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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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니 ‘새엄마’>
그 남자
퇴근 후에 집에 가서 제일 먼저 아내와 아이의 얼굴을 살폈습니다. 지난 밤 꿈자리가 뒤숭숭했기 때문입니다. 하루 종일 마음이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몇 번의 문자를 보냈지만 별 일 없는 듯 했습니다. 얼굴을 보니 다행히 맑음입니다. 그제야 마음이 놓였습니다. 아내는 놀라울 정도로 아이와 코드를 잘 맞춰갑니다. 아들 또한 잘 따라주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결혼을 하면서 둘의 사이가 가장 큰 걱정거리였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여전히 잘 웃으니 좋습니다. 처음 아내가 맘에 들은 것도 웃는 모습이었습니다. 박꽃처럼 환한 미소가 보는 사람을 무장해제 시키는 재주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아들한테도 통한 모양입니다. 내일도 오늘 같기를 잠자리에 들면서 또 빌었습니다.
그 여자
대부분의 여성들이 겪게 되는 ‘출산’이지만 저에게는 동경이었고, 가슴앓이였고, 이루지 못한 소망이었고 그리고 본능을 거스르는 고통이었습니다. 원치 않는 불임은 여자에게 내릴 수 있는 가장 가혹한 형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창살 없는 감옥에서 받고 있는 형벌을 남편을 만나면서 면제받았습니다. 남편 덕에 아들이 생겼습니다. 중학교 1학년을 거의 다 지낸 겨울이었습니다. 누구나 두려워하는 ‘중2병’을 목전에 둔 나이였습니다. 하지만 상관없었습니다. 여자로서 40년 동안 기다리고 갈망해왔던 ‘엄마’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과 통하는 비밀의 열쇠를 예전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언제부턴가 친구들을 만나면 늘 대화의 중심에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입은 닫고 귀만 열어놓았습니다. 불편한 내색을 하면 행여나 친구들이 언짢을 까봐 같이 웃으며 맞장구를 쳤습니다. 친구들은 말했습니다. ‘아이가 없는데도 너랑 이야기하는 것이 편해’라고. 그러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이 선행되어야 했는지 아마 친구들은 모를 것입니다. 비어버린 한쪽 가슴을 들키지 않기 위해 무던히 표정관리를 했다는 것을. 모임을 파하고 집으로 돌아갈 때 나의 초라함을 달래주려 한 노력들을. 그것은 프랑스에 다녀 온 적이 없으면서도 그 여행 모임에 나가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비슷할 것입니다. 왜 그렇게까지 했냐고 묻는 다면, 왜냐하면 아이도 없는데 친구까지 없어질까 봐서요. 그런데 이제는 같이 대화에 동참할 수 있어 더 없이 기쁩니다.
처음 아이와 전화 통화를 하게 된 날, 전화를 끊고는 숨죽여 울었습니다. 밝고 당돌한 목소리, 그리고 시작된 우리의 인연은 생각지도 못한 감정들을 안겨주었습니다. 운명은 말문을 닫고 수용하게 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토를 달 이유도, 겨를도 없이 서로를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적어도 겉으로는 편안해 보였습니다. 재혼 가정의 특징 중에 하나는 자녀가 결혼 전에 결정된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엄마라는 자리 또한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다 얻은 것이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불려 진다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기다렸지만 엄마가 되는 일도 처음에는 생각보다 난감했습니다. 이제까지 같이한 추억과 역사가 없기에 공감대를 찾는 것이 힘이 들었습니다. 갑자기 나타난 큰 아들의 코드를 찾는 일은 미로처럼 어지럽고 안개 속에서 헤매는 것 같았습니다. 그 동안 아이의 마음을 여는 열쇠가 녹이 슬었나? 불안한 마음이 앞장 섰습니다. ‘진심 어린 말과 행동만 하자. 형식을 내세우거나 가식을 앞세우지 말자. 그리고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말자.’ 나름의 룰을 정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습니다.
남편과 아이의 예전 모습이 궁금했습니다. 사랑은 그 사람의 옛날 모습도 알고 싶게 만드는 법이니까요. ‘같이 하지 못한 과거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기대와 함께 앨범을 찾았습니다. 거실에 있는 장식장의 서랍문을 열자 앨범이 바로 보였습니다. 그것을 두 손에 들고 한장한장 넘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앨범 곳곳에 존재하는 뜻 밖의 얼굴. 남편 옆에 서 있는 한 여인. 아이와 같이 있는 그 여인. 당혹감에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습니다. 왜 그런지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습니다. 마치 나쁜 짓을 몰래 하다가 걸린 것처럼. 그래도 손에서 놓아지지 않는 앨범.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는 나의 시선. 남편의 이야기 속에 존재하던 원망과 상처의 주인공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재혼은 이혼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혼은 결혼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초등학생도 뻔히 아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알고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때, 말로만 듣던 존재를 확인하게 될 때, 엇나간 질투와 삐딱한 호기심은 가슴 한 복판에 강한 펀치를 날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정 연구학자들이 말하는 ‘유령’의 모습이고 위력이었습니다. 같이 살지 않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따라다니며 힘을 발휘하는 유령 말입니다.
순간 화가 났습니다. ‘전 사람의 사진을 치워주는 배려는 기본적인 것 아닌가?’ 하지만 곧 깨달았습니다. 사진 속의 여자는 남편의 배우자이기도 했지만 아이의 엄마라는 것을요. 사진은 역사입니다. 아이의 역사 속에 엄마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아이의 백일, 아이의 돌, 그리고 가족 나들이. 남편과 단 둘이 찍은 사진이 없는 것을 보니 이미 한 번은 정리를 한 듯합니다. 누군가의 엄마가 된다는 것은 그 이전의 역사를 모두 수용하고 인정해야 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저 같은 새엄마들의 숙명입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새엄마’ 였네요.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는 기쁨은 그 자리가 새엄마라는 것을 빠른 시간 안에 알게 해주었습니다.
한 남자와의 사랑을 선택한 자리에는 아내 말고도 ‘새엄마’의 자리가 있었습니다. 배가 아프지 않은 대신에 큰 아들을 얻은 대가로 ‘새엄마’. 라는 이름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말로만 듣던 유령의 실체를 보고 새엄마라는 나의 자리를 확인하게 된 하루였습니다. 이런 복잡한 마음을 남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애써 활짝 웃었습니다. 그 동안 숱하게 해왔을 마음 고생에서 편안해 진지 얼마 되지 않은 남편이 안쓰러웠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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