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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23일 08시 37분 등록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 청년 논객 한윤형의 잉여 탐구생활


한윤형 저, 어크로스, 2013년 04월.


1. 저자에 대하여


■ 한윤형 ■

출생/사

1983년 대구

활동분야

칼럼니스트

 

• 발 자 취 •  

• 저 서 •

1999. 시작된 안티조선 운동의 원년 맴버

2000. 서울대, 조선일보 주최 제1회 전국고교생 논리논술경시대회 대상

     (당시 안티조선 운동의 참여자임을 밝히며 조선일보의 인터뷰 거부)

2001. 서울대학교 철학과 입학. 민주노동당원으로 인터넷에 참여정부에 비판적인 글 올리기 시작함

강원도 화천에서 군복무마치고 2007년 전역

2007년부터 먹고살기 위해 잡지에 글을 실어 한국일보, 한겨레, 한겨레21, 경향신문, 주간경향, 시사인, 프레시안, 오마이뉴스 등에 다양한 칼럼 연재

현재,  매체 비평지 미디어스에서 정치부 기자로 일하며 집필 활동을 병행

2009. 뉴라이트 사용후기: 상식인을 위한 역사전쟁 관전기

2009. 키보드워리어 전투일지(2000~2009)

2010. 안티조선 운동사:대한민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역사

2011. 안철수 밀어서 잠금해제

2011.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2013.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

……


 20대 논객, 매체 비평지 '미디어스' 기자, 키보드 워리어, 독립 자유 기고가. 저자 한윤형을 수식하는 말들이다.

 어쩌다 보니 취직을 하게 되었고, 요리 실력은 몇 종류 국과 찌개를 끓일 수 있는 수준에서 멈춰 있고. 그럼에도 평균적인 동년배 남성에 비해 요리에 대해 떠들 수 있는 축에 속하는 저자. 한윤형은 자신의 자의식을 이야기하며, 어린 시절의 우려는 뒤집히고 다른 방식으로 ‘처진’ 인생이 되었다라고 쓴다.

 청춘의 인생, 내가 보기에 지속적으로 글을 쓰고 책을 쓰는 ‘작가’이고 자신의 활동 영역을 굳건히 하고 있는 인생이다 생각하는데, 그 역시 ‘사회적인 시선’의 눈으로 볼 때 자신이 그렇지 않음을 잘 ‘인식’하고 있다. 아마도 보다 어린 시절에 그러니까, 저자가 책을 내기 이전의 블로그에 글을 쓸 때 느꼈던 감정일 수도 있으나 어쨌든 저자는 일반적인 한국의 남성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회사’라는 곳에 ‘취업’하는 인생을 산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다른 인생이었다. 그리고 그 다름이 ‘남들에 비해 못한’ 인생이란 꼬리표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 덕분인지 저자는 보다 잉여의 청춘들, 청년 세대들에 대해 더 잘 이해하고 공감하며 그들에 대한 글쓰기를 한다. 그리고 청년세대를 문제있는 세대로 바라보는 세대들에게 ‘무엇이 문제인가’를 되묻는다. 그래서 또래의 세대들에게 공감을 얻는지도 모른다.

 

참고자료 : 예스24 저자 소개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들어가며 : 잉여 시대를 명랑하게 돌파하는 청춘 여행


p6~7 여러 세대와 청년 세대를 접합한 글을 쓰다 보니 세대 담론이 실제로 정치적 문제와 연결이 되어 있다는 어떤 직관을 갖게 되었다. 물론 이는 경제적인 상황 때문에 내키지 않는 일을 오래도록 하고 있다고 마냥 생각하기는 힘들었던 이가 만들어 낸 하나의 핑계, 자기 정당화일 수도 있다.


p7 청년 세대의 문제는 그들이 가장 힘든 세대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한국의 사회문제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표층(表層)이기에 문제가 된다. 등록금 문제와 실업 문제는 그들만이 아니라 그들 부모 세대의 고난이다.


*어그로 : 주로 ‘어그로를 끌다’로 사용하며, ‘분노를 이끌어내다’로 해석하면 된다. 본래는 게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 몬스터를 공격할 때 가장 많은 데미지를 준 캐릭터에게 몬스터의 분노 수치가 올라가는 시스템에서 유래되었다.


1부 잉여의 이유 : 어쩌다 우리 인생이 이렇게 되었을까


자의식


p18 체제는 인격의 끝없는 성장을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가 그를 적당히 써먹을 수 있는 수준에서 성장이 멈추기를 바랄 뿐이다.


p19 스무 살이 넘어서도 잡다한 주제로 선행 학습 진도 빼듯이 독서를 하고 있다면 당신은 쓸모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잉여’의 앎을 추구하고 있는 것일 게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도움이 되는 앎, 시험 점수나 학점을 얻고 취직 시험에 합격하고 회사에서 업무를 수행하는 데 도움을 주는 앎은 아니기 때문이다.


p20 객관적인 자기 인식 없이 낭만화된 자기 긍정은 남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중2병’으로 향하는 지름길이다. 따라서 정말로 자신을 긍정하는 길은 자기 행위의 무의미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일 게다.


