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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9일 10시 12분 등록

일차원적 인간- 선진산업사회의 이데올로기 연구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저, 박병진 옮김, 한마음사.

1986년판의 2002년 E-book


1. 저자에 대하여


■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Herbert Marcuse)  ■

출생/사

1898.7.19 독일 베를린 / 1979.7.29

활동분야

철학자. 

20세기 후반 정치적 좌파에 대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사상가

헤겔, 마르크스, 프로이트의 연구가

고도산업사회의 비판적 이론가

 

• 발 자 취 •  

• 저 서 •

1898년 베를린에서 출생, 프라이부르크 대학, 베를린 대학에서 철학과 사회학을 공부

1922년 철학박사 학위

1933년 나치스정권의 대두로 스위스의 제네바로 망명,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등과 약 2년간 함께 연구

1934년 미국으로 이주. 「사회연구소」의 일원으로 일함

1941∼1950년 미국 국무성에 근무

1952년 컬럼비아대학에서 러시아 연구에 종사

1953년 하버드대학 러시아문제연구소에서 소련문제 연구, 브랜다이스 대학 정치학 교수

1954년 매사추세츠주(州) 브랜다이스대학 교수

1965년에는 캘리포니아대학 철학교수

《권위와 가족》(프롬과 공저, 1936)

《사적 유물론(의 기초를 위한 신자료(新資料)》(1932)

《이성(理性)과 혁명》(1941)

《에로스적 문명》(1955)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1958)

《일차원적 인간》(1964)

신좌익운동(新左翼運動)의 정신적 지주(支柱)

……

……


 20세기 후반에 정치적 좌파에 대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사상가,라고 마르쿠제를 말한다. 그의 생애를 들여다보려니 온통 공부와 연구한 이력만이 넘쳐난다. 그의 일생은 학자적인 관심과 연구의 나날인 모양이다. 특히 그는 헤겔, 마르크스, 프로이트의 연구가, 고도산업사회의 비판적 이론가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러시아와 소련 연구에 집중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특정한 시대를 살았다는 건 그 시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역시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었다. 그의 철학이 그의 사상이 그의 생애가 어떠했을지는 어느 정도 짐작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역시도 이주와 망명의 연속된 생활이었음을 보건대....

 1968년 일어난 세계적 학생 운동의 분노 물결에 마르쿠제의 영향력이 강했다고 한다. 그의 저서들의 영향력이 컸음이다. 그런 것을 보면 ‘운동’ 역시도 ‘사상과 철학’이 동반되어야 함을, 행동력에 미치는 ‘인식’의 역할을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시대의 사회에 대한 비판적 철학자로서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일차원적 인간』은 현대의 고도산업사회가 기술적 진보를 몰가치화ㆍ중립화하여 생산성 자체를 지고의 가치로서 자기목적화하는 데 반대한다. 즉 그는 생산성을 인간의 욕구로부터 분리시켜, 그 욕구를 노동의 부차적인 것으로 전도시키는 것을 비판한다.



참고자료


알라진 저자소개

네이버백과, 마르쿠제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제1판 서문_비판의 마비-반대없는 사회


p8 선진 산업사회는 이 위험을 영속시킴으로써 한층 풍요해지고 거대해지며 살기 좋아진다는 사실이다. 방위체제는 한층 많은 사람들의 생활을 더욱 살기 편하게 하고, 인간의 자연지배를 확대한다. 이러한 사정 아래서 우리의 매스미디어는 거의 아무런 곤란도 없이 개별적인 이익을 모든 상식적인 사람들의 이익으로 선전한다. 사회의 정치적 요구는 개인의 욕구와 원망(願望)으로 바뀌고, 그것들을 만족시키는 것이 기업과 공공의 복지를 조장하며, 이렇게 해서 전체가 더할 나위 없이 이성을 구현하는 듯이 보인다.

⇒ 위험 - 인류를 전멸시킬 수도 있는 핵전쟁으로 인핸 파국이 주는 위협


p15~16 선진 산업사회가 달성한 성과의 전체적 성격에 직면하여, 비판적 이론은 이 사회를 초월하기 위한 논리적 근거를 갖지 못하는 상태에 놓인다. 그 공백은 이론적 구조 자체를 공동화한다. 왜냐하면 비판적 사회이론의 범주들은 거절과 전복에 대한 욕구가 유력한 사회적 세력의 행동으로 구체화된 시기를 통하여 발전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 범주는 본질적으로 부정과 반대를 내포하는 개념들로, 19세기 유럽사회의 현실이 지닌 모순을 명시하고 있었다. 「사회」라는 카테고리 자체가 사회적 영역과 정치적 영영의 날카로운 갈등―국가에 적대하는 것으로서의 사회―을 나타냈다. 이와 마찬가지로 「개인」 「계급」 「사적인 것」 「가족」과 같은 카테고리는 기성의 조건에 아직 통합되지 않은 영역과 힘―긴장과 모순의 영역―을 나타냈다. 산업사회의 통합화가 진전하는데 따라서 이들 범주는 비판적인 의미를 잃고 기술적, 기만적 또는 조작적인 용어로 되어 가는 경향이 있다.


