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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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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9일 11시 59분 등록


클리셰,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 널 위한 소리

내 말 듣지 않는 너에게는 뻔한 잔소리

그만하자 그만하자

사랑하기만 해도 시간 없는데


머리 아닌 가슴으로 하는 이야기

니가 싫다 해도 안 할 수가 없는 이야기

그만하자 그만하자

너의 잔소리만 들려


- 아이유, 노래 가사 <잔소리> 中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이에게서 듣는 잔소리는 달콤할까. 개별적이긴 하지만 대다수가 ‘아니’라고 도리질 할 것이다. 왜냐고? 잔소리는 잔소리니까. 몰라서 안하는 것이 아닌데도 들어야 하는 뻔한 이야기가 잔소리다. 궁극의 짜증을 향해 달리는 소리다.

 클리셰(cliche)는 잔소리와 같다. 듣다 보면 짜증나는 잔소리처럼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진부한 표현을 의미한다. 인쇄술에 쓰이는 연판이 어원이듯 판에 박힌 듯한, 무수히 반복되어 영화나 소설 속에서 일종의 규칙이 되어버린 것들이다. 물론 이것이 영화, 드라마에서만 사용되지 않는 걸 안다. 우리의 눈과 귀는 클리셰의 언어를 정치판에서 생생하게 전달받는다. 사랑하는 이에게서 받는 잔소리도 짜증날 판에 정치권의 소리라면 더 말해 무엇하랴.

 근데 가만, 이 잔소리는 누가 누구에게 하고 있는 건가. 정치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자, 정책을 만들어 내는 일이다. 그 역할을 투표를 통해 정당하게 부여받은 이들이 잘하고 있는지를, 국민이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잘해라’ ‘이런 문제를 해결해 달라’ ‘그렇게 하면 안된다’ ‘좀 도덕적으로 살아’라고 매번 똑같은 소리를 하게 되기는 하지만 말이다. 물론, 요즘은 이런 잔소리도 함부로(?) 할 수 없다. 워낙 통로도 좁은데다가 그나마 할 수 있는 인터넷을 통해 했다가 발각이 되면, 그저 잔소리라서 바로 아웃당하는 일이 넘쳐난다. 

 국민들의 소리가 아웃되기까지 정치권은 끊임없는 잔소리, 클리셰를 양산한다. 불행히도 클리셰가 가지는 속성은 그것이 식상하고 반복적임에도 그래서 잊히지 않는다는데 있다. 매번 비슷한 상황에서 똑같은 클리셰가 나올 것을 예상하면서도 잔뜩 찡그려 클리셰를 째려보려하다가도 어느새 흡수되고 만다. 이쯤되면 농약같은 클리셰다. 어쩌면 드라마의 재미는 상상할 수 없는 장면에서 느끼는 신선함과 반대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척척 알아맞히는 데 더 있는 것이 아닐까. 막장 드라마에 끌리는 심정, 무언가를 훤히 꿰뚫고 있다는 데서 느껴지는, 마치 자신이 그 방향을 이끌고 있는 듯한 통제에 대한 환상 아닐까.

 우리가 드라마를 통해 통제의 환상(Illusion of control)을 상상 경험한다면 정치권력은 클리셰를 통해 통제의 환상을 실현해 낸다. 정치에서 가장 흔한 클리셰는 북한과 연계된다. 북풍, 그것은 늘 타이밍을 잘 맞춰 등장하곤 한다. 그리하여 이전에는 ‘빨갱이’였던 것이 이제는 ‘종북’으로 단어만 달리한 채 바뀌어 등장했고 더불어 NLL이며 무인기며 간첩사건 들을 양산한다. 끝도 없이 복제된다. 생산력 으뜸이다. 

 정부의 이러한 북풍 공작이 얼마나 우리 뇌리에 박혔는지 이제는 민간에서 행하는 북풍에도 쉬이 맘이 동하는 현상까지 발생한다. 2014년 말, 갑자기 사라진 수많은 사람들이 발생했는데 그들은 미국에서 신학학위를 받았다는 한 전도사가 전하는 전쟁예언에 대한 두려움으로 한국을 떠난 것이다. 전도사는 2014년 12월 14일이 북한이 땅굴을 통해 남침할 것이라 예언하며 전쟁의 사전 증거들로 무수한 땅굴과 각종 사고들을 언급했다. 한발 더 나가 ‘북한군이 전쟁을 일으키면 어린이들을 인육으로 잡아먹고 여성들을 제2의 정신대로 만들 것이다’라는 믿는 것이 더 이상한 경고를 날렸다. 그럼에도 수십명의 사람이 이를 믿고 해외로 도피하였다는 사실은 정부의 ‘북풍’이라는 클리셰가 그동안에도 얼마나 잘 ‘먹혔는지’, 아주 효과적인 국민의 통제 수단으로 작용했는지 알 수 있다.

 정치권의 클리셰는 정부가 감추고 싶은 일들을 가리는데 활용되었다. 정치적 클리셰와 궤변은 사람들이 믿으라고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암묵적으로 합의된 핑계 역할을 하는 것1)이기 때문이다. 지금 정치권은 효과적인 ‘종북’ 클리셰를 성공, 일단 저장해두고 다시 일상의 클리셰를 꺼내들고 있다.

  그것이 다름 아닌 변화, 변신의 클리셰다. 우리는 이 아리송한 클리셰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상의 클리셰에 길들여질 때 놓치기 쉬운 것은 삶에 관한 것이다. 강유정은 상투어에 지나치게 길들 때 예민한 감성을 잃게 될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일상의 밑바닥을 흐르는 더 큰 삶에 대한 감각을 잊지 않고 상투어를 사용하되 지배받지 않는 것은 진부한 일상 속에서 ‘나’를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한 일1)이라고 말한다. 변화, 변신의 클리셰가 오래도록 화두로 자리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의 감성을 점점 잃어가고 있지 않은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변화를 쫓으며 무엇을 위해 변화, 변신하는지 모른 채 팔색조의 매력이니 변신은 무죄이니 변화해야 살아남는다는 말들 속에 지배당하고 있다. 변화가 변신이 매력이라는 점이 어필하는 것은 무엇일까. 변신속에 감추어둔 클리셰는 무엇일까.

 우선 말할 수 있는 것은 변신의 귀재 카멜레온의 클리셰를 통해 우리가 감성을 잃고 있다는 것, 지배받고 있다는 것이다.




1) 밀란 쿤데라, 우스운 사람들, 민음사, 2013.

2) 강유정, 클리셰, 한경에세이, 2014.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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