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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2일 11시 51분 등록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

: 청년 김원영의 과감한 사랑과 합당한 분노에 관하여


김원영 저, 푸른숲, 2010.



1. 저자에 대하여


■ 김원영 ■

출생/사

1982. 강원도

활동분야

 

 

• 발 자 취 •  


검정고시로 초등학교 과정 마침

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교의 중학부와 일반 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 재학

인제대학교 인문의학연구소에서 펴낸 《인문의학》의 공동 필자로 참여

인터넷 신문 ‘비마이너(beminor.com)’에 칼럼 연재

 

 

……

……



 저자인 ‘청년’ 김원영은 강원도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1980년대생인 그의 시대에도  장애는 사회적인 편견을 받기에 충분한 ‘재앙’인 이유와 신체적인 이유로 그는 열다섯 살까지 방 안에서만 지냈다. 그의 병명은 수시로 뼈가 부러지는 골형성부전증이다. 그런 그는, 재활원에서 지내다가 많은 노력과 투쟁 끝에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다시 또 그만큼의 노력과 투쟁으로 대학교에 진학한다. 대학에서 그는 인권 운동에 참여하고 인생의 진로를 고민하며 다시 로스쿨에 진학한다.

 수식어를 붙이기 좋아하는 우리네 언론은, 우리 사회는 그에게 ‘장애를 극복한 장애인’이라 칭하며 비장애인도 이루기 힘들다는 서울대학교 진학이나 로스쿨이란 타이틀에 집중한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수식어에 대해 반박하며 ‘장애를 극복했는데 어떻게 장애인일 수 있는가’를 되묻는다.

 어린 시절 학교 가는 친구들을 창문으로 바라보는 장애인 소년이 사회에다가 장애인임을 알림으로써 (즉, 장애인 등록을 함으로써) 재활 학교에 들어가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힘겹고 낯선 생활에 집으로 가고 싶다 투정부리는 소년에게 아버지는 매번 ‘다음 주에 올게’라는 말로 아이가 재활 학교에 익숙하도록 했다. 그렇게 그곳 생활에서 적응을 하며 자신과 같은 친구들을 만난 소년은, 자신도 장애인임을 인정하지만, 동시에 ‘장애인’만이 생활하는 곳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물론 그에게 재활학교는 다른 세상을 나아가게 해 준 곳이기도 하다. 그는 학교에서의 생활을 이렇게 묘사한다.


p65 재활 학교를 통해 나는 공부를 시작했고, 우정을 배웠으며, 무대 위에 섰고, 사랑을 경험했다. 그동안 주변의 누군가는 죽었고, 누군가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고, 또 누군가와는 첫 번째 키스를 했다. 어리둥절하게도 그 모든 일이 단 3년 동안 일어났다. 병원 아니면 작은 방 안에서의 삶이 전부였던 나의 삶이 어느 순간 고속버스를 타고 유럽 여행이라도 하듯 정신없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나는 두렵고 떨렸던, 그리고 부정하고 싶었던 이 공간에 나 자신을 완전히 풀어놓았다. 가족과 함께 투병 생활을 하던 ‘골형성부전증 환자’임을 잊고 휠체어에 앉은 내 몸과 하나가 되었다. 더 이상 치료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던 내 병은 점차 내 몸의 일부가 되었다. 나는 골형성부전증을 안고 사랑을 하고 공부를 하고 연극을 했다.


 그러나, 장애인들만 모여 있는 그곳은 또 한 편으로는 새로운 세상을 나아가도록 하지 못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장애인 학교가 아닌 일반 고등학교를 진학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은 혼자만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일반 고등학교를 진학하기 위해서는 성적이라는 기본적인 요건 외에 ‘더 월등한 성적’이 필요되었고 또한 학교의 허락, 승인이 필요했다. 이러저러한 어려움 속에서 포기하려는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고, 그 동안의 노력만으로도 그를 ‘달리’ 보며 그 정도면 됐다고 하는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이건 고등학교를 가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야. 이건 네가 앞으로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야. 이 껍질을 평생 안고 가느냐 깨고 나가느냐.”는 장애인 ‘선배’의 말에서 그는 이 어려움을 깨고 나아가기 위해 구조적인 부분을 그를 도와주는 이들과 함께 하며 해결해 나간다. 그리고 마침내 일반 고등학교를 진학하고, 다시 대학교를 진학하게 된다.

 당시의 장애인 인권 운동의 분위기와 함께 그는 장애인 인권 운동을 추진하며 장애에 대한 ‘인식’과 ‘관점’을 확립한다. 

 “쿨한 게 아니라 ‘핫한’ 장애인, ‘야한’ 장애인이 되었으면 좋겠다” 말하는 그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특히 무기력한 세대라 비판받는 세대에게 필요한 것이 분노라고 말하며 함께 하는 삶을 말한다.


참고자료

알라딘 저자 소개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프롤로그_작고 약한 존재들의 야하고 뜨거운 고백을 열망하며


p5 금욕하는 성자나 초연한 철인(哲人)은 완성된 인간이 되는 데 실패한 사람들이다. 그들 가운데 소수는 사회를 풍요롭게 만들기도 하지만 세상이 그들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아마도 지겨워져 죽을 것이다.  - 버트란트 러셀, 나는 이렇게 믿는다.


p7 나의 몸, 우리의 몸, 가난과 질병과 추함에 빠져들까 불안해하는 몸을 우리는 극복할 수 있는가? 나는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오랜 기간 노력했음에도 여전히 이 질문에 확실한 답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내가 분명히 알게 된 것 한 가지는 장애인은 장애를 결코 극복할 수 없으며, 그것을 극복하는 순간 이미 장애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누군가 나에게 ‘장애를 극복한 장애인’이라고 말한다면 그 순간 나는 모순된 존재가 될 것이다. 장애를 극복했다면서 왜 나는 여전히 장애인인가. 장애를 극복하지 않고 장애인인 상태로 존재하면서도 내가 세상의 한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서는 왜 안 되는가.


