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2015년 2월 23일 11시 41분 등록

외로움이외로움에게_구달리뷰#44

김남희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출판

 

1. 저자에 대하여

 

스스로 ‘까탈이’라 일컫는 저자는 강원도 삼척에서 나고 자라 아홉 살에 서울로 입성했다. 여덟 살 때, 포항에서 대구까지 혼자 기차를 타고 갔던 첫 여행의 황홀함은 아직도 생생하다. 남다를 바 없는 학창시절을 보내고 대학을 졸업하던 해, 펼쳐진 인생이 막막해 유럽으로 두 달간 여행을 떠났다. 그 길로 여행 중독자의 대열에 합류, 영국에서 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터키대사관에 근무하던 시절에는 해마다 한 달씩 주어지는 여름휴가를 이용해 한 나라씩 돌기도 했다.

1971
년생 여성 여행가.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으며, 영국 버밍험대학 관광정책학 석사를 졸업하였다. 오마이뉴스에 2000년 ‘몽골 여행’ 연재를 시작으로 국토종단 도보여행기, 중국, 미얀마, 라오스, 티베트, 네팔 여행기 등을 연재했으며 현재 ‘까탈이의 세계여행’을 연재하고 있다. 월간중앙에 2003 1월부터 12월까지 ‘동남아 여행기’를 연재했으며, 네팔에 체류하는 동안은 KBS ‘도전지구탐험대’의 현지 코디네이터를 맡았다. 

‘간절히 원하는 것은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부적처럼 품고 산다. 외국인을 위한 ‘게스트 하우스’와 청소년을 위한 ‘여행 학교’는 그렇게 품고 있는 여전한 소망이다. 우리 땅, 우리 길을 걸은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을 썼고, ≪한겨레21≫에 <길 위에서 주은 한마디>를 연재했다. 

지금까지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를 비롯해 중국, 라오스, 미얀마, 캄보디아, 태국, 네팔 등 30여 개국을 여행한 후 한국에 돌아온 그는, 앞으로 4-5년간 인도, 파키스탄, 이란, 중동을 거쳐 아프리카까지 돌면서 ‘7년간의 세계일주’ 목표를 완성할 계획이다. 세계일주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외국인을 위한 문화 체험 게스트하우스를 짓고, 우리 땅 우리 흙을 무대로 하는 ‘청소년 여행학교’를 만들겠다는 구상을 하고 있다.

 

"제 삶의 모토는 ‘내 능력 안에서 스스로 기쁜 일을 하자’예요. 어떤 거대한 담론이 있다 해도 제 능력 밖의 일이거나 저 자신이 즐겁지 않은 일은 시도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여행을 하면서 항상 깨닫는 것은 남보다 느리더라도 제 속도로 가는 게 결국 오래가고, 저를 기쁘게 하는 일이라는 진리예요.

 

서재, 앉아서 유목하는 일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

최근 쓰지 신이치 교수와 함께 『삶의 속도 행복의 방향』을 펴낸 여행수필가 김남희. 여행을 하고 글을 쓰는 게 직업인 그녀는 여행지를 선택하기까지 그 지역에 대한 책들을 꼼꼼히 살펴본다. 가장 최근에는 남미의 파타고니아로 떠나기 전에 루이스 세풀베다의 『지구 끝의 사람들』, 『파타고니아 특급 열차』을 읽었는데, 이 책들 덕분에 파타고니아에 대한 애정과 기대를 더 키울 수 있었다. 아직 가보지 못한 알래스카도 일본인 사진가 호시노 미치오의 책들을 읽고 마음 속의 여행지로 품게 됐다고. 김남희는여행 가기 전의 준비를 그 나라 작가들의 소설을 찾아 읽는 일부터 시작하게 된다고 말했다.

점점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게 되니까 소설 같은 경우에는고전이라고 불릴만한지를 좀 따지게 되는 편이고요. 다른 책들은 관심 있는 주제에 관한 책들 중에서 관점이 마음에 드는 책을 고르는 편이에요. 한마디로 편향적인 독서죠. 최근에는 환경과 생태, 건축이나 나무에 관한 책에 관심이 많이 가요. 특히 제가 옥상 텃밭을 가꾸고 있어서 농사나 음식에 관한 책도 찾아 읽게 되고요. 『개발의 역설』, 
『마음을 품은 집』, 『원자력의 거짓말』, 『도시 농업』, 『에코의 함정』과 같은 책들이 제 리스트에 담겨 있는 책들이죠.”

여행가 김남희에게 서재란, ‘앉아서 유목하는 일을 가능하게 해주는 공간이다. 이름을 붙인다면, ‘세계를 향해 열린 문이 알맞겠다. 김남희가 가장 좋아하는 여행에 대한 정의는 신영복 교수의여행은 단순한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자신이 쌓아온 생각의 성을 벗어나는 것이라는 말이다. 김남희는책이야말로 가장 편하고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생각의 성을 벗어날 수 있게 이끌어주는 문’”이라고 말했다.

 

설해목블로거가 김남희 작가에게

안녕하세요. 작가님. 여행에세이스트인 작가님의 독자이자 여행자로서의 작가님의 팬인 한 사람입니다. 책은 물론 TV와 인터넷 등 여러 매체를 통해 작가님과의 여행을 간접적으로나마 함께 해오면서 몇 가지 궁금한 점도 있고 또 저같이 용기가 없어 서른이 넘어도 여행 한 번 떠나본 적 없는 이들에게 마음과 발걸음을 움직이게 하는 촌철살인 같은 한마디 조언도 듣고자 이렇게 몇 자 적습니다.

2003
년에 본격적으로 여행길에 오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정말로 세상 밖으로 발을 움직이게 한 그 단 하나의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떠나기와 되돌아오기를 반복하는 삶에서 여행할 때와 머무를 때의 괴리를 느끼시는지요? 만약 느끼신다면 어떤 면에서 가장 큰 괴리를 느끼며 그에 대한 대처 방법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

또 샐러리맨이 아닌 여행가로 살아가는 데 대한 경제적 이유 등의 두려움은 없으신지요? 한편 작가님은 특히나 여행 중에 길 위에서 많은 사람을 만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런 인연들 중 혹시 이성적으로 끌리는 사람은 없었는지요?*^^* 혹은 잊혀지지 않는, 평생 기억하고 싶은 인연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

그리고 
『일본의 걷고 싶은 길』1권에서내가 사랑하는 도시의 조건이란 글을 보았는데요. 그런 조건에 알맞은 마쓰모토 같은 도시를 몇 군데 더 소개해주셨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저처럼 몇 년째 마음만 품었을 뿐 이런 저런 이유 혹은 핑계로 짐을 꾸리지 못하는 여행을 동경만 하는 사람들의 발을 움직이게 하는여행의 정수한마디 부탁드리며 짧은 편지를 마칠까 합니다.

작가님께서 어느 나라 어떤 길 위에 계시든 몸과 마음 항상 건강하시길 멀리서나마 기도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여행을 통해 품게 된 외국인을 위한게스트 하우스 청소년을 위한여행 학교라는 여전한 소망 꼭 이루시길 기원하겠습니다
.

설해목(
http://blog.yes24.com/jyh7778)드림

 

김남희 작가가 설해목 블로거에게

사진출처 : 『외로움이 외로움에게』 (김남희 저 | 웅진지식하우스)


안녕하세요? 보내주신 편지 감사히 잘 받았습니다. 추운 겨울, 마음은 따뜻한 날들이신지요? 적지 않은 질문들을 받고,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고민이 앞서더군요. 혹 기대에 못 미치는 답이 된다 해도 그저 솔직하게 답하는 수밖에는 없겠지요.

세상 밖으로 발을 움직이게 한 단 하나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잠시 생각해보았습니다
.

세계 일주를 떠나야겠다고 결심하고 나서도 한동안 떠나질 못했습니다. 막상 사표를 쓰기가 그리 쉽지 않았거든요. 버티고 버티다 끝내 떠날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삶을 유보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간절히 하고 싶은 일,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 내 가슴을 뛰게 하고, 나를 웃게 하는 유일한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인생을 방기하고 있다는 느낌. 자유롭게 살기 위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기 위해 가까운 사람들을 아프게 하면서 선택한 길인데, 그 길에 오르지도 못한 채 일상의 안락에 젖어가는 제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지더군요. 그렇게 되기까지 예정보다 무려 2년이나 늦어졌구요
.

떠나기와 되돌아오기를 반복하는 삶에서 여행할 때와 머무를 때의 괴리를 느끼지는 않는지 물으셨지요. 물론 느끼지요. 바깥에서는 늘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별 욕심도 없이 지내는 제가 돌아와서는 세속적인 기준에 흔들리는 모습을 볼 때면 가장 괴리감을 느끼곤 합니다
.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거나, 물질적인 욕심을 내거나 하는 모습을 볼 때면아아, 나는 아직 멀었어. 더 내공을 쌓아야만 해.’ 하고 중얼거리지요. 제가 살고 싶은 삶덜 갖되 더 충실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선 좀 더 오래 길 위에서 단련을 해야만 할 것 같네요
.