p20 내가 남들보다 조금 다른 것들을 읽고, 조금 다른 것들을 생각하고, 조금 다른 것들을 쓴다는 이유로 가지게 되는 자의식은 처연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가 사회로부터 받은 소외감을 같은 질량의 우월 의식으로 바꾸어놓기 때문이다. 그런 우월 의식을 지니게 될수록 소외감은 더 커지고 그렇게 생긴 소외감은 다시 우월 의식으로 변한다. 한번 이 ‘공굴기리’에 올라타게 되면 사태가 악화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p21 그 결과 겉만 성장한 그들은 자의식 과잉의 덩어리들을 주렁주렁 매단 채 대학원생이 되어, 직장인이 되어, 자칭 ‘좌파’가 되어 자신이 지체된 생각들을 인터넷에 뱉어놓는다. 물론 그런 자의식이 없이는 견뎌낼 수 없는 우리 시대의 고통을 생각하면, 그런 행위에도 연민은 느껴진다. 하지만 배배 꼬인 그들의 모습을 보자면 그들을 불쌍히만 여길 수는 없다. 심지어 그들은 서로서로 ‘다르다’고 주장하지만 실은 놀랄 정도로 닮았다. 우리 세대의 보편성을 이런 측면에서 확인하게 되는 것은 정말이지 씁쓸한 일이다.


청춘의 유예


p28 베이비부머 세대는 대체로 자신들이 학력이 낮아서 충분히 잘살지 못했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녀들의 학력에 엄청나게 신경을 쓴다. 아버지는 자신보다 훨씬 좋은 대학에 들어간 아들이 자신보다 훨씬 잘살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20대 중반부터 그의 월급명세서를 볼 때마다 나는 평생 이렇게 벌 일이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단골집이 필요 없는 세대


p31~32 내가 물건을 살 때 더 이상 그 판매자와 인격적 관계를 맺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이었다. … 그렇지만 문제의 핵심은, 어느 순간부터 내게 그런 종류의 인간관계를 만드는 것은 너무나 거추장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다는 거다.

    많은 소비자들이 이제는 판매자의 수다를 듣는 일 없이 혼자 물건을 고르고, 인격적 관계를 맺을 일 없는 캐셔에게 카드를 건네고 쿨하게 떠나면 되는 그런 상황을 편하게 여기지 않을까? 나처럼 돈도 별로 없고 상대적으로 가용 시간이 많은 자유기고가조차 그렇다면, 직장인들은 오죽할까. ‘소비자의 시대’가 왔다고, 이제 진보도 소비자의 정서를 이해해야 한다고들 한다. 2008년의 촛불시위에서 그것이 보였고 그 후 전개된 광고주 불매운동이 그 맥락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소비자가 되기 위해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도 봐야 할 필요가 있다.


p35 자주 바뀌는 비정규직이 많은 공장에서 서로간에 돈독한 대화를 나누려 하지 않는 것처럼, 끊임없이 변화하는 거리 가운데 선 우리는 한 가게의 단골손님이 되겠다는 결심을 내리기가 어렵게 되었다. 물론 우리는 할 수만 있다면 소비자와 판매자 이상의 특별한 관계를 맺고 싶어한다. 하지만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런 기대는 언제나 무리한 것이다.


후배의 실종


p40 운동권이 주류였던 시절엔 ‘조직’에 참여하지 않고 도서관에서 머리 싸매고 공부만 하는 이들이 사회 부적응자라고 놀림을 당했겠지만, 오늘날의 현실은 정반대다. 내 주변의 20대 좌파들은 정말로 사교성이 없다. 사교성이 없어서 좌파가 된 건지 좌파질을 하다 보니까 사교성이 사라진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중에 깨달은 것은, 그러한 조류는 운동권 바깥에서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젊은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는 거다. 그들에게서 발견했던 것은 일종의 우울증이었다. 동년배에게서 공통의 화제를 찾거나 지적 자극을 받는 일을 포기한 그들은 각자의 환경에서 원자화된 개인으로 전락한 채 그로부터 파생되는 우울함을 자기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p40 2008년은 촛불시위를 계기로 청년층의 정치적 관심을 이끌어낸 해였지만 나에게는 잃어버렸던 후배들을 되돌려 받은 해였다. 이명박 정부는 참여정부 말기에 심화되었던 냉소주의를 타파하고 극적인 정치의 시대로 우리를 인도했다.

 

문어체 소년의 취미


p48~49 전인권의 <남자의 탄생>을 보면, ‘소년 전인권’은 ‘재떨이 고고학’이라 하여 자신의 아버지를 보편적인 것과 접속해 있는 위대한 인물로 생각했다. 즉, ‘나-아버지-……박정희(국가지도자)-미국 혹은 유엔’와 같은 방식의 구도로 아버지를 경유해 세계 속에 자신을 위치시켰던 것이다. 전인권은 이런 한국 남성의 특징을 ‘비겁한 부친 살해’와 ‘심리적 고아’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p51 '책 도둑의 욕망‘은 물질적인 욕망과는 조금 다른 것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절대로 책을 빌려주지 않거나, 차라리 책 도둑을 용인한다.


