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녕이~
  • 조회 수 2112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15년 2월 17일 12시 00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서울대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독일 브레멘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강수돌 교수는돈의 경영이 아닌삶의 경영을 가르치고 실천하는 일에 힘쓰고 있다. 대학 교수인 그는나의 작은 실천이 참 행복의 길을 열고 사회도 바꾼다는 믿음에서 2005 5월부터 2010 6월까지 5년간 시골 마을의 이장을 지낸 바 있고, 현재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 경영학부 교수이다. 학교 근처 서당골에 귀틀집을 짓고. 가족과 텃밭을 일구며 세 명의 아이들을 자연 속에서 키웠고 자연이 주는 즐거움에 흠뻑 빠져 사는 그는, 돈벌이가 아닌 살림살이의 관점에서 사회와 삶을 바라보고아래로부터의 시각으로 이웃과 역사를 바라볼 때 희망이 열리고 더불어 행복한 세상도 올 것이라 믿는다.

 

강수돌 박사는 주로 노동자의 삶의 질과 생활을 규정짓는 생태의 문제와 함께 노동의 조건들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왔다. 세계화 담론에 대한 문제제기로서 외국인 노동자 -그가 주장하는 이주 노동자 -에 대한 연구 활동도 활발히 진행했다. 그의 이론은 기존의 전통적인 노사관계론 시각을 벗어나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 경제 수치에 의존해 왔던 노동자의 삶을 적극성과 자기 조직화라는 근거로 새롭게 재구성하고 있는 하나의 다른 시각이다. 노동 과정에서의 노동자의 역할이나 민중 정치의 새로운 방향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강수돌 박사의 연구 흔적을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저서로 『노동을 보는 눈』, 『이장이 된 교수, 전원일기를 쓰다』,『내가 만일 대통령이라면』,『나부터 마을혁명』,『살림의 경제학』,『자본을 넘어, 노동을 넘어』,『지구를 구하는 경제책』,『나부터 교육혁명』 등이 있다. 이 책『팔꿈치 사회: 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에는 강수돌 교수가 꿈꾸는 행복한 세상에 대한 염원과 혜안이 담겨 있다. 어른과 아이 할 것 없이 모두를 불행으로 이끄는 이 경쟁사회를 넘어서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제대로 바라보고, 무엇을 제대로 실천해야 하는가? 이런 면에서 이 책이 우리 사회의 병폐인경쟁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는 나침반 역할을 하기를 바란다

 

2.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9-10. 작은 기업이 망하고 대기업이 물 시장을 독점하게 되자, 대기업은 물값을 서서히 올리기 시작한다…..그리고 식당이나 가게들은 예정보다 더 적은 양의 물을 더 비싸게 사먹어야 했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시장경쟁이다. 이 이야기에 사람들은 경쟁의 냉혹함을 씁쓸해하면서도 대개는 현실이니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반응한다. 그리고선 그러니 힘을 키워 강자가 되어야지!”라고 해답을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태도를 갖기 때문에 갈수록 경쟁은 치열해진다. 강자가 되어야 돈과 일자리와 권력과 명성 같은 것을 독차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아는 시장경쟁이란 기득권을 향한 경쟁이며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의 적대적 경쟁이다. 문제는 우리 대부분이 이를 당연시하고 이것 외에는 삶의 대안이 없다며 그런 논리를 굳게 내면화한다는 점이다.

 

이 책은 바로 이런 시각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 제기를 한다. 그러한 시장경쟁, 적대적 경쟁은 원래 사람의 논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겉으로 보이는 현실은 경쟁 투성이지만 잘못된 현실의 껍데기를 몇 꺼풀 벗겨내면, 바로 그 경쟁이란 누군가 이득을 얻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것에 불과함을 폭로한다. 결코 인간 사회의 본래 모습이 아니란 말이다.

 

11. 세상의 모든 일은 결코 우리의 일상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일과 삶, 학교와 직장, 사회와 역사에 대하여 그 근원을 캐묻고 본질을 파악하기 시작하면 서서히 삶의 진실이 보이기 시작한다. 삶의 진실을 깨닫고 나면 지배층이나 기득권층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이데올로기나 세뇌교육의 본질이 드러나고 만다. 사람답게 살고 싶은 우리의 열렬한 소망은 바로 이 과정을 거친 뒤에 비로소 가능하다. 허상을 벗겨내고 진실 위에 새로운 대화와 토론을 시작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사람도 바꾸고 제도도 바꾸고, 그리하여 전체 삶의 구조도 바꾸어야 한다. 결코 쉽진 않지만, 이것이 바른 길이다.

 

80년 정도 지속되는 인생 여행. 그 것을 마감할 무렵 그간 헛된 삶을 살았노라고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지금부터라도 삶의 본질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더불어 사는 행복한 사회다. 이 책이 모든 개인에게, 그리고 우리 사회에 전반적으로 삶을 새롭게 접근해 가는데 좋은 길잡이가 되길 바랄 뿐이다.

 

12. 우리의 느낌, 감정, 생각, 태도, 행동 등 인간 행위의 측면을 새롭게 살피는 것이 대안의 출발점이다.

