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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9일 11시 41분 등록

단속사회 - 쉴 새 없이 접속하고 끊임없이 차단한다


엄기호, 창비, 2014.


1. 저자에 대하여


■ 엄기호 ■

출생/사

1971. 울산 귀퉁이 시골

활동분야

 

 

• 발 자 취 •  

• 저 서 •

2000년부터 국제연대운동

 - 국제연대운동을 하면서 낯선 것을 만나 배우는 것과 사람을 평등하게 둘러앉게 하는 ‘모름’의 중요성을 배움

 - 답을 제시하는 것이 자신의 재주가 아니라 묻고 또 묻는 것이 이번 생의 이유라고 여김

 - 삶이 인과적으로 구성되어 분석될 수 있다기보다는 삶이란 우연이며 글과 말은 그 아이러니와 역설을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함

 -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지구 어느 한쪽 귀퉁이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며 사는 꿈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살고 있음

『닥쳐라, 세계화!』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단속사회』 등

 

……

……


참고자료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72399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책을 펴내며_‘편’을 강요하고 ‘곁’을 밀치는 사회


p6 ‘곁’이 있는 글. 내가 지금까지 글을 써오면서 가장 신경 써온 것이 바로 이 ‘곁’의 문제다.

    나는 삶이란 아이러니로 가득 찬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관관계보다는 예기치 못한 역설과 아이러니가 삶을 이루고 그 아이러니를 드러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왔다. 내가 스스로를 치밀하고 논리적으로 하나하나 꼼꼼히 따지고 논쟁하는 저자가 아닌, 직관적인 글쟁이로 분류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p6~7 '곁‘은 말하는 자리가 아니라 ’듣는‘ 자리에 가깝다. 때로는 신나는 이야기를 들기도 하지만, 곁에서 듣는 이야기는 고통 혹은 슬픔에 찬 이야기인 경우가 많다. 이 이야기들은 논리정연하기보다는 오히려 비명과 한숨, 절규와 한탄이 뒤죽박죽 섞인 이야기들이다. 마치 고장 난 시디플레이어처럼 같은 말이 반복되기도 한다. 곁에서 듣는 이는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아직 ’말이 되지 못한 말‘을 듣는다. 따라서 듣는 이는 말하는 이의 말이 말로 들릴 때까지 반복하여 곱씹고 끊임없이 물으며 들어야 한다. 누군가의 곁에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가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p7 지금 우리 곁에는 말을 듣는 사람이 점점 사라져가고 자기 말을 들어달라는 사람만 가득하다. 자기 말은 호소하고 싶은데 남의 말을 듣는 것은 힘들어지면서 사람들은 힐링이니 상담이니 하는 사적이고 상업적인 자리라 재빠르게 몰려갔다.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반응하며 구체적인 도움을 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반응은 꼭 친절하지 않아도 좋다. 오히려 호통치고 야단칠수록 마치 그것이 애정의 표현이고 관심이며 깨달음을 주는 죽비소리인 듯 여겨진다. 말할 수 있는 곁이 사라지자 이처럼 돈 내고 야단맞으러 가는 세상이 되었다.


p7~8 힐링과 상담이 아닌 일상생활의 공간에서 사람들은 곁이 사라진 자리를 편으로 메꾸며 악몽으로 만들어간다. 곁을 파괴하고 편을 강요하는 것, 이는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곁은 파괴되고 편으로 몰아가는 사회. … 조금이라도 자신과 다른 이야기, 반론을 펴면 이내 곧 누구 편이냐 되묻고 상대를 내친다. 이렇게 ‘편’을 강요하는 언어에는 반성이나 성찰이 들어설 여지가 전혀 없다. 편으로 이루어진 세계는 ‘지지 혹은 적대’의 세계이기 때문에 자기가 지지하는 쪽은 무조건 옳고 반대편은 무엇을 하더라도 틀리게 된다. 그래서 편의 언어는 단순하다. 편들어야 하는 자는 일방적으로 말한다. 이때 듣는 자가 할 수 있는 말은 ‘옳소’뿐이다. ‘아니요’라고 답하면 적으로 지목되어 내쳐진다. ‘옳소’ 이외의 다른 말은 침묵된다.


p9 이제 사람들과의 유대와 교류는 같거나 비슷한 취향의 모임들에서만 활발할 뿐이다. 간혹 등장하는 다름과 차이에 대해서는 ‘그의 취향일 뿐’이라는 말로 무관심한 듯 존중하는 제스처로 해결한다. 이로써 자신의 고통에서 자신의 주변 혹은 사회의 모순이든 고통이든 무엇인가 ‘자기’를 넘어서는 것을 발견하는 일은 불가능해진다. 이야기를 나누며 ‘곁’을 만드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처럼 서로 참조하며 배우는 ‘곁의 언어’가 사라질수록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공적인 이슈로 바꾸는 역량, 즉 시민의 정치적 역량 역시 쇠퇴한다. 또한 낯설고 다른 것과의 부딪침과 만남을 통해서 일어나는 사람의 성장 역시 불가능해지게 된다.


p10 같고 비슷한 것에는 끊임없이 접속해 있다. 하지만 타인의 고통같이 조금이라도 나와 다른 것은 철저히 차단하고 외면하며 이에 개입하지 않으려 한다. 또한 자기를 ‘단속(團束)’하며 타자와의 관계는 차단하며 동일성에만 머무르며 자기 삶의 연속성조자 끊어져버린 상태, 이것을 나는 ‘단속’이라고 이름붙이고자 한다.


p11 국가는 악몽이 되고, 사회는 몽상이 되고, 개인은 착각이 되어버린 이 폐허에서 곁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여전히 ‘사회 이후의 사회’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프롤로그_누구의, 어떤 관계의 단절인가


p18 ‘관계의 단절’이나 ‘관계의 파편화’니 하는 말로 단절을 실존화하여 해석하는 경향에 대해 우리는 그것이 누구의 경험이며, 왜 그 경험이 마치 ‘현대인’ 모두가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주류화되었는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가 ‘개인화’되었다는 말은 그래서 한계가 많다. …개인화라는 말은 ‘관계’를 달팽이처럼 지고 살아가는 이들의 삶과 경험을 배제하고 있다.