p7 우리는 대개 자기 삶에 주어진 여러 조건들을 완전히 ‘극복’할 수 없다. 외모, 성장 환경, 부모의 가난, 질병, 장애, 성별 등은 우리가 극복할 수 없는 것들이다. 물론 종종 그런 조건들을 극복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다. 세상은 그들을 가리키며 왜 너희는 그들처럼 극복하지 못하느냐고 손가락질을 한다. 하지만 극복하는 것만이 우리가 그런 조건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오히려 우리들의 조건들을 세상의 중심에 오게 하는 도전과 연대, 상상력에 우리의 미래를 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대부분은 아무런 도움 없이 장애와 가난을 극복하고 철저한 자기 관리와 다이어트로 미인의 대열에 끼어들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며, 그럴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p8 장애인 그리고 이 사회에서 격리되어 있는 수많은 ‘미물’들은 모두 뜨거운 피가 흐르는 존재다. 연애를 하고, 섹스를 하고, 성공을 욕망하고, 상대의 멸시와 모욕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인간의 욕망과 열정을 가슴에 품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상대가 한쪽 뺨을 때리면, 그 힘에 굴복해 나머지 뺨을 내밀면서도 “그래, 나는 참 쿨하고 착한 사람이다.”라고 위안해야 했다. 그렇게하지 않으면 이 세계는 병약하고 느린 그리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사람들에게 주제넘게 굴지 말라고 충고했다.


p8~9 나는 이제 ‘야한’ 장애인, 뜨거운 인간이 되고자 한다. 내 피는 지금 이 순간도 찬란한 태양 아래서 세상과 죽을힘을 다해 싸우고, 세상과 모든 것을 걸고 사랑하라고 부추긴다. 절대로 ‘싸가지 없이’ 굴지 못했던 미약한 존재들, 세상에서 영원히 찾아주지 않을까 봐 자신을 숨겨야 했던 존재들, 식당에서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것조차 쉽게 할 수 없었던 존재가 이제 감히 ‘섹시함’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우리는 쿨하기(cool)보다는 오히려 뜨거운(hot) 존재가 되어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고 불타오르는 열정으로 세계를 향해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다. 그 권리를 획득한 자만이 ‘야한 장애인’이 될 수 있고, 야한 장애인이 되려는 자만이 그 권리를 세상에 드러낼 수 있다.


1장 유리 같은 몸, 가시 같은 마음


보이지 않는 존재

p19~20 사람들은 악의가 없다. 그저 나를 못 보았을 뿐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아래쪽을 잘 보지 않고 살기 때문에, 자기 시선보다 1미터 정도 아래에 있는 나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다. 설사 어떤 존재가 있다는 게 느껴진다고 해도, 그게 물건을 사기 위해 줄을 서 있는 경제 주체일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보통 앞만 보고 걸어간다. 그 앞에서도 자신과 일상적으로 관계를 맺는 익숙한 존재들만을 지각한다. 아래쪽에서 꿈틀거리는 존재들은 바쁘고 치열한 경쟁 속에서 그다지 고려할 대상이 아니다.


p21 나는 내 삶을 선택한 적이 없다. 나를 세상의 중심에서 밀어내는 강력한 원인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들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먼 길을 돌았다. 나는 장애가 도대체 무엇인지 아직도 제대로 알지 못하며, 질병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왜 타고난 혹은 우연한 사건에 의한 몸의 상태에 따라 그토록 현저히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는지 잘 알지 못한다.


나는 골형성부전증이다

p28 아버지는 이미 일을 하러 내려가고 없었다. 누가 더 슬펐을지는 모르겠다. ‘생명에 지장이 없는 것’, 그것이 나와 우리 가족에게 희망인지 절망인지 나는 수술이 끝난 후에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질병은 보통 아이를 성숙하게 하는 법이다. 성숙한 아이에게는 그만한 크기의 고통이 있다.


달빛만 들어오던 사춘기

p33~34 그러나 그런 몇몇을 제외하고 당연히 누구도 자신을 장애인으로 등록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공식적으로 장애인이 된다는 것은 사회적인 추락, 투병 과정에서의 실패 그리고 세계의 외부로 밀려남을 인정한다는 듯이다. 또한 영원히 회복할 수 없는 비정상의 굴레를 뒤집어쓰는 것이다. 휴대폰 요금을 30퍼센트 할인받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추락시킬 사람은 많지 않다.

 

배움이 열어준 신세계, 그러나 비좁은 세계

p44 그들의 공통점은 갑작스레 장애를 갖게 되었다는 것, 그 때문에 자신의 뚜렷한 꿈과 엄청난 성실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외부로 밀려났다는 것, 그 외부에서 탈출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발버둥쳤다는 것이다. 그 자신과 가족이 존재했던 세계 이외에는 어느 곳에서도 그들에게 먼저 손을 뻗지 않았다.


풍경처럼 사는 사람들

p46 재활원은 자원봉사자들에게 하나의 풍경일 뿐이었다. 내게는 그곳이 삶의 전부였지만 각자의 공간에서 일을 하고, 연애를 하고, 영화를 보고, 섹스를 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팍팍한 일상의 때를 잠시 벗겨내기 위한 ‘풍경’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곳을 찾아오는 많은 외지인들에게서 그것을 느꼈다. 그네들은 친절하게 말을 걸고 내 생활을 도와주곤 하지만, 그때 우리가 나눈 많은 이야기들은 그네들의 삶에 스며들지 않고 한순간 숭고한 영혼 정화의 방편이 되었다가 사라질 뿐이었다. 나는 자원봉사자들의 친절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 누구도 진실한 친구로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점차 깨달았다.


p51 기업이나 학교에서 연수 프로그램의 하나로 단체 방문을 하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기업 이미지 제고에도 도움이 되고, 직원들은 의미 있는 경험을 할 수 있으며, 때로는 꼭 필요한 곳에 도움의 손길이 되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봉사활동은 대개 누군가의 절실한 부분에 대한 적절하고 의미 있는 도움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때때로 봉사자들의 마음에 훈훈함을 담아주기 위해 우리 같은 ‘봉사 대상자’들에게 의무를 부과하고는 한다.


무대 위, 내가 세상에 보이는 순간

p56 다수의 관객 속에 앉아 있는 나는 잘 보이지 않고, 의욕과 열망과 재능을 드러낼 수 없다. 가만히 앉아 있을 때는 결코 빛나는 존재일 수 없다. 침묵하는 즉시 열등한 존재로 추락한다. 그러나 무대는 내게 완전히 다른 기회를 준다. 무대 위의 나는 거의 유일하게, 이질감이 아닌 다른 이유로 타이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다.


