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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월 13일 06시 30분 등록
오랜만에 화실에서 왔다.

책 읽고 정리해야 한다고 빠지고, 시골집에 다녀와야 해서 빠지고, 연말이라고 친구랑 모임해서 빠지고, 이래저래 핑계만 갖다 대니 그림 그리는 것은 멀리 있었다. 어제도 날씨 춥다고, 감기 걸렸으니 집에서 그리자고 빠질까 했는데, 전화가 왔다. 화실 도우미의 전화다. 그나마 다행이다.

오랜만에 화실에 와서 그런지 적응 안된다.
딱히 그리고 싶은 것 없다. 뭘 어떻게 그려야 할지 모르겠다.
아니. 이건 아닌 것 같다. 적응이 안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그리고 싶은 게 없다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니다. 하여간 화실에 들어서면 그리고 싶은 것은 저 멀리있다. 내가 그릴 수 있는 것과 그리고 싶은 것과의 거리는 너무나 멀다. 그 사이에서 뭘 그려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손에 쥐고 있는 재료의 한계도 있고 말이다. 이런 것은 이렇게 그린다는 법식도 있는 것이고. 그 틀 먼저 생각하면 그릴 게 없다.

요근래 본 2권의 책 [동양화 읽는 법], [동양화 구도론]은 아름다움에 흠뻑 빠지게 했다. 동양화 읽는 법에서는 물고기가 자유롭게 노는 것을 보았다. [동양화 구도론]은 아름다운 산수 속에서 놀고 싶게 만들었다. 그리고 드넓게 펼쳐놓은 청나라 때의 풍경을 보았다.
화가들은 어떤 심정으로 그것들을 그렸는지 궁금해졌다. [동양화구도론]에 나온 그림들은 대작이 많아서, 그것을 바라보는 동안, 그리는 데 상당히 오랜 시간을 걸렸을 거란 것과 공을 많이 들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묘사력이 괜찮아지면 나도 그런 그림 그려보고 싶다.

화실에 도착한지 30분이 지나도록 화집만을 뒤적거린다. 연습할 책을 정해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생님과 얘기해서 내가 그리기에 적당한 것을 골라잡아서 따라서 그리는데, 이번에도 어느 것을 그려야 할지 모르겠다. 연필로 그려야한다는 제약 조건을 두면, 그 중에서도 참고할 화집은 더 줄어든다. 소묘집이 몇 개 있고, 고전 화가들의 작품이 실린 화집이 있다. 그림들은 모두 밋밋해 보인다.

화집을 한 장씩 넘기면서 하나라도 내 마음을 사로잡아 주길 바랬는데 그러질 않는다. 우선은 바탕이 검은 색인 것들은 대부분을 제외시켰다. 바탕이 검은 것은 고생한 경험이 있어서 선뜻 마음이 가질 않는다. 연필로 그 넓은 면을 모두 칠하려면 갑갑해서 죽을 것만 같다. 보이는 것만큼, 원하는 만큼 검게 만들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화집에 나온 그림들은 대부분이 바탕이 검은 것들이다. 고전화가들의 작품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인물화는 특히 더 그렇다. 인물의 얼굴을 살리기 위해서 어두운 바탕을 이용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 같은 분위기를내는 그림들 뿐이다. 어두움에서 뽑아낸 빛이라니.

화실의 마크 선생님은 말씀하신다. 학생들이 자신이 사진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그리면 그림이 재미없어지는 경우가 많단다. 그것은 빛을 잘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사진은 배경도 아웃시켜주지 않고, 화면에 나타나는 것 대부분을 다 밝게 또렷하게 찍어주기 때문에 그것을 보고 그대로 그리면 그림이 밋밋해진다고 하셨다. 그 밋밋하다는 것은 깊이가 없다는 말일 거다. 얼마 전 화실의 한 친구가 그렸던 어린애 그림이 생각났다. 핑크빛이 가득한 밝은 그림이었다. 화실에 그 그림과 비슷한 분위기를 내는 것이 있어서 본인의 것이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했다. 화면이 전체적으로 밝은 화사한 그림이었다. 그 친구는 자신은 취미로 배우는 거라서 연필소묘부터 차근차근 배우지 않아서 깊이가 나오지 않는다고 했었다. 아마도 주제를 부각시키는 배경처리를 하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 같다. 하나씩 뜯어보면 정말 잘 그린 그림인데, 몇 미터 떨어져서 보면 전체적으로 밝아서 아이의 몸체에 입체감이 조금 떨어진다. 마크 선생님은 멀리서 봐도 뭘 그렸는지 잘 보이는 그림을 요구하는데, 그 그림은 그런부류가 아니었다.

주제가 부각되려면 주제가 아닌 부분을 어둡게 단색으로 깔아줘야 한다는 결론인데, 시작하기 전부터 막막하다. 연필로 하기엔 막막하다고 생각했는데 화실 선생님도 역시 그 점을 지적하신다. 유화 그림을 연필로 옮기는 것은 대단히 시간을 많이 필요로 한다. 차라리 목탄이나 콘테를 이용하는 것이 낫다고 하신다. 그걸 것 같다. 보고 그리려고 짚어든 그림은 분위기가 딱 그렇다. 부드러움은 연필로 다 표현하지 못할 것 같다.

배경을 연필로 칠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니 검은색 수채물감을 칠하면 되겠다 싶었다. 몇가지 색을 혼합하여 어두운 색을 만들었다. 처음 의도는 검은색을 만들자였다. 그것으로 연필로 배경 채우는 수고를 덜자였는데, 내 의도처럼 되지 않는다. 파레트에서는 어두워도 화면에서는 그렇지 않다. 칠하고 나니 바탕이 그리 검지 않다. 내가 만든 검은 색은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검은색이 아니다. 붓자국이 여기저기 나고 아주 지저분해져버렸다. 주제에 집중을 할 수 없게 만드는 배경이 되어버렸다. 한마디로 말하면 망쳤다. 처음부터 다시 그려야겠다. 이번에는 목탄을 준비해야겠다.

동양화에서는 여백이 흰색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서양화에서는 대부분이 어둡다. 동양화 구도론에서는 여백에 대해서 여러차례 언급해 줬다. 물을 그리지 않고도 물이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던가, 더 넓은 무엇과 연결된 것을 상상하게 만든다 던가 하기 때문에 여백은 중요하다고. 그런데, 서양화의 여백, 배경은 그와는 다른 것 같다. 우선은 색깔부터 다르지 않은가. 연습으로 참고하는 서양화들은 거의 대부분이 배경이 검은색이다. 왜? 왜? 왜? 단지 주제를 잘 나타내기 위해서? 아니면 화가 본 세상이 그렇게 어두워서? 아니면 그리려는 주제가 어둠 속에서 살아나온 것처럼 영롱하게 표현하고 싶어서?

종이와 캔버스가 흰색이 것이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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