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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9일 11시 47분 등록

Book Review

쓴 맛이 사는 맛

2015 3 9

 

 

  1. 저자 소개

 

저자 채현국은 1935년 사업가 채기엽의 아들로 태어났다.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중앙방송국(KBS의 전신) 공채 1기 연출직에 입사했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일이 자신의 신념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그만둔 후 아버지의 탄광 운영을 돕게 된다. 그 뒤로 사업은 승승장구, 한때 개인소득세 납부액이 전국 2위를 기록할 정도로 거부가 되었다. 그러나 1973, 홀연히 직원들에게 재산을 모두 분배하고 사업을 정리했다. ‘돈 쓰는 재미’보다 몇 천 배 강한 ‘돈 버는 재미’에 빠져 돈 버는 것이, 권력이, 명예가, 신앙이 되어버리기 전에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성공한 사업가였지만 뒤에서는 박정희·전두환 정권 때 핍박받는 민주화 인사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활동자금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1988년부터 효암학원의 이사장으로 취임해 효암고등학교와 개운중학교를 뒤에서 돌보며 교육자의 삶을 살고 있다. 자신을 내세우기 싫어하는 성격이지만 정체되고 부패하는 것을 경계하며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위해선 거침없이 목소리를 높인다. 지금도 80 노구에도 불구하고 시민단체들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여러 강연에 참석하고 있다. 좌충우돌, 종횡무진한 선생의 강연은 역사, 정치 예술, 철학까지 아우르며 청중들을 압도한다. 파격적이고 철학적이고 가식 없는 선생을 ‘거리의 철학자’로 부르는 까닭이다.

저자 : 정운현
저자 정운현은 1959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났다. 1984년 중앙일보 입사를 시작으로 서울신문, 오마이뉴스 등 여러 매체에서 기자와 편집책임자를 지냈다. 1980년대 말 친일연구가 임종국을 알게 된 이후 친일파 연구에 매료돼 그간 친일파 관련 저서를 10여 권 출간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장을 지내기도 했다. 저서로는 《친일파는 살아 있다》, 《임종국 평전》, 《어느 날 백수》 등이 있다.

거부’였지만 유신시절 ‘양심세력의 보루’였던 효암학원 이사장 채현국
“아비들도 처음부터 썩지는 않았다…노인 세대를 절대로 봐주지 마라”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며칠씩 신문을 보기 싫을 때가 있다. 상쾌한 표정으로 조간신문을 펼쳐 드는 건 신문사 광고에나 나오는 장면이다. 신문을 펼치는 게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만큼 불길한 나날들, 불빛도 없이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어른을 만나고 싶었다. 채현국 선생을 만나면 “어른에 대한 갈증”이 조금 해소될 수 있을까. 격동의 시대에 휘둘리지 않고 세속의 욕망에 영혼을 팔지 않은 어른이라면 따끔한 회초리든 날 선 질책이든 달게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채현국 선생에 대한 기록은 변변한 게 없다. 출생연도 미상. 대구 사람. 서울대 철학과 졸. 부친인 채기엽과 함께 강원도 삼척시 도계에서 흥국탄광을 운영하며 한때 “개인소득세 납부액이 전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거부였던 그는 유신 시절 쫓기고 핍박받는 민주화 인사들의 마지막 보루였다. 언론인 임재경의 회고에 따르면 채현국은 <창작과 비평>의 운영비가 바닥날 때마다 뒤를 봐준 후원자였으며 셋방살이하는 해직기자들에게 집을 사준 “파격의 인간”이다. 김지하, 황석영, 고은 등 유신 시절 수배자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여러 민주화운동 단체에 자금을 댄 익명의 운동가, 지금은 경남 양산에서 개운중, 효암고를 운영하는 학원 이사장이지만 대개는 작업복 차림으로 학교 정원일이나 하고 있어 학생들도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고 했다. 한사코 인터뷰를 거부하던 채현국 선생을 지난 1223일 조계사 찻집에서 어렵사리 대면했다. 검은 베레모에 수수한 옷차림, 등에 멘 배낭은 책이 가득 들어 묵직했다. 노구의 채현국은 우리 일행에게 허리를 굽혀 절을 하고 깍듯이 존대를 했다.