 

13. 지구촌 모든 사람을 생존경쟁으로 내모는 이 가혹한 자본의 시스템으로부터 진정 해방되어 서로 돕고 사는 그 날까지 우리 풀뿌리 민초들이 서로 훈기를 풍기며 함께 행복한 발걸음을 내딛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14. 전통적으로 한국과 다른 나라를 비교할 때 가장 두드러진 기준 중 하나는 단연코 긴 노동시간이다. 한국인들은 하루 종일 일하고도 할 수만 있다면 밤새도록 일한다.

 

흥미롭게도 많은 한국인들은 일벌레라는 별명을 대단히 자랑스러워하기조차 한다.  근면과 성실의 이데올로기가 가정, 학교, 직장, 사회 일반에서 뼛속 깊이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15. 한국 사회에서는 일단 직장에서 쫓겨나면 곧 죽음이란 의식이 더욱 팽배하다. 직장 생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딴 생각말고 죽은 듯 일해야 하는 상황이다. 기업이 직면한 치열한 경쟁 압박이 개별 노동자들에게 그대로 전가된다. 노동자들은 생존의 두려움 앞에서 경쟁을 내면화하고 만다. 심지어 일중독에 걸려도 일중독인 줄도 모르기 일쑤다. 바로 이것이 한국이 자랑하는 세계 최고의 장시간 노동이라는 수수께끼를 푸는 한 열쇠다.

 

16. 한 연구는 사람들이 노동 속에서 성취감이나 자아실현감을 느낀다고 했고, 다른 연구는 사람들이 일터 밖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고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앞 연구의 후속 연구에서 보듯이, 갈수록 노동 속에서 자아실현감을 찾는 사람들이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제 2차 세계대전 뒤 서양에서의 고도 성장기에 대량생산-대량소비 체제가 구축되는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

 

17. 골드소프 등의 연구에서 사람들의 노동에 대한 태도를 크게 세 가지로 대별했는데, 첫째는 성취 지향성, 둘째는 연대적 지향성, 셋째는 도구적 지향성이다.

 

18. 한국에서는 직장인으 70퍼센트가 스트레스성 심신이상 증상을 경험하고 있으며, 노동자의 50퍼센트가 자신이 직장에서 매우 강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호소한다. 한 실태조사에서는 직장인의 3분의 2가 이직을 고려한 바 있다는 결과가 나올 정도로 직장생활이 삶의 스트레스를 높이고있다. 그런데 정작 이들은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느낌을 가짐에도 다른 대안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그러한 느낌들을 그냥 옆에 제처놓고지금까지 해오던 방식을 그대로 밀고 나간다. 이것이 일중독의 심각성이다.

 

19. 이런 식으로 자신의 진정한 느낌을 제쳐놓고 생계를 위한다는 명목 아래 현실세계의 압박을 스스로에게 강제하는 현상을 나는 정서적 프롤레타리아화라 부른다.

 

오늘날 가정의 이미지는 더 이상 보금자리가 아니라 단순한 버스정류장으로 변하고 있다. 가정은 노동에 종속되어 노동의 긴 여정을 다니기 위한 간이정류장으로 변했다. 아이들도 노동하는 어른들과 둘러앉아 삶의 의미와 행복을 나누는 시간을 함께 갖기 어렵다. 다만 그 간이정류장에 간간히 들러 냉장고 문을 열고 먹을 것만 챙겨 먹고 바삐 떠난다. 차라리 학원에서 또는 독서실에서 공부하는 척이라도 하면 마음이 좀 편한 듯하지만, 여전히 내면은 불안하고 공허하다. 어른들은 삶이 고달플수록 그 고통을 잊기 위해 일에 더 매진하는 병적 경향도 있디. 가시적 성과를 올리면 다소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른들, 아이들 모두 일중독으로 내몰리고 있다.

 

20. 겉으로는 우리가 일에 대한 가치관을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우리가 일에 대한 가치관을 강요받는다. 필요에 따라 일하기 보다는 거꾸로 일의 필요에 따라 우리가 끌려 다니면 일한다. 그 와중에 굳이 우리가 일에 대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일이 우리 내면의 고통이나 두려움을 회피할 수 있는 도피처내지 망각제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일중독 문제나 중독사회의 문제에 대해 예리한 통찰력을 가진 A.W 셰프(일하는 여성을 위한 명상록)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늘 끊임없이 반복되는 집안일에 묻혀 바삐 지내는 것은 실제 그 일들이 꼭 해야할 일들이기 때문이라기 보다 내 스스로 바쁠 필요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 자기 내면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것을 두려워해 왔다. 속을 들여다보았다가, 거기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하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21. 한 마디로 노동을 더 이상 신성시하지 않아야 하는데 사람들은 여전히 이를 신성시하며 나아가 고통스런 현실적 삶의 도피처로 삼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피비린내까지 풍기는 신성한 쉼터 로서의 노동, 이것이 일중독 시대에 우리 대다수가 내면화해버린 노동관이다.