제1부 1차원적 사회


제1장 통제의 새로운 형태


p25 개인의 욕구를 더욱 더 충족시킬 수 있는 조직 형태를 갖춘 사회에서는, 사상의 자립성, 자치의 권리 및 정치적 반대의 권리에서, 실제로 그 기본적인 비판 기능을 잃고 있다. 이와 같은 사회는 당연히 그 원리와 제도를 받아들이도록 요구할 수 있으며, 또한 반대운동을 왜소화시켜 현상유지의 ‘테두리 내’에서 선택해야 할 정책을 검토하고 추진한다는 운동으로 바꿀 수도 있다.


p27~28 현대 산업사회는 그 토대로서의 테크놀로지를 조직하고 있는 방법 때문에 전체주의화하는 경향이 있다. 전체주의화에는 테러에 의하지 않고 사회를 경제적・기술적으로 통합하는 것―그것은 기득의 이익에 호소한 욕구 조작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도 있기 때문이다. 현대 산업사회는 이렇게 하여 전체에 대항하는 유력한 반대파의 출현을 사전에 저지하는 것이다. 특정의 통치 형태나 특정의 정당정치만이 전체주의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고, 정당의 다원주의, 신문, 상쇄세력 등과 충분히 양립할 수 있는 특정의 생산・분배체제도 전체주의를 조장한다.


p29 경제적 자유는 경제‘로부터의’―경제적 힘과 관계에 의해 통제되고 있는 상태에서의―자유, 즉 나날의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의 자유, 생활비를 벌어야만 한다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뜻하게 될 것이다. 정치적 자유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힘으로는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없는 정치‘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을 뜻하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정신적 자유는 현재 매스커뮤니케이션과 대중의 교화에 흡수되고 있는 개인의 사상을 되찾는 것, 여론을 그 조작자도 포함하여 폐기하는 것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p34 모든 해방은 노예상태를 자각하는데 기초하고 있고, 이 자각의 발생은, 어느 경우에나 그 대부분이 개인 자시의 것이 되어버린 욕구와 만족의 지배적인 힘이 우세하기 때문에 방해를 당한다. 해방의 프로세스는 어떤 경우에나 선행하는 조건의 시스템을 다른 그것으로 대치하는 것이다. 그 최고의 목표는 허위의 욕구를 진실의 욕구로 바꾸는 것이며, 억압적인 만족을 폐기하는 데 있다.


p35 억압적인 전체(a repressive whole)의 지배 아래서, 자유는 지배의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 개인에게 열려 있는 선택의 여지는 인간적 자유의 정도를 정하는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 개인에 의해 선택될 수 있는가, 그리고 무엇이 실제로 선택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 그 결정적 요인이 된다.


p38 사람들은 자기의 일용품 속에서 자기 자신을 확인한다. 즉 그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동차, 하아파이 세트, 실내에 2층 계단이 달린 주택, 부엌 살림살이 등에서 자기의 혼을 발견한다. 개인을 그가 속한 사회에 결부시키는 메커니즘 자체가 변하고, 사회적 통제는 그 사회가 만들어낸 새로운 욕구 속에 닻을 내린다.


p48 사회는 모든 타입의 적대적인 작용과 행동을 저지하고, 그 결과로 그것들에 관련하는 개념을 환상 또는 무의미한 것으로 만든다.


p48~49 「진보」는 중립적인 용어가 아니다. 그것은 특정의 목적을 향해 진행하는 것이며, 이 목적은 인간의 처지를 개선하는 가능성에 의해 규정된다.


제2장 정치적 세계의 폐쇄

사회변동의 억제

p60~61 풍요한 사회에서 지옥과도 같은 생활을 강요당하는 사람들은, 중세나 근대 초기의 관례를 연상시키는 잔인한 방식으로 그 처지에 억압당하고 있다. 이 사람들보다 다소나마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사회가 일종의 욕구, 즉 예속상태를 구미에 맞도록 또는 자각하지 못하도록 촉구하는 욕구를 충족시킴으로써 해방을 추구하는 욕구를 제거시킨다.