 

“독지가라 쓰지 말라”는 인터뷰 조건

-왜 그렇게 인터뷰를 마다하시나?

“내가 탄광을 한 사람인데…. 사람들이 많이 다치고 죽었다. 난 칭찬받는 일이나 이름나는 일에 끼면 안 된다.

-탄광사고는 다른 탄광도 마찬가지 아니었나?

“그게 결국은 내 책임이지. 자연재해도 아니고….

흥국탄광이 설립된 것이 1953. 열일곱 살 때부터 채현국은 서울에서 연탄공장을 하며 부친의 일을 돕기 시작했고 10여 년 후부터는 본격적으로 도계에 내려가 73년까지 회사를 운영했다.

-젊어서는 큰 기업가였고 현재 학원 이사장인데, 어르신 70 평생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 평전이나 자전에세이 같은 것도 없고.

“절대 쓰지 않을 거다. 주변 사람들한테도 부탁했다. 쓰다 보면 좋게 쓸 거 아닌가. 그거 뻔뻔한 일이다. 난 칭찬받으면 안 되는 사람이다.

-죄송하지만 연세도 잘 모르겠다. 몇 년도 생이신가?

“호적에는 1937년생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35년생이다. 올해 일흔아홉.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이 쓴 글에 보면 “채현국은 거리의 철학자, 당대의 기인, 살아있는 천상병”이라는 대목이 있다.

“하하하… 거지란 소리지.

-어쨌든 주류 모범생은 아니신 듯하다.(웃음)

“근데 시험을 잘 치니까 내가 모범생으로 취급되고. ‘저러다 언젠간 출세할 거야’ 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10여 년 전부터 내게 성을 내는 친구들이 있다. ‘이 새끼, 출세하고 권력 가질 줄 알았는데 속았다’고….(웃음)

-출세는 안 하신 건가, 못 하신 건가?

“권력하고 돈이란 게 다 마약이라…. 지식도 마찬가지고. 지식이 많으면 돈하고 권력을 만들어 내니까….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었다. 채현국 선생과의 인터뷰는 긴 실랑이 끝에 몇 가지 약속을 전제로 성사되었다. “절대로 자선사업가, 독지가라는 표현을 쓰지 않을 것” “미화하지 말 것” “누구를 도왔다는 얘기는 하지 말 것.

-도움 받은 사람들이 있는데 왜 도운 사실을 숨기나?

“난 도운 적 없다. 도움이란, 남의 일을 할 때 쓰는 말이지. 난 내 몫의, 내 일을 한 거다. 누가 내 도움을 받았다고 말하는지는 몰라도 나까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될 일이다.

-왜 안 되나?

“그게 내가 썩는 길이다. 내 일인데 자기 일 아닌 걸 남 위해 했다고 하면, 위선이 된다.

-한때 소득세 10위 안에 드는 거부였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어떠신가?

“난 여섯번 부자 되고 일곱번 거지 된 사람이다. 지금은 일곱번짼데 돈 없는 부자다.(웃음) 돈은 없지만 학교 이사장이니까. 개인적으론 가진 거 없다. 보증 불이행으로 지금도 신용불량자다.

-탄광업에선 완전히 손 떼셨나?

73년도에 탄광 정리해서 종업원들한테 다 분배하고 내가 가진 건 없다.

-어떻게 분배를 했나?

“광부들한테 장학금 주기 시작해서 그 자식들 장학금 주다가 병원 차려서 무료 진료하다가… 마지막에 손 털 때는 광부들이 이후 10년씩 더 일한다 치고 미리 퇴직금을 앞당겨 계산해서 나눠줬다.

-73년이면 오일쇼크로 탄광업이 황금알 낳는 거위였을 텐데 왜 기업을 정리했나?

“경기 좋을 때였다. 근데 72년도에 국회 해산되고 유신 선포되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곤 ‘이제 더 이상 탄광 할 이유가 없겠다’고 결론 내렸다. 내가 정치인은 아니지만 군사독재 무너뜨리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을 해왔는데….

-그럴수록 돈을 벌어서 민주화운동을 지원해야 하는 것 아닌가?

