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승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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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민 은행의 탄생
방글라데시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인 그라민 은행(Grameen Bank)이 있다. 이 은행의 설립자는 무하마드 유누스(Muhammad Yunus)이다. 그라민 은행의 시작은 197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6년 당시 방글라데시에 최악의 기아(飢餓)가 몰아 닥쳤다. 방글라데시의 수도인 다카의 길거리에는 굶어 죽은 사람들이 즐비했고 다른 지역의 사정은 더욱 안 좋았다. 치타공 대학의 경제학 교수로 재직 중이던 무하마드 유누스(Muhammad Yunus)는 자신의 눈앞에서 굶어 죽는 사람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게 된다. 그는 당시 자신이 받은 충격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죽는 데에도 여러 방식이 있지만, 굶어서 죽는 것처럼 끔찍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이 굶어 죽는다는 것은 죽음이 매초 매초마다 조금씩 다가와, 결국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없어지는 것을 말한다. 어느 한순간 삶과 죽음은 서로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땅바닥에 서로 껴안은 채 웅크리고 있는 어머니와 자식이 우리와 같은 세상 사람들인지 아니면 이미 다른 세상으로 떠났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죽음은 너무도 조용히 다가와, 과연 언제가 그 때인지 알기가 힘들다.
이 모든 비극은 한 줌의 양식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을 멀지만, 죽은 이 남자나 저 여자는 그러지 못하였다. 아이가 울지만, 결국 젖을 먹지 못한 채 잠이 들어 버린다. 아마도 내일이면 아기는 울 힘조차 없을지 모른다.
나는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모든 문제에 해답을 제공하는 경제학 이론을 가르치면서 보였던 그 열성을 기억한다. 나는 이론이 가진 아름다움이며 조화에 감타하곤 했다. 그리고선 이 모든 이론에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길바닥에선 사람들이 굶어 죽고 있는데, 도대체 경제학 이론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는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로 결심하고 치타공 대학 주변의 조브라 마을을 돌아 다녔다. 그는 한 사람이라도 도울 수 있기를 바랐다. 마을을 돌면서 그는 주민들이 어떻게 살고 있으며 자신이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생각했다. 마을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유누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됐다. 그가 만난 마을 사람 중에 수피아 베굼이라는 20대 여성이 있었는데, 그녀는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빌려 대나무를 사고 하루 종일 대나무 의자 하나를 만들었다. 의자가 완성되면 돈을 빌려준 고리대금업자가 그 의자를 가져갔다. 하루 종일의 작업을 통해 고리대금업자로부터 그녀가 벌어들이는 돈은 빌린 원금과 이자를 제외하고 남은 50페이사(미국 돈으로 2센트에 해당)였다. 하루에 50페이사, 그것이 전부였다. 그녀는 하루 벌어 하루를 겨우 살았고 작은 돈도 모을 수 없었다. 유누스는 그녀가 가여웠지만 한편으로는 그녀의 생존 능력에 감탄했다. 그는 ‘만약 그녀가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빌리지 않고 대나무를 구입할 수 있다면, 그래서 그 의자를 직접 시장에 내다 팔 수 있다면 그녀는 적어도 최악의 상황에서는 빠져나올 수 있겠구나’하고 생각했다.
유누스는 자신의 제자 한 명에게 조브라 마을에서 수피아 베굼 처럼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빌리는 바람에 매일 열심히 일을 하고도 돈을 모으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조사해보도록 했다. 조사 결과,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빌려 어려운 상황에 빠진 사람들은 42명이었고 이들이 빌린 돈은 모두 합해 856타카였다. 이 금액은 미국 돈으로 따지면 27달러에 해당했다. 문제는 이들이 하루 종일 정말 열심히 일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스스로의 힘으로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유누스는 27달러 때문에 42가구나 되는 사람들이 어렵게 살고 있다는 사실에 기가 막혔다. 그는 42명에게 27달러를 빌려 주기로 하고, 이 사람들이 형편이 되면 그 때 가서 돈을 돌려받기로 했다. 유누스는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단돈 27달러로 42명의 생사여탈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현실에 낙담했다.
