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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2일 08시 51분 등록

<진화하는 결혼>

1 저자에 대하여-스테파니 쿤츠

미국 현대가족위원회에서 연구 및 대중교육을 담당하고 있으며 워싱턴 주 올림피아의 에버그린 주립대에서 역사와 가족학을 가르치고 있다. 하와이 마카하와 워싱턴을 오가며 일하고 있는 그녀는 《뉴욕 타임스》 《월스트리트 저널》 《워싱턴 포스트》 《하퍼스》 《시카고 트리뷴》 《보그》 《결혼과 가정 저널》 등 여러 전국적인 매체에 결혼과 가정에 관한 글을 기고했다. 『결코 존재한 적이 없는 우리의 과거: 미국 가정과 향수의 덫The Way We Never Were: American Families and the Nostalgia Trap』을 비롯해 많은 저서들이 일본어,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등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2 내 마음을 무찌르는 글귀

014 결혼 제도의 붕괴를 걱정한 것은 서구인들뿐만이 아니었다. 1990년대에 사회학자인 에이미 케일러는 오래전부터 이혼이 흔한 일이었던 아프리카 남부의 한 지역에서 면접조사를 실시하면서 부부간의 갈등과 불안정한 결혼 생활이 새로운 현상이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래서 케일러는 50년 전에 수집된 구전역사를 살펴보았다. 그 결과 그녀가 1990년대에 만났던 사람들의 조부모들과 증조부모들도 자기 부모나 할아버지의 시대보다 결혼 생활이 불안해졌다고 말했음을 알게 되었다. 케일러는 과거에는 모든 사람이 화목한 결혼 생활을 했다는 생각을 만들어내는 것은 사람들이 자기 생활의 다른 측면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는 방법 중 하나라는 결론을 내렸다.

015 태양 아래 새것은 없다는 말이 성립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회에서 결혼이 차지하는 위치와 부부간의 관계에 관해서는 과거에 오늘날과 같은 현상이 존재한 적이 없었다. 비록 얼핏 보기에는 비슷해 보일지라도 말이다.

017~018 나는 이런 다양한 주장과 현상들의 배경이 된 역사적 추세를 검토하다가 당혹스러울 정도로 제각각인 현실 속에서 공통적인 테마를 발견했다. 그것은 모든 지역에서 결혼이 점점 선택의 문제로 변하고 있으며, 점점 힘을 잃고 있다는 것. 결혼과 자녀 양육이 예전에는 당연하게 연결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모든 지역에서 이 연결고리가 너덜너덜해지고 있다는 것. 또한 모든 지역에서 남녀 간의 관계가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으며 때로는 그로 인해 사람들이 상처를 입기도 한다는 것. 사실 남녀 간의 관계에서 지난 30년 동안 일어난 변화가 그 이전 3천 년 동안의 변화보다 더 크다는 것을 깨닫고, 결혼의 역할에도 비슷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019 결혼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그저 사랑하는 남녀가 만나 가정을 꾸리는 낭만적인일만은 결코 아니었다. 오랫동안 결혼은 정치적 거래이자 경제적 거래였는데 유력한 가문과의 사돈을 통한 동맹 맺기, 성별분업, 재산상속 등이 모두 결혼을 통해서 이뤄졌다. 결혼은 그림 속의 신랑, 신부는 물론 그들을 둘러싼 인물들 모두의 이해타산이 걸려 있는 중요한 사업 중 하나였다.

020 18세기 사람들은 사랑이 결혼의 근본적인 이유가 되어야 하며, 젊은이들이 사랑을 기초로 배우자를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급진적인 새 사상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19세기에 사랑을 기반으로 한 결혼에 감상적인 색채가 더해지고 20세기에는 성이 강조된 것은 각각 이 새로운 결혼관의 발달이 논리적으로 거쳐야 하는 단계였다.

021~022 사랑을 기반으로 한 결혼이 왜 그토록 불안정한지, 그리고 우리가 어쩌다가 지금과 같은 지경에 이르렀는지 이해하려면 인류 역사상 대부분의 기간 동안 결혼의 일차적인 목표는 부부와 그 자식들의 욕구, 즉 개인적인 욕구를 채워주는 것이 아니었음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결혼은 평생의 반려자를 구하고 사랑하는 자식을 기르기 위한 일인 동시에, 좋은 가문과 사돈을 맺고 가족의 노동력을 증가시키는 일이기도 했다.

024 전통적으로 결혼은 또한 성별과 연령을 기준으로 노동을 분배하고 권력을 분할하는 역할을 했다. 남자가 여자에게 권위를 행사할 수 있음을 확인해주고, 자식이 부모의 재산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지 결정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결혼은 사회적 안정, 의료, 실업했을 때의 보장을 제공해주는 중요한 요소였을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이 성인이 되어 책임을 지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표식이었다.

025 정치적, 경제적 이득을 위한 결혼은 수천 년 동안 지구 전 지역에 사실상 보편적으로 퍼져 있었다. 하지만 로마와 그리스의 유산이 기독교의 발전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중세 유럽에서 독특한 형태의 정략결혼이 탄생했다. (중략)

그러나 유럽에서 일련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변화들이 결혼의 예전 기능들을 침식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애정을 근거로 배우자를 직접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얻고, 부부들이 자신의 삶에 간섭하는 외부인들의 권리에 도전할 수 있게 된 것은 17세기 들어서였다. 또한 18세기 말에야 비로소, 그것도 서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만, 자유로운 배우자 선택과 사랑을 위한 결혼이라는 개념이 문화적 이상으로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025~026 19세기에 대부분의 유럽인과 미국인들은 남편이 생계를 책임지고 아내는 살림을 맡는 새로운 개념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서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대다수의 가정이 실제로 단 한 사람의 수입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은 20세기 중반의 일이었다.

026 사랑의 결합과 평생에 걸친 친밀한 관계라는 이상이 자리를 잡자마자 사람들은 이혼할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가족이 아이들의 욕구에 부응해야 한다는 데에 사람들이 동의하자마자 사생아 출생에 대한 법적인 처벌이 비인간적이라는 주장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027 우리가 진정으로 의문을 품어야 하는 것은 왜 1970년대에 모든 것이 무너졌는가가 아니라, 1790년대에, 또는 그 다음 위기가 찾아온 1890년대에, 또는 1920년대의 혼란 속에서 무너지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라는 것이 지금의 내 생각이다. (중략)

과거에 이미 결혼 제도가 무너지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당시 사람들이 아직 사랑과 자아실현이라는 포부를 행동에 옮길 여유가 없었다는 점이다.

029 결혼에서 개인적인 만족감보다 재산과 정치적 고려가 더 중요하게 여겨졌던 수천 년 동안, 사랑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도 이러한 현실을 바탕으로 형성되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항상 사랑에 빠졌으며, 상대에게서 사랑의 보답을 받지 못하면 괴로워했다. 하지만 역사상 대부분의 기간 동안 결혼이라는 제도의 규범에 따라 여자들은 결혼에서 사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좌절되었을 때 말없이 혼자서 괴로워해야 했으며, 남자들은 가정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사랑을 찾을 수 있었다.

030 역사상 대부분의 기간 동안 결혼의 핵심적인 기능은 자녀 출산과 상속자 결정이었다.

>이런 부분을 읽을 때는 불편한 마음이 드는 것은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032 18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중반 사이에 전통적인 결혼의 사회적 기능과 내적인 역학구조가 바뀌었다. 과거의 가부장적인 중매결혼 대신 남자가 생계를 책임지고 부부간의 사랑이 기반이 되는 결혼이 자리를 잡았으며, 평생에 걸친 일부일처제와 부부간의 친밀한 관계가 이상이 되었다. 그래서 새로운 기대들이 결혼의 구조를 결정하게 되었다. 그런데 지난 30년 동안, 남자가 생계를 책임지고 부부의 사랑이 기반이 되는 가족 관계를 통해 수립된 모든 전례들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전통적인 결혼

1 사랑으로 맺어진 결혼은 급진적인 개념

037 조지 버나드 쇼는 결혼이 가장 폭력적이고, 가장 어리석고, 가장 기만적이며, 가장 덧없는 감정의 영향력 아래에서두 사람을 하나로 묶어주는 제도라며 두 사람은 죽음이 자기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계속 그렇게 사람의 진을 빼놓는 비정상적인 흥분 상태를 유지하겠다고 맹세해야 한다고 썼다. (중략)

즉 강렬하고 깊은 사랑이 결혼의 기반이 되어야 하며 부부는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그 열정을 유지해야 한다는 이상에서 솟아나온 비현실적인 기대를 놀리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런 기대가 비정상적인 거였군.

038 인류학자들은 낭만적인 사랑이 최근에 서구에서 발명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은 틀린 생각이다. 사람들은 항상 사랑에 빠졌으며, 어느 시대에나 많은 부부들이 서로를 깊이 사랑했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사랑이 결혼의 가장 중요한 이유로 여겨진 경우는 몹시 드물었다.

038~039 고대 인도 사람들은 결혼 전에 사랑에 빠지는 것을 파괴적이다 못해 거의 반사회적인 행동으로 보았다. 그리스인들은 상사병을 일종의 광기로 생각했는데, 중세 유럽 사람들도 이런 관점을 채택했다.

039 중국어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는 전통적으로 부부간의 감정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승인 받지 못하는 부정한 관계를 묘사하는 말이었다. 1920년대에 일단의 지식인들은 부부간의 사랑이라는 급진적인 신사상에 특별한 이름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냈다.

039 유럽에서는 12세기와 13세기에 간통이 귀족들 사이에서 가장 고귀한 사랑의 형태로 이상화되었다.

040 18세기에도 프랑스의 수필가 몽테뉴는 아내를 사랑하는 남자는 너무 지루한 사람이라 어느 누구도 그를 사랑할 수 없을 것이라고 썼다.

아내를 정부처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불순한 일은 없다

040 부부간의 사랑을 존중한 사회에서도 부부는 사랑의 감정을 엄격히 통제해야 했다. 많은 문화권에서 부부가 사랑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꼴사나운 짓이었다. 어떤 로마인은 딸 앞에서 아내에게 입을 맞췄다는 이유로 원로원에서 축출되기도 했다.

041 수백 년이 흐른 뒤 가톨릭과 개신교 신학자들은 부부가 서로를 지나치게 사랑하는 것은 우상숭배의 죄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중략) 중세 무슬림 사상가들은 부부간의 성적인 열정에 대해 기독교 신학자들보다 더 포용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그들 역시 부부간의 관계가 지나치게 친밀하면 신에게 헌신하는 마음이 약해진다고 주장했다. 이슬람 세계의 저술가들은 또한 유럽의 저술가들과 마찬가지로 결혼의 울타리 밖에서 사랑이 가장 화려한 꽃을 피운다고 믿었다.

041 사랑을 결혼의 중심에 놓는 것에 눈살을 찌푸리는 곳은 지금도 많다. 아프리카 카메룬 북부의 풀베 족은 사랑, 특히 부부간의 사랑을 정당한 감정을 보지 않는다. (중략) 농민과 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지역 중에서도 부부간의 지나친 사랑을 파괴적으로 보는 곳이 많다. 그들은 서로에게 의존하며 살아가야 하는 사회구조를 갖고 있는데, 사랑이 지나친 부부는 이 관계망에서 떨어져 나가려 하기 때문이다.