“사업을 해보니까… 돈 버는 게 정말 위험한 일이더라.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돈 쓰는 재미’보다 몇천배 강한 게 ‘돈 버는 재미’다. 돈 버는 일을 하다 보면 어떻게 하면 돈이 더 벌릴지 자꾸 보인다. 그 매력이 어찌나 강한지, 아무도 거기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어떤 이유로든 사업을 하게 되면 자꾸 끌려드는 거지. 정의고 나발이고, 삶의 목적도 다 부수적이 된다.

-중독이 되는 건가?

“중독이라고 하면, 나쁜 거라는 의식이라도 있지. 이건 중독도 아니고 그냥 ‘신앙’이 된다. 돈 버는 게 신앙이 되고 권력이, 명예가 신앙이 된다. 그래서 ‘아, 나로서는 더 이상 깜냥이 안 되니, 더 휘말리기 전에 그만둬야지’ 생각했다.

-부친이신 채기엽 선생도 중국에서 크게 사업을 일으켜 독립운동가들에게 재정적 도움을 주신 걸로 알고 있다. 큰돈을 만지면서 돈에 초연하기는 부친한테서 배우신 건가?

“우리 아버님도 일제 치하 왜곡된 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성공 자체를 그리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으신다. 부끄러운 시절에 잘산 것이 자랑일 수 없다는 걸 잘 아는 사람이다. 아버지가 과거 얘기를 나한테 하신 적이 없어서, 내가 아는 것도 다 남한테 드문드문 들은 거다.

대구 부농의 독자였던 부친 채기엽은 교남학원 1기 졸업생으로 시인 이상화 집안과 교분이 깊었다. 이상화의 백형인 이상정 장군이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걸 알고 상하이(상해)로 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중국에 잔류해서 사업을 시작했는데 트럭운송업, 제사공장, 위스키공장을 하며 손대는 일마다 크게 성공했다. 독립운동가들을 먹이고 재우고 돈 대준 대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도 46년 귀국할 때는 빈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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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의사적인 인간과 산파적인 인간

-일제하 지식인 중에 사회주의에 경도된 사람이 많았는데 아버님은 어떠셨나?

“아주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사상이나 이념 그런 거에 구애받지 않고 ‘사람’을 좋아하셨다. 아버님도 나도, 지식이나 사상은 믿지 않는다.

-서울대 철학과까지 나오신 분이 지식을 안 믿는다니?

“지식을 가지면 ‘잘못된 옳은 소리’를 하기가 쉽다. 사람들은 ‘잘못 알고 있는 것’만 고정관념이라고 생각하는데 ‘확실하게 아는 것’도 고정관념이다. 세상에 ‘정답’이란 건 없다. 한 가지 문제에는 무수한 ‘해답’이 있을 뿐, 평생 그 해답을 찾기도 힘든데, 나만 옳고 나머지는 다 틀린 ‘정답’이라니…. 이건 군사독재가 만든 악습이다. 박정희 이전엔 ‘정답’이란 말을 안 썼다. 모든 ‘옳다’는 소리에는 반드시 잘못이 있다.

-반드시?

“반드시! 햇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듯이, 옳은 소리에는 반드시 오류가 있는 법이다.

부친이 큰 사업가였지만 채현국은 부잣집 도련님으로 자라지 못했다. 사업은 부침이 심했고, 부친의 종적이 묘연할 때 어머니가 삯바느질로 가계를 꾸린 적도 적지 않았다. 위로 형이 한 분 계셨는데 휴전되던 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서울대 상대 4학년이던 형은 유서도 남기지 않았다. “이제 우린 영구분단이다. 잘 살아라…” 한마디뿐이었다. 형의 죽음으로 채현국은 열일곱 살에 집안의 11대 독자가 되었다.

-서울대에 입학해서 연극반 활동을 하셨다고 들었다.

“한 게 아니라 만든 거다. 그때 이순재가 철학과 3학년이고 내가 1학년이었는데 순재더러 ‘우리 연극반 하나 만들래?’ 해서….

-이순재씨가 선배라면서 왜 반말을 쓰시나?

“나이로는 순재가 나보다 한 살 많은데. 내가 중학 때부터 후배한테는 예대(禮待)하고 선배한테는 반말했다. 나랑 친구 할래, 선배 할래? 물어보고 친구 한다고 하면 반말로…. 후배한테 반말하는 건 왜놈 습관이라, 그게 싫어서 난 후배한테 반말하지 않는다.

