 깔린 꿈과 슬픈 사연이 작지 않을 것이다. 텅 빈 주차장터엔 깻잎머리 계집아이 둘이서 구름과자를 찰지게 먹고 있다. 몇 걸음 올라가니 ‘중국식 마사지’라고 쓰여진 분홍색 간판이 반짝거린다. 주중엔 전신마사지가 3만원이란다. ‘건전업소’라고 적어놓았다. 중국식 발안마를 무지 좋아하는 나로서는 구미가 당기는 메시지다. 아내랑 한번 땡길까 싶다. ‘휘발유 1319원, 경우 1119원’ 가짜 휘발유 팔다가 징계 먹고 쉬던 주유소에서 간판을 바꿔달고 다시 기름을 팔기 시작했다. 입간판에다가 대문짝만하게 기름 값을 적어놓은 폼새가 어째 믿음이 안간다. 주인이 바뀐 건지 간판만 바꿔 단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집에서 기름 넣을 일은 없으니...터덜터덜 걷다보니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았다. 신호를 받고 길게 늘어선 빨간 브레이크 등의 행렬이 짐승의 눈 같다고 생각했다. ‘그 사이 차가 이렇게나 많지?’ 시계를 보니 퇴근시간이다. 아! 이제 퇴근시간을 잊어버릴 정도는 된 모양이다. 제법 월급쟁이 물이 빠진 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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