, 또 하나의 괴리감은 속도예요. 시간이 흘러가는 속도, 삶이 지나가는 속도랄까. 우리나라는 뭐든지 빠르잖아요. 무슨 일을 결정하고 진행할 때의 속도도, 무언가 유행했다 사라지는 속도도,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의 속도도제가 원래 좀 느린 면이 많은 데다, 특히나 여행은상추밭을 탐험하는 달팽이의 속도로 하고 있기 때문에, 서울에 돌아오면 어지러움을 느낄 정도로 삶이 빠르더군요. 덕분에 자연의 시간이 흘러가는 속도를 기억해내고 되살릴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구요
.

샐러리맨이 아닌 여행가로 살아가는 데 대한 경제적 이유 등의 두려움은 없냐고도 물으셨지요. 전혀 두려움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요. 우리는 1분 후도 내다볼 수 없기에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해선 누구나 두려움을 느끼니까요. 하지만 물질적 풍요로움이 정신적 풍요로움도 보장해주지는 않기에 종종 두려움을 잊어버리곤 합니다. 여행을 통해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있으니까요. 여행을 마친 후 정착해 꾸려갈 제 삶의 방식이 그리 많은 소비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약간의 자급자족이 가능한 방식이기를 바라고요
.

답하기 쑥스러운 질문도 하나 하셨네요. 길 위에서 만난 그 많은 인연들 중에 마음이 끌리는 이성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라고 답한다면, 그 또한 거짓말이겠지요. 그 아픈 이야기는 제 책 
『외로움이 외로움에게』에 자세하게 실려 있으니 참고해주세요.^^;

저 뿐 아니라 다른 분들도 여행에서 가장 힘든 일이 누군가와 정들만 하면 헤어지는 일이 아닐까요. 몇 번의 여행을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어려움이기도 하구요. 단지, 길 위에서 언제나 되새기고는 합니다. 진심으로 지극한 것들을 다른 길을 걷더라도 같은 길에서 만나게 되는 법이다라는 김선우 시인의 말을요. 여행은 어쩌면 찰나의 순간을 나누고, 오래 그리워하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사랑하는 도시 몇 곳을 추천해달라고 하셨죠? 
『일본의 걷고 싶은 길』에 나오는 마쓰모토의 조건을 다 충족시키는 곳은 아니지만, 몇 곳을 말씀드릴게요.

배낭여행자들의 블랙홀이라 불리는 파키스탄의 훈자-빼어난 자연 환경, 친절한 사람들, 저렴한 물가의 삼박자를 갖춘 곳이죠-, 한없이 느린 속도로 시간이 흘러가는 것만 같은 라오스의 루앙프라방, 산들에 둘러싸인 작은 도시 치앙마이(태국), 몇 달쯤 배낭을 내려놓고 머물고 싶었던 네팔의 포카라, 눈부시게 하얀 마을들이 있는 스페인의 그라나다, 걷는 것만으로도 영적인 기운이 전해지는 것 같던 인도의 맥그로드 간즈 등등입니다
.

하지만 제 추천을 너무 믿지는 마세요. 전 여행을 하는 모든 곳과 사랑에 빠지는 변덕스러운 성격이라서요.^^ 여행자는 누구나 자신이 여행하는 지역을 새롭게 창조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타인의 추천에 의지하기보다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낯선 땅과 뜨겁게 만날 수 있기를 바랄게요
.

마지막으로 여행을 떠나고픈 이들에게 한 마디를 건네달라고 하셨지요. 제게 여행은 만남입니다. 신영복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여행은 단순한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자신이 쌓아온 생각의 성을 벗어나는 것이죠. 성을 벗어나 만나는 것, 그게 여행의 본질이 아닐까요? 잘 몰랐던 자기 자신을 만나고, 타인을 만나 이웃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고, 지구라는 별이 품고 있는 아름다운 인연을 만나고, 그 자연 속에 깃들어 살아온 인류의 역사와 문명의 흔적을 만나는 것
.

결국 여행은어디로가 아니라어떻게의 문제이기에, 자신의 영혼을 흔드는 한 번의 만남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장소는 중요하지 않으니, 부디 혼자서 용감히 떠나보세요. 그래서 가슴 속 한 번도 울린 적 없는 현을 흔드는 만남을 경험하시길 기원 드립니다
.

오랫동안 지켜봐주시고, 격려해주셨지요? 이제야 이렇게라도 감사의 인사를 전하게 되네요
.
지금까지처럼 그렇게, 앞으로도 걸어갈게요. 함께 해 주실 거죠? 언젠가 길 위에서 만날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추운 겨울 내내 몸도, 마음도 평안하시기를


2010
12 18일 새로운 여행을 준비하며 김남희 드림

 

서른넷에 직장 때려치고 여행가로 변신한 김남희씨

파워인터뷰/명사 인터뷰 2010/08/03 08:56

 

"저는 여행을 통해 '긍정의 힘'을 많이 배웠어요. 여행하면서 그동안 몰랐던 나의 예쁘고 사랑스러운 모습을 발견하면서 나 자신을 긍정하게 되었고요. 여행에서 만난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타인의 삶을 사랑하고 긍정하게 되었어요."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여자', '도보여행가'라는 수식어가 함께 따라다니는 여행작가 김남희. 그녀는 서른넷의 나이에 잘 다니던 터키 대사관을 그만두고 전세보증금과 적금을 털어 무작정 세계 여행길에 오른 '용자'이다. 그것도 여자 혼자, 걸어서. 최근에는 일본을 여행하고 일본 여행기를 출간했다. 안정적인 직장을 박차고 나서 지금까지, 여행을 하게 만드는 여행의 매력은 무엇일까. 햇볕이 내리 쬐던 평일 오후, 그녀의 자택이 있는 부암동의 한 까페에서 그녀를 만났다. 


안정적인 직장을 관두고 여행을 시작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여행을 시작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제가 터키 대사관을 다닐 때 여름 휴가를 한 달씩 줬는데, 그 한 달 동안 저는 한 나라를 여행하고 다녔어요. 갔다 오면 내년에는 어느 나라를 갈지 정하고 그것으로 직장 생활 1년을 버티고, 여행 갔다 온 에너지로 1년을 버티곤 했어요. 그런데 여행을 끝마치면 돌아오기 싫어서 항상 비행기 안에서 울고, 회사에 거짓말을 해서 못 간다고 할까 그런 생각도 할 정도였어요. 그래서 언젠가는 배낭 싸는 게 지겨워질 때까지 원 없이 여행을 하리라 마음을 먹었어요. 그런데 직장 생활이라는 게 마약 같은 중독성이 있더라고요. 안정적으로 월급이 나오니깐요. 그것 때문에 버티다가 어느 순간 더 이상은 여행을 미뤄서는 안 되겠다 싶었죠. 더 넓은 세상으로 가기 위해서,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기 위해서 사표를 내고 여행을 떠나게 됐죠. 여행할 때의 내 모습이 제일 예쁘고, 또 여행을 하는 것이 내 가슴을 가장 뛰게 하는 일이고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여행'만 생각하게 돼서 자연스럽게 사표를 냈던 것 같아요.


제일 처음으로 여행했던 곳은 어디인가요?

유럽이요. 대학생 때 67일 정도 혼자서 배낭을 메고 여행을 했죠. 그 당시에는 밤차로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이동하며, 씻지 않고 먹지 않고 잠을 안 자도 배부르고 행복했던, 놀라운 충격의 경험이었어요.

이렇게 살지 않아도 되겠구나, 인생에 정답은 없는 것이구나, 남의 눈치 안 봐도 되지 않을까 등등 제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좁은 세계가 무너지고 새로운 세계가 제 눈앞에 펼쳐진 거였어요. 그 여행이 결국 제 인생을 바꿨죠. 이때는 미술관, 박물관 위주로 다녔는데, 먹는 것 자는 것 아껴가면서 많이 보러 다녔죠. 1초도 헛되이 보낸 시간 없이 두 눈을 반짝반짝거리면서. 온 몸의 세포가 다 활기차게 움직인다고 할까? 그때의 저는 세계를 마구 빨아들인 스펀지였죠.

 

여행이라는 것이 각 나라의 유명한 관광지만을 찾아다니는 방식도 있고, 혹은 시골이나 오지를 구석구석 돌아다니면서 명소보다는 현지인들과 그들의 삶의 모습을 좀 더 구경하는 방식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요, 굳이 미술관과 박물관을 여행 주제로 택한 이유가 있나요?

저는 그 당시 유럽에서 '무엇을 볼 것인가' 했을 때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고, 그렇다면 유럽이라는 이 대륙이 쌓아온 역사, 문화를 만나야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유럽의 역사와 문화를 가장 집약적으로 잘 드러내는 것이 미술관, 박물관이라고 생각했죠.

 

여행기를 쓸 때 롤 모델 혹은 벤치마킹 하는 작가가 있나요?

