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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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잘 쓰던 사람이 손을 놓고 있는 경우를 가끔 본다. 그들에게는 열심히 글을 쓰던 시절이 있었고, 언제고 자기가 글을 잘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글을 쓰고 있지는 않다. 개중에는 열심히 관련강좌를 쫓아다니는 사람도 있고, 일상에 떠밀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되씹기만 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잘 쓰든 못 쓰든 꾸준히 쓰는 편이지만, 어쩌다 사나흘씩은 블록block에 갇힐 때가 있다. 그럴 때 내 안을 들여다보다가 세 가지 이유를 발견했는데, 혹시 다른 분들에게도 참고가 될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제일 큰 이유는 ‘나를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 아닐까. 뭐 대단한 것을 숨기고 있어서가 아니다. 3년 넘게 일을 않고 있으니 당연히 경제가 빽빽하다. 그런데 경제적인 곤궁에서 파생되는 장면이 부지기수다. 궁핍할수록 사물의 가치가 도드라져 작은 일의 의미가 증폭된다. 쇼핑이나 외식처럼 궁핍한 날에 누리는 호사의 맛이 진국이다. 아이들의 알바수입이 내 비정규직 수입을 넘어 서면서 일어나는 감정적 추이도 만만치 않다. 경제난이라는 커다란 문제가 다른 여러 가지의 사소한 문제를 모조리 덮어주기도 한다. 그런데 곤궁함이 드러날까봐 이 많은 글감을 사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나이 들어가는 데 대한 공포, 성장한 아이들과의 미묘한 긴장, 헛헛함, 식탐도 마찬가지다. 내 옹색함이 드러나는 것이 싫어서 이리저리 제껴 놓다 보면 쓸 것이 없다. 설령 쓴다고 해도 감출 것 감추고 적당하게 편집한 글에 맛이 날 리가 없다. 자연히 글쓰기에서 멀어지는 것은 시간문제?
두 번째 이유는 ‘남들보다 더 잘 써야 한다는 강박감’이 주범이지 싶다. 오늘로 6기 연구원 레이스가 끝나는데, 글을 잘 쓰는 분들이 많다. 이제껏 지켜본 바에 의하면 레이스 중의 퀄리티가 계속 유지되는 것은 아니더라만^^, 그래도 선배로서 평이한 글을 올리기 찜찜할 때가 있다. 이런 기분, 글쓰기에 치명적이다. 자기기준이 높을수록 글쓰기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난 나야! 나는 내식대로 글을 쓸 권리가 있고 그걸 즐길 거야!” 하는 뱃심이 필요하다.
‘모든 글을 순수한 창작’으로 생각하는 태도도 걸림돌이 된다. 논픽션보다는 순수문학에 뜻을 둔 사람 중에 이런 경향이 더 심할 것 같은데, 글이라는 것을 백프로 내 안에서 샘솟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책상 앞에 좌정하고 오롯이 내 안에서 언어를 길어 올리려다 잘 안 되면 좌절하고 만다. 그런데 이 세상에 순수한 내 것이 어디 있는가. 시냇물이 바위에 부딪쳐 소리를 내듯이, 우리도 무언가에 촉발되어야 감흥이 나온다. 앞서 걸어간 사람들이 던져 놓은 질문과 해답에 힘입어 내 의견을 만들어 간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을 참고하거나 모방하는 것을 거리낄 이유가 없다.
강준만은 ‘포스트모던 시대의 저자란 ‘편집자’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 고까지 말한다. 처음부터 자신이 모든 것을 다 만들어내겠다는 과욕에서 고통이 비롯된다는 것이다.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에 어떤 저작물이 나와 있는지 두루 살펴보고, 그것들을 창의적으로 재해석하여 새로운 가치를 조금 보탤 수만 있어도 성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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