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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16일 11시 24분 등록

한줄로사랑했다_구달리뷰#47

윤수정 지음

㈜달 출판

 

1. 저자에 대하여

 

윤수정

카피를 쓴다. 광고와 크리에이티브를 강의한다. , 오리 등의 가금류와 익힌 어류, 게로 만든 요리를 못 먹는다. 전생에 새, 게와 친한 인어공주(생선공주)였다고 생각한다. 중학교 1학년 때 교과서에 수록된 큰 바위 얼굴에 감동, ‘나는 얼굴이 작으니 얼굴 큰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결심하여, 그 꿈을 이룬 남편과 즐겁게 인생 동행 중이다. ‘네가 힘이 된다.’는 아버지의 유언을 품고, 지나온 시간들에 감사하며 살아갈 시간들에 용기를 내고 있다.

이화여대에서는 국문학을, 고려대에서는 영문학을 배웠다. 광고대행사와 영화사에서 카피와 마케팅을 익혔다. 영화, 축제, 식품, 화장품, 드라마, 게임, 음반, 책 등 다양한 분야의 카피를 맡아 왔고, 맡아오고 있다. 영화 소개 칼럼을 연재했고, 라디오에서 영화 소개 프로그램을 구성하고 진행했다. ‘카피라이터’라는 직업을 처음으로 한국 영화계에 도입했으며 현재까지 영화전문 프리랜서 카피라이터로서는 유일한 사람이다. 예술영화, 독립영화는 물론 블록버스터와 애니메이션까지 장르와 크기를 불문한 한국 영화 80여 편과 외국 영화 70여 편의 카피를 작업했다. 서울예대 광고창작학과와 콘텐츠진흥원 아카데미에서 광고와 크리에이티브를 강의한다. 상상마당 아카데미에서 ‘크리에이티브 테라피’라는 강좌를 열고 있으며 2년 동안 매회 조기마감의 성황을 이루고 있다.

 

광고계의 '똥줄이 탄다'는 표현을 아세요? - 카피라이터 윤수정

돈을 벌지 않는 순간은내가 나를 버는 순간
청춘을 위로하는 글을 써달라는 부탁, 거절했다
당신이 사랑을 멈추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한 줄로 사랑했다』

 

한 줄로 사랑한, 그녀의 이야기


대기업의 광고가 아닌 영화, 드라마, 게임, 음반, 하이 페스티벌 등의 광고를 맡았습니다. 그리고 카피라이터의 경력이 많아지면 흔히 하는 칸 광고제, CLIO, 대한민국광고대상의 수상을 받는 길보다는 크리에이티브 강사로서 강의를 하는 것과 책을 쓰는 일을 선택했죠. 화려하고 돈이 많이 오가는 광고계에서 일반적인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약간 바보 같고 삐딱한 길을 선택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선택한 길은 행복했고 지금 이 자리에 있어 저는 더더욱 행복합니다. 이 책은 제가 그동안 썼던 카피들과 그와 관련된 사적인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이 책을 쓴 이유는 살아온 시간들의 머리를 묶고 싶었기 때문인데요. 머리를 묶게 되면 부피가 느껴지고 비로소 그 사람의 얼굴 형태가 보이게 되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한 줄로 사랑했다』는 책은 제 카피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고, 제가 살아온 시간의 기록이기도 하면서, 제가 한 시대에서 다음 시간으로 넘어가기 전에 묶었던 운동화 끈으로서 작업을 한 책입니다. 제가 어떤 카피를 쓰셨는지 알고 싶으신 분은 이 책을 보시면 아시게 될 겁니다.”

일하면서 내 자신이 타들어가는 게 좋다

짧은 인사말이 끝나고 그녀는 강연 대신 다른 방식으로 독자들과 소통한 길을 택했다. 4년 전부터 강연을 하고 있는 윤수정 작가에게 강연은 익숙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번 자리에서는 독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자 기꺼이 마이크를 독자들에게 넘겼다.

 

어떠한 계기로 카피라이터가 되신 건가요? 그리고 지금 이 분위기에 맞는 한 줄의 카피를 써주신다면?

우선, 두 번째 질문부터 답하면요. 저는 그 질문이 가장 힘든 것 같아요. 예전에 <브라보, 마이 라이프>라고 하는 라디오 생방송에서 그 방송을 'FM의 휴먼블록버스터'라고 표현했다가 혹평을 받은 나쁜 기억이 있는데요. 그 이후로 웬만해서는 그런 일을 하지 않습니다. 카피라이터에 입문한 계기는 책에도 쓰여 있는데요. 싱겁게도 답은 광고대행사 공채에 붙어서 입니다. 대학에 다닐 때 '내가 잘난 사람이 아니라 난 안될 거야'라고 생각했어요. 상처받을까 두려워서 말이죠. 그런데 우연히 제 눈에 들어온 추천서가 있었고 지원을 했고, 지금 카피라이터가 되었죠.

광고창작학과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내용 중에 카피를 쓴다는 것은 어떤 시스템이나 회사를 선택하는가보다 더 많은 다른 것이 존재하는 행위라는 부분이 있는데요. 글은 나에게 나오는 것인데, 돈이 개입되면 굉장히 복잡해져요. 예를 들어 꿀라면이라는 상품이 있는데 그 카피가 대히트를 쳤지만, 사실 그 꿀라면에 나쁜 성분이 포함되어 있다면 나는 무엇을 해서 돈을 번걸까요?

광고회사에서 입사해서 일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문제는 타인을 위해 글을 쓴다는 것은 타인에 대한 애정과 배려가 선행된 행위여야 한다는 거죠. 광고는 항상 '어떻게 되어야한다' 라고 소비를 조장하곤 합니다. 당신이 소유하는 것이 당신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 광고에요. 광고인의 일면에는 어쩌면 '공범자'라는 말이 행간에 숨어있는지도 몰라요. 언어를 판다고 생각하면 감성이 피폐해져요. 그러니까 언어를 팔 생각보다는 나눌 생각을 했으면 좋겠어요. 광고인은 널리 알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광고계에 관심이 있다거나 광고계에 일할 사람들은 뭘 널리 알릴 것인지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만큼에 책임을 가져주었으면 해요.

마케팅과 학생인데, 전 색다른 광고를 만들고 싶은데요. 그렇게 하기 위해 대상을 삐딱하게 보는 노하우가 있다면?

처음에 있었던 광고업체 쪽에서는 제 광고 카피가 너무 추상적이라면서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는데요. 영화계 쪽으로 왔더니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질문하신 분의 느낌이나 아이디어를 다른 사람이 틀리다고 해서 그것이 정답이 아니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행복하다, 슬프다, 지루하다는 감정을 배우지 않아도 알게 됩니다. 모든 사람들은 느낌을 스스로 깨우치는 천재들이죠. 그러나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고 해서 맞추려고 한다면 불행해집니다. 다만, 여러분 개인의 특별한 느낌을 교감하는데 사심이 들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마음으로 느끼는 법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17년간 카피를 쓰고 있는데요. 아직도 돈을 위해 쓰는 카피는 뭔가 석연치 않아요. 저는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르죠. 하지만 지인인 방송작가가 제가 썼던 '그래도…… 꿈꾸라고 말해줘'(p.157 참조)라는 카피를 보고 힘을 많이 얻었다고 했을 때 정말 행복했어요. 저는 여러분도 그런 기쁜 순간을 찾아주었으면 해요.

『한 줄로 사랑했다』라는 책 제목이 굉장히 인상적인데요. 이러한 제목이 나오게 되었나요?

제목은 이병률 대표님이 뽑으셨는데요. 가제는 '마음으로 광고하다'였어요. 수신 받은 입장으로서 '카피라이터로서의 한줄'이 아닌 한 줄이 얼마나 절박하고 위태로운가, 생각했어요. 순수하게 내 이야기를 표현할 수 있을 거란 생각했죠. 영화의 카피로 책을 구성한 건 크리에이티브 수업을 받던 학생의 아이디어였어요.

카피(Copy)는 간결하게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창작의 고통을 동반하는 존재인 것 같은데요. 데드라인에 대한 압박을 느끼시나요?

물론이죠. 광고계에서는 속어로 '똥줄이 탄다'고 표현해요. 몸 아래에서 머리 꼭대기까지 찌릿하게 느껴지는 감각이 있죠. 저는 철녀라고 불릴 정도로 워커 홀릭이었는데요. 카피라이터가 육체적으로 규칙적인 삶이 아니잖아요. 결과물도 All or Nothing이니까요. 심지어 광고대행사에서 일할 때는 스트레스로 살이 뜯어지기도 했어요. 하지만 고통이라기보다는 개인의 입맛에 맞으면 그 압박이 좋게 작용하는 것 같아요. 저는 타들어가는 제 자신이 좋거든요(웃음).

