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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22일 18시 14분 등록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고미숙, 그린비

 

1. 저자에 대하여

 

고미숙(1960~)

 

대한민국의 문학평론가. 주로 고전에 대해 연구하였다. 교수 임용에 매달리는 것보다 경제적 자립과 배움이 가능한 공간을 만들겠다는 신념으로 사회과학자들과 연구공간 <수유+너머>를 만들었다. 2004년에 출간한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는 작은 공부방에서 소수의 국문학 연구자들로 시작된 모임이 서울사회과학연구소의 사회과학자들과 결합해 <수유+너머>라는 연구공동체로 성장하는 과정을 담은 '인류학 보고서'였다. 이후 이 공동체는 <수유너머 문>, <수유너머 N>, <수유너머 길> 등 여러 모임으로 분화되었고, ·역학으로 관심 영역을 넓힌 고미숙은 <감이당>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저서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 2001, 책세상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휴머니스트. 2004

《나비와 전사》. 휴머니스트. 2006

『이 영화를 보라』, 2008, 그린비

『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 2009, 사계절

『윤선도 평전』, 2013, 한겨레출판

『두개의 별 두개의 지도 : 다산과 연암 라이벌 평전 1탄』, 2013, 북드라망

열하일기 삼종세트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개정신판, 2013, 북드라망

『삶과 문명의 눈부신 비전 열하일기』-2012, 작은길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2) -개정신판, 2013, 북드라망

 

동의보감 삼종세트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개정판, 2012, 북드라망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 사주명리학과 안티 오이디푸스』, 2012, 북드라망

『고미숙의 몸과 인문학 : 동의보감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 2013, 북드라망

 

달인 시리즈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개정판, 2012, 북드라망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개정판, 2012, 북드라망

『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개정판, 2012, 북드라망

《낭송의 달인, 호모 큐라스》. 북드라망. 2014

 

2. 내가 저자라면

 

- 책의 핵심을 몇 줄로 요약할 것.

(책의 핵심 메시지와 키워드를 가지고 내가 다른 사람에게 이 책을 명확하게 소개한다는 기분으로 쓸 것)

 

새로운 공부법을 알려주는 책

 

학교라는 근대적 제도의 산물이라는 장막 안에 갇혀 공부는 곧 점수와 학벌 따기의 사적 소유물로 전락한 가운데 공부의 목적이 자본과 권력을 얻는 것으로 집약된 시대! 공부의 진정한 의미를 일깨워 주는 책!

 

- 이 책의 특징을 몇 가지로 도출해볼 것.

(이 책의 차별점은 무엇인가? 이 책이 다른 책과 뭐가 다른가?)

 

기존 성적 올리기 비법을 담은 공부의 달인시리즈와는 현저하게 다르다.


호모 쿵푸스란?

공부를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하는 공부의 달인을 말한다.

앎에 대한 열정으로 몸을 단련하고 일상을 바꿔나가는 존재다.

인생의 모든 순간을 학습하는 호모 쿵푸스에겐 존재 자체가 곧 공부다.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가 그의 존재론이며,

공부해서 남주자가 그의 실천론이다.

 

- 특히 감동적인 장절과 해석, 그 구절에 꽂힌 이유  

 

83

고전의 시대에 좋은 부모란 자식에게 훌륭한 스승을 찾아주는 존재였다. 공자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학자들은 자기의 동료나 제자 혹은 자기의 사상적 라이벌에게 자식 교육을 맡겼다. 그러니 공부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가족의 영토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87

사제관계를 회복하고 싶다면, 새로운 공부를 시도하고 싶다면, 지금 당장 동료들을 불러 모아 살아 움직이는 학습망을 조직하라. 제도의 지원은 받으면 좋고, 아니면 그만이다. 그 자체만으로도 앎의 영역이 대폭 확장되는데, 그보다 더 큰 보상이 어디 있단 말인가. 최근 뇌과학의 성과에 따르면, 뇌의 존재 이유는 네트워킹하는 데 있다고 한다. 네트워킹을 하지 못하면 신경망이 점차 끊겨져 결국 치매나 죽음에 이른다는 것. 공부 역시 마찬가지다. 스승과 멋을 찾아가는 네트워킹을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곧 공부다.

 