042 케냐의 타이타 족은 대개 부부간의 사랑을 널리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편이다. 한 여든 살 노인은 자신의 네 번째 아내가 내 마음을 가져간 아내였다…” (중략) 타이타 족 남자는 보통 현실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는 아내를 여러 명 얻은 뒤에야 비로소 사랑하는 아내와 결혼하기 때문이다.

042 많은 문화권이 사랑을 결혼의 바람직한 결과로 보지만, 결혼을 해야 할 이유로 보지 않는다. 힌두교의 전통문화에서는 부부간의 사랑과 성에 찬사를 보내지만, 사랑과 성적인 매력을 결혼의 합당한 이유로 보지는 않는다. “먼저 결혼한 다음에 사랑에 빠진다라는 것이 공식이다.

정말 속이 뒤틀렸다, 예전에 내가 아내와 사랑에 빠졌을 때 그랬던 것처럼

044 피프스는 나중에 대단히 강렬하지만 덧없는 가정인 사랑 때문에 결혼한 조카에게서 상속권을 박탈해버렸다.

044 근대 초기 유럽에서 사람들이 흔히 인용하던 속담 중에 사랑 때문에 결혼하는 사람의 밤은 즐겁지만 낮은 괴롭다는 것이 있었다.

영원히 행복하게

048 현대의 결혼 지침서들은 한결같이 남편과 아내에게 서로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라고 충고한다. 하지만 의미있는 관계들의 등급을 따질 때 결혼이 매우 낮은 등급에 속하는 사회들이 많다.

049 북아메리카의 초원지대에 살던 카이오 족 인디언 여성은 그들을 연구하던 학자에게 남편은 언제든 새로 얻을 수 있지만, 오빠나 남동생은 하나뿐이라고 말했다. (중략)

17세기 이전의 기독교 문헌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는 대개 배우자보다는 하느님이나 이웃을 대하는 감정을 의미했다.

유교철학은 가정 생활에서 가장 강력한 관계로 부부 관계가 아니라 부자관계와 형제 관계 두 가지를 꼽는다.

049 과거의 많은 사회에서는 정조를 지키는 것이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부부가 서로 정절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은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다.

050 인류학자들이 109곳의 사회를 연구한 결과, 아내와 남편 모두의 혼외정사를 금지한 사회는 48곳뿐이었다.

050 일부 인류학자들은 공동 배우자 관계가 성적인 끌림을 해소하는 방안으로 결혼 그 자체보다 사회적으로 더 적절한 수단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050~051 남아메리카의 여러 소규모 사회에서는 (중략) 임신 중인 여자와 섹스를 하는 남자는 태아에게 자신의 생물학적 물질을 일부 주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여자의 남편을 태아의 일차적인 아버지로 인정하지만, 여자의 애인()도 부모로서 책임을 져야 하며, 여기에는 앞으로 그 여자와 아이에게 음식을 나눠줄 의무도 포함된다. (중략)

여자는 아이를 낳은 뒤 자신이 임신 사실을 안 날로부터 잠자리를 함께 했던 남자들의 이름을 모두 말하고, 출산을 돕던 여자는 이 남자들 모두에게 자식이 태어났다고 알렸다.

아이의 보조 아버지들은 아이에게 자신이 잡은 물고기와 짐승의 고기를 주어야 하기 때문에, 보조 아버지가 있는 아이는 그런 아버지가 없는 형제자매에 비해 열다섯 살 때까지 살아남을 확률이 두 배나 문제는 되었다.

2 결혼의 수많은 의미

053 중국의 나 족. 이들의 예외적인 경우를 빼면, 결혼은 어떤 형태를 띠든 인류가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한 이래 보편적인 사회제도였다.

055 게다가 피상적인 유사성을 넘어 좀 더 깊이 파고들어가 보면, 동물계에는 인간의 결혼과 조금이라도 닮은 것이 전혀 없음을 알 수 있다.

055~056 수천 년 동안 인간 사회에서 누가 누구와 짝이 되느냐는 문제는 나중에 함께 살게 될 두 사람만의 의사로 결정되지 않았다. 가족과 이웃들이 거의 항상 발언권을 갖고 있었다. (중략)

게다가 인류 역사상 대부분의 기간 동안 결혼은 그저 두 사람만의 결합이 아니라 두 집안의 결합이었다. (중략)

마지막으로 반드시 결혼해야 하는 상대, 결혼할 수 없는 상대, 결혼하면 절대 안 되는 상대를 가리기 위해 정교한 규칙을 마련해놓은 동물은 없다.

056 결혼을 주선하는 방식과 결혼의 주요 목적에 관한 여러 시대의 생각들이 다양한 변화를 보인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결혼이 보편적으로 퍼져 있다는 피상적인 인식을 넘어 결혼이 여러 사회에서 수행한 다양한 역할들을 조사해보면, 결혼을 정의하고 결혼이 존재하는 이유를 파악하기가 훨씬 어려워진다.

057 1949년 저명한 인류학자인 조지 피터 머독은 남자와 여자가 성적인 활동을 하고 경제적으로 협력하면서 함께 사는 보편적인 제도다 가볼 결혼이라는 정의를 내렸다.

058 (영국의 왕립 인류학 연구소) 이 연구소는 자식의 지위와 권리를 결정하는 데 결혼이 미치는 영향에 초점을 맞춰 결혼을 여자가 낳은 자식이 두 배우자의 합법적인 자손으로 인정받게 해주는 남녀의 결합으로 정의했다. 하지만 이 정의 도한 너무 제한적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059 수천 년 동안 여러 문화권에서 사람들이 선호한 결혼 형태는 일부다처제였다. 이보다 드물기는 하지만 일처다부제도 존재했다.

059 프레이저는 이 통계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성관계와 자녀 출산을 사회가 승인하고 장려하는 관계가 결혼이라는 정의를 내렸다.

060~061 인류학자 에드먼드 리치는 다른 시각에서 결혼을 정의한다. 섹스를 규제하고 자식을 낳아 기르는 측면보다 재산 관리라는 측면에서 결혼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결혼이 물건, 직위, 사회적 지위가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지는방식을 규정하는 법규의 집합이라고 말한다.

061 대부분의 복잡한 문명사회에서 상속권이 결혼 제도의 중심을 차지했던 것은 사실이다.

061 무타는 특정한 상황에서 남자와 여자가 혼외정사에 따르는 가혹한 처벌을 받지 않고 성욕을 해소할 수 있게 해주는 제도다. 수니파는 무타를 비난했지만, 시아파와 바빌로니아 유대인들은 이 관습을 인정해 현자가 낯선 도시에 들어갈 때 하루 동안의 아내를 요구할 수 있게 했다.

>우와~~~~남자의 성욕을 이리 존중해 주다니….

063 (스리랑카) “여자가 어떤 남자를 위해 요리를 하는 모습이 남들의 눈에 띄면, 그것이 곧 그 여자가 그 남자와 결혼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이런 사회에서는 여자가 남자에게 더 이상 요리를 해주지 않으면, 그 결혼 생활은 당연히 끝난 것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다.

063~064 (뉴기니의 구루룸바 족) 요리된 음식을 함께 먹는 것이 성행위와 같은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064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결혼하는 이유 중에는 혼자 힘으로 모든 일을 다 하며 살아남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이 포함되어 있다.

065 케냐의 루오 족은 바람직한 결혼 상대자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그들은 우리의 적이고, 우리는 그들과 결혼한다.” 아프리카와 뉴기니에서 연구하고 있는 인류학자들은 우리는 싸움의 상대와 결혼한다는 속담의 여러 가지 변형들을 기록해놓았다.

065 결혼은 또한 여러 가문들이 노동력과 자원을 공동으로 이용하거나 아니면 두 친족 그룹이 일종의 동반자 관계를 수립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065 북서태평양의 벨라 쿨라 족과 콰키우틀 족은 결혼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때로 성적인 문제나 자녀를 생산하는 문제보다 친족 집단 사이의 유대관계 수립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놀라운 사례다.

사돈의 중요성

066 결혼은 대개 성과 관련된 권리와 의무, 성역할, 사돈과의 관계, 자식의 합법적인 지위 등을 결정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사람들은 결혼을 통해 사회 안에서 구체적인 권리와 역할을 얻는다.

067 우리가 아는 사회들 중에서 결혼이 중요한 제도가 아닌 유일한 사회인 나 족 사회에서 사람들은 형제자매와 함께 살면서 자매들이 낳은 아이들을 함께 기르고, 가르치고, 부양한다.

067 그렇다면 나 족 아기들은 어디서 어떻게 태어나는 걸까? 대부분의 경우 난세세라고 불리는 가벼운 연애에서 아기들이 태어나는데, 난세세는 몰래 찾아가다라는 뜻이다. 밤중에 일어나는 몰래 찾아가기는 나 족 사회에서 가장 흔한 형태의 성적 관계다.

3 결혼의 발명

072 여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결혼이 발명되었다는 이야기는 결혼의 기원에 관해 지금도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신화다.

072~073 여자가 남자를 잡는 방법 중 하나는 식량과 보호의 대가로 그에게 자주 독점적인 섹스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 이론에 따르면, 다른 포유류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발정기, 즉 암컷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특정한 시기에만 성적으로 달아오르는 현상이 인간 여자들에게서 사라져버린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인간 여자들은 일 년 내내 성행위가 가능해졌으므로 남자들을 장기적인 관계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073~074 결혼이 보호를 위해 생겨났다는 이론은 지금도 주기적으로 재활용되면서 여자들이 강력하고 지배적인 남자에게 끌리는 반면 남자들은 자식도 잘 낳고 살림도 잘할 것 같은 젊은 여자를 찾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이용된다.

075 여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결혼이 발명되었다는 이야기는 1970년데 이후 이를 부정하는 사례들이 계속 발견됨으로써 오늘날 많은 의구심을 받고 있다. 사냥을 하고 돌아오는 다이아나처럼 과거 원시인들은 생존을 위해 남녀의 구분 없이 모두 수렵, 채취, 사냥 등에 나섰다. 현대에는 원시 시대 여자들이 남자의 보호 없이도 충분히 생존할 수 있었다는 여러 증거가 발견되고 있다.

077 남녀의 분업이 상당히 일찍부터 발달했으며, 사람들이 움직이는 동물을 멀리서 죽일 수 있을 만큼 효과적인 무기를 개발했을 때 더욱 강화된 것은 확실하다.

078 배우자의 성별을 기반으로 한 탄력적인 분업은 인류의 생존에 중요한 도구였다. (중략) 하지만 이런 분업으로도 핵가족이 자급자족을 달성할 수는 없었다. 집단적인 수렵과 채집이 여전히 생존에 필수적이었다.

078 사람들이 이렇게 집단을 이루어 반영구적인 자그마한 촌락에서 산 기간은 복잡한 마을, 도시, 국가, 제국이 나타난 수천 년의 역사보다 훨씬 더 길었다.