-원래 조선 풍습은 후배한테 반말 안 쓰는 건가?

“퇴계는 26살 어린 기대승이랑 논쟁 벌이면서도 반말 안 했다. 형제끼리도 아우한테 ‘~허게’를 쓰지, ‘얘, 쟤…’ 하면서 반말은 쓰지 않았다. 하대(下待)는 일본 사람 습관이다.

-어쨌든 사업하는 집안 자제로 일류대까지 갔는데 왜 연극을 할 생각을 했나?

“교육의 가장 대중적인 형태가 연극이라고 생각했다. 글자를 몰라도 지식이 없어도, 감정적인 형태로 전달이 되고. 지금도 난, 요즘 청년들이 한류, 케이팝 하는 거 엄청난 ‘대중혁명’이라고 본다. 시시한 일상, 찰나찰나가 예술로 승화되고… 멋진 일이다.

대학 졸업 후 채현국이 선택한 직업은 중앙방송(KBS의 전신) 공채 1기 연출직이었다. 그러나 입사 석달 만에, 박정희를 우상화하는 드라마를 만들라는 지시에 미련 없이 사표를 던졌다. 마침 흥국탄광도 부도 위기였다.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 360%의 사채를 쓰며 겨우 위기를 막고, 이후 10여 년간 사업에만 전념했다.

-그렇게 고생해서 일군 사업인데, 아깝지 않나?

“아깝지 않다.

-기업을 제대로 키워서 돈을 벌어 좋은 일에 쓰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거 전부 거짓말이다. 꼭 돈을 벌어야 좋은 일 하나? 그건 핑계지. 돈을 가지려면 그걸 가지기 위해 그만큼 한 짓이 있다. 남 줄 거 덜 주고 돈 모으는 것 아닌가.

-기업가가 자기 개인재산을 출연해서 공익재단을 만드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흥분한 어조로) 자기 개인 재산이란 게 어딨나? 다 이 세상 거지. 공산당 얘기가 아니다. 재산은 세상 것이다. 이 세상 것을 내가 잠시 맡아서 잘한 것뿐이다. 그럼 세상에 나눠야 해. 그건 자식한테 물려줄 게 아니다. 애초부터 내 것이 아닌데, 재단은 무슨…. 더 잘 쓰는 사람한테 그냥 주면 된다.

-그렇게 두루 사회운동가들에게 나눠주셨지만 개중에는 과거 경력을 입신과 출세의 발판으로 삼거나 아예 돌아서서 배신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돈이란 게 마술이니까… 이게 사람에게 힘이 될지 해코지가 될지, 사람을 회전시키고 굴복시키고 게으르게 하는 건 아닐지 늘 두려웠다. 그러나 사람이란… 원래 그런 거다. 비겁한 게 ‘예사’다. 흔히 있는, 보통의 일이다. 감옥을 가는 것도 예사롭게, 사람이 비겁해지는 것도 예사롭게 받아들여야 한다.

-서운하거나 원망스러운 적 없으신가?

“모든 건 이기면 썩는다. 예외는 없다. 돈이나 권력은 마술 같아서, 아무리 작은 거라도 자기가 휘두르기 시작하면 썩는다. 아비들이 처음부터 썩은 놈은 아니었어, 그놈도 예전엔 아들이었는데 아비 되고 난 다음에 썩는다고….

-보통 선생 연배에 이른 분들을 뵈면, 4·19에 열렬히 참여하고 독재에 반대했던 분들이 나이 들며 급격히 보수화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의제든 종북이냐 아니냐로 색칠을 해서 다른 모든 가치에 우선시하는데, 이런 세대갈등은 어떻게 풀어야 하나?

“세상엔 장의사적인 직업과 산파적인 직업이 있다. 갈등이 필요한 세력, 모순이 있어야만 사는 세력이 장의사적인 직업인데, 판사 검사 변호사들은 범죄가 있어야 먹고살고 남의 불행이 있어야 성립하는 직업들 아닌가. 그중에 제일 고약한 게, 갈등이 있어야 설 자리가 생기는 정치가들이다. 이념이고 뭐고 중요하지 않다. 남의 사이가 나빠져야만 말발 서고 화목하면 못 견디는…. 난 그걸 장의사적인 직업이라고 한다.