 

25. 이 모든 (설문)결과가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어릴 적부터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은 채 자신의 느낌과 욕구를 솔직하게 표현.충족시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부모와 잘 소통하지 못하고 따뜻한 지지도 받지 못하면서 자란 경우, 특히 좋은 학교 성적으로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린다는 성과주의적 삶의 태도를 반복하며 자란 경우, 요컨대 성장 과정에서 전형적인 일중독적 특성이나 일과 삶의 불균형이 상대적으로 극심하게 나타날 수 있다.

그것은 하이데(Haide,2002)가 강조하는 바와 같이 어린 시절에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을수록 일종의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에 시달리면서 사람들은 생존의 두려움을 특히 강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그럴 때 대개 생존전략으로서 강자와 동일시를 하게 되고, 이것이 곧 성과주의적 삶의 지향이나 강박적 노동관으로 연결되기 쉽다. 그렇게 자란 어른들은 어린 시절의 좌절감을 보상받기 위해, 또는 그러한 내면의 불안감과 두려움을 은폐하기 위해, 일이라는 일종의 중독물에 빠져듦으로써 견디기 어려운 심적 고통을 피해가고자 한다. 그 결과 사람들은 일의 결과가 얼마나 좋은가와는 무관하게, 오로지 일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하는 자기강제를 하게 되고 자연히 실 노동시간도 길어진 수밖에 없다. 이 모든 현실은 경제와 사회가 마침내 이분법적으로 분리되었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사회가 경제 속에 합병된 결과, ‘삶의 식민화가 고도로 진척되었음을 말해준다.

 

26. 사유와 노동의 이분법을 넘는다는 것은 너도 나도 삶의 문제 해결에 이론가이자 실천가로 적극 나서야 함을 뜻한다. 더 이상 가정과 학교에서 땅파고 살지 않으려거든 공부해라라고 강요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모든 이가 땅을 파면서도 땅의 철학자가 되는 감동적인 사회, 이것이 돌파구나. 그것은 지금의 수직적 사다리 질서를 수평적 원탁의 질서로 바꾸어야 가능하다. 그 출발점은 우리 마음속의 사다리 질서부터 걷어내는 일이다.

 

자연의 노동을 적극 인정한다는 것은, 햇볕의 노동, 바람의 노동, 물의 노동, 흙의 노동, 미생물의 노동, 풀의 노동, 밀알의 노동, 나무의 노동을 인간의 노동과 동등하게 보는 것이다.

 

27. 모든 사람을 사람 그 자체로 인정하며 살갑게 더불어 살 때, 비로소 경제 사회 이분법이 극복된다.

 

28. 이분법을 과감히 넘어가는 길의 입구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우리 자신 안에서 분리된 내면과 외면을 다시금 통일하는 데 있다. 참된 자아와 다시 접촉하는 것이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인가, 내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것이 무엇인가, 무엇이 나의 참된 행복인가, 무엇이 삶의 기쁨이요, 존재의 기쁨인가? 이런 질문에 답하려면 결국 외피에 가려진 내면의 진실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나 홀로 가면서도 더불어 가는 존재다. 또 더불어 가면서도 나 홀로 가기도 한다.

소유 양식이 아닌 존재 양식을 강조한 에리히 프롬, 라다크 마을이나 남태평양 아누타 섬, 그리고 북미 원주민들이 가졌던 확장된 자아의 삶. 사람을 관계적 존재로 보자는 신영복 선생의 시각도 바로 이런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우리가 좁은 의미의 자아를 초월해야 하는 까닭이요, 그 자아를 부단히 확장할 필요이기도 하다. 결국 우리는 더불어 행복할 수 있을 때 진정한 행복감을 맛볼 수 있다. 이것이 우리의 내면과 외면이 통일된 삶이 아니겠는가.

 

돈과 권력과 명예라는 외피 속에 깃든 있는 그대로의 나, 이것을 느끼고 참된 내면과 접촉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우리는 다양한 이분법 속에 뒤틀린 삶과 일, 가정과 사회, 그 모두를 건강하게 복원할 방도를 찾을 수 있다.

 

29. 경쟁 상황 자체는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경쟁 압박을 우리 스스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것, 바로 이것이 비극의 출발이다.

 

독일 말에 팔꿈치 사회라는 말이 있다한마디로 옆 사람을 팔꿈치로 치며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치열한 경쟁사회를 일컫는다. 자본주의 경쟁사회를 이렇게 실감나게 표현할 수 있을까?

 

팔꿈치 사회에서 심각한 문제는 한 번 일등 한다고 영원히 일등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무수히 많은 새로운 경쟁자들이 호시탐탐 그 자리를 노린다. 시간이 갈수록 경쟁은 치열하다. 그것을 버텨내기엔 차라리 목숨을 걸어야 할 지경이다. 오죽하면 국민 마라토너 황영조 선수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과 1994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일등자리를 두 번이나 차지한 뒤 1996년에 더 이상 못뛰겠다며 스스로 조기은퇴를 선언하고 말았을까?

 

마라톤에서는 설사 번번이 일등을 못한다고 하더라도 생존 자체가 위협에 처하는 것은 아니 데 비해, 자본주의 상품경쟁에서는 남보다 계속 뒤쳐지게 될 때 생존 자체가 큰 위협을 받는다는 점이다.