내 몸과 내가 하나가 되기까지

p64 아무것도 갖지 못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이십대 이후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된 듯하다. 그러나 십대의 우리는 좁은 공간과 억압된 자유 안에서도 상대를 사랑할 수 있었다. 나는 십대들의 사랑을 긍정한다. 아마도 이때가 인간이 거의 유일하게 오로지 상대의 존재 하나만 빠져들 수 있는 시기가 아닐까. 사춘기의 섬세하고 떨리는 감수성은 비현실적인 로맨스를 가능하게 한다.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각자의 자원을 교환하는 이십대 이후의 연애 시장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장애인이 기회를 얻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p65 재활 학교를 통해 나는 공부를 시작했고, 우정을 배웠으며, 무대 위에 섰고, 사랑을 경험했다. 그동안 주변의 누군가는 죽었고, 누군가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고, 또 누군가와는 첫 번째 키스를 했다. 어리둥절하게도 그 모든 일이 단 3년 동안 일어났다. 병원 아니면 작은 방 안에서의 삶이 전부였던 나의 삶이 어느 순간 고속버스를 타고 유럽 여행이라도 하듯 정신없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나는 두렵고 떨렸던, 그리고 부정하고 싶었던 이 공간에 나 자신을 완전히 풀어놓았다. 가족과 함께 투병 생활을 하던 ‘골형성부전증 환자’임을 잊고 휠체어에 앉은 내 몸과 하나가 되었다. 더 이상 치료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던 내 병은 점차 내 몸의 일부가 되었다. 나는 골형성부전증을 안고 사랑을 하고 공부를 하고 연극을 했다.


2장 온몸을 밀어 세상 속으로


바깥세상의 아찔한 높이

p74~75 내가 ‘탈출’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재활원 생활이 끔찍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곳은 안락하고 즐거운 공간이었다. 그러나 그 안락함과 즐거움에 익숙해진다면, 우리는 평생 세상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분리해서 교육하는 것은 장애 아동을 편안하고 전문화된 체계 속에서 성장할 수 있게 하고 때로는 그들에게 자존감을 심어주기도 하지만, 문제는 세상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살아가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p82 자립 생활 운동은 장애인들이 시설 등에서 사회복지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며 세상과 분리된 채 사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지역 사회에서 ‘자립하여’ 자기 삶에 대한 선택권을 온전히 행사하며 비장애인들과 통합되어 살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장애인 스스로가 나설 것을 촉구한다. 이 운동은 현재 장애인계의 가장 큰 화두이지만, 1999년 당시에는 이제 막 그 담론이 형성되고 있었다.


'특수'의 세계와 '일반'의 세계

p85 “이건 고등학교를 가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야. 이건 네가 앞으로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야. 이 껍질을 평생 안고 가느냐 깨고 나가느냐.”


p87 그는 그때까지 내가 알던 장애인들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장애인이었다. 자신의 장애를 전혀 숨기지 않았고, 부정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장애에 뒤따르는 어려움을 넘어서기 위해 어떤 공동의 노력을 기울이고, 반짝이는 기지를 발휘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는 ‘새로운’ 장애인이었다. 그 새로운 장애인이 새로운 세계로 나가라며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p91 내가 ‘새로운 세계’로 발을 딛게 된 이 순간은 그 자체로 드라마틱해 보일 수 있지만, 나는 그 의미를 왜곡시킬 생각은 없다. 만약 어떤 중학생이 자기가 가고 싶은 고등학교에 가는 데 이처럼 많은 사람의 도움과 남들보다 우수한 성적이 필요하다면, 그 자체가 교육을 기본권으로 규정한 대한민국에서 우스운 일이지 않은가. 어떤 중학생도 ‘후원회’의 도움을 받고, 교장선생님과 ‘협상’ 아닌 ‘협상’을 하며, 남들보다 우수한 성적까지 입학하지 못할까봐 걱정하지는 않는다. 15등이 아니라 150등이라도 점수가 된다면 아무런 문제없이 입학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정상’이다.


슈퍼 장애인 되기

p95 돌아보면 우리는 새로운 세계로 나가기 위해 서로를 부정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사회의 외곽에 위치한 사람들은 그곳에 함께 거주하며 절대적인 편안함을 느끼고, 사랑과 우정을 나누었던 사이라도 어쩔 수 없이 서로를 부정해야 하는 때를 맞는다. 아직 어렸던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초월할 당당함을 갖지 못했다.


p97 나는 모욕에 익숙해져야 했다. 장애인은 모욕을 견딜 수 있는 강력한 정신력을 갖추어야 한다. 사람들은 “그걸 모욕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지”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 ㄹ대는 ‘네 장애를 생각해볼 때 그건 모욕이 아니다’라는 의미인지, 그건 누구에게도 모욕적이지 않다는 뜻인지 곰곰이 따져봐야 한다. 만약 전자라면 장애인이 모욕을 감수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를 대야 할 것이다.

p98 모욕을 ‘쿨하게’ 견디는 힘 이외에 슈퍼 장애인의 또 다른 조건은 과감한 도전과 주눅들지 않는 용기이다.


가장 달랐지만 가장 가까웠던 친구 그와 나의 ‘사이’

p103 사람에게 정해진 궁합이란 것은 없다. 서로 얼마나 이해하고, 얼마나 진실하게 곁에 있어줄 수 있는지, 그런 노력 여하에 따라 궁합이라는 것이 맞을 수도 있을 뿐이다.


p104 같이 걸을 때 가끔 원영이 형과 어깨동무를 한 채 걷고 싶다. 허나 그런 적이 없고 그럴 수도 없을 것이다. 대신 휠체어 손잡이로 그 느낌이 전해져오기도 하여, 형의 뒤에서 뒷머리를 바라보며 같은 눈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그 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불리함’이란 단어가 ‘특별함’으로 바뀌어 있다.


p104~105 천명륜은 항상 내 휠체어를 밀고 다니면서도 언제나 내가 그를 돕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 거의 유일한 친구였다. 녀석과 나는 큰소리로 말다툼을 한 뒤에도 묵묵히 함께 움직였다. 그때 우리는 그가 나를 일방적으로 돕고, 나는 도움을 받기만 하는 관계가 아니었다. 그랬다면 싸우고 나서 곧장 그가 내 휠체어를 밀 수는 없었을 것이고, 나 역시 거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이동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관계를 맺었던 것 같다. 그 관계란 공통의 관심사를 나누거나 필요한 도움을 주고받는 친구를 넘어서, 서로 다른 세계에 발을 딛고 서 있으면서도 항상 당연하게 연결되어 있는 어떤 것들의 ‘사이’였다. 서로 완전히 다르지 않기 때문에 단순히 상대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며, 서로 동일하지도 않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공유하고 공감하기만 하는 것도 아니었다.


