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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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때 잘 나가는 학원의 원장이었다. 소읍이어서 그랬겠지만 나의 행보가 곧 읍의 수준을 높이는 일이었다. 남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남들보다 한 발 먼저 행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것이 설령 ‘영어뮤지컬’ 같은 유치부 프로그램을 도입하거나, 좌석 700석의 지역문화회관에서 학습발표회를 여는 일처럼 단순한 일일지라도 내게는 그랬다. 그것은 그 지역에서는 아무도 밟아 보지 않은 땅이었다. 오직 나의 정보망과 판단에 의해서 내가 기획한 일이 성공할 때의 기분은 최고였다. 원생 400명을 점찍어 보았다. 유치부 70명, 초등부 330명이었다. 보통 학원이라는 곳이 수시로 희망자를 접수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데, 나는 수업 진도를 맞추기 위해 3월과 9월에만 신입생을 받았다. 신학기면 대기하고 있던 원생들이 수십 명씩 몰려 왔다.
그 전성기는 오래 가지 않았다. 소읍에 학원이 난립하기 시작해서 그야말로 일주일에 하나씩 학원이 생겨났다. 좁은 바닥의 진흙탕 싸움 속에서 승부욕 없는 나는 두 손 들고 물러났다. 학원만 안할 수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을 정도로 시달린 끝이었다. 이제 학원을 관둔 지 3년 반이 넘었다. 그동안 잠깐 비정규직을 겸하기도 했지만 주로 읽고 쓰는 일을 했다. 2006년에 2기 연구원을 했고, 2007년에는 연구소에서 발행하는 메일 서비스의 필진이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2008년에는 블로그가 주된 일과였다. 그 때에서야 비로소 나의 관심사를 하나의 주제로 간추릴 수 있었다. 더 이상 나이가 변수일 수 없을 정도로 젊고 다양해진 시대에 여전히 찬밥 신세인 중년을 새롭게 자리매김하는 일! 그것은 나의 삶 그 자체였다.
주제를 가진 지 1년 만에 출간계약이 되어 2009년 12월에 첫 책이 나왔다. 하얀 바탕에 상큼한 녹색 띠지가 세로로 둘러진 나의 첫 책은 사랑스러웠지만, 숨이 막힐 정도로 좋지는 않았다. 당연히 일어날 일이 일어났고, 이제 첫 발을 떼었을 뿐 계속 걸어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했다. 첫 책이 나오자마자 글쓰기강좌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통장에 15,15,15... 수강생들의 입금을 확인하는 순간이 더욱 감격스러웠다. 오랜만의 수입이기도 했지만 일에 대한 자세가 달라진 것이다.
이것이 나의 일이다. 나의 일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지불한 대가이다. 원생이 바글거리던 옛날에는 일이 좋은 줄을 몰랐다. 목 좋고 타이밍 좋아서 잘 나갈 때는 돈 쓰는 재미로 살았고, 가파른 속도로 오그라들 때는 죽지 못해 살았다. 호경기였든 불경기였든 일이 나의 정체성이라는 느낌은 갖지 못했다. 그것이 내가 50대를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흔의 변곡점은 직업상의 변화지만, 쉰의 변곡점은 존재의 확인이다. 수없는 시행착오를 통해 내 입지를 줄이고 줄인 낭떠러지에서 비상하는 것이 이 맛일까. 나는 이제 일의 맛을 안다. 일은 사회 안에서 내가 존재하는 방식이며, 내가 쓸모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통로였다. 일은 이 세상 어느 것보다 좋은 것이다. 이제 성인으로 바뀌었을 뿐 학원 일과 비슷한 글쓰기강좌를 하며 열 댓 명의 수강생에 열광하는 나를 본다. 몇 백 명의 수강생에게서도 느끼지 못했던 책임감과 뿌듯함에 인생의 아이러니를 느낀다. 이 드넓은 세상에서 나를 발견하고 내 강좌를 선택해 준 사람들, 그들이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여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에 짜릿해진다.