92

개별적으로, 혼자만의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공부법은, 지식이란 한 개인의 두뇌의 산물이거나 노력의 결과라는 환상을 낳게 된다. 즉 남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은 사이공간자체가 지워져 버린 것이다. 게다가 학교는 지식을 철저히 사적 생산물로 취급한다. 경쟁과 점수에 의해 그 성과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가 문제라 여기는 이들도 거기에 따르는 불균형이나 모순을 단지 분배의 합리성을 통해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유식한 사람이 무식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식으로, 지식의 사적 소유 자체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이런 계몽과 시혜의 구조를 깨뜨리려면 공부법 자체가 개인의 밀실에서 대중의 광장으로 나와야 한다. 암송은 바로 그 점을 환기시켜주는 공부법이다. 암송은 형식 자체가 집합적 관계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지식의 사적 소유라는 주술에 걸려들지 않는다. 한두 사람이 튀는 것보다 다 함께 리듬을 타야 만 즐거운 공부가 가능한 까닭이다. 그렇기 때문에 암송의 배치 속에선 뛰어난 사람과 열등한 사람이 서로를 소외시킬 필요가 없다. 뛰어나면 뛰어난 때로,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소리를 합치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꾸로 인류 최고의 고전들을 소화해낼 수가 있다. 암기 위주의 공부는 단계별 학습의 한계를 넘지 못한다. 굳이 고전을 읽을 필요도, 이유도 없다. 하지만, 암소의 세계에선 초등학생도 <논어> <금강경>을 배울 수 있고, 고려가요와 사설시조, 이상과 김영랑의 시 정도야 뭐, 가볍게 주워섬길 수 있다. 뜻도 모르면서 암송을 하면 뭣하냐고? 절대 그렇지 않다! 공부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다. 뜻을 완벽하게 이해한 다음 소리를 터득하는 길도 있고, 소리 자체를 음미하다 보면 뜻이 환하게 밝혀지는 길도 있다. 또 평생 뜻도 모른 채 그저 소리로만 음미하는 텍스트도 있다. 요컨대, 암기식 공부는 학습 진도를 넘어서기 어렵지만 암송으로 하는 공부에는 진도가 따로 없다. 누구든 언제든 시작할 수 있고 동서고금의 어떤 것이건 상관없다. 마음과 몸을 열어놓기만 한다면, 원대한 지혜의 바다를 마음껏 유영할 수 있다. 암송은 정말 힘이 세다!

 

174

이 위대한 스승들이 제자들에게 전수하고 싶었던 건 어떤 구체적 이념이나 원리라기보다 배움의 열정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 이 책의 구성에 대해 논할 것.

(탄탄한가? 일관성이 있는가? 신선한가?)

 

이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된다.

학교 공부법의 문제점을 밝히는 1부와 고전에서 공부법을 찾는 2부 인생의 모든 순간을 학습하라는 3부로 구성된다.

 

책머리에

프롤로그 _ ‘세 개의 절망과 하나의 희망이 있는 풍경

 

1부 학교, 공부에 대한 거짓말을 퍼뜨리다

1. 학교, 공부를 독점하다

2. 거짓말 하나공부에는 때가 있다?

‘학번 공화국| 아줌마들의원초적 본능| 대학로와종삼이 통하는 길 | 공부엔 때가 있다!

3. 거짓말 둘독서와 공부는 별개다?

제갈량과 허생 | 책과 패스트 푸드 | 독서는 고리타분해!

4. 거짓말 셋창의성만 있으면 만사 OK?

시설과 서비스로 승부한다 | 렛잇비!―자율성에 대한 심각한 오해

 

2부 고전에서 배우는-의 공부법

1. 새로운 지도 그리기

2. ‘앎의 코뮌에 접속하라!

‘유년기’라는 함정 | 학교와코뮌의 차이 | 꿈은 이루어진다! | 공부는네트워킹’!

3. 암송과 구술아는 만큼 행복하다!

「변신」과 「오감도」 | 암송의 힘 |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 | 구술, 리더십과 유머의 원천

4. 독서로 인생역전!―호모 부커스(Homo Bookus)

책과 우리 시대 | 책과 몸찰떡궁합 |책과 연애, 그 은밀한 접속 | 오래된 미래, 도래할 과거 | 고전, 우정의 메신저

5. 글쓰기는 신체를 어떻게 단련시키나

공부의 최종심급, 글쓰기 | 서곡 | 차이를 구성하라 | 일이관지(一以貫之) | 지전능변(知典能變) | 글쓰기와 운명

 

3부 인생의 모든 순간을 학습하라-“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1. 평생의 일대사

2. “천지에 가득한 책의 정기

3. 몸과 일상, 문명의 거처

자폐증 앓는 사회 | 사랑, 이보다 훌륭한 텍스트는 없다! | 질병과 죽음최고의 스승 | 운명애(Amor fati)를 터득하라!네가 먹는 음식이 바로 너다!”

4. 스승, 배움의 전령사

스승과 친구 | 감염과 촉발 | 천하를 그대 품안에 | 덧달기 1: 공부의 달인들 | 덧달기 2: ‘공부와 밥과 우정이 있는 풍경

5. 공부는 어떻게 혁명과 조우하는가?

고향은 없다! 가장 억압받고, 가장 소외되지 않은| 유목 혹은 마법의 변신술

에필로그 _ 공부해서 남 주자!

인물 찾아보기

 

- 내 책을 쓸 때의 참고사항을 기술할 것. 이 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아이디어를 정리할 것.

 

<가족에게 권하는 인문학>의 배움의 참고도서로 링크해 놓았다. 내가 쓸 책 뿐만 아니라 내 삶에도 끌어들여야 할 요소가 많은 책이다.

 

호모 쿵푸스의 공부법!

책을 읽어라. 특히 원대한 비전, 눈부신 지혜로 가득 찬 고전을 섭렵하라.

소리 내어 암송하라. 소리의 공명을 통해 다른 이들과 접속하라.

사람들 앞에서 구술하라. 지식과 정보에 서사적 육체를 입혀라.

앎의 코뮌을 조직하라. 즉 스승을 만나고 벗과 함께 공부하라.