가장 힘들게 작업한 카피는 어떤 것이 있었나요? 작업한 카피 중에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어떤 것이 있나요?

힘들 때는이 영화를 사람들이 보면 참 힘들겠다싶은 작품을 만났을 때에요. 그래도 그 작품의 카피를 완성하면, 이후에 다른 영화의 카피를 쓸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일해요. 가장 좋아하는 영화, 이 질문은 대답하기 힘든 것 중 하나에요. 영화에 대한 인상은 흘러가는 것이기 때문이죠. 요즘은 따뜻한 영화가 좋아요. 최근 본 영화 중에서는 <서칭 포 슈가맨> <사랑의 침묵>이 그렇죠. <사랑의 침묵>은 묵언수행을 하는 수녀님들의 다큐멘터리인데요.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침묵은 신과 대화하는 시간이라고 대답하는 걸 듣고 많은 생각을 했어요. 제게 '돈을 벌지 않는 순간' '내가 나를 버는 순간'이고, '사람을 만나지 않는 순간' '나를 만나는 순간'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닫게 했죠.

작가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창의력'이 카피라이터의 직업에서 굉장히 중요한 능력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근 학생들은 입시 공부로 이런 능력이 키워지기 힘든 환경에서 살고 있는데요. 광고업계에서 일하고 싶은 학생들은 어떤 환경에서 공부를 해야 할까요?

최근 젊은이들은 남과 달라지길 두려워하면서도 남과 다른 내가 되고 싶어 해요. 남과 다르게 살고 싶다면 그렇게 살면 됩니다. 물론, 공통의 기호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각 개인이 다르다는 점을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기준을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에게 청춘을 위로하는 글을 써달라는 청탁이 들어온 적이 있었는데요. 저는 거절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태양계에서 살았다면 그들은 은하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죠. 각자 다른 시대가 살고 있기 때문에 같이 서로 고민하고 나누어야 할 문제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태어난 것만은 아니다


이렇게 독자들은 윤수정 작가와 도란도란 대화하며 질문과 대담의 시간이 끝났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진 않을까했던 윤수정 작가의 우려와는 달리 독자들의 열띤 질문으로 계획된 시간을 훌쩍 넘어섰다. 그녀는 전 세계 네티즌이 뽑은 애니메이션 1위에 빛나는 「KIWI!를 보여주며 마지막을 장식했다.

키위 새는 먹이와 천적의 걱정 없이 사는 새의 종인데요. 이 애니메이션에서 키위 새의 마지막 행위를 사람들은 추락 혹은 투신이라 하지만, 키위 새에게는 행복한 비행이었을 것입니다. 새는 먹이를 주워 먹으라고, 천적 없이 살라고 태어난 건 아닐 겁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을 벌라고만 태어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우리가 태어난 궁극의 목적을 찾아주길 바래요.”




한 줄로 사랑했다

윤수정 저 |
영화를 보기 전, 우리는 영화 포스터와 영화평을 살펴본다. 주변의 평가도 중요하겠지만, 영화 포스터의 한 줄을 보고 영화를 결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 줄'을 쓰는 사람이 바로 저자 윤수정이다. 저자는 국내 유일의 영화 전문 카피라이터이다. 소가 나오던 영화도 그녀의 묵직한 카피 한 줄이 관객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만큼 한 줄의 힘은 위대하다. 우리는 카피를 두고 보이지 않는 시공간 사이를 이겨내며, 그녀와 호흡하고 이야기, 그리고 감정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마치 그녀의 노트를 훔쳐보는 듯한 이 책은 그녀의 카피들의 이야기이자 저자의 이야기이다

 

2. 내가 저자라면

 

한 줄로 사랑했다멋지지 않은가. 영화 전문 카피라이터다운 카피다.

윤수정, 그녀의 책은 한 권이 오롯이 카피다.

 

영화마다 카피가 태어나기까지의 과정을 그렸는데 구절구절마다 자기 삶을 녹여 넣었다. 사람의 생명을 녹여 에밀레 종소리를 만들어 내었다는 전설처럼 그녀의 삶이 녹아 든 카피는 그 자체로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기발한 착상과 천재적인 영감이 알고 보니 모두 그녀의 치열한 삶 가운데서 피어 오른 꽃봉오리였다.

 

이런 책을 만난 것은 참으로 행운이다. 필사를 해가면서 글을 어찌 써야 할지 생각했다. 땀과 피, 체액의 흔적이 없는 글은 단무지 없는 김밥 같을 게다. 시처럼 함축적이고 신선한 시선, 도발적인 상상 같은 것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가서 잘 버무린 비빔밥처럼 문장의 맛을 내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수많은 시를 읽고 책과 영화를 끼고 사는 직업적 카피라이터이지만 카피만 안 쓰면 카피라이터라는 직업은 괜찮은 직업이라 토로할 만큼 카피는 고통스런 작업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카피, 척 보는 순간 바로 이거야 싶게 확 와 닿는 삼빡한 카피는 수없는 밤을 지새운 고통의 산물일 터. 결국 마음을 움직이는 문장이란 고통에서 핀 선홍빛 아네모네인가.

 

글쓰기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로지 글을 쓰는 것 밖에 없다는 별안간의 생각, 에둘러 가지 않는 정공법, 그것만이 길이다. 무진장 연습하여 연습지가 자기 키 높이로 쌓일 때쯤 나탈리는 부스를 열어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시를 써 주지 않았을까. 그쯤 되면 글쓰기가 즐거운 놀이가 되어 있을 것이다.

 

3. 나를 무찔러온 장절

 

019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류승완, 꽃 같은 세상 날려 버린다

 

020 우연은 언젠가 운명이 된다, 순애보

 

영화 일하는 사람들이 일터을 칭하는 영화 판이라는 말에는 초등학교 운동회의 모래먼지 냄새가 난다. 뙤약볕에 구워진 소음과 지문마다 꼈던 흙때와 머리카락 올올이 앉은 자갈알갱이들이 영화판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내 마음에 불려온다. 철야도 이어달리기 계주처럼 전력질로 해내고, 술도 발야구 결승전처럼 거침없이 마시고, 연애도 피구공 잡아채듯 순식간에 금방금방 해내는 스타 플레이어가 수두룩한 영화판 선수들 곁에서 밤을 달리지 못하는 나, 좋은 사람을 소리쳐 부르지 못하는 나 시사회 장 구석에 숨어서 박수만 치다 돌아오는 나는 운동의 제주도 니가 없는 운동회를 만나는 것보다 더 초라 했다

 

021
동사무소 공무원이 인터넷 사이트에서 본 여자에게 반한다. 그게 줄거리인 영화, 동사무소 공무원도 영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구나. 인터넷 사이트를 클릭하는 것도 사건이 될 수 있구나. 내가 아는 사람과 내가 하던 일이 영화가 되다니! <순애보>는 영화가 나에게 기죽지 말라고 들려준 응원깃발 같았다.

 

029
숨 돌릴 여유가 생기면 뭐 하고 있지? 왜 이걸 하지? 이게 무슨 의미가 있지? 너 잘 하고 있는 거 맞아? 하고 고통의 아이가 펑펑 울까 봐, 아이가 깰 엄두를 못 내도록 밤과 새벽 내내 작업을 하고 오전에 잠시 눈을 붙이고 오후에 일터로 달려 나갔다. 그렇게 내 힘을 남김없이 쏟아 부으며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뿌듯함은 다음 영화가 기다릴 거라는 희미한 확신을 주었지만 문제는 카피라이트라는 직업은 그저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 칭찬 받을 수 있는 직업이 아니었다는 것.

 

030
그런 사랑을 받는다면 영화 하루에 답이 그렇게 찾아졌다. "너무 눈부셔 짧다는 말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031
심지어 하루를 사랑해도 영원히 간직할 수 있다. 영화 <하루>의 석윤과 진원은 사랑의 본질을 안다. 하루라는 만남의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고.

 

032
함께 한다는 것이 사랑의 핵심이라고. 무뇌증으로 하루밖에 살 수 없는 아이를 기꺼이 낳는 진원.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달려가 출생신고를 하는 석윤의 모습에서 나는 내 아버지 모습을 본다. 유한한 인간이 아비와 딸로 만나 결국 준비도 하지 못한 채 이별을 했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아비였다. 딸이었다. 사랑했다. 사랑 받았다. 그 단어 사이에 시간은 주어로도 목적어로도 낄 수 없다.