p25 말은 그것이 이행되었을 때엔 점검이 뒤따라야하고 혹은 이행되지 않았을 때엔 사과가 ‘이행’되어야 한다. 즉 약속이 지켜지건 아니건 말 뒤에 이행되는 것이 뒤따라야만 말이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지금의 냉소와 절망은 아무것도 이행되지 않는 사회가 됨으로써 필연적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결과일 수 있다.


p25~26 말에 대해 냉소하고 말문을 닫아버릴수록 우리가 잃어버리는 능력이 있다. 자신의 사적인 경험을 공적인 이슈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 능력의 상실은 관계의 단절을 정치와 정치공동체의 위기로 이어지게 한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공적 공간이란 “개인의 고민과 공공의 현안들에 대해 만나서 의논하는 장소”라고 말한다. 즉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 분리되거나 개인적인 것이 곧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사적인 문제들이 공적인 이슈들을 다루는 언어로 새롭게 해석되고 사적인 곤란들에 대하여 공공의 해결책이 모색되고 조정되며 합의”되는 공간이 바로 공적인 공간이라는 것이다.


p26 자신의 사적인 경험을 자기만의 고통으로만 말할 줄 알지 남들도 들어줄 만한 ‘공적인 이슈들을 다루는 언어’로 전환해내진 못한다. 또한 이를 뒤집으면 우리는 남들의 이야기를 공적인 이야기로 들을 줄 모른다는 뜻도 된다.


p28 정치공동체 혹은 공적 공간에서 ‘차이’는 토론과 논쟁의 주제이지만 취향의 공동체에서 차이는 개인의 취향으로서 존중되어야 한다. 심지어 정치적 견해의 차이도 정치적 ‘취향’의 차이로 둔갑한다. …취향을 존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더 이상 듣지 않고 ‘무시’하는 것이다. 웬디 브라운이 ��관용��에서 설명하듯 관용이란 어떤 경우 무시의 다른 말에 지나지 않는다. 취향의 공동체는 차이를 배제하고 ‘같은 취향’이라는 동일성만 추구하는 지극히 사적인 공간이다.


p29 삶이 연속적일 때 비로소 개인과 사회의 서사(敍事)가 완성되고 이 서사를 갖춰야 내가 내 삶의 주인공이라는 느낌을 가질 수 있는데, 바로 그 연속성(續)이 끊어진(團) 것이다.


제1부 악몽이 된 곁, 말 걸지 않는 사회


1장 정치공동체의 파괴: 폭로하고 매장한다


p41 정치공동체의 핵심은 ‘말하는’ 데 있다. 즉 정치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바로 말할 권리가 있는 사람들이 서로 토론하고 경험하면서 ‘공론’을 형성해가는 것이다. 문제는 과연 누가 말할 자격이 있는가를 그 정치공동체가 배분하고 결정하는 데서 발생한다. 말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말할 권리가 배분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정치공동체에 배제된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자유민들이었다.


p41 근대 ‘시민’정치에서 몫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정치에서의 자기 몫을 주장하기 위해 거리시위에 나섰고 공장을 점거했다. 자끄 랑시에르는 정치 바깥에서 배제된 자들이 정치 안의 몫을 주장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치라고 말한다.


p49 공론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억압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하승우는 일제 식민 권력이나 이후 독재 정권이 가장 두려워한 것이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었고 회의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말 많으면 빨갱이’라는 표현도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말을 많이 한다는 것은 곧 이견을 제시한다는 것이고, 이견을 제시한다는 것은 자신이 지금 ‘불편하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표현하고 힘을 모으는 과정이었는데, 그동안의 권력은 그것을 불온시해왔다.


p51 폭로는 말하기가 억압되고 말하기에서 배제된 자가, 자신에게 말한 권리를 배분하지 않고 공론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는 ‘정치공동체’의 ‘정치 없음’을 드러내는 ‘정치적 행위’였다. 자기 조직 내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던 시도가 공론화라는 의미에서의 정치라면, 폭로를 통해 정치공동체의 정치 없음을 드러내는 것은 ‘몫없는 자가 몫을 주장한다’라는 의미에서의 정치였다.


p53 다른 한편, 폭로는 말할 권리를 부여받지 못하고 배제된 사람들이 아닌, 말할 권리를 충분히 가진 사람들에 의해 사용된다. 그러다 보니 공론을 통한 해결은 사라지고 남은 것은 온통 폭로밖에 없다. 폭로의 목적 또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폭로하는 사람들 또한 자신이 당한 상처에 대한 개별적인 복수, 즉 누군가를 지목해서 사냥하고 매장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인 것처럼 행동한다.


p57 사람은 말하는 것을 통해서만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 이 ‘말’을 체계적으로 구성하면 바로 ‘의견’이 된다. 의견을 제시하는 대신 침묵해버리는 것, 이로 인해 사회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정치적 행위는 결정적으로 타격을 받는다.


p57~58 리처드 세넷은 이 사회를 지배하는 두 가지 원리로 가시성과 사회적 고립을 꼽는다. 사무실에서 벽을 없애버리는 것처럼 누구든 서로를 볼 수 있는 가시성이 강화될수록 친밀성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에 의한 감시만 증가한다. 이 상태에서 개인은 “침묵만이 자신을 보호하는 유일한 수단”임을 알게 되고 침묵하는 것을 통해 스스로를 세계와 단절하여 고립된다. 이러한 사회에서 공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맞닥뜨리게 되는 공통된 감정은 바로 공포감이다.