학벌 사회


p59 만약 평준화를 무너뜨린다면 그 두 가지 길 사이에 수많은 지류가 형성되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층층의 서열화의 기준은 단 하나(두 말할 필요 없이 성적)로 귀결될 것이다. 한 가지 기준을 가진다는 점에서는 지금과 동일하다. 그러나 살인적인 경쟁을 부추기며, 변화의 여지를 봉쇄시킨다는 점에서는 최악이다. 고등학교에서부터 계급이 결정된다면, 그 계급을 결정하기 위해 중학교 교육은 다시금 황폐화의 길을 걸어야 한다. 대한민국 학생들은 평생 주입식 교육을 받아야 한다.


p60 사회가 애초부터 무한 경쟁의 정글로 이루어져 있다는 인식은 지극히 한국적인 특수성일 뿐이다.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라!”라며 집단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을 배제시켜버리는 짝짓기 게임이 바로 ‘의자놀이’다. 독일에서 한인 교포 아이들에게 이 게임을 시켜보았더니 멀뚱멀뚱 서서 “다같은 친구인데 누굴 택하고 누굴 버려요”라고 울먹이더라는 얘기를 들었다. 사회의 구성이 무한 경쟁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는 우리보다 훨씬 잘사는 독일은 우리처럼 한 번 폐허가 되어본 나라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경쟁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우리의 경쟁’의 비효율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경쟁


p62~63 경쟁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고전적인 경쟁의 모델은 달리기 같은 거다. 출발선상에서 우르르 목표 지점을 향해 달려가는 그런 달리기 말이다. 이런 상황에선 경쟁의 효과라는 게 눈에 보인다. 흔히 좌파는 이 달리기의 출발선이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꼬집곤 했다. 부자 아이들은 몇 킬로미터 앞에서 출발하고, 가난한 집 아이들은 부자 아이들이 이미 보이지도 않는 저 뒤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경쟁은 ‘완전 경쟁’이 아니라 ‘불완전 경쟁’이 된다.


p65 물론 누구도 죽음의 원인을 단언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는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죽음이란 사태의 원인을 파악하는 게 아니라, 그로부터 환기된 제도와 그 제도 이면의 교육철학의 정당성을 묻는 데 있다.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 버금가는 공대를 설립하기 위해‘ 학생 수를 무리하게 늘리고, 그렇게 늘린 학생의 교육비를 감당하기 위해 학점이 3.0에서 0.01 미달할 때마다 6만 원씩 등록금을 늘려 최대 600만 원의 등록금을 걷는 것이 합리적인 제도이며 올바른 대학 개혁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p65 '경쟁‘ 논리 자체가 문제이며 대학의 시장화가 문제라고 규탄하는 방법도 있지만, 오늘날의 ’대학 개혁‘이 보수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실력‘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 따져보는 관점도 필요하다.


p66 평균적으로 볼 때 징벌적 등록금제는 가난한 이들에게 교육비를 더 물리는 역누진세와 같은 정책이다. 이는 ‘학점이 좋은 취약계층 자녀들’에게 등록금을 주겠다는 대부분의 대학 장학금 정책이 눈 가리고 아웅으로 전락하는 이유와도 관련이 있다. 복지가 약한 한국 사회에서 성적이나 실력은 그 자체로 계층을 반영할 수밖에 없는데, 결과적으로 계층을 보고 징벌하거나 포상하는 웃기지도 않는 상황이 펼쳐지는 거다.


p67~68 국가의 부름을 중시하는 우리 대한민국은 이러한 ‘국가대표’의 조직을 무엇보다 중시한다. 한국의 국가대표가 국내 리그의 기량에 비해 국제대회에서 유난히 좋은 성적을 낸 것도 그 때문이었다. 가령 월드베이스볼클래식을 생각해보라. 한국 국가대표 야구팀은 종종 미국이나 일본팀을 이긴다. 인프라나 리그 수준은 상대가 안 되지만 막상 국가대표끼리 붙으면 실력은 비등한 것이다. 한국인들은 이런 광경을 보며 환호성을 지른다.


p68~69 과거 한국은 경제개발을 위해 ‘산업 역군’들을 ‘국가대표’와 같은 것으로 상징화했다. 그 결과 우리는 삼성전자가 거둔 천문학적 영업이익이나 삼성 반도체와 휴대폰의 세계시장 제패를 올림픽 금메달이나 월드컵 16강과 비슷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삼성 반도체 공장 노동자들이 백혈병에 걸려 죽는다는 것을 고발하는 일은 김연아나 박태환을 비난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 된다. 콜트콜텍이나 기륭전자처럼 비정규직 노동자를 착취하는 기업을 해외에 고발하면 수구 언론들은 사설에서 난리를 친다. 국내 일은 국내에서 해결해야지 해외에 나가서 우리 기업의 영업을 방해해선 안 된다는 거다.  