일상에서 공부하라. 질병과 사랑, 밥과 몸, 모든 것을 배움으로 변환하라.

 

3.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책머리에

 

7

공부란 세상을 향해 이런 질문의 그물망을 던지는 것이다. “크게 의심하는 바가 없으면, 큰 깨달음이 없다.”(홍대용) 고로, 질문의 크기가 곧 내 삶의 크기를 결정한다!

 

프롤로그 _ ‘세 개의 절망과 하나의 희망이 있는 풍경

 

27

, 그럼 낡고 병든 사슬을 끊고 좋은 앎과 좋은 삶이 일치하는 멋진 신세계를 향하여, 출발!

 

1부 학교, 공부에 대한 거짓말을 퍼뜨리다

 

31

발트해 연안의 거대한 숲.

나무와 나무 사이로 붉은 장막들이 나부낀다. 몰이꾼들이 요란하게 나팔소리를 울리며 한 무리의 늑대를 붉은 장막 쪽으로 몰아붙인다. 빼곡히 늘어선 나무들과 울퉁불퉁한 바위, 급한 여울과 가시덤불 사이를 날렵하게 달리던 늑대들이 장막 앞에서 흠칫. 멈춰 선다. 울타리도 아니고 철조망도 아니고, 그저 펄럭이는 장막일 뿐인데, 대체 왜? 결코 넘을 수 없는 금지의 선이라 스스로 간주해버린 것이다. 머뭇거리는 사이, 몰이꾼들이 늑대들의 숨통을 끊어버린다.

 

우스운가? 혹은 불쌍한가? 하지만 공부의 정글을 미친듯이 헤매고 다닐 그대들의 운명 또한 다르지 않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성적과 경쟁, 성공의 신화만이 판치는 정글에 내몰린 채, 끊없이 이어지는 철인 5종 경기를 방불케 하는 각종 장애물 넘기를 강요받지 않은가. 방법은 오직 하나, 정글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뿐. 하지만 죽어라 달려가다 다들 어떤 표지판 앞에서 멈추어 선다. ‘학교식 공부가 짜 놓은 장막에 걸린 탓이다. 허공을 두루 덮는 새빨간 거짓말의 장막에.

하여, 호모 쿵푸스의 제1초식은 장막 너머로 도주하기’.

 

남편의 파업과 나의 퇴사로 자연스레 호모쿵푸스의 삶을 살게 된 우리 가족. 사교육을 시킬 수도 선행학습을 받을 수도 없었던 우리 가족. 여태껏 온 가족이 재미나게 잘 공부해왔다. 큰 아이가 초등 4학년이 되는 시점, 우리에게 혼란이 찾아왔다. ‘학교식 공부가 짜놓은 장막에 걸린 것인가? 바로 지금, 온 가족이 모두 호모 쿵푸스가 되어야 한다!

 

1. 학교, 공부를 독점하다

2. 거짓말 하나공부에는 때가 있다?

‘학번 공화국| 아줌마들의원초적 본능| 대학로와종삼이 통하는 길 | 공부엔 때가 있다!

 

40

공부란 눈 앞의 실리를 따라가는 것과는 정반대의 벡터를 지닌다. 오히려 그런 것들과 과감히 결별하고 아주 낯설고 이질적인 삶을 구성하는 것, 삶과 우주에 대한 원대한 비전을 탐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공부다. 더 간단히 말하면, 공부는 무엇보다 자유에의 도정이어야 한다. 자본과 권력, 나아가 습속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해야 비로소 공부를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대학은 이런 식의 공부법자체를 잊은 지 오래다.

 

49

공부란 궁극적으로 자기를 넘어서는 것일진대, 거기에는 우와 열이 있을 수 없다. 그저 자기가 선 자리에서 한 걸음씩 나갈 수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할 따름이다. “남이 한번 해서 그것에 능하다면 자기는 백 번 할 것이며, 남이 열 번 해서 그것이 능하다면 자기는 천 번 할 것이다.” (<중용>) 밥을 먹고 물을 마시듯 꾸준히 밀고 가는 항심과 늘 처음으로 돌아가 배움의 태세를 갖추는 하심, 공부에 필요한 건 오직 이 두 가지뿐이다.

 

50

배우고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논어>의 첫머리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서 란 여러 가지로 해석 가능하다. ‘틈이 나면’, ‘상태가 무르익으면’, 혹은 때때로’. 뭐가 되었던 공자님의 속뜻은 시도때도 없이 무시로계속 정진하라는 뜻이었을 터. 그러므로 공부엔 다 때가 있다! 숨을 쉬고 있을 때, 그때가 바로 공부할 때이다.

 

3. 거짓말 둘독서와 공부는 별개다?

제갈량과 허생 | 책과 패스트 푸드 | 독서는 고리타분해!

