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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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가을 한 케이블 방송이 나의 강의를 동행 취재한 적이 있었습니다. 거절하기 어려운 사연이 있어 촬영을 허락하긴 했는데 나는 그 촬영이 어떻게 편집되었고 어떻게 방송됐는지 본적이 없습니다. TV에서 나를 보았다는 인사를 몇 달째 간간히 듣고 있어 ‘그때 촬영분이 반복 노출되고 있나보다’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 방송을 보고 나를 만나자 하신 분들도 몇 있습니다.
오늘 나는 그 중 한 분을 이곳 여우숲에서 만났습니다. 그분은 부인과 함께 버스를 타고 오셨습니다. 4반세기를 禪(선)과 武藝(무예), 명상으로 수행해 오신 분이었습니다. 회갑을 훌쩍 넘긴 몸과 얼굴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고 맑고 기품 있었습니다. 점심 식사부터 조금 전까지 열 시간 가까운 시간을 함께 했는데 한 번도 흐트러진 모습 없는 자세를 유지하는 분이었습니다. 부인은 시와 소설을 짓는 작가분이셨습니다.
방송에 무슨 내용이 나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두 분은 나의 안내를 통해 숲을 보는 새로운 눈을 열고 싶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함께 숲을 거닐었습니다. 나는 숲 입구에서 만난 가시엉겅퀴의 뿌리 잎 앞에 쪼그리고 앉았습니다. 그 녀석이 왜 그렇게 가시를 단 채 땅바닥에 온 몸을 밀착하고 이 계절을 지나고 있는지 그 녀석의 사는 꼴을 헤아려 설명해 주었습니다. 본격 잎을 터트리기 시작한 산마늘(명이나물)이 왜 이토록 추운 계절에 타자들의 침묵 속에서 저 홀로 잎을 틔워내고 있는지, 그 절박한 열망을 지키자고 산마늘은 또 무엇을 만들어 추위를 견뎌내고 있는지 그 꼴도 설명해 주었습니다.
군락을 이뤄 자라는 낙엽송(일본잎갈나무)는 왜 사방 중에 한 쪽으로만 가지를 뻗고 있는지, 그것이 빽빽한 경쟁 속에서 서로가 살아가기 위해 터득한 그들이 이루어낸 놀라운 지혜임도 보여주었습니다. 바위 위에 떨어졌으나 그 바위를 끌어안음으로써 제 하늘을 열어내고 있는 느티나무의 대단함도 느끼도록 안내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이 숲에 사는 나무와 풀들이 어떻게 제 삶을 지켜내며 또한 제 고유성을 확보해 가는지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두어 해 전 불어댄 거센 바람에 뿌리가 뽑혀 쓰러져버린 거대한 낙엽송 한 그루 앞에 이르러 그의 죽음을 보시게 한 뒤 산방으로 들어와 차와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부인께서 글을 쓰는 이유는 소외되고 고난 받는 사람들에게 그 어둠을 이겨낼 힘을 주고 싶어서라고 했습니다. 내가 숲의 생명을 소재로 그 일을 하는 것이라면 당신은 시나 소설로 그 일을 하고 계신 것이라 했습니다. 오늘 짧은 숲 산책에서 당신은 참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예전에는 삶에서 고난과 고통이 없으면 좋을 국면이라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살아보니 그것이 삶에 놓여 지는 까닭이 있음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나 역시 깊은 공감을 표했습니다. 우리가 숲에서 마지막으로 본 그 뽑혀 쓰러진 낙엽송을 보아도 그렇다고 부연했습니다. ‘그 낙엽송은 바로 옆에 심겨져 자신의 하늘을 다퉜던 낙엽 때문에 늘 빛이 모자라는 고난을 겪어야 했으나, 몇 해 전 간벌 때 그 옆 나무가 잘려나간 뒤 쓰러진 것입니다. 동아시아 사상에서는 음양과 오행으로 사물의 변화를 설명하는데, 그때 서로 간에 상생과 상극이 작용하는 관계도 포함합니다. 마지막으로 본 그 쓰러진 낙엽송은 바짝 붙어 자라는 나무가 자신을 극하는 존재여서 그것이 고난이나 고통을 주는 원인이었지만, 고통을 주던 나무가 사라지자 그것이 막아주던 바람이 걸림 없이 확 열린 자리로 불어치게 되었고 결국 큰 바람에 쓰러지고 만 것이지요.’
우리는 고난과 고통, 어려움이 힘겹지만 삶을 키우고 자신의 고유성을 얻어나가게 하는 강력한 에너지임을 공감했습니다. 4반세기의 수련을 통해 이룬 하나의 세계에도, 그 세월 넘게 몰두한 작가의 창작에도 고난은 에너지였을 것입니다. 십여 년 숲에 안겨 사는 내 삶이 그러하듯.
다시 적막해진 밤 숲에서 나는 릴케의 한 구절에 다시 밑줄을 그어 어려움을 마주하고 있는 그대에게 보냅니다. “우리는 어려운 것에 집착해야 합니다. 자연의 모든 것들은 어려운 것을 극복해야만 자신의 고유함을 지닐 수 있습니다. 고독한 것은 어렵기 때문에 좋은 것입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어렵기 때문에 좋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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