081 선사 시대에 남자가 오로지 자신의 생존 기술에만 의존하는 아내와 자식들만 위해 사냥을 했을 것이라는 주장은 순전히 1950년대의 결혼 형태를 과거로 투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081 구석기 시대의 결혼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직계가족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경계를 넘어서는 협조망을 만드는 것이었다.

083~084 그럼에도 결혼이 처음부터 여자들을 교환하는 방식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저명한 인류학자 클로도 레비 스트로스는 결혼 동맹이 남자와 여자 사이에 맺어진 것이 아니라 여자들을 수단으로 삼아남자들 사이에서 맺어졌다고 단언했다.

1970년대에 여러 여성학자들이 이 주장을 바탕으로 결혼이 보호를 위해서 생겨났다는 이론을 뒤집었다. 그들은 결혼이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억압하기 위해서 생겨났다고 주장했다.

고대사회에서 일어난 결혼의 변화

090 결혼 동맹으로 좌우되는 재산이 많을수록 더 많은 친척들이 결혼 상대, 결혼 지속 기간, 그리고 첫 번째 결혼이 깨어지는 경우 재산상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상속자가 새로 태어날 수 있는 재혼 성사 여부 등에 관심을 보였다.

091 결혼이 지위와 재산을 물려주는 최고의 수단이 됨에 따라 남녀 모두 행동에 더 커다란 제약을 받게 되었다.

091 합법적인 아이와 사생아의 지위는 모든 고대국가에서 점점 더 엄격하게 구별되었다. 승인 받지 못한 결합에서 태어난 아이는 땅, 지위, 시민권 등을 물려받을 수 없었으므로, 많은 경우 사실상 노예가 되거나 굶주림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092 많은 사회에서 최상류층 여성들에게 적용되는 정교한 순결 이데올로기가 자라났다. 정상적인 경로를 거치지 않고 상류층 여자에게 구애한 남성은 가혹한 제재를 받았으며, 심한 경우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

093 많은 나라에서 여자들이 오로지 살림만 하는 존재가 되면서 자유로워진남자들은 군인으로 징병되거나 대규모 공공사업에서 허리가 휘어지도록 일을 하는 일꾼으로 징집되었다.

094 그리스도가 태어나기 3천 년 천에 중동에서 일어난 왕국들로부터 1,500년 뒤에 생겨난 유럽 왕국들에 이르기까지 지배계급의 여러 당파들은 결혼의 합법성을 인정해주거나 이혼을 승인하는 권리를 누가 가질 것인지를 놓고 서로 싸움을 벌였다. 그리고 이런 싸움이 역사의 방향을 바꿔놓는 경우도 많았다.

095 개인이 부모, 교회, 국가의 손에서 결혼의 통제권을 빼앗아오려고 싸움을 시작한 것은 겨우 2백 년 전부터였다. 그리고 여성들이 경제적 필요와 사회적 압박에 굴복하지 않고 스스로 결혼 상대를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은 겨우 지난 백 년 동안에 일어난 일이었다.

095 지금은 혼전성교, 이혼, 재혼을 점차 용인하는 곳이 많으며, 이와 더불어 동거와 결혼 합법적인 아이와 혼외자식을 구분하던 엄격한 기준도 점점 무뎌지고 있다.

성과 결혼에 관한 원시 집단 사회의 비공식적인 규범들과 현대의 가족관계가 유사하다는 점에 주목하고, 우리가 문명의 이점들을 내팽개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096 수렵.채집 집단과 평등주의적인 원시 농경 사회에서는 결혼 생활이 불안정해지더라도 오늘날과는 달리 여자와 아이들이 빈곤해지지 않았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들이 집단의 노동에 동참했으며, 공평한 몫을 나눠 받을 권리가 있었다.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오늘날의 세계경제에도 나름대로 강점이 있겠지만, 약자와 자원을 함께 나누는 관습은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과거의 제약들이 사라진 지금 개인의 권리와 의무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현대의 결혼이 맞이한 위기의 또 다른 측면이다.

정략결혼의 드라마

4 고대 세계의 연속극

100 모든 왕국에서 왕, 파라오, 황제, 귀족들은 개인적인 유대 관계와 가문 간의 관계를 이용해 지지자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상을 내리고, 동맹을 맺고,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했다. 결혼은 이런 유대 관계를 만들어주는 핵심적인 기제 중 하나였다.

100 신의 자손이라고 자장하든, 예전의 왕이나 전설적인 영웅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든, 통치자의 정당성은 혈통의 순수성과 부모의 결혼의 합법성에 의해 좌우되었다.

103 정력결혼은 외교적인 조약과 마찬가지로 주기적으로 갱신되어야 했다.

104 많은 가문들이 유용한 연줄을 만들기 위해 딸이나 누이들을 자진해서 통치자에게 바쳤다. 상류층 여성들은 많은 지참금과 함께 종자들을 거느리고 시집을 오곤 했는데, 이것은 그녀가 장차 낳을 아들이 남편의 왕좌나 그 가문의 영지를 물려받으면 외가에 호의를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에서 그녀의 가문이 마련해준 재산이었다. 하층계급 여성들은 가장 총애받는 아내가 되거나 궁극적으로 제1부인의 자리를 빼앗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오로지 미모와 매력만으로 승부를 걸었다.

105 현대를 사는 우리는 지위가 높은 사람과의 결혼은 여자만 하는 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여자가 부유한 남자나 잘생긴 왕자를 잡는다고 말이다. 하지만 고대에는 대개 남자들이 자신보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여성과 결혼해 부와 권력을 얻고자 했다.

108 왕이 정처를 버려두고 지위가 낮은 첩이나 다른 아내를 총애하면, 사람들은 때로 개인적인 감정이 이익을 추구하려는 마음을 앞섰다고 탄식했다.

108 하지만 왕이 신분이 높은 아내보다 매력적인 첩이나 상인의 딸을 더 좋아한 데에는 논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평민에게는 유력한 친족이 없으므로 왕에 대한 충성심이 엷어질 우려가 적었던 것이다.

108 따라서 왕족과 왕족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정략결혼은 항상 기회뿐만 아니라 위험도 내포하고 있었으므로 부유하고 유력한 사돈을 얻는 것의 이점과 사돈들이 권력을 강탈하거나 자신에게 유리한 정책을 펴려고 할 가능성을 견주어봐야 했다.

109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처가와의 이해 다툼을 피하기 위해 때로 누이나 이복누이와 결혼했다. 이를 통해 왕은 자신뿐만 아니라 아내와의 사이에서 태어날 자식들을 위해 왕조의 지속성을 보장할 수 있었고, 친족들의 계략 때문에 남편과 아내가 각자 다른 방향으로 갈라설 위험을 제거할 수 있었다. (중략)

고대 중국의 황제들도 외척의 영향력을 제한하고 아내가 남편보다 자기 일족이나 아들의 이익을 중시하지 못하게 하려고 애썼다. 명나라 황제들은 일부러 힘이 없거나 지위가 낮은 집안에서 아내를 선택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결혼은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113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 그리고 그전에는 클레오파트라와 율리우스 카이사르 사이에 성적인 열정이 정말로 존재했을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세 사람의 열정은 모두 계산된 것이었으며, 심지어 냉혹한 정치적 음모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럴 수 도 아닐 수도. 그 사람의 배경까지 포함해서 매력적으로 보였겠지. 사랑은 어쩌면 허구인가? 영원이라는 이름으로 붙들어 들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신기루처럼 쫓게 되는 것이 아닌가?

고대 평민들의 결혼

120 로마의 부자들이 자주 그랬던 것처럼, 개인이 결혼과 이혼에 관해 스스로 결정을 내릴 때에도 그 결정이 사랑이나 욕망보다는 정치나 경제와 더 많이 관련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121 결혼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아내의 성적인 행동에 대해 이렇게 개방적인 태도를 드러낸 남편이 거의 없었지만, 이는 사랑을 바탕으로 한 질투심보다는 아내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122 일부 역사가들은 고대의 하층계급이 사랑을 기반으로 배우자를 선택하는 사치를 누릴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124 하층계급 사람들이 스스로 배우자를 고를 때에도 미모와 매력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개는 예쁜 다리보다 튼튼한 팔이 더 중요한 배우자의 조건이었다.

126 최초로 문명이 싹튼 시기부터 수천 년 동안 하층계급과 중간계급에게는 개인적인 만족감보다 결혼의 경제적 기능이 훨씬 더 중요했으며, 상류층에는 결혼의 정치적 기능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5 빌려온 것: 고전 세계와 조기 기독교 세계가 결혼에 관해 남긴 것

127 귀족 가문의 권력을 제한하려는 시도 중에서 서유럽의 결혼 제도 발전에 특별히 중요한 역할을 한 개혁이 세 번 있었다. 첫 번째 개혁은 기원전 5세기에 아테네에서 민주주의가 확립된 것이고, 두 번째 개혁은 로마 공화정과 로마 제국 초기에 보편적인 법이 시행되고 직업군인들로 이루어진 부대가 만들어진 것이며, 세 번째 개혁은 로마 제국 말기에 기독교가 형제애라는 보편적인 이상과 국가권력을 제한하는 많은 장치들을 결합시키는 체제로 떠오른 것이었다.

아테네의 실험

130 아테네의 귀족들은 자기들 중에서 차주가 등장하기 전에 개혁을 실시할 필요가 있음을 인식하고 기원전 594년에 귀족인 솔론을 집정관으로 선출했다.

131 부와 혈연이 여전히 중요하기는 했다. 하지마 아테네의 입법가들은 이제 귀족 가문들이 개별적으로 병사를 모집해 개인적 충성심과 혈연을 근거로 부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131 도시국가는 또한 고아와 미성년자의 이익은 물론 심지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들의 이익까지도 대변할 권위가 국가에 있다고 선언했다. 예전에는 대가족이 고아와 미성년자와 태아들의 운명을 좌우했다.

132 또한 이와 비슷한 다른 조치들이 도입되면서 핵가족이 친족 집단으로부터 더 많은 독립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136 아테네 지도자들은 결혼을 두 친족 집단의 결합이 아니라 두 개인의 결합으로 전환시키려고 애썼다. 그들은 귀족이나 부유한 평민들이 경제적, 정치적으로 이로운 결혼 계약을 맺는 것을 막지는 않았지만, 여성이 혼자 힘으로 지위를 물려주지 못하도록 여성을 개인적이고 부차작인 영역으로 밀어 넣는 데 다 같이 노력을 기울였다.

136 세계 최초의 민주주의 실험은 아내들의 권리와 사회적 지위 향상에는 아무런 영향일 미치지 못했다.

