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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23일 08시 46분 등록

<아내의 역사>

1 저자에 대하여

매릴린 옐롬 (Marilyn Yalom)

스탠퍼드 대학의 미셸 클레이만 젠더 연구소에 재직 중인 원로학자이다. 소르본느 대학에서 현대문학을, 웰즐리 대학에서 프랑스어를 전공했다. 하버드 대학에서 독일어교육, 프랑스어교육 석사학위(M. A. T.),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비교문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저서로 《모성, 죽음, 그리고 광기의 문헌Maternity, Mortality, and the Literature of Madness(1985), 《폭풍의 시간Le Temps des Orages(1989), 《냉혈 자매Blood Sisters(1993), 《체스 퀸의 탄생Birth of the Chess Queen(2004), 《미국인의 안식처The American Resting Place(2008) 등이 있다. 저서 중 《유방의 역사》(1999)는 한국에서도 번역서로 출간되었다.

 

2 내 마음을 무찌르는 글귀

들어가는 글

009 옛날 여성들은 경제적 지원을 받기 위해서, 가족 간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서, 아이를 낳기 위해서, 외로워서, 다른 여자들처럼 평범하게 살기 위해서 등의 이유로 결혼을 했다. 성직자의 아내, 제빵사의 아내, 의사의 아내처럼 누군가의 아내가 된다는 것은 타고난소명을 완수했음을 세상에 알리는 일이었다. 행복한 결혼이든, 그렇지 않든 결혼반지는 여성의 가치를 평가하는 척도가 되었다.

009~010 오늘날에는 결혼이 성적 즐거움과 안락한 가정을 얻기 위해 그리고 어머니가 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 아니다. 오늘날 미국의 아이들 가운데 40퍼센트는 혼외 관계에서 태어나고 있다.

010 나는 지난 50년간 여러 가지 측면에서 나타난 아내상의 변모가 매우 오랫동안 진행되어온 변화의 정수라고 생각한다. 비록 시대에 따라 변해왔고 새로운 그리고 좀 더 절박한 문제들에 자리를 내주기도 했지만 성경 시대와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시작되어 우리시대까지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문제들에 초점을 맞추려고 했다. 우리 시대에 특히 논란이 되고 있는 문제들 가운데 몇 가지는 그 뿌리가 수백 년, 아니 수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있다.

013 과거에는 대부분의 결혼이 사랑보다는 금전적 이유로 결정되었다. 남자들은 지참금이 있는 여자와 결혼을 했고 여자들은 부양 능력이 있는 남자와 결혼을 했다. 구약 시대부터 1950년대에 이르기까지 아내를 먹여 살리는 것은 남편의 의무였다. 여자는 그 대가로 섹스, 아이, 그리고 가사 노동을 제공했다. 그것은 쌍방이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일 뿐만 아니라 종교법과 민법에 성문화되어 있었다.

014~015 나는 결혼을 결정하는 데 사랑이 중요한 요소가 된 것이 16세기, 특히 영국에서였다고 믿는 학파에 속한다. 사랑을 중요하게 여기는 결혼관은 17세기에 청교도들이 이주하면서 미국으로 전파되었고, 18세기 후반에는 중류층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귀족과 상류층의 경우에는 20세기까지도 배우자를 선택하는 데 부와 가문, 지위를 중요하게 고려했다. 그렇다고 해서 옛날 부부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부부가 열정적인 사랑을 나누었던 고대 히브리인, 그리스인, 로마인들의 사례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근대 이전에는 연애결혼보다 중매결혼이 일반적이었고, 신랑과 신부는 사랑에 대한 기대를 품지 않았다.

015 회초리가 남편의 엄지손가락만 해질 때까지 아내를 때려도 좋다는 엄지손가락의 법칙 19세기까지도 영국과 미국의 여러 지역에서 존재했다.

016 어떤 사람들에게 아내란 여전히 귀여운 여자이거나 깨지기 쉬운 그릇’, 즉 성경, 중세 시대, 종교개혁의 이론에 따르면 남편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이브의 딸에 불과하다.

017~018 비록 90퍼센트 이상의 미국인이 일생에 최소한 한 번은 결혼을 하지만 모든 사람이 아내 또는 남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혼한 사람의 4명 중 3명은 재혼을 한다.

018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1552년에 만들어진 영국 국교회의 기도서(그 기원은 중세에 라틴어, 프랑스어, 영어로 각각 기록된 기도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에 수록된 결혼 의례에 따라 결혼식을 치른다. 결혼 서약은 여전히 아름답게 들린다. (중략) 원래 아내는 복종할 것도 함께 맹세했지만 얼마 전부터 이 구절은 삭제되었다. 이 작은 변화를 제외하면 21세기의 여성은 중세나 르네상스 시기의 신부들과 똑 같은 맹세를 한다. 이것은 작지만 중요한 차이이며 다가올 시간 속에서 아내의 미래상을 규정짓게 될 변화다.