억제의 전망

p90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의 테제에 있어서의 절반의 진리는, 「지체된 생산관계와 생산력의 성격」 사이의 지배적 모순이 폭발하는 일이 없이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고, 또한 두 가지 요인 사이의 ‘일치’는 「점진적인 변화」를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진리의 나머지 절반은 양적 변혁이 질적 변혁으로, 즉 개인에게 부과되고 있는 독립적인 힘으로서의 국가, 당 계획 등이 소멸하는 상태로 전환되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혁이 사회의 물질적 토대(국유화된 생산과정)를 그대로 보존하는 한, 그것은 ‘정치적’ 혁명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것이 인간 존재의 바탕에서의, 즉 필요한 노동의 차원에서의 자기결정을 이끌어낼 수 있다면, 그것은 역사상 가장 과격하고 가장 완전한 혁명이 될 것이다.


p90~91 일의 능률에 관계없이 생활필수품을 분배하는 것, 노동 시간을 최소한으로 감축하는 것, 임무를 교환할 수 있는 전인적인 교육을 폭넓게 일반에 실시하는 것―이런 것들은 자기 결정의 전제조건이 될 수 있으나 자기 결정의 내용은 아니다. 이러한 전제조건을 만들어내는 것은 역시 지배적인 관리의 결과일 수 있겠으나, 그러한 조건을 확립하는 것은 이 관리의 종식을 의미할 것이다. 확실히 자유롭고 성숙한 산업사회라면 역할의 불평등을 내포한 분업에 계속 의존할 것이다. 이와 같은 불평등은 진정한 사회적 욕구와 기술의 필요성, 개인간의 육체적 및 정신적인 차이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그러나 행정 및 관리기능은 어느 특정의 이해관계에 의해 타인의 생활을 지배하는 특권을 지니지는 못할 것이다. 이러한 상태로의 이행은 완전히 국유화되고 계획화된 경제의 기초 위에서라 하더라도 진화의 과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혁명의 과정이다.


복지국가와 전쟁국가

p98 어느 정도 합리적이라 해도 복지국가는 여전히 부자유한 국가이다. 왜냐하면 그 전면적 관리는 (a)‘ 기술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자유로운 시간, (b) 개인의 기본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하여 ‘기술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상품과 서비스의 양과 질, (c) 자기결정의 가능성을 이해하고 실현할 수 있는 (의식적 무의식적인) 예지(叡智)를 조직적으로 제한하기 때문이다.


p99~100 자유라는 추상적 개념을 위해 복지국가를 거부하는 것은 거의 설득력이 없다. 지난 2세기 동안의 진정한 업적인 경제적・정치적 자유가 상실되는 것은, 관리된 생활을 안전하고 쾌적한 것으로 이룰 수 있는 국가에서는 보잘 것 없는 손실이라고 여길 것이다. 만일 개인이 정부로부터 제공해주는 재화와 서비스에 행복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만족하고 있다면, 다른 재화와 서비스를 별도로 생산하기 위한 별도의 제도를 그들이 요구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또한 개인이 사상, 감정, 소망까지 만족을 주는 물건 속에 포함되도록 미리 조건을 부여한다면, 그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고 상상하기를 희망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확실히 제공되는 물질적・정신적 상품들은 질이 나쁘고 낭비적이고 하찮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신’과 지식은 욕구 충족에 반대하는 효과적인 논거가 되지는 않는다.


p102~103 전체의 광기는 개개의 광기를 허용하고, 인간성에 대한 죄를 합리적인 기도로 바꾼다. 사람들이 공적・사적인 관계로부터 쉽게 자극받아 전면적 동원의 생활을 각오할 때, 그들은 다연한 적뿐만 아니라 산업과 오락에서의 투자와 고용 가능성으로 인해 민감해진다.


제3장 불행한 의식의 극복-억압적인 탈승화(脫昇華)


p110 실제로 문화가치는 사회적 결집(social cohesion)의 도구로서 기여한다. 자유로운 문학과 미술의 위대함, 휴머니즘의 이상, 개인의 슬픔과 기쁨, 퍼스낼리티의 실현 등은 동과  서의 경쟁적 투쟁에서 중요한 항복이 된다.


p116 정신문화의 이질적이고 소외적인 작품이 흔해빠진 상품과 서비스가 된다. 그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는 문화의 양적인 변화―즉 문화의 감상과 이해의 증대, 문화의 민주화―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p118 예술이 그 독자적인 말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기존질서를 거절하고 논박하는 이미지가 살아있는 동안에만 한정된다.


p120 예술을 특징짓는 결정적인 구별은 즐거움 속에 창조된 예술과 슬픔 속에 창조된 예술과의, 또는 정기(正氣)와 신경증간의 심리학적 구별이 아니라 예술적 현실과 사회적 현실간의 구별이다. 마술적 위배이든 혹은 합리적인 위배이든 간에 사회적 현실로부터의 단절은 가장 긍정적인 예술에 있어서도 그 본질적 특성이 되고 있다. 게다가 이 긍정적인 예술은 그것이 표현되는 민중 자체로부터도 소외된다. 사원과 대성당이 그 주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가깝고 친숙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들은 노예, 농민, 직공의 일상생활과는―아마도 그 주인의 일상생활과도―역시 대조적으로 다른 것이며, 공포를 품게 하거나 마음을 고양시키는 것이었다.