 

033
그러므로 이별의 사랑의 완성을 위한 신의 한 수다. 아빠는 곁에 계 시지 않아도 나를 키우는 분이다. 그러니까, 사랑이다.

 

038
세상에서 가장 착한 손을 가진 남자
마음은 착한데, 두들겨 패는 남자를 옹호하는 여자의 말, 원래 착한 사람인데, 나를 해꼬지 하는 이를 원망하다가 분 바르듯 붙이는 말. 착해, 뾰족한  매력 없는 사람에게 언제 보자는 인사처럼 뜻 없이 건네는 말. 얼마나 무책임하고 무기력한 언어인가. 착하다. 나는 김영호의 착한 손이 박하사탕을 운동권 영화, 저예산 영화, 예술 영화로 오해 하는 대중에게 착해서 불행한 우리의 비극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나 자신의 인생을 주체에서 객체로 위치 변경시키고, 상대방에게 나를 부릴 채찍을 쥐어주었기에, 그래서 파괴되었다. 김영호도, 나도, 시대와 불화한 모든 사람들이.

 

040
세상의 모든 눈물을 그의 첫사랑에 바칩니다 -박하사탕; <오아시스>에서 설경구와 문소리가 연인으로 만났다  "마침내 세상이 선택한 사랑"

 

044
그러나 영화는 좀 다르다. 다르게 생각하고 남이 못하는 걸 하기 전에 같은 생각 다같이 하는 걸 찾아 야 한다.

 

045
8
월의 크리스마스 -생과 죽음이 공존하는 슬픔

 

046
읽는 순간 가슴이 확 절절해 지고 뭐가 막 있을 것 같은 그런 사랑 카피 없어요?

 

048, 자유에는 대가가 있는 법
프리랜스라는 단어는 출퇴근 시간, 일하는 장소 등의 사소함부터 일의 목적 수입가지 노동이 도달할 수 있는 극한의 자유가 향기를 뿜는다. 그러나 프리랜스라는 단어의 그림자 에는 상의할 사람이 없다. 아플 때 스러운 건 물론이거니와 감정적 슬럼프나 가정적 우환을 막아줄 누군가가 없다. 백수와 종이 한 장을 나눠 쓰는 사이다. 게다가 일에 대해 느끼는 사소한 감정의 부스러기들을 같이 껍질 벗기고 도란도란 상의할 누군가가 없다.

 

053, <물고기 자리> 멈출 수 있다면 사랑이 아니다
사랑이라는 것에 몸을 왈칵 담그기는커녕 발끝만 넣어 몸을 사리고, 늘 누군가를 마음에 담을 때마다 그 사람과 만나지 말아야 할 100가지 이유 쯤을 대고, 그 사람이 나를 싫어 하도록, 그 사람이 나를 떠나가도록 비겁한 음모를 벌이던 나는 감정이 사랑으로 자라나지 않도록 혹은 스르르 사랑의 형체를 띄게 되면 화들짝 놀라 어여 흐트러지도록 요란을 떨곤 했다. 그런 내가 멈출 수 있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니, 내가 알지도 못하고, 걸어 보지도 못한 길을 관객들에게 가라고 비겁하게 속삭였다. 죄가 컸다. 카피가 칭찬을 들어도 마음이 썼다.

 

057
우주의 별처럼 멀던 배우와 감독들을 직접 만나고 밥도 먹고 운이 좋으면 이야기로 나눌 수 있다. 이런 일을 하면서 돈도 벌 다니, 정말 좋은 직업 아닌가.  카피만 쓰지 않는다면.

 

060
나를 움찔거리게 하는 움직일 수 없음의 공포를 어떻게 그릴 수 있을까? 영화 전체 이야기를 버리고 단 한 장면에 승부를 걸기로 했다. 영화의 오프닝 장면, 한 남자가 발을 내딛자마자 깍두기처럼 네모나게 쪼개지는.
"
움직이는 순간 당신은 부서진다" <큐브>

 

064
극장은 여성이 점령한 문화영토였으므로 남자들은 여성의 가방 곁에 따라가는 오브제인 것이 일상적인 풍경. 여자들은 동성 친구들과 우르르 영화를 보러 가지만 남자들은 동성 친구들 만나면 피씨방이나 술집을 가기에 <바람의 파이터>는 대단히 불리했다. 여성그룹 관객은 포기 해야 하고, 남녀 커플은 남자가 기선을 잡아야 하고, 남성 그룹은 스타크래프트나 술보다 땡기게 해야 했다.

 

065
그의 삶,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의 기록들 속에서 분명히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이야기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확신 속에 그의 삶을 훑어 내려갔다. 눈길이 멈춘 곳은 그가 최영이라는 본명 대신 배달이라는 한국의 상징을 자신의 이름으로 삼은 것. 예를 들어 재미 교포가 자신의 이름을 코리아 혹은 서울이라고 짓는 느낌이었다. 또 극진 가라데의 극진이라는 개념이 매력적이었다. 뼈를 부러뜨리고 다시 붙이고 부러뜨리고 다시 붙이고 그렇게 온몸을 돌처럼 단단하게 만들었다는 그의 수련 법은 읽는 것만으로도 악 소리가 나도록 고통스러워 보였지만 그 수련은 실은 상처 받고 딛고 일어서기를 반복한 내 인생이 동의하는 깨달음이었다.

 

068
극진과 배달. 내가 이 영화에서 선택한 두 개의 검 이었다. 그는 거대한 체구를 가진 사람도 아니었고 정통 무술인도 아니었지만 거의 근육에 감춰진 혈관은 사람, 조국, 그리움, 버려짐, 울분, 분노 그리고 생존으로 붉게 물들었다. 나는 그 근육에 감춰진 혈관의 성분을 카피로 쓰기로 결심 했다. "그때 세상에는 새 무리가 있었다. 일본인, 일본인이 키우는 개, 그 개만도 못한 조센징"이라는 카피로 예고편 노출서 충격을 주고, "대한민국이 만만한가" 나는 온라인 배너 카피로 최배달의 육성과 함께 한국인으로서 액션을 공유하고자 했다.

 

073
성공이란 내가 가장 즐기는 일을 내가 가장 감탄하고 존경하는 사람들 속에서 내가 가장 원하는 방식으로 행하는 것

 

076
"
살아있는 불의 선전포고"라는 말로 영화에 크기가 블록버스트라는 것을 확신 시킨 뒤에, "숨소리 마저 태워 버린다" 라는 생명을 가진 듯 생생한 불을 강조한 개봉 직전 카피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079
여러 편의 영화가 왈칵 쏟아지고 사람과 사람이 얽혀 드는 소란한 장터지만 결국 그 영화를 보고 느끼는 것은 홀로 있는 누군가다. 홀로 된 이의 마음을 여는 것은 혼자 힘으로 당당한 영화 만이 가능할 것이다. 몹쓸 겻눈질의 버릇은 그렇게 고칠 수 있었다. <리베라메> 라는 제목은 라틴어로  '우리를 구원하소서' 라는 의미다. 결국 구원은 밖이 아닌 안으로부터 온다. 우리가 구원을 위해 애타게 두드려야 할 것은 나였다.
"
거대함은 서두르지 않는다"

082
영화라는 예술이 가장 많은 대중들에게 사랑 받을 수 있는 것은 가장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표현이 응집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 사람이 피켓을 들고 서있는 1인 시위와 달리 수많은 촛불이 일렁이는 거리의 모습은 그 마음의 모임만으로도 울컥하게 하는 힘이 있다. 그 사람의 힘, 그것이 영화의 힘이다 라고 나는 영화를 맡을 때마다 확인 받는다.

 

084
그녀는 남자들이 자신을 욕망 한다는 사실을 욕망한다. 영원한 사랑이 자신을 선택할 거라고 가장 아름다운 선택을 당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아나이스는 그 계기가 스스로의 외모에 대한 아픈 자각일지는 몰라도 타인의 선택은기대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욕망을 자신의 의지로 품고 관철해 낸다. 모두가 그녀를 뚱뚱하다고 혀를 찬다 해도 그녀는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빼앗기지 않는 소녀다.

 

085
바캉스에서 첫 경험에 도달 한 것은 언니지만, 그 경험을 느낀 것은 자신의 욕망을 타인의 손에 휘둘리도록 포기하지 않은 아나이스다. 영화의 궁극적 강자는 pet girl 엘레나가 아닌 fat girl 아나이스다. 아랫입술을 꾹 눌러 발음하는 fat 발음이 그렇게 신나 보기는 처음이다. FAT 만세.