p106 무엇보다도 나는 장애를 이해한다는 것이 반드시 정치적으로 올바른 태도와 지식을 몸에 익히거나 종교적 신념에서 비롯한 헌신과 배려에 기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 어떤 사람들은 별다른 교육을 받지 않아도, 세상에 대해 특별히 이타적이거나 헌신적으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자신과 다른 존재들이 함께 만들어갈 새로운 관계, 새로운 삶의 방식, 새로운 가치를 찾아내는 데 능숙하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일수록 강력한 신념을 갖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3장 새로운 몸의 기억 만들기


추락하는 것에는 바퀴가 있다

p116~117 내가 장애인이라는 사실과 “나는 장애인이다”라고 외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나는 장애인 중 50퍼센트가 초등학교만 졸업하는 대한민국에서 서울대학교에 다니는 대학생이었다. 나의 자부심과 나의 꿈 앞에서 또다시 장애인이라는 정체성을 내세우고 싶지 않았다. 추락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장애와 아무런 관련 없이 살 수 없을까. 그냥 휠체어를 타고 다니기는 하지만 주위 사람들이 내가 장애인이라고는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의 능력, 직업, 학식, 유머, 경쾌함 같은 것을 갖출 수는 없을까.-


우리는 늘 이렇게 살아왔다

p122 “정말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 여러분이 조금만 참아주기 바란다. 우리는 늘 이렇게 살아왔다.”

    - 1960년대 미국 휠체어 리프트 고장 이유로 승차거부를 당한 여성이 버스 승객들에게


p122~123 ‘이동권’이라는 말은 ‘이동’이라는 일상적인 행위조차 사회적으로 보장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면서 중요한 인권 담론의 주제로 부상했다. 또한 장애인 이동권 운동은 바로 장애인 집단 가운데서도 가장 소외된 곳에 있던, 중증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주체가 되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p124 물러서지 맙시다. 지금 여기서 물러서면 또 집구석에서 수십 년씩 처박혀 살아야 합니다. -장애인 운동 리더 지체장애인 박경석, 장애인 이동권 운동 현장에서


p124~125 1960년대 미국에서 흑인들은 흑백 분리 정책에 반대하는 의미로 레스토랑이나 버스의 백인 전용석에 앉는 시위를 했다. 그들은 그저 그 자리에 앉아서 하루 종일 버텼다. 단지 그 이유만으로 경찰은 그들을 연행했다. 흑인들은 그 자리에 묵묵히 앉아 최대한 오래 버텨내고, 연행되고, 처벌받고를 계속했다.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시민 불복종’ 운동으로, 국가의 불합리한 법이나 제도에 저항하는 것이다. 시민 불복종은 사회를 상대로 협상할 어떤 권력도 없는 집단이 선택하는 최후의 방식이다. 이들은 폭력을 사용하지 않으며, (현행법에 의한) 불법 행위에 대한 처벌도 감수한다. 그러나 계속해서 ‘불법’을 저지른다. 장애인들은 바로 이런 일을 한 것이다.


장애를 극복한 장애인?

p125 지금까지도 우리사회의 많은 장애인들은 장애가 ‘고쳐야 할 병’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전통적으로 이러한 생각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이것을 학문적으로는 ‘장애에 대한 의료적 모델’이라고 부른다. 예컨대 각 정부가 운영하는 각종 재활 프로그램은 장애인을 고용하기위해 그의 몸을 최대한 ‘고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만약 내가 휠체어를 타는데 내가 가야 할 학교에 계단이 있다면, 나는 내 다리를 목발을 짚고서라도 걸을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한다. 만약 손에 장애가 있어 내 필기 속도가 매우 느리다면, 손의 기능을 최대한 향상시켜 시험 시간 내에 답안을 작성할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재활이다. 이에 실패한다면 나는 학교에 가지 못하고 제대로 시험을 치르지 못할 것이다. 반면 누군가 절대 불가능할 것 같은 몸으로 재활에 성공한다면 우리는 그를 “장애를 극복한 인물”이라고 칭찬한다.


p126 거리로 뛰쳐나온 장애인들은 이러한 관점을 전면에서 부정했다. 이들은 도무지 ‘재활이 불가능한’ 중증 장애인들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외쳤다. “우리의 몸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사회를 바꾸는 것은 가능하다.”

    이들은 휠체어를 탄 자신의 모습이 개인의 비극과 책임이라는 시각을 부정했다. 오히려 자기 몸의 특징, 예컨대 휠체어에 앉아 있어야 하거나 수화로 대화를 하나의 정체성으로 인식했다. 그것은 피부색이 검다거나 성 정체성이 여성인 것과 같은 맥락이다. 다만 이러한 정체성이 ‘장애’가 되는 이유는 사회 구조가 그 정체성을 제대로 수용할 수 없도록 짜여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p127 혼혈 아동이 장애인으로 분류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식민지와 전쟁의 경험 속에서 부풀려진 ‘단일 민족’ 신화와 관련이 있다. 실제로 혼혈아는 살아가는 데 물리적으로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데도 문화적, 역사적 이유에서 ‘장애아’로 분류된 것이다.


p128 장애인인 영국의 사회학자 마이클 올리버는 사회가 자본주의 체제로 접어들면서 공장 노동이 일반화되는 가운데 신체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공동체로부터 소외되었는지를 밝히기도 했다. 이와 같은 예들은 개인이 생물학적인 ‘손상’을 입었다고 해서 필연적으로 사회로부터 배제되는 ‘장애’를 갖게 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즉 장애는 사회가 특정한 신체적, 정신적 특징을 수용할 수 있는 문화적, 물리적 여건을 갖추고 있느냐에 따라 규정된다. 이런 연구들은 ‘장애의 사회적 모델’의 강력한 근거다.


p131 우리는 과연 장애를 ‘극복’해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극복할 수 있기나 한 것인가. 장애는 삶에서 명백히 불편하고 어려운 과제다. 그러나 그것은 온전히 나와 나의 부모가 져야 할 전생의 ‘업’과 같은 것인가. 이러한 질문과 독서를 거듭하면서 우리는 장애의 사회적 모델의 원칙들을 나누었고 사회 곳곳에서 장애인들의 현실을 온몸으로 알리고 있는 중증장애인들을 만났다.