깨진 돌에 쓰인 “쓴맛이 사는 맛”

-그럼 산파적인 직업은 뭔가?

“시시하게 사는 사람들, 월급 적게 받고 이웃하고 행복하게 살려는 사람들…. 장의사들에게는 죄송하지만, 실제 장의사는 산파적인 사람들인데. 여하튼 갈등을 먹고 사는 장의사적인 사람들이 이런 노인네들을 갈등 속에 불러들여서 이용하는 거다. 아무리 젊어서 날렸어도 늙고 정신력 약해지면 심심한 노인네에 지나지 않는다. 심심한 노인네들을 뭐 힘이라도 있는 것처럼 꾸며 가지고 이용하는 거다. 우리가 원래 좀 부실했는데다가… 부실할 수밖에 없지, 교육받거나 살아온 꼬라지가…. 비겁해야만 목숨을 지킬 수 있었고 야비하게 남의 사정 안 돌봐야만 편하게 살았는데. 이 부실한 사람들, 늙어서 정신력도 시원찮은 이들을 갈등 속에 집어넣으니 저 꼴이 나는 거다.

-젊은 친구들한테 한 말씀 해 달라. 노인세대를 어떻게 봐달라고….

“봐주지 마라. 노인들이 저 모양이라는 걸 잘 봐두어라. 너희들이 저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까딱하면 모두 저 꼴 되니 봐주면 안 된다.

-요즘 청년들이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를 이어가고 있다. 어떻게 보시나?

“아주 고마워! 젊은 사람들 그렇게 하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그렇게라도 살아 있어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날조 조작하는 이 언론판에 조종당하지 않고 그렇게 터져 나오니 참 고마워. 역시 젊은 놈들이 믿을 만하구나. 암만 늙은이들이 잘못해도 그 덕에 사는구나 하고….

-정약용 같은 사람은 죽기 훨씬 전에 자기 비문을 썼다는데, 만일 그런 식으로 선생의 비문을 스스로 쓴다면 뭐라고 하고 싶으신가?

“우리 학교에 가면 ‘쓴맛이 사는 맛’이라고 돌멩이에 쓰여 있다. 원래 교명을 쓰려고 가져왔는데 한 귀퉁이가 깨져 있었다. 깨진 돌에 교명 쓰는 게 안 좋아서 무슨 다른 말 한마디를 새겨볼까 하다가 그 말이 생각났다. 학생들한테 ‘이거 어떠냐?’ 물었더니 반응이 괜찮더라. 비관론으로 오해하는 놈도 없고.

-그 말이 비관론이 아닌가?

“아니지. 적극적인 긍정론이지. 쓴맛조차도 사는 맛인데…. 오히려 인생이 쓸 때 거기서 삶이 깊어지니까. 그게 다 사람 사는 맛 아닌가.

-그럼 비문에 “쓴맛이 사는 맛이다” 이렇게?

“그렇게만 하면 나더러 위선자라고 할 테니 뒤에 덧붙여야지. ‘그래도 단맛이 달더라’ 하고.(웃음)

-“쓴맛이 사는 맛이다… 그래도 단맛이 달더라.” 뭐가 인생의 단맛이던가?

“사람들과 좋은 마음으로 같이 바라고 그런 마음이 서로 통할 때…. 그땐 참 달다.(웃음)

당분간은 쓴맛도 견딜 만할 것 같다. 선생과 함께한 시간이 내겐 “꿀맛”이었다.

 

  1. 내 마음에 들어온 글귀

 

12. “자기 껍질부터 못 깨는 사람은 또 그런 늙은이가 된다. 저 사람들 욕할 게 아니라 저 사람들이 저 꼴밖에 될 수 없었던 걸, 바로 너희 자리에서 너희가 생각 안 하면 저렇게 된다는 걸 알아야 한다. “

 

25. “비겁해야만 목숨을 지킬 수 있었고 야비하게 남의 사정 안 돌봐야 편하게 살았는데. 이 부실한 사람들, 늙어서 정신력도 시원찮은 이들을 갈등 속에 집어 넣으니 저 꼴이 나는 거다.”