p58 위험을 회피하고 안전만 추구하는 이런 사회를 지그문트 바우만은 ‘사냥꾼의 사회’라고 부른다. 이 사회에서 사람들이 목숨 걸고 추구하는 것은 생존과 안전이다. 사냥꾼이 될 수 없으면 최소한 사냥감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p58~59 사냥꾼의 사회에서 개인이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침묵하는 전략을 택한 것은 안전의 목적과 의미가 전도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바우만에 따르면 원래 국가는 제약없이 행사되는 시장의 힘에 의해 초래된 손실과 피해를 제한하고, 약자들을 지나치게 고통스러운 재난으로부터 보호하고, 불확실한 처지의 사람들을 자유경쟁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체제유지의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국가의 가장 주된 임무가 ‘시장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으로부터 시장을 보호하는 것’으로 바뀌면서, 국가는 자신의 정당성의 근거를 경제적 영역이 아니라 비경제적 영역에서 다시 찾아야 했고 ‘안전’을 통해 그것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이다.


p61 타자와의 만남이 사라지고 개별화・동질화된 세계에서 인간의 경험은 축소되고 국지화된다. 경험은 낯선 것과는 단절된 채 비슷한 것, 동질적인 것 안에서만 무한 반복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인간 본연의 세계관, 즉 낯선 존재들을 “우연히 상봉하는 과정에 의해서만 성장한다는 관념”을 잃어간다. 우리는 낯선 존재들을 만날 때에야 비로소 익숙한 것을 상대화하게 되고 때로는 “친숙한 관념과 기성 진실을 뒤집어 놓을 수” 있게 된다. 새로운 것을 배워가면서 우리는 낯선 것에 도전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할 용기를 얻는다. 그런데 사냥감이 되지 않기 위해 동일성에만 숨어들게 되면서 우리의 경험은 축소되고 성장의 기회는 봉쇄된다. 이것이 사냥꾼의 사회에서 우리가 추구한 안전의 댓가다.


2장 단속사회의 출현: 타자와 차단하고 표정까지 감춘다


p66 일상공간에서 고통과 상처를 나누는 것이 불가능해지면서 신뢰란 인간관계에서 가장 기대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바우만은 액체근대로 진입하면서 세가지 범주의 신뢰가 모두 붕괴했다고 말한다. 첫 번째는 자기 자신에 대한, 두 번째는 타자에 대한, 세 번째는 제도에 대한 신뢰가 그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주변을 친밀한 사람들로만 채우려 하며 모르는 세상과의 접속을 될 수 있는 한 끊으려 한다. 위험한 상황을 겪으면 그것이 새로운 성찰이 아니라 사적인 안전을 도모하는 계기로 이어지는 것도 이처럼 신뢰가 붕괴했기 때문이다. 제도와 타자,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불신할 때 안전을 위해 자기가 자기를 감시하고 검열하는 자기단속 현상은 확산된다.


p69 말 그대로 사장 사적인 것이야말로 가장 흥미로운 구경거리가 된 것이다. 이는 ‘고통에 대한 고백과 치유’라는 의미에서의 힐링이 어떤 연유로 공중파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고통이나 상처 등은 이제 주변의 신뢰할 만한 사람과 나누는 내밀한 이야깃거리가 아니라 가장 훌륭한 구경거리가 되었다. SNS와 문화산업의 이 같은 단면은 상처와 고통, 그에 따른 힐링의 대유행의 이면을 드러내준다. 즉, 우리 사회는 말이 억압된 공간이라기보다 특정한 시공간에서는 끊임없이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과잉 연결되어 쉴 새 없이 상처에 대해 말해야만 하는 공간이 되었다.


p75~76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우리 사회에는 이미 정해진 길이 있다. 성취와 발달이라는 이름의 이정표다. 몇 살까지는 뒤집기를 해야 하고 몇 살까지는 옹알이를 해야 한다.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는 연애도 하지 말고 오로지 공부만 해서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 대학 이후의 삶에서도 언제까지는 집을 마련해야 한다는 식으로 성취요건별 시기가 통념화되어 있다. 이 발달의 이정표를 따르지 못하면 낙오자, 실패자가 된다.


p77 오로지 자신에게만 몰입해야 하는 우리들의 삶은 낯섦으로부터 설렘은 없애고 두려움과 피곤함만 남겼다. 나를 발견하고 가늠할 수 있는 타인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더 이상 공포감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타인이 나를 방문하고 다가오는 것이 공포다. 이런 사회에서 개인의 안전을 도모하고 관계를 규율하는 원리는 환대가 아니라 ‘예의바름’이 된다.


p80~81 이는 결국 어떤 형태로건, 씨스템의 요구에 맞지 않는 모습을 보이면 이를 곧 씨스템에 적응하는 사람들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나온 결과다. 따라서 자신이 씨스템에 의해 상처와 고통을 받았더라도 상처가 발생한 그 자리에서 그것의 부당함을 밝히면서 다른 사람들과 자신의 상처를 나누는 행위는 의식적으로 기피된다. 차이는 드러낼 것이 아니라 감추어야 한다. 본래 자유주의가 규정한 ‘자유’라는 개념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다르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개념은 다름과 차이를 드러내면 이를 곧 타인의 삶에 대한 개입으로 판다하는 식으로 그 의미에 대한 해석이 뒤엎어졌다.


p81 상처와 치유는 철저히 사적이고 개별화된 방식으로 해결해야 한다. 사적인 위로와 맞춤형의 상담이 공적 토론의 자리를 대체한다. 바우만의 말처럼 “사적인 문제들에 대해 사회적인 해결책을 기대하기보다, 오히려 사회적으로 발생한 문제들에 대해 사적인 해결책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3장 기획된 친밀성: 철저히 감시하고 매끄럽게 관리한다


p93 앤서니 기든스는 끊임없이 협상되고 타협되면서 관계 그 자체에 의해서만 유지되는 관계를 ‘순수한 관계’라고 부른다. 기든스는 성찰적 근대화 아래에서 전적으로 개인 내부의 기준에 의해 형성・관리・해체되는 이 순수한 관계가 “자아의 성찰적 기획에 본질적인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기든스는 이 순수한 관계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전념, 친밀성, 상호신뢰, 공유”라고 말한다. 또한 이 관계에서 가장 필수적인 것은 바로 “자유롭고 공개된 의사소통”이다.