p120~121 예술은 의식화되었든 그렇지 않든 부정의 합리화를 내포한다. 그 진보된 상태에서는, 그것이 「위대한 거절」―실제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항의―이다. 인간과 사물을 등장시키고, 노래하거나 소리지르거나 말하게 하는 양식은, 인간과 사물이 사실로서 현존하고 있는 방식을 논파하고 파괴하고 재창조하는 양식이다. 그러나 한편 이들 부정의 양식은, 그것이 관련을 맺는 적대적 사회에 찬사를 보낸다. 사회가 자기와 그 궁상을 재생산하는 노동의 영역에서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부정의 양식이 창조하는 예술세계는 아무리 진실을 내포하더라도 역시 하나의 특권적 위치, 하나의 환상으로 존재한다.


p128~129 단어는 문장의 일정하고 상식적인 규칙을 거부한다. 그것은 이미 확립된 의미의 구조를 파괴한다. 그리고 「절대적 대상」 그 자체가 됨으로써 견딜 수 없는 자기 패배적 세계―불연속의 세계―를 분명하게 한다.


p139 사회적으로 허용될 수 있고 또한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만족의 범위는 크게 확대되었다. 그러나 이 만족을 통하여 쾌감원칙은 약체화되고―그 기성사회와 양립할 수 없는 요구는 박탈당한다. 쾌감은 이와 같이 적응함으로써 복종을 만들어내게 된다.


p139 적응된 탈승화의 쾌감과는 달리 승화는 억압적 사회가 개인에게 부과하는 부인의 의식을 보존하고, 그것을 통해 해방을 추구하는 욕구를 보존한다. 확실히 모든 승화는 사회의 힘에 의해 강요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이 힘에 의한 불행한 의식은 이미 소외를 빠져나간다. 확실히 모든 승화는 본능적 만족의 사회적 장벽을 받아들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이 장벽을 넘어서기도 하는 것이다.


p140 승화의 양식이 갖는 인식기능에 비추어 보면, 선진 산업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탈승화의 진실로 순종적 기능이 명백히 드러난다. 성 (그리고 공격성)의 이러한 해방은 기성의 만족스런 세계의 억압적인 힘을 밝혀줄 만한 불행과 불만으로부터 본능적 충동을 분출시킨다. 확실히 불행은 만연하고 있다. 그리고 행복의 의식은 실로 불안정하고―공포, 욕구불만, 불쾌감을 엷게 가린 표면일 뿐이다. 이 불행은 쉽사리 정치적 동원에 기여한다. 의식을 발달시킬 여지도 없이 그것은 새로운 파시즘의 삶과 죽음의 방식을 위한 본능의 저장고가 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행복의식의 배후에 있는 불행이 사회질서를 위한 힘과 결집의 원천으로 바뀔 수 있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다.


p144~145 제도화된 탈승화는 1차원적 사회가 달성한 「초월성의 정복」이라는 한 국면으로 나타난다. 이 사회는 고급 문화의 영역에서 반대(질적인 차이!)를 약체화하고 다시 그것을 흡수하게끔 되어 있는데, 그것은 본능의 영역에서도 완전히 동일하다. 그 결과는 모순과 선택 가능성을 파악하는 정신적 기관의 위축이고, 기술적 합리성이라는 오직 하나 남은 차원에서는 「행복한 의식」이 지배적으로 될 것이다.


제4장 언설 세계의 폐쇄


p152 행복의식―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고 체제는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신념―은 체제 순응주의를 반영한다. 이것은 사회적 행동주의로 번역된 기술적 합리성의 단면이다.


전면적 관리의 언어

p155~156 대중 언어는 악의적이고 반항적 유머를 통하여 공적인 또는 준 공적인 언설을 공박한다. 속어가 구어가 이토록 창조적이었던 적은 거의 없었다. 마치 평범한 보통사람(또는 그 익명의 대변자)이 자기의 말로 현존하는 권력에 항거하여 자기의 인간성을 주장하려는 것처럼, 정치의 영역에서의 억제 당하는 거부와 반항이 “head-shrinker"(머리를 축소한 사람의 뜻으로 정신분석자)라든가, ”egghead"(계란 머리의 뜻으로 지식인, 인텔리), “bood tube"(바보, 얼간이), ”think tank"(사고탱크의 뜻으로 다양한 영역의 전문가를 모은 두뇌집단), “beat it"(도망치다, 나가다), ”die it"(가까스로 이해하다), “gone, man, gone"(완전히 열중한다) 따위와 같은 사물 그 자체의 정곡을 찌르는 어휘로 분출되고 있는 것 같다.


p158 일반의 공적인 언설세계와 매듭에서는 자기 증명적이고 분석적인 명제가 나타나고, 이것은 마술이나 의식에 쓰여지는 주문과도 같은 작용을 한다. 이들 주문과도 같은 문구는 듣는 사람의 머리에 되풀이 세뇌되면, 그것이 규정하는 조건 안에 듣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효과를 만들어내다.