 

남을 엿보고 남처럼 되고 싶어 몸달아 하다가 눈이 머는 대신, 내 심장을 깨우고,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여다볼 수 있다면 난파하지 않고 항해를 이어갈 수 있다. 팻걸은 알려 준다. 세상이 욕망하는 pet girl이 되고 싶어 하다가 울지 말라고. 세상에 욕망하지 않는 fat girl이 되어도 스스로의 키를 놓지 말라고
"
 것은 언니지만 느낀 것은 나였다"

 

088
또래 여자 아이들보다 머리 하나는 컸던 탓에 일찍 2차 성징이 시작되었던 나를 웃통 벗겨 키가 비슷한 남자 아이들과 나란히 신체검사를 받게 했다. 다른 남자애들이 나를 보며 키득거리는 걸 그저 바라보고만 계셨다. 여선생님이었는데. 나는 열 살이었는데. 마흔이 넘은 지금도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이게 미움 받는 것이구나. 내가 잘못을 하지 않아도 내가 싫은 사람도 있구나. 그렇게 나는 미움의 백신을 10살 때 맞았다.

 

090
명문대에 가지 못하면 평생 낙오자가 될 것 같아 초중고 12년을 입시의 전사로 양성 시키고 대기업, 강남의 아파트, 결혼, 총명한 아이들의 출산과 양육, 노후 대책... 이어지는 촘촘한 공포의 그물을 웬만한 강심장으로는 통과할 수 없는 것이 오늘이다. 시선을 뒤집어 바라보면 오히려 오늘의 사람들은 계속 다른 공포를 향해 몸을 던지고 있는 것 같다.

 

091
이해가 되지 않는 부당한 일들에 마음에 거대한 물음표가 반점처럼 솟아도 입 밖으로 소리 내면 말 대답이 되어 버렸던 시절. 그 삼켰던 질문들이 하나로 합쳐져 나타난다. 하늘같은 스승에게 비로소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너 묻는다. 한 줄로 썼다. "선생님 그때 왜 그러셨어요"

 

095
게다가... 영화는 지독한 전쟁이다. 개봉일 이라는 피니쉬라인을 향해 수십 개 레인의 대표선수가 달려가는, 길이로는 마라톤을 넘어 농사에 가깝고, 경쟁의 치열함으로는 올림픽 단거리 육상 결승에 맞먹는 신기한 녀석, 그러나 개봉하고 며칠 만에 선도를 잃은 생선의 운명이 되기 쉬운 노동집약적이고 비효율적인 콘텐츠, 영화.

 

<스승의 은혜> 그때 왜 그러셨습니까?

 

099
비가 온다. 여고생 2명이 걸어 가는데 한 명은 우산을 쓰고 걸어 가고 한 명은 우산 없이 비를 맞고 간다. 둘 중에 말을 건다면 누구한테 하겠니? 학생들은 우산 없이 비를 맞고 가는 여학생이오"라고 답한다. 그리고 나는 말한다. 없는 것이 오히려 장점이 될 수 있는 것. 그것이 스토리텔링이란다

 

102
감독의 임무는 관객에게 장면 속의 여러 요소들을 보여주며 관객이 자신을 감동시키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찾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관객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다.

 

104
미쳤다 생각하고 쓴 카피, "섹스가 없어도 황홀한 영화"였다 여자들의 팬티를 드러내는 비주얼 <래리 플린트> <나쁜영화> 옆에서 기죽지 말라고 주먹 불끈 쥐고 쓴 카피였다. 그 카피가 헤드 라인으로 올라 갔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관객이 늘었다.

 

105
없음이 불러내는 있음의 마력을 그 때 깨닫게 되었다. 없다고 말했는데 사람들은 그 없음 속에서 있다고 말하는 것 이상의 있음을 봤다. 나는 이 없음의 승전보를 반드시 기억해야 할 내 카피목록에 넣었다. 세월이 흘러 나는 <고양이를 부탁해> 라는 특별한 성장 영화에서 다시 진실하게 고백하는 없음의 선물을 한번 더 선사했다. '스무 살 섹스 말고도 궁금한 건 많다' 그리고 그 때 역시 많은 사람들이 없음의 있음에 눈과 귀를 내어 주었다. 많이 가진 사람이 부자라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안 가진 사람이 부자가 될 수도 있다. 지금 가진 것이 없어서 더 많이 움직여야 하고, 지금 아는 것이 없어서 많이 공부해야 한다. 없음이 부르는 있음은 너무 많은 있음 보다 강하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이제 그 증거를 나눠 가진 셈이니, 당신의 있음으로 더 큰 증거를 나에게 보여 주시길.

 

108
텔레비전도 가지지 못한 그들에게 영화는 먼 이야기일 텐데도 그들은 그 먼 별을 반가워하고 감탄해줄 줄 안다. 게다가 그 만듦새의 사람냄새란. 전문적으로 훈련 받은 배우들이 아닌 현지 주민들과 아이들의 어색하고 수줍은 눈맞춤에서 유기농 채소를 먹고 건강해진 영화의 웃음 소리를 듣는다.

 

116
지진으로 무너진 마을을 다시 방문하는 감독, 곡소리가 나고 누군가를 원망하는 비명이 들려야 하겠지만 신기하게도 이 영화가 담고 있는 풍경들은 사랑에 몸 달아하는 청년, 신혼부부, 축구를 보기 위해 안테나를 세우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미소다. 그리고 반가운 얼굴들-공책을 들고 지그재그 길을 달리던 아마드와 그 공책의 주인인 네마자데-이 보인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도 생의 회복력은 놀라워서 새로운 생명의 기쁨이 슬픔을 덮고 사랑은 비극에 떨던 마음을 따뜻한 흥분으로 두근거리게 한다.

 

117

어쩌다 쉬는 날이 와도 종로로 향했다. 내 유일한 사치이자 쾌락이었던 서점과 극장들에서 아편을 맡듯 책의 향기를 흡입하고 기차표를 끊듯 코아아트홀의 티켓을 끊었다. 그렇게 끝이 보이지 않던 피로를 영화로 위안받고, 갈 곳이 보이지 않는 오늘을 영화로 탈출했다.

 

120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영화들을 보며 나는 카피를 쓰는 내 등에 쏟아지는 햇볕을 느꼈다. 기쁨을 최대화하는 삶과 고통을 최소화하는 삶은 다르다. 고통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의 기쁨이 줄어들 리 없다. 고통은 결코 기쁨의 국경을 침범할 수 없다. 기쁨을 포기하지 않은 인간의 삶 앞에서는 어떤 폐허도 순간에 불과하다고. 꿈꾸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기에 행복할 수 있다고, 그것만으로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와 살아있는 이유는 충분하다고, 감독은 실제 현실을 보여주며 경험하게 한다.

 

121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사람들은 꿈을 꾸고 사랑을 한다. 모든 것이 무너진 폐허에서도.

 

125

그러나 알지 않는가. 내 사주에 고독하게 고생한다는 달 그림자가 있다. 어두운 밤에 어슴푸레한 달 그림자를 받으며 걸어야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동양 운명 통계학이 보증한 사람이 나다. 돈도, 명예도, 대중의 사랑도 덧없다. 내 마음이 향하는 것은 나를 알아주고, 나를 필요로 하는 영화들이라는 사명감을 지팡이 삼아 매 작품을 꿋꿋하게 등산을 했다. 관객 천만 명 시대, 천 명만 관객이 들어도 행복해 하는 독립영화로.

그러나 이 영화는 달랐다. 처음 받아본 자료부터 느낌이 특별했다. 다큐멘터리인데도 따뜻했다. 유머도 있었다. 눈물도 있었다. 평균 십오 년을 사는 소가 마흔 살을 살았다고 하지 않는가. 당신이 마침내 알아 챈 독립영화 <워낭소리> 이야기다.

 

126

굳이 가공의 상상이 아니더라도 다큐멘트리조차 삶의 경지를 넘어서기도 한다. 정해진 수명을 넘어 묵묵히 80 노인의 벗이 되어 40 년을 산 소의 마지막 일 년, 사람이 남겨야 할 것은 무엇인지, 우리가 미처 돌보지 못한 것은 무엇인지를 이 영화가 알려주고 있었다.

사람은 가끔 마음을 주지만, 소는 언제나 전부를 바친다.”

 

128

워낭소리의 이야기가 관통하는 것은 마흔 살을 산 소의 기적, 그리고 떠나가는 순간 눈물을 흘리며 주인과 이별을 나누는 소의 마음이었다. 그 순수한 사랑을 담은 눈빛에게 흔하디 흔한 선물을 줄 수는 없었다.