  1. 재산 목록 1호는 아내 고대 세계의 아내들: 성경과 그리스. 로마 시대의 아내상

023 왜 우리는 성경에 등장하는 아내들과 그리스. 로마 시대의 아내들로부터 출발해야 하는가? 그것은 이러한 고대 문명의 아내에 대한 종교적, 법적, 사회적 관습들이 결혼한 여성에 대한 처우의 원형이 되었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타난 아내상

025 아담의 갈비뼈로 이브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여성이 본질적으로 남성보다 열등하며 남성에게 의존하며 살아가게 되어 있다는 저 오랜 논쟁의 원인이 되었다. 이 이야기에서 유래한 히브리어 ‘icha(여성)’남성에게서 나온 여성이라는 뜻으로, 여성의 부차적인 지위를 잘 보여주는 예다.

025 하느님은 모든 어머니들에게 출산의 고통을 겪게 함으로써 이브를 벌주는 한편 모든 인간에게 땀 흘려 일하는 의무를 부과한다.

>모든 어머니들에게 출산의 고통을 겪게 함으로써…..출산의 고통을 나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육체적인 출산만 출산일까?

027 신부 아버지는 일반적으로 신부에게 혼수(chiluhim)’, 즉 지참금을 주었다. 지참금은 집안 살림에 쓰일 물건들로 구성되었는데, 하인과 가축, 심지어 토지는 물론 처녀성의 대가로서여자에게 되돌려주게 되어 있는, 일정액의 모하르가 포함된 것이었다. 지참금은 이혼하거나 과부가 되었을 때 아내에게 돌로주어야 하는 금액과 같은 것으로서 결혼 계약서인 케투바에 정확한 액수가 명기되었다.

027 결국 아내는 가축이나 노예와 다름없는 남편의 재산으로 여겨졌고, 무엇보다도 자식을 낳는 도구로 취급받았다. 아내는 오직 아들의 어머니로서만 시집에서 존중받았다.

>예전에 태어나지 않길 잘했군.

029 심지어 오늘날에도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남편이 이혼 여부를 결정한다. 아내가 이혼을 원할 경우 남편은 이에 동의하고, 아내에게 게트(get)’라는 문서를 준다. 만약 아내가 결국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게트를 내주는 대신 위자료 액수를 줄이거나 양육권을 얻기 위해 남편이 거절하면 아내는 종교적인 결혼 계약에서 벗어나 재혼할 수 없다. 오늘날 미국과 이스라엘에는 이러한 결혼의 굴레에 묶여 있는 많은 정통파 유대인 아내들이 존재한다. 반면에 남편은 아내에게 문서를 주기만 하면 아내의 동의 없이도 이혼할 수 있다.

041 유대인에게 신의 계율에 복종하는 유일한 방법이 결혼하여 자손을 낳는 것이었다면 바울을 추종하는 기독교인에게 신의 계율을 따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성생활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아내들

046 그리스와 로마에서 헬레네와 페넬로페는 기독교가 후에 이브와 동정녀 마리아에게 부여했던 대립 쌍인 악처와 양처를 대표한다.

049 고대 아테네에서 결혼은 대개 재산 관리의 문제였다. 즉 결혼은 신랑과 신부의 감정을 그다지 중요하게 고려하지 않는 재무거래였다.

054 결혼은 자식을 낳고 집안 살림을 잘 꾸려 나가게 해주는 제도로서 존중되었지만, 그 누구도 영혼의 반려에 대한 갈망을 결혼을 통해 채울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교양 있는 엘리트들이 이상적인 결합으로 여겼던 것은 동성애였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정서와는 현저히 다르게 그리스에서는 성인 남자와 소년의 결합이 자연스럽고 건전한 것으로 여겨졌다. 플라톤은 남자와의 육체적 접촉을 즐기는 소년들을 찬미했으며, 이 소년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그들은 성적으로 소년들에게 끌려서, 관습이 그들의 자연스러운 성향을 유린하지 않는다면 결혼이나 출산에 대해서는 아무런 흥미도 못 느낄 것이라고 믿었다.

055 많은 문서들을 살펴보면 고대 그리스에서, 적어도 상류 사회에서는 동성애가 널리 퍼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일이었으며 높은 문화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여겨졌다는 데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로마의 아내들

057 부부는 남편 가문의 대를 잇고, 국가의 존속을 군사력에 의존하고 있는 신생 공화국을 위하여 아들을 제공할 의무를 지고 있었다. 전선에서 그리고 원로원에서 통치하고 있는 남성은 가정에서도 지배자여야 했다. 그러나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공화정 후기와 제정 시대가 도래하자, 남편과 아내의 파트너십을 강조하는 평등주의적인 사상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059~060 결혼 약속은 종종 직업적인 중매인이 개입해 협의되었는데, 결혼 중개 사업은 로마에서 날로 번창했다. 양가의 아버지가 자녀의 결혼에 합의할 수도 있었고, 장래의 신랑이 본인의 배우자에 대해서 협상을 할 수도 있었다. 일단 남자들끼리 문제를 해결하면 신랑은 신부에게 가운뎃손가락에 낄 반지를 준다. 이 같은 관습은 지금까지도 약혼 반지를 교환하는 형태로 내려오고 있다.

>놀랍군. 중매인이 이때부터 성행을 했다니….

060 유효한 결혼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 당사자 간의 동의임을 강조하면서 로마 당국은 이러한 개념을 로마 제국에, 궁극적으로는 서양 세계 전체에 퍼뜨렸다. 결혼할 때 당사자들의 동의를 요구한 것은 수 세기 동안 아내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데 기여했다. 아내는 더 이상 아버지가 남편에게 재산처럼 공여하는 물건이 아니었다.