의미 부여


p71 물론 사람들은 많은 돈을 벌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런 사람에게라도, 그 욕망이 자신의 노력을 최대치까지 끌어내는 동기는 되지 못할 수 있다. 수렵 채집을 하며 살 때 인간은 초과근무(?)를 해서 사냥감을 쌓아두어 봤자 쓸 곳이 없었기 때문에 무리한 일을 즐기는 성격을 계발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p73 글 쓰는 사람들의 상당수도 남에게 의미 부여를 하는 일에 종사한다. 내가 속한 분야, 정파, 혹은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 갖가지 행위들에 의미 부여를 한다. 어떤 글쟁이들은 <로도스도 전기>에서 용 사냥을 하거나 다른 집단과 싸울 때 노래를 불러 사기를 고양시키는 음유시인들을 닮았다. 그런 이들은 자신의 행동에 의미 부여를 하기가 쉬울지 모른다. 그러나 세상엔 의미 부여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무수한 의미 부여들 사이의 구멍들을 탐색하며 다른 것을 바라보려는 이들도 있다. 남들의 의미 부여의 맹점을 짚고 다른 얘기를 하려고 하지만, 그런 일을 하는 자신의 일에 의미를 부여할 방법을 찾기는 쉽지 않다. 어떤 대의가, 혹은 어떤 진리에의 강박이 그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이들은 아전인수 격으로 의미 부여를 하는 이들과 너무 자주 부딪히기에 결국엔 자신을 위한 의미 부여에 성공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p74 혁명은 최악의 상황에서가 아니라 최악의 상황이 다소 개선될 때 가능하다고들 하지 않는가.


문화 자본


p75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문화적 취향에서의 계급적 차이에 주목한다. 계급적 차이들이 문화적 차이들을 생산하지만, 이러한 문화적 차이들이 재능이나 성취 같은 개인적 특성에 따른 것이라고 잘못 인식되기 때문에 결국 계급 체계를 정당화하게 된다는 것이다.


p76 부르주아들이 ‘문화 자본’을 획득하는 것은 돈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돈과 상관이 없어 보이는 가치 또한 소유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것을 ‘허영’이라고 부른다면, 그건 그렇다고 치자. 문제의 핵심은 우리 사회의 부르주아들이 그런 ‘허영’에 쉬이 휩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없는 이들에게 문화자본을 자랑하는 법이 없고 돈과 상관이 없는 일에 일절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말하자면 자신이 성공한 이유는 남들을 철두철미하게 잘 쥐어짰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그것을 ‘재능’이나 ‘능력’이라는 수사로 포장한다.


p77 사람은 먹고살 만해야 ‘허영’을 추구하게 되는데,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모두 이루었다고 믿었던 1990년대의 상황이 이어졌다면 한국의 부르주아와 중산층도 다른 종류의 ‘문화 자본’을 추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IMF 구제금융의 충격이 한국 사회를 엄습했고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한국사회는 중산층이 감소함과 동시에 여차하면 부르주아도 몰락할 수 있는 무한 경쟁의 길로 들어섰다. 문화 다양성의 측면에서 볼 때 이런 상황은 안타깝다. <강남 스타일>로 세계인을 즐겁게 한 싸이가 1990년대의 유산이란 점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문화적 역량이 1990년대의 것을 뜯어먹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그 남자와 그 가족


p80 여성들의 학력이 높아지고 사회 진출은 활발해졌지만, 문화적인 벽은 생각보다 강고했고 남자들의 노동시간도 줄어들지 않았다. 집안일은 여전히 여성의 몫이었고 맞벌이 부부는 밥을 사먹거나 육아와 요리를 부모님에게 떠넘겼다. 그런 상황을 보면서 나는 군대를 다녀왔고 어느덧 20대 중반이 되었다.


p81~82 지금 우리는 일하는 이들은 엄청난 시간을 일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일을 찾지 못해 ‘잉여’가 된 시대를 산다. 일하는 이들의 3분의 1이 자영업자로 그들 중 상당수는 남을 먹이는 일에 종사한다. 누구는 일이 많아 죽어나고 누구는 일이 없어 죽어난다. 그러나 경제성장의 신화가 깨지고 석유 값이 상승하는 근(近)미래엔 우리 대부분이 다시 요리를 하게 될 것이다. 농업을 시작한 이후 인류가 오래도록 그랬던 것처럼 대부분의 사람이 하루의 일정 시간 이상을 농경과 가사 노동에 투자하게 될 것이다. 다들 집 앞 텃밭에서 무언가를 키우게 되면, 잉여 노동력도 사라질 것이다.


p84 "부산 남자의 이상적 자아는 ‘짱 세고 아주 멋진 나님’이지만, 대구 남자의 이상적 자아는 ‘패밀리의 주인인 나’야“였다. 대구 남자와 부산 남자를 일반화하려는 시도는 아니다. 그저 대중문화에서 안전하게 그려낼 수 있는 ‘부산 남자의 마초성’에 대한 서술과, 대중문화에서 그려낼 수조차 없는 ‘정말로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마초성’의 차이를 지적한 것이라고 여기면 된다. 나는 실제로 삶의 경험을 통해 대구 남자들한테서 그런 경향이 두드러진다고 증언하고 싶지만, 그게 특정 지역에 대한 비하인 것 같아 불편하다면 ‘시실리 남자’라는 말로 대신하면 된다.