워낭소리의 메인카피는 기존의 공식집을 덮고 마음을 붓질하고 두드려 울려서 글자로 새기자고 결심했다. 어떻게 아버지의 거친 손을, 묵묵히 예정된 생의 두 배가 넘는 시간 동안 노동을 되새김질한 소의 그렁그렁한 눈물을, 그리고 어머니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고향의 흙을 담아낼까 하는 고민이 꼬리를 무는 작업이었다. 거기에 쉽게 설명되지 않는 제목 워낭의 느낌도 전해야 했다.

 

129

글자로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글자로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글자로 선을 긋고 색을 칠하고 글자를 읽는 사람들의 마음에 사진이 박히게 할 수 있을까.

 

나는 이 넘쳐흐르는 질문들의 답이 예라는 것을 믿는다. 예를 들어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의 충격, ‘정수박이라는 단어, 그리고 폭삭 주저앉았다에서 폭삭의 느낌. 글자는 그림을 그릴 줄 안다. 내가 솜씨가 없을 뿐이다. 워낭소리 메인 포스트 카피는 그 그림에 대한 도전이었다. 읽는 이의 마음이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자. 워낭이 울리는 소리를 들려주자. 할아버지의 반생을 함께한, 눈물을 떨구며 극락으로 간 소의 워낭은 뭐라고 울까.

 

그래서 고맙다라고 썼다. 고맙다 고맙다 고맙다그렇게 울려퍼지는 소의 워낭소리. 그것은 할아버지가 소를 부르며 나지막이 건네는 이별의 송가이기도 하고, 소가 할아버지에게 화답하는 메아리이기도 하다. 그 소리가 이제는 움직이지 않는 워낭에서 화수분처럼 퐁퐁 솟아올라 포스터를 보는 사람들의 마음에 동심원을 그리기를바랬다. 그래서 흘리듯, 써본 카피가 고맙다, 고맙다, 참말로, 고맙다였다.

 

132

서편제의 카피 이년아, 가슴에 한이 있어야 소리가 나오는 벱이여

 

그래서 고맙다 함께 있어줘서라는 고마움의 이유가 나오는 카피로 가자고 마케팅팀 이야기 했을 때 극렬하게 반대했다.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었다. 불가능한 이야기 아닌가. 글자로 소리가 들리게 하고 싶다니. 단지 말 맛이라는 이야기를 했을 뿐. 다들 갸웃거렸지만 정말로 고맙게도 내 선택을 믿어주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포스터와 잘 어울린다며 만족해하기도 했다.

 

133

토마스 만이 어떤 작가가 당대에 각광받는 것은 작가의 은밀한 운명이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혼자 끄적이다 그 끄적임을 종일 하고 싶다는 그 마음만으로 카피라이터가 된 내가 계속 일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내가 가진 광고란 널리 알리는 것, 그러므로 내가 소리쳐 알리는 그것이 더 나은 세상을 불러오도록 깨어있어야 한다는 은밀한 믿음이 넘치는 것보다 부족한 것에, 꾸민 것보다 소박한 것에 눈을 돌리는 이 시대와 맞닿은 것이 아닐까.

 

140

<! 브라더스> , 어디가? , 버리러!

 

146-147

가족, 친구, 같은 여자들에 의해 권해지는, 대대손손 내려오는 그 민간요법은, 침묵이다. 사춘기에 들어서며 여자들은 순결이란 의무와 결연한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테스처럼 여자들의 삶이 추락하는 원인이 바로 그 의무를 수호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경고가 보이지 않는 문신으로 새겨진다. 유리처럼 연약한 그 의무에 손상을 당하면 네 잘못이야라는 매질이 가차없이 후려쳐질 것이다. 옷차림, 음주, 귀가시간, 방심, 웃음다양한 죄목의 매질에 피해자는 유발자가 되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어 낄낄거린다. 그 매질을 피하기 위하여 여자들은 도와달라고 소리치지 못한다. 그런데 애나벨은 “251명의 남자들과 10시간 동안 섹스를 하는 것과 한 남자와 10시간 동안 섹스를 하는 것이 뭐가 다른가?”하고 외치며 고개을 든다.

 

한결 같은 그녀의 당당함이 흔들리는 부분은 두 번, 신청한 남자들이 콘돔을 착용하지 않았기에 AIDS검사를 받으며 결과를 기다리는 순간, 그리고 충격을 받아 망연자실한 어머니와 이야기하는 순간, 그때 그녀는 목소리가 떨린다. “엄마, 실망시키지 않을게.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게 될 거야.”

 

당시 PC통신에 리뷰를 올렸더니 누군가 쪽지를 보냈다. 그 영화 야하냐며 노출수위가 어느 정도냐며 추천하는 포르노 영화리스트를 늘어 놓으며 같이 보자고, 정말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타인 앞에서 옷을 벗은 사람일까. 옷 벗은 타인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사람일까. 애나벨이 나에게 알려준 질문이다. <애나벨 청 스토리>의 감독이 촬영 후 그녀에게 청혼을 했지만 그녀는 누군가의 아내가 될 수 없는 사람이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251명이 아니라 그녀의 상대는 전 세계였다

헤드라인은 문제가 없었지만 포르노그라피의 잔다르크라는 서브카피가 심의에 걸렸다.

 

256

<청연> 세상, 그 위로 날아 오르다

 

157

꿈이 뭐래요? 영화 일의 목표가 뭐예요?” 고백하자면 지독한 근시라 아득한 훗날의 이야기를 감당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나의 목표는 늘 조촐했다. 그저 지금 내 손안에 내 눈앞에 아장대는 영화들이 건강했으면 좋겠다.  많이 웃었으면 좋겠다. 햇볕이 잘 들었으면 좋겠다라고 중얼댈 뿐.

 

159

12시간 주야 교대로 근무하며 20-30회 승객을 태워야만 8-10만원의 사납금을 겨우 채우는 생활 속에 그는 택시 뒷자리에 앉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궁금해졌다. 최하동하 감독은 그렇게 서울과 서울의 사람들을 인터뷰하기 시작한다. 그 영화가 <택시 블루스>. 택시가 품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꿈을 수 놓아 주고 싶었다. “길 잃은 당신의 희망을 안전하게 모십니다

 

165

영화가 폭력을 사랑하는 이유는 영화 감독들이 폭력에 매료되는 취향이 있어서가 아니라 영화를 꿈꾸고 만드는 시스템 자체가 폭력적이기 때문이라는 박찬욱 감독의 말. 창조적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라지만 알고 보면 창조를 고갈시키는 선수들이 모여있는 곳. 감독과 배우, 현장과 스태프 모두 대박 영화를 해야 칭찬을 받는 실적과 영업이 출세의 비결인 상도가와 다를 바 없는 곳. 흥행이 보장된 영화, 커리어의 로프에 든든한 버팀목을 박아 줄 영화, 그걸 타고 더 높이 올라가야 하는 곳. 한 발 헛디디면 로프를 받친 못이 빠지면 금방 까무룩한 나락으로 빠져드는 버티칼 리미트가 영화계이기 때문이다.

 

169 <품행제로> 모범시대 불량영웅

인간을 억압하는 시대는 분명 유죄일 텐데 중고등학교 시절 그 억압에 반항하는 아이들이 벌을 받았다. 조회시간과 종례시간마다 불량이란 낙인이 찍힌 아이들은 맞거나 폭언을 들었다. 복장불량, 성적불량, 품행불량, 자세불량불량은 다양한 문패를 달고 그들을 찾아와 그 모서리로 머리며 등짝을 쪼아댔다.

 

미팅, 롤라장, 파마는 물론이고 인근 남학교 축제나 남녀가 구분되지 않은 독서실조차 얼씬하지 못한 새가슴의 나는 그때 불량이란 소리를 들으며 파란만장했을 내 친구들에게 이제야 감사의 인사를 보낸다. 그들이야말로 비겁한 내 학창시절에 명랑한 추억을 지켜준 영웅이었다. 창백한 피부와 허약한 근육으로 허겁지겁 숙제를 해대느라 젊은 날을 날려버린 모범생들은 학교를 떠난 뒤에야 알게 될 것이다. 젊음을 구성하는 동위원소의 명단에는 모범이 없음을.

 

모범이 가라앉힌 세상을 시끄럽게 흔들어 살맛 나는 세상으로 재구성하는 건 불량의 은덕이다. 지금 이 순간도 사람들에게 모범이라는 최면을 걸며 지루하고 갑갑한 상자 안에 가두는 세상에서 순정한 옆차기를 날리는 불량영웅들을 응원한다.

 

172

결혼이란 인생담보대출 같다는 소리를 했다. 인생을 걸고 안정감, 소속감이라는 대출을 받은 뒤 그 이자를 매일 몇 시간씩 상환하고 있다는 것 같다는.