팔꿈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거지에 대한 동정은 커녕 자기 자신에게 마저도 냉혹해야만 하는 경제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42. 진리를 위한 경쟁이 아닌 타자를 누르기 위한 생존경쟁, 즉 세계시장을 둘러싼 상품경쟁은 어떤 상품이 승리하는가와 무관하게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지배를 존속시키는 조건이 된다. 내가 시장경쟁에 참여하는 순간, 그 승패와 무관하게 경쟁의 희생자가 된다. 나아가 그것을 넘어 (우리 모두를 지배하는) 자본의 지배력을 강화시켜주게 된다. 바로 이 점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 자본주의 경쟁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것이다. 

 

57. 이처럼 지금의 경쟁은 상생의 경쟁이 아니라 공멸의 경쟁이다. 이런 불공정 경쟁이나 과당경쟁을 통제한답시고 국가가공정거래위원회같은 조직을 만들었지만 자본의 독과점이나 부정부패, 정경유착, 내부거래, 순환출자, 부당하청, 과당경쟁을 막는 데는 실패했다. 오히려 적정 경쟁이 아니라 경쟁의 세계화가 갈수록 심해지고 심지어 사람의 뼛속까지 경쟁 심리로 물들어가지 않는가? 이것이 사태의 진실이다. 더 이상 이런 진실을 스스로 속여서는 안 된다.”

 

58. 그렇다면 이러한 경쟁의 내면화는 왜 이뤄지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강자와 동일시또는 스톨홀름 증후군개념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우리가 직접 상대하기엔 너무나 버거운, 엄청난 폭력으로 우리를 위협하는 깡패(가해자)를 만나게 되었을 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즉각적 대응방식은 대개 도망가거나 싸우는 것이다. 그렇다고 직접 맞서 싸워봐야 결과가 뻔하다면 어떻게 할까? 그것은 바로 그 깡패 같은 이 앞에 무릎을 꿇고 형님 알아서 모시겠습니다라고 충성과 복종을 맹세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엄청난 공포가 갑자기 모종의 안도심으로 변한다. 피해자 자신이 마치 가해자와 일심동체가 된 것처럼 느끼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이제 자신이 느끼는 것, 생각하는 것, 행동하는 것은 사실상 자신의 내면이 요청하는 것과 다르다. 이렇게 해서 자기 소외 또는 자기 배신이 일어난다….이미 자신은 강자처럼 느끼고 행동하기 때문에 자기 안의 약한 요소를 억지로 감추고 철저히 억누른다.

 

60. 문제는 이러한 강자와 동일시, 및 경쟁의 내면화와 더불어 우리는 자신의 참된 내면과 점점 멀어지게 된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겉으로는 살아 있으되 속으로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또한 겉으로는 부와 권력과 명예, 외모와 건강을 과시하되, 속으로는 끊임없는 불안과 공포, 두려움과 불만족에 시달리는 표리부동한 삶을 살게 된다. 그렇게 되면 한 마디로 우리는 제아무리 보약을 먹고 오래 살아 봐야 결국 헛살기쉽다.

 

61. 우선 탈경쟁이 만드는 두려움을 피하지 말고 똑바로 쳐다보자. 우리는 대개 팔꿈치 사회내지 경쟁논리로부터의 이탈은 마치 정체와 죽음을 뜻하는 것처럼 받아들인다. 정체와 죽음은 자연스럽게 두려움을 조장한다. 정체와 죽음이 아니라 발전과 생존만이 희망이라 보기 때문이다.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것이 우리 삶의 목표라면 그 과정 또한 더불어 행복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바로 여기서부터, 나부터, 타자와의 소통과 연대를 하나씩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 생존에 대한 두려움, 강자와 동일시, 경쟁의 내면화가 초래하는 자기소외나 자기고립을 적극적으로 넘어 관계적 존재로 다시 서려는 것이 소통이며, 문제 상황의 정면 돌파를 위해 힘을 합쳐 해결의 주체로 함께 당당히나서는 것이 연대다. 처음에는 주어진 조건 속에서 최대한 노력하고, 그러한 노력을 통해 새로운 조건을 창출하며, 새로운 조건 속에서 또다시 더 넓고 깊은 실천을 이뤄내는 식으로 한걸음씩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무한한 생존 경쟁의 틀로부터 강요받던 엄청난 두려움이 실제로 두드러지게 줄어드는 것을 체험할 수 있다. 두려움의 축소와 더불어 삶의 새로운 활기까지 치솟는 짜릿함을 맛볼 수 있다. 이것만이 자기 소외와 자기 배신을 제대로 극복하고 참된 자아회복과 초월을 가능하게 한다. 소통과 연대는 우리가 미래에 꿈꾸는 대안사회의 밑거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대안사회로 가는 수단이자 일상적 과정이기도 하다.

 

65. 경쟁이 낳는 비극 중 하나는 타자의 불행을 자기 행복의 기초로 삼는 일이다. 경쟁이 낳는 최대 비극은 서로 경쟁하는 가운데 모두 공멸한다는 점이다.