 

벤치마킹이라기보다는 나도 언젠가 이런 사진을 찍고 이런 글을 쓰면서 여행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 작가가 있어요. 일본의 '호시노 미치오'라는 동물 사진 작가인데 굉장히 전설적인 분이에요. 그는 어느 날 우연히 알래스카 사진을 보게 돼요. 1970년대 일본에서 알래스카는 전혀 알려진 곳이 아니었어요. 호시노 미치오는 그 사진을 보고 감명을 받은 나머지 무작정 그 사진에 나온 알래스카 동네 주소로 편지를 보낸 거에요그 마을에 너무 가고 싶다고.

 

그런데 정말 1년 후에 그 마을에서 답장이 온 거에요. 그래서 이 사람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 때인가 돈을 모아서 알래스카에 갔어요. 결국 알래스카에서 20년 넘게 살고, 거기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죠. 알래스카에 살면서 책도 여러 권 쓰고 사진집도 내며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알래스카 캄차카 반도에서 곰 사진을 찍다가 곰에게 물려 죽어요. 가장 자기답게 죽은 거죠. 그런데 이 사람의 글과 사진이 매우 담백해요. 그 어떤 꾸밈이 없으면서 담백하고 힘이 넘치고 아름다워요. 그래서 언젠간 나도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내공을 쌓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람이죠. 한때는 제가 이 사람한테 너무 빠져서 이런 남자와 결혼해서 이런 남자를 닮은 아들을 낳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에요.

 

여행에서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아주 많아요. '피스앤그린보트'라고 한국과 일본이 같이 띄운, 평화 환경 교육을 하는 크루즈가 있어요거기서 환경 운동, 평화 운동을 함께 하는 '스지 신이치'라는 선생님을 만났는데, 일본에서 '슬로우 라이프'라는 말을 처음 만든 분이에요. 그 이후로 일본 갈 때면 신이치 선생님 댁에 머물기도 하고 같이 여행을 하기도 했는데, 그 선생님에게 매우 많은 것을 배웠어요. 그는 "지금의 경제 시스템과 사회 시스템이 결국에는 붕괴하고 말 것이다. 그런 시스템이 붕괴되었을 때, 우리가 현재 찾는 대안적인 삶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까우리가 그걸 대체할 거대한 힘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사람들에게 다른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지 않을까."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저에게는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은 것을 가르쳐주시는 선생님이에요. 그래서 작년에 선생님과 같이 부탄도 여행했고 일본은 물론이고 다음 책도 같이 준비하고 있고 가장 영향을 많이 받는 분이에요.

예전에 마흔 살까지는 유목민으로 살고, 그 이후에는 한국에 정착해서 외국인 여행객을 위한 게스트하우스, 여행학교를 운영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아직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으신가요?
인생을 80년 정도까지 살게 되었으니 전반전 40대까지는 유목하고, 그 후에 정착을 하겠다는 거였어요. 아무래도 이번에 중남미를 갔다 오고 나면 제가 가고 싶었던 나라는 대충 다 둘러보게 되는 거니깐 내년 후반이나, 내후년부터는 정착해서 살아가게 될 거 같아요. 그렇다고 정착하고 나서 전혀 외국 여행을 가지 않고 우리나라에서만 지내겠다는 것은 아니고요. 지금보다 여행을 하는 횟수는 줄어들겠지만 여행은 평생 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돈이 없는 대학생, 20대에 값진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여행지가 있다면?
저는 인도를 많이 추천해요. 아주 저렴한 비용으로도, 한 달에 50만원으로도 여행할 수 있는 곳이고 제가 1년 간 인도와 네팔을 여행했을 때 비행기 값 빼고 450만원을 썼거든요. 아주 저렴한 비용으로 여행을 할 수 있는데다가 굉장히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에요. 나라가 워낙 커서 대륙과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어서 다양성도 굉장하고 여러 가지 성장할 수 있는 경험의 기회를 많이 줄 수 있는 곳이에요.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어떤 여행 방식을 추천하시나요?
저는 자기만의 주제와 스타일이 있는 여행을 많이 하라고 해요. 나한테 별로 의미도 없고 관심도 없지만 단지 유명하다는 이유로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사진만 달랑 찍는 그런 여행은 하지 않았으면 해요. 유명한 여행지라도 나한테 의미가 없으면 그냥 과감히 포기하고 나만의 주제, 예를 들면 미술관 탐방, 음식 탐방, 영화의 소재와 배경이 되었던 곳 탐방 등. 혹은 여행 가서 아무것도 하기 싫다면, 뒹굴면서 책을 읽어도 되는 거고요. , 남들과 다른 자기만의 주제와 스타일이 있는 여행을 창조하길 바래요.

여행을 하면서 무엇을 배우셨나요?
저는 '긍정의 힘'을 많이 배웠어요. 여행하면서 그동안 몰랐던 나의 예쁘고 사랑스러운 모습을 발견하면서 나 자신을 긍정하게 되었고요. 여행에서 만난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타인의 삶을 사랑하고 긍정하게 되고, 너무 거창할 수도 있지만 지구시민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깨달았어요.

여행 후 충만함이 굉장히 클 거 같아요.
성장하는 즐거움이 있죠. 이 여행을 통해서 사람들을 만나고 끝없이 낯선 환경에서 생활을 함으로써 늘 성장하고 있다는 생각은 많이 하죠. 내가 그대로 살았으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았을지. 그것은 단순히 세상에 대한 지식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정신연령이나 세상을 판단하고 보는 나의 눈조차 얼마나 좁고 얕았을까를 생각하면 아찔할 때가 있어요. 그나마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게 여행 덕분이에요. 그래서 여행은 저에게 그 어떤 교육보다 훨씬 뛰어난 스승이자, 학교였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여행을 통해 환경주의자, 채식주의자가 되었다고 들었어요.
어떤 소비 행위를 할 때 매우 꼼꼼하게 따지게 되었어요. 예전에는 싸고 마음에 드는 물건이면 그냥 샀는데 지금은 이 제품을 만드는 회사가 혹시나 제 3세계의 아이들이나 여성을 착취하지는 않는지, 정당한 대가를 지불했는지, 이 회사가 환경을 파괴하거나 아주 나쁜 일을 벌이는 회사는 아닌지. 그래서 혼자서 보이콧하는 물건이 매우 많아요. 너무 피곤하게 사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세상을 바꾸는 거대한 힘은 다 개인의 작은 변화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해요. 제가 가장 싫어하는 말은 '세상이 다 그런데'라는 말이에요. 스스로가 세상을 바꾸기 위해 전혀 노력하지 않는다는 말이잖아요. 세상 탓이나 하고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기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이라도 하면서 살아가는 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을 여행을 통해서 배웠어요.

 

단행본 <인생기출문제집> 20대 때 고민해 볼 질문으로 '당신 삶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미래를 위해 오늘을 생각하는 것을 미루고 있진 않나요?" "실패를 기꺼이 맞을 수 있나요?" "불편한 진실을 목격한 적이 있나요?" 들었는데요어떤 생각을 거쳐서 그 내용을 넣게 되었나요?
강연에서, 여행에서 만난 대학생들을 보면서 20대의 활력과 도전의식, 용기가 없이 너무 경직되어 있고 안정적인 길을 가려고 한다는 것을 많이 느꼈어요. 여행을 하면서 그렇지 않은 20대의 친구들도 많이 만났지만, 우리나라에서 만난 평범한 대학생들을 보면 자신이 살아온 세계가 전부라고 생각하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연애든 일이든 마음껏 도전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20대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마음껏 썼어요.

김남희씨의 20대는 어땠나요?
저의 20대는 비교적 제 마음대로 살았던 것 같아요. 대학생 때는 집에서 반대했지만 열심히 데모하면서 길거리에서 대학 시절을 다 보냈어요. 그 이후에는 제가 원하는 길로 가고 싶었던 저와, 주변에서 원했던 제 모습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보냈어요.그러나 남들이 바라보는 내 모습이 안정적으로 보이고 좋아 보여도 그것이 결코 나의 행복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결국 30대가 넘어서야 남들이 원하는 삶이 아닌,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살아야겠다고 마음먹고 나올 수 있었죠. 그래서 전 20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나이 들어서 점점 행복해지고 있고 제 삶에 만족하게 되었거든요. 그러나 그렇게 방황했던 20대의 모습이 지금의 저를 만든 밑거름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20대의 시절도 그립고 소중해요. 하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요.

그렇다면 김남희씨는 20대가 명예와 돈이 아닌,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가길 바라시나요?
그럼요. 명예나 돈이라는 것은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다보면 자연스레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라 생각해요. 설령 따라오지 않는다고 해도 자신이 선택한 길이기 때문에 후회는 별로 없을 거 같아요. 그러나 그게 아닌 돈이나 명예만을 찾아가는 길은 너무나 많은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스스로를 망가뜨릴 위험도 내포하고 있고, 내 꿈을 포기한 상실감도 함께 따라올 거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20대는 명예나 돈이 아니라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 내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을 선택했으면 좋겠어요.