p85 과거 경상도 주역주의를 상징하는 말로 쓰이던 ‘우리가 남이가’란 말이나, 영화 <황산벌>에서 그것을 염두에 둔 듯한 ‘우리는 모두 가족인 기라’는 이미 ‘패밀리의 주인인 나님’을 넘어 좀 더 넓은 패밀리의 연합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시실리 남성’이 태어날 때부터 자신이 누군가의 주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지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물론 가부장제라는 접근도 가능하지만, 이들끼리의 싸움이 ‘시실리의 율법’과 ‘폭력의 문제’와 ‘자본주의의 룰’ 사이에서 어떤 양식을 보여주는지를 더 직관적으로 알려면 <대부>를 보는 편이 더 낫다.


p85~86 '시실리 남성‘의 폭력은 패밀리를 위한 것이다. 국가라는 공적 기구는 ’모르는 사람‘일 뿐이다. 우리는 이런 사고방식이 한국 사회에서 굉장히 ’보편적인‘ 것이란 걸 안다. 그래서 사회 지도층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거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아들의 병역을 빼준다. 어쩔 수 없이 병역의 의무를 지는 다른 대다수는 군대에서 ’공적 기구‘로 충분히 전환되지 않은 ’모르는 사람의 폭력‘을 경험하고 그 낯선 상황에 대한 분노를 미필 남성과 여성들에게 분출한다.

     가령 “대통령을 ‘가업’으로 여긴다”고 비판한 전여옥의 말대로 박근혜 대통령은 ‘패밀리 비즈니스’와 국가 기구를 동일시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한국 사회의 절반은 이 사실에 불편해하지만, 그보다 조금 더 많은 절반은 오히려 그 사실에 안도한다. 다른 패밀리들은 박근혜와 같은 ‘행복한 일치’를 경험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각자의 패밀리를 위해 살아간다.


p88 그간 진보 지식인들은 한국인의 집단 심리와 보수성에 대하여 ‘우리 안의 파시즘’을 성찰할 것을 주문했지만, 나는 ‘우리 안의 시실리’가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렇게 볼 때에야,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층이 내미는 ‘영남 패권주의’라는 말을, ‘반호남 인종주의’를 뒤집은 ‘반영남 인종주의’가 아닌 한국 사회의 지배계급의 의식을 포착하는 개념으로 전유해낼 수 있다.


우리편 전문가와 냉소


p98 사람들은 정말로 어려운 글을 싫어하고 쉬운 글을 좋아하는가? 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 ‘어려운 글이 자신을 편들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비난하는 글의 어려움도 내용의 어려움이라기보다는 ‘누구 편을 드는지를 파악하기 힘든 어려움’이 아니었던가 한다. 가령 ‘이 글은 노무현을 찬양하기 위한 글입니다’라고 천명하고 시작한다면 어떤 어려운 철학자나 정치철학의 말이 나와도 이해 받기는 어렵지 않다.


p99 '우리편 전문가‘에 대한 열광이 ’자위‘나 ’정신 승리‘ 이상의 의미를 지니려면, 적어도 전문가는 존재해야 한다. 즉 대중이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 무의미하단 단언을 넘어선, 어떤 전문 영역의 맥락이 존재해야 한다. 그것들은 수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지식이며, 우리가 사는 세상의 문제를 반영하는 것이라면 한다. 그런데 만일 전문가의 지식이 그런 것이라면, 그가 내리는 결론이 한 정치 세력의 입장과 온전히 포개질 수는 없을 것이다.


p99~100 결국 사람들이 사랑하는 ‘우리편 전문가’는 실은 사람들이 경멸해 마지않는 바로 그 정파 논리에 찌든 ‘지식인’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이 경멸하는 것은 자신의 환상일 뿐, 진짜 지식인은 아니다. 한국인들의 인식 체계에는 지식인들이 뭐하는 종자인지에 대한 고려 자체가 없다. 그런 면에서 한국의 지식인들은 철저하게 무력하다. 한편 그 무력함을 타파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은 ‘우리편 전문가’를 사랑하는 이들에 의해 ‘자신을 내세우고 치장하고 권위의 도구만으로 사용하기 위해 개념어들을 내뱉는’ 타락한 지식인으로 규탄받는다. 한 정파나 대중의 심리를 온전히 대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구세력의 나팔수’나 ‘친북세력의 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편 전문가’에 대한 열광보다 더 솔직한 것은 이 세상엔 아무것도 중요한 것이 없고, 그렇기에 지식인은 필요치 않거나 단지 사기꾼일 뿐이라는 그런 ‘냉소주의’일 것이다. 그런데 냉소주의가 슬픈 이유는, 냉소주의의 표명이 그 냉소적인 진실에 대해 적합한 표현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정치가 우리 삶의 문제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강변하는 사람을 생각해보자. 그의 말이 옳다면, 그는 정치에 대해 냉소할 때마다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p100~101 냉소적 기질이란 일종의 좌절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세상이 이렇게 생겨먹었다는 것을 긍정할 수 있다면, 냉소는 애초에 필요가 없다. 따라서 냉소주의자들 역시 세상은 이래선 안된다고 생각하며 그 과절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는 것뿐이다. ‘맹동주의자’에 대한 그들의 냉소는 맹동주의자의 정치적 행동과 마찬가지로 시간 낭비란 점에서 자신이 파악한 ‘삶의 진실’을 배반할 뿐이지만, 그들은 이 모순을 넘어서기 위해 맹동주의자를 비판하는 ‘끝없는 글쓰기’를 해야만 한다.