 

먼저 경쟁은 좋은 것이라는 말부터 한번 살펴보자. 원래 경쟁이란 말의 어원을 보면, 이 말은 라틴어로 함께 추구하는 것이란 뜻이 있다. 뭔가 바람직하거나 공통적인 것을 위해 더불어 가는 것이다. 만약 오늘날도 우리가 이런 의미로 경쟁이란 말을 쓴다면 단연코 경쟁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문제시되는 경쟁은 생존경쟁이다. 다른 말로, ‘너 죽고 나 살자식의 적대적 경쟁이다. 다른 사람을 억누르고 내쳐야지만 내 생존이 보장되는 그런 사회가 곧 우리가 살아가는 이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이다.

 

66. 오늘날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경쟁이란 생존경쟁이며, 이것은 경제적 전쟁인데, 결국 경제적 형태를 빙자한 정치의 한 모습이란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정치의 주체는 누구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권력과 기업이고 권력과 기업은 결국 자본이다.

 

68. 즉 경쟁이란 자본의 지배를 위한 수단이다. 그래서 경쟁과 지배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현실 자본주의 경제가 돌아가는 원리가 이러하니, 갈수록 사람들이 피곤해지고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경쟁은 필연이고 좋은 것이니 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이제부터 이런 생각은 버려야 한다. 그런 생각은 결국 자본과 대리인들, 대리 조직들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 원래 사람이 살아가는 원리는 경쟁이 아니라 협동이다. 서로 돕고 나누는 가운데 온갖 역경도 이겨내며 같이 살아온 것이 인류의 생존방식이었다. 그 단초를 알 수 있는 것이 오래된 미래인 북미 원주민, 호주나 남태평양의 원주민들, 히말라야 산맥 주변의 라다크 마을과 같은 전통 공동체 마을들이다. 사실 우리의 전통 마을들도 두레와 품앗이 같은 우애와 호혜의 전통이 있지 않던가? 오늘날도 스페인의 몬드라돈 협동조합이나 방글라데시의 그라민 은행 같은, 협력적이고 연대적인 경제방식이야말로 평화와 평등, 자유와 정의를 달성하는 건강한 방식임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69. 결론은 이렇다. 비적대적인 놀이경쟁과 달리 적대적인 생존경쟁은 좋은 것이 아니다. 인생의 본질은 경쟁이 아니라 협동이며, 독점이 아니라 나눔이다. 이미 우리의 마음과 느낌은 안다. 치열하게 경쟁할 때 마음이 평온한가, 아니면 서로 협동할 때 마음이 평온한가?

 

122.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오늘날 냉혹한 경쟁이 이뤄지는 경제세계에서 한편으로는 위협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기회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은 대부분의 기업들이 말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외치지만 실제로는 진정성이 없음을, 아니, 본연의 사회적 정당성조차 상실하고 있음을 자주 보여준다. 이것도 결국 무한 경쟁과 무한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경제의 근본원리 때문에 나온 부산물이다. 요컨대 적대적 생존경쟁에 불과한 돈벌이 경쟁은 기업들이 아무리 CSR을 잘 수행한다고 선전해도, 마침내제도화된 무책임을 부르고 만다는 것이 또 다른 진실이다.

 

137. 이제 사람들은 회사도 믿지 않고 노조도 믿지 못한다. 오로지 믿는 것은 자신뿐이다. “언제 잘릴지 모르니, 있을 때 벌자.”가 신념이 되었다. 회사가 잘 나갈 때는 일터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충성스럽게 일하느라 일중독에 빠졌지만, 이제 회사가 수시로 사람을 자르는 시기에는 탈락과 배제의 두려움 때문에 더욱 일중독에 빠진다.

여기서 곰곰히 생각해보면 경쟁력이 있어야 생존 가능함을 근본원리로 하는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아무리 완벽한 대책을 세워도 실업이 늘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자본 입장에서는 노동력의 유연한 투입을 위해, 그리고 취업자의 노동통제를 쉽게 하기 위해서라도 실업자들이 늘 많으면 좋다. 게다가 경기순환 과정은 호황과 불황을 거치면서 과잉된 부분들을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오늘날 유형어가 된 구조조정이라는 말도 사실은 자본이 생존을 위해 그 과잉 부분을 조절하는 과정, 즉 군살빼기 과정에 불과하다. 결국 이런 사실은 실업 정책들이 실업률 수치를 세련되게 관리하는 정책이나 단기적 임기응변으로는 결코 효과를 가질 수 없음을 시사한다. 보다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주요 실업 문제 1) 중년 실업, 2) 여성 실업, 3) 청년 실업 4) 비정규직 5) 박사 실업 6) 이주 노동자 문제

 

140. 실효성이 의심되는 제반 정책들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과감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래서 가장 먼저, 경제 운용의 원리를 경쟁과 이윤에서 연대와 삶의 질로 이동시켜야 한다. 이러한 원리 전환은 가히 혁명적이다.

아래로부터의 구조조정’ ‘아래로부터의 세계화를 만들어나가야 진정한 변화가 온다.