138 소크라테스는 여자와 동물을 노골적으로 비교하면서 말이 난폭해지는 것이 기수의 잘못이듯이. 아내가 못된 짓을 하면 그녀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남편을 탓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38 어디서나 그렇듯이 그리스에도 애정이 넘치는 부부뿐만 아니라 심지어 열정적인 부부도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이 생각한 진정한 사랑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아니었다. 그들은 성인 남자와 훨씬 더 어린 소년의 관계 속에 무엇보다 지정한 사랑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로마의 정치와 결혼

139 기원전 509년부터 31년까지 4백 년이 넘는 기간 동안 로마는 공화국이었다. 공화국에는 귀족들로 구성된 강력한 원로원이 있었으며, 뛰어난 군사 지도자들과 부유한 시민들을 대표하는 백부장 회의도 있었다. 기원전 471년에는 평민 회의도 만들어졌다. 이런 정치적 제도들 덕분에 귀족 주부들은 정부 내에서 정치적, 경제적으로 엄청난 힘을 휘두르면서도 공식적인 정치적 채널을 벗어나 스스로 통치자가 되려고 애쓰지 않았다.

140 로마인들은 아이들이 가문을 위해 태어나는 존재이므로 아버지가 허락할 때에만 생명을 이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141 남자는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비로소 자식을 낳을 권리를 얻었다.

144 이 로마인은 아이도 잘 낳고, 성격도 신중하고, 부지런하고, 정숙한 아내와 이혼했다는 이유로 친구에게 비난을 당한다. 이에 대해 이 남자는 남의 눈에 샌들이 아름답게 보이겠지만 그 샌들이 살을 꼬집는지 어떤지는 그것을 신은 사람만 알 수 있다고 대답하는데 플루타르크는 이 남자의 말에 수긍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래서 부부만의 속사정은 살아봐야 안다는….

145 아테네와 마찬가지로 초창기 로마에서도 여자가 결혼할 때 그 여자에 대한 통제권이 아버지에게서 남편에게로 넘어갔다. 남자는 아내가 가져온 모든 물건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지만, 아내 또한 남편의 친족 집단 내에서 피를 나눈 친척과 마찬가지로 모든 권리를 누렸다.

146~147 기원전 1세기의 역사가인 코르넬리우스 네포스는 로마인들에게 그리스의 관습이 로마의 관습과 얼마나 다른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해주었다. “그들은 우리가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관습들을 천하다고 생각한다. 로마인이라면 아내를 데리고 디너파티에 가거나, 아이들의 어머니가 집에서 제일 좋은 방을 차지하고 집 밖을 돌아다니는 것을 허락할 때 결코 주저하지 않을 것 이다. 그리스의 관습은 완전히 다르다. 여자는 친척들끼리 모이는 자리가 아니면 결코 파티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으며, 오직 집 안에서 여자의 구역이라고 불리는 곳에만 앉을 수 있다. 가까운 친척이 아닌 남자는 이곳에 들어갈 수 없다.

149 당시 결혼의 신성함을 주장했던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이혼도 했고, 많은 여자들과 바람을 피웠음에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주저 없이 결혼의 미덕과 가족의 가치를 강요했다. 사실 아우구스투스는 역사 기록상 최초로 결혼 장려 캠페인을 벌인 사람 중 하나였다.

아우구스투스가 시작한 가족의 가치 캠페인에는 출산율을 늘리려는 목적이 포함되어 있었다. (중략) 자식을 셋 낳은 자유민 여성에게는 여성을 평생동안 남편이나 아버지의 피후견인으로 묶어두는 법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선포했다. 해방되었지만 아직 옛 주인의 피후견인으로 남아 있는 여자 노예는 아이 넷을 낳으면 주인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내가 이때 태어났더라면 죽어라고 일만 했겠군. 아니면 단명했겠지.

기독교의 등장

152 유대교 내부의 운동으로 시작된 기독교는 로마 공화국 쇠퇴기에 인기를 끌며 꽃을 피운 많은 종교와 신비주의 종파 중 하나였다.

153 많은 초기 기독교인들은 결혼이 영적인 구원을 얻기 위해 필요한 엄격한 자기 통제를 무너뜨린다고 믿었다. “ 장가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 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꼬 하되 장가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중략)”

153 인도의 힌두교도들은 결혼이 신성한 행위라고 생각했으며, 독신자나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불경한 자나 아니면 최소한 불완전한 자로 간주되어 일부 종교 의식에 참여할 수 없었다.

154 기독교는 결혼에 대해 심히 양면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이혼도 엄격히 금지했다. (중략) “그러므로 하느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가복음 10 9) 대부분의 세계 종교와 달리 기독교는 이혼 금지 조항을 남자와 여자에게 똑같이 적용했다.

154~155 교회는 모든 사람들을 형제로 받아들였으며, 겸손과 자선과 영성이 세속적인 재산이나 권력보다 우월하다는 가르침 때문에 하층계급과 노예들에게 특히 인기를 끌었다.

155 그 후 2세기 동안 기독교는 지리적인 세력권을 넓혔으며, 유사 정부 같은 기능을 더 많이 수행하게 되었다. 또한 로마의 주교가 여러 지역의 동료 주교들보다 높은 권위를 얻어 교황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교황을 뜻하는 pope는 아버지를 뜻하는 papa에서 온 것이다.)

156 초기 기독교는 세속적인 일에 무심하다 못해 적대적이기까지 했으며 결혼보다 독신 생활을 높게 쳤다. 하지만 교회의 정치적 역할과 경제력이 커지면서 교회는 서유럽에 새로인 생겨난 정치적 결혼, 이혼, 가족문제에 깊이 휩쓸리게 되었다.

6. 주교 흉내, 여왕 잡기: 중세 초기 유럽 귀족들의 결혼

158 중세 유럽에서는 귀족들의 결합에 수십 명의 사람들이 끼어들었으며, 왕과 왕비의 결혼에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었다.

159 비잔틴 제국과는 달리 서방의 이 불안정한 왕국들에서는 친족 관계와 정략결혼이 권력 투쟁에 필수적이었다.

중앙집권적인 신정국가였던 비잔틴 제국에서 강력한 힘을 지닌 황제는 처가의 힘을 얻기 위해 아내를 고를 필요가 없었다. 사실 비잔틴의 통치자들은 현대의 미인대회와 비슷한 신부 쇼에서 아내를 고르는 경우가 많았다.

160 그들은(비잔틴의 통치자들) 거세당한 전직 노예인 내시들을 궁정 관리로 임명함으로써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싸움을 최소화했다. 스스로 자식을 낳을 수 없으며 귀족들에게는 지독한 원망의 대상인 내시들은 군주에게 훨씬 더 의존적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왕실의 아내들이나 외척보다 훨씬 더 충성심이 강했다.

162 (서방의 유럽) 정복자들이 자신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쫓겨난 왕의 미망인과 결혼하는 것은 다반사였다. 정복자가 죽으면 그의 아들이 의붓어머니와 결혼해 자신의 정당성을 다시 천명하곤 했다.

164 후계자가 없으면 통치자의 죽음과 함께 왕조가 끝날 뿐만 아니라, 정권 교체를 앞당기고 싶어 하는 성급한 사람들 때문에 왕이 암살 목표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따라서 왕은 아들을 많이 낳을 필요가 있었다.

샤를마뉴의 결혼 동맹과 종교 동맹

166 기독교의 결혼 원칙에 최초로 힘을 실어준이 왕들 중에 샤를마뉴가 있었다.

167 789년에 그(샤를마뉴)는 부부 중 한쪽의 부정으로 이혼이 이루어져서 다른 한쪽이 무고한 희생자가 되었다 하더라도 이혼한 남녀는 재혼할 수 없다고 선포했다. (중략) 교황은 군사적 지원과 영적인 협조에 대한 보답으로 800년 크리스마스에 샤를마뉴를 신성로마황제로 책봉했다.

167 샤를마뉴 이후 다른 통치자들도 상속권을 둘러싼 분쟁의 중재와 통치자의 정당성 인정 문제를 교회에 맡기는 것의 이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왕과 왕비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일부일처제를 고집하고 이혼에 반대하는 교회의 태도가 가끔 불편하기는 해도 군비 제한 협정에 버금갈 만큼 결혼을 제한하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다.

천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결혼 스캔들

168 중세에는 결혼 분쟁의 추잡한 내막이 낱낱이 까발려지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었다. 오늘날의 타블로이드 신문에 해당하는 중세의 주요 정보원은 교회였다. 현대의 가십 칼럼니스트들과 마찬가지로, 교회 관리들은 결혼 분쟁의 당사자들을 추적해서 그들의 성생활을 자세히 알아내 어느 한쪽의 편을 들었다.

>이 대목에서 왜 웃음이 날까?

172 로타르의 사건은 중세의 결혼 정치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 사건은 합법적인 아내가 후계자를 낳지 못했을 때 왕이 재혼하고 싶다 해도 교회의 협조를 얻지 못한다면 결국 파멸을 몰고 올 족쇄에 묶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172 일부일처제 결혼이 반드시 섹스 파트너가 한 사람뿐이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사실 일부일처제 결혼의 장점 중 하나는 왕에게 꿩도 먹고 알도 먹을 수 잇는 방법을 제공해준다는 점이었다. 왕은 여러 여자에게서 계속 아들을 얻을 수 있었으며, 군사 원정을 나갈 때 이 아들들을 이용하고 그들의 외가에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었다.

근친상간 관련법의 독특한 역사

173 근친상간에 대한 로마 카톨릭교회의 정의는 중세 시대 결혼의 가장 흥미로운 측면 중 하나였다.

175~176 가문 내의 결혼을 피하는 것은 서유럽 상류층의 뚜렷한 특징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교회의 근친상간 금지 조항이 귀족과 왕족의 결혼에 미친 영향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친척과의 결혼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귀중한 전략이 될 수 있었으므로, 귀족 가문들은 자신에게 이로울 때에는 근친상간 금지 조항을 어기는 경우가 많았다.

176 한 역사가의 지적처럼 근친상간 혐오가 일부일처제 법칙에 틈새를 만들어주었고, 왕은 이 틈새로 (…) 마차와 말을 마음껏 몰 수 있었다.

신분 높은 아내의 중요성

177 부부가 성행위를 할 때 실제로 피가 섞인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여성들은 귀족 신분의 세습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통치자가 되려는 야망을 품은 남자는 고귀한 혈통의 어머니나 아내가 있어야 했다.

178 중세 유럽에서는 여자가 혈통은 물론 재산도 물려받아 후손에게 전해줄 수 있었으며, 남편이나 남편의 친족은 여자의 재산을 빼앗을 수 없었다.

180 중세 초기 왕국들의 정치에서 권력관계를 공고히 하는 데 필요한 바로 그 자질들이었으므로, 왕의 아내는 사실상 공직에 잇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183 장기적인 관점에서 신분이 높은 여성들의 독립성과 신분을 제한한 또 하나의 요소는 가톨릭교회의 힘이 점점 강해졌다는 점이었다.

184 왕비들은 정략결혼이라는 게임에서 단순히 가치 있는 교환 대상의 역할만 하지 않았다. 그들 자신이 이 게이의 뛰어난 선수인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중세의 유럽인들이 이슬람 세계에서 체스라는 게임을 가져오면서 가장 강력한 말, 이슬람교도들이 고관이라고 불렀던 그 말의 이름이 왕비로 바꾼 것도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7. 나머지 95퍼센트의 결혼: 중세 평민들의 결혼

187 중세 초기에는 대부분의 성직자가 결혼했으며, 이런 관행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5세기부터 점점 커지기 시작했는데도 변화는 아주 느리게 찾아왔다. 742년에 교황 자카리아는 간통을 저지르거나 한 명 이상의 아내를 둔 주교와 사제들은 종교 의식을 집전할 수 없다고 선포했다. 11세기에는 그레고리오 개혁가들이 성직자의 결혼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조직적으로 이끌고 있었다. (중략) 교회법은 1139년에야 비로소 성직자의 결혼을 완전히 금지했다.