   

p101 냉소적 기질과 냉소주의의 차이는, 전자의 경우 자신의 냉소를 ‘냉소하지 않아야 할 대상’을 발견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즉 ‘냉소적 기질’은 ‘건전한 활동가’와 ‘낭만으로 치장한 약장수’를 구별하는 데 도움을 준다. 오버하자면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에 견줄 만한 ‘방법적 냉소’다. 그게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을 냉소해야 한다면 우리는 세상사에 대한 냉소를 거두고 자기 먹고사는 문제에나 신경쓰는 것이 옳다.


소수에 대한 혐오


p104 상황을 요약하자면 책에 나오는 ‘유연한 여자와 뻣뻣한 남자’다. 경제 위기가 일어날 때마다 ‘남성적인 일자리들이 줄어갔는데, 여성들은 수십 년 동안 남성의 영역에 쉽게 진입한 반면 남성들은 여성의 영역에 진입하기를 머뭇머뭇하고 있다는 것이다. 남자들이 육아와 가사노동을 아주 조금 더 하게 될 동안 여자들은 훨씬 많은 비가사노동을 하게 되었다. 여자들은 ’남성적 일자리‘에도 진입했지만 남자들은 아직까지 ’여성적 일자리‘에 별로 진입하지 못했다. 저자는 이런 상황에서 기존에 ’남성적인 것‘이라 여겨졌던 성격을 여성들이 많이 보여주고 있다고 진단한다.


p104 '전 지구적 자본주의‘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쓰지만, 그 말이 자칭하는 조류 속에서 이제는 문화 역시 ’전 지구적으로 동시에‘ 바뀌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문화주의에 맞서 선천주의를 주장하려면 이제는 동시대의 여러 문화권만을 비교해선 안 되고 시대의 추세에 따른 변화까지 고려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p105 한국에서도 여성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남성과 동등한 교육을 받고 있고, 일자리에 진입하는 순간의 남녀 인금 격차는 꽤나 줄어든 것으로 보이는데도 이런 논의가 한국 사회에 적용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첫 번째 이유는 한국의 부동산 가격이 소득에 비해 지나치게 높아서, 고소득 여성이라도 독립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그 이상을 벌거나 물려받을 재산이 있는 남성과 삶을 살지 못하고 그 이상을 벌거나 물려받을 재산이 있는 남성과 가정을 꾸릴 궁리를 하게 되고 결국 ‘시월드’로 스스로 걸어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일하다가 아이 낳고’, 아이 낳고 와서 또 일하는‘ 여성의 양태를 실현할 만큼 한국 노동시장이 유연화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 노동시장은 비정규직 비율은 엄청나게 높지만 퇴직 이후에 다시 정규직으로 돌아오는 쪽의 ’유연성‘은 전혀 없다.


p106 한국에서 ‘남자의 종말’을 지연하는 건 역설적으로 한국 특유의 사회문제들이다. 그리고 한국 남성이 여성에 대해 분통을 터트릴 때 주로 ‘젊은 여성’을 지목하는 이유는 바로 이 짧은 시기의 남녀만이 저 전 지구적 현상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성의 종말’을 지연하는 이 사회문제들, 높은 집값과 노동시장의 이중 구조 속에서 과연 한국 남성들은 다른 선진국의 남성들보다 행복할 걸까.


p107 자본이 마음껏 이동하는 세계화의 질서를 대개 긍정하는 우리들이, 노동의 이동을 부인한다는 것은 무언가 앞뒤가 안 맞는 일이 아닐까? 한국 사회는 이미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맥락에 합류한 지 오래고 그 질서 속에서 외국인 유입을 독려하는 건 바로 한국 사회의 문제들이다.


p108~109 외국인 노동자들이 대개 (지금의 세계질서에) 우리나라보다 못사는 나라 국민들이기 때문에, 이 혐오증이 일종의 인종주의자가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물론 그런 부분이 있겠지만, 좀 더 총체적으로 접근해야 할 필요도 있다. 불법체류자처럼 법적인 논리를 들이밀 수 없는 백인계 외국인 영어 강사에 대한 일반인의 혐오도 만만치 않다. 주로 그들이 한국 여성들을 꾀고 있다고 생각하는 한국 남성들이 그러한 혐오를 드러낸다.