 

2. 내가 저자라면

 

‘내 능력 안에서 스스로 기쁜 일을 하자’가 저자 김남희의 모토다. 그래서 잘 나가던 터키 대사관의 직장도 때려치우고 배낭을 쌀 수 있었다. 자기 방식대로 용감하고 씩씩하게 살 수 있는 저자의 실행력이 마냥 부럽다. 물론 스스로 택한 생활 여행자의 삶의 방식이 항상 좋기만 하겠는가. 그래도 짧은 인생에 후회 없는 삶을 살려면 이 길 외에는 방법이 없을 것 같다.

 

여행을 하게 된 중요한 이유로 자기의 성을 벗어난 만남을 들고 있는데 아주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물 안 개구리를 벗어나는 길이 여행보다 좋은 방법이 있을까? 삶을 고양시키는 방법으로 최선의 선택일 것이다. 저자는 여행이 생활이 된 삶을 살고 있지만 책 또한 앉아서 유목하는 방법이라 말하는데, 이 생각이 신선했다.

 

서재란, ‘앉아서 유목하는 일을 가능하게 해주는 공간’으로 세계를 향해 열린 문이라는 저자의 말에 공감한다. 생각의 성을 벗어날 수 있게 이끌어주는 문으로 여행 다음이 책이라고 나도 오래 전부터 생각해 왔다. 그래서 여행을 하지 않는 시간(아니 여행 중에도)에는 줄기차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저자의 삶의 방식은 여행과 책이 조화를 이룬 멋진 저자만의 인생 여행길이 되었다.

 

삶의 속도를 버리고 느림을 추구하는 것도 행복이란 삶의 가치를 생각할 때 저자에만 아니라 현대를 그저 앞만 보고 달리는 사람들에게 좋은 지침과 쉼을 제공하는 바람직한 방법이다. 무엇보다도 저자의 정직함과 진실성에 나는 매혹되었다. 저자의 글에 삶이 묻어나지 않는다는 독자의 지적이나 여행 중 만난 사람과의 로맨스 같은 것을 회피하지 않고 솔직하게 피력한 저자의 내공에 깊이 감동했다.

 

3. 나를 무찔러온 장절

 

4
한때는 꽃을 사모 했으나 이제는 입들이 더 가슴에 사무친다.

 

5
모두가 꽃이 될 수는 없는 세상에서 꽃만 예쁘다고 믿는 것이 얼마나 좁고 얕은 생각인가를. 이제는 꽃 아닌 것들도 다 어여쁘다.

 

5
골목 귀퉁이 작은 집에서 저마다 일상을 꾸려가는 사람들. 특별할 것도 없고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내 발길을 멈추게 한다.

 

6
사람이 한 사람을 만나 마음을 나누는 일에는 함께한 세월의 길이가 꼭 중요한 것만은 아님을 가르쳐 주었다.

 

6
우리 모두가 이토록 외로운 존재라는 사실이. 나만 아픈 건 아니 없구나. 나만 쓸쓸했던 건 아니었구나. 결국 우리는 애틋한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슴에 품고 가파른 삶의 길을 가는 외로운 순례자들이었다. 이 글은 그렇게 만난 이들의 이야기다. 길에서 만나 길 위해서 마음을 열고 길 위에서 헤어진 사람들의 이야기. 세상에 나온 모든 목숨에는 저마다의 존재 이유가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내게 가르쳐 준 사람들이었다.

 

수많은 인연들, 한 때는 꽃을 사모했으나 이제는 잎들이 더 가슴에 사무치는 사람들. 세상의 모든 존재가 결국은 꽃이라는 것을 내게 알려준 사람들이었다.

 

7
참 이상하다. 길 위에서 사람들은 어찌 그리 넓어지는 걸까. 가슴 어디에 그토록 빈 공간이 있어 타인의 슬픔을 제 몸에 깃들게 하는 걸까. 정말이지 나는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길 위에서 배웠다. 세상에 태어나 가장 잘 한 일을 꼽으라면, 방 빼고 적금 깨 여행을 떠난 일이었다. 그 길에서 새롭게 만난 이들은 또 어떤 얼굴일까. 길 위의 스승을 만나기 위해 길 위의 학교에 오늘 준비.

 

01 꿈을 찾아 길 위를 걷는 사람들

 

37 한국 사회에서 자유롭게 산다는 것
하지만 곡을 팔거나 연주해서 버는 돈은 그야말로 입에 겨우 풀 칠 할 수 있는 수준이구요. 이렇게 여행 나오려면 노가다 뛰어야 해요
저 첫 콘서트 할 때 몇 명 온 줄 알아요? 12. 그 중에 두 명은 내 친구. 그 열 명이 어디에선가 버스 타고 지하철 갈아타고 오직 내 음악을 듣기 위해 여기까지 찾아 왔다는 것. 그게 얼마나 나를 감동시키는지 알아요? 이 세상에 내 음악을 듣기 위해 와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좋았어요. 몇 명이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그래 네 말이 맞다. 나 역시 내가 소통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존재하는 한, 이 길을 계속 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하니까. J는 서울이 고향인데 부산에서 혼자 산다고 했다.

 

왜 부산에 살아 나는 내 물음에 그가 물었다 누나는 왜 세계를 떠돌아 돌아요? 그야 하고 싶었던 일이니까. 저도 그래요. 부산에 송정이라고 제가 좋아하는 바닷가가 있거든요. 그 바다를 자주 보고 싶어서 아예 거기로 옮겼어요. 근데 이번에 들어가면 이사할 거예요. 경주 안압지 알지요. 그 안압지를 가까이 두고 살 수 있는 곳으로 가려구요. 놀라운 건 J가 그 바다를 보기 위해 부산으로 이사 한 게 중학교 3학년 때 있다는 사실. 그래서 제이는 고등학교를 부산에서 혼자 다녔다. 한국에서 삶을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것, 그것도 그 어린 나이부터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하고 살 수 있다는 것은 내게 충격이었다. 제이 때문에 한국말을 배운 그녀가 어느 날 프랑스에서 전화를 걸어 밥 먹었어라고 물어 봤다. 그러자 J는 심장이 덜컥 내려 앉았다고 했다. 누나 알지요? 밥 먹었니라는 말이 품고 있는 그 겹겹의 의미. 알 수 있을 것 같아. 사랑하는 남자의 모국어를 배우고 그 말로 인사를 해온 여자. 나 역시 길 위에 오른 이후 누가 밥은 잘 먹고 다니니 하고 물으면 그 물음에 왠지 괜히 서러워서 눈물이 나는 그런 날이 있었으니까.

 

40-41
인도에서 소매치기를 당하는 건 설사병을 앓는 것만큼이나 흔한 일이었다. 다 잃어버리고 나니까 차라리 속이 시원 하더라구요. 근데 나중에 여행 마치고 들어가는 사람들에게서 mp3도 얻고 카메라도 다 얻었어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뭔가를 아무런 조건 없이 줄 수 있다는 게 제게는 정말 소중한 경험이었어요. 그래서 저도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건 나누어 주면서 다녀요. J는 카트만두를 떠나기 전날 트레킹갈 때 입으라며 내게 스키바지와 파카를 남겼다
너 왜 그 동안 내가 네 이름 잘못 부를 때마다 그냥 있었어? 그게 뭐 중요해요. H로 불리든 J로 불리던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뭐라고 불리던 난 그냥 나인 건데.

 

24 세인 J는 여러 면에서 나보다 자유로웠다. 그 자유로움은 단지 젊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여전히 내려 놓지 못하는 무거운 짐을 지고 끙끙거리는 나의 비해 J는 편견과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J가 끝까지 자기 자신으로 남을 수 있기를. 하고 싶은 일을 하며 그렇게 살아갈 수 있기를.

 

42 마음이 가는 대로 가는 거야
나는 전설 보다 오래된 도시에 와 있었다. 미로와 같이 좁은 골목 때문에 길을 잃기에 딱 좋은 곳. 지도 따위는 있지도 않고 있다고 해도 소 용 없는 곳. 그러니 시간에 쫓기는 이들은 발을 들여 놓아서는 수는 안 되는 땅 모로코의 페스였다.

 

43
,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셈솟곤했다. 그곳은 살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로 가득한 곳이었으니까. 외로움이나 슬픔 따위는 목구멍으로 넘기는 숟가락에 힘을 이기지 못하는 곳. 산다는 일의 엄숙함을 몸으로 증명 하는 사람들 곁에서 나도 살아 보겠다. 어떻게든 살아지는 거라고 덩달아 고개 끄뜩이게 되는 그런 곳.

 

=> 삶의 의지는 이토록 고결한 것. 그 기운을 접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것이지.

 

43
27
살 유리코. 공동목욕탕 하맘을 찾아가 살집 좋은 모로코 여자들 틈에 앉아 있기도 했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노천 카페에서 뜨거운 박하차를 마시던 밤, 그녀는 내 인생의 남자들 이야기를 들려 줬다.

