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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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혼의 조건
혼자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전 배우자에 대한 평가가 거의 같다. 사별한 배우자는 주로 신성시되거나 숭고한 인물로 묘사되는 반면에, 이혼한 배우자는 ‘미치광이’나 ‘나쁜 놈’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 또한 이런 시간들이 있었다. 분명히 나의 선택이었고 한 때는 좋아했던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내 입에서 나오는 그에 대한 이야기는 괴물처럼 묘사되곤 했다. 속에 무엇인가를 담아 두지 못하는 성격이기에 주변의 친한 사람들을 만나기만 하면 신세한탄과 그에 대한 욕을 있는 대로 쏟아냈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속이 시원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계속 반복되는 이야기 속에서 나는 뭔가 불편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혼을 한다는 것은 지긋지긋하던 그와의 혼인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부부의 관계가 정리 된다고 해서 내가 한 결혼 생활 자체를 백지화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계속 되는 험담 속에서 내 선택과 내 삶의 한 부분을 부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말끔히 사라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야기 속에 난 괴물과 같이 살다 가까스로 도망쳐 나온 가엾은 공주였고, 그 괴물과 같이 사느라 심신이 상처받고 지쳤다는 이야기를 무슨 영웅담처럼 했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괴물을 선택한 것도 나였고, 그 사람이 괴물같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어떻게든 결혼 생활을 유지하려고 애쓴 것도 내가 아니던가? 그러는 과정에서 상처와 분노가 더 커진 것이 아니던가? 결국은 모든 선택의 중심에는 내가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헤어질 수 밖에 없는 모든 이유를 그의 습관이나 나쁜 성격때문이라고 치부해야 속이 시원할 줄 알았는데, 그 모든 것을 선택한 것이 나라니. 참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에 대한 분노를 넘어 나에 대한 분노로 화살 시위가 당겨졌을 때, 그 허망함은 어디가서 말로 표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도 피해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와 같은 사람을 만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만났더라면 그런 괴물의 모습을 하고 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쯤 미치니 억울하기도 하고 바보같기도 한 힘들었던 시간들을 탓할 수가 없었다. 그냥 그 상황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조금 더 지혜로워 지는 방법을 생각하는 것이 옳다는 판단이 들었다. 아무리 억울하다고 가슴을 쳐 보아도 결국은 내 가슴이었고, 멍드는 것도 내 가슴이니 달리 도리가 없었다.
죽음학으로 유명한 의사 퀴블러 로스는 ‘죽음을 인정하는 다섯 단계’를 정의했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환자들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라고
하지만 이는 이별을 받아들이는 과정과도 비슷한 듯 하다. ‘부정 분노
타협
절망
수용’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든 천하에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원수 같은 사람과의 이별이든 우리는 두 번째 단계인 ‘분노’에서 멈춰있는 사람을 많이 보게 된다. 물론 꼭 거쳐야 하는 과정이긴 하지만 그 단계에 오래 머무르는 것은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또 한번 자신으로부터 상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상황을 냉정하게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꼭 필요한 길이 아닐까? 나는 이것이 ‘재혼의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돈이나 건강을 준비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중요하다면 자기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고 냉정한 판단과 수용을 하는 것은 어떤 조건보다도 선행되어야 하는 ‘재혼의 조건’ 말이다. 지난 결혼 생활에서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라는 것이 인지가 되어야만 똑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일은 없어지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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