p100~101 기획된 친밀성은 친밀함을 ‘같음-동일성’에 가둔다. 흔히 우리가 친구라고 말할 때 우리는 같음을 강조한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친구관계는 나른하다. 관계가 깨질 것을 각오하고 서늘한 충고와 조언을 주고받는 사이가 아니다. 이러한 관계에서는 “공동의 침체를 도덕이라 부르고, 공동의 나태를 평화라고 부르며, 공동의 타락을 질서”라고 착각하게 된다. 기획된 친밀성은 이것이 한편으론 ‘기획’이라는 점에서 부모의 기획과 통제 아래에 아이를 두겠다는 것인 대 반해, 다른 한편 ‘친밀성’이라는 점에서 아이가 부모의 기획 아래에 있지 않은 다른 ‘남’을 만나면서 ‘남’으로 자라날 기회와 가능성을 봉쇄한다는 점에서 명확한 이중성을 띤다.


p102 세넷에 따르면 사람은 낯선 존재를 만날 경우에만 자신이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것을 다르게 바라보게 되고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을 뒤집어 생각해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 아버지가 보여주는 “게토의 사랑, 특히 중산계급 게토의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의 지각과 경험을 풍부하게 해줄 기회나 모든 인간의 교훈 중에 가장 값진 것, 그의 생활의 기존 조건에 의문을 제시할 능력을 배울 기회”를 앗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획된 친밀성이 곧 교육이 되고 그것이 교육과 결합되었을 때 나타나는 비극이다.


4장 사생활의 종언: 고독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p109 개인이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 구분되는 것이다. ‘나’라는 개인은 다른 누구하고도 다른 자기만의 독특함을 지닌다. 이 독특함은 다른 어떤 특성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것이어야 하며 다른 것으로 강제로 환원하려는 순간 사라져버린다.


p110 우리는 기본적으로 ‘네’하며 순종하는 주체가 아니라 ‘아니오`라고 반발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네`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그 말을 한 사람에 종속되는 부차적인 존재가 된다.


p125~126 관계도 사라지고 프라이버시도 없는 이 공간에서의 삶을 버티게 하는 것은 오로지 아파트의 자산가치다. 단독주택이나 다른 주거는 값이 오르지 않는 데 반해 아파트만 값이 올랐다. 그러니 ‘입주자’로서의 의식보다는 ‘소유자’로서의 의식이 더 강하다. 그 결과 사생활을 대신한 것은 소유 의식이다. 소유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사생활을 누린다고 착각한다. 주거지가 아니라 자산가치로서의 아파트는 그 어떤 괴로움도 참을 수 있게 한다. 여기서 살 것이 아니라 언제든 값이 오르면 팔아치우고 이곳을 탈출하여 ‘더 좋은 곳’으로 가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이다.


제2부 쓸모없어진 곁, 몽상이 된 사회


1장 관계: 질문하면 ‘죽는다’


p133 근대는 이 진정성을 만인의 윤리적 가치로 만들었다. 우리 모두는 이제 진정한 ‘나’가 되어야 하다. 근대사회에서 성장이란 곧 진정성의 추구와 다른 말이 아니다. 이 ‘나’가 되기 위해 무엇보다 필수적인 것은, ‘나’를 언제까지나 ‘나’로 내버려두지 않고 나의 특이성을 폐기하려 하는 “분류체계”로서의 문화와 사회에 저항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진정성은 근대사회가 추구한 내적 성장의 윤리적 가치다. 진정성 있는 존재만이 타자와 만나고 소통할 가치가 있는 존재로 인정받는다.


p141~142 ‘함’이 지나칠수록 인간에겐 생각할 틈이 줄어든다. 생각할 공간, 즉 내면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함이 과잉된 인간에게 내면의 풍요, 즉 ‘행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함을 통해 만족을 얻는 것이 전부다. 이처럼 행복이 아니라 만족이 삶의 목적이 된 존재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소비를 통해 만족을 추구하는 삶에 질문이 들어설 여지는 없다.


p145~146 속물이 내면으로 자신을 숨기는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전시하는 존재인 것은 어찌 보면 근대의 필연적인 결과다. 전시(展示)는 우리 시대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 많은 연구자들은 전시가 사실 근대사회에 내재된 권력의 작동방식이라고 지적한다. 사실 전지 역시 진정성을 출현시킨 내면과 외부의 분리와 깊은 연관이 있다. 근대인들은 내면으로 물러나 외부와 긴장을 유지한 채 그 외부를 바라볼 줄 알게 되었다. 바라본다는 것은 거리를 둔다는 것이며, 이 거리를 창조함으로써 세계를 전시의 대상으로 구현하게 된다. 근대사회의 독보적 권력은 시각 그 자체다. 근대는 애초부터 보는 권력의 시대였고 세계를 전시하는 장이었다.


p153~154 우리는 으레 정치를 ‘말하는 행위를 통해 발화자의 요구를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저임금을 보장하라 한다든지 등록금을 반으로 내리라 요구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 현수막은 누구에게 그 무엇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존재한다는 것, 그 자체를 알리기만 할 뿐이다. 그럼에도 문제가 되었다. 바꿔 말하면 누군가에게는 존재를 알리는 행위 자체가 논란이 된다. 이들은 그저 “입 닥치고” “찌그러져” 살아야 한다.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 얼굴을 드러내지 말 것, 유령처럼 지낼 것.


p161 울리히 벡은 현대를 가리켜 위험사회라고 불렀다. 위험사회에서는 위험을 어떻게 배분하는지에 따라 ‘계급’이 결정된다. 사회발전의 이면에는 그 ‘발전’이 만들어내는 위험을 고스란히 떠맡는 사람들이 있다. 노동경제학자 류동민의 말을 빌리면 이익은 위로 가고 위험은 아래로 분배되는 것이 이 사회의 특징 중의 하나다. ‘풍요로운 전기’라는 환상은 정부에 의해 전기를 파격가로 공급받는 기업인들이나 누리는 것이고, 그 전기를 생산하기 위해 발생하는 위험은 고리・밀양 같은 변두리 지역민의 몫이 된다. 자신의 편리를 위해 다른 사람을 위험으로 몰아넣고 그것을 불가피하다고 말할 뿐이다.