p159 공적인 언설의 세계에서는 말이 동의어나 유어반복의 형태로 움직이므로 실제로 질적인 차별로 움직이는 일은 절대로 없다. 분석적 구조는 지배적인 명사를 그 안의 다른 명사들로부터 고립시킨다. 이것들은 정책과 여론을 발표할 때에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명사의 용법을 무효화시키거나 혹은 적어도 방해하는 일이 있을지도 모르게 때문이다. 의식화된 개념은 모순에 대하여 면역이 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실제로 행해지는 평등의 양식은 가중된 불평등이라는 사실이, 각각의 언설세계를 형성하는 힘으로서의 이들 개념의 완결된 정의로는 표현될 수 없게 된다.


p159~160 모순이 문장 속에서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고 명사로 한정되는 것도 역시 오웰 스타일 못지않다. 자본주의의 옹호와 육성을 위해 일하는 정당이 「사회주의적」이라고 명명되고, 전제적인 정부가 「민주적」이라고 불리며, 부정한 통제 아래서의 선거가 「자유선거」라고 일컬어지거나 하는 것은 이미 오웰 이전부터 있었던 상투어적―그리고 정치적 특징이다.


p160 비교적 새로운 것은 이러한 거짓말들이 여론과 개인적 의견에 폭넓게 받아들여지고 그 터무니없는 내용이 은폐되어 버린다는 점이다. 이러한 언어가 확산되고 유효성을 갖는다는 것은 사회가 잉태하는 모순들에 사회가 승리했음을 증명한다. 이러한 여러 모순은 사회 체제를 전복시키지 않고 재생산된다. 그리고 말의 표현과 선전광고의 한가지 편법으로 변질된 것은 바로 노골적이고 뻔뻔스러운 모순이다. 단축에 의한 문장 구성법은 대립되는 항을 확고한 숙지의 구조 안에 용해시킴으로써 화해시키는 것이다. ...한때 모순이라는 것은 논리에 대한 중요한 공격으로 생각되었으나, 지금은 조종을 위한 논리의 한 원리―변증법의 사실주의적 캐리커처―로 나타나게 된다.


p174 조작적 합리성의 사회에서 이 차원이 억압되는 것은 ‘역사의 억압’이고 이것은 아카데믹한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문제이다. 그 억압은 사회 자신의 과거에 대한 억압이지만, 미래가 질적인 변화, 현재의 부정을 일으키는 것인 한, 미래의 억압이기도 하다.


제2부 1차원적 사유


제5장 부정적 사유-패배한 저항의 논리


p210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진리일 수 없다」「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

⇒ 현실과 현실을 이해하려는 사유와의 상반(相反)・대립적인 구조를 표현한다. 직접적인 경험의 세계―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파악되고 변형되고 전복되어야 한다.


p210 주관적 세계와 객관적 세계를 하나의 상반 대립적인 통일체로 결합시키는 이성(理性)=진리=실재(實在)라는 등식에서는, 이성이 파괴적인 힘, 「부정의 힘」이며, 그것은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이성으로서 사람들과 사물에 대한 진리―즉 사람들은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되는 조건―를 확증한다. 이론과 실천에 관한 이러한 진리가 주관적인 조건이 아니고 객관적인 조건이라는 것을 논증하려고 하는 시도는 서샹사상의 본래부터의 관심사이고 서양사상 논리의 근원이었다―그 논리는 철학의 전문분야라는 의미에서의 논리가 아니고, 현실을 이성적인 것으로 파악하는데 적합한 사유양식으로서의 논리이다.


제6장 부정적 사유에서 긍정적 사유로-기술적인 합리성과 지배의 논리


p242 사회적 현실이라는 점에서, 모든 변화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는 여전히 지속되고, 그것은 기술 이전의 이성과 기술적인 이성을 결합하는 역사적인 연속체를 형성한다. 그러나 기술에 의한 자연의 변형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사회는, 인격적인 종속관계(주인에 대한 노예의 장원영주에 대한 농노의, 보건군주에 대한 영주의 등등)를 점진적으로 「사물의 객관적 질서」(경제법칙, 시장 등)로의 종속관계로 대치하고, 그것에 의해 지배의 토대를 바꾼다. 확실히 「사물의 객관적 질서」는 그 자체가 지배의 결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지배는 전보다 고도의 합리성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p245~246 사회는 인간의 기술적 이용을 포함한 갖가지 사물과 관계로 구성되는 기술적 전체가 성장하는 가운데 스스로를 재생산했다. 다른 말로 바꾸면, 생존경쟁과 인간 및 자연의 착취는 더욱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되었다. 「합리와」의 이중적 의미는 이 문맥에서 중요하다. 과학적 관리와 과학적 분업은 경제적・정치적・문화적인 산업의 생산성을 크게 향상시켰다. 그 결과 보다 높은 생활수준이 초래되었다. 그와 동시에, 그리고 그것과 동일한 이유에서 이 합리적인 산업은 가장 파괴적이고 억압적인 특징까지 정당화하고 면책하는 정신과 행동패턴을 만들어냈다. 과학적・기술적인 합리성과 조작은 새로운 사회 통제의 형식으로 함께 결합된다.


