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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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 행복의 맥거핀(MacGuffin)
어느 날 마음에 걸리는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잠자는
자신이 한 마리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
- 카프카, 변신 中 -
변신 첫 구절은 오래도록 나를 따라다녔다. 어느 날 흉측한 벌레로 변해있는 것은 아닐까, 잠을 설쳤고 잠에서 깨어나 팔다리를 더듬기도 했다. 그래서 ‘변신’이란 거부, 반사를 외치고 싶은 단어이다. 그렇기에 사회에서 재촉하는 변화나 변신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을지 모른다.
동화든 만화든 영화든 변신의 요정들이 출몰해도 마찬가지였다. 마법의 주문을 기다리는 동안의 끔찍함이 더욱 무서웠다. 변신하여 공주가 되기보다 벌레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컸다. 중요한 점은 내가 변신능력의 주체라면 벌레가 될 리 없다는 것이다. 무엇이든 내가 되고자 하는 것으로 뽀로롱 변하면 될 터였다. 벌레로의 변신은 내 의지가 아니라는 점에 있다. 카프카의 변신에서처럼 아무런 이유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다. 징후를 알면 공포가 더욱 감해지려나 싶기도 하지만 서서히 다가오는 공포, 이유를 모르는 공포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은 늘 쇼크 상태에 있는 것과 같다.
변신의 필요성은 현재 나의 상태의 불충분함에서 출발한다. 어딘가 닿으려는데, 무언가를 얻으려는데 못 미칠 때 더욱 인식하게 된다. 내가 느끼는 불충분함은 위장과 가장과 변장뿐만 아니라 환골탈태까지 요구된다. 말 그대로 ‘화장을 통한 놀라운 변신술’의 변장이 아니라 뼈를 깎는 성형이 성행하는지도 모른다. 현대는 이것이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남성에게도 성형의 유혹과 압력이 일어나고 있다. 살과 뼈를 깎고 다듬어 만들어내는 변신의 노력은 개인의 ‘개성’을 강조하고 ‘나 자신’을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같은 외모의 얼굴을 가진 공장형 인형들을 생산해내고 있다. 점심시간을 통한 ‘고속 성형’이 등장하듯 성형은 마치 기계로 찍어내는 느낌이고 ‘쉽고 간편한’ 패스트푸드를 연상시킨다. 수능시험을 마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단체 쁘띠 성형을 보면 마치 그것이 인간이 성장하는 동안 밟아야 할 당연한 수순인 양 이뤄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성형 부작용으로 인한 폐해가, 심지어 사망 기사가 도배를 하기도 한다.
이토록 우리나라가 성형공화국이 되는 것은 외모를 바라보는 과한 시선의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러한 풍토에 얹어져 성형 중심의 의료산업이 활성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외모를 통한 외적인 변신이 내적인 변화를 돕는다고 성형의 이유를 말하기도 한다. 콤플렉스였던 것을 수정하고, 좀 더 예뻐짐으로써 자신감이 생긴다고 말이다. 그렇게 외적인 변화를 통해 자신감을 형성하게 되는 것, 남들의 눈을 통해 내 외모를 바라보는 것, 보다 예쁜 외모에 대한 열망, 이것이 외모를 중시하는 우리사회의 모습이고 결과이다. 뼈를 깎는 고통까지 감수해야 하는 외모의 변화가 필요로 된다면 다른 변화는 더 말해 무엇하랴. 하긴, 차라리 뼈를 깎는 고통이 더 손쉬운 변화일지도 모른다. ‘돈’이 있으면 되고 ‘아픔(마취는 통증을 느끼지 않게 해주고)’은 참으면 된다. 이 두 가지를 극복할 의지만 있다면 (실패 사례가 종종 언급되긴 하지만) 어쨌든 ‘쌍꺼풀 생김’, ‘유방 확대’, ‘V라인’, ‘S라인‘ 등의 ’예뻐짐’(물론, 예뻐졌다 아니다는 주관적 판단의 결과이다), ‘교정’ 등의 결과를 만들어 준다.