 

52

다산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편지를 쓴다. ‘이제 가문이 망했으니 네가 참으로 독서할 때를 만났구나.” 참 대단한 아버지다. 보통 아버지 같으면 당장 가문을 살릴 방도를 마련해보라고 닦달을 하겠구만, 이 아버지는 쫄딱 망한 주제에 아들한테 마침내 독서의 찬스가 왔으니 절대 놓치지 말라고 한다. 이 황당한 아버지에 따르면, 독서, 이 한가지 일은 위로 성현과 짝할 수 있고, 아래로 뭇 백성을 깨우칠 수 있으며, 그윽하게는 귀신과 통할 수 있고, 밝게는 왕도와 패도의 방략을 터득하여 우주를 지탱할 수 있는 것이니 부디 책을 손에서 놓지 말라고 당부하고 또 당부한다. 성현과 짝하고 백성을 깨우친다는 건 대충 납득이 되지만, 귀신과 통하고 우주를 지탱할 수도 있다고? 좀 뻥이 센 거 아냐? 하지만 설마 그럴 리가 있겠는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다산 정약용이. 그것도 유배지에서 자기 아들에게 헛말을 했겠는가.

 

57

최근 분당에 있는 이우학교에 200북스(중학교 고등학교를 마치는 동안 200권의 책을 읽자는 취지에서 만든 동아리)가 생겼다고 하는데, 그런 동아리가 전국 곳곳에 생긴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교육적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입시의 중압감만 떨쳐버린다면, 중고등학교 시절 동서고금의 웬만한 고전은 다 섭렵할 수 있을 테고, 장담하건대, 그것만으로 허생이나 제갈량에 버금가는 카리스마를 키울 수 있다. 분명!

 

4. 거짓말 셋창의성만 있으면 만사 OK?

시설과 서비스로 승부한다 | 렛잇비!―자율성에 대한 심각한 오해

 

63

이반 일리히에 따르면, 학교가 유포한 환상 가운데 가장 나쁜 것이 사람들을 제도적 서비스에 길들이는 것이라 한다. , 서비스가 좋아질수록 삶의 질이 향상된다고 착각하는 것. 예컨대, 의료체제가 복잡해지면 건강해진다고 여기고, 학교가 많아지면 교육 수준이 높아진다고 착각하고, 고석도로가 뚫리면 생활수준이 높아진다고 생각하는 식으로, 하지만 그 결과는 자립적 활동력을 상실한 신체 곧 제도에 길들여진 노예들을 길러낼 뿐이다. 오호, 유감스럽긴 하지만 맞는 말인 거 같다. 우리 교육 현실이 딱 그 꼴이다. 시설과 서비스는 나날이 좋아지는데, 학생들은 창의성은커녕 나날이 하향 평준화되고 있으니 말이다.

 

66

콩도르세는 이렇게 말했다. “교육의 목적은 현 제도의 추종자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제도를 비판하고 개선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다.” , 기존의 배치를 거스르면서 전혀 다른 욕망의 지도를 그려낼 수 있는 과감성. 전혀 다른 삶을 창안할 수 있는 상상력, 뭐 이런 것들이 창의성의 진짜 의미에 값한다. 예를 들면 어떻게 하면 우리 시대에 돈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혹은 사람마다 스스로 몸을 돌볼 능력을 터득하여 병원 없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공부로 축제를 열면 어떻게 될까? 가족이 해체된 시대의 새로운 공동체는 어떻게 가능한가? 등등. 사람들은 다들 머리 싸매고 돈을 벌 궁리만 하고 있다. 넓은 아파트에 아이들 교육에 노후대책까지 몽땅 혼자서 다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구들과 더불어 함께 해결한다고 생각해보라. 일단 기본 비용이 반도 들지 않을뿐더러, 함께 살면 먹는 거나 입는 것이 몇 배로 풍족해진다. 또 굳이 노후 대책을 따로 할 필요가 없다. 함께 노년을 보낼 친구가 있는데, 무슨 대책이 또 필요하단 말인가? 중요한 건 의기투합하는 친구가 있느냐인데, 바로 어릴 때부터 이걸 훈련해야 된다는 것이다. 의리, 우정, 신의 창의적으로 산다는 건 바로 이런 가치를 몸에 익히는 것이기도 하다.

 

2부 고전에서 배우는-의 공부법

 

장막을 그저 장막이라 여기고 휘리릭! 지나가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장막 너머엔 과연 무엇이 있을까? 광활한 평야, 신비로운 계곡, 운무 자욱한 봉우리, 기암괴석 등등.

 

그럼, 거짓말의 장막 너머로 도주한 호모 쿵푸스들 앞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원대한 비전, 심오한 지헤, 우주의 농담으로 가득찬 고전의 향연이 펼쳐질 것이다. 동서고금의 고수들이 인생과 우주를 놓고 진검승부를 겨루는 천 개의 고원, 천 개의 길’! 거기에선 솔로의 고독한 실루엣이 아니라, 코뮌의 화려한 교향곡이 울려 퍼지고, 유리구슬에 갇힌 난쟁이들의 비탄이 아니라, 천하를 주름잡는 거인들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흘러 넘치리라. 학벌, 위계, 돈과 명예 따위는 말끔히 잊어버려라! 필요한 건 다만 두려움 없는 용기와 지칠 줄 모르는 끈기 뿐. ‘노하우는 책과 우정!

하여, 호모 쿵푸스의 제 2초식은 천 개의 고원을 향하여, ‘거침없이 하이킥!’

 

학교식 공부법이라는 장막을 걷고! 거침없이!!

