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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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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1일 14시 28분 등록

향기로운 디지털

2015. 3. 1



그녀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듣는 순간 시간은 순식간에 거꾸로 흘러 그때로 데려다 놓고야 말았다. 1992년 어느 날, 나는 모자에 불을 밝힌 채 밤을 달리고 있었을 것이다. 피곤이 밀려오는 늦은 밤. 담배 한 모금과 열어 놓은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속삭이는 그녀에게서 휴식과 위안을 얻었던 것 같다. 그녀의 목소리는 속삭이는 듯 했지만 힘이 있었다. 다른 진행자들이 하지 않는 부조리나 인권에 관한 이야기들을 심심치 않게 뱉어내곤 했었다. 오프닝은 늘 그랬다. 때때로 목소리에 촉촉함이 묻어있다고 느껴질 때는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는 나만을 위한 속삭임이라는 착각을 하기도 했다. 일부러 챙겨듣지는 않았지만 하루 종일 채널 고정이니 정해진 시간이 되면 그녀는 어김없이 나타나 속삭였다. 그녀는 그 때 막 방송을 시작한 신참 아나운서였고, 나는 모자달린 차를 달리고 있었다.


“진짜 고독한 사람들은 쉽게 외롭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조용히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쉽게 그 외로움을 투정하지 않습니다. 마치 고공크레인 위에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 이 세상에 겨우겨우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지난 하루 버틴 분들, 제 목소리 들리세요? 저 FM 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2003년 10월 22일 정은임의 FM영화음악 오프닝 중에서).”


복학과 함께 그녀와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시간은 흘러 10여년의 세월을 훌쩍 건넜다. 가끔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서 그녀를 만났겠지만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그렇게 잊고 살던 어느날 그녀의 사고 소식이 뉴스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2004년 8월 불의의 사고로 영면의 길을 일찍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마지막 방송을 하고 불과 4개월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오늘 활동하는 커뮤니티에서 그녀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녀가 첫사랑이었다며 오늘 유난히 그녀가 그립다던 그가 남긴 링크를 따라 홀린 듯 그녀의 자취를 찾아나섰다. 그녀가 떠난지 10년이 지났지만 그녀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과 함께 그들의 가슴에서 살고 있었다.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 ‘추모사업회’를 열어 놓고 있었던 것이다. 문득 박제된 시간을 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더 놀랍고 반가운 것은 그녀의 목소리가 그대로 디지털화 되어서 팟캐스트로 방송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날로그로 생산된 것이 디지털로 박제되어 유통되고 있다는 사실이 문득 경이롭게 느껴졌다. 그녀의 아버님이 곱게 간직하던 카세트테이프를 그녀의 팬이 전해 받아 3년반이나 되는 긴 시간을 들여 디지털 파일로 만들었다고 한다. 진정 사람만이 아름답다.


“첨밀밀에서는 음~~장만옥의 얼굴이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게...그래요. 그 샤론스톤이니...ㅎㅎㅎ 옛날사람이네요. 맥라이언이니 그 당시에 장만옥과 겨루던 서양의 여배우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표현 못할 남는 부분이 그 얼굴에 있습니다. 둥그렇고 보름달 같잖아요? 이 보름달을 흐르는 물에다가 솨악 솨~~~악 한 두 번 이렇게 씯어가지고 톡톡 건져낸 것 같은 그런 맑음이 있는 얼굴인데 첨밀밀에서는 그러한 얼굴이 전해주는 느낌이 강했죠? (2014년 4월 46일 마지막 방송 가운데서)”


왜 이 프로그램이 통째 사라져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촉촉한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이글을 쓴다. 변경에 머물러 있길 자처했던 그녀의 음성이 유난히 깊게 스며드는 밤이다.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누르는 그녀의 호흡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디지털이 향기로울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가 펼쳐야 할 디지털은 이래야 한다. 아날로그를 담는 그런 것으로 말이다. 


“그대가 바로 그대가 말한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대와 겨루던 사람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담아내지 못할 남는 부분이 그대에게 있습니다. 그 향기가 이렇게 길게 남았습니다. 고맙습니다.” 





덧: 정은임추모사업회( http://www.worldost.com )

   팟 캐스트나 팥빵에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일청을 권해 올립니다.

   촉촉한 시간 만드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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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02 13:42:21 *.196.54.42

피울선생처럼 늦은밤 촉촉한 시간을 가지지 못해서 나는 이리 감성이 메말랏을까 ㅎㅎ 새삼 부러움이...

아날로그에 어울리는 피울선생이 디지로그로 진화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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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02 18:59:22 *.255.24.171

누군가의 은은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네요.

우리 아이들은 디지털의 향수를 갖고 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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