이토록 뚜렷하게 변화가 필요하다고 외치는 사회 분위기는 조금 공포스럽지 않은가. 너도 나도 변화 중이고 변신 중인데, 그들의 변화와 변신의 종착역은 어디일까. 과연 끝은 있을까. 무엇을 위해 변신, 변화해야 한다고 조급한 마음으로 허덕이고 있는 것일까. 지금 이 시간에도 계속하고 있는 변신을 위한 노력의 결과는 무엇인가. 사회가 요구하는 변화에 맞추어 쉴새없이 변화해 온 이들은 진정 ‘변화’가 된 것일까. 변화의 방식은, 스스로의 의지에 의한 것일까. 그 방식조차도 기획된 것일까. 구직과 실업 상황에 처한 이십대는 끊임없는 스펙1)쌓기로 변화를 도모하며 성형도 스펙쌓기의 한 방법으로 선택1)하고 있다. 중장년층은 부동산과 주식을 통한 재테크에 집중하며 변화를 도모한다. 평균수명의 연장으로 노후의 삶이 길어졌지만 은퇴 이후의 삶은 여전히 불안한 노인들은 어떤가. 대한민국의 온갖 격랑을 겪은 퇴출세대인 베이비붐 세대1)에게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민간’보험을 통한 변화를 꾀하라고 종용한다.
결국엔 자본주의 사회이기에 삶을 이어가는 방편엔 ‘돈’이 필요하고 ‘돈’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자본, 지대를 통한 수입이거나 ‘취업’을 통한 소득이다. 소득을 얻을 수 있는 한 개의 의자만을 놓아두고 앉을 수 있는 자격을 ‘변화’의 내용과 강도로 레벨 업(level up)하는 지금의 상황은 연령과 성별을 초월한 끊임없는 경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렇듯 변신, 변화가 필요로 되는 이유의 저변에는 무엇이 있을까. 물론 변화라는 말은 흔한 말이기도 하고 긍정적인 의미가 없진 않다. 변화의 주체와 이유가 누구이고 무엇인가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우리는 한 개의 의자를 얻기 위해 변화하려 한다. 그 의자를 얻기 위한 방법이 그것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왜, 의자가 하나만 놓여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의 의자만 가져다 놓은 이가 누구인지 생각하지 않는다. 정녕 하나의 의자만 놓아야 했다면,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의자에 앉을 생각, 그 자리만 차지할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생각할 틈없이 정부가, 사회가 끊임없이 개인의 변신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IMF시대는 IMF 시대라서 변화해야 한다고 했다. 외환위기, 구제금융을 받는다는 것은 쉽게 이해되기 어려운 말이었다. 그런 표현이 계속 이루어졌다면 좀 달랐을까. IMF는, 외환위기는, 구제금융은 ‘나라가 망했다’라는 표현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이 ‘경악스런 말’의 공포 속에 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 틈도 없이 나라가 망한 ‘결과’와 그에 대한 ‘책임’은 고스란히 일반 국민의 몫으로 이어졌다. 구제금융의 조건에 힘입은 대량 해고와 실업이 합법적으로 이루어졌고 실직으로 인한 가계파탄이 넘쳐났다. 이 와중에도 국민들은 나라가 망하지 않게 하겠다는 의지로 금모으기 운동을 이어 350만 명이 227톤의 금을 모았다. 이를 이유로 국민성을 칭송하고 국민이 가진 ‘애국심’을 강조하던 것은 잠깐이고 곧 죽어도 개인을 탓하는 정부의 기본 인식은 변하지 않았다.
정부가 보기에 국가의 위기는 곧 개인의 위기가 된다. 그렇기에 ‘국가를 위해서’ 국민 개개인은 변화의 노력을 가져야 한다. 그 위기를 자초한 것은 ‘개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부의 시각은 한결같다. IMF 원인으로 국민의 과소비라고 가르치는 인식이나 변명하는 방법1)이나 복지정책을 이야기하는데 ‘국민의 나태’를 이야기하는 것도 닮아 있다. IMF 원인이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 모순 때문이라는 것, 그 모순덩어리 존재가 권력을 가진 이들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온갖 비리를 끌어안고 세계정세를 제대로 읽어 내지 못한 채 부실하고 무능하고 부패한 정책을 남발한 것이 IMF의 근본 원인이다. 그리고 지속적인 경제위기와 삶의 어려움은 역시 정경유착과 반민주적인 정치구조가 이루어낸 결과이다.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변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늘 무언가를 가져다준다고 얘기한다. 돌아보면 국민들에게는 ‘늘 힘들었던 시대’였던 것만 같은데 더 힘든 삶으로 가지 않기 위해서는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또, 또 그렇게 말한다. 끊임없이 강조하는 변화하라는 요구에 발맞춰 변신의 능력과 도구를 갖추었지만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시대가 변화했다면 그에 맞춰 정부의 역할도 변하기 마련인데 그들의 ‘변화의 노력과 결과’는 없다.