글 쓰는 사람은 인생을 몇 배로 산다. 직접 겪으면서 살고, 글로 쓸 때 반추하며 두 번 산다. 거기에 상상의 세계를 현실처럼 생생하게 느끼니 그의 세계는 따따블인 셈이다. 어디 그뿐이랴. 글감을 찾기 위해 감각의 촉을 세워 순간을 음미하는 것은 또 어쩌구? 무엇을 보더라도 글로 쓸 수 있을지 생각하느라 천천히 맛보고 두 번 세 번 머리에서 굴려 본다. 벚꽃비 흩날리는 것을 단단히 눈에 새겨 넣었다. 바람이 쏴아 하고 불 때마다 작은 꽃잎들이 천천히 팔랑이며 떨어졌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는 듯, 살아있어 다행이라는 듯 내 머리 위에 꽃잎 세례가 축복처럼 주어졌다. 연분홍 손톱 같은 꽃잎이 도로 한 편에 수북이 쌓여 있다가 조그만 바퀴가 되어 팽글팽글 온 몸으로 굴러 갔다.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정말 사는 것처럼 살아보고 싶어! 나는 무엇인지 그립고 아련하여 한참을 못 박힌듯 서 있었다. 그 장면은 사진처럼 각인되어 나는 언제고 그 장면을 불러올 수 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나를 닮아 어리버리하고 감성적인 아들과 똑 소리나게 현실적인 딸과 사는 요즘이 꼭 신혼살림 하는 것처럼 재미있는데, 이 또한 내가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과 자부심이 없었다면 도달하지 못했을 지점이다. 글쓰기를 통해 계속해서 나와 주위를 들여다보는 성찰지능이 훈련되고, 지속적으로 커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붙은 덕분이다. 이것이 없었다면 나는 그저 서서히 쇠퇴해 가는 일 밖에 하지 못했을 것이다. 종래의 중년이 그랬던 것처럼.
책이 나온 후 첫 번째 강의 제안을 받았다. 이대 여성병원에서 환자와 가족, 방문객을 위한 프로그램이다. 우선은 3회에 불과하지만 스타트를 잘 해서 계속 인연을 맺고 싶다. 직간접적으로 접한 ‘질병’이라는 경험이 글쓰기를 시작하기에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신촌에 내 글쓰기 강좌를 위한 공간을 마련했다. 20여 명이 들어갈 만한 작은 곳이지만 너무 좋다. 이곳에서 주로 내 강좌를 하지만 더러 지인들을 불러 특강을 하기도 한다. 자주 만나지는 않지만 서로의 기질을 속속들이 이해하기에 언제 봐도 편안한 사이, 누구에게 소개해도 자랑스러운 존재, 그저 친밀감이 아니라 서로의 일을 도와주며 성장을 촉구하는 사이...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知己이다. 친구이자 스승이 될 수 있는 지인들과 계속 커 나가는 내가 참 좋다.
앞의 것은 사실이고 뒤의 것은 앞으로 이루어질 사실이다.^^ 미래의 모습을 분명하게 그려놓고 한 발 한 발 걸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도 글쓰기에서 얻은 능력이다. 내가 목표한 것을 얼마나 이루는지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고 그 결과를 또 책으로 쓸 것이니 할 일 많아 좋다. 목표는 분명하되 미래만을 위해 살지는 않는다. 마음에 드는 글 한 편을 쓴 날은 마냥 행복하다. 많은 것을 가지고도 만족하지 못해 허허로웠던 예전에 비하면 얼마나 달라진 모습인가. 이것이 삶의 혁명이 아니고 무엇이랴.
@ 글쓰기강좌를 하고 있습니다. 5월 강좌 접수중입니다.
http://cafe.naver.com/writingsutra

마치 제 글에 댓글을 달아 주어서 나도 다는 것처럼 보이네요..ㅎㅎ
별로 재미없어도 꾸준히 '재미있는 전략이야기' 올리면 솔솔 조횟수가 올라가는 것이 보입니다.
그런 글도 그럴진데, 진짜 진솔한 글을 쓰는 명석누님이야 덜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저도 언젠가는 글 쓰기 강좌에 반드시 등록할 겁니다. - (명석누님도 나중에 전략 강의 들어 보실랍니까?)
다들 '눈물 젖은 털'을 질근질근 씹어 봐야 진짜 인생의 맛을 알게 되지 않을까요....^^
참, 이 봄 다 가기 전에 남도 여행 다녀오세요. 팍팍한 다리로 직접 훑으며 다니시면 더욱 맛이 날 듯...
남원에 가면 '춘향골 마당'이라는 큰 공원이 있는데
거기 뉴욕이라는 커피점에서는 제법 향기 그윽한 아메리카노를 드실 수 있습니다.
그거 한잔 드시고 춘향이가 탔다는 그네도 타 보세요....
혹시 알아요? 시공간을 망각한 이도령이 어디서 훌쩍 나타날지도 모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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