제7장 긍정적 사유의 승리-1차원적 철학


p297 결과는 원인을 잠식하고 목적은 수단을 흡수한다. - 폴 발레리


p312 물론 신화는 원초적이고 미성숙한 사유이다. 문명의 과정은 신화를 무효하게 만든다(이것이 바로 진보의 정의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합리적인 사유를 신화적 상태로 되돌리기도 한다. 이 경우에는 역사적 가능성을 확인하고 투기하는 이론은 비합리적으로 되거나 또는 비합리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이 논리가 기성의 언설과 행동세계의 합리성과 모순하기 때문이다.


p314 오늘날 신비화의 요소는 통제되고 생산적인 광고, 선전, 그리고 정책에 쓰여진다. 마술, 마법, 도취적 귀의 등은 가정, 상점, 사무소의 일상적 습관으로 실행되고, 합리적인 성취는 전체의 비합리성을 은폐한다. 이를테면 상호 살육이라는 마음 아픈 문제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수학, 살해와 과잉 살해도의 계산, 방사성 투하물의 확산 또는 비확산 측정, 이상한 상황에서의 지속성 실험―은 그것이 광기를 받아들이는 행동을 촉진(심지어는 요구)하는 정도로까지 신비화되고 있다. 이리하여 그것은 진실로 합리적인 행동―즉 함께 따라가기를 거부하고 이 광기를 낳는 조건을 제거하려는 노력―을 좌절시킨다.


p314~315 합리성을 그 반배도 바꾸는 이 새로운 신비화에 맞서기 위해, 구별은 반드시 지지되어야 한다. 합리적인 것은 비합리적이 ‘아니’고 사실의 정확한 인식 및 분석과 애매하고 감정적인 사변과의 차이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본질적인 것이다. 문제는 경험적 사회학과 정치학의 통계, 측정, 실태조사는 충분히 합리적이지 못하다는데 있다. 그것들은 사실을 만들고 그 기능을 결정하는 진실로 구체적인 관련에서 분리되는데 따라 신비화되기에 이른다.


p320 사람들은 자신의 언어로 말을 하는데 동시에 그것은 그들의 주인, 보호자, 충고자의 언어로 말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 자신’, 자신의 지식, 감정, 원망을 표현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 자신과는 다른 어떤 것을 표현한다. 자기가 사는 동네에서든 또는 국제적인 국면에 대해서든, 「자기 스스로」정치적 상활을 묘사하는 것이지만, 그들은(이 ‘그들’에는 그것을 알고 비판하는 ‘우리’ 지식인도 포함하여) 그들의 매스미디어가 그들에게 전달하는 것을 묘사하는 것이고―이것은 그들이 실제로 생각하고 보고 느끼는 것과 하나로 합병된다.


p327 의미의 사회적 시스템이 갖는 결정적인 기능이 가장 엄격하게 자기를 주장하는 것은 논쟁적・정치적인 언설의 세계에서이지만, 또한 일상적인 언설의 세계에서는 보다 은밀하게 무의식적, 감정적인 태도로 작용한다. 언어적 표현은 이들 모든 것에 관련하는 것이므로 실로 철학적인 의미 분석은 이들 모든 의미의 차원을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철학에서의 언어분석은 언어외적인 구속을 갖는다. 만일 그것이 정당한 용법과 부당한 용법, 진정한 의미의 환상적 의미, 유의미와 무의미의 구별을 짓는다면, 그것은 정치적, 미학적, 또는 도덕적 판단에 호소하는 것이다.


p329 일상 언어의 진정한 세계는 생존경쟁의 세계이다. 그것은 사실 양의적이고 애매하고 불명확한 세계로서, 확실히 명석하게 할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명석화는 치료적 기능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철학이 치료적인 것으로 된다면 그것은 실제로 자기 본래의 것으로 될 것이다.

    철학이 이 목표에 접근하는 것은, 기성의 언설과 행동의 세계에 의한 노예상태에서 사유를 해방시키고 기성체계의 부정적 성격을 해명하며(그 긍정적・적극적 측면은 어떻게든 충분히 선전되었다), 그 선택 가능성을 투기하는 정도에 따르는 것이다. 확실히 철학은 사유의 내부에서만 모순을 일으키며 투기한다. 그것은 이데올로기다. 이 이데올로기적 성격은 어떠한 과학주의, 실증주의도 극복할 수 없는 철학의 운명 그것이다.