 

44
그의 직업은 오토바이 배달원이었지. 한 마디로 몸을 써서 일하는 남자. 내 주변에 남자들이 어린아이라면 그는 진짜 남자였고 어른이었어. 나이도 우리 아빠랑 비슷했으니까. 내가 전혀 모르는 현실 세계 일들을 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자전거를 조립할 줄 알아. 손으로 뭔가를 만들어 낼 줄 아는 사람이었지. 그런 게 난 너무 경이로웠어. 난 겨우 스물 한 살이었어.

 

나는 그녀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우리 주변의 남자들은 전부 육체성을 잃어버린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가늘고 흰 손, 와이셔츠 속에 감춰진 빈약한 어깨로 상징되는 남자들. 사라진 육체의 시대에 머리와 몸을 함께 쓸 줄 아는 남자는 얼마나 희귀한 것인지.

 

44
남자는 어느 순간 지나면 더 이상 나이를 먹지 않는 것 같아 그대로 아이로 남는 거지. 마크는 내가 가진 가능성을 사랑했던 것 같아. 내 나이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 말이야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는 거니까.

 

48
두 번째 남자는 모로코에서 이주한 부모를 둔 앤디. 그후 그들의 사랑은 유럽과 일본을 오가며 몇 년간 이어졌다. 그녀는 그렇게 자신의 마음과 욕망에 정직하고 용감한 삶을 살아 왔다.

 

49
그거 혹시 안전한 삶으로의 투항인 거야?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건 아니야. 지금껏 내가 끌린 남자 들에겐 한가지 공통점이 있어.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면 안전함을 느낀다는 거지. 세상으로부터 보호 받고 있다는 느낌 말이야. 나한테는 그게 정말 중요 하거든중요한 일들을 결정할 때 온전히 자신을 목소리만 고려할 수 있다면 그 선택의 결과가 비록 좋지 않다 해도 우리는 감당해 낼 수 있다.

 

50
이상해 이런 얘기는 한번도 한적이 없었는데... 가끔은 낯선 사람에게 자기를 드러내는게 편하게 느껴지기도 하지 않아. 더구나 여행하는 동안은 누구나 조금씩 헐거워 지니까
누군가 담을 넘자 하고 내 손을 잡아 끌면 못이기는 척 따라 갈 수도 있을 것 같아. 짧게 마음을 나누고 오래 그리워해야 한다 해도 이렇듯 함께한 시간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라고 믿으며 나는 그 도시를 떠났다.

 

경계인을 꿈꾸는 친구이자 스승인 P

 

52
그건 내가 찾은 유일한 자유라고 믿었던 길 위에서 삶이 더이상 나를 몰입시키지도 뜨겁게 만들지도 못한다는 거였다. 나는 길 위의 삶을 고향에서의 일상처럼 살아내고 있었으니까.

 

53
어떻게든 살아지는 거라고 
누구에게나 가끔은 견디기 어려운 날들이 찾아오기도 하는 거라고
 
너는 그런 날들 중의 하루를 지나 가고 있는 것 뿐이라고

 

54
바다를 가르는 등 푸른 물고기처럼 싱싱하게 살아 있는 너를 보며, 네가 튕겨내는 그 찬란한 물방울을 후드득 맞으며 나도 조금씩 바다의 맑은 기운에 젖어 갔다.

 

55
그 시절 너는 내 곁에 출렁이던 바다였다. 그 푸른 물길에 잠시 발을 담갔던 아릿한 기억으로 또 한철을 잘 견뎌 왔다.
호조니, 당신이 아름다움 속으로 걷게 되기를...

 

세상에 태어나 올랐던 가장 높은 산 킬리만자로에서 내려온 날, 나는 먼지투성이에 때에 전 옷차림이었다. 그래도 아프리카 대륙 최고봉의 정기를 받아 눈은 반짝이고 몸에서는 푸른 기운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지난 몇 달 간 시든 풀처럼 시들어 있던 몸과 마음이 다시 살아난 기분이었다.

 

57
그는 이곳 대학에서 컴퓨터를 가르치며 2년째 봉사 활동 중인 청년이었다 탄자니아의 작은 도시 아누샤에서 한국인을 만날 기회는 많지 않았기 때문에 P도 나도 서로가 무척 반가웠다. 피가 저녁에 시내 카페 라이브 공연을 보러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인도 음식을 안주 삼아 남아프리카 와인을 마시며 우리는 수다를 떨었다 무슨 이야기가 그리도 오래 오갔을까. 여명이 밝아올 무렵까지 우린 이야기 하고 또 이야기 했다.

 

58
피는 어리지만 생각이 깊고 반듯한 데다 진심으로 타인의 아픔에 공명 할 줄 아는 청년이었다. 한번도 해본적이 없는 이야기들까지 술술 풀어놓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일터로 가는 사람들 사이를 걸어 숙소로 돌아오던 그날 아침 아루샤가 오래 살아 온 것처럼 정겹게 다가 왔다
피는 세상의 때가 전혀 묻지 않은 듯 순수하고 밝았다. 함께 있으면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곁에 있는 사람의 삶까지 고양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누나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인지 알아? 자전거로 전국일주를 마치고 서울에 들어선 밤이었어. 그날은 무리해서 달려서 거의 탈진 상태였어. 근데 아버지가 나오셨더라고 우리 아들 장하다 이렇게 쓰인 현수막을 들고서 말이야. 내 인생 최고의 순간 이었어.

 

64
난 언제나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 남자 와 여자의 경계, 진보 와 보수의 경계,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경계, 젊은이와 노인의 경계 같은 그 모든 경계를 말이야. 그런 게 내 꿈이었어. 그런데 사람들은 늘 나에게 하나를 선택해서 그 길 만 가기를 원해. 20살부터 지금까지 10년은 내가 원하는 것이 뭔지를 찾기 위해 조금씩 범위를 좁혀왔던 시간이야.

 

65
네가 살아온 방식 그대로 그렇게 계속 가면 되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찾아질 거라고 믿어. 미리 너 자신을 규정지을 필요는 없어. 그렇지 않을까? 현재를 충실하게 살다 보면 그 안에서 미래가 이루어 져 가는 게 아닐까?

 

뜨거운 삶, 생생한 언어

 

68
엄마가 통화 하고 싶으시대요 아이구나 얄궂어라. 여까지 어째 왔는교
온통 흰색과 푸른색으로 칠해진 집들의 대비가 선명했다. 레게 머리를 하고 알록달록한 색깔의 헐렁한 옷을 걸친 히피 들이 거리마다 가득했다. 과연 히피들의 집결지라 불릴 만한 곳이었다. 페스에서 만난 스페인 여행자의 말이 생각났다. 그 동네 인구의 절반은 여행자들에게 마리화나 팔아서 먹고 살거야.

 

하지만 마을의 느긋한 분위기에 마음이 절로 풀어 지고 있었다. 노을이 질 무렵 카페에서 일어 섰다저녁 초대에 응할 시간이었다. 낯선 현지에서 찾아 갈 곳이 있다는 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모로코에서 20년을 살아온 윤 선생님은 오랜 친구라도 되는듯 반갑게 나를 맞았다.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그녀는 처음 만난 내게 54년 인생 이야기를 자진모리로 풀어 놓았다.

 

70
아버지가 남사스럽다 고마워 치아 뿌라 하대 대학에 가지 못한 그녀는 곧 침술의 세계에 빠져 들었다. 2년제 학원 과정을 마친 그녀는 전국에 유명 하다는 침술사들과 학원을 찾아다니며 자신에게 유일한 가치였던 바늘에 목숨을 걸고 달려 들었다. 그렇게 20대가 지나갔다. 내가 그때 미쳤던기라. 그때나 지금이나 뭐에 꽂히면 눈에 뵈는게 없는기라. 고마 죽자 하고 달려 드는 거지. 그 시절 그녀는 남들 절반의 가격에 두 배의 시간을 들여 환자를 치료 했다. 그런 그녀의 열정은 불법 의료 행위를 적발하러 온 복지부에 공무원 마저 감동시켰다.

 

그렇게 침에 미쳐 살던 어느 날 한 남자를 만났다. 평생을 유일하게 사랑했고, 그녀를 이해한 단 하나의 영혼이었던 남자. 그는 6년의 시간을 그녀와 함께 보낸 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혼자가 된 그녀는 추억 외에 아무것도 남겨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허무했다.

 

71
아이를 갖고 싶은 강렬한 욕망이 자신이 침을 놓던 어떤 환자와 아무렇게나 결혼을 했다. 예정된 수순이었을까 이혼을 감당했다 그리고 4 살 된 딸 아이의 손을 잡고 모로코로 건너 왔다 아프리카는 그녀가 어릴 때부터 꿈꿔온 땅이었다.

 

72
끝내 자신의 침과 약으로 원인도 이유도 알 수 없던 딸의 병을 완치시켰다. 그리고 그 치료법은 이후 수많은 모로코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 의술이 되었다마침내 페스에서 자기만의 병원을 갖게 되고 이름을 날리고 돈도 버는 날이 찾아왔다.