 

나는 치료되지 못했지만 치유되었다

p139 골형성부전증 또는 장애 그 자체는 이미 내 몸이며 나 자신이다. 나는 이것을 ‘가지고’ 사는 게 아니라 이것 자체로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오랜 시간의 투쟁 끝에 위험하고 심각한 상태를 벗어났고, 내 삶의 한 부분이 되어 내 몸의 독특한 운영 방식을 구성했으며, 그 자체로 나 자신이 되었다. 이것은 비정상적인 위험 상태라기보다는 그 자체로 ‘나’라는 인간을 구성하는 한 부분이다. 우리는 더 이상 정신과 신체를 이분법적으로 가르는 데카르트의 사유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 우리는 몸 그 자체이고, 몸의 경험과 기억에 의해 기질, 재능, 성격, 감정의 일부가 결정된다. 나는 내 팔꿈치에 새겨진 검은색 굳은살로 내 과거를 기억한다. 휘어진 내 다리가 곧 내 삶이다. 골형성부전증이 아닌 몸은, 더 이상 김원영이 아니다.


4장 두 세계 사이에서


칸트를 읽는, 구걸하는 장애인

p152 이런 분열은 우리 사회가 철저하게 ‘정상’의 세계와 ‘비정상’의 세계로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학벌과 지위는 철저히 한쪽에 속해 있고 장애인과 같은, 즉 불균형하고 왜곡되어 있으며 속도가 느린 몸은 철저히 비정상의 세계에 속해 있다. 그리고 각각의 세계는 각자의 네트워크로만 구성된다. 나는 한쪽으로는 <순수이성비판>이나 법전을 들고 서 있는 대학원 동료들과 판사들, 다른 쪽으로는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하고 외출조차 하지 못하는 장애인 친구들을 바라본다.


비정상 세계의 지옥같은 이야기

p159 어떤 제도에 의한 혜택이 운에 의해 결정된다면, 우리는 그것의 효용과 도덕적 정당성을 의심해봐야 한다.


p164 수년 전부터 장애인들은 필연적으로 장애인의 삶을 구속할 수밖에 없는 시설 위주의 장애인 정책을 지속적으로 비판하고, ‘자립생활운동’을 추구해왔다. 자립생활운동은 수용 시설의 인권 침해와 전문가들에 의존한 수동적인 삶을 비판하며 장애인들이 지역 사회에서 살 수 있는 기반을 만들려는 노력이다. 하지만 인권 침해 사례들이 보도되어도, 그 시설에 대한 행정 제제만 이루어질 뿐 시설 정책은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p165 여전히 시설 위주의 정책에 커다란 변화가 없는 이유는 오랜 기간 지속된 정책이 갖는 강력한 관성과 이를 둘러싼 많은 이해관계 때문일 것이다. 또한 시설이 없어진 후에 생길 수 있는 여러 가지 현상을 두려워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p165 과연 ‘정상적’인 사람들이 단지 ‘비정상적인’ 인간들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분리된 두 세계가 영원히 유지되는 것일까? 나는 꼭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장애인이나 정신질환자에 대해서 매우 관용적이고, 또 함께 살기를 바라거나 선량한 관심을 보이기도 한다. 오히려 우리는 어떤 면에서 ‘비정상인들’을 ‘구경’하고 싶어 한다.


전시되는 사람들, 구경하는 사람들

p173 만약 세상에 장애인 수용시설 같은 것이 없었다면 열등감에 시달리는 우리 이십대들은 어디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었을까. 하지만 이러한 충고는 커다란 결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열등감은 상대와의 비교에서 오는 것이다. 그런데 결국 자신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존재들에 의존해서, 그 열등감을 상쇄해보려 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태도는 자신을 그 자체로 충만하게 만들지 못하고, 타인의 존재에 의지해 열등감을 극복하려 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타인에 의해 열등감을 경험하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타인의 존재를 통해 위안을 얻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그 위안을 얻는 가장 적절한 방법은, 바로 비정상적인 인간을 ‘구경’하는 것이다.


p174 히브리대학의 철학 교수 아비샤이 마갈릿은 그의 책 <품위있는 사회>에서 모욕을 이렇게 정의한다.

      모욕은 으레 모욕당한 자들의 인간성을 전제하고 있다. […] 상대의 인간성을 부정하는 모욕 행위를 하려면 그를 의식이 있는 존재, 따라서 내적으로 인간적 가치를 소유한 존재로 간주해야 한다.

    다시 말해, 모욕이란 상대의 인간성을 짓밟는 행위이기 때문에 일단 상대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 인간적 존재의 자존감에 상처를 주고, 자신의 우월성을 입증하려는 태도가 드러날 때 모욕이 발생한다.


p176~177 정상은 비정상 없이 성립될 수 없다. 장애인 없이는 ‘건강한 몸’이 자신을 확인받을 길이 없다. 그래서 오늘도 많은 장애인이 이곳저곳에서 전시되고 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눈물을 훔친다. 따가운 시선과 동정심 가득한 눈물은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둘은 사실상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이러한 가운데 두 세계는 점점 더 멀어진다. 한쪽에서 법전을 들고 서 있는 내 친구와 다른 쪽에서 돈을 구걸하는 장애인은 서로에게 아무런 적대감을 갖고 있지 않지만 이렇게 차츰 하나의 세계를 살아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함께 비를 맞는 연대

p177 나는 장애인에게 선량한 관심을 품고 그들을 돕고자 하는 태도가 누군가를 대놓고 모욕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사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상당히 조심스러운 일이다. 분명 우리 주변에는 이런 선량한 관심 덕분에 생존을 이어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당장 장애인 시설에 누군가가 ‘구경’을 가서 위문품이라도 전달하지 않는다면,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굶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현실이다.


p178 우리는 물론 함께 살아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도움을 주고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 모두의 삶에 요구되는 보편적인 미덕이지, 장애인들이 착하고 순수하게 살면서 구걸해야 할 것은 아니다. 만약 장애인에게 순수와 구걸의 의무를 지워 이 사회의 공동체 문화를 미화시키려 한다면, 봉사활동 점수나 봉사활동을 통해 얻는 사회적 평판은 바로 ‘봉사의 대상들’에게 돌아가야 한다. 대상이 도는 것이 봉사를 하는 것보다 백배는 더 어렵고 헌신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p180 국가의 복지 체계가 아무리 발달해도 이러한 사적 도움이 없이는 공동체가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비판하는 봉사는 자신은 기사가 운전하는 편안한 자동차 안에 있으면서 비를 맞고 걸어가는 사람에게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 우산을 씌워주고는 그 장면을 사진으로 남겨 자동차에 걸고 다니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확인받고 싶은 욕망, 그리고 자신은 타자와 ‘서민’에게 관대하다는 것을 상징하는 몇 장의 사진과 일회성 이벤트 등으로 점철된 봉사 말이다.


p182 나는 두 가지로 분리된 자아 속에서 갈등하고 있다. 한쪽의 자아는 다른 쪽의 자아를 모욕하며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다른 쪽의 자아는 그 모욕을 견디지 못해 분노한다. 한쪽의 자아는 수용 시설이라는 꽉 막힌 세계에서 그 안팎의 세계 사이에 놓인 끈적거리는 선 때문에 때때로 울부짖는다. 그러나 다른 한쪽의 자아는 수용 시설의 삶에 모여드는 사회의 시선 덕분에 스스로를 특별한 인간인 양 생각한다. 꽉 막힌 세계와 그 위에 터를 잡고 펼쳐진 넓은 세계. 두 세계로 분열된 내 자아는 그렇게 서로를 부정하면서 공존하고 투쟁한다.