유누스는 조브라 마을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줌으로써 그들을 도울 수 있었지만 거기서 만족할 수 없었다. 가난에 빠져 생존을 위협받는 이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이 어려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도록 돈을 빌려 쓸 수 있는 방법을 제도적으로 마련하고 싶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개인적인 차원의 해결책이 아닌 보다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제도권 내에 있는 기관이 가난한 사람에게 융자를 해주는 체제가 필요했고 그가 보기에 은행이야말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최적의 기관이었다. 그는 은행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고 해야 한다고 확신을 갖고 방글라데시에서 가장 큰 은행을 방문했다. 은행으로 하여금 가난한 사람들에게 좋은 조건으로 돈을 빌려 주도록 설득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은행 측은 여러 이유를 들어 그의 제안을 거부했다.
일반 은행들이 봤을 때 가난한 사람들은 ‘상대 할 수 없는 부류’였다. 가난한 사람들은 글을 읽거나 쓸 줄 모른다.(1970년대 후반 방글라데시의 인구 중 75%가 문맹이었고 농촌 지역의 경우 그 수치는 더 높았다.) 따라서 융자와 상환에 필요한 서류들을 작성할 수 없다. 게다가 가난한 사람들의 거의 대부분은 은행에 맡길 담보가 없다. 담보가 있어야 융자가 가능하다는 것이 은행의 규칙이었다. 은행 측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융자를 해주는 사업으로는 은행이 수익을 거둘 수 없다는 점도 문제 삼았다. 유누스는 가난한 사람들은 소액 융자를 통해서 가난을 벗어 날 수 있기 때문에, 은행에서 큰 돈이 아니라 적은 돈을 융자해줄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은행이 평균적으로 융자하는 액수와 비교하면 그가 제안한 소액 융자로부터 은행이 얻을 수 있는 수익은 너무 적었다.
은행의 설명을 들으면서 유누스는 ‘일반 은행의 융자 프로그램은 부자와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은행 세계의 저변에는 ‘가진 자는 가진 것만큼 더 쉽게 가진다’와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앞으로도 가질 수 없다’라는 두 가지 법칙이 흐르고 있음을 발견했다. 유누스는 은행들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그릇된 편견에 빠져 ‘재정적 인종차별’을 자행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은행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유누스는 자신이 직접 가난한 사람들의 여건에 맞춘 여신 시스템을 만들고 이런 시스템으로 작동되는 은행을 설립하기로 결심했다.
1976년 어느 날 42명의 마을 주민들에게 27달러를 빌려준 것이 시작이었다. 27달러로 시작된 유누스의 실천은 3년간의 그라민 은행 프로젝트로 확대되었고, 3년간의 실험기간을 통해 유누스를 포함한 프로젝트에 참여한 사람들은 의미 있는 성공과 발전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드디어 1983년 10월 2일 정식으로 그라민 은행(Grameen Bank)이 설립되었다.(‘그라민’은 ‘농촌의’ 혹은 ‘마을의’이란 의미이다) 그라민 은행은 방글라데시 최초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이자 ‘소액 융자’(microcredit) 은행의 원조가 됐다. 그라민 은행의 목적은 ‘빈민구제’였는데, 유누스의 표현을 빌리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가난을 지구로부터 몰아내는 것’이다. 무하마드 유누스는 그라민 은행이 추구하는 목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2050년이 되면 전세계가 마침내 가난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지구상의 그 어느 누구도 가난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기를 바란다. 그 때가 되면 ‘가난’이란 말은 의미를 상실하고, 다만 역사적 의미로만 존재했으면 하고 소망한다. 가난은 박물관에나 전시되는 과거의 유물이 되어 있고, 문명화된 세계에서는 그 어느 곳에서도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다. 그 때가 되면 박물관을 찾은 초등학생들이 이 과거의 유물을 보면서 지난 시대에 창궐했던 끔찍한 모습을 떠올리며 치를 떨 것이다. 그러면서 이 아이들은 21세기 초두에 이르도록 조상들은 어째서 그런 처참한 실행을 그대로 방치했는지 의아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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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인 그라민 은행(Grameen Bank)이 있다. 