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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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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8일 12시 55분 등록

그래도 다행인거지!

2015. 3. 7


어릴 때 나는 차멀미가 심했다. 이 놈의 멀미 때문에 시골 가는 길은 언제나 지옥 같아서 혼자서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비닐봉지를 챙기는 것은 필수였고 운전수 바로 뒷자리나 차장 근처에 앉아 가는 것은 기본 중에 기본이었다. 심지어는 시내버스조차 몇 코스 탈 수 없어서 학교 다닐 때는 시간 반쯤 되는 거리를 웬만하면 걸어 다녔다. 이게 다 멀미 때문이다. 어머니 원망을 많이 했다. 당신을 닮아서 이런 것이니 말이다. 방학이면 외갓집에 가는 것을 무척 좋아했는데 문제는 하루 종일 몇 번이나 버스를 갈아타고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큰마음을 먹어야 하는 일이었다. 환승을 하는 곳에 이르기 전에 멀미를 견디지 못하고 아무 곳에서나 내려서 속을 가라앉히고 다음 버스를 기다리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꼬까옷을 입은 참한 처녀 가슴에 왈칵 쏟아내기도 했었다. 덕분에 나를 데리고 가던 외삼촌은 조카의 실례를 빌미로 그녀와 데이트쯤은 했을 법도 한데 아쉽게도 기억은 그날 터미널 다방에서 멈춰 끊어져 버렸다.


이렇듯 버스 근처만 가도 멀미를 하는 것과는 달리 기차는 언제나 좋았다. 내게 기차는 늘 좋은 곳이었다. 기차는 내게 삶은 계란과 각기 우동이었으며 관연한 누나의 향기로운 가슴이었다. 아주 가끔 타는 기차였지만 그때마다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그래서였을까! 혼자 여행을 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늘 기차를 탔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기차는 내게 ‘설레임’이었다. 수많은 출장의 압박가운데서도 역으로 향하는 길은 여행을 떠나는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곧 벌어질 오후의 전투에 늦지 않으려면 새벽 첫 기차를 타도 빠듯했지만 그 새벽이 그렇게 싫지 않았다. 자그마치 다섯 시간을 가야하지만 아카시아 샴푸냄새가 나는 긴 생머리 아가씨가 옆자리에 앉아만 준다면 무료하지 않을 것이었다. 물론 이런 행운은 언제나 다음을 기약해야 했지만 말이다.


나는 구본형 선생의 부산 강연 뒤풀이 에피소드를 읽으면서 이루지 못한 로망 하나를 떠올렸다. 선생은 이 날 자수성가한 수강생이 경영하는 화려한 술집에서 술을 마셨다.

“내 옆에 앉은 여자는 키가 크고 날씬했다. 미인이고 말수도 적었다. 시간이 지나고 우린 춤을 추었다. 여자의 등 뒤로 가냘픈 어깻죽지 뼈가 만져졌다. 얇은 옷 사이로, 부드러운 피부 속으로 만져지는 뼈. 뼈도 아주 성적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밤이 한참지나 해운대의 호텔로 돌아왔다. 바다는 검었다. 창문을 조금 열자 바다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파도의 끝이 부서지는 흰 포말도 보였다. 한참 그렇게 서 있었다. 여자를 남겨두고 온 것을 후회했다.”


지난 1월 어느 날, 이른 아침 역은 여느 때와는 달리 제법 사람들이 넘쳤다. 몹시 추운 날이다. 플랫폼에 내려서서 영화 ‘마지막 콘서트’의 주인공을 떠올렸다. 아리도록 시린 바람을 몰고 기차가 미끄러져 들어온다. 붐비는 사람들 사이로 과녁처럼 비어있는 한자리가 유난히 크고 빠르게 드러나 보였다. 그리고 그 옆자리, 아~~~그녀다. 그녀 옆에 앉았다.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는 손가락이 길고 매끈하다. 마디와 마디사이가 도톰하게 살이 올랐고, 그 뽀얀 살 위로 솜털이 가지런히 누웠다. 올이 성긴 헐렁한 스웨터를 걸친 듯 입었는데 뽀얀 목선이 길게 드러나 보였다. 굵게 웨이브진 긴 머리는 사슴 같은 목선을 따라 흘러내렸다. 깊숙이 몸을 묻고 눈을 감았다. 그녀의 숨소리가 내 심장소리만큼이나 크게 들렸다. 잘 익은 여자의 향기만큼 관능적인 것은 없다. 그렇게 가만히 있었다. 가뭇 꿈을 꾼듯한데 그녀가 말을 걸어왔다. “죄송합니다. 좀 내리겠습니다.” 그녀는 대전에서 내렸다.


나는 선생의 호흡과 떨림을 한 방울도 놓치지 않고 느낄 수 있다. ‘마흔의 유혹’이라는 제목으로 녹여 놓은 글에서 나는 내가 가을의 문턱에서 여름을 그리워하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활짝 웃으면서 찍었는데 여전히 무뚜뚝하게 나온 셀카 사진을 보면서 이젠 웃어도 웃어지지 않는 굳어진 근육을 확인하던 날처럼 약간 슬펐다. 그래도 다행인거지! 아직은 불처럼 타고 있으니 말이다.


그녀에게 말이라도 한번 걸어볼걸 그랬다. 당신이 바로 내가 그리던 스텔라였노라. 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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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09 09:34:32 *.255.24.171

ㅍㅎㅎㅎ. 말걸었으면 '이 아저씨 뭐야?' 하는 눈빛으로  바라 보았을 수도.

보내길 잘 했어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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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09 18:51:43 *.104.9.235

진심어린 리플 반갑지 않습니다.

빈말이라도 좀 해 주지...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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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09 13:02:03 *.143.156.74

피울님의 매력은 조금 지내봐야 알지.

그때 말 걸었어도 잘 안되었을거에요.

너무 아쉬워하지 말기를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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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09 18:52:23 *.104.9.235

진심만 가득담긴 답변...정말이지 반갑지 않습니다.

어차피 그림의 떡인데 

말이라도...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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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09 15:55:00 *.196.54.42

와~ 그참, 피울과 구샘의 실우엣이 겹쳐지는 영상이군, 나도 구샘의 그 책에서 이 대목만 유난히 기억에 선명한데...

피울의 살아있는 감성이 부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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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09 18:52:57 *.104.9.235

구샘은 되고 나는 안되는 이유가 뭘까요?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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