제3부 또 하나의 선택 가능성


제8장 철학의 역사적 책임


p337 개인의 요구와 사회의 요구간의 부조화, 개개인이 자신을 위해 일하고 발언하는 대의적 제도의 결여는 국민, 정당, 헌법, 회사, 교회와 같은 보편개념의 실재로 유도하고―이 실재는 확인할 수 있는 개별적 존재(개인, 집단, 제도)와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보편개념은 물상화의 다양한 정도와 양태를 표현한다. 그들의 독립성은 실재적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사회 ‘전체’를 조직하는 개별적 힘인 한에서는 사이비적인 것이다. 이 보편 개념의 사이비적 실체를 해소할만한 번역은 여전히 하나의 절실한 요구이다―그러나 그것은 정치적인 요구이다.


p337~338 그들은 계급을 위해 죽는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정당을 위해 죽는다. 그들은 조국을 위해 죽는다고 믿지만 산업가를 위해서 죽는 것이다. 그들은 개인의 자유를 위해 죽는다고 믿지만 배당금의 자유를 위해 죽는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해 죽는다고 믿지만 그 관료제를 위해 죽는다. 그들은 국가의 명령에 따라 죽는다고 믿지만 국가를 지탱하는 돈을 위해 죽는다. 그들은 국민을 위해 죽는다고 믿지만 국민에게 재갈을 물리는 악당들을 위해 죽는다. 그들은 믿는다―그러나 왜 사람은 이토록 깊은 암흑을 믿는가? 믿는다, 그리고 죽는다―사는 것을 배워야 할 때는 언제인가?


p352 인구과잉의 세계는 여러 가지 점에서 탐탁하지 못하다. 그것은 황무지의 풍경을 좋아하는 우리의 미적 감감을 저해한다. 그러나 이것이 최악은 아니다. (그와 같은) 가능적인 빈민굴은 질서를 혼란시키는 요소의 온상이 된다.


p354 철학자는 스스로 생각하고 말할 때 그 사회에서의 특정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며, 그 사회에 의해 전해지고 이용되는 재료를 통해 그렇게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 그는 사실과 가능성의 일반적 세계 속에 대해 말하고 생각한다.


p362 역사적 과정으로서, 변증법적 과정은 의식을 포함한다. 즉 해방의 가능성에 대한 인식과 포착의 의식을 포함한다. 그리하여 변증법적 과정은 자유를 내포하게 된다. 의식이 기성사회의 요구와 이해헤 의해 결정되는 한, 그것은 「부자유」하다. 기성사회가 비합리적인 정도에 따라 의식은 기성 사회에 ‘대항하는’ 투쟁에서만 보다 고차의 역사적 합리성을 위해 자유롭게 된다. 부정적 사유의 진리와 자유는 이 투쟁 속에 그 근거와 이유를 갖는다. 따라서 마르크스에 의하면, 프롤레타리아트는 혁명적 힘으로써만 해방의 역사적 세력이다. 자본주의의 결정적 부정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자기 자신을 의식하고, 또한 그 사회를 만들어내는 조건과 과정을 의식하기에 ‘이른다면’, 그리고 의식하게 되었을 ‘때’에 일어난다. 이 의식은 부정적 실천의 전제조건인 동시에 한 요소이다. 여기서의 ‘이른다면’은 역사의 진보에 본질적인 것이다.


제9장 해방의 파국


p366 긍정적 사유에 대한 관용은 강요된 관용이다―꼭 테러리즘에 의해 강요된다는 것이 아니고 기술적인 사회의 압도적인 익명의 힘과 능률에 의해 강요되는 관용이다. 그러한 것으로서 이것은 일반의 의식에, 그리고 비평가의 의식에도 스며든다. 부정적인 것을 긍정적 [실증적]인 것이 흡수하는 것은 일상적 경험에서 확증된다.


p369 기술적인 변혁은 동시에 정치적인 변혁이지만, 정치적인 변화는 오로지 그것이 기술적 진보의 방향을 변경시키는―즉 새로운 기술을 전개하는―한에서만 질적인 사회적 변화로 이행할 것이다. 왜냐하면 기성의 기술은 파괴적인 정치의 도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p372 수학은 플라톤의 형이상학적 이데아와 동일한 의미에서 현실적이고 「선한」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전자의 발전은 ‘과학’이 되고 후자의 발전은 형이상학으로 머물렀을까?

    가장 명백한 답은 다음과 같다. 즉 ‘과학적’ 추상은 많은 자연의 현실적 정복과 변형으로 진입하여 거기서 그 진리성을 입증한 반면에, ‘철학적’ 추상은 그러하지 못했고 또한 그렇게 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자연의 변형과 정복은 생활의 법칙과 질서 안에서 일어났지만, 철학은 이를 초월하여 다른 법칙과 질서의 「선한 생활」에 종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역, 무지 및 빈곤으로부터의 고도의 자유를 전제로 하는 이 다른 질서는, 철학적 사유의 단서에서, 그리고 그 전개를 통하여 「비현실적」 인 것이었다. 그 반면에 과학적 사유는 점점 강력해지고 보편적으로 되는 ‘현실’에 계속 적용할 수 있는 것으로 남았다. 실제로 철학의 궁극적 개념은 항상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잔존했다.