 

1. 새로운 지도 그리기

 

76

학교는 20세기 초 근대 국민국가의 도래와 함께 시작되었다. 중세의 신분제에서 해방된 사람들을 국민국가가 요구하는 근대적 주체로 재탄생시키는 가장 첨단의 제도적 장치가 바로 학교였던 것. 그 때 이후 학교의 영향력은 실로 막강해져 지금은 누구도 학교 없는 사회를 상상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사실 학교는 어디까지나 20세기 근대의 산물일 뿐이다. 따라서 정말로 학교식 공부의 대안을 꿈꾼다면 근대적 제도 교육의 틀을 넘어서는 탈근대적 운동이 요구된다.

 

탈근대적 모색에는 아주 다양한 길이 있다. 인터넷이나 첨단 테크놀로지를 활용하여 근대적 시스템으로부터 탈주하는 길도 있고, 전위예술의 힘을 빌려 근대적 습속을 전복하는 방식도 가능할 것이다. 고전 또한 그 가운데 하나다. 고전이란 시대의 통념과 억압을 뚫고 삶과 사유의 운부신 비전을 탐색한 전위적 텍스트를 말한다. 고전이 시대마다 서로 다른 의미망을 구성할 수 있는 건 바로 그 전위적 열정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고전이야말로 진정, ‘-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고전은 늘 새로운 얼굴로 되돌아온다. , 그것은 과거로부터 온 것이지만 늘 우리에게 도래할 시간에 대해 예고해준다. 오래된 미래로서의 고전! 고전의 전위성에서 머지않아 지금, ;’로 도래할 삶의 지혜와 비전을 길어 올릴 것. 이것이 학교식 공부, 근대적 교육을 넘어 새로운 지도 그리기에 나선 호모 쿵푸스의 전략이다.

 

2. ‘앎의 코뮌에 접속하라!

‘유년기’라는 함정 | 학교와코뮌의 차이 | 꿈은 이루어진다! | 공부는네트워킹’!

 

79

인간의 일부분을 아이들이라는 범주로 분류하는 것만으로써 우리들은 현재까지 그들을 학교에서 교사의 권위에 복종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 학교는 아이들을 유년기라는 연령대에 묶어놓고 그 단계에 맞는 사고만을 주입함으로써 나머지 다른 능력을 몽땅 회수해버린 것이다. 그래야만 교사와 어른에게 기꺼이 복종하게 될 것이므로. 어디 그뿐인가. 유년기는 소년기. 소년기는 다시 청년기를 만들고, 그에 따라 연령별 학습을 정착시킨다. 이런 배치 하에서 공부를 한다는 건 미성년기에 학교를 가는 것이고, 동시에 자격증이나 학벌을 따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83

고전의 시대에 좋은 부모란 자식에게 훌륭한 스승을 찾아주는 존재였다. 공자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학자들은 자기의 동료나 제자 혹은 자기의 사상적 라이벌에게 자식 교육을 맡겼다. 그러니 공부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가족의 영토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87

사제관계를 회복하고 싶다면, 새로운 공부를 시도하고 싶다면, 지금 당장 동료들을 불러 모아 살아 움직이는 학습망을 조직하라. 제도의 지원은 받으면 좋고, 아니면 그만이다. 그 자체만으로도 앎의 영역이 대폭 확장되는데, 그보다 더 큰 보상이 어디 있단 말인가. 최근 뇌과학의 성과에 따르면, 뇌의 존재 이유는 네트워킹하는 데 있다고 한다. 네트워킹을 하지 못하면 신경망이 점차 끊겨져 결국 치매나 죽음에 이른다는 것. 공부 역시 마찬가지다. 스승과 멋을 찾아가는 네트워킹을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곧 공부다.

 

네트워킹, 온라인 까페나 블로그, 페이스북 활동을 활발히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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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이나 돼야 가능하다고? 무슨 소리! 고등학교, 중학교 아니 초등학교 때부터 얼마든지 가능하다. 스포츠나 음악, 연극이나 댄스 같은 활동은 당연히 동아리를 만들어 함께 하면서, 왜 공부는 여럿이 함께 한다는 걸 생각조차 하지 못 하는가. 함께 모여 고전의 명문장들을 암송하고 함께 토론하고 그것으로 다양한 게임과 놀이를 만들어내고 또 그 공부를 바탕으로 또 다른 밴드와 결합하고 이게 바로 지식의 향연이다. 학창시절에는 물론 성인이 된 다음에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런 향연을 조직할 수 있는 능력만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공부의 최고경지에 도달했다 해도 좋으리라. “군자는 글로써 벗을 만나고, 벗으로써 어짊을 북돋운다.”(<논어> 안연편)

 

3. 암송과 구술아는 만큼 행복하다!