이 은행의 설립자는 무하마드 유누스(Muhammad Yunus)이다. 그라민 은행의 시작은 197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6년 당시 방글라데시에 최악의 기아(飢餓)가 몰아 닥쳤다. 방글라데시의 수도인 다카의 길거리에는 굶어 죽은 사람들이 즐비했고 다른 지역의 사정은 더욱 안 좋았다. 치타공 대학의 경제학 교수로 재직 중이던 무하마드 유누스(Muhammad Yunus)는 자신의 눈앞에서 굶어 죽는 사람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게 된다. 그는 당시 자신이 받은 충격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죽는 데에도 여러 방식이 있지만, 굶어서 죽는 것처럼 끔찍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이 굶어 죽는다는 것은 죽음이 매초 매초마다 조금씩 다가와, 결국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없어지는 것을 말한다. 어느 한순간 삶과 죽음은 서로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땅바닥에 서로 껴안은 채 웅크리고 있는 어머니와 자식이 우리와 같은 세상 사람들인지 아니면 이미 다른 세상으로 떠났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죽음은 너무도 조용히 다가와, 과연 언제가 그 때인지 알기가 힘들다.
이 모든 비극은 한 줌의 양식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을 멀지만, 죽은 이 남자나 저 여자는 그러지 못하였다. 아이가 울지만, 결국 젖을 먹지 못한 채 잠이 들어 버린다. 아마도 내일이면 아기는 울 힘조차 없을지 모른다.
나는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모든 문제에 해답을 제공하는 경제학 이론을 가르치면서 보였던 그 열성을 기억한다. 나는 이론이 가진 아름다움이며 조화에 감타하곤 했다. 그리고선 이 모든 이론에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길바닥에선 사람들이 굶어 죽고 있는데, 도대체 경제학 이론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는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로 결심하고 치타공 대학 주변의 조브라 마을을 돌아 다녔다. 그는 한 사람이라도 도울 수 있기를 바랐다. 마을을 돌면서 그는 주민들이 어떻게 살고 있으며 자신이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생각했다. 마을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유누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됐다. 그가 만난 마을 사람 중에 수피아 베굼이라는 20대 여성이 있었는데, 그녀는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빌려 대나무를 사고 하루 종일 대나무 의자 하나를 만들었다. 의자가 완성되면 돈을 빌려준 고리대금업자가 그 의자를 가져갔다. 하루 종일의 작업을 통해 고리대금업자로부터 그녀가 벌어들이는 돈은 빌린 원금과 이자를 제외하고 남은 50페이사(미국 돈으로 2센트에 해당)였다. 하루에 50페이사, 그것이 전부였다. 그녀는 하루 벌어 하루를 겨우 살았고 작은 돈도 모을 수 없었다. 유누스는 그녀가 가여웠지만 한편으로는 그녀의 생존 능력에 감탄했다. 그는 ‘만약 그녀가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빌리지 않고 대나무를 구입할 수 있다면, 그래서 그 의자를 직접 시장에 내다 팔 수 있다면 그녀는 적어도 최악의 상황에서는 빠져나올 수 있겠구나’하고 생각했다.
유누스는 자신의 제자 한 명에게 조브라 마을에서 수피아 베굼 처럼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빌리는 바람에 매일 열심히 일을 하고도 돈을 모으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조사해보도록 했다. 조사 결과,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빌려 어려운 상황에 빠진 사람들은 42명이었고 이들이 빌린 돈은 모두 합해 856타카였다. 이 금액은 미국 돈으로 따지면 27달러에 해당했다. 문제는 이들이 하루 종일 정말 열심히 일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스스로의 힘으로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유누스는 27달러 때문에 42가구나 되는 사람들이 어렵게 살고 있다는 사실에 기가 막혔다. 그는 42명에게 27달러를 빌려 주기로 하고, 이 사람들이 형편이 되면 그 때 가서 돈을 돌려받기로 했다. 유누스는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단돈 27달러로 42명의 생사여탈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현실에 낙담했다.