188 유럽대륙에서는 16세기, 그리고 잉글랜드에서는 1753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법적, 공식적으로 특정한 절차를 거쳐야만 결혼이 인정된다는 규칙을 국가와 교회가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191 결혼이 그러 미래에 관한 약속만으로도 이루어지게 되자 비밀 결혼 등 여러 폐단이 발생했다. 이를 막기 위해 13세기에는 결혼이 보다 엄격한 형식을 띠게 되어 신부의 지참금, 결혼예고, 교회에서의 결혼식 등의 절차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비밀 결혼으로 인한 제2로미오와 줄리엣이 탄생하는 것을 원천봉쇄하려 했다.

192 그레고리오 개혁가들이 성작자의 결혼 금지와 평신도들의 이혼 금지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12세기의 교회법에서는 이미 이혼이 전혀 허용되지 않았다. 남편이나 아내가 상대와 합법적으로 별거할 수 있는 이유는 세 가지뿐이었다. 간통, ‘영적인 간음이라고 일컬어진 배우자의 이단행위, 극단적인 잔임함.

192~193 한 교회법 전문가는 그 절차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 남자와 여자를 한 침대에 눕게 한 다음, 현명한 여자들을 침대 옆으로 불러 여러 날 밤을 지켜보게 한다. 만약 남자의 그 부위가 항상 아무 쓸모가 없고 마치 죽은 것처럼 보인다면, 부부는 헤어질 수 있다.”

193 교회의 근찬상간 금지 조항이 많은 귀족과 왕들에게 탈출구를 제공해 주었듯이, 쌍방이 결혼에 동의한다는 말을 주고받아야 한다는 규칙은 평민들이 결혼 무효를 주장할 수 있는 유용한 방편을 제공해주었다.

196 봉건영주들의 초야권’, 즉 노인의 딸이 결혼할 때 귀족이 그녀와 첫날밤을 지낼 권리가 있었다는 얘기는 허구다. 하지만 영주가 농노의 딸에 대해 성적인 관심은 아닐망정 경제적인 관심을 갖는 것은 보편적인 일이었으며, 교회는 영주가 농노의 딸들의 결혼을 좌우하는 것에 반대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197 지주들이 농노들의 결혼에 관심을 가진 것은 부부간의 분업이 농촌 경제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197~198 경제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가정이라는 단위를 만들어내는 데에 결혼이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영주나 수도원장에게 묶여 있지 않은 자유민 농부들도 빨리 적당한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 했으며, 자식이 장성한 뒤에는 자식 또한 빨리 적당한 사람과 짝을 지어주려 했다.

198 중세 유럽 농촌의 농가들은 상호 원조와 공동 책임의 네트워크가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198~199 이웃들은 부적절하다고 생각되는 결혼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저지하거나 처벌했다.

200 따라서 농촌의 결혼에도 소귀족의 결혼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었다.

200 혼외자식을 낳은 여자가 그 아이의 아버지와 결혼하지 않는다 해도 농촌에서는 특별히 흠 있는 여자로 간주되지 않았다.

202 여자는 오로지 남편을 통해서만 집 밖에서 이런 영향력을 획득할 수 있었다. 결혼을 통해 경제적인 계약을 맺을 권리를 모두 잃어버리는데도 말이다.

203 중세에 남편의 권위가 어느 정도였는가를 보여주는 증거로는 잉글랜드, 노르망디, 시칠리아의 법을 들 수 있다. 이 법은 아내가 남편을 죽이는 행위를 일종의 반역으로 간주해서 아내를 화형시킬 수 있다고 규정했다.

203 역사가 섀넌 맥셰프리에 따르면, “적당한 결혼이 이루어지게 하고, 부적절한 결합을 저지하는 것은 나이 많은 남성의 의무이자 특권이었다.”

204 14세기 런던에서 가죽을 염색하는 남자의 아내들은 심지어 남편과 함께 길드에 가입하기까지 했으며, 많은 길드들이 조합원에게 명인의 지위에 올라서기 전에 결혼할 것을 요구했다.

너무 까다롭게굴지 말라: 결혼, 사랑, 개인의 선택

206 일부 역사가들은 결혼이 상호 동의로 이루어진다는 교회의 원칙과 12세기 상업의 재부상, 그리고 1348년의 흑사병 유행 이후로 농노제도가 느슨해진 것 등이 한데 합쳐져서 서유럽에 놀라울 정도로 개인주의적인결혼 시스템이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개인들이 배우자를 자유로이 선택하게 되었으며, 결혼한 부부는 가족들의 간섭에서 자유로워졌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 모든 변화가 부부간의 사랑과 조화를 강조하는 독특한 현상을 이끌어냈다고 믿고 있다.

207 결혼이 좀 더 자유로웠던 잉글랜드에서도 부모들은 대개 자식의 뜻을 완전히 무시한 채, 사업상의 이득과 정치적인 면을 고려해서 결정을 내렸다.

208 중세 사람들은 결혼이 사람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직업적인결정임을 알고 있었다.

중세 부부의 초상

211 중세 여성들은 아내가 되기 전부터는 물론, 아내가 되고 나서까지 순종적이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강압적인 부모에 의해 머리가 두세 군데 부서지거나말 훈련법을 연상시키는 결혼 생활 지침서를 탐독한 남편에게 폭력적인 대우를 받을 수도 있었다. 이 시기 여러 문헌에 등장하는 그리젤다 이야기는 남편의 말을 무조건 따르는 항복한 아내의 전형을 보여준다.

215 중세 사람들은 여자가 남자보다 더 호색적이라고 생각했으므로, 그레고리오 개혁가들은 성직자의 결혼을 금지시키려는 캠페인을 벌이면서 여자들이 색이라는 끈적끈적한 풀로 남자들을 얽어맨다고 독설을 퍼부었다.

216 “강아지, 여자, 호두나무는 두들겨 팰수록 좋다” 16세기 런던에서 저녁 9시 이후에 아내를 구타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있었지만, 소란스러운 소리 때문에 사람들이 잠을 잘 수 없다는 것이 이 법이 생긴 유일한 이유였다.

8. 낡은 것과 새로운 것: 현대 여명기 서유럽의 결혼

219 서유럽 결혼 관습의 독특한 특징 중 하나는 12세기에 벌써 일부다처제가 금지되었다는 점이다.

220 북서 유럽에서는 남녀가 배우자를 선택하거나 거절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이 세계 대부분의 지역보다 더 널리 받아들여졌다.

222 결혼 자금을 마련하는 가장 흔한 방법은 다른 사람의 집에서 여러 해 동안 하인으로 일하는 것이었다. 하인으로 일하는 것은 중세 말기와 근대 초기의 젊은이들에게 일종의 통과의례였다.

223 중세 말기와 근대 초기 유럽의 젊은이들은 오늘날 대학에 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집에 가서 하인 일을 하거나, 공방의 도제가 되어 돈을 모은 다음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처럼 결혼이 가족사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보니 현대에 흔한 만혼 경향이 이 시기에도 나타났다.

225 결혼율이 갑자기 늘어난 것은 흑사병으로 많은 사람이 죽으면서 사업체나 땅을 새로 물려받을 사람이 늘어났고, 상인과 농부들에게 새로운 파트너가 필요해졌기 때문이었다.

225~226 가톨릭 수녀원들은 오래전부터 여성에게 결혼 대신 선택할 수 있는 품위 있는 대안을 제공해 주었다. 하지만 15세기 이후에는 평신도 여성들 중에서도 독신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226 일단 결혼한 사람들은 오로지 죽음만이 끊어 놓을 수 있는 효과적인 동반자 관계를 형성하곤 했다.

227 조화로운 결혼 생활은 개인의 행복뿐만 아니라 사업을 위해서도 필수적이었다.

227 부부와 십 대 자녀들만으로 이루어진 가족을 이루고 사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이었으며, 때로는 어린 자식들조차 다른 사람의 집에서 하인으로 일하곤 했다. 부자들은 자기 집에서 하인으로 일하는 하층계급 젊은이들과 함께 대가족을 이루고 살았기 때문에, 부부는 사생활을 거의 누리지 못했다.

>대가족의 개념이 우리와 많이 다르군.

228 인구통계학자 론 레스테이게는 복지국가가 발달하기 오래전부터 북서 유럽의 가정들이 친족 집단보다 길드나 기업 같은 조직의 우애와 지역적인 가난 구제 위원회에 더 많이 의존했다고 주장한다. 친구, 하인, 이웃, 후원자들이 다른 시대, 다른 지역에서는 오로지 혈연에게만 제공해주던 도움을 서로에게 제공해주는 것이 당연시 되었다는 것이다.

230 북서 유럽의 결혼 패턴은 또한 다른 곳에 비해 청소년 노동력은 물론 특히 여성의 노동력을 사회에 많이 제공해주는 역할을 했다. (중략) 이 노동력의 탄력성이야말로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찍 일어난 이유 중 하나다.

231 중동, 북아프리카, 인도, 중국처럼 고전적인 가부장제가 시행되는 곳, 즉 여자아이들이 아주 어린 나이에 결혼해서 시아버지가 이끄는 가정에 편입되는 지역에서 여성들은 후계자가 될 아들을 낳아야만 가족들 사이에서 입지를 확보할 수 있다. 여자가 남편, 시아버지, 시어머니에게 복종해야 하는 처지에서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는 최선의 전략은 아들을 많이 나아서 아들들과 강한 유대 관계를 맺어 나중에 아들들이 신붓감을 데려왔을 때 며느리들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이다.

>고부간의 문제가 여기서 비롯되었군. 여자들 특히 아내들의 불편한 역사는 아내에서 시어머니가 된 여자가 며느리에게 되물림을 해주는 격이었군.

232 고전적인 가부장 사회에서 여성들은 가족 내에서 심지어 남편에게도 상당한 힘을 휘두를 수 있지만, 그렇게 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자녀 출산뿐이다.

233 종교개혁은 이런 풍조(조화로운 결혼 생활)를 더욱 가속화해서 결혼을 이사화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종교개혁

233~234 개신교도들은 어디서든 세력을 확보하기만 하면 수도원과 수녀원을 폐쇄했다. 심지어는 세력을 확보하기 전에도 수녀원에 틀어박힌 수녀들의 도주와 구출을 지원했다.

234 일부 통치자들은 정치적인 이유로, 즉 멀리서 자신들에게 간섭하는 교황에게서 벗어나고, 교회가 장악한 경제적 자산과 정치적 자산을 직접 통제하기 위해 개신교로 개종했다.