062~063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해 귀족의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던 공화정의 마지막 한세기와 제정 초기에는 결혼과 출산을 장려하는 법이 제정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25세에서 60세 사이의 남성과 25세에서 50세 사이의 여성은 의무적으로 결혼하거나 재혼해야 한다고 공포했다.

063~064 로마 최초의 이혼으로 기록된 것은 기원전 230년 또는 231년에 루가라는 별명으로 불린 스푸리우스 카빌리우스의 이혼이었는데, 사유는 아내가 자식을 낳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공화정 후기 로마의 엘리트들 사이에서 이혼은 흔한 일이었다. 남성이 자식을 낳아줄 여자를 얻기 위해서 이혼하는 것은 물론이고 출세를 위해서 이혼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076 재혼을 거부하는 50세 미만의 여성에게는 법적 처벌이 따랐지만 미망인이 사망한 배우자에 대한 정절을 지키는 것은 오히려 칭송되었다. 심지어 한 번만 결혼한 여성에게 열녀(univera)라는 이름으로 경의를 표했다.

077 역사가인 존 보스웰에 따르면 로마에는 많은 동성 커플이 있었는데, 그들은 이성 커플처럼배타적이지 않은 결합을 이루며 끝까지 함께 살았다.” 54년에서 68년까지 재위한 로마 제국의 네로 황제는 연달아 두 명의 남성과 공식적인 결혼식을 치르기까지 했다.

077~078 동성 결혼식은 1세기와 2세기에 점점 증가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342년에 금지되었다.

소유 관계에서 제한적이나마 동반자 관계로

082 고대 사회에서 결혼은 대개 경제적, 사회적 또는 정치적 이유로 엮인 가족사였다. 누구도 신랑과 신부가 서로 사랑할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남편과 아내의 역할은 안정적인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었다. (중략) 일부일처제에 대한 로마인들의 존중심이 제국 전역으로 퍼저 나갔고, 마침내 오늘날 우리가 따르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도덕에까지 스며들었다.

2장 섹스는 타락의 지름길 중세 유럽의 아내들, 1100~1500

085 “아내에 대해 좋게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제프리 초서, <바스의 아내> 서문

>ㅍㅎㅎㅎㅎ 웃기는 군.

법적. 종교적 고려

086 12세기 중반 이후로는 카는(canon)이라고 알려진 교회법의 영향으로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첫 번째는 교회가 개인들에게 증인들뿐만 아니라, 성직자가 배석한 가운데 결혼할 것과 교회에서예식을 치를 것을 강요한 것이다 .두 번째는 교회가 합법적인 결혼을 성사시키는데 부모의 동의보다 당사자들의 의지를 중요한 기준으로 내세운 것이다. 이러한 혁명적인 교리는 여러 세기에 걸쳐 지속되면서 영향력을 발휘했다.

087 구타는 남편이 아내에게 권위를 행사할 수 있도록 법관 관습의 인준을 받아 널리 용인된 행위였다.

093 신랑과 신부는 양가 사이에 재정적인 문제가 합의되면 공식적을 약혼을 했다.

097 교회 예식은 유럽 전역에 흩어져 자신들만의 계율과 의례를 따르며 살고 있던 유대인 사회에는 해당되지 않았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제아무리 자족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다 해도 기독교 문화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었다. (중략) 보름스의 랍비 게르숌 벤 유다의 제안에 따라 1040년에 일부다처제는 공식적으로 금지되었고, 독일과 프랑스에서 이 풍습은 종식되었지만 세파르디 유대인들은 다음 1000년 동안에도 일부다처제를 유지했다. 일부다처제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이스라엘이 건국된 20세기 중반의 일이다.

099~100 중세 이래로 사제가 결혼식에 참여하기 시작했을 때, 결혼을 인정받으려면 신방을 차리는 것이 의무 사항이었으므로 교회는 부부의 침실에서 결혼의 모든 단계에 영향을 미쳤다.

100 중세의 신학은 육체는 죄악의 근원이며 결혼은 필요악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했다.

기독교 신학자들은 결혼 생활을 과부의 삶이나 처녀의 생활보다 더 못한 상태로 여겼는데, 그 이유는 순결한 과부나 처녀는 성관계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102 우리가 성을 상품화한 광고의 이미지 공세에 휘둘리고 있듯이 중세 기독교인들은 금욕주의자들이 강요하는 모범적 이미지에 갇혀 있었다.

낭만적인 사랑의 탄생

113~114 일반적으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이유에서 나이 든 남성과 결혼한 귀부인에게 빛나는 갑옷을 입은 젊은 기사라는 존재는 에로틱한 상상의 배출구 역할을 했다. 결국 이러한 궁정 로맨스에서 유래한 낭만적인 사랑관은 귀족 계급으로부터 평민에게로 내려왔고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

어머니이자 또 다른 노동자들

118 중세의 아내는 대개 결혼한 지 1년 안에 어머니가 되었다. 어머니는 일반적으로 동경의 대상이며 신이 여성에게 부여한 역할을 완수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133 중세에는 아내나 어머니로 사는 것보다 독신 생활을 더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이 아내들은 종교적 소명을 다하게 해달라고 남편들을 설득할 수 있었다. 이 종교적 소명에는 정숙의 서약과 자식들을 포기하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중세답군. 종교의 힘이 이렇게까지 컸을 줄이야.