    내 자의식의 분열은 우리 세계가 두 극단으로 분리되면 될수록 더 커진다. 장애인들이 수용 시설에 갇혀 누군가의 구경거리가 되거나 모욕의 대상이 되거나 자유를 박탈당하고 있다면 나는 그 부당함에 분노한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그들과 다른 나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늘 애써왔다. 그들을 부정하고 거부할수록 한편으로는 내가 그들과 다르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 자신이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삶에 속해 있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우리 사회가 ‘비정상의 거주민’들을 하나의 세계에 몰아넣고 그들이 일상 세계를 침범하는 것을 끔찍이 싫어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삶에 강한 연민과 (부당한 차별에 대한) 분노를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다.


5장 나는 '야한'장애인이고 싶다


직립보행의 섹시함에 대하여

p196 나는 (나 자신도 제대로 못 하면서) 그에게 장애를 사회적인 차별로 규정하며 우리의 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러한 관점이 비록 많은 장애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권리를 주장ㅎ아고, 거리로 나와 실질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게 했다 할지라도 때때로 우리 몸의 고통과 욕망을 은폐하는 것은 아닌가? 나는 이러한 의문에 답해야 했다.


p197 우리의 노력이 건물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고 교과서를 점자책으로 만드는 데 기여할 수는 있지만, 내 몸의 근원적인 욕망과 고통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도 도처에 누워 있는 ‘야마’의 삶을 세상으로 끌어낼 수는 없는 것이다.

 

내 다리를 봐줘

p199 무성성이란 장애인들을 성적 욕망을 가진 주체로 인식하지 않는 것, 또는 성 정체성을 가진 존재로 인식하지 않는 것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용어다. 예컨대 장애인 화장실은 대개 남녀공용으로 설치된다. 여기에는 효율성의 논리도 개입되었겠지만, 장애인은 여와 남이라는 성 정체성을 특별히 구분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인식이 작용한 결과이기도 하다. 장애는 여성, 남성과 구별되는 제3의 성이다.


'야한' 장애인, '야한' 가난뱅이, '야한' 추남/추녀가 되자

p210~211 자유로운 행위란 오직 그 자신만이 원인이 되는 것. 어떤 외부적인 또는 욕망과 같은 내부적인 요인조차 원인으로 하지 않는 순수한 의지에서 촉발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칸트가 보기에 누군가가 내 팔을 강제로 끌어당기는 것이나 내가 눈앞의 음식을 보고 배가 고파 팔을 뻗는 것은 둘 다 자연적 원인에 의한 결과에 불과하다. 만약 눈앞에 음식이 있는데 내가 죽도록 배가 고프면서도 그것을 집어 옆에서 굶고 있는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면, 그것은 내가 자연적 인과성을 거슬러 굶주린 사람 자체만을 목적으로 해서 한 행위, 즉 자유로운 행위이다. 칸트의 자유는 결국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에 따르는 것이며, 이것이 곧 도덕이다.


p213 정치철학자 로널드 드워킨은 하늘이 준 불운과 사회가 만든 불운을 구분한다. 하늘이 준 불운에는 지진이나 태풍, 현대의학 기술로는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질병 등이 해당된다. 반면 사회가 만든 불운에는 사회경제적 구조나 정책으로 인한 불평등, 적절한 대비책을 마련하지 못해 피해가 더 심각해진 재해, 완치가 가능한 질병인데도 의료비가 없어 치료하지 못하는 경우 등이 포함된다. 드워킨은 ‘사회적 불운’에 대해서는 우리가 정의의 원칙에 따라 그 위험을 최대한 나누어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하늘이 준 불운’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는 걸 인정한다. 그런데 ‘하늘이 준 불운’과 ‘사회가 만든 불운’의 구분 자체가 모호한 영역이 있다. 그것이 바로 ‘장애인의 몸’이다.


p219 나는 쿨한 게 아니라 ‘핫한’ 장애인, ‘야한’ 장애인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 몸이 가진 욕망과 내 몸에 부여된 운명, 그 모든 것을 쿨하게 받아칠 줄 아는 유쾌한 인간 또는 고상한 척, 성숙한 척하는 인간이 아니라 좀 구차하고 미성숙하더라도 뛰고 싶다면 뛰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인간, 죽음을 앞두고 있다면 남은 생을 뜨겁게 살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인간, 누군가에게 무시와 모욕을 당하고 무성적인 존재로 인식당할 때 저 유명한 드라마 주인공 강마에의 대사처럼 “진짜 시련이 뭔지 알지도 못하면서 겪은 척, 뛰어넘은 척, 쿨한 척”하는 대신 “내 몸을 봐라. 내 욕망을 봐라. 나의 짓밟히는 자존심을 봐라”라고 말할 수 있는 인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p22 그곳은 우리 둘 이외에는 누구의 시선도 없는, 오로지 우리만의 공간이었다. 장애인과의 에로스적 관계에 대한 사회적 통념이 침투해 들어올 틈이 없었다. 우리는 새로운 관계로 말려 들어갔다. 장애인의 몸에 씌워져 있던 동정, 시혜, 고통, 비극의 시선들이 괄호 안으로 들어갔다. 에로스는 평등한 인간의 관계에서만 출현한다. 누군가가 상대를 지배한다면, 또는 누군가가 상대를 도와야 한다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내가 다리를 내보인 순간, 그동안 내가 어설프게 시도했던 지적 동반자인 척, 쿨한 척, 숭고한 관계인 척했던 행위는 끝이 났다. 나는 더 이상 무성적 존재가 아니었다. 내 몸은 자유롭게 부유했다. 내 다리는 타인의 시선 앞에서 섹시함을 뽐냈다. 섬세한 감각들이 날을 세운 채, 그러나 결코 날카롭지 않게 내 자의식을 쓰다듬었다. 