개인의 변화를 강조하는 것만큼의 사회변화가 있다면 그에 상응하는 정부의 변화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의 노력이라 할 것은 무엇이 있었던가. 하나의 노력은 꾸준했다. 무엇이든 ‘개인’의 탓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 ‘개인’은 슈퍼 울트라맨이 되어야 하는 지경이다. 슈퍼 울트라맨이 되려다 지친, 될 수 없는 대한민국의 일반 국민은 변신할 옷을 얻지 못한 채 영웅을 꿈꾸며 잠들고 아침이면 얼굴을 확인했다. 다행히 우리의 얼굴은 매번 달라져 있었기에 스스로 변화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힘겨움이란 무게가, 절망의 고통이, 우울의 절망이, 상실의 분노가 우리의 얼굴을 점점 그늘지게 만들고 표정없는 얼굴을 만들어 버렸는데, 딱 그 얼굴이 사회가 요구하는 얼굴이었을지 모른다. 아니, 표준적으로 보였을지 모른다. 왜냐고. 거리에서 만날 수 있는 우울의 표상이니까. 그 얼굴만이 떠돌고 있으니까. 다른 이와 같은 모습으로 변하는 내 모습에 안도를 느끼지 않았을까. 어쨌든 남들만큼은 되었다는 것에, 다르지 않다는 것으로 불안을 달랠 수 있었을 것이다.
애초부터 그렇게 바란 것이 아니었던가 의심스럽게도 수많은 이들이 갤러리족(gallery族), 거품족(bubble族), 니트족(NEET族), 두피족(duppie族), 딩크족(DINK族), 딩펫족(DINKpet族), 빨대족, 셀러던트족(Saladent族), 싱크족(SINK族), 연어족(鰱魚族), 예티족(Yettie族), 잉여족, 캥거루족, 패러싱글족(para single), 프리터족(freeter族)1)……이 되어 이 사회의 그늘 속에 놓여 있다.
이쯤되면 변화란 행복을 낚는 미끼, 떡밥 아닌가. 최상급 맥거핀(macguffin)이다. 영화에서 사용되는 기법인 맥거핀은 관객이 이야기에 끌려가게 만드는 장치다. 과연 어떤 방법일까. 한마디로 중요하지 않은,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가지고 마치 뭔가 있는 것처럼 위장하는 방법을 통해서다. 결국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면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거라는 걸 알게 된다. 변화를 활용하는 방식이 그렇다. 행복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인 듯 잔뜩 홀려 놓고, 심지어는 의자가 하나밖에 없다는 공포를 조성하며 ‘개인의 변화’를 강조하였지만 개인이 ‘변화’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강조하였듯이 정부는 모든 것을 ‘더 변화하지 않은’ ‘더 변화하지 못한’ 개인의 탓으로 돌린다. 개인의 변신이 해답인 양 온갖 맥거핀과 클리셰를 동원하여 현혹하고선, 정작 그들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항상 해 온대로 그대로 있을 뿐이다.
정부의 이 ‘변화하라’는 말 속에는 두 가지가 숨어 있다. 일단 변화하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하라’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변화하지 않는 것은 ‘게으르다, 나태하다’는 인식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변신 속 함의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변한 사회에 맞춘 능동적인 역할을 개인에게 부여함으로써, 결과의 책임을 개인에게 지우는 것이다. 변화될 수밖에 없는 것은 있다. 그러나 변화하지 않아도 될 것이 있다. 변화하지 않아도 될 것이 정부 권력에 의해 부정한 방법으로 변화되고 조작된다면 그 변화하라는 요구에 발을 맞추어야 될 이유가 있는 것인가. 문제는, 무언가를 하라는 의미 속에 포함되지 않는 하나가 있다는 것이다. 바로 정부의 역할에 대해 ‘잘못된 것을 비판’하거나 ‘국민을 위한 정책’을 만들어 달라는 요구이다.
두 번째는 길들임이다. 길들여진다는 것은 익숙해짐을 의미한다. 변화하라며 내세우는 방법들은 국민들을 경쟁과 차별에 익숙해지게 만드는 것이다. 과거 이데올로기로 국민을 통제했다면 지금은 경쟁을 부추기며 국민을 통제한다. 경쟁에 진 존재로서, 차별받아 마땅한 존재로 스스로를 생각하게 만들어 버림으로써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 다른 소리를 낼 수 없게 만든다. 남들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행복한 길이라고 길들인다. 젊은 세대와 노인 세대가, 남성과 여성이, 개인과 개인이 경쟁하며 대치하는 동안 문제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를 망각하게 한다. 이렇듯 정부에 의해 강요된 변화는 끊임없는 개인의 능력을 고취하기를 부추기며 너도나도 자기계발 속에 파묻힌 채, 개인의 변화에만 매몰된 채, 국가를 향한, 권력을 향한 그 어떤 목소리도 내지 않도록 길들이고 있는 것이다.
길들임의 변화는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그러니까 변신의 귀재인 카멜레온이 된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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