140 피렌체 고문서 보관소에는 지참금을 돌려주지 않는 자녀들을 상대로 미망인이 벌인 재판 기록이 잔뜩 쌓여 있다.

3장 청교도의 침실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나? 독일, 영국, 미국의 프로테스탄트 아내들, 1500~1700

루터 시대 독일의 결혼

157 현명한 남편, 아내와 평화롭게 지내기를 원하는 남편은 다음 세 가지 규칙을 지켜야 한다.

첫째, 종종 훈계할 것,

둘째, 가끔 꾸짖을 것,

셋째, 절대 때리지 말 것. -<경건한 가정 운영형태>1614-

157 아내의 역사가 종교의 역사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결혼한 여성들의 운명은 종교에 따라 결정되고 있다. 극단적인 경우를 꼽는다면 이란, 파키스탄, 아프카니스탄 등에서는 이슬람교의 계율에 따라 공공장소에서 여성들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가리지 않으면 안되고, 간통을 한 경우에는 돌로 쳐 죽이거나 처형할 수 있다.

158~159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수사였던 마르틴 루터만큼 결혼 제도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없다. (중략) 성직자는 결혼 할 수 없다는 교의에 대한 루터의 반대는 성경에 기초하고 있다.

그는 1520년에 발표한 <독일 민족의 기독교 귀족들에게 보내는 연설>에서 이러한 견해를 표명하고 단호한 어조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결론을 내렸다.

첫째, 모든 성직자가 아내 없이 지낼 수는 없다. 비단 그 육체의 나약함 때문이 아니라 가정의 필요성 때문에 그렇다. (여성이 남성의 성적 욕구와 가정을 이루려는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필요하다고 여긴 점에 주목하라.)

둘째, 교황은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을 금지하거나 우리의 몸이 음식물을 소화하고 살이 찌는 것을 금지할 권한이 없는 것처럼 이것(성직자의 독신)을 명할 권한이 없다.(여기에서 성행위는 다른 육체적 활동과 다름없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셋째, 교황의 법이 성직자의 결혼을 금지하는데도 (성직자들이) 결혼생활을 해왔다면 이미 이 법은 효력을 잃었다고 봐야 한다. 하느님의 율법에는 어느 누구도 남편의 아내를 갈라놓지 못할 것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교황의 법에 우선한다.

165 예부터 아내는 치료사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남편의 건강을 돌봐야 할 책임이 있었다.

167 아벨라르와 엘로이즈가 시끄럽게 떠들고 어지르는 아이들이 지적인 탐구와 병행될 수 없다고 보았던 반면, 루터는 아이들을 생활의 중심으로 받아들였는데, 이것은 종교개혁이 가져온 변화 가운데 하나다. 아내가 큰 살림을 도맡고 아이들이 천방지축 뛰노는 목사의 집은 프로테스탄트 부부들에세 새로운 모델이 되었다.

튜더와 수튜어트 왕조 시대 영국의 결혼

172 1536년에 이르러서야 영국의 성사 목록에서 혼인성사가 삭제되었다. 역설적으로 결혼이 탈신성화되자 영국 국교회는 그것의 가치와 존엄성을 강조하는 데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174 영향력 있는 청교도 신학자 윌리엄 구즈는 몇몇 유복한 집안의 아ㅐ들이 그의 설교 내용 가운데 일부(예를 들어 아내는 남편의 동의 없이 재산을 소유해서는 안 된다는 것)를 반대하고 나선 이후로 전통적인 가부장제의 관습과 부부간의 애정의 조화를 중시하는 새로운 경향을 융화시키려고 노력했다.

175 엄격한 청교도이거나 온건한 국교회에 소속되어 있던 그 시대의 다른 성직자들과 마찬가지로 구즈는 가부장제의 질서가 하늘의 별자리만큼이나 바뀔 수 없는 것이라고 믿었다.

176 튜더 왕조 시대의 도시와 시골에서 행해지던 결혼 풍습을 연구한 역사가 에릭 칼슨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가장 중요하게 고려된 것은 사랑이었다고 단언했다.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가 귀족층과 향신층 사이에서 결혼을 결정하는 데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 상류층은 인구의 10퍼센트에 불과했고 사랑에 기초한 결혼이 증가하는 추세였다.

181 부모에 대한 자식의 복종과 남편에 대한 아내의 복종은 설교와 소책자뿐만 아니라 이야기, 소설, 연극의 주제였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가장 유명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들도 예외는 아니다.

189 결혼은 여성에게 안정된 지위와 남편의 보호를 보장해줄 것이다. 최상의 경우라면 재정적인 후원자 겸 다정한 동반자를 얻을 것이다. (중략)

그러나 여성에게 결혼이 무조건적인 축복은 아니었다. 결혼은 자유를 포기하고 남편의 노예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남편의 권위와 변덕 그리고 그의 주먹질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했다. 또한 결혼은 불행한 결혼 생활 속에서 아내들이 겪을 끊임없는 정신적 긴장의 잠재적 위험을 의미했다.