6장 통속의 뇌, 주인공이 되다


휠체어 위의 맥베스

p226~227 나는 내가 들어갈 집단에 애초부터 적합한 인물이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늘 부족했고, 적당하지 않았고, 그 집단과 조응할 수 없는 정체성이었다. 그래서 시작은 언제나 좌절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 세계와 새로운 방식으로 화해하고 상호 적응하는 방법을 찾아내곤 했다. 나는 기존의 질서에서 최고가 될 수는 없었지만 그 질서가 내 몸, 내 정체성과 조응하는 과정을 통해 나 자신과 외부 환경을 변화시켰다. 장애를 극복해본 적은 없지만, 나를 둘러싼 세계가 장애에 적응해나가는 변화를 경험했다. 그렇게 세상은 변화한다. 그래서 나는 대학원 생활과 이곳에서 한 공부가 내 삶을 또 얼마만큼 확장할지를 생각하면 설레기까지 한다. 세상은 또 얼마나,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객석을 무대로 바꾸는 용기 있는 사람들

p240 하지만 과감하게 예상 밖의 인물에게 주연을 맡기는 사람들은 언제나 존재하며, 그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창조한다. 휠체어 위의 맥베스, 두 명의 가난한 중학생과 대학생 하나를 동시에 세상의 주체로 만드는 장학재단, 그리고 눈의 깜박임을 기다려 긴 문장을 완성하는 사람들에게는 인간 승리가 아니라 상상력과 인내심, 과단성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무엇보다 그런 연대의 손길은 막연한 동정이나 자신이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받고 싶은 욕망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들은 새로운 삶과 공동체의 가능성, 또는 특별한 무대를 통념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연출하고자 하는 자유정신의 예술가들이다.


p242 그들은 내게 무대에 등장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는 걸 일깨웠다. 탁월한 연출자와 좋은 동료를 만나는 것 이외에 무대 자체를 개조해 객석을 아예 무대로 만들 수도 있다. 스포트라이트의 방향을 무대에서 객석으로 돌려버릴 수도 있다. 그렇게 객석은 무대가 된다. 이제 무대는 단 하나가 아니다. 우리가 빛날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이 여기저기서 출몰한다.


p243 내 삶은 그 자체가 하나의 ‘자유’다. 우리 사회를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는 기존 질서를 마음껏 거스르는 존재이자, 수많은 이들이 열망한 자유가 모여 만들어낸 구체적인 증거다. 그들은 무대와 객석을 뒤바꾸고, 절대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사람에게 과감히 역할을 부여했다. 그리고 내가 그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낼 수 있도록 상상력을 보태고, 적극적인 협력의 자세를 보여주었다. 그러한 것들이 내 삶을 구성했다.


무력한 이십대 그리고 88만 원짜리 장애인

p252~253 산업화 시대에 모든 것을 바쳐 경제성장을 이룬 부모들의 노후는 돌보지 않으면서 그 자녀들에게 “젊은이여, 모험을 감행하라”라고 강요하는 국가는 부당하다. 우리의 가난한 부모에게는 우리밖에 없다. 우리는 부모를 사랑하기 때문에 모험을 감행할 수 없는 것이다. 과거 세대는 “우리의 부모는 더 가난했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부모에게는 서로 의지하며 가난을 견딜 수 있었던 마을 공동체조차 없다. 우리의 모험은 그들을 철저한 외로움 속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다. 이런 말을 모험을 두려워하는 자의 핑계라고 한다면 더 이상 나는 할 말이 없다.


p253 나는 장애인권연대사업팀 활동을 하며 우리의 연대가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지 지켜보았고, 지적이고 열정적인 친구들과 이런저런 문제들에 대해 토론하면서 우리 중 누군가가 이 시스템에서 자유로운 움직임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했다. 우리는 최인훈의 <회색인>을 읽고 스스로를 ‘갇힌 세대’로 정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어떤 측면에서 ‘지적 허영’을 부리며 쾌락을 느끼는 것에 불과할 뿐 무엇도 제대로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내 몸이 증언하는 자유와 연대의 힘

p258~259 잘난 척은 다 하면서도 결국은 내 안으로 도피하기만 했던 나에게도 누군가는 “사랑해, 사랑하는 게 더 멋있어”라고 말해주었고, “무대에 올라가, 그게 더 섹시해”라고 말했으며, “글을 써, 네 이야기를 글로 쓰면 자유로워질 거야”라고 말하며 손을 내밀어주었다. H는 “다리를 보이지 마, 그게 더 추해”라는 눈빛을 보내지 않고 오히려 (따스한 동정의 눈빛조차 아닌) 에로스의 감수성으로 나를 바라보았다.〔…〕나는 장애인 치고는 멋있기 위해 노래를 부른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멋지고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뜨겁기 위해 무대 위에 섰을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이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했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역시 ‘장애인 치고는’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 혹은 ‘장애인 치고는’ 멋진 말을 늘어놓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는 장애인이기 때문에 멋질 수 있는, 장애인이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 있는, 장애인이기 때문에 매력적일 수 있는 어떤 메시지를 위해 이 글을 쓴다.


p261 내 삶은 이 자유를 온몸으로 실천한 사람들 가운데서 완전히 변화했으며 내 자유가, 내 몸이, 내 사랑이 그것을 증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 글을 자유와 연대의 힘을 증언하기 위해 썼다. 실천의 주체가 되기에 나는 아직 경험이 일천하고 능력도 용기도 부족하다.

    그러나 앞으로 내게 다시 무엇인가를 쓸 기회가 온다면 나는 증언을 넘어 변론을 하고자 한다. 그 변론이 옹호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나의 몸, 당신의 몸, 내 친구들의 몸 그리고 우리 모두의 몸이 가진 자유가 될 것이다. 우리의 유약한 몸, 장애를 가진 몸, 추한 몸, 88만 원짜리 몸. 그 몸들이 처한 완전히 다른 여러 세계가 나의 존재와 나의 사랑을 통해서 자유의 가능성을 타고 새로운 삶을 생성하는 것. 그것이 내 궁극적인 꿈이며 삶이 될 것이다.


에필로그_우리에겐 분노가 필요하다


p263 타인에 대한 비인간적인 행위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반응은 분노입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증오를 느끼지는 않습니다.