235 그는(헨리8) 자신이 영국 성직자들의 새로운 보호자라고 선포하고, 교황의 사람인 대주교를 자기 사람으로 바꿔버렸다. 그리고 새로운 대주교는 당연히 캐서린과 헨리의 결혼이 무효라고 선언했다. 헨리는 이미 미래의 엘리자베스 여왕을 임신 중이던 앤과 결혼했고, 1534년에는 가톨릭교회의 재산을 모두 몰수해서 영국 국교를 창설했다.

236 헨리는 결국 여섯 번이나 결혼했는데도 두 딸과 몹시 허약한 아들 하나 밖에 얻지 못했다. 영국의 학생들은 헨리의 아내들이 맞은 운명을 다음과 같이 외운다. “이혼, 참수, 사망, 이혼, 참수, 생존.”

237 ‘사랑이라는 단어와 결혼이라는 단어가 같은 문장에 등장하는 경우가 점점 많아졌으며 중세의 궁정 연애시와 대중문학의 특징이었던, 간통의 노골적인 이상화는 점점 드물어졌다. 중세의 종교 저술가들은 인간과 예수의 관계, 또는 이웃들이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을 묘사할 때 사랑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16세기의 설교에서는 부부간의 사랑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아직 멀었어요?

240 이론적으로는 개신교도들이 가톨릭 신자들보다 결혼을 높게 평가했을지 몰라도, 실제로는 비공식적으로 맺어진 결혼 계약의 유효성을 받아들이는 데 훨씬 더 인색했다.

242 가톨릭은 혼외정사를 한 여성을 처벌하려는 노력에도 박차를 가했다. 1556년에 프랑스의 앙리 2세는 독신 여성이나 과부가 임신을 하면 지방 관청에 등록하고 심문을 받아야 한다는 칙령을 발표했다.

243 뉴잉글랜드에서는 남자가 부모나 후견인의 동의 없이 여성의 애정에 유혹당하거나 넘어가면태형이나 징역형을 받을 수 있었다.

243 실제로 여자의 부모가 결혼에 반대하면 결혼을 포기하는 남자가 많았다. 미래의 아내가 부모의 재산을 상속 받지 못하거나, 적대적인 처가 식구들이 자신에게 전혀 득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245 대부분의 남자들에게 결혼은 어른이 되는 자격증 획득과정의 일부였다. 심지어는 출세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247 18세기 이전에는 종교개혁가들을 제외하고는 남녀 모두에게 정절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드물었다.

248 아내를 통제하지 못하는 남편은 벌금을 물거나 마을 연못에 머리가 처박히는 처벌을 받기도 했다. 심지어 뉴헤이븐 정착지의 지사조차 아내의 기강을 잡지 못했다는 이유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사랑, 결혼의 돌연변이

9. 노동의 짝에서 영혼의 짝으로: 남자가 생계를 책임지는 결혼의 등장

254 18세기에 시장경제가 전파되고 계몽주의가 등장하면서 커다란 변화들이 급속히 이루어졌다. 1700년대 말에는 중매결혼 대신 개인이 직접 배우자를 선택하는 결혼이 사회적 이상으로 자리 잡았으며, 사랑을 기반으로 한 결혼이 장려되었다. 5천 년 만에 처음으로 결혼이 정치적, 경제적 동맹 속의 연결 고리라기보다는 두 개인의 사적인 관계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254~255 18세기에는 남편과 아내의 이미지도 변화를 겪었다. 예전에 가족의 노동력을 감독하는 사람이었던 남편은 혼자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사람이 되었으며, 아내의 역할은 경제적 기여도보다는 감정적, 도덕적 기여도에 초점을 맞추는 쪽으로 변했다. 남편은 감정의 경제적 동력이었고, 아내는 감정의 중심이었다.

결혼 규범이 이렇게 변화하는 데 촉진제 역할을 한 것은 두 가지 커다란 사회 변화였다. 첫째, 임금노동이 확산되면서 젊은 부부가 새로운 삶을 시작할 때 부모에게 덜 의존하게 되었다. (중략) 둘째, 시장경제가 부여해준 이런 자유 외에 정치와 철학 분야에서도 새로운 자유가 등장했다. (중략) 18세기에 계몽주의가 등장하면서부터 이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은 더욱 늘어나, 유럽 전역의 영향력 있는 사상가들이 개인의 권리를 옹호했으며, 남녀 관계를 포함한 사회적 관계들을 무력이 아니라 이성과 정의의 바탕 위에서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55 18세기 말 이후 결혼을 사회적 위계구조 속에서 가족의 지위에 의해 역할과 의무가 엄격하게 결정되는 공적인 제도라기보다 공적인 결과를 낳는 개인적 합의로 규정하는 시각이 점점 더 강화되었다.

259 노처녀라는 말을 듣고 이 단어가 무척이나 품위 있으며 자신을 존중해준다고 느끼는 여성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원래 이 말은 천을 짜는 여자들만을 가리키는 고상한 단어였다. 그러던 것이 18세기에 접어들어 결혼이 이상화되면서 처음으로 이 단어에 부정적인 의미가 스며들었다. 오늘날 여성에게 이 말을 사용했다간 대단한 결례를 범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260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특히 중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오랫동안 결혼의 기반이 되었던 정치적 모델이 약화되었다는 점이었다.

사랑의 결합에 내포된 혁명적 의미

262 사랑과 동반자의 관계를 결혼의 기반을 삼은 것은 수천 년간 이어온 전통과의 단절을 의미했다.

264 자유선택에 대한 찬양에서 가정의 붕괴로 곧장 이어지는 미끄러운 비탈길이 실재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은 점증하는 이혼법 자유화 요구였다.

266 1790년대에 프랑스 혁명가들은 결혼을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민간 계약으로 재정의하고, 아버지들이 자녀를 복종시키기 위해 감금할 수 있는 권리를 없앴으며, 딸과 아들에게 재산을 평등하게 상속할 것을 요구하고, 심지어 수천 년 동안 재산권의 근본이었던, 사생아의 상속권 박탈에도 이의를 제기했다.

268 사람들은 남자와 여자가 각각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여자와 남자의 본성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누가 우월하거나 열등하다고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남성이 생계를 책임지는 결혼의 발명

273 남녀를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은 아내가 반드시 집안 살림을 맡아야 하는 것은 남자가 여자를 지배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가정이 여성들을 경제 생활과 정치 생활의 혼란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성역이기 때문이라고 믿게 되었다. 가정은 또한 남편들이 물질적인 것에만 관심이 집중되는 임금노동의 세계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18세기 성적인 위기

274 젊은이들의 구애에 대한 과거의 사회적 제약이 제거된 것은 출산 패턴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19세기 초까지 유럽 일부 지역의 혼외출산 비율은 20세기 말의 미국과 서유럽보다 높았다. (중략) 빈곤계층에서 이처럼 폭발적으로 혼외출산이 늘어난 것은 중산층과 상류층의 가장 커다란 걱정, 즉 개인의 자유와 낭만적인 사랑이 커다란 폐해를 낳기 십상이라는 생각이 옳았음을 증명해주었다.

10. “한 둥지 안의 새 두 마리”: 19세기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감상적인 결혼

281 19세기 중반에는 서유럽과 북아메리카 전역의 중산층과 상류층 사이에 사랑을 기반으로 결혼해서 아내는 집에서 살림을 맡고, 남편은 그녀를 부양하며 보호해주는 생활이야말로 지상에 천국을 실현하는 방법이라는 공감대가 거의 형성되어 있었다.

282 여성들은 옷이라는 보호막 속에 자신을 가뒀다. 19세기 말에 유행하던 여성 의류의 평균 무게는 약 17킬로그램이나 되었다.

19세기에 적어도 중산층의 지침서 저자들과 의사들은 정상적인여성들에게 성적인 충동이 전혀 없다는 주장을 정설로 받아들였다.

289 애정의 대상이 가족으로 좁아지는 현상은 19세기가 진행될수록 더욱 가속화되었다.

289 부부의 결혼 생활이 자리를 잡은 뒤에는 핵가족만의 사생활이 훨씬 더 중시되었다.

291 19세기로 넘어오면서 유럽과 북아메리카 중산층 및 상류층 남성들은 가족의 울타리 밖에서 과거에 자신이 수행하던 의무, 즉 일주일에 며칠씩 거래처 사람들과 저녁을 들거나 이웃과 부하 직원들에게 식사 대접을 하는 등의 행위에 이미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대신 가족을 부양하고 아내와 자녀에게 헌신하는 일이 남성적인 미덕으로 자리 잡았다.

293 미국 남부의 노예 소유주들은 노예들에 관한 한 결혼의 신성함을 전혀 존중하지 않았으며, 노예해방이 이루어진 뒤에도 대부분의 미국 흑인들은 가정을 성소로 만들 수 있는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295 남자와 여자에게 적합한 일이 따로 있다는 사고방식은 옛날 같으면 법적인 독신녀남편 대리나 가족의 보호자로서 독립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는 여자들에게 모든 길을 막아버리는 역할을 했다.

297 아내들이 섹스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새로이 갖게 되었다는 것은 아직 믿을 만한 피임 방법이 없던 시대에 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299 19세기 내내 미국의 주들은 대부분 여자가 섹스에 동의할 수 있는 나이를 열 살이나 열한 살이나 열두 살로 정해놓고 있었다. 심지어 델라웨어 주에서는 일곱 살이었다. 하지만 미국과 유럽의 개혁가들 덕분에 19세기 말에는 여자가 법적으로 섹스에 동의할 수 있는 나이가 열여섯에서 열여덟 살로 확립되었다.

300 어머니가 자녀에게 도덕적으로 독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시각은 여성의 교육 기회가 확대되는 데에도 기여했다.

11. “들썩거리는 화산”: 빅토리아 시대 결혼의 이면

307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결혼을 인생의 축으로 만들고 부부간의 사랑을 모든 감정과 의무와 만족감의 중심으로 만들려고 했던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310 하지만 낭만적인 사랑을 찬양하는 분위기 때문에 특히 여성들이 결혼을 망설이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19세기에 많은 여성들은 혹시 남편감이 고귀한 이상에 걸맞은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하는 결혼 쇼크를 겪었다.

311 반드시 진정한 사랑이 결혼의 기반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는 그 밖의 다른 이유로 결혼하는 것은 부도덕하다는 인식이 내포되었다.

312~313 유럽, 캐나다, 미국에서 사랑의 결합을 가장 강력하게 지지하던 사람들은 또한 이혼에 대한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고 가장 강력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그들이 보기에 사랑 없는 결합은 부도덕한 것이므로 반드시 아무런 불명예를 당하지 않고 그 결합을 해체 할 수 있어야 했다.

315 여자들이 남자와 동등하기 때문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더 우월한 존재이기 때문에 정치적 권리를 얻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321 남자들이 서로에게 신체 접촉을 통해 애정을 표현하는 것이 동성애로 해석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부터였으며, 여성들 사이의 열렬한 감정은 1900년대 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비정상적인 행위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321 독신 여성들은 노년을 대비한 저축은 고사하고 혼자 힘으로 몇 년씩 생계를 해결하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많은 여성들이 결혼을 가난이나 성매매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 보았다.