2장 소통: 위로를 구매하라


p165 교육현장뿐만이 아니다. 가족과 직장, 학교에서부터 정당과 국가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단어를 꼽으라고 하면 단연 ‘소통’일 것이다. 대통령에 대한 평가에서부터 학교폭력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는 어떤 사건이 벌어지면 늘 ‘소통’이 문제라고 진단해왔다.


p166 소통이 되지 않는 이유에 관해 상대방과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반대의견을 관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특히 한국처럼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사회에서는 소통이 미덕이 아니라 거추장스러운 방해물이 될 뿐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강준만은 불통의 원인으로 이념적 극단주의, 서열주의, 중앙집권주의, 지도자 추종주의, 각개약진 등을 지목했다. 모든 것이 극단적으로 이분화・위계화된 사회에서 소통을 한다는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p169 다른 한편 소통은 ‘차이’에 기반을 두지 않으면 발생하지 않는다. 부처님이 중생에게 설법하시다 꽃을 들어 보였다. 이를 보고 제자 가섭이 빙긋이 웃었다는 데서 유래하는 염화시중의 미소처럼, 말하지 않고서도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다면 우리는 결코 소통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소통은 ‘공통의 것’과 ‘차이’, 두 가지 모두에 기반을 두어야 하는데, 이는 곧 둘 사이에서의 줄타기가 되는 셈이다. 따라서 소통이란 서로의 차이 안에서 공통의 것을 끊임없이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공통의 것이 없어도 소통은 일어나지 않으며, 차이가 없어도 소통은 일어나지 않는다.


p177~178 우리가 근래 들어 더더욱 ‘말’을 신뢰하지 않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과거에는 말이 곧 폭력이었기 때문에 공포의 대상이었다면, 이제 말은 ‘사기’에 불과하다. 이전에는 말의 뜻을 새길 필요가 없었다면, 이제는 그것의 의도와 배후를 의심해야 한다. 또한 이전에는 권력자들이 우리로 하여금 말을 못하게 했다면, 이제는 그들이 우리의 말을 못 들은 척 묵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전에는 말을 못하게 하는 것이 가장 못 참는 일이었다면, 지금은 우리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 가장 못 견디는 일이 되었다. 그리하여 ‘소통에 대한 요구’는 자연스럽게 말에 대한 요구가 아니라 존재에 대한 요구로 치환되었다. 소통은 권력・씨스템 바깥의 사람들이 그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휘두를 수 있는 유일한 ‘자해적’ 권력의 도구가 되었다.


p179~180 많은 이들이 불편해하고 짜증스러워 하지만 “네네, 고객님이라는 말은 결국 우리가 듣고 싶은 말 아닐까. 흔히 쓰이는 ‘힘없는 소비자’라는 말에 어쩌면 소통 붕괴의 답이 있을 것이다. 무력한 정치적 주체로서의 말과 무한대의 짜증을 부릴 수 있는 왕(소비자)의 말 사이의 분열과 간극에서 좀처럼 공론장이 열릴 틈은 없다.

    ‘힘없는 소비자’에게 공론장이 열리지 않는 이유는 공론장이 지닌 근본적 특성 때문이다. 앞서 바우만을 인용하여 공론장이란 사회문제를 다루는 장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근심과 걱정을 공적 이슈로 전환하고 이를 새로운 언어로 해석하는 장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적인 근심걱정이 공적인 이야기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 즉, 의견이 의견이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고유함을 지녀야 한다. 따라서 공공적 공간이란 서로의 고유함이 담긴 이견들까지 부딪치는 논쟁과 토론의 공간이다.

 

p187~188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에서 보편성을 발견하려 하기보다는 개별적인 상담만을 추구한다. 사적인 것을 공적인 것으로 전환하는 것이 아니라 사적인 것을 사적인 것으로 남겨놓은 채 개별적인 해결책만을 바란다. 그렇다면 이 ‘힐링과다’ 시대에 멘토란 뭘 하는 사람들일까. 그들은 개별적인 경험을 보편적인 것으로 이끌어내는 안내자가 아니라 어쩌면 개별적인 맞춤형 상담사에 불과한 것 아닐까.


3장 노동: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라


p196 경제학에서는 노동을 대단히 소극적으로 다룬다. 대신 경제는 생산과 소비로만 이루어진 세계로 묘사한다. 노동자는 없고 소비자만 등장한다. 노동은 “소득과 여가라는 두 마리 토끼 사이에서 최적의 균형을 찾아내는 노동 공급자의 선택 과정의 부산물 또는 잔여항”으로만 취급된다. 그 결과 노동자는 생산에서 필수적인 존재가 아니라 부수적인 것으로 취급되고 학교 교과서도 이에 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우리의 교과서들은 노동자가 될 학생들에게 “노동의 권리에 관해, 노동강도에 관해, 노동과 자본의 대립에 관해, 결국 노동 그 자체에 관해” 거의 아무 말도 안 하고 침묵한다. 그러다 보니 노동을 그저 돈 버는 수단 정도로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대부분 노동에 대해 모르거나, 혹은 알바나 인턴을 하면서 몸을 때우며 배우게 되는 것이다.


p190~191 한국의 학교는 노동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았지만 노동자를 만들기 위한 충실한 훈육기관이기도 했다. 이들이 훈육하는 것은 ‘몸’이었다. 대량생산・대량소비 체제에 걸맞은 몸을 만드는 것이 학교의 가장 큰 기능이었다. 어떤 몸인가. 바로 “지루함을 견디는 몸”이다. 류동민을 전기 자본주의 혹은 산업화 자본주의 시대의 경제모델에서 필요로 한 노동자의 능력과 덕목은 지루함을 견디는 힘이라고 말한다. “공장이나 회사의 규격화된 노동에 적응을 잘 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했고 이에 따라 “하나의 거대한 씨스템이 되어 지루함을 잘 참을 수 있도록 길들여진 노동력”을 만드는 곳이 학교였다는 말이다. 학교에서 「관동별곡」을 외우게 하고 그 암기를 기준으로 성적을 매긴 것도 지루함을 견디는 힘을 측정하는 것이었을지 모른다고 류동민은 농담한다.