 

173

육체적으로 힘들다거나 과정의 난이도가 높은 것도 아닌데 가사노동을 힘들게 여기게 하는 것은 그 반복성에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새로움에 대한 본능이 있어서 전혀 새로워질 여지가 없는 그저 현상유지가 최대한의 목표인 가사노동은 그 본능을 갉아먹는 괴로운 수행인 것이다.

명절의 음식 장만이 고된 것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창의성을 차단하며 해마다 도돌이표를 돌리는 반복의 문제다. 그리고 그 반복이 미덕의 핵심이 되는 제도가 결혼이다.

 

176

폭력은 상대방에 대한 두려움에서 기인하는데 사회는 남자와 여자의 사랑이 흘러 넘치는 게 두려운 모양이다. 그 끝없이 솟아나는 다양한 조합과 결합의 순열들을 결혼이라는 마침표로 묶으려고 한다. 한 사람 당 한 사람이라는 사랑 정량을 할당하고, 등기권리증을 발부해 남의 권리를 넘보지 말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사랑의 소유를 변경 없이 평생 유지해야 한다고 한다. 인간의 사랑과 삶을 한 사람 대 한 사람의 양적인 관계로 묶어버리는 제도, 머리 길이를 제한하듯 넘치는 사랑을 금지하는 제도, 감정을 일인 분으로 수렴해야지 추가분의 욕망을 발산하지 못하게 하는 제도, 그래서 과감하게 결혼에 추가를 요구하는 <아내가 결혼했다>라는 소설이 즐거웠다. “여기, 남편 하나 추가요

 

177

정말 사랑하는 남편 덕훈과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지만 그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또 하나 있기에 남편을 추가했을 뿐이다. 추가를 요구하는 것은 리필보다 건강하다. 리필은 하나를 소진시키고 그 하나를 채워야 한다는 도시 깍쟁이 같은 전제가 붙지만 추가는 원래 있던 것을 보유하고도 하나를 더 원할 수 있는 시골사람들의 인심 섞인 여유다.

그래서 커피는 리필이지만 공기밥은 추가다. 리필은 눈치 보는 서비스지만 추가는 당당히 대가를 지불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으리라.

 

늘 불리하기 마련이던 여자가 당당하게 결혼을 만끽하고 너무 좋다 못해 여기, 남편 하나 추가요를 외치는 광경을 포스터에 소개하고 싶었다. 그러나 채택되지 못했다. ‘평생 한 사람만 사랑할 자신 있어?’ 우회적인 카피로.

 

180

도시의 아파트가 아니라 강원도의 둥근 산에 둘러 쌓인 밥 냄새 날리는 야트막한 집과 마당, 삐걱대는 마루가 정답게 안부를 묻는 초등학교 교실이 첫 집이고, 벚꽃 잎을 물들인듯한 17살의 볼을 가진 단발머리 전도연이 내 분신이었다. 첫 장면부터 마지막까지 마냥 수줍고 설레고 기쁘고 고운 영화, 그 영화가 내 카피의 처음을 연주했다. 영원히 기억할 소리를.

 

181

홍연이 수하가 좋아하는 LP판을 들고 그의 주변을 맴돌며 자신을 알아봐준 이 사람을 향한 콩닥거림이 그저 신기함인지, 아니면 다른 종류의 것인지를 궁금했을 때 나 역시 카피의 시안을 들여다 보며 밥 새도록 즐거운 이 마음이 나를 알아봐준 이들에 대한 고마움인지 아니면 정말로 영화를 보고 카피를 쓰는 일이 주는 흥분 때문인지 궁금했다.

 

홍연이가 교장샘이란 이어달리기 쪽지를 버리고 냅다 수하의 손을 잡고 뛰었을 때나도 그렇게 맥을 놓고 있는 영화를 힘내 달려주리라 다짐했다.  집에서 귀하게 기른 닭을 잡아 소풍날 선생님께 드리는 홍연을 보며 나 역시 내 영화를 위해서라면 못 줄 것이 없겠구나. 내 시간, 내 청춘 다 줄 수 있다고.

 

185

아직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홍연이가 사랑에 대해 각성을 느끼는 그 순간을 보여주고 싶었다. 선생님의 싱긋 웃는 얼굴, 그 얼굴에 출렁이는 마음, , 이거구나, 저 사람이 웃는데 내 마음이 환해지는구나.

<내 마음의 풍금> 그가 웃었다 세상이 환해진다

 

사랑은 멈췄지만 그리움은 멈춰지지 않았습니다

 

187
영화를 마케팅 한다는 것은 음유시인의 역할을 현대로 이어받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 한 줄의 줄거리를 영화 마케터들은 키스토리라 부른다 두사부일체가 조폭두목 학교가써 고삐리에게 삥뜯기는 사연으로 요약 되듯 영화의 긴 이야기를 짧게 압축하는 보통 20자 콘셉트라고도 부르는 작업이 마케팅의 처음이고 카피의 처음이다. 이 짧게 요약된 스토리만 듣고도 궁금해져야 하고 재밌겠다는 탄성이 나와야 긴 마케팅 여로가 수월하고 순탄하게 이어지는 것이다.

 

188
삼풍백화점 참사로 약혼녀를 잃은 주인공이 10년 뒤 그녀의 노트를 받게 되고 그 안에 계획된 여행을 혼자 떠난다 라는 줄거리를 가진 영화 가을로.

 

누가 어떤 사랑을 하는가가 가장 중요한 멜로영화인데 여자주인공은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죽어 버린다. 갈등의 상대방을 맡아줄 여자주인공이 없이 남자주인공 혼자 영화를 끌고 가야 한다. 그가 약혼녀를 잃었다가 스토리가 전부다. 살인이 아니므로 복수도 할 수 없다. 명명백백한 사고였기에 음모도, 추리도 없다.

 

그렇다면 갈등이 사라진 영화 이야기를 채울 것은 무엇일까? 여행이라고, 가을로는 느리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전라남도 목포 끝에서 경주 울산 울진 포항을 거쳐 강원도 영월 태백까지 대한민국 전역을 훑어 건져 올린 60개의 로케이션이 영화의 중반부 이후에 펼쳐지지만, 이 풍경들은 아라비아의로렌스의 사막, 닥터지바고의 설원, 그랑블루의 바다 등 오대양 육대주의 스펙터클을 경험한 관객들에게 너무 겸손하다.

 

그 풍경은 비행기로 숨가쁘게 날아 처음 보는 색깔들로 찬란하게 빛나는 거리와 수백 수천 년의 역사를 날개처럼 펄럭이며 사람의 존재를 먼지처럼 사소하게 압축해버리는 건물들을 경험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느리게 카트를 끌며 지나가는 동네의 낮은 담, 익숙한 길처럼 아늑하고 평화롭다. 모나게 눈에 박히지 않고 마음을 노곤하게 감싸는 우리나라의 풍경이 가을로의 여행을 이어간다.

 

그러므로 가을로라는 영화는 애초에 태어날 때부터 당신의 심장 박동수를 가장 높이 올리겠다고 야심 차게 선언하는 대신 타박타박 도보의 속도로 당신의 맘에 속삭이겠다고, 젖어들겠다고 이야기 하는 영화였다. 수묵화의 감성을 어떻게 카피로 설명할 수 있을까.

 

192
연어가 자신이 태어난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저 영화가 태어난 질문으로 거슬러 올라 갔다. 우리는 왜 여행을 가는가? 그리고 왜 10년도 전의 이야기들을 기억하고 지금 나누려 하는 걸까? 그리워서, 한참 뒤에 찾아낸 답이었다. 그렇게 이 영화의 카피를 썼다.

 

192-193 그리움
그리움은 약자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과는 이별이 있다 그러나 그리움은 이별이 없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사랑은 희미해지지만 그리움은 소멸되지 않으며 시간으로 인해 불순물이 휘발되어 오히려 더욱 청순해진다. 그리움은 인간을 비로소 영원이라는 달에 발을 디딜 수 있게 하는 감정이다
그리움이 그리움의 거리를 놓지 않고 그리움이 그리움답게 스스로의 대상에게 충실할 때 영화는 진정한 힘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 감정 중추를 쥐락펴락하는 약물, 그리고 극장에서 팔리는 상품으로의 가치를 넘어 인간의 마음에 힘을 불어 넣어주고 인간으로 하여금 날아 오르게 하는 진정한 힘.