    여기에는 민족주의 정서와 서구적 외모에 대한 열등감이 묘하게 중첩돼 있다. 이러한 열등감이 실존한다는 사실은 인도 파키스탄 지역 출신의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태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즉 경제 능력으로는 제3세계 출신에 속하면서 외모는 아리안 민족의 핏줄을 따라 서구적인 이들은, 한국 남성들에게 가장 격렬한 증오의 대상이 된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들의 외모에 속아나가는 한국 여성들의 무지함과 품위 없음에 대한 조소도 잊지 않는다. 


교양의 실종


p111 사람들이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한다고 탓하지 말자. 이것은 한국의 사회적 조건이며, 어쩌면 유럽이나 미국이 도달하지 못한 자본주의의 최첨단이다. 한국의 대학생들은 그 사이버펑크보다도 현기증 나는 공간에서 실시간으로 싸우고 있는 전사들이다. 이러 s사회에서 ‘교양’은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를 자본의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p115 '나 자신의 이성으로 고찰해보지 않은 삶은 가치가 없다(혹은 덜하다)‘는 명제다. 윤리 교과서에서 나온 고상한 말로 바꾸면 ’주지주의‘가 된다. 물론 오늘날엔 주지주의가 아니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는 철학들도 있다. 그러나 주지주의 자체가 철학을 탄생시킨 욕망이란 건 분명한 사실이다. 교양 지식은 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들의 컬렉션 같은 거다. 욕망이 없다면 그 컬렉션은 아무 의미도 없다.


군대와 영어


p122  공적인 영역에서조차, 우리는 법적인 요건에 의해서 성인의 권리를 획득하지 못하고, 관습의 힘에 의해 어른이 되거나 아이가 된다. 더 큰 문제는 이것이 문제라는 사실을 국가가 알지 못할 것이고, 많은 이들이 나처럼 분노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다.


정치의 소비


p125 한국의 정치는 철저하게 여의도 중심으로 돌아간다. 의원, 보좌관, 관료, 출입기자들로 구성된 수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그것을 좌지우지한다. 정치평론가들 역시 그들과의 친분을 통해 정보를 얻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판단을 내린다. 한국 사회에서 정치는 그 수만 명의 의지의 총합이며, 그 수만 명의 나머지 오천만 명에 대한 소외다. 물론 인류는 대체로 그랬고 수십 명이 수만 명으로 확대된 것만으로도 한국 사회는 지난 몇백 년간 인류 문명이 추구해온 민주주의 질서의 최정점에 근접해 있는 상태라고 덧붙여야 할 것이다.


p127 말하자면 진보신당이 <시사인>에서 발명해낸 조어, ‘강남 좌파’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가질 만큼 가졌고 배울 만큼 배웠다고 생각하는 이들, 하지만 한나라당은 택할 수 없는 이들에게 진보신당이 민주노동당, 혹은 민주당에 비해 손쉽게 택할 수 있는 대안이라면?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아침에 식사를 하면 ‘경제적으로 성공’한 부모님의 정치에 대한 훈시를 듣고 학교로 오는 대학생들에게 “저는 이 정당 지지하는데요”라고 말해도 “넌 아직 세상을 모르는구나” 정도의 소리는 들을지언정 “그런 이들도 필요는 하지”라는 수준의 코멘트는 얻어낼 수 있는 ‘안전한’ 대안이라면?

    아마도 ‘강남 좌파’들에게 다가오는 진보신당이 어떠한 것인지를 미리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진보신당을 선택하는 근거에는 이명박은 싫지만 지난 십 년간의 민주당 집권 기간도 좋은 시절이었다고는 보지 않는다는 생각과 친북 시비가 일어나는 좌파는 싫다는 생각이 포함되어 있을 테니 말이다. 이를테면 그들은 일종의 정치적 얼리어답터들인 것이다.


내려가는 사회


p131 이제는 ‘청춘’의 시대가 끝났다고 말하는 게 더 정답에 가까울지 모른다. 자본주의 체제가 존속하는 한 또다시 68혁명이나 반문화 운동과 같은 체제의 사춘기가 올 것 같지는 않다.


p132 김용민처럼 “대학생 때도 저항하지 못하는 이들이 회사원이 되면 얼마나 보수적으로 변하겠느냐”고 말하는 건 자신들의 삶의 궤적을 ‘정상’으로 설정하고 후세대를 비판하는 것밖에 안 된다. 대학생 때가 인생에서 가장 진보적인 순간이었단 게 그렇게 자랑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p133 러시아의 푸슈킨은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이라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응답하라 1997>에 대한 열광에서 여겨지듯 지금 한창 아이를 낳아야 할 그 세대의 마음은 이미 과거를 산다. 흔히 예전의 한국 사회와 지금의 차이로 ‘계층 이동 가능성’의 유무를 둔다. 과거의 사람들이 계층 상승이 가능하다 믿었고 그게 실존했다면, 지금의 사람들은 그게 거의 불가능하단 걸 이미 알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문제는 계층 이동 가능성을 넘어선다. 부모님 세대는 사회내에서 자신의 계층이 상승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삶 자체가 상승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진실이었다. 사회는 올라가는 중이었다. 아이를 낳아야 한단 사실엔 의문을 품은 바도 없지만, 아이를 낳게 된다면 그 아이의 살이 나보다 더 나을 거란 것도 그들에겐 명약관화한 진실이었다. 실제로 어르신들을 만나보면 그렇게 부유하지 않은 분들도 ‘얼마나 세상이 좋아졌냐’라고 말씀하시곤 한다.