190 이 시기 영국인들의 결혼관이 유럽 다른 나라들의 결혼관과 달랐던 점은 최선의 결혼이란 동반자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믿음이었다.

청교도의 여행 가방

196 17세기에 뉴잉글랜드에서 살았던 기혼 여성들의 삶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미국 최초의 여류 시인 앤 브래드스트리트로 인해 상당히 풍부해졌다.

198 1630년 그들은 앤의 어린 시절 친구이며 자신의 남편과 함께 이민을 떠났던 아르벨라 존슨의 이름을 딴 아르벨라호라는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넜다. (중략)

이민의 이유는 종교적인 것이었다. (중략) 몇 년 전에 필그림(순례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신세계에서 종교적 신념을 좀 더 자유롭게 펼칠 수 있고, 자신들이 이해하는 하느님의 뜻에 근접한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여겼다.

199 그녀가 격은 최초의 불행은 폐병처럼 질질 끄는 병으로 인해 가중되었다. 그녀는 그것을 자신의 오만한 콧대를 꺾고 선행을 베풀게 하기 위해 하느님이 내린 이라고 받아들였다.

>나도 이런 해석을 자주했다. 그리고 지금도 가끔 한다. 단지 대상이 하느님이 내린 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해석의 자유라고 생각했지만, 그 또한 역사적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에 웃음이 난다.

201 앤 브래드스트리트는 임신을 환영했지만 당시 성인 여성의 사망 원인 중 5분의 1이 출산 과정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식민지 어머니들이 품었던 출산에 대한 두려움을 그녀 역시 갖고 있었다.

208 식민지 여성들은 개인적으로는 자신과 가족이 뉴잉글랜드의 혹독한 겨울을 견디기 위해서라도 신체 면에서나 감정 면에서 강인해져야 했지만, 공적으로는 약한 그릇으로서의 여성에 어울리는 외모를 가꾸어야 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여성은 연약한 면과 강인한 면을 동시에 갖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속은 단단하지만 유해보이는 것 또한 남자들의 시각아닌가?

209 이혼은 비록 드문 일이긴 했지만 그것이 부자들의 특권이었던 영국보다는 뉴잉글랜드에서 성별 그리고 계급에 상관없이 좀 더 쉬웠다.

223 21세기에 살고 있는 사람의 유리한 입장에서 이 시대에 대해 살펴보면, 16세기와 17세기의 프로테스탄트들은 근대적인 결혼을 위한 토양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미국 역사가 에드먼드 모건은 청교도들이 부부간의 사랑을 높이 평가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중략) 그러면서 17세기의 사랑이 오늘날과 똑 같은 의미를 지닌 것은 아니라고 덧붙인다. 그것은 낭만적인 열정과 혼동되어서는 안 되며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경쟁하려 해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4장 혁명의 그늘에 선 사람들 공화국 미국과 프랑스의 아내들

227 18세기에 서양 여성들은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정치의식이었다. 왕정을 타파한 미국 독립전쟁과 프랑스 혁명의 시련 속에서 대서안 양안의 여성들은 정치의식에 눈떴다. (중략) 비록 극소수만이 역사를 만들어갔지만, 여성들은 혁명적 투쟁으로 건설된 새로운 공화국의 공동 창조자였다.

식민지 미국의 완벽한 아내

227 18세기 미국 아내의 정체성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아내는 비록 종속적인 반려자이긴 했지만 남편의 육체적, 감성적 반려자였다. 둘째, 아내는 남편과 함께 부모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하는 어머니였다. 셋째, 아내는 가사 노동을 하는 주부였다.

228 아내의 지위는 남편의 신분에 따라 결정되었다. (중략) 기혼 여성이 명성을 얻는 것은 그녀가 뛰어난 산파이거나 훌륭한 종교 지도자인 경우에 한해서였고, 그것은 매우 예외적인 일이었다.

229 이 시기에 영국, 프랑스, 미국에서 출간된 서적들 역시 똑 같은 논조를 띠고 있다. 즉 여성은 약한 그릇이며 유약한성이고 이성적인 면에서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남편에게 봉사하고 자식들을 양육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이다. 종교적인 관점으로 역사를 해석하는 것에서 탈피한 계몽 사상의 시대인 18세기에도 사람들은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된 운명을 타고났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231 한 도덕주의자가 다음과 같이 설파한 대로 사람들은 아내의 손이 잠시라도 쉬고 있는 꼴을 보지 못했다. “한가한 오후는 악처를 양산한다.”

독립전생으로 인한 새로운 결혼 형태의 확산

243 독립전쟁은 서로를 동반자로 여기는 결혼 형태가 확산되는 데 촉매역할을 했다. 물론 남녀의 위계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남편과 아내가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고 시민으로서의 선을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졌다.

245 보스턴은 여성들의 새로운 정치의식이 싹튼 최초의 도시였고, 이러한 의식은 다른 도시들로 퍼져 나갔다.

공화파와 왕당파: 프랑스의 아내들

261 혁명이 모든 희망을 꺾어버렸음에도 일부 아내들은 가족의 생계 부양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자긍심을 느꼈다.