     - 에드워드 사이드, 이스라엘 일간지와의 인터뷰 중에서


p264 사실 라마누잔이나 헬렌 켈러, 오토다케가 꼭 천재적이고 영웅적인 인물이라 놀라운 성취를 이룬 것도 아니다. 그들에게는 대체로 열정적이고 개방적인 부모, 스승, 친구들이 있다. 우리 모두에게 이런 행운이 언제나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험을 들 듯이 사회적 연대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p266 나는 우리 세대 또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분노’라고 생각한다. 끝없는 긍정과 낙천적인 생각, 타인에 대한 사랑은 언제나 중요하고 소중한 가치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분노해야 한다. 사람들은 보통 분노를 증오와 착각한다. 증오는 타자에 대한 감정적인 혐오이고 복수심이다. 증오는 폭력만을 낳을 뿐 증오하는 주체의 상태를 조금도 변화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분노는 이와 다르다. 분노는 부정의에 대한 합당한 정의이고, 그 저항 속에서 우리 자신의 욕망과 열정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분노하는 삶은 사랑하는 삶만큼이나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확장시킨다. 그래서 나는 분노란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욕망과 잠재력을 추동시키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시작된 욕망은 우리의 상상력과 공동의 노력을 통해 현실이 된다. 우리는 분노하되, 증오하지 않을 수 있다.



3. ‘내가 저자라면’


■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의 목차 및 전체적 뼈대


 

 프롤로그 : 작고 약한 존재들의 야하고 뜨거운 고백을 열망하며

 

1장 유리 같은 몸, 가시 같은 마음

보이지 않는 존재

나는 골형성부전증이다

달빛만 들어오던 사춘기

배움이 열어준 신세계, 그러나 비좁은 세계

풍경처럼 사는 사람들

무대 위, 내가 세상에 보이는 순간

내 몸과 내가 하나가 되기까지

 

2장 온몸을 밀어 세상 속으로

탈출을 꿈꾸다

바깥세상의 아찔한 높이

'특수'의 세계와 '일반'의 세계

슈퍼 장애인 되기

가장 달랐지만 가장 가까웠던 친구

그와 나의 '사이'

 

3장 새로운 몸의 기억 만들기

추락하는 것에는 바퀴가 있다

우리는 늘 이렇게 살아왔다

장애를 극복한 장애인?

나는 치료되지 못했지만 치유되었다

 

 

 

 

 

4장 두 세계 사이에서

칸트를 읽는, 구걸하는 장애인

비정상 세계의 지옥같은 이야기

전시되는 사람들, 구경하는 사람들

함께 비를 맞는 연대

 

5장 나는 '야한'장애인이고 싶다

직립보행의 섹시함에 대하여

내 다리르 봐줘

'야한' 장애인, '야한' 가난뱅이

'야한' 추남/추녀가 되자

 

6장 통속의 뇌, 주인공이 되다

휠체어 위의 맥베스

객석을 무대로 바꾸는

용기 있는 사람들

자유의 무게

무력한 이십대

그리고 88만 원짜리 장애인

내 몸이 증언하는 자유와 연대의 힘

 

에필로그 : 우리에겐 분노가 필요하다

 

 

 장애인인 저자의 삶의 이야기다. 저자는 이 책을 사회과학서로 쓰고 싶었으나 사회과학 에세이로 되었다고 말한다. 이 책은 저자가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떻게 ‘장애’를 인식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사회가 ‘장애’와 ‘장애인’에 대해 어떠한 인식을 가져야 하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의 경험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는 이 책은 단지 개인의 ‘삶’에 초점을 맞추어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일류대에 진학한 외형적인 삶의 성공기가 아니다. 장애인들에게는 나는 이렇게 장애를 극복했다고 말하는, 비장애인에게는 나는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성공했다를 알리는 이야기가 아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그가 깨닫고 느끼고 인식한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이며 ‘사회’가 가져야 할 인식에 대한 물음과 촉구이다.

 분명 그는 개인의 이야기를 말했지만 그것은 저자의 ‘개인적’인 차원의 이야기를 넘어서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저자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보다 자세히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며 장애인이 이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견디어야 하는 그 모든 사회적인 편견과 모욕감의 인식적 측면과 사회 구조적인 차원의 문제를 보여주고 있다.


■ 감동적이었던 장절

  

 p98 모욕을 ‘쿨하게’ 견디는 힘 이외에 슈퍼 장애인의 또 다른 조건은 과감한 도전과 주눅들지 않는 용기이다.


 장애인으로 살아보지 않았다. 그러나 ‘정상’으로 간주되는 ‘이긴 자’ ‘가진 자’의 세상에서 장애인과 마찬가지로 소외되기는 피차일반. 단지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타인에게 온갖 모욕이 일상화되는 사회에서 특히, 그 일상적 모욕을 받는데 선두주자 격으로 장애인은 치부된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시되고 일상화되기에 그 모욕을 견디기 위해서는 ‘쿨’함을 넘어서는 다른 것들이 필요하다. 저자는 주눅들지 않는 용기라고 말했는데, 저러한 용기를 가지기 위해서는 또 얼마만큼의 노력이 필요할 것인가.

 그렇기에 그가 견딘 모든 모욕을 보여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펼쳐낸 이야기들은 그의 말대로 도전과 주눅들지 않기 위한 활동의 모습이었다. 모든 장애인들이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모든 비장애인 역시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삶이 아니니까. 또한 자본주의 사회, 언제 어떤 사고로 인해 장애를 겪을 지 모를 위험한 사회에서, 우리가 장애인, 비장애인의 구분이 필요치 않은 환경을 만드는 것은 쿨함도 주눅들지 않은 용기를 가져야 되는 인식과 생각의 문제가 아니라 당연한 권리일 것이다.


■ 보완점


 저자의 경험의 이야기가 속속들이 있는 관계로 저자가 주장하는 것에 좀더 설득력이 실린다. 그가 겪은 사회적 모순, 인식, 인간관계들이 잘 버무러져 있다. 문제는 그러다 보니, 저자의 개인사에 더 치중된다는 우려가 있다. 그가 전하는 메시지나, 그가 굳이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내며 하는 이야기들이 ‘개인 자신’에게로만 머무를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저 이런 힘들고 어려운 조건을 이겨낸 ‘한 개인’에 대한 동정과 연민, 그리고 칭송으로 마무리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저자의 역할이 있음이니 저자 자신도 이야기한 것처럼, 뭔가 의도와는 다르게 ‘개인의 이야기’로 좀더 치중한 부분이 있는 듯하다. 그 균형을 어떻게 잡았는지는 모르겠으나 갈수록 저자의 개인 스토리가 많이 드러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마무리도 좀 급하게 서두른 느낌도, 감상적인 느낌도 들었다. 그럼에도, 그렇기에 그가 전하는 메시지가 크기도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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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05 17:48:23 *.214.15.69

아~ 좋은 책입니다.

에움길님. 리뷰 잘 읽었습니다. 감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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