「변신」과 「오감도」 | 암송의 힘 |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 | 구술, 리더십과 유머의 원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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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적으로, 혼자만의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공부법은, 지식이란 한 개인의 두뇌의 산물이거나 노력의 결과라는 환상을 낳게 된다. 즉 남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은 사이공간자체가 지워져 버린 것이다. 게다가 학교는 지식을 철저히 사적 생산물로 취급한다. 경쟁과 점수에 의해 그 성과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가 문제라 여기는 이들도 거기에 따르는 불균형이나 모순을 단지 분배의 합리성을 통해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유식한 사람이 무식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식으로, 지식의 사적 소유 자체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이런 계몽과 시혜의 구조를 깨뜨리려면 공부법 자체가 개인의 밀실에서 대중의 광장으로 나와야 한다. 암송은 바로 그 점을 환기시켜주는 공부법이다. 암송은 형식 자체가 집합적 관계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지식의 사적 소유라는 주술에 걸려들지 않는다. 한두 사람이 튀는 것보다 다 함께 리듬을 타야 만 즐거운 공부가 가능한 까닭이다. 그렇기 때문에 암송의 배치 속에선 뛰어난 사람과 열등한 사람이 서로를 소외시킬 필요가 없다. 뛰어나면 뛰어난 때로,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소리를 합치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꾸로 인류 최고의 고전들을 소화해낼 수가 있다. 암기 위주의 공부는 단계별 학습의 한계를 넘지 못한다. 굳이 고전을 읽을 필요도, 이유도 없다. 하지만, 암소의 세계에선 초등학생도 <논어> <금강경>을 배울 수 있고, 고려가요와 사설시조, 이상과 김영랑의 시 정도야 뭐, 가볍게 주워섬길 수 있다. 뜻도 모르면서 암송을 하면 뭣하냐고? 절대 그렇지 않다! 공부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다. 뜻을 완벽하게 이해한 다음 소리를 터득하는 길도 있고, 소리 자체를 음미하다 보면 뜻이 환하게 밝혀지는 길도 있다. 또 평생 뜻도 모른 채 그저 소리로만 음미하는 텍스트도 있다. 요컨대, 암기식 공부는 학습 진도를 넘어서기 어렵지만 암송으로 하는 공부에는 진도가 따로 없다. 누구든 언제든 시작할 수 있고 동서고금의 어떤 것이건 상관없다. 마음과 몸을 열어놓기만 한다면, 원대한 지혜의 바다를 마음껏 유영할 수 있다. 암송은 정말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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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론 조만간 암송교실 같은 걸 열고 싶다. 암송교실이란 동서고금의 명문장들을 뽑아서 소리 높여 암송만 하는 코스를 말한다. 음악을 감상하고 영화를 보듯, 인류가 만들어낸 최고의 음성들과 접속하는 행복을 맛보기 위해서다. ‘소리의 공명을 통한 세대간 공감의 장을 마련하는 데도 효과 만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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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송과 더불어 중요한 공부법 하나가 구술이다. 구술이란 어떤 상황이나 문맥을 서사적으로 재현해내는 능력이다. 달리 말하면, 대상을 장악하는 힘, 대상과 교호하여 새로운 국면을 연출하는 테크닉이기도 하다. 책이나 영화, 기타 다른 자료를 접한 다음, 그걸 재현해보라고 하면, 그 학생의 지적 수준이 그대로 드러난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말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거꾸로, 말하기를 훈련하면 보는 것과 아는 것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런 점에서 지식이란 근원적으로 서사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천지를 가득 메우고 있는 정보의 흐름을 어떤 식으로든 절단, 채취해야만 앎으로 변환되는데, 그때 그것은 반드시 어떤 맥락 속에 놓여야 한다. 말하자면 정보의 계열에 서사적 육체를 입힐 수 있어야 비로소 지식의 영역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은 인문학적 지식은 물론이거니와, 자연과학의 세계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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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육 시장에 내몰리고 싶지 않은 꼬마들, 성적의 위계와 입시의 중압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청소년들, 기성세대의 고루한 관습에 저항하고 싶은 청년들, 시각의 지배에 예속되기를 원치 않는 직장인들, 매너리즘에 찌든 일상의 회로를 벗어나고 싶은 아줌마들, 삶의 비전과 지혜를 통찰하고 싶은 노인들 이 모든 대중지성이 하나로 연결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독서뿐이다. “책 속에 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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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을 읽어야 하나?

일단 나보다 훨씬 폭넓게, 강렬하게 살았던 분들이 쓴 책이어야 한다. 또 저자는 알 수 없지만, 생명의 역동성이 살아 숨쉬는 책, 생사를 가로지르는 원대한 비전이 담긴 책이어야 한다. 새로운 시대를 예감하는 책, 한 시대의 통념에 맞서 치열하게 투쟁한 책, 마주칠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책 등등. 그런 책들을 우리는 고전이라고 부른다.

 

왜 고전을 읽어야 하는가?