혁명의 시발로부터 나폴레옹의 등극에 이르기까지 10년간(1789~1799) 프랑스 여성들은 과거에는 관심이 없었던 정치의식에 눈뜨게 되었다. (중략)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귀족 계급의 아내들은 대부분 좋은 시절을 누리고 아버지와 남편의 출세를 바라며 평탄하게 살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혁명은 이 여성들이 스스로 사고하고 행동하게 만들었다. 정부를 상대로 공식적인 소리를 내지는 못했지만 여성들은 자신들을 배척하는 정치 체제와 협상하는 방법을 수없이 개발했다. 여성들이 정치적 입장과 관계없이, 즉 왕당파였던 아니면 공화파였건, 그들이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인 것은 가족의 생존이었다.

>시련은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는 말이 떠오르는군.

공화국의 시민을 길러내는 어머니

262 미국의 아내들이나 프랑스의 아내들은 집단으로서의 여성 자격으로, 그들의 삶을 망가뜨렸던 혁명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 남편들은 시민이 되었지만, 그들은 누구누구의 아내로 남아 있었다.

262 미국인들은 영국의 지배라는 사슬을 벗어던지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영국의 불문법을 대체할 어떤 새로운 법률도 만들지 않았다.

1804년 나폴레옹이 완성시킨 법전은 남편과 아내 사이에 평등의 원칙을 제도화하려던 기존의 모든 노력을 무위로 돌려버렸다.

5장 도덕의 갑옷을 입은 낭만적인 사랑 빅토리아 여왕 시대 대서양 양안의 아내들

269~270 대다수의 사회학자들은 서구에서 근대적인 결혼관이 미국 독립전쟁과 1830년 사이에 등장했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재산, 가족, 사회적 지위가 여전히 결혼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요소였지만 이 기간 동안 사랑은 배우자를 선택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영국에서의 사랑과 결혼, 그리고 돈

275 결혼을 고려할 때 사랑의 환희는 그것이 도덕적 욕구와 결합했을 때조차도 결코 경제적 현실과 분리될 수 없었다.

296 여성의 교육은 주로 훌륭한 결혼 상대를 만나기 위한 것으로 여겨졌고, 무엇보다도 현모양처를 길러내는 데 가치를 두었다.

엘리자베스 케이디 스탠턴: 아내, 어머니, 운동가

307 엘리자베스 케이디 스탠턴은 동시대인들에게 직설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성들이 얼마나 많이 남성에게 의지하고, 보호받고, 또 지원받기를 원하는 가에 관계없이, 그리고 남성들이 그녀들이 제발 그렇게 하기를 얼마나 원하는가에 관계없이 그녀들은 혼자서 인생이라는 항해를 해나가야 한다.”

5장 서부의 흙먼지 속에서 살다 간 여성들 빅토리아 여왕 시대 미국 개척자의 아내들

393 남편과 아내는 갈라서고 나면, 어느 한쪽이 재혼을 원하지 않는 한 이혼 수속 문제로 골치 썩을 일이 거의 없었다. 심지어 재혼하고 싶을 때조차 미국처럼 넓은 나라에서는 낯선 땅으로 은신한 뒤 서류 정리를 하지 않고도 새로 결혼을 하는 것 이 얼마든지 가능했다. 중혼은 미국 역사 초기에 일반적인 사회 현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394 1857년부터 1882년까지 영국에서 그리고 1840년대에 미국에서 발효된 법은 결혼한 여성에게 더 많은 자유를 부여했고, 새로 주어진 교육과 취업의 기회는 독신 여성과 이혼한 여성에게 아내로서의 삶 대신 택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해주었다.

7장 인형의 집 여성 문제와 신여성

398 노라라는 이름은 곧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을 거부하는 한이 있더라도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살아갈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싸우는 여성을 상징하게 되었다.

영국의 신여성

403 1880년대와 1890년대의 영국에서 여성 문제는 정점에 도달했다. (중략) 신여성의 특징은 높은 교육 수준과 독립성, 가족의 전통적인 가치를 무시하고 남성과 여성이 지켜야 할 관습적인 영역의 경계들을 무너뜨리려는 성향이다. 찬미자들의 눈에 신여성은 오랫동안 기다려온 여성 구세주로서 양성 간의 관계를 바로 세우고 가정과 사회에 커다란 기여를 하는 존재로 비쳤다. 그러나 반대자들의 눈에는 남녀 간의 영역 구별을 무너뜨리고 결혼과 모성 같은 신성한 가치들을 파괴하려고 작정한 괘씸하고 말 많은 계집으로 보였다.

미국에서의 여성 문제

429 여성 해방의 최고의 상징은 자전거였다. 자신들의 제품이 완벽한 여성용이어서 다른 브랜드의 제품보다 낫다고 광고하는 포스터가 언제 어디서나 눈에 띄었다.

>자전거가 이리 많은 일을 했을 줄이야!

435 길먼의 다윈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여성의 집으로부터의 탈출은 19세기 산업사회가 요구한 것이기도 했다. 농장에서 여성 노동력을 대체하는 기계가 등장하면서 그들은 더 이상 전업주부로서 머물러 있지 않아도 되었다. 노동 부담에서 벗어난다는 사실은 여성들에게는 자신들의 지평을 확장하고 남성과 동등한 지위를 획득하게 만드는 해방적 힘으로 여겨졌다.