그동안 우리가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며 증진시켜온 생산성 향상의 성과를 골고루 향유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일하되 남녀노소 차별 없이 조금씩 일해야 한다. 이러한 사회적 불평등의 해소는 물론 삶의 여유를 증진시켜 사람들의 창의성과 동기부여를 촉진할 수 있다. 이는 다시 진정한 생산성을 향상시킬 것이고 다시금 노동시간 단축의 토대로 작용해 삶의 여유는 증대하게 된다. 악순환이 아니라 선순환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돈벌이나 경쟁력이 아니라 사회적 필요나 삶의 질 차원에서 꼭 있어야만 한다면, 이를 일자리로 인정하고 그에 걸맞은 교육훈련을 실시해야 한다. 제레미 러프킨이아 울리히 백 등이 말하는 제3섹터, 시민노동에 속하는 일자리는, 비록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긴 해도 잠재적 가능성은 상당하다. 뿐만 아니라 제 1섹터인 시장 부문이 양산한 문제들, 예컨대 환경 파괴, 공해 산업, 건강하지 못한 건축물들, 퇴폐/향락 산업, 음식이나 의류 속에 만연된 각종 화학물들 등등을 완전히 청산하고 새로운 대안들을 만들어나가는 일들은 실로 무궁무진하다.

2섹터인 국가부문도 크게 보면 마찬가지다. 관료주의와 획일주의로 얼룩진 국가부문도 창의성과 다양성 그리고 자율성이 가득한 새로운 영역으로 바꾸어내려면 무수한 일자리가 필요할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창조적 파괴가 이루어지고 진정한 의미의 대안들이 창조되는 노력들이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실업 문제의 질곡으로부터 점차적으로 해방될 뿐만 아니라 진정한 노동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게 될 것이다.

 

143. 2009년에 77일간 파업 및 점거 투쟁으로 만신창이가 된 쌍용차 노동자들은해고는 죽음이다. 같이 살자는 구호를 외쳤다. ‘무급휴직자 복직과 같은 합의 같지 않은 합의마저도 헌신짝 내버려지듯 무시되었다. 그 사이에 이래저래 상처 받아 죽은 이들이 무려 23명이나 된다. 제주 강정마을의 아름다운 구럼비 해안은 미국의 동아시아 지배전략과 한국 건설자본의 이윤전략이 맞아 떨어져 반민중적, 반생명적 사업 대상으로 전락해 2011년과 2012년을 뜨겁게 달구었다. 자본의 새로운 이윤 공간을 위한 용산 재개발은 수많은 철거민 투쟁을 낳았고 2009년 연초부터 경찰과 민중이 정면 대결했다. 이 쌍용, 강정, 용산을 뜻하는 SKY의 공통점은 국가폭력과 기업폭력의 결합이며, 다시금 그 본질은 자본이다.

 

149-150. 문제는 죽어간 노동자만이 아니다. ‘아직잘리지 않거나아직살아 있는 노동자들은 과연 행복하게 살고 있는가? 혹시라도 일중독에 빠져 몸은 살아 있되 정신은 죽은 거나 다름없는좀비가 아닌가? 나아가 그 노동자들이 만든 휴대폰과 컴퓨터, 자동차를 별 생각 없이 잘 쓰는 소비자들은 어떠한가? 혹시라도돈이면 안 될 게 없다거나어디, 공짜 폰이 없나?’라며 소비중독에 빠진 건 아닐까? 돈벌이 경제가 번창하는 원리는 이렇다. 소비자들이 소비중독에 빠질수록 노동자들은 일중독에 빠져들어야 하고, 노동자들이 일중독에 빠져들수록 소비자들이 소비중독에 빠져야 한다. 과연 우리는 노동자의 고통과 죽음을 외면한 채 소비세계 속의 편리만 추구하며 살 것인가.

 

“새로운 모양은 더 이상 피라미드 모양의사다리 질서가 아니라 모두가 둘러앉아 오순도순 이야기 나누며 밥을 먹는원탁형 질서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결국 힘센 상부의 소수가 약한 하부의 대다수를 차별하고 착취하는 구조를 타파하고, 상부상조하는 호혜의 살림살이 구조를 만들자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더불어 사는 세상이요, 생존의 불안감이 없는 세상, 경제민주화가 이뤄진 세상이다

 

150. 일이란 현대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모두에게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은 사람에게 크게 세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생계다. 먹고사는 원천을 얻는 것이다. 농사를 짓는 경우 직접 얻기도 하고 남의 밑에서 일하는 경우 임금으로 생필품을 사서 해결하기도 한다. 둘째는 관계다. 일을 통해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 직장 동료인 경우도 있고 생산자와 소비자로 만나기도 한다. 일을 통해 비로소 우리가 사회적 존재임을 깨닫는다. 셋째는 정체성이다. 일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도 있고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 수 있다. 이런 복합적 의미에서 정기적으로 일하는 사람은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다. 웰빙 수준이 높아질 수 있다는 말이다. 사실 일이 삶의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된 노동사회의 진실이 바로 이런 것이기에 오늘날 우리는 의외로 쉽게 일중독에 빠져 든다.