 

들어온 이유가 돈 밖에 더 있겠나 싶으면서도 내치지는 몬하겠더라. 우짜겠노. 애 아빈데 받아 들여야 안 하겠노.
허무했던 기라. 뭐 하려고 죽자고 앞만 보고 달려 왔는지. 미치도록 일만하고 살아온 내가 가여워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든 기라.

 

73
그녀는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일이었다고 인정했고, 그 신 앞에 눈물을 쏟으며 항복했다. 그리고 다시 모로코로 돌아왔다. 주중에는 산간 마을의 침술원에 혼자 지내다가 주말이면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오는 한결 평화로워진 일상으로.

 

그녀의 가파르던 54해 삶이 가공되지 않는 언어의 실려 내게 전해졌다. 날것 그대로여서 싱싱하게 퍼덕이는 모국어였다. 다듬어지지 않아서 더 생생하고 구체적인 말들의 풍경.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 사람 만나는 게 얼마나 오랜만인가.

 

76
남다른 길을 걸어온 엄마의 인생을 지켜 보며 그 엄마의 삶에 상처로 남아 있는 남자들을 보며 그녀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두려움을 키워 가지 않았을까. 사랑하고 헤어지고 상처 받는 일에 대한 두려움. 이제는 자리 잡고 성공한 엄마지만 여전히 외롭고 고단한 삶을 보며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는 일에 대해 겁 먹게 되지 않았을까.

 

사람은 우째됐건 고마 바라 보는 대로 가게 되어 있다 아이가.

 

78, 레바논
시리아와 이집트, 요르단의 젊은이들은 이 나라로 일자리를 구하러 오고, 이 땅의 청년들은 유럽이나 아메리카 대륙으로 나가지 못해 안달이었다.

 

이 땅에는 천 년도 넘게 이슬람과 기독교가 평화롭게 공존해 왔는데 제 2차 대전을 전후로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정부의 친서구화 정책이 시작되고 이스라엘 건국 후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몰려 들게 시작하면서 온 나라가 기독교도와 무슬림으로 갈려  패싸움을 벌였다.
18
년의 내전이 남긴 건 폐허가 된 국토와 깊은 적개심이었다.

 

80
베이루트에 몇 개 없는 배낭족들이 모이는 숙소다. 숙소의 주인 자히르는 장기투숙자인 내게 이런 저런 마음을 써 주곤 했다팔레스타인 난민 캠프를가 보고 싶다고 했더니 자히르가 안내를 자청하고 나섰다.

 

81
반세기가 넘는 세월이 흐른 지금 그는 아직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레바논 내의 난민 캠프를 전 전하며 살아오는 동안 그는 같은 처지에 팔레스타인 여성과 결혼했다. 26녀를 두고 손 자까지 22명의 가족을 이루었다. 무슨 일을 하며 살아 왔냐 는 내 질문에 그는 이렇게 말하면 웃었다. 닥치는 대로 주어지는 대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다 했지.

 

83
웃고 있는 그의 주름진 눈가에 눈물이 번지는 것 같았다. 평생을 조국도 집도 없이 떠돌며 살아온 한 남자의 좌절과 분노를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올해 24 살인 아히만은 거리에서 배웠다는 영어가 썩 훌륭했다. 그는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하고 직업도 없이 난민으로 살아야 하는 청춘의 무력감을 토로 했다 팔레스타인 난민을 받아들인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 중 레바논에 정착한 난민 신세가 가장 어렵다는 말이 사실인 것 같았다.

 

84
자히르와 헤즈볼라 이야기를 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무의식적으로 그 테러단체? 하고 되묻자 자히르가 정색을 하며 반박했다. 테러? 그게 누구의 입장인데? 우리 처지에서는 자위를 위한 조직 일 뿐이야. 최대 테러리스트 조직은 미국과 이스라엘 아니냐?

 

86
앎에는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어서 앓을 수 밖에 없다고 했던가. 3주 남짓 레바논에 머무른 후 나는 다시 배낭을 꾸려 국경을 넘었다. 시리아와 요르단을 거쳐 배를 타고 이집트 다합으로 건너 갔다 홍해 바닷가의 작은 마을 다합은 여행자들의 발목을 잡아 주저 앉히는 곳이었다 나도 날마다 해변의 카페에서 책을 읽으며 평화로운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가끔씩은 울어도 괜찮아

 

92
인도에서 네팔로 가는 버스는 길고 지루했다. 30 시간이면 도착 할 거라더니 꼬박 이틀이 걸렸다. 길은 엉망이었고 몸은 지쳐 갔다. 낡고 좁은 버스 안에서 몸을 꼬며 힘겨워 할 때 내 옆자리는 한 소녀가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무릎에는 헤세의 데미안 영문판이 소녀의 자세만큼이나 단정하게 놓여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데팔. 나이는 열여섯. 봄날의 물오른 나무만큼이나 싱싱한 나이였다. 데팔은 네팔에서 나고 자란 티베트 소녀였다.

 

95
인생은 아름답지만 너무 짧아 그러니 즐기고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렴.

 

96
배낭을 메고 길 위에 나선 이후, 내 이름 석 자와 상관없이 한국인이라는 것 하나로 내가 규정 되고 받아들여지는 일들을 겪어 왔다. 내가 개별 적이고 구체적인 인간 김남희가 아니라 집단적이고 익명의 한국인으로 불려지던 순간들. 그제야 조국이라는 것, 내가 나고 자란 나라 이름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를 구속하며 평생을 따라다닐 숙명 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사과 한 봉지를 사들고 집으로 가는 그 어린 소녀 의 어깨는 갸날펐다. 그 가냘픈 어깨 위에 내려앉을 삶의 예외 없는 무게를 생각해보면 운명의 여신이 있다면 조금은 그녀를 편해 하기를 빌고 또 빌었다.

 

97
훈자의 폼은 무참했다. 눈을 두는 골짜기마다 살구 나무들이 몸살을 앓으며 꽃망울을 밀어 올리고 있었다.

 

100-101
길가에 지천으로 돋아난 쑥을 캤다. 향긋한 쑥에 말린 살구를 넣고 밀가루에 버무려 쑥떡을 쪄 내고는 한국 음식이라고 소개 하기로 했다. 내가 감기에 걸려 앓아 누운 날은 야스민이 학교 차를 끌고 숙소로 찾아왔다. 그 차에 실려가 그녀의 집에 머물며 간호를 받았다. 그녀는 나와 있을 때 혹은 그녀의 집이랑 교장실 에서는 스카프를 쓰지 않았다. 하지만 동네 사람들의 기척이라도 들리면 스카프를 뒤집어 쓰고 옷 매무새를 만졌다. 작은 시골 동네서 말이 나지 않으려 애쓰는 그녀의 모습은 안쓰러울 정도였다. 이 산골에 온 후 스카플 쓰지 않으려고 3년을 투쟁 했어. 그리고 졌어. 이제는 이들을 설득 하는 걸 포기 했어. 학교에서 난 스카프를 쓰지 않지만 바깥에 나갈 때는 써.

 

그리고 스카프뿐 아니라 웃는 모습과 말하는 태도 와 걷는 모습, 모든 면에서 나를 규제하고 판단하고 평가를 하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가십거리를 주지 않으려고 그들을 만나지 않아. 이곳에 온 후 나는 최소한의 만남만 가질 뿐이야. 히잡, 부르카, 차도르...

 

107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의 가슴에는 얼마나 깊고 넓은 강이 흐르기에 제 몸을 열어 낳은 자식이 아닌데도 이렇게 품어줄 수 있는 물길이 있는 건지요.

 

111
한 사람이 간절한 꿈을 품으면 온 우주가 그 꿈을 이루어 주기 위해 노력한다.

 

02 외로움은 외로움을 만나 서로를 위로한다

 

115
너에게 나의 에너지를 나눠 줄게

 

117
평온한 얼굴로 나를 마사지 했던 조단과 달리 내 얼굴에는 곤욕스러움이 가득 했다. 이건 남자의 몸이 아니라 그냥 떡이야 떡. 이렇게 중얼거려봤지만 여전히 조단의 발 냄새는 코를 찌르고 떡이 되지 못하는 그의 몸은 나를 불편하게 했다

 

119
마사지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너의 에너지를 나눠 주는 일이야. 그러니 몸과 마음을 다해야 네 좋은 기운이 상대방에게 전달 되지 않을까?

 

120
자나깨나 작업에만 열중하는 이들에게는 조단의 말이 작업 멘트로 밖에 들리지 않는 걸까. 그에게는 아직 조단의 마음이 보이지 않는게 분명했다. 허름한 외모에 가려진 조단의 따뜻한 마음. 상대가 누구든 눈 앞에 있는 사람에게 마음을 다하고 진심 어린 미소를 지어 주는 조단. 지금 이 순간이 내 삶에서 가장 소중한 순간이고,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얼굴이 가장 귀한 인연이며, 앉은 자리가 다 꽃자리라는 것은 조단은 가르쳐 주었다.