439~440 길먼 이전에는 어느 누구도 일을 하는 것이 독신 여성뿐만 아니라 기혼 여성들에게도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처럼 명확히 지적한 적이 없었다. (중략) 비록 1990년대까지도 완전히 현실화되지는 못했지만, 기혼 여성을 포함하여 여성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노동력이 될 것이라던 길먼의 예언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러나 여성들의 취업이 보다 행복한 결혼, 보다 행복한 가정, 보다 행복한 남성들과 여성들을 낳게 될 것이라던 길먼의 예측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8장 임신, 여성의 원죄인가? 미국에서의 섹스, 피임, 낙태 1840~1940

피임

449 피임 지식은 영국에서 막 시작된 산아 제한 운동의 영향을 받아 1920년대부터 미국 사회로 서서히 확산되었다.

450 피임 정보와 기구가 눈에 띄게 증가하면서 순결 운동과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낙태

456 <시카고 타임스>의 기사에서 주목할 것은 낙태가 미혼 여성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의사들 자신이 확인했듯이 중상류층 여성들은 하층 계급의 미혼모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낙태 지지자들을 후원하고 나섰다.

457 19세기 말이 되었을 때 산아 제한의 수단으로 낙태를 택하는 것은 어느 역사학자의 말마따나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460 자신의 책을 통해 생어는 산아 제한은 결혼한 여성들이 반드시 가져야 할 권리라고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1920년대를 거쳐 퍼져 나간 새로운 성 윤리를 옹호하고 나섰다.

460 억압은 계속되었지만 산아 제한 운동은 몇몇 진보적인 종교 단체 등을 포함한 뜻밖의 우군을 얻었다. 1930년 런던에서 국교회의 주교들은 부부가 부모로서의 역할을 제한해야 할 도덕적 의무감을 느낄 때 피임을 해도 좋다는 신중한 성명서를 발표했다. (중략) 예수교의 연방위원회는 의학적, 경제적인 이유를 들어 산아 제한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새로운 성 문화

462 성은 원래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며 두 사람이 함께 즐기는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평등한 결혼 생활을 이루어나가는 추진력이 되어주었다.

피임과 낙태: 대공황 시기

469 아이들을 부양할 수 없게 된다는 공포, 또한 자식이 많이 딸린 빈민 가족들은 국가에 의존해서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많은 미국인들에게 피임의 필요성을 받아들이게 했디.

470 1930년대 말엽에 아마도 대공황 때문이었겠지만 피임이 모든 사회 계층에서 일반화되었다. 사회는 더 이상 피임을 공공연하게 또 도덕적으로 비난하지 않았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9장 전쟁, 예기치 못한 기회 아내, 전쟁, 그리고 일 1940~1950

481 20세기가 시작된 이후 이미 여성의 고용이 꾸준히 증가 추세에 있었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은 이미 진행되고 있던 변화를 촉진했을 뿐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중략)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미혼 여성 노동자보다 기혼 여성 노동자의 수가 더 많아진 것이다.

487 전쟁 중 미국 아내들은 작업복 차림으로 도시락을 들고 공장에 가거나 스타킹을 신고 장갑을 낀 채 사무실로 출근할 때에도 가사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0장 내일을 향한 한 걸음 새로운 아내상을 향하여, 1950~2000

532 즉 혼전 성교와 혼외 성교가 더 많아지고 여성의 경제적 독립성이 더 강화되며 이혼이 점점 증가하고 만혼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532 출산을 위한 성에서 쾌락을 위한 성이라는 성 관념의 변화, 노동 인구 가운데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의 증가가 새로운 아내의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성 혁명: 킨제이 보고서에서 코스모 보고서까지

535 킨제이가 인간의 성행위에 관한 많은 자료를 수집한 뛰어난 연구자로서 각광받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연구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541 ‘남근 선망을 품고 잇는 것이 분명한 여성들은 직장 동료이든 남편이든 아들이든 남자들을 보살피기보다는 그들과 경쟁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

551 20세기의 후반 50년 동안 집에서 살림하는 여자라는 표현은 가정주부의 위상이 낮아진 것을 반영한다.

552~553 주부들의 자신감을 북돋아주려는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많은 주부들이 일상의 무미건조함, 고단함, 고립감에 시달렸다. 가사 노동을 좀 더 편안하게 만들어주고 생활을 즐겁게 해주는 각종 생활용품들, 덱세드린 같은 새로 나온 경구 피임약, 여성의 생물학적 운명과 가족 내에서의 성스러운 지위에 대한 담론들도 교외의 새장에서 일부 아내들이 느끼는 좌절감과 고립감을 덜어주지는 못했다.

553 여성 운동은 이와 같은 대중의 정치적 자각 위에서 탄생했다.

567 편지들은 성 혁명의 절정기에서조차 대부분의 여성들이 만족스러운 성생활보다 더 많은 것을 원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사랑, 따스함, 존경, 우정, 헌신을 원했다.

568 성의 개방과 열린 광장에서 성관 관련된 문제들을 토론하고 싶어하는 여성들의 의지는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억압에 종지부를 찍었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서 새로운 사회 문제들이 싹트기 시작했다. 10대 엄마들의 증가, 에이즈를 포함한 성병의 확산, 이혼과 한 부모의 증가 등이 그것이다.