 

151. 실업을 담당하게 받아들이고 인생 이모작의 기회로 삼아 자신을 적극적으로 계발하고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으면 정신건강이 좋아지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전화위복이란 말처럼 오히려 실업이 진정한 자아를 찾는 참된 계기가 된다.

 

152. 현실적으로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구호가 맞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해고를 당하지 않고 계속 일한다고 해서 행복한 것도 아니다. 취업자들은 취업자대로 스트레스고 실업자는 실업자대로 스트레스다. 이 진퇴양난의 상황을 돌파하는 진보적 대안은 모두 일하되 조금씩일하는 것이다. 정규직을 원칙으로 모든 이의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가 우리 모두의 구호가 되어야 하는 까닭이다.

 

180. 진정 사람을 위하는 정치경제를 일구려거든 특권과 탐욕의 가면을 벗고 가장 낮은 곳의 목소리를 들어라. 제발, 그들 목소리 중 당신들의 이익을 닮은 것만 쏙 빼내 과장하지 말라. 제발, 그들의 목소리 중 당신들을 가장 불편하게 하는 것들을 집중 연구하여 근원적으로 해결하라고 하라. 그러면 모두 살 것이요, 안 그러면 모두 죽으리니.


182. 더 이상 '일류대학'이나 '일류직장'을 목표로 살아선 안 된다. 우리가 진정 추구할 것은 '일류인생'이다. 그것은 꿈의 발견, 실력 증진, 사회 헌신의 3요소로 구성된다. 일류대학이나 일류직장은 소수만 성공하지만 일류인생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나는 내 아이가 경쟁의 승자가 아니라 사랑의 주체가 되기를 바란다.


183. " 우리 사랑스런 아기가 건강하게 자라서 자기 하고 싶은 것 맘껏 하며 행복하게 살길 빈다." 는 것이었지.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단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엄마 아빠는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나 우리와 함께 살게 된 것이 무척 고맙고 행복하다."


184. 네가 머리를 들기 시작하고 몸을 뒤집으며 기기 시작했을 때, 걷기 시작하고 말하기 시작했을 때, 엄마 아빠는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 갈채를 보냈단다. 감동적인 순간들이었지. 그것은 다른 아이와 비교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네 스스로 성장하는 모습 자체에서 나온 것이지. 그렇게 자연스레 드러난 것이기에 정말 소중한 감동이었지.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인생 전체가 감동의 순간들로 가득하구나. 정말 놀라운 일 아니냐?


너도 권정생 선생님의 '강아지 똥'을 보아서 알겠지만, 똥은 결코 더러운 쓰레기가 아니란다. 똥이야말로 우리 자신과 세상을 이어주는 끈이지. 이 대자연이 선물하는 음식을 우리가 먹고 또다시 똥으로 배출해 이 대자연의 거름으로 되돌리는 걸 반복하는 과정이 바로 우리가 성장하고 생활하며 인생을 사는 과정이 아니겠니? 그러니 똥이 참 고맙지. 그래서 아빠가 만날 밥상에서 "밥이 똥이고 똥이 밥이다."며 너희를 웃게 한 거란다.


186. 그러고보니 너 같이 귀여운 아가 하나를 키우는 과정도 순수하게 개인적인 것만은 아니구나. 그렇게 사회와 개인이 모두 연결되어 있는 게 우리네 인생살이란다.


너를 입학식에 데리고 가는 아빠 마음은 '마치 송아지를 끌고 도살장에 가는 느낌' 이었단다. 그래서 그날 이후 엄마와 아빠는 "우리 아들에게는 절대로 100점을 받아야 한다거나 1등을 해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기로 하자"고 굳게 약속했지.


190. 물론 어느 것도 완벽하긴 어렵지만, 새로운 해결책이란 것도 또다시 '정-반-합'의 과정을 거치며 또 새롭게 진화를 해야겠지. 중요한 것은 그러한 성찰과 문제제기, 새로운 시도와 민주족 토론, 이런 과정들이 아니겠니? 그래서 민주주의가 정말 소중한 것이지. 이게 제대로 되려면 우리 각 개인들의 내면이 성숙해야 함은 물론이고.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좀 더 잘 알기 위해. 또 자신을 좀 더 잘 알기 위해 '공부'를 하는 것이란다. 대학이란 것도 원래는 진리탐구를 위해 큰 공부를 하는 곳이 아니겠니? 하여간 당시에 네가 친구들이 매 맞는 모습을 보면서 고통스러워했던 것도, 또 엄마 아빠가 너의 솔직한 느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노력한 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대단히 소중한 순간들이었던 것 같아. 나중에 네 자신이 부모가 되어도 이런 걸 잊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삶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란 걸.


191. 네가 실수를 할 때도 있을 것이고 엄마 아빠 마음에 안 들 때도 있겠지만, 두려워하지 말기 바란다. 오히려 실수나 시행착오가 너를 더욱 성숙하게 만들어주는 계기가 될 것이니까. 그래서 좋은 일은 좋은 일대로, 나쁜 일은 나쁜 일대로 배우고 느끼며 한 걸음씩 더 나아가는 발판으로 삼으면 된다.