 

130
일찍이 나는 흘러가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었다 
다른 사람들이 길이로 넓이로 흘러가는 동안
 
나는 깊이로 흘러가는 것뿐이라고

 

133
저도 설사 중인데 약은 없네요. 미안해요. 대부분의 인도 여행자들에게 설사는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다.

 

136
모르는 제대 후 반년 동안 충격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정신을 차린 그가 처음 한 일은 여행이었다. 아홉 달 동안 인도에서 요가와 명상으로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자유를 반쯤 씹다가 결국 자율이구나를 깨달은 후에.

 

근데 누나 오늘 보니까 내 무관심이 결국 부당한 일들에 대한 책임이 되더라구요. 그래서 그는 사회적 참여를 시작했다.

 

137
유목과 정착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모르는 나보다 앞서 산티아고를 걷기도 했다. 모르는 티베트에서 편지를 보내 왔다
, 그 길 나에겐 사랑의 길이었고 그래서 아픈 길이었고 그렇기에 정든 길이지. 걷다 보면 길에 아직도 울음이, 웃음이 바람에 날리고 않고 있을 거야. 생각해보면 정말 고마운 길이었어. 그런데 고맙다고 말하지 못했네. 몸을 숙여 따뜻하게 한번 만져 주지도 못했네. 고마웠다고 누나가 전해줘요. 누나 걷는다는 거, 우리가 지구 위에서 걷는다는 거, 정말 축복이야.

 

틀에 박힌 사고에 물들지 않은 모르였기에 그에게서 날아오는 편지는 유머와 재기 발랄함이 가득했다. 오랫동안 일해 온 피자 가게에서 콧수염 때문에 권고사직을 당하던 날, 모르는 잠시 상처를 받은 듯 보였다.

 

138
예전에 일하던 피자 집에서 성실함을 인증 하시어 다시 복직 되었소. 코털의 연좌제에 걸려 백수 생활을 전전 하였지만 지금은 아, 때때로 배달하며 계단 오르니 즐겁지 아니한가 하오. 워킹홀리데이로 호주에 머무르던 모르가 이런 편지를 보내왔다. 남희 누나. 외롭구나. 모르도 외로워요. 그러니까 지구에 최소한 외로운 사람 두 명이 있으니까 혼자 외롭지는 않군요.

 

자기를 힐끔 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은 여전히 밝고 싱싱했다. 티베트에서 막 돌아온 모르는 내게 붉은 빛깔의 조약돌 하나를 내밀었다. 누나 색깔 있게 살라는 뜻에서 골랐어요.

 

140
그러니까 산에 대한 누나의 감정은 내가 사랑하는 여자를 볼 때 느끼는 거랑 똑같은 거구나. 옷 벗은 모습도 좋고 옷 입은 모습도 좋은 그런 거.

 

누나는 지금 토성의 띠 같은 것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것 같아요. 아직 완전히 이탈한 자가 되지는 못한. 띠 밖으로 튕겨 나갈 것인가 띠 안에 머물 것인가 잘 생각해요 한 번 궤도를 이탈하면 다시는 못 돌아가니까누나 우리나라 남자들은 여성 호르몬이 너무 부족해.

 

141
누나는 길 위에서도 왜 그렇게 그리워 하는 것들이 많아요? 누나는 몸은 유목민이지만 농사짓는 아낙의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니까요. 제 집처럼 드나들던 인도에서 요가 강사 과정을 마친 모르는 지금 서울에서 요가를 가르치고 있다. 햇살 뜨거운 어느 여름날에 받았던 모르의 요가 강습은 세심하고 부드러웠다요가를 마치고 뒷동산에서 김밥을 먹으면서 나는 숲의 정령에게 살짝 빌었다. 요령을 모르는 모르, 단단하고 심지 굳은 모르가 세상의 풍파에 시달려도 지금 같은 모습으로 남을 수 있기를.

 

143
초점을 잃은 코뿔소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144
자기 앞에 놓인 생에 대해 한번도 의문을 품지 않는 사람의 얼굴을 대하는 것, 그것은 늘 나를 불편하게 한다. 아직은 내가 자유의 깃발을 목숨을 걸기 때문일까.

 

K를 만난 것은 네팔의 포카라였다. 히말라야의 흰 봉우리들이 그림처럼 호수에 내려 앉은 곳. 인도를 여행 하던 이들이 지친 몸과 마음을 쉬어 가는 곳. 배낭을 내려 놓고 주저앉아 몇 달쯤 늘어지고 싶어지는 곳이다.

 

145
호숫가의 작은 마을에서 우리는 매일 식당을 옮겨 다니며 밥을 먹고, 햇빛이 좋은 오후에는 호수가 한눈에 들어오는 정원에서 책을 읽었다. 밤이 내리면 벽난로 불빛이 따뜻한 카페를 찾아 주인이 나가 달라고 정중히 요청할 때까지 머물기도 했다. 나룻배 한 척을 빌려 낚싯대를 강물에 드리우고 하염없이 세월만 낚기도 했다.

 

149
나는 어떤 사람에게는 슬픔의 정조를 가진 사람으로 비칠 수도 있으며 또 다른 사람에게는 깃발처럼 가볍게 나부끼는 바람으로 다가갔을 수도 있고, 또 어떤 이에게는 그늘 없는 햇살 한 자락이었을 수도 있겠지. 누가 사람을 안다는 것, 이해 한다는 것, 누군가의 내면을 들여다 본다는 것, 그건 어디까지 가능한 걸까.

 

151
여름날 오후의 짧은 꿈처럼 그렇게 잠시 스치는 모습을 한 사람의 전부로 기억하는 건 아닐까.

 

짧은 만남 후에 남겨지는 긴 그리움에 대해 다시 돌아 보았다. 내가 k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봄이 가고, 꽃이지고, 비가 내리고, 여름이 끝날 무렵이면 어쩌면 서울의 거리에서 다시 k를 만날 수 있을까. 네팔에서 보낸 시간처럼 그렇게 따뜻하게 웃을 수 있는 여백이, 케이에게도 나에게도 그 때까지 남아 있을까
케이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 그런 생각을 하며 찬바람 부는 타멜 거리에 들어 서던 내 모습이 기억난다.

 

152
여름을 여름답게 보내고 싶습니다. 땀을 쏟을지라도, 더위를 먹을지라도, 내 스스로 이겨 내고 기쁘게 가을을 맞고, 당당하게 겨울을 견디고 싶은데, 나는 날마다 나약해져 가네요.

 

153
따뜻한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지나쳐 서로가 데이지 않도록, 그 사이에 바람이 불게 하려 합니다. 케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저마다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꿈이라는 것이 가끔은 가혹하기도 하다는 것을 케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앞길에 기다리고 있을 어려움과 아픔마저도 케이는 넉넉히 끌어안고 견뎌가리라 믿는다.

 

155
벨기에인 아줌마 렌이 내게 제안했다. 이 근처에 내 친구가 하는 호텔이 있어요. 난 거기 가는 길이 구요. 그곳에서 하룻밤 머물고 내일 떠나는 게 어때요? 혼자 낯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택시 타고 어두운 밤길을 가는 건 아무래도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은데....

 

모로코 남자와 결혼한 친구 마르틴은 자신의 모든 재산을 처분해 모로코로 이주 했다고 한다. 땅을 사서 호텔을 짓고 운영해 가는 생활은 마르틴이 꿈꾸었던 것처럼 낭만적이지 않았다. 운 나쁘게도 남편 또한 좋은 남자가 아니어서 삶은 피폐했다. 끝내는 칼을 들고 그녀를 협박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녀의 남편은 결국 감옥에 갔고, 그제야 이혼이 성립되었다. 혼자 남은 마르틴은 버릇처럼 이어지는 전남편의 협박과 경제적 어려움을 감당 하며 호텔을 꾸려가고 있던 터였다.

 

159
6년간 나는 지옥에서 살았어. 차라리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 게 더 나아.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하고 생사를 알려 못한 채 기다리기만 하는 건 정말 끔찍하거든. 게다가 그 때 난 오노 때문에 종일 근무하는 직업을 가질 수 없었어. 아이들 픽업해야 했으니까. 늘 시간제로 일을 해야 했고, 그러다 보니 언제나 돈에 쪼들렸지.

 

160
여행자 보험을 반드시 들고 그건 남겨질 가족에 대한 내 최소한의 배려이다. 여행 중에 가족에게 편지를 쓸 때면 말미에 늘 지금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려고 한다는 것을 적는다. 낯설기만 할 그 도시 이름들이 사고에 대비한 거라는 걸 가족들은 알지 못한다.

 

딸이라고는 하나 밖에 없는데 그 애가 얼마나 남 다른 삶을 살았는지... 최루탄 냄새에 절어 들어 오던 대학시절부터 유난하더니, 끝내는 세상을 혼자서 떠돌아다니더라구요. 10년간 난 발 뻗고 잠을 자 본 적이 없지요.