p202 유효수요관리를 통해 투자가 끊임없이 일어나게 하여 실업을 없애고 성장을 도모하고자 했다. 이것이 곧 케인즈주의다. 이 케인즈주의를 토대로 세워진 복지국가에 따라 노도은 완전히 체제에 포섭되고 노동 영역에서의 불만은 임금의 문제만으로 국한되었다. 이에 사람들의 관심과 욕망, 정체성이 형성되는 공간은 소비로 넘아갔으며 사회적 갈등은 제도화되는 듯 보였다.


p203~204 '프랑스 68혁명의 교과서‘라고 불리는 라울 바네겜의 ��일상생활의 혁명��을 토대로 이를 다시 살펴보자. 68혁명이 일어나기 1년 전에 쓰인 이 책에서 그는 “일생생활을 지배하던 권태와 그 원인을 고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비주의의 확산과 사회이 스펙터클화에 따라 세상이 안온한 무덤이 되어가는 것 같던 1960년대 후반에, 오히려 ’삶에 대한 열정‘과 소비에 대한 욕망이 이를 완전히 대체하고 박탈된 자유에 대한 불만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으며 ’삶의 열정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더 증가했다. 그리하여 터져나온 68혁명 당시의 언어는 “착취자에게 죽음을!”이 아니라 “무엇보다 우선 삶을!”이다. 이것이야말로 68혁명이 무엇을 지향했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이들은 생존이 아니라 삶을 위하여 ’사회 밖으로!‘를 외쳤다.


p205~206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역시 스펙터클로 전환했다. 사회는 권위주의에서 시장의 유혹으로, 저축에서 낭비로, 청교도주의에서 쾌락으로, 땅과 인간을 볼모로 만드는 착취에서 환경의 영리적 재구성으로 그 모토를 탈바꿈해냈다. 무엇보다 사람에 대한 관점이 바뀌었다. 자본은 이제 사람과 사람의 창조력이 저 중요한 자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68혁명 이후의 자본주의는 ‘개인보다 소중한 자본’에서 ‘가장 소중한 자본으로서의 인간’으로 서둘러 넘어갔다. (동시에 인간은 가장 쓸모없는 쓰레기가 되었다. 왜냐하면 사장 소중한 자본이 되지 못하는 인간은 쓰레기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더 많은 자유’와 ‘더 많은 상상력’이라는 68혁명의 구호가 자본주의의 구세주가 된 셈이다.


p206 68혁명 이후 1970년대의 혼란기를 거쳐 신자유주의시대로 접어들면서 서구에서는 들뢰즈가 통제사회라고 통제사회라고 부르는 사회가 출현했다. 이 사회는 자유의 박탈이라는 감금을 통해 움직이는 사회가 아니다. 이 사회는 사회 전체를 감옥으로, 학교로, 병원으로 개방한다. 감금하여 조사하고 훈련하던 그 판옵티콘의 시선이 도처에 자리한다. 모두가 평생교육이라는 이름으로 24시간 노동체제에서 살아가는 사회가 되었다. 이 통제사회에서 인간의 자유는 자기 관리문제로 전환된다. 이 자기관리에 성공하지 못한 자들에게 남는 것은 영원한 탈락이다.


4장 국가폭력: 껍데기까지 발가벗겨라


p216 바우만에 따르면 근대 자본주의는 언제나 본질적으로 잉여인간을 생산하고 관리한다. 특히 노동의 기계화・전자화와 맞물린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완성은 잉여인간을 단순히 일시적인 잉여인간이 아닌 영원히 쓸모없는 쓰레기로 전락시킨다. 이들은 생산과 소비의 영역 모두에서 경제적으로 아무런 효용가치를 갖지 못한다. 모두가 자신이 잉여인간이 될지 모른다는 탈락의 공포에 시달리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파업에 대한 댓가로 해고된 노동자가 느낄 추방에 대한 공포는 상상을 초월한다.


p217 격리는 국가가 그 사회에 존재하는 모순과 적대를 법의 이름으로 은폐하고 제거하는 고전적인 방법이다. 국가는 어떤 부류의 사람들을 질서를 위협하는 ‘무질서’ 유발자로 여기고 이들은 사회로부터 도려내어 격리했을 때 질서가 지켜지고 안전을 도모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파업에 대한 탄압에서부터 부랑자에 대한 처벌까지를 아우르는 논리가 바로 이 ‘질서’와 ‘무질서’의 대립이다. 이러한 논리는 대개의 시민들로 하여금 무질서가 사회 전체를 무너뜨릴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갖게 한다. 이런 공포를 시민들이 내면화하게 되면 ‘질서’라는 이름으로 ‘무질서’를 처벌하는 것에 대한 광범위한 합의가 형성된다.


p218 형벌제도는 위법 행위를 근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차이에 다라 나누고 관리하기 위한 장치로 발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한 개인의 의지 탓이 아니었다. 푸꼬는 이러한 “범죄”들이 “어느 특정한 사회계급이 거의 배타적으로 자행하는 행위”였다고 말한다. 이에 따라 범죄에 대한 재판과 처벌이란 “사회 전체가 사회 구성원들 가운데 한 사람을 재판하는 것이 아니라 질서를 담당하는 하나의 사회적 부류가 무질서에 빠져 있는 어떤 사회적 부류를 제재하는 것”으로 재해석된다. 범죄에 대한 처벌은 범죄를 저지른 한 개인이 아니라 무질서에 빠져 있다고 규정된 어떤 ‘부류’에 대한 집단적인 처벌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p219 일제시대부터 ‘부랑자’에 대한 탄압이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그들에 대한 추방과 격리를 제도화한 것은 박정희정권 때였다. 박정희 정권의 ‘근대화’는 단지 산업화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국민들의 생활을 ‘근대적’으로 뜯어고치고 그에 부적합한 사람들을 사회악으로 간주하여 갱생을 명목으로 가혹하게 격리했다. 이에 따라 가출청소년, 걸인, 노숙인, 나아가 전/반근대적인 미신을 퍼트린다는 이유로 무속인까지 탄압의 대상으로 삼았다.