고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이자 매트릭스이기 때문이다. <주역>처럼 실제로 우주의 비의가 담겨 있는 것도 있고, ‘불경이나 성경처럼 인간의 존재론적 물음을 탐구하는 것도 있고, <돈키호테> <열하일기>처럼 삶의 지혜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것도 있다. 한 인간이 평생 경험할 수 있는 시공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하지만, 고전이 있기에 그 협소한 시공간을 넘어 아득한 역사의 궤적을 조망할 수도 있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비전을 탐구할 수도 있다. 전혀 낯설고 이질적인 삶을 체험할 수도 있고 생명과 존재의 심연을 항해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그런 책들과 접속하는 순간, 나는 단번에 우주적 존재로 도약한다. 앉아서 유목하기! 골방에 앉아서도 천하의 이치를 관통할 수 있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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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기로는 <서유기>,<수호지>,<홍루몽> 등과 같은 장편이나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 프루스트나 보르헤스 등 사상적 깊이를 갖춘 소설과 함께 읽는 것이다. 소설적 재미도 맛보고 동시에 사유의 힘도 기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노자와 장자, 사서삼경 등 동서양의 사상사를 넘나들어야 한다. 물론 이건 출발에 지나지 않는다. 각 시대를 장식한 고수들의 가르침은 특정 분야로 환원되지 않는다. 거기에는 존재에 대한 탐구를 비롯하여, 습속과 무의식에 대한 인류학적 탐사도 있고, 빅뱅과 별의 탄생 및 뇌와 생각의 출현 같은 생명과 우주의 영역도 있다. 혹은 질병과 죽음의 세계를 다룬 의학의 영역도 있다.

 

오래된 미래 혹은 도래할 과거로서의 고전! 아득한 과거와 첨단의 미래가 어우러져 진검승부를 펼치는 낯설고 경이로운 시공간, 이 매트릭스에 접속하는 순간,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너무 광대해소 엄두가 안 난다고? 돈 워리! 일단 클릭하고 보라! 클릭의 노하우는 간단하다. 암송과 구술이 그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고전은 눈이 아니라 소리로 만나야 한다. 그래야 기질이 바뀌고 내공이 쌓이는 것이므로.

 

그에 반해, 쉽고 재미있는 책, 읽어서 몽땅 이해되는 책은 당장 덮어야 한다. 생각해보라. 그건 저자의 수준이 나랑 똑같다는 뜻이다. 그런 책으로부터 대체 뭘 배울 수 있단 말인가? 10대들이 열광하는 일본의 하이틴 소설, 직장 여성들을 겨냥한 삼류 연애담이나 감성적 에세이들,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탐정소설류, 재테크나 성공의 신화를 적당히 가공한 책들. 이런 건 독서의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건 그야말로 취미 활동에 불과하다. 특히 여기에 몰입해서 다른 장르를 멀리하게 되면 그건 게임 중독이나 다를 바가 없다. 스스로 그런 조짐이 느껴질 경우 당장 멈추어야 한다. 패스트푸드에 길들여지면 다른 음식을 먹을 능력이 없어지는 것처럼 그런 야들야들한 책에 맛들이다 보면 신체는 한없이 나약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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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인문학>의 저자 얼 쇼리스는 빈민들에게 인문학을 가르틴 것으로 유명하다.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왠 인문학? 그가 보기에, 빈민들이 겪는 박탈감은 경제적인 것이 아니었다. 빈민들에겐 그저 대활 교육이나 직업과 관련한 공부만 시켜주면 된다고 생각하는 건 그야말로 어설픈 동정심이거나 감성적 사치에 불과하다. 그들이 진정 박탈당한 것은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통찰할 수 있는 정신적 자산이었다. 한 번도 지적인 풍요로움을 경험해본 적이 없다 보니 늘 충동에 내몰리게 되고 그러다 보면 범죄와 마약의 수렁에서 헤어날 길이 없는 것이다. 얼 쇼리스는 이렇게 주장한다. 빈민운동이란 빈민들이 스스로를 성찰하고 탐색할 수 있는 학습의 장을 마련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다시 말해, 그들이 철학적으로 무장하게 된다면, 그들은 더 이상 충동에 몸을 내맡기지도 않을 뿐 아니라, 당당하게 정치적이고 공적인 실천의 장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4. 독서로 인생역전!―호모 부커스(Homo Bookus)

책과 우리 시대 | 책과 몸찰떡궁합 |책과 연애, 그 은밀한 접속 | 오래된 미래, 도래할 과거 | 고전, 우정의 메신저

5. 글쓰기는 신체를 어떻게 단련시키나

공부의 최종심급, 글쓰기 | 서곡 | 차이를 구성하라 | 일이관지(一以貫之) | 지전능변(知典能變) | 글쓰기와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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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질문을 던질 것, 하나의 논리로 관통할 것 이 두 가지가 내가 석사과정 내내 갈고 닦은 글쓰기의 초석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글의 완성도가 아니라 신체적 능력을 증식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앎과 삶, 글과 신체의 결합, 지식의 거대한 순환 글쓰기의 집합적 배치 등 지금 연구실의 주요 강령을 이루는 토대를 나는 철학으로 배우기 이전, 현장에서 실감으로 체득했던 것이다.

 

3부 인생의 모든 순간을 학습하라-“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1. 평생의 일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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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어야 우주적 존재가 될 수 있다. 이건 불변의 진리다. 그런데, 그렇게 공부를 하다 보면 또 한번의 비약이 일어난다. , 언어와 문자의 경계를 넘어 세상 모든 것이 이 되는 경이를 체험하게 된다. 그야말로 문자와 몸과 세계가 혼연일체가 되는 순간. “앎은 행위에서 시작되고, 행위는 앎의 완성” (왕양명)이 되는 지행합일의 경지, 이것이 바로 고전의 학인들이 지향했던 공부의 진경이다.