으와, 이렇게 명쾌하게 보수수구꼴통으로 몰락하는 사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요약한 건 처음. 납득이 간다

아프리카 속담에 죽어가는 노인은 불타고 있는 도서관과 같다는 말이 있다. 노인 한 사람은 한 시대요, 그 시대의 산 역사다. 개개인의 지적 역량과 경험치, 인품과는 별개로 노인은 그 자체가 보물과 같은 존재다.

 

27. 그렇다면 노인들은 왜 저 모양일까? 왜 저렇게 처참하게 무너졌을까? 개인적으로 추측건대 주체성의 부재, 혹은 상실 때문이 아닌가 싶다. 태어나면서부터 식민지의 노예였고, 이후에는 산업 역군으로 포장된 일꾼이었다. 그러면서도 배를 곯지 않는 것에 감사해야 했다. 그런 와중에 불행하게도 노예근성이 체화돼버렸다. 그 결과 비판력이 상실되고 권력 앞에서는 한없이 왜소해지는 비정상의 자아를 형성하게 되었다.

 

36. 쓴맛조차도 사는 맛이며, 오히려 인생이 쓸 때 삶은 깊어진다면서 말이다. 그게 다 사람 사는 맛이란다.

소주의 단 맛은 죽이고 싶도록 싫다.”

선생이 말하는 인생의 단맛은 바로 사람이다. 그중에서도 좋은 사람. 선생은 사람들과 좋은 마음으로 같이 바라고 그런 마음이 서로 통할 때 그땐 참 달다고 했다.

 

41. 모든 것은 이기면 썩고, 거기에는 어떠한 예외도 없다.

 

47. 회사의 돈은 누가 벌어다 주나? 사장? 전무나 상무? 물론 그들도 제 몫을 하겠지만 돈을 버는 주역은 직원들이다. 생산직이 상품을 만들고 영업직이 내다 팔고 관리직이 안에서 살림살이를 잘 해나갈 때 회사에 돈이 벌리는 것이다. 아주 단순한 사실이다.

기업오너도 아니고, 월급쟁이 사장들이 직원들을 소모품으로 여기는 것을 볼 때 참 아이러니하다. 본인도 소모품이잖아. 오히려 그 수명이 더 짧은. 수명이 짧으니 먹튀 밖에 방법이 없다는 깨달음을 공유하는건가? 이 치사하고 비겁한!

 

48. “나누어 먹기를 잘 하면 성공합니다. 우리의 속성이 (돈 혹은 성과물을) 조금 늦게 나누어줍니다. 남들보다 앞에 나누어주면 생명을 거고 돈을 벌어다 줍니다. 바로 그걸 했던 겁니다. 좀 힘들때 먼저 나누어줍니다. (그러면) 목숨 걸고 벌어다 줍니다…. 자기하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게 해줘야 합니다. 돈을 번 것은 다 그 사람들 덕분이라는 겁니다. 광산 일하다가 기자, 선생도 하고, 함께 사는 사람 모두가 신나게 하는 것을 자꾸 찾아야 해요돈 버는 비결은 약간의 상상력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집니다. 나눠먹기를 잘 해야 합니다. 구멍가게도 마찬가지입니다.”

 

59. 가난한 자의 특권은 의지 밖에 없다.

 

62. 선생은 거짓말을 거지의 말이라 정의했다. 이어 스스로 살아갈 줄 모르는 거지가 하는 말이 거짓이라고 부연설명했다.

 

64. 어떤 정치인이 자서전에 자신은 후회 없이 살았다고 쓴 걸 본 적이 있다. 조심스레 말하지만 그런 말은 오만이라고 본다인생은 그런 게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삶의 후회란 모두에게 무거운 무게를 갖는다.     

 

67. 선생은 시시해야만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부지런하지 않으면서 한가로운 것이 행복의 원천이라고 말이다. 몸이든 의식이든 행동이든 모두가 한가해야 행복해진다고 말이다.

 

69. “적게 쓰고 가난하게 살고 발전이란 소리에 속지 말고, 훨씬 더 소박하게 살라.”

 

84. “의사소통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상대방이 말하지 않은 소리를 듣는 것이다” – 피터 드러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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