p222 내부의 적으로 지목된 사람들이 아닌 내부의 사람, ‘여기’의 사람을 추방하기 위해 통치권력이 선택하는 이데올로기 전술은 바로 ‘고립’이다. 통치권력은 그들의 투쟁과 저항의 정당성과 불가피성은 일정할지언정 그 ‘순수성’이 외부에 의해 오염괴었는 주장은 굽히지 않는다. 이를 통해 정치권력이 노리는 것은 내부와 외부의 단절이며, 그로 인한 내부의 ‘고립’이다. 앞서 부랑자 같은 내부의 적이 사회안전을 위해 추방되어야 하는 존재라면, 이들은 내부에서 고립되어 서서히 고사되어야 할 존재들이다. 국가는 그들이 아니라 그들의 말을 들으러 오는 사람들을 불순한 존재로 지목하여 아무도 그들의 고통에 대해 듣지 못하게 하고, 주민들이 자신의 고토에 대해 아무에게도 호소하지 못하게 한다.


p224 아이와 옹에 따르면 “미국의 시민권은 영토화”되는 반면에 “중산층의 직업은 탈영토화”되고 있다. 시민권의 국가주의화・민족주의화는 점점 더 심해지는 반면 아이러니하게도 중산층들이 이를 통해 지키고자 하는 일자리는 아웃소싱이나 공장의 재배치를 통해 탈영토화된다. 결국 ‘경제’가 탈규제화하여 벌어지는 일자리의 위기를 이주노동자들의 탓으로 돌리면서 인종차별주의가 득세하는 것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 종교근본주의와 연합하여 사회적 불만을 페미니스트들과 성소주자들의 평등한 주장에 대한 공격으로 뒤바꾸는 데 성공했다. 가족이야말로 가장 숭고한 가치인데 이것을 페미니즘과 성수주자 운동이 파괴하고 있다고 공격했으며 이것이 보수층을 결집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p225 대의민주주의는 ‘노동귀족’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 세력의 야합으로, 또한 좌파는 이도저도 제대로 선택을 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는 세력으로 각각 비판받았다. 결국 대중들 사이에서 국익을 중시하는 새로운 질서가 출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노동자든 부랑자든 국익이라는 질서에 반하는 자들은 모두 사회의 적으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p229 도덕적 공황이 정치적 해결이 아니라 사법적 해결로 이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이 타자들의 한결같은 목적이 내부로부터 국가를 전복하는 것이므로, 국가가 ‘문제를 바로잡도록’ 아주 폭넓은 권한을 이양해야만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제3부 고통에 대면하기, 사회에 저항하기


1장 성장은 가능한가


p236 '점검하는 삶'은 멈추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점검하는 삶에서 ‘멈춘다’는 것은 곧 주저함을 의미한다.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이다. ‘안다’라는 확신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소크라테스가 했던 것처럼 자신이 모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에 대한 진정한 배려다.


p236~237 점검하는 삶은 자신의 확신을 괄호로 묶고 타인의 말을 경청하는 삶이다. 배움에 주저함이 없는 삶, 배움을 위해 타자와의 만남에 주저함이 없는 삶이 바로 이 ‘점검하는 삶’이다.


p237 초조함은 이런 점검하는 삶을 불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이 때의 초조함이란 개인의 감정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이 초조함이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체제에 의해 체계적으로 생산・관리되는 통치의 효과라고 할 수 있다. 즉 앞에서 말한 ‘탈락에 대한 공포’와 맞닿아 있다. 다만 무엇보다 초조함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처럼 자신의 삶을 총체적 점검에서 초조함을 대체한 것이 '관리'다. 내 삶 그 자체에 대해서는 돌아보지 않는 대신 이미 설정된 목표와 방향 내에서 제대로 과업이 수행되는지 아닌지를 감시・관리하는 일만이 남게 된다. 이 자기 감시와 관리의 기술이 발달하고 이에 충실할수록 정해진 트랙 바깥으로 내려오거나 트랙의 바깥을 상상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거시 통치의 전략이다.


p237 통치는 개인이 이 초조함을 개인적인 감정상태로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초조함의 원인으로 자신의 부족을 탓하게끔 조장한다.


p239 초조함이 지배적인 감정상태가 된 사회에서 개인들은 자신을 멈추게 하는 다름/차이와 철저히 차단하려 한다. 이런 사회의 특징은 한마디로 ‘이질공포증’이다. 이질공포증 사회에서는 외부의 낯설고 모르는 것의 침입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공동체에 활기를 불러 넣을 수 있는 문제제기도 귀찮아한다. 이런 문제제기는 생동적이고 활기는 있지만 동요를 일으키기도 한다. 이질공포증은 이런 “귀찮은 상호작요에서도 물러나 틀어박히겠다”라는 것이다. 그 결과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다르고 낯선 외래의 ‘타자’를 멀찍이 거리 두려는 노력, 소통하고 조정하고 상호간 충실할 필요를 사전에 없애는 결정”이 사회를 지배한다.

    이질공포증의 사회에서는 나와 같지 않은 것에 대해 불온하다고 생각하며 그것이 자신들이 기껏 구축한 질서를 무너뜨리지 않을까 경계하고 그 차이를 추방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한다.