유누스는 조브라 마을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줌으로써 그들을 도울 수 있었지만 거기서 만족할 수 없었다. 가난에 빠져 생존을 위협받는 이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이 어려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도록 돈을 빌려 쓸 수 있는 방법을 제도적으로 마련하고 싶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개인적인 차원의 해결책이 아닌 보다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제도권 내에 있는 기관이 가난한 사람에게 융자를 해주는 체제가 필요했고 그가 보기에 은행이야말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최적의 기관이었다. 그는 은행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고 해야 한다고 확신을 갖고 방글라데시에서 가장 큰 은행을 방문했다. 은행으로 하여금 가난한 사람들에게 좋은 조건으로 돈을 빌려 주도록 설득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은행 측은 여러 이유를 들어 그의 제안을 거부했다.
일반 은행들이 봤을 때 가난한 사람들은 ‘상대 할 수 없는 부류’였다. 가난한 사람들은 글을 읽거나 쓸 줄 모른다.(1970년대 후반 방글라데시의 인구 중 75%가 문맹이었고 농촌 지역의 경우 그 수치는 더 높았다.) 따라서 융자와 상환에 필요한 서류들을 작성할 수 없다. 게다가 가난한 사람들의 거의 대부분은 은행에 맡길 담보가 없다. 담보가 있어야 융자가 가능하다는 것이 은행의 규칙이었다. 은행 측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융자를 해주는 사업으로는 은행이 수익을 거둘 수 없다는 점도 문제 삼았다. 유누스는 가난한 사람들은 소액 융자를 통해서 가난을 벗어 날 수 있기 때문에, 은행에서 큰 돈이 아니라 적은 돈을 융자해줄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은행이 평균적으로 융자하는 액수와 비교하면 그가 제안한 소액 융자로부터 은행이 얻을 수 있는 수익은 너무 적었다.
은행의 설명을 들으면서 유누스는 ‘일반 은행의 융자 프로그램은 부자와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은행 세계의 저변에는 ‘가진 자는 가진 것만큼 더 쉽게 가진다’와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앞으로도 가질 수 없다’라는 두 가지 법칙이 흐르고 있음을 발견했다. 유누스는 은행들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그릇된 편견에 빠져 ‘재정적 인종차별’을 자행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은행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유누스는 자신이 직접 가난한 사람들의 여건에 맞춘 여신 시스템을 만들고 이런 시스템으로 작동되는 은행을 설립하기로 결심했다.
1976년 어느 날 42명의 마을 주민들에게 27달러를 빌려준 것이 시작이었다. 27달러로 시작된 유누스의 실천은 3년간의 그라민 은행 프로젝트로 확대되었고, 3년간의 실험기간을 통해 유누스를 포함한 프로젝트에 참여한 사람들은 의미 있는 성공과 발전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드디어 1983년 10월 2일 정식으로 그라민 은행(Grameen Bank)이 설립되었다.(‘그라민’은 ‘농촌의’ 혹은 ‘마을의’이란 의미이다) 그라민 은행은 방글라데시 최초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이자 ‘소액 융자’(microcredit) 은행의 원조가 됐다. 그라민 은행의 목적은 ‘빈민구제’였는데, 유누스의 표현을 빌리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가난을 지구로부터 몰아내는 것’이다. 무하마드 유누스는 그라민 은행이 추구하는 목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2050년이 되면 전세계가 마침내 가난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지구상의 그 어느 누구도 가난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기를 바란다. 그 때가 되면 ‘가난’이란 말은 의미를 상실하고, 다만 역사적 의미로만 존재했으면 하고 소망한다. 가난은 박물관에나 전시되는 과거의 유물이 되어 있고, 문명화된 세계에서는 그 어느 곳에서도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다. 그 때가 되면 박물관을 찾은 초등학생들이 이 과거의 유물을 보면서 지난 시대에 창궐했던 끔찍한 모습을 떠올리며 치를 떨 것이다. 그러면서 이 아이들은 21세기 초두에 이르도록 조상들은 어째서 그런 처참한 실행을 그대로 방치했는지 의아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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