 

193
사랑은 살아있는 것과의 관계지만 그리움은 사라진 것과의 관계다. 가을과 함께 라면 그리움은 사랑보다 힘이 세다. 햇볕과 공기, 물을 모아 양분을 만들었니 생활의 터전인 잎이 생식의 꽃보다 아름다워지고 거느린 것들을 모두 내려놓고 하얗게 리셋될 겨울의 다가섬조차 미소 지을 여유가 생긴다. 사랑은 죽고싶을만큼 아플 수 있지만 그리움은고통의 복판에 선 사람조차 살고 싶게 만든다

 

195
극장은 내가 나의 인생에서 유체이탈 하듯 붕 솟아 오르는 놀라움이 이루어지는 마법의 양탄자와 같다. 익명의 사람들이 빛을 통과해 어둠 속에 모인다. 그들의 시선이 한 점에 모이면 현실이 타 들어 가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는 영화가 보여주는 이야기 속에서 누구라도 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으며 시간과 공간의 법칙들을 어기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기도 한다. 한번도 만난 적 없는 타인들이 그 기적의 동반자가 되어 허구의 여행을 완료한다.

 

198
심지어 산이 보이는 거리지만 다들 애즈라 파운드 의 시 지하철 정거장에서'에 나오는 까맣게 젖은 나뭇가지처럼 지하철에서 쏟아져 나와 고개를 숙이고 잰 걸음으로 걷는다. 잠깐 멈춰서기만 해도, 고개를 들기 만 해도 왕처럼 행복할 수 있는 특별한 거리에서.

 

교차로에서 있는 시네큐브라는 극장에서 나는 사람들이 이 마법의 양탄자를 타게 하고 싶었다. 현실 밖으로 피곤에 절은 각자의 영혼과 육체를 탈출시키고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상 속으로 맑게 헹궈서 햇볕도 맞추고 풍욕도 하고 그렇게 돌아가라고. 그래서 사막 같은 세상을 모두의 별이 빛나는 우주로 만들자고. 그렇게 말을 걸고 싶었다.

 

좋은 음식의 효과는 금방 나타나지 않는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영화는 유기농 슬로푸드를 스크린에 옮긴 것 같은 영화다. 조미료의 톡 쏘는 감칠맛이 없어 입에 넣는 순간 바로 아, 맛있어! 이런 몸서리는 나오지 않지만 식은 후에 먹어도 맛있고, 배고프면 생각나고, 오래도록 힘이 솟는, 먹고 나면 나도 모르게 얼굴이 밝아져 있는 그런 영화다.

 

202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리라 ... 행복하세요

 

203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 / 죽어도 못 잊어!

 

205
비겁한 사람과 용감한 사람을 구분하는 가장 쉬운 기준은 그들이 스스로에게 얼마나 엄격한가를 지켜보는 것이다.

 

206
폭력으로 부서진 사람들은 불안정한 죽음의 충동이라는 생명의 지병을 얻는 셈이다. 폭력이 인간의 육체에 미치는 엄청난 공포와 고통, 그리고 그 치욕의 여진을 설핏 경험한 뒤에 나는 폭력에 대한 카피를 돌려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211 축제와 놀이
노동은 인간을 행복하게 하지만 그 속에서 파괴되고 지친 사람들을 온전한 인간으로 보전하는 것은 놀이의 몫이다. 외줄타기를 하는 사람들에게 부채를 지어 주는 것. 그래서 떨어질까 두려워서 조마조마한 사람들이 허이하고 기합을 넣고 사뿐사뿐 줄을 디뎌 미소를 짓게 하는 것. 그렇게 일상을 넘어서 현실 그 이상을 꿈꿀 수 있는 여유를 주는 놀이들이 왈칵 쏟아져 판을 벌이는 것이 축제다. 그러므로 축제는 시간과 돈이 남아도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정말 살기 힘들고 각박한 사람들에게 더 절실한 기회다.

 

214
사실 우리 조상님들은 생활 속에서 축제를 벌일 줄 알았다. 보릿고개의 궁핍 속에서도 까치를 위해 홍시를 남겨 두는 여유가 있었고, 남녀가 유별 하고 양반과 상놈이 하늘과 땅처럼 갈렸던 세상에서도 무대와 객석을 나누지 않고 마당에서 관객과 배우가 하나가 되어 예술을 즐길 줄 알았다.

 

215
봄의 축제니 봄바람, 신바람, 춤바람 신명을 싣고 그 신명에 소망의 바람을 불어넣자고 서울이 바람 난다고 썼다. 그리고 궁이 모든 사람들이 보러 오는 꽃피는 봄에 비로소 닫힌 봉오리를 열고 만개 한다고 궁, 봄에 피다를 썼다

 

, 봄에 피다와 서울의 봄, 궁에서 피나는 비슷해 보이지만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 , 봄에 피다에서 서울은 결코 앞에 나서지 않는 속 깊은 주인의 모습이 되어 손님들 마음껏 놀다 가시라고 인자한 미소를 짓지만, 서울의 봄 궁에서 피다 라는 카피에서 서울은 맨 앞에 버티고 서서 사람들의 상상을 막는다. 내가 주인공인이니 와서 마음껏 나를 칭찬해라. 나에게 감사하라를 거들먹거리는 것이다. 궁은 엑스트라로 전락하고 만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서울의 봄뿐.

 

216
낮아짐으로써 높아지고 말하지 않음으로써 알아보게 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축제의 의미인데 서울이라는 도시 이름이 턱 하니 앞으로 나서는 순간, 축제 마저 각박한 생색과 노동의 현장이 된다. 너그럽지 못함이 이 카피의 아쉬움이다.

 

217  한 입의 행복 / 던킨도너츠
공책 한 권 연필 한 자루만 있으면 두려울 게 없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나는 끄적이는 재미에 들려서 감옥엘 가건, 무인도엘 가건, 집에 혼자 남겨지건, 무언가를 쓸 수 있다면 절대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여름 방학 가족 여행 때 혼자 집 보기를 간청 하기도 하고

 

224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 왕은 백성을 버렸고 백성은 왕을 버렸다 누가, 역적인가

 

225
포획된 것들이 펼쳐지는 순간 알알이 살아있는 세포가 되어 보는 이의 신경 속으로 틈입한다고. 그래서 인간의 키와 무게로 가늠할 수 없는 부피와 질량의 생명을 가지고 의식 속을 떠돌아 다닌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서 영화를 볼 때마다 나는 수를 셀 수 없는 스크린 위로 포도 알처럼 송이송이 떠오르면 생명들에 아찔해 진다. 그 생명들은 나뭇잎을 간질이는 햇살 속에 숨어서 기포를 터뜨리며 웃기도 하고 주인공이 나누는 대화를 타고 미끄러지면 반짝하고 품은 빛을 들키기도 한다

 

231 우리에겐 사랑, 어른들에게는 날벼락 ...우리 편이 되어주세요/ 제니, 주노

 

233
중학생이 아이를 가진 발칙한 미성년 부부 제니, 주노 
결혼, 출산, 모두 적령기를 따지는 세상인데 사랑은 신기하게도 적령기가 생각하는 이의 나이를 따라 자란다. 20살에는 막 피어나는 꽃 봉오리 같은 지금이 사랑의 적령기라 생각하고, 30살에는 배려를 모르고, 사랑의 의미를 모르는 풋내 나는 스무 살 보다 사회생활도 하고 첫사랑의 이별도 겪어본 지금이 사랑의 적령기라 생각하고, 마흔 살에는 또 그 나이대로 인간에 대한 애정이 가득한 부부애건 혹은 원숙미 넘치는 비혼자의 연애이건 자신의 나이가 사랑에 적당한 나이라는 생각을 한다.

 

지금 자신의 상태가 최적의 시기라고 생각하는 나를 따라다니는 감정이 사랑이다. 우리는 우리 보다 어린 사람들의 외모를 탐내면서도 그들의 사랑은 불신한다. 아직 인생을 모른다면서.

 

237
게다가 섹스를 넘어 임신이라면제니주노는 그 뜨거운 감자를 입에 물고 말도 못하고 뱉지도 못하는 영화다. 게다가 제니주노는 10대의 임신 이라는 화제를 다루는 태도 역시 착하지 않다. 10대 임신을 동갑내기 과외하기의 과외나 어린 신부의 조혼처럼 홈 코미디 같은 수위의 해맑음으로 까르르 웃어댄다. 그리고 사랑스러운 남녀 주인공들이 스스럼 없이 입을 맞추고 한 점 구김 없이 팬티 바람으로 거울을 보며 부른 배를 신기해 한다.