p393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활동과 태도로부터 정신적・육체적 에너지를 이처럼 개별적으로 철회하는 일도 오늘날에는 극소수의 인간만이 가능하다. 평화회복에 선행해야 할 것은 에너지의 방향을 다시 정립하는 대수롭지 않은 측면일 뿐이다. 개인적 영역을 넘어서 자기 결정의 전제가 되는 것은, 강요된 물질적・정신적 노동에 소모되지 않는 자유로운 에너지이다.


p396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그 자신의 사면의 벽 안에서도 지킬 수 없는 사회가 스스로 개인을 존중하고 있다거나 자유로운 사회라고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을까? 확실히 자유로운 사회는, 개인의 자율성보다 훨씬 많은 보다 근본적인 성과에 의해 규정된다. 그러나 개인의 자율성이 없으면, 자율을 그 숨겨진 근원으로부터 부정함으로써 경제적・정치적 자유의 가장 뚜렷한 제도까지도 훼손하게 된다.


p398 억압적 요구의 창출은 오래 전부터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의 일부가 되었다. 필요하다는 것은, 만일 그것이 없다면 기성의 생활양식이 유지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문제는 심리학 또는 미학의 문제가 아니고, 지배의 물질적 기반에 있는 것이다.


제10장 결론


p404 모든 표현수단이 부여할 수 있는 방식으로 상상력을 해방하려면, 실제로 현재 자유스럽고 억압적인 사회를 영속화시키고 있는 많은 억압이 전제가 된다. 이러한 역전은 심리학이나 윤리학의 문제가 아니고, 정치의―이 용어가 시종 여기서 쓰여졌던 의미에서의―문제이다. 즉 기본적 사회제도가 전개되고 규정되고 변혁되는 실천의 문제이다. 그것은 개개인이 어떻게 조직되든간에 개개인의 실천이다.


p415 우리에게 희망이 주어지는 것은 오로지 희망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이다. - 발터 벤야민









3. ‘내가 저자라면’


■ ‘일차원적 인간’의 목차 및 전체적 뼈대

제1판 서문 비판의 마비

 

제1부 1차원적 사회

제1장 통제의 새로운 형태

제2장 정치적 세계의 폐쇄

제3장 불행한 의식의 극복

제4장 언설 세계의 폐쇄

 

제2부 1차원적 사유

제5장 부정적 사유

제6장 부정적 사유에서 긍정적 사유로

제7장 긍정적 사유의 승리

 

제3부 또 하나의 선택 가능성

제8장 철학의 역사적 책임

제9장 해방의 파국

제10장 결론

 

역자후기

 

마르쿠제는 현대를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를 공통 존재로 하는 일차원적인 '고도산업사회'라고 명명한다. 이러한 사회에서 인간은 억압된 현실을 비판하는 힘이 되는 내적 차원을 상실하고, 의식의 일원화에 이른다. 결국 인간은 문화가치와 기성질서가 동일화하는 일차원적인 문화와 사고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처럼 마르쿠제는 점점 사회에서 인간 소외와 인간 상실이 되는 상태를 그리고 있다.

 3부 10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1부에서 고도산업사회의 모습인 1차원적 사회의 모습을 그려낸다. 2부에서 이러한 사회에서 획득된 1차원적 사유의 상태를 그리고 마지막 3부에서 이 사회에서 새로운 철학의 가능성에 대해 논하며 이 사회를 개조한 새로운 세력에 대해 논하고 있다. 다만, 확실하고 분명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마르쿠제의 1차원적 인간은 선택권이 없는 폐쇄된 인간을 말한다. 그는 여기서 현대 자본주의와 소비에트 공산주의 양 체제에 대한 비판이론을 전개한다. 그의 기본명제는, 고도로 발달한 산업사회는 항상 기술에 의해 인간을 규제하며 이 지배의 원리로 1차원적 인간상이 탄생한다는 것이다(p422).


■ 보완점


 마르크스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논리 전개는 비슷한 패턴을 보이는 듯하다. 저자에 대한 이해없이도 목차를 훑어보거나 몇 장을 읽고 나면 아, 이 사람은 마르크스와...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전반적으로 거의 모든 철학사가 마르크스의 생각과 저작에서 뗄 수 없는 영향을 받고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일단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논거의 방식이나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기본적 사상의 이해, 개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인지 일단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책이나 프랑크푸르트 학파들, 그러니까 독일 출신의 철학가들의 책을 읽으려면 일단 숨을 크게 들이쉬고 읽어야 한다. 1차적인 내용의 흐름을 알고 세세한 것까지를 완벽히 습득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시간이 부족하다. 핵심적인 한 문장만을 뽑아내기 위해 무수한 페이지를 넘기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하다.

 마르쿠제의 저작들은 1968년의 혁명에 어떠한 역할을 했을까. 그때의 학생들은 무엇으로부터 행동력의 힘을 얻었을까. 어떠한 형태로든 ‘필요’가 발명을 낳는다는 말처럼 ‘필요’한 이들의 힘은 그것의 어려움을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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