322~323 새로운 결혼의 이상 덕분에 현실 속에서 남자의 지배권이 약화되는 경향이 있었음에도,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여성에게 허황된 평등을 보장해주면 결혼이 위협받게 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여성의 권리 확대에 완고하게 저항했다.

324 또한 여성들은 결혼 생활에서 누릴 수 있는 권리가 거의 없으며, 결혼 이외의 대안도 거의 없는 현실에 맞춰 기대와 욕망을 조절해야 했다. 지금에 비해 19세기에 가정불화가 그토록 적었던 것은 여성들이 포부를 접고 절망감을 억눌렀기 때문이다.

328 여성의 순수성을 숭배하는 분위기 때문에 남자들은 좋은 섹스와 좋은여자를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329~330 현실적으로 많은 여성들이 당연히 성적인 충동을 느꼈으므로, 이 충동을 억제하려고 애쓰다가 결국 병을 앓곤 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들 사이에 유행병처럼 번지던 병이 있었는데, 성적인 좌절감이 이 병의 원인이었음이 거의 확실하다.

330 의사들은 히스테리를 완화시키기 위해 여성들의 골반 부위를 마사지했다. 히스테리는 원래 자궁을 뜻하는 그리스어 단어에서 유래한 말이다. (중략) 사실 진동기는 19세기 말에 시간도 많이 들고 지루하기만 한 이 귀찮은 일에서 의사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발명된 물건이다.

331 19세기 말에 일부 개혁가들은 이미 부부 모두에게 당연히 기쁨이 되어야 하는 결혼 생활에서 섹스가 바람직한 역할을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도전에 직면한 빅토리아 시대의 결혼 관념

334 상업의 자유화도 19세기의 성적인 금기를 깨뜨리는 데 기여했다.

336 의사들은 자전거 타기가 여성들의 성적인 방종으로 이어지는 첫걸음이라고 주장했다.

337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영국에서 마침내 여성들이 투표권을 획득했을 때, <새터데이 리뷰>의 편집자는 이것이 일종의 반역이라고 주장했다.

12. “산이 움직일 때가 왔다”:감상적인 결혼에서 성적인 결혼으로

339 피임과 성에 관한 정보를 얻기가 그 어느 때보다 수월해지면서 빅토리아 시대의 부부들을 괴롭혔던 성적인 긴장과 두려움이 해소되었다.

339 남자와 여자에게 별도의 영역이 있다는 관념은 급속히 무너졌다. 1900년부터 1920년대 말 사이에 여성 참정권 운동은 강력한 국제 운동이 되었다.

341 순식간에 섹스가 최고의 화제가 되었고,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성적인 본능이 지닌 힘에 관한 이론을 널리 퍼뜨렸다. (중략) 시인과 소설가들도 성을 찬양하는 사회학자와 심리학자의 대열에 합류했다. (중략) 성에 관한 개방적이 태도는 지식인과 자유주의자가 아닌 사람들에게까지 번져 나갔다.

345 술과 마약은 젊은이들의 실험정신을 더욱 자극했다.

347 그런데 1920년대에는 섹스가 불만족스러운 결혼 생활에 대해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349 20세기 들어 결혼 생활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이 중요한 위치에 올라서자마자 과거 결혼을 유지하던 거의 모든 원칙들이 흔들렸다. 남녀의 역할 분담이 모호해지고 성적 순결을 강조하는 원칙도 희미해지자 사람들은 반세기 뒤에 결혼 제도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21세기인 지금도 수많은 커플들이 여전히 결혼을 하고 있다.

348~351 진보적인 사업가이자 정치 운동가인 윌리엄 카슨은 모성 본능은 강하지만 결혼할 수 없는 여성에게서 모성본능을 만족시킬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일부 저명인사들은 심지어 동성에게서 성과 사랑의 기쁨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그 기쁨을 허용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353 하지만 외부의 제약 없이 영원히 행복하게산다는 것은 곧 사람들이 감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과거에 가능했던 수준보다 더 깊은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로 인해 성에 더욱더 관심이 쏠리게 되었다.

360 1920년대 여자들은 성적인 해방을 맞았지만 그것이 여성의 독립성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363 19세기와 마찬가지로 중산층 여성들에게 가장 무난한 직업은 가정생활에 관한 조언을 해주는 것이었다.

367 1930년데에 나치가 실행한 악의적이고 인종차별적인 우생학 프로그램은 널리l 알려져 있지만, 1920년대에 서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우생학이 얼마나 인기를 끌었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371 “과거의 가치관은 사라졌다.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 새로운 가치관은 지금 정신없이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부글거리는 혼돈 속에 살고 있다. 불안이 미친 운동선수처럼 현대성 위에 올라타고 있다. 문명은 자신을 목 조르려 하는 모순들 속에 붙들려 있다.”-새뮤얼 슈맬하우젠-

13. 어떻게든 견디다가 아기 만들기: 대공황기와 2차 세계대전 때의 결혼

376 대공황은 기혼 여성의 노동력 진입을 가속화했다. 1900년에 미국의 기혼 여성 중 직장에 다니는 사람은 6퍼센트도 되지 않았지만, 1930년대 중반에는 15퍼센트 이상의 기혼 여성들이 직장인으로 기록되어 있었으며, 기록이 남지 않은 기혼 직장 여성의 숫자도 아주 많았다.

377 남편이 직장에 다니고 있는데도 일을 하는 여성들은 특히 신랄한 적의의 대상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일자리가 모자란데, 그런 부부가 이중으로 돈을 받아먹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378 정부도 남자가 생계를 책임지는 결혼 형태를 강화하기 위해 적극적인 조치를 취했다.

이제 당신은 커리어우먼의 남편

380 여성들은 전쟁 수행을 돕기 위해 전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에 종사했다. (중략) 그들은 이렇게 남자의 일을 했을 뿐만 아니라, 임금 면에서도 남자의 임금을 받았다.

381 전쟁이 터지면서 갑자기 많은 흑인 여성들이 임금이 높은 제조업체 여공이나 사무직원이 될 수 있었다. 수십 년 뒤에 한 흑인 여성은 진정한 노예해방을 가져온 사람은 링컨이 아니라 히틀러였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

결혼의 황금시대가 밝아오다

389 전쟁 이후의 결혼 열기는 미국에서만 나타난 현상이 아니었다. 유럽과 스칸디나비아 전역은 물로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에서도 결혼 연령이 낮아지고, 결혼율이 증가하고, 이혼율이 감소했다. 프랑스와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1950년대 초에 스물네 살의 남자들 중 기혼자의 비율이 50년 전에 두 배나 되었다.

390 이 긴 10년이 서구 역사에서 결혼의 황금기였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1960년대에 결혼은 북아메리카와 서유럽에서 이미 거의 보편적인 일이 되어 있었으므로, 전 인구의 95퍼센트가 결혼을 했다.

391 1950년대라는 긴 10년 동안 결혼은 삶의 모든 것이었다.

392 결혼의 황금기는 놀랍게도 사회경제적 계층과 인종마저 초월해버렸다.

393 이 유례없는 결혼 시스템은 18세기 말에 발명된, 사랑을 기반으로 하고 남자가 가정을 보호하는 결혼 모델을 거의 2백 년 동안 지속적으로 만지작거린 끝에 도달한 정점이었다.

14. 오지와 해리엇의 시대: ‘전통적인결혼의 긴 10

394 미국에서는 1947년부터 1960대 초까지, 서유럽에서는 1952년부터 1960년대 말까지 이어진 긴 10년은 결혼의 역사에서 독특한 순간이었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자유로이 구애하고 결혼해서 자신의 가정을 꾸릴 수 있었던 적은 그때까지 한 번도 없었다. 부부가 대가족과의 유대감이나 지역 공동체로부터 그토록 독립적이었던 적도 없었다. 또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오직 한 종류의 가정만이 정상적이라고 의견 일치를 보았던 적도 없었다.

399 ‘ 10은 결혼의 역사에서 가장 독특한 순간이었다. 이 시기 많은 사람들이 인기 시트콤 <오지와 해리엇>의 가정처럼 보이기 위해 최신 가장용품과 가구 등을 들여놓으며 행복한 보금자리를 지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 보금자리는 후에 다가올 변화의 바람에 쉽사리 흔들릴 정도로 불안정한 것이었다.

400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정상적인 가족들과 같은 생활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나 부모를 탓했다.

401 소비혁명의 초기에 해당하는 이 시기에 사람들은 결혼을 풍족한 생활로 가는 통로로 생각했다.

403 하지만 결혼 전문가와 가족 전문가들은 남성이 생계를 책임지는 결혼 생활이 여성에게 스트레스를 준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남녀의 역할 분담을 바꾸려는 노력을 거의 지지하지 않았다.

405 이혼은 결혼의 실패라기 보다는 개인의 실패로 인식되었다.

406 1950년대의 기혼 직장 여성들은 대부분 마흔다섯 살이 넘은 사람들이었다. 아이 기르는 일을 거의 끝낸 사람들.

412 대중문화가 점점 섹시해지는 현상은 1950년대에도 계속되었다.

413~414 1950년대의 많은 남성들은 돈을 벌어오는 역할을 권력의 원천으로 보지 않고, 가족에 대한 사랑 때문에 수행하는 무거운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414 기대치가 낮은 것이 반드시 나쁜 일만은 아니다. (중략) 1950년대의 부부들은 낮은 기대치 덕분에 사실은 끔찍하기 짝이 없었던 결혼 생활을 견딜 수 있었음이 분명하다.

415 처녀가 아닌 여자는 강간범을 고발할 수 없는 곳이 많았으며, 남자가 아내를 강간할 수 있다는 주장은 여전히 터무니없는 말로 여겨졌다.

연애의 재앙과 보편적인 결혼의 붕괴

15. 변화의 기운: 1960년대와 1970년대의 결혼

423 겨우 20년 만에 결혼은 젊은이들의 성생활, 어른으로의 이행, 직업 선택, 부모 변신을 좌우하는 일생 대사의 지위를 잃어버렸다.

425 1960년대의 반전운동과 인종차별 반대운동 뒤에는 가정에 대한 공격이 이어졌다. 여성의 역할, 구애, 결혼에 관한 1950년대의 관념들이 한꺼번에 공격의 대상이 된 것이다.

428 처음에 사람들은 가정에서 만족을 얻으려 했다. 하지만 결혼이 한층 높아진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하자 불만이 점점 커졌다. 결혼 생활에서 행복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공허하거나 불만족스러운관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커졌다.

429 1962년 갤럽 조사에서는 미국의 기혼 여성들이 인생에 매우 만족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딸들이 자신과 같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여성은 10퍼센트 밖에 되지 않았다. 그들은 딸들이 결혼을 미루고 공부를 더 많이 하기를 바랐다. (중략) 하지만 그들은 자식들이 자기보다 더 많은 자기표현의 기회를 누리기를 바랐다.

430 1963년에 프리단은 주부들의 고독감과 소외감을 이름 없는 문제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남자들은 이미 10년 전에 소외된 가장의 문제에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 이름은 순응주의였다.