 

이 세상에 상처 없는 영혼이 있을까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품고 있는 저마다의 슬픔이 때로는 위안이 되어 주기도 한다. 불행한 당신보다 내가 행복하다는 위안이 아닌, 당신도 나와 똑같이 고통받는 인간이라는 동류의식에서 오는 위로 말이다.

 

173
나는 홈페이지에 올라온 글 하나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김남희 씨의 글은 초기보다 매끄러워 졌습니다. 제가 보기엔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제 김남희 씨의 글에는 삶이 담겨있지 않습니다. 문장의 기교는 늘었으나 그만큼의 깊이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여러 권의 책을 출판해서 서점에 까는 만큼 좋은 글이라 생각하는지. 자유를 꿈꾸는 여행가가 속세에 그렇게 많은 흔적을 남기는 게 적절한 일인지요. 돈벌이 수단으로 여행을 소비 하는 건 아닌지 가끔 안타깝습니다.

 

175
내 글에는 이제 삶이 담겨 있지 않은 걸까. 정말 그런 걸까. 삶이 담긴 글이란 또 무엇일까. 내가 길에서 보고 느낀 것들, 눈을 맞춘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쓰는 것, 적어도 그 지점에서 나는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그조차 달라져 버린 걸까. 그 모든 질문에 변명하고 싶었고,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었고, 당신이 틀린 거라고 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 먼저 보였다.

 

176
작은 주점에서 동네 아저씨와 말을 섞어가며 오뎅 국물에 뜨거운 사케를 마시기도 했다. 거리마다 탑처럼 쌓인 눈 사이를 걸으며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고, 코끝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맵고 맑은 겨울 공기를 마음껏 마시고, 온몸에 고드름이 달릴 것 같은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다.

 

177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무사놀이나 하자. 마지막 무사를 하자. 내가 무사를 할 테니 넌 무사를 사랑한 기생이 되는 거야. 알았지. 100년이 넘는 전통을 자랑하는 여관은 안락하고 편안했다.

 

182
나를 일본으로 내몰았던 글에 대한 답이었다.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들은 먼저 인정해야 했다. 아직 하지 않은 여행에 대한 연재 약속은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미리 예고편까지 나간 연재가 아니었다면, 여행은 계속 했으되 글쓰기는 중단 했을 것 같다. 그런데도 약속과 책임이라는 것 때문에 지루하고 심심한 여행기를 계속 써야만 했다. 귀한 지면을 내어준 신문사에도 미안했고, 더 많은 것을 기대 했을 독자들에게도 부끄러웠으며,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실망하고 좌절한 시간이었다.
홈페이지에 올라온 그 글을 처음 보았을 때 애써 외면하고 있던 진실을 마주 대한 것 같아 원망보다는 부끄러움이 앞섰다.

 

183
내 글은 늘 그랬듯이 한 평범한 사람이 두려움을 극복하고 세상 밖으로 나가 만난 것들을, 그래서 얻은 작은 가르침들을 솔직하게 풀어놓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눈물 많고 정도 많고 웃음도 많은 그러면서도 까탈스럽고 탈도 많은 한 사람의 이야기. 그런 사람이 넓은 세상과 만나 부딪치고 깨어지고 울고 웃으며 자기를 새롭게 만들어 가는 과정, 그것뿐이다. 그 평범한 이야기들을 좋아해 주는 얼마간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 힘이 여기까지 나를 밀고 왔다.

 

184
내게 있어 여행은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고,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고, 나를 찾고 증명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내가 여행과 글을 쓰는 일로 밥을 벌게 되었다면 그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것에 대해 매를 맞을 준비는 되어있다. 그렇지만 글을 쓰고 책을내는 일로 무조건적인 비판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일을 좋아하고, 이 일을 좀 더 오랫동안 계속하고 싶고, 이 일로 소통하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나 말고도 나와 같은 방식으로 삶을 꾸려가는 이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아직은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한 여행을 하고 있는 거니까. 쓴다는 행위로 가장 큰 위로를 받는 건 나 자신이니까.

 

우리는 궤도를 이탈한 별들

 

188
이렇게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을 거리낌 없이 집으로 초대하고, 우리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초대를 받아 들이며 살 수 있다면 정말 멋진 세상 일 텐데...

 

191
우리는 아직 젊어서 쓸쓸했고, 정거장 같은 인생을 살고 있었다. 떠나고 돌아오고, 만나 사랑하고 헤어지고, 다시 떠나고.... 우리가 살아갈 앞으로의 삶이 어떤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직 우리는 궤도를 이탈한 별들이었다
나란히 베란다에 서서 파리의 야경을 바라보던 그 밤, 외로움은 외로움끼리 만나 서로를 위로하고 있었다. 그건 따뜻한, 온기 나는 외로움이었다
.

197
이상하다. 어째서 아름다운 그들은 함께 바라 보는 사람이 있을 때 그 아름다움이 더해지는 걸까
.
14
세기 시인 하페즈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 죽은 시인이 아니라 이란인의 일상 에서 끝없이 인용되며 살아있는 시인이었다.

 

198
언젠가는 내게도 유랑을 끝내고 정착할 날이 찾아올까요? 놀랍게도 하페즈가 내게 준 대답은 이랬다. 내 마음은 보헤미안이 가져가 버렸네. 그 운명의 길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마라. 받아들이고 따를지니.

 

202 런던
하이게이트 공동묘지, 오래된 무덤들 사이를 걸으며 한 시대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을 찾아보고, 묘비명을 읽으며 삶과 죽음에 대해, 떠난 사람과 남겨진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는 걸 나는 무척 좋아했다

 

203-204
꼭 남편 배웅하는 전업주부가 된 것 같아서. 돈 많이 벌어 와
도시락은 어디 있어
?
재치있게 말을 받은 E. 잊고 살았던 내 안의 욕망이 차 올랐다. 닻을 내린 사람들의 삶이 나를 출렁이게 만든 순간이었다. 런던을 떠날 때까지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내가 한동안 보낼 수 없는 편지를 쓰게 되리라는 것을.

 

204
나는 카미노데 산티아고를 걷고 있었다 800 km를 걸어가는 동안 황금빛 밀밭을 볼 때마다 어린왕자와 여우의 대화가 생각났다.

 

밀밭은 내게 금빛 머리칼을 가진 그를 떠올리게 만들었고 나는 밀밭을 지나는 바람 소리에도 흔들리고 있었다. 아무런 고민도 없이 하늘거리는 발걸음으로 내딛은 첫발이었는데, 날이 갈수록 마음이 어지러웠다.

 

206
긴 여행을 시작한 이후 내가 마지막까지 피하고자 했던 건 누군가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일이었다. 나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고 싶었지만 한 사람에게만은 아니었고,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다 사랑 하고 싶었지만 한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두려웠다. 그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이 세상을 향한 내 호기심과 열정을 태워 버리고 나를 한곳에 정착하도록 유혹할까봐. 내가 런던에서 발견한 것, 그건 미련이었다. 가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이미 내려놓았다고 생각한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내 안에 괴어 있었다. 다 가질 수 없기에 더욱 간절한 것을 갖기 위해 내가 포기했던 것들인데
내가 엄마가 되는 데는 자격미달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건 자유를 위해 내가 포기했던 것 중에 하나라는 것을 기억하면서도 내가 없이는 생존해 갈수 없는 한 생명,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나를 필요로 하는 생명과 더불어 울고 웃는 삶을 꿈꾸다 니. 한 존재의 우주가 되어 보고픈 갈망이 나는 무섭고 두려웠다.

 

209
그 모든 언어의 장벽, 문화의 차이를 넘어서 뛰어들고 싶었던 푸른 눈의 첫 남자가 그였다. 그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때로는 소리 내어 말하지 않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걸까. 짧았던 48시간의 체류 후 새벽 거리에서 그와 헤어질 때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그 입술에 입맞추고 싶기도 했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으면 더 좋았을 거라고 했던 건 인연이라는 수필인가. 나의 세 번째 만남도 그러했다. 함께 나 간 내 친구를 바라보던 그의 모습이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얼굴이라니.

 

IP *.196.54.42

프로필 이미지
2015.02.23 19:27:42 *.186.179.93

여행과 자기발견에 관심 많으시군요.

저의 키워드 중 하나가 자기발견입니다...

 

자전거로 세계여행하는 구달님을 상상해봅니다.

예전에 제가 만났던 연변의 조선족 재야역사학자가 있었는데

그분은 중국 전역을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조선에서 징용 징병 온 할아버지들을 찾아서 취재했었답니다.

자전거 하면 늘 그 분이 떠올랐는데....

이제는 길 위를 달리는 구달님도 기대합니다...^^

 

또 뵙겠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2015.02.24 09:39:31 *.196.54.42

반갑네요, 서선배^^

자기발견은 일생의 화두고요, 자전거와 여행은 취미죠 ㅎㅎ

책 쓰기는 자 되어 가시나요?

책 나오면 연락주소서^^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