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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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잊을 수 없는 장면,
나는 한 달간 그곳에 있었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언제나 해가 뜨기 전에 깨었고 해가 진 다음에 자리에 들었다. 나는 하루 종일 바다를 바라보았다. 해변에 앉아 바다가 시간에 따라 변해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곳에 올 때 작은 가방을 하나 들고 왔다. 그 속에는 두 개의 속옷이 들어 있었고 긴 팔 남방이 두 개 들어 있었고 바지가 두 개 들어 있었고, 두개의 양말이 들어 있었다. 치약이 하나 칫솔이 하나. 그리고 노트북이 있었다. 방을 구하는 데 쓰고 난 다음 내 지갑 속에는 천 원짜리 27장과 만 원짜리 4장이 들어 있었다. 나는 하루에 천원으로 살았고 토요일만 만원을 썼다. 토요일에는 소주를 한 병을 샀고, 쌀과 반찬을 조금 샀다. 내 방안에는 아무 것도 없다. 요 하나와 작은 베게 하나와 얇은 이불 하나, 그리고 작은 앉은뱅이 밥상 겸 책상이 하나 있다. 이것이 전부다.
바다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곳이다. 특히 이곳 바다는 오랫동안 보아 둔 곳이었다. 긴 백사장이 있고 그 한 쪽 끝에는 내가 늘 올라 가 멀리 수평선을 바라 볼 수 있는 작은 누각이 있다. 나는 저녁이면 대청처럼 그곳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날이 저물어 가는 것을 음미했다. 저녁은 그 특유의 평화로움으로 지고 있었다. 해안의 다른 한 쪽 끝에는 꽤 신기한 모양을 갖춘 바위들이 늘어서 있어 그곳에 앉으면 파도가 부서져 흩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간혹 바위에 부딪혀 솟구 친 파도의 포말이 내 발끝까지 쳐 오르면 나는 얼른 몸을 움직여 피하곤 했다. 그건 내가 키우던 개와 놀던 몸놀림과 비슷했다. 나는 한 달 동안 바다와 파도와 바람과 장난을 치곤했다.
간혹 강한 바람과 비가 몰아쳤다. 파도가 높게 몰아쳐 웅장한 소리를 질러대면, 나는 웃통을 벗고, 바다로 나갔다. 마치 영화 ‘쇼생크 탈출’의 포스터처럼 나는 쏟아지는 비 속에 두 팔을 벌리고 흰 백사장에 서 있었다. 원없이 폭우를 맞는 것은 오랫동안 내가 바랐던 장면이었다. 폭우 속에서 나는 눈을 뜨고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 장울 들을 보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눈을 뜰 수 없다. 이내 빗소리와 파도 소리와 온몸에 느껴지는 빗방울 속에서 나는 돌연 바닷가 모래밭에서 불현듯 솟아 오른 나무처럼 두 팔을 벌리고 서있다. 비가 내리면 내 영혼이 쑥쑥 자라리라. 비가 그치고 햇빛이 나면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리라. 그런 기대는 늘 나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비가 그치고 나는 동쪽으로 난 창문을 열어 젖혔다. 싱싱한 바람이 불어 들고 나는 밥을 차렸다. 밥 반공기와 김치 한 사발 그리고 아침에 내가 소금을 조금 넣고 끓인 배추국이 전부다. 그동안 너무도 많이 먹었다. 나는 바닷가에서 아주 소박한 한 달을 지냈다.
2014년 9월 1일부터 9월 30일은 이렇게 지나갔다. 나는 언제나 미래의 시간을 과거로 인식하는 훈련을 해 왔다. 미래는 이미 벌어진 것이며, 나는 미래를 회상한다. 이것이 내가 미래를 만들고 창조해 가는 방식이었다. 이 해는 내가 환갑이 되는 해의 가을이 시작하는 때였다. 나는 그해 가을을 이렇게 맞았다. 그것은 일종의 죽는 연습이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는 연습이기도 했다.
나는 매우 싱싱해졌다. 바다는 그동안 내 속의 썩고 더러운 것들을 파도쳐 가져갔다. 모든 더러운 것들을 품고도 여전히 초록빛으로 푸른 것이 바다였다. 바닷가에서 보낸 한 달의 생활, 지극히 소박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휴일에 술을 한 잔 하는 것은 그 이후 내 인생의 가장 기본적인 바탕이 되었다. 그것은 내 인생 후반을 대비한 중요한 의식(儀式)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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