192. 네 동기생들에 비해 몇 년 늦어지기는 했지만, 엄마 아빠의 소신처럼 인생은 결코 속도전이 아니니 친구들과 비교해서 초조해할 필요는 없단다. 꾸준히 네가 가고 싶은 길을 한 걸음씩 정진하는 것만이 네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사는 길이니까.


193. 네가 걸어가는 인생의 길에서 엄마 아빠가 굳이 바라는 게 있다면 이런 것이란다. 하나는 실수나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누구나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좀 더 나아지는 법이니 처음부터 완벽하려고 하지 말기 바란다. 조금씩 좋아지는 과정 속에 기쁨이 있는 것 아니겠니. 지금까지 너는 큰 좌절을 경험하지 않아서, 비교적 행복한 느낌으로만 살아왔기에 오히려 그것이 너의 약점일 수도 있단다. 혹시라도 어려움이 닥치고 실패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를 발판 삼아 너 자신을 더욱 다듬고 성찰할 수 있기를 바란다. 사람이 아름다운 것은 약점이 없을 정도로 완벽해서가 아니라 약점을 딛고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기 때문이지.

 

3. 내가 저자라면

1) 목차

프롤로그: 우리는 언제쯤 경쟁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1.
삶과 일, 가정에 대한 작은 에세이: ‘빨리빨리’ 문화와 ‘오래오래’ 노동의 뿌리

2.
경쟁 압박은 어떻게 내면화하나?
3.
경쟁에 대한 오해와 진실

4.
경쟁교육의 허와 실: 학교가 가르치지 않은 열 가지
5.
돈벌이 경쟁과 제도화된 무책임
6.
무엇을 위한 구조조정인가?: 경쟁력 중심 vs. 삶의 질 중심 구조조정
7.
덫에 걸린 신자유주의 세계화: 이윤 동기와 생존 경쟁이 만든 거품의 붕괴
8.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앙드레 고르와 이반 일리치에서 배우기
9.
아들아, 너랑 살아서 참 기쁘구나!: 경쟁이 아닌 사랑이 인생살이의 핵심이다
에필로그: 호혜의 경제를 위하여

 

2) 본받고 싶은 점

교수인 저자의 특성 때문인지 책의 군데 군데 논문을 보는 듯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 하는 통계 등의 데이터들이 많이 보이는 데 이 때문에 더욱더 대한민국 사회의 상황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또한 쌍용차 등 최신 사례들을 책 속에 인용하고 있어 때로는 함께 분노하게 되기도 하고 저자의 주장에 동조하게 되기도 하는 등 현실감 있게 읽혔다.

 

3) 개선할 점

저자는 모두 조금씩 일하는 사회를 경쟁사회의 폐단을 없앨 수 있는 가장 좋은 해결책으로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공산주의의 것과도 조금은 비슷해보이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는 등, 그것의 구체적인 모습과 얼마나 우리 사회를 아름답고 발전적으로 만들지에 대한 내용은 책을 통해서는 알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또한 이러한 구조를 풀뿌리인 우리가 먼저 나서 변화하자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이 부분도 크게 와닿지 않았다. 아무리 우리의 인식을 변화한 들, 회사의 규제가 따르지 않는다면 한계가 있다. 이에 저자의 상상력을 조금 더 더해서라도 저자의 주장처럼 구현되는 사회의 청사진이나 우리의 힘을 통해 변할 수 있다는 부분에 대한 확신을 강화해서 보여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또한 현재 프리랜서 직업군도 다양하게 등장하고 있으며, 구글 같은 회사의 경우 협력을 기반으로 한 조직 설계를 하고 있다. 이 같은 사회 변화에 비추면 저자의 주장은 일견 고리타분해보이는 감이 없지 않아있다. 우리가 모두 협력해야 잘 살 수 있다는 인식은 공고히 하는 것은 너무나 동감이 되지만, 이것이 실천되는 형태는 더 나은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또한 마지막 부분에 가면 책이 약간 길을 잃은 것 같기도 하다. 공동체 생활에서의 우정과 환대에 대한 이야기를 기술하면서 일리치의 이야기. 앙드레 고린과 도린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등을 길게 서술하고 있는데 그 내용 자체로는 감동이나 현대를 사는 우리가 어찌 적용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그들과 같은 삶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요즘의 삶에서는 이 또한 돈과 여유가 필요하니 말이다. 그들 또한 그 시대에서도 남다른 사람들이 아니었는가. 우리와 같은 갑남을녀에게는 우와라고 잠시 감탄하고 넘어갈만한 사례인지도 모른다.

마지막에는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후손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도 공유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도움이 되었다. 이에 저자의 실제 이야기들을 추가적으로 다뤘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저자는 실제로 지방 캠퍼스에서 교수로 근무하는 등 다소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일견 벗어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삶을 실제로 살면서 실천해본 것들과, 발견하게 된 우리 사회의 희망, 이미 경쟁 사회의 폐단들을 극복한 공동체의 성공 사례 등과 같은 부분을 추가적으로 넣어주었으면 더욱 좋았을 것 같다.  

IP *.124.78.132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