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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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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16일 22시 16분 등록

아날로그형 인간


2015. 3. 16


며칠 전 SNS서비스 라인과 만년필 회사 라미의 콜라보 버전 만년필이 출시되면서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출시일에 맞춰 오프매장 문이 열리길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사재기 열풍까지 불었다. 한정판이란 소문이 돌면서 빚어진 해프닝이다. 해당 업체에서도 깜짝 놀랐을 것이다. 온라인 판매를 한다느니 안한다느니 풍문이 무성하더니 온라인 판매를 시작하면서 오프라인과 함께 구매수량까지 제한하고 나섰다. ‘대단하다’ 싶다가 이내 ‘신기하다’ 싶었다. 21세기 대명천지에 고리타분한 구시대 물건이 아직도 굳건히 살아 있는 것도 그랬고, 이제 이걸 어디다 쓰나 싶은 물건에 열광하는 신세대가 더 그랬다. 바야흐로 “와! 대단하다.”


이렇게 품귀현상이 일어나는 제품의 면면을 좀 살펴보자. 플라스틱 허접한 만년필이다. 천연수지로 만든다는 명품 수제 만년필의 그런 플라스틱이 아니다. 금으로 만든 촉 따위는 더더욱 아니지. 단지 칼라가 양판 되던 것과 차별되고, 팬 클립에 달수 있는 캐릭터 액세서리가 추가되었을 뿐이다. 지금도 만년필 커뮤니티에선 판매처의 재고 현황이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구매기가 실시간으로 공유되고 있다. 5만원 남짓한 이 요상한 물건이 도대체 무엇이건데 이 난리 통이란 말이냐! 마케팅 꼼수에 당한 것이라고만 하기엔 설명이 궁하다.


나는 만년필을 좋아한다. 내가 다시 만년필을 사용하게 된 것은 십수년쯤전 후배녀석이 잉크가 말라붙어 떡이 된 것을 내 집에 버리고 가면서 부터다. 파카 소네트였는데 별 기대 없이 며칠 물에 담가놓았더니 묵은 잉크들이 떨어져 나가면서 말끔해졌다. 잉크를 채우고 종이를 긁어보니 잉크가 묻어나온다. 서걱거렸지만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이때부터 이 녀석은 다이어리에 찰싹 붙어 다녔다. 언제부턴가는 배럴에서 새는 것인지 피드에서 새는 것인지 잉크가 스며나오지만 여직 종이에 잉크 칠을 하면서 살아 있다. 그사이 촉이 ‘길’이 들어서 손에 딱 맞게 되었다. 말인즉슨 ‘내 것’이 된 것이다.  


사실 요즘 일상에서 만년필을 써야 할 일이 그리 많지 않다. 사인이라도 자주 해야 할 위치라도 되면 모를까 일기나 일정 따위 끄적거리는 정도라면 더더욱 만년필 따위가 필요할리 없다. 컴퓨터나 디지털 장비들이 수두룩하고 애써 육필을 써야 한다거나 쓰고 싶다고 하더라도 비싸고 번거롭고 불편한 만년필을 써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 많은 사람들은 다시 만년필에 열광하는 것일까?


글을 단 몇 줄이라도 써 본 사람은 알게되는 것이 있다. 컴퓨터로 쓸 때와 육필로 쓸 때 글이 달라진다는 것 말이다. 때문이었을까! 육필원고를 고집한 작가들이 몇 있다. 

최인호는 육필로 원고를 쓰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만년필 튜브에 잉크를 듬뿍 집어넣고 쓰는 방법보다는 마치 옛날의 펜족처럼 일일이 잉크를 찍어 쓰는 방법을 좋아한다. 원시인이 되어서 그런지 무릇 글이란 거미의 구멍 속에서 빠져나오는 거미줄처럼 만년필촉을 통해 흘러나오는 문장을 통해서 완성될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문단에서 소문난 악필이었지만 그는 암투병 중에서도 육필의 수고로움을 감내하면서 원고를 썼다.


조정래는 “문학이라는 게 농밀한 언어로 써야 하는데 기계로 쓰다보면 속도가 빨라지고 쓸데없이 문장이 길어지게 된다.”며 평생 펜으로 작업할 것이라고 했다.


김훈은 “연필로 쓰면 내 몸이 글을 밀고 나가는 느낌이 든다. 이 느낌은 나에게 소중하다. 나는 이 느낌이 없으면 한줄도 쓰지 못한다.”고 고백했다.

그들에게 몸을 움직여 종이에 녹여내는 행위는 신성한 의식이다. 체혈 호스를 타고 빠져나오는 선혈처럼 그들의 몸에서 펜을 타고 내려와 원고지를 적시는 피가 글이 되었다.


곳곳에서 아날로그 열풍이 만만치 않다. LP가 다시 복각되고, 필사가 유행이며, 가죽공예, 목공예를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진공관으로 음악을 듣고, 흑백사진을 즐긴다. 책을 읽고 손편지를 쓴다. 사람들이 아날로그로 돌아온다. 나는 이런 현상을 디지털 속도에 잃어버린 우리들의 원형을 되찾기 위한 본능의 발로라고 생각한다. 이런 움직임은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디지털을 이용하여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비용과 노력으로 증식되고 유통된다. 


며칠 전 제법 그럴싸한 만년필을 하나 샀다. 난생 처음 내 돈으로 산 만년필이다. 지구를 이잡듯이 뒤져서 샀다. 온 지구를 뒤져서 산것이지만 기운 빠지게도 아직 대구를 직할시라고 쓰는 서울의 신사분이 가지고 있던 것이다.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다. 출장에서 돌아온 늦은 밤 책상위에 놓인 작은 택배박스가 집나간 마누라 돌아온 것 보다 반갑다. 늘어져 떡이 되었던 몸에 엔돌핀이 꽐꽐 솟아난다. 엄숙하고 고요하게 박스를 열었다. 도톰한 목선이며 쭉 빠진 엉덩이며 고이 감춘 황금 빛 속살에 눈이 부시다. 아! 아름답구나. 너 멕이려고 사 놓은 잉크를 따고 부드러운 융으로 너를 더듬어 잉크를 듬뿍 먹였다. 사각사각 미끄러져 나가면서 뽑아놓은 선혈이 네 것이냐, 내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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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7 20:27:07 *.255.24.171

그 만년필 보고 싶네요.

나도 만년필로 쓰면 글 좀 더 잘 쓸 수 있을까?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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