430 휴 프래너는 1953년에 남자가 가정에서 져야 하는 책임에 반기를 들기 위해 잡지 <플레이보이>를 창간했다. 헤프너는 남자들이 감정적으로 휘말리지 말고 여자들이 줄 수 있는 쾌락만을 즐기라고 촉구했다. 감정적으로 휘말리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경제적으로 책임을 지는 것이었다.

431 많은 여성들은 잡지에서 결혼 생활의 이상적인 모습이 어떤 것인지 읽은 뒤에야 비로소 자신의 결혼 생활이 이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매스컴의 단점이다.

432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배우자의 잘못이 없는 무과실 이혼이 널리 퍼져나간 것은 결혼 생활에 대한 불만이 증가한 결과였다.

434 피임약은 개발되자마자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미쳐 섹스와 임신의 관계를 영원히 바꿔놓았다. 1960년대의 피임 혁명은 이른바 성 혁명보다 훨씬 더 극적인 전통과의 단절이었다.

434 1950년대의 여성들은 여전히 임신을 걱정해야 했기 때문에 반드시 사랑하는 사람하고만 섹스를 해야 한다는 인식에 매달렸다.

435 역사상 처음으로 어느 정도의 교육을 받고 경제적인 능력이 있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섹스와 출산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수천 년 동안 여성들의 삶을 결정했던 원치 않는 임신이라는 유령이 사라진 것이다. (중략) 1970년에는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피임약이나 자궁내 장치를 사용하거나 아예 불임수술을 받은 여성의 비율이 전체 성인 여성의 60퍼센트에 이르렀다. 출산율은 대공황기보다 훨씬 더 낮아졌다.

>나는 피임에 대해 한 번도 신경을 써 본 적이 없지만, 나와 반대되는 상황의 경우에 있는 여성이라면 임신과 출산이 고통스러웠을 것 같다. 그것은 인생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놓는 일이니까.

438 하지만 1960년대 말에는 결혼이 지극히 기본적인 인권이기 때문에 정부의 변덕에 맡겨놓을 수 없다는 인식이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

440 하지만 1968년에 대법원이 루지애나 주를 상대로 한 르바이의 소송에서 평등한 보호를 규정한 수정헌법 14조가 혼외자식에게도 적용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중략) 합법적인 자식과 사생아의 구분이 없어진 것은 고대로부터 내려온 불평등을 해소한 인본주의적인 조치였다. 하지만 이로 인해 결혼 제도가 수천 년 동안 수행해온 역할을 잃어버렸으며, 사람들의 정치적, 경제적 권리와 의무에 미치는 결혼의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폭풍 전야

441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자율성과 자발적인 협동이 권위에 대한 복종보다 더 고귀한 가치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442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남성들은 직업과 소득의 불안정성을 경험한 반면, 여성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서비스직 일자리는 꾸준히 늘어났다.

443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눈에 띈다. 여성들이 지장에 다니는 기간이 늘어남에 따라, 남성들의 취직연령이 높아지고 퇴직연령은 낮아졌다. 따라서 남녀의 격차가 훨씬 더 줄어들었다.

444 독신 여성들은 현대의 남자들이 결혼을 두려워한다고 투덜거렸고, 남자들은 현대의 여성들이 직장에서는 남자들과 똑 같은 대우를 원하면서 밖에서는 남자가 저녁식사 값을 지불하기를 바란다고 투덜거렸다.

447 1970년대 말에 여성들은 법적인 권리, 교육, 피임, 괜찮은 일자리를 모두 누릴 수 있었다. 이혼도 쉬워졌다. 이와 동시에 새로운 경제 체제 속에서 전통적인 가족 구조를 유지하기가 어려워졌다.

16. 초강력 폭풍: 20세기 말 결혼의 변신

450 결혼율과 재혼율이 계속 높게 유지되는 동안에는 이혼율의 증가로 인해 결혼의 보편성이 위협받지는 않았다. 이혼과 재혼이 각각의 가정에 아무리 파괴적이고 고통스러운 영향을 미친다 해도 말이다.

451 하지만 이혼 후에 재혼하는 사람이 줄어들었다. (중략) 이에 못지 않게 극적인 변화를 보인 것은 이십 대 중반이 지나도 결혼하는 않는 사람들의 숫자였다. (중략) 이보다 훨씬 더 중대한 변화는 결혼하지 않고 같이 사는 커플들의 숫자가 늘어났다는 점이었다.

455 계급과 상관없이 이제는 순전히 가족만을 위해 직장에 다니는 여성들이 거의 없다는 것.

456 물론 기혼 여성들이 직장에 다니는 데에는 경제적 이유뿐만 아니라 심리적, 사회적 이유도 큰 몫을 하고 있다.

457 여성들은 직장에 다닐 때 사회뿐만 아니라 남편도 자신을 더 존중해준다고 항상 말한다.

458 여성들은 여전히 이혼 뒤에 생활 수준의 하락을 경험하지만, 이토록 많은 여성들이 남편 없이도 자신과 아이들을 부양할 수 있었던 적은 지금까지 역사상 한 번 도 없었다.

460 이처럼 기대수명이 늘어남에 따라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함께 사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힘든 도전이 되었다.

461 이혼과 동거 커플의 결별은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는 한부모가정과 재혼 가정이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

466 하지만 결혼이 20세기 말에 미국에서 법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특권적인 지위를 잃어버렸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467 2000 7월에 버몬트 주는 동성 결합을 결혼과 동등한 것으로 인정하는 법을 제정했다. 2003년 캐나다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2개 주가 동성 결혼을 합법화했다.

472 1950년대에는 결혼한 사람들이 미국 내 모든 가구의 80퍼센트를 차지했다. 하지만 21세게가 시작될 무렵에는 결혼한 사람들의 비율이 51퍼센트도 되지 않았고, 자식을 키우는 부부의 비율은 겨우 25퍼센트였다. 역사상 처음으로 부부가 자식을 키우며 사는 가정보다 독신 가구가 더 많아진 것이다.

475 여성의 노동 패턴 변화는 출산 혁명의 원인이자 결과였으며, 이는 선진국뿐만 아니라 개도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결혼의 비제도화

476 우리 할머니 세대와 달리 요즘 사람들은 제도 속에서 살 필요가 없다.

478 기혼과 미혼을 가르는 장벽이 무너진 것을 두고, 일부 법률사가와 사회학자들은 결혼의 비제도화 또는 비합법화라고 표현한다.

17 전인미답의 영역: 결혼의 변화가 우리 삶을 어떻게 바꿔놓고 있나

483 결혼하지 않아도 생산적인 인생을 사는 것이 가능한 세상에서 현대의 부부는 함께 살아가기 위해 결혼 생활의 이유와 도움이 되는 자신들만의 습관을 과거보다 더 열심히 의도적으로 찾아내야만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의무뿐만이 아니라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훨씬 더 만족스럽고, 공정하고, 효율적인 가정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는 기회도 동시에 잡았다.

484 사람들이 가족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싶어 하든, 심지어 이른바 전통적인 결혼 생활을 구축하는 데 전념하는 경우에도, 과거와는 다른 방식을 이용해야 한다.

489 2001년에 미국에서 실시된 여론조사에서는 이십 대 여성 80퍼센트가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줄 아는 남편감을 찾는 것이 돈을 잘 버는 남편감을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대답했다.

507 서유럽과 북아메리카에는 다양한 동거 패턴들이 존재하지만, 동거 커플들은 일반적으로 결혼한 부부보다 더 공평하게 가사를 분담한다. 또한 결혼 전에 동거하는 남자들은 곧장 결혼하는 남자들보다 가사에 더 많이 참여한다. 어쩌면 평등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고, 가사를 분담하는 성향이 높은 남자들이 동거할 가능성 또한 높은 것인지도 모른다.

513 결혼을 바라보는 남녀의 태도에서 역사적으로 의미심장한 역전이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대략 1970년대까지 결혼은 여성들이 훨씬 더 필요한 일이었으며, 여성들 또한 남성들보다 훨씬 더 결혼을 원했다. 남자들은 여자들만큼 결혼에 열의를 보이지 않았고, 결혼으로 인해 져야 하는 부담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는 경우가 더 많았다. 하지만 1980년대와 1990년대 남성들은 결혼을 예전보다 훨씬 높이 평가하기 시작했으며, 20세기 말에는 결혼의 삶이 이상이라고 말하는 남성이 여성보다 훨씬 더 많았다.

515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결혼밖에 없었던 시절에는 결혼이라는 제도가 보편성과 안전성을 확보하고 있었지만, 이제 와서 그때로 되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것은 나쁜 소식인 동시에 좋은 소식이기도 하다.

515 하지만 결혼이 점점 선택의 문제가 되면서 더 깨지기 쉬운 상태로 변한 것도 사실이다.

 

 

 

3 내가 저자라면

『진화하는 결혼』은 인류의 여명기 때부터 고대, 중세, 근대, 현대에 이르는 긴 시기 동안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의 결혼과 관련된 각종 문헌과 통계 자료, 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취합, 분석하여 결혼의 기원과 결혼을 둘러싼 다양한 해석, 결혼의 발전 방향 등을 이야기한다. 이를 통해 이른바전통적인의미로서의 결혼에서부터 현대적인 의미로서의 결혼까지를 폭넓게 다루며 결혼이라는 인간만의 독특한 사회 제도가 지닌 위상을 재고하게 만든다.

결혼에 대한 추상적이고 낭만적인 시각이 역사 속에서 존재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에 놀라울 따름이다. 나는 왜 결혼을 두 번이나 했을까?가 궁금했고, 인간에게 결혼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찾고 싶었으나 아직은 잘 모르겠다.

<차례와 목차에 대하여>

탄탄한가? 시간대별로 구성이 되어 있어 탄탄하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하는 느낌이다.

일관성이 있는가? 가끔 역사적인 이야기가 샛길로 빠지는 느낌을 준다. 저자가 세계사의 스캔들을 굉장히 좋아하는 듯 했다.

신선한가? 세계의 방방곡곡에 있는 결혼 문화의 소개는 참으로 신선했다. 그리고 결혼에 대한 환상에 사로 잡혀 있는 나로서 결혼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는 부분이 좋았고 왜 그렇게 되어 있는지 궁금했다.

<좋았던 장과 절>

중국과 아프리카의 알지 못했던 부분들이 신선했다. 대부분이 결혼을 하고 살지만 결혼의 모양은 그 지역과 시대에 따라 굉장히 다르다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리고 종교가 생활에 미친 영향, 결혼에 미친 영향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영화를 볼 때 이해가 가지 않던 부분이 이해가 되었다. 시대를 거슬러 한 주제에 대해 이렇게 탐독한 것은 재미있는 시간 여행이다.

<배울점 및 보완점>

*동양과 서양, 아프리카를 가로지르는 종횡무진의 자료조사와 내용에 감탄을 금치 못하겠다. 상대적으로 서양의 분량이 대부분이긴 하나 앞에서 읽은 <아내의 역사>에 비하면 그 내용을 포함하면서도 더 디테일하다 할 수 있다.

*중간중간에 이야기를 들려주는 식의 전개는 이해하기 쉽게 전개되어 있어 좋았다. 이야기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사례의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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