노동 혁명: 맞벌이 부부의 증가

569 1960년대에서 1980년대 사이에 일하는 여성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미국인들의 결혼관이 변화했다.

570 맞벌이 가족을 떠받치던 평등주의적 철학에도 불구하고 아내들은 계속해서 가사와 육아 부담을 남편보다 많이 져야 했고, 이러한 부당함은 일하는 부부 사이에서 꺼지지 않는 갈등의 불씨로 남아 있었다.

571 교육을 많이 받은 남편들은 교육을 적게 받은 남편들에 비해 가사에 대한 책임을 더 잘 받아들였다.

571 부성의 이상과 실천에도 급진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아내가 아이를 낳을 때 남편은 좀 더 적극적으로 출산 과정에 참여하도록 권유받았다.

새로운 아내상이 함축하는 것

587 새로운 아내의 주요한 특징은 믿을 만한 기준이 되는 여성 잡지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새천년이 시작될 때 잡지들은 가사, 요리법, 다이어트, 건강, , 자녀, 사랑, 섹스에 초점을 맞추었다.

593 많은 여성들이 지난 이삼십 년 동안 배운 것이 있다면 아내가 되는 것이 유일한 선택지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여성이 더 이상 남성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단지 생존을 위해 결혼을 할 필요는 없다.

596 그렇다면 오늘날 여성이 아내가 되었을 때 진심으로 고대하는 것, 혹은 적어도 희망하는 것은 무엇일까? 물론 그녀는 자신의 결혼이 평생토록 지속되는 50퍼센트에 들기를 희망한다. 누구나 알고 있는 이혼 통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결혼만은 영원할 것을 믿는다.

598 아내, 배우자, 파트너, 동반자 그리고 모든 연인들이 사랑과 깊은 이해를 통해 자신이 선택한 짝과 맺어지기를 원한다. 그러한 결합은 헌신, 거듭되는 헌신을 요구한다.

599 오늘날 남편에게 의존하고 남편을 위해 희생하는 전통적인 아내상은 더 이상 이상적인 아내상을 대표하지 않는다. 아내로서 살아갈 것을 선택한 많은 여성들은 경제적 독립을 바탕으로, 그리고 걸음마 단계이긴 하지만 남편과의 동등한 가사 분담을 통해 한층 더 완벽한 부부 관계를 창조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

3 내자 저자라면

아내의 역사라는 제목 자체만으로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아내의 길을 걷고 있듯이, 나 또한 그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아내라는 자리가 수천 년의 역사를 거쳐 지금까지 오게 되었음을 알게 해 준다. 현재의 삶 속에 역사적인 것들이 얼마나 많이 배어있는지 확인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유럽과 미국의 지역에 국한이 되어 있기에 뭔가 부족하고 허전한 느낌이 든다.

<차례와 목차에 대하여>

*신선한가?아내의 역사라는 자체가 끌림이 있었다. 아내로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원전부터 있었던 아내에 대한 사회적 역할과 여성으로서의 역할에 대해 영화에서 봤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내라는 자리에 대해 유구한 역사를 만날 수 있었기에 신선했다.

*탄탄한가? 반쪽자리 아내의 역사이다. 동양의 시선은 배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일관성이 있는가?아내의 역사는 생각보다 방대하다. 여성으로서 엄마로서 아내로서 경제적, 사회적 위치를 그리고 역할을 망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필요이상으로 길어지는 부분이 있었다. 예를 든다면 5장에서 미국의 남부 지방의 아내와 노예에 대한 이야기는 같은 여자로서 너무도 끔찍했고, 필요이상의 분량을 할애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의도일까?

<좋았던 장과 절>

좋았던 장이라기 보다는 5장의 미국 남부의 노예에 관한 삶과 6장의 서부 개척 시대의 여인의 삶에서 가슴이 짠했다.

<보완점 및 배울점>

*호기심을 반만 채울 수 있다. 유럽과 미국에서의 아내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동양에서의 아내의 역사는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미흡함을 느낄 수 있었다.

*생생한 전달력을 목적으로 해서 그럴까? 어떤 부분은 너무 디테일하게 늘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6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의 책이 아니어도 충분히 전달은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문화의 차이일까? 아내는 엄마와 동격으로 보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한 집안의 며느리로서의 의무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그 자리에 대한 스트레스가 없었다면 정말 부러운 일이다.

*필요 없는 부분이 개입되었다. 5장을 읽다 보면 아내의 역사에 대해 공감하기보다는 노예제도라는 인권에 대해 분노하게 만든다. 초점에서 벗어났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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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23 19:21:07 *.186.179.93

명절 잘 보냈어요, 왕참치님?

와우~ 이 책 읽으셨네요... 저는 사 놓고 아직 못 읽었는데...

참치님의 북리뷰를 읽으니 도움이 되네요. 동양 아내들의 역사가 없는 반쪽짜리이니...

서양의 아내 이해하는 책이겠네요.

 

잘 읽고 갑니다....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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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26 10:22:04 *.255.24.171

우와! 선배님.

반가워요. 저도 기대보다는 별로 였지만 나름 재미있었고 의미있는 책이기도 했어요.

여기서 이리 뵈니 정말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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