 

2. “천지에 가득한 책의 정기

3. 몸과 일상, 문명의 거처

자폐증 앓는 사회 | 사랑, 이보다 훌륭한 텍스트는 없다! | 질병과 죽음최고의 스승 | 운명애(Amor fati)를 터득하라!네가 먹는 음식이 바로 너다!”

4. 스승, 배움의 전령사

스승과 친구 | 감염과 촉발 | 천하를 그대 품안에 | 덧달기 1: 공부의 달인들 | 덧달기 2: ‘공부와 밥과 우정이 있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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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하는 묘리는 다른 것이 없다. 모르는 것이 있다면 길 가는 사람을 붙들고서라도 물어야 한다. 어린 종이라도 나보다 한 자라도 더 안다면 그에게 배울 것이다. 옛날 순임금은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며 그릇을 굽고 물고기를 잡는 것에서 임금 노릇을 하는 데 이르기까지 어느 것도 남에게서 배워오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공자는 말하기를 자기가 어려서 미천했기 때문에 상일에 아주 익숙했다고 했으니, 그 역시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며 그릇 굽고 물고기 잡는 따위의 일일 것이다. 비록 순임금이나 공자와 같이 거룩하고 재주 많은 분도 물건을 보고서 기교를 생각해내며 일에 당해서 기구를 만들자면 시일도 부족하고 지혜도 모자랐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순임금과 공자가 성인이 된 것도 남에게 묻기를 좋아해서 배우기를 잘한 데 지나지 않는다. – 박지원, <연암집>, 북학의서에서

 

그렇다. 공부란 바로 이것, 잘 배우는 능력에 다름 아니다. 순임금과 공자가 위대한 성인이 된 것도 그 때문이라지 않는가. 공자님은 학자니까 그렇다쳐도 순임금은 천하를 다스리는 제왕이었음에도 저렇게 열심히 배웠다니 더더욱 감동이 아닐 수 없다. 요컨대 연암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성인이란 남을 가르치고 훈계하는 존재가 아니라 남보다 앞서 부지런히 배우는 존재라는 것이다. 부처님도 제자들에게 자신은 스승이 아니라, 길을 함께 가는 벗일 뿐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 위대한 스승들이 제자들에게 전수하고 싶었던 건 어떤 구체적 이념이나 원리라기보다 배움의 열정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그것만 있다면 아라비아 사막이건 시베리아 벌판이건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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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지고 보면 부모 자식 관계를 돈독히 하는 데도 공부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지금 같은 핵가족 시대에 자식에의 배려는 자칫 과잉보호로 빠지기 십상이다. 더구나 지금은 아이들이 집안의 제왕으로 군림하고 있지 않은가. 자칫하면 서로에 대한 의존과 집착에 빠져들 확률이 아주 높다. 하지만 부모와 자식이 함께 공부를 하면 이런 함정에서 벗어나 평생의 길동무가 될 수 있다. 요컨대 부모는 단지 배움으로써만 자식을 가르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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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는 말했다. “행복해지기 위해 어린아이에게 더 기다리라고, 노인에게 이미 지나갔다고, 노예나 매춘부에게 포기하라고 말해선 안 된다. 누구나 지금, 그 자리에서 함께 행복해야 한다.” 공부 또한 그러하다. 공부하면 이 다음에 훌륭한 사람이 되고, 뭔가를 얻게 될 거라고 말 해선 안 된다. 공부하는 그 순간, 공부와 공부 사이에 있다는 바로 그것이 공부의 목적이자 이유여야 한다. 고로 공부는 존재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5. 공부는 어떻게 혁명과 조우하는가?

고향은 없다! 가장 억압받고, 가장 소외되지 않은| 유목 혹은 마법의 변신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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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란 고향으로부터 한 발자국씩 작별을 고하는 것이어야 한다. 태어나기 위해선 어미의 뱃속을 떠나야 하듯, 어른이 되고 현자가 되려면 고향의 품을 떠나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또 다른 고향을 찾아서>? 더 아름다운 세상을 향하여? 아니다! 새로운 장소를 찾아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향이라는 표상 자체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다.

 

요컨대 공부란 특정 시공간에 고착되지 않고 끊임없이 다른 존재로 변이하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의 변이를 통해 세상의 질서와 배치를 바꾸는 것. 거기가 바로 공부가 혁명과 조우하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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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이란 무엇인가? 억압과 소외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억압에 저항하고 소외를 극복하기 위한 투쟁, 그것이 곧 혁명이다. 그것은 어디로부터 시작하는가? 공부로부터 시작한다. 인생과 우주에 대한 원대한 비전을 탐구하는 공부. 이 공부를 통해 삶을 통찰하는 힘이 생길 때 비로소 존재의 근원적 소외를 극복할 수 있다. 그리고 소외되지 않는 자만이 구조적 억압에 맞서 싸울 수 있다.

 

노동해방이란 노동자가 중산층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그대로 오늘은 이 일, 내일은 저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야만 소외된 노동이 아닌 자유로운 활동을 능동적으로 창안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스스로 자율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 즉 나의 일상과 세계를 하나의 서사로 엮을 수 있는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래야만 삶으로부터 소외되지 않을 수 있다. 맑스가 말한 비판의 의미도 그런 것이었으리라.

 

에필로그 _ 공부해서 남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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