2장 무엇이 우정을 가로막는가


p258 멘붕은 개인의 심리가 붕괴된 것을 일컫지만 실제로 붕괴된 것은 사회 전체다. 멘붕을 개인적 차원이 아닌 사회적 기준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우만의 저술들은 사회적 차원에서 붕괴가 연이어지고 삶의 예측가능성이 현저히 떨어져버린 상홍을 잘 보여준다. 그는 서구 복지국가의 사례를 들어 근대의 국가가 하는 일이 잉여・배제・폐기 같은 삶의 불확실성에 맞서 시민들을 보로하고 삶의 안정성을 높이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근대 국가의 야심은 노동의 안정성을 확보함으로써 미래를 더욱 확실하게 하고 삶을 기획 가능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국가의 가장 큰 역할은 시민이 아니라 시장을 보호하는 것으로 탈바꿈했다. 잉여를 시민을 위해 재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도 잉여로 만드는 것이 국가의 일이 되었다. 근대 시민의 삶을 받쳐주던 씨스템 전반이 붕괴한 것이다.


3장 경청이란 무엇인가


p279 말 걸기와 경청을 통해 비로소 남은 ‘너’가 된다. 그의 고통에 찬 얼굴을 보고 고통이 벤 목소리를 들을 때 우리는 그를 외면할 수 없다. 나와 남 사이에는 ‘거리’만 있지만 나와 너 사이에는 ‘관계’가 있다.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나는 너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고 다시 안녕을 서로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레비나스가 말한 것처럼 고통받는 얼굴을 대면할 때 우리는 응답하지 않을 수 없다. 외면할 수 없게 된 목소리, 배제할 수 없게 된 얼굴로 떠오른 남, 그 남이 ‘너’가 아닌가. 이렇게 남이 ‘너’가 될 때 이 ‘너’는 다른 무엇으로도 환원되지 않고 대체되지 않는다. 환원되지 않는 존재, 대체되지 않는 관계. 이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대체가능하게 마드는 ‘수의 정치’에 맞서는 일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말 걸기와 경청은 사회적 배제와 맞서는 정치적 행위다. 고통에 귀 기울이고 말을 거는 행위인 경청은 배제의 정치, 수의 정치에 맞서는 삶의 정치가 된다.



3. ‘내가 저자라면’


■ ‘’의 목차 및 전체적 뼈대

책을 펴내며

 

프롤로그 누구의, 어떤 관계의 단절인가

 

제1부 악몽이 된 곁, 말 걸지 않는 사회

 1장 정치공동체의 파괴: 폭로하고 매장한다

 2장 단속사회의 출현: 타자와 차단하고 표정까지 감춘다

 3장 기획된 친밀성: 철저히 감시하고 매끄럽게 관리한다

 4장 사생활의 종언: 고독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제2부 쓸모없어진 곁, 몽상이 된 사회

 1장 관계: 질문하면 ‘죽는다’

 2장 소통: 위로를 구매하라

 3장 노동: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라

 4장 국가폭력: 껍데기까지 발가벗겨라

 

제3부 고통에 대면하기, 사회에 저항하기

 1장 성장은 가능한가

 2장 무엇이 우정을 가로막는가

 3장 경청이란 무엇인가

 

에필로그 누구에게 말을 걸 것인가

주석

 

  

 한국 사회의 관계 단절, 소통의 불가능이 어떤 양상으로 흐르는지를 파악했다. 우리가 언제 누구와 접속하며 또 언제 누구와는 단절하는지를 파악하면서 소통을 하되 소통을 하고 있지 않은 현 세태에 대해 분석하였다. 저자는 자신의 주변에서나 현장연구를 통해 만나온 사람들이 좀처럼 자신의 속내를 내보이지 않는 모습에 보면서 이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고 사례들을 수집하여 자신의 학위 논문의 주제로 삼았고 10연 년 동안 사례를 수집하여 이 책을 냈다. 아파트 등 중산층 밀집지역, 노동조합 등 시민사회 등의 현장 연구가 생생한 이 책의 는낌을 살린다.

 먼저 ‘단속’이란 단어를 통해 사람들의 관계맺음의 양상을 설명한다. 단속은 자신과 다른 의견이나 타인의 고통같이 이질적인 것의 침입을 철저히 차단하면서, 동질적인 것이나 취미공동체에는 과도하게 접속하고 의존하는 사회현상을 개념화한 말이다. 즉, 차단하고[斷] 접속한다[續]는 의미의 결합이다. 아울러 타인과의 진실한 만남이나 부딪침을 피하기 위해 거리를 두고 자기를 단속(團束)한다는 의미도 지닌다.

  한국사회는 시민 대다수가 자기가 속한 가족, 직장 내에서 소통이 매끄럽지 않음을 호소하는 한편 정작 그 불통의 당사자와는 일대일로 직접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불통 그 자체의 공간이다. 그러면서 그 스트레스를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이 모인 또다른 힐링의 공간에서 해소하려 한다. 그러다 보니 현실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누적되며, 현실로 돌아온 사람들은 다시 피로와 무력감에 휩싸이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이처럼 자신과 다른 남의 생각을 도무지 인정하지 못하고 소통에 무력하며 자신과 친밀한 ‘취향의 공동체’에만 기대는 것이 단속사회의 대표적 현상이라고 말한다.


■ 감동적이었던 장절

  

 익숙한 우리 사회의 모습을 글로 표현된 것을 보니 마음을 콕 집어낸 것 같다. sns에 집착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표면적으로가 아니라 통찰한 이 글은 날카로운데 부드러운 느낌이다.


■ 보완점


   저자는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를 ‘단속’으로 정하고 10여년간의 현장연구를 정리하여 2013년 「‘단절-단속’ 개념을 통해 본 ‘교육적’ 관계의 (불)가능성에 대한 연구」로 문화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의 핵심 키워드를 토대로 한국사회 전반의 사례들을 새롭게 엮어낸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사회학적인 주제를 인문학적인 특성이 돋보이는 글쓰기와 어우러졌다. 저자의 혜안과 유려한 글쓰기에 감탄하며 읽게 된다. 물론 오랜 시간의 연구와 관찰이 이 글의 맛을 더하였을 것이다. 생생한 현장의 사례들을 통해 저자가 분석하고 지적하는 문제들에 공감하며 또한 그가 제시하는 대안에 수긍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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