 

부모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사랑을, 반성도 고민도 없이 버릇 없고 생각 없는 못된 송아지가 되어 보여준 셈이다. 그러니 보지 말자는 지탄, 청소년에게 절대 보여줘서는 안 된다는 욕을 가득 가득 받았다. 나도 이 영화 안타깝다. 어린애들이 아이를 가지면 안 되지 거드는 마음이었다.

 

238
용감한 카피를 썼다 참으로. 어른들에게는 날벼락 우리에게는 사랑이라고 압축한 이 영화의 줄거리 뒤에 덧 붙였다 ...우리 편이 되어주세요.

 

239
성장을 완결한 어른이란 모자란 것, 짧은 것, 작은 것들을 지키고 보호해야 하는 사람이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 누군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 그 확신만 있다면 세상은 살만한 것이 아닐까. 아이들은 자란다. 그 아이들이 부모가 된다. 아이들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가장 값진 선물은 절대 지켜야 하는 유리같은 순결일까 아니면 인생이 너희 편에 서 있다는 믿음일까.

 

243

기억하세요?

당신에게 처음으로 사랑이 찾아왔던 순간을

어느 날 잠시 스친 눈빛이 가슴에 꽂혀

끝 모를 그리움으로 밤을 뒤척이던,

종일 만나는 모든 얼굴들이 그녀가 되고, 그가 되어

보내지도 못할 편지를 수십 번 썼다 구겨버리던,

우연히 그의 뒷모습이라도 만나지면 마냥 가슴이 뛰어

그의 웃음 한 번에 세상을 다 가진 듯 마음이 하늘로 오르던

그 눈부신 시간들을 기억하십니까?

 

어쩌면 일상에 지쳐 잊었을지도 모를,

아니 아직 미처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를,

가장 아름다운 시간들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내 마음의 풍금>카피, 윤수정

 

우리가 첫사랑을 생각할 때 그 모든 서툼 속에서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 카피를 보면 지금도 내 마음은 스물 아홉의 그날 밤처럼 콩닥 거린다. 보도자료 반응이 좋아서 서문에 이렇게 긴 카피를 넣는 것은 나름대로 하나의 유행이 되었다

 

245
그녀가 말했다 
나는 내가 싫어 나조차 다니지마 나한테 전화 하지 말고 나한테 선물도 주지마 나 기다리지도 마

 

나는 활짝 웃으면서 대답했다 
나 좋아해 주지 않아도 돼. 나 못 본 척 해도 돼. 사랑하니까 괜찮아

 

그녀가 울었다 
나 너한테 줄게 아무것도 없어. 네가 나한테 준 사랑 돌려줄 수도 없어. 네 곁에 있어 줄 수도 없어. 너한테 받기만 하고 영원히 떠날 거야.

 

나는 떨리는 입술로 웃으며 대답했다
내 걱정 하지마. 잠깐이라도 상관없어. 네가 떠나고 내 가슴이 부서진 대도... 
사랑하니까 괜찮아

 

<사랑하니까 괜찮아> 네이밍 스토리

 

246
"
이건 10년 짜리 포옹, 이건 10년짜리 키스, 하루를 10년처럼 사랑해 줄게" 라는 메인 포스터의 카피도 10대와 시한부의 느낌이 잘 묶였다는 평을 받았는데 영화는 오래 상영되지 못했다.

 

248
그해 겨울 눈물 같은 첫눈이 세상을 덮었다

 

나라야마라는 산이 있었습니다 
너무나 힘들 던 시절 
일할 수 없는 노인들은 그 곳에서 마감되었습니다 나는 올 겨울에 나라야마에 갈 거다
어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겨울이 오고 있습니다 
어머니를 업고 
한 걸음, 한 걸음 
낙엽을 헤 치고 걸어 갑니다 
길은 먼데 왜 시간은 빠른지... 
하지만 길의 끝까지 나는 가야 합니다 
입술을 깨물며 그곳까지 가야 합니다 
그리고 가슴 가득 고인 슬픔을 꾹꾹 눌러 담고 돌아와야 합니다 
다시 삶 속으로....

 

슬픔으로 빚어진 산
나라야마 부시코

 

<나라야마 부시코> 보도자료 서문

 

250
처음 바다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생겼습니다 
아직 만나지 못한,

 

당신 덕분에 여기서 일할 수 있습니다 
결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곳 사람들은 모두 친절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가장 친절합니다

 

잊어버리지 않도록 보고 있는 사이
당신을 좋아하게 됐습니다

 

당신을 만나면 꼭 묻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강재 씨....
당신을 사랑해도 되나요?

 

<파이란> 예고편

 

252
당신은 이런 남자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헐렁한 기지바지 
주름이 잔뜩 간 구식셔츠 
이마 한 구석 일회용 반창고가 떠날 날이 없는 상처투성이의 남자,

 

노상방뇨로 얼룩진 담벼락과 
연탄재가 폴폴 날리는 남루한 시장 통이 그의 일터입니다

 

관리하던 비디오 가게는 열흘 구류를 살다 날려버리고 
슈퍼마켓 아줌마의 빛을 받아내러 큰소리치며 나가지만 
여린 마음에 오히려 아줌마에게 머리털을 잡혀 망신을 당하는
오락실 아저씨를 협박해 동전을 뜯어내고 인형 뽑기로 하루를 때우며
조카같은 소년들에게 빨간 비디오를 찔러주는 삼류양아치 이강재

 

당신은 그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녀는 그를 사랑했습니다 
파이란,

 

단 한번 고백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
한 번도, 사랑이라 불리지 못한
그녀의 이름입니다

 

<파이란> 전면광고

 

253
파이란의 강재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와 대칭 점에 서 있다. 그는 나를 더 나쁜 사람이 되게 만드는 남자다. 그러나 파이란은 강재의 사진 한 장만으로 그를 남편이라 생각하고 그를 아낌없이 사랑한다. 배터맨이 되게 하는 고백까지만 발을 뻗는 나에게 파이란은 진짜 사랑은 그러므로가 아니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고 미소를 지으며 속삭인다.

 

254
D
라인 그녀, 한나....이상하게 정이가네?

 

169cm 95kg, k1이나 씨름판에 나가도 거뜬할 체격을 가진, 그러나 한 남자에게 사랑 받고 싶은 여린 마음의 소유자 한나(김아중 분), 신이 그녀에게 허락한 유일한 선물인 천상의 목소리로 가수를 꿈꾸지만 미녀 가수 아미의 립싱크에 대신 노래를 불러주는 얼굴없는 가수 신세다. 생계를 위해 밤에는 폰팅 알바까지 뛰어야 한다. 쉴틈없이 혹사 당하는 목. 그러나 정작 가장 괴로운 건 그녀의 마음이다. 아미의 음반 프로듀스이며 그녀의 음악성을 인정해 준 유일한 사람 한상준 (주진모 분) 남몰래 사랑하게 된 것. 짝사랑에 몸 달아 하던 그녀, 드디어 꿈에 그리던 그의 생일파티에 초대받고 들뜬 마음으로 한껏 멋을 부리고 나타나는데... 그런데 그날 밤 이후 거대한 그녀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s라인 미녀 제니.... 희한하게 매력 있네?

 

169cm 48kg, 뽀샵으로 그려도 힘든 완벽한 s라인 몸매의 소유자 제니. 한나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음반활동을 중단하게 된 아미의 공백을 멋지게 메꾸어 줄 상준에게는 그야말로 구세주다. 교통사고 당한 사람이 넋을 놓고 쳐다보다가 병원 가기를 잊을만큼 황홀한 미모의 그녀는 고맙게도 노래 실력까지 사라진 한나만큼 되어주신다. 그러나 떨이로 파는 생선에 환장하고 넘어진 자장면 배달 보이의 빈 그릇을 친절히 추워 주며, 예쁘다는 말에 눈물까지 글썽이며 감동하고, 남이 먹다 남긴 것도 거침없이 추워 먹는 등 희한한 엽기 행각을 벌인다. 이상할 만큼 착한 미녀 제니, 이 모든 상황을 유혹과 질투의 눈으로 바라보는 라이벌 아미는 점점 자신의 입지를 위협하는 제니의 존재에 위기감을 느끼고, 독특한 미녀 제니의 뒷조사를 한다. 과연 그녀의 s라인 뒤에 숨겨진 살 떨리는 비밀은 무엇일까?

 

미녀는 괴로워 시놉시스

 

256
7
살 당신과 결혼 하고 싶었습니다 
17
당신에게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이제는, 당신이 떠날까봐 눈물납니다...

 

35, 너로 인해 종일 웃음이났다 
45,
네 걱정에 밤마다 잠을 설쳤다 
지금은, 네가 밟혀 속으로 운다...

 

<가족> 와이드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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