p134 부모님 세대가 자신들이 세상을 만들어낸다 여겼던 그 ‘박정희 시대’를 향수하는 것만큼이나, 이 세대 사람들이 아이를 낳기 싫어하는 것도 이해받을 만한 감정이 아닐까? 친구 하나는 그랬다. “내가 불행한 것도 문제지만, 아이를 이런 세상에 낳기는 싫다”고. 옳든 그르든 지금 세대가 세상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이렇다.


2부 루저들의 사회 : 여긴 어디? 나는 누구?


20대 멘토 담론의 현실


p138 김난도와 우석훈과 엄기호의 경우 ‘강의자’라는 데에서 권위가 나오고, 김어준과 김형태와 박권일에게는 ‘남들과 다르게 살았는데도 안 죽고 살아남았다’는 사실 그 자체에서 권위가 나온다. 그런데 여기서 언급한 강의자들도 자신의 인생 성공담을 늘어놓은 이들은 아닌지라, 결국엔 ‘남들과 다르게 살았는데도 안 죽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권위가 된다. 20대들의 말을 이끌어내려고 노력하는 엄기호라는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청년들은 그 권위를 인정하며 그들의 말을 받아들인다.


p140~141 소위 진보적 지식인들이 복거일이나 공병호와 같은 우익 필자들을 비판하거나 조소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훨씬 더 어려운 일은, 오늘날의 청년들에게 사회를 바라보는 총체적인 시각을 가져야 할 필요성을 납득시키는 것, 본인과 복거일 (또는 공병호)이 경쟁하고 있는 그 장에 청년들을 끌어오는 일이다. 출판 시장에서 그들의 대립각에 서 있는 것은 복거일이나 공병호가 아니라 차라리 김훈이나 장영희일 수가 잇다. 여기서 우리는 상대편의 광활함에 화들짝 놀라게 되는데, ‘김훈이나 장영희’라는 말이 포섭하는 바가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이념보다 밥벌이’를 말하는 섹시한 마초 소설가와, 생명과 삶의 소중함을 말하는 감성적인 에세이스트는 전혀 다른 종류의 글쟁이인 것 같지만, 이 영역 정체에 대해 ‘진보 지식인’들은 개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김훈의 독자들은 스스로 보수주의적이라 생각하거나 보수주의자의 책을 읽고 있다 생각할 가능성이 있지만, 장영희의 독자들은 정치적 보수주의의 차원에 있다기보다 아예 그 변별 바깥에 있다.


p141 '좌우‘ 변별과는 상관없는 이러한 ’삶의 태도‘의 영역을 진보 담론이 전혀 공략하지 못한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그리하여 ’김훈이나 장영희‘를 읽는 독자들이 굳이 탈정치적이거나 보수주의적일 이유는 없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소설과 에세이를 읽는 독자들의 상당수는 정치의식을 가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p142~143 여기서 드러나는 진정한 문제, 혹은 슬픈 현실은 사회문제에 대한 총체적 인식에 대해 열심히 말하던 ‘진보적 어른’들에게 청춘의 삶에 대한 구체적인 조언을 요청할 경우 ‘보수적 멘토’들과 다르게 말할 수 있는 무언가가 없다는 것이다. 명문대생들이 고시나 공무원 시험에 몰리고 대학생 일반의 ‘취업 눈높이’가 높아져서 대기업에만 지원하는 현상에 대해선 이명박 대통령이나 <조선일보>도 우려를 한다. ‘취업을 안 해도 살 수 있으니 겁먹지 마라’고 당부하는 박원순이나 진중권의 충고가 이에서 크게 벗어난다고 보기는 어렵다. 진보적 평론가들은 특히 김난도의 <아프니까 청춘이다>에 대해 이런 문제를 제기할 가능성이 높지만, 김어준이나 김형태의 ‘남 눈 신경 쓰지 말고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라는 조언의 현실 정치적 함의가 ’공무원이나 대기업 정규직 지망하지 말고 중소기업가거나 창업하라‘는 우파의 조언과 겹쳐 보인다고 말한다면 내가 너무 예민한 걸까?


p143 오늘날의 청춘은 질타받기를 원하는데, 그것은 질타받는 것도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하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질타가 쌩뚱맞으며 그 뒤엔 구조적 문제가 있지 않느냐는 지적이 오히려 그들의 ‘자기’에겐 더 감당하기 힘든 문제일 수 있다.

    

루저는 ‘세상 속의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p147 과거의 루저는 학벌 구조의 바깥에 위치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루저는 바로 학벌 구조 안쪽에 있다. <비트>의 이민과 로미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기에 ‘루저’로 취급된다. 집이 잘사는 로미에겐 해외 유학을 통해서라도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는 식의 계급적 차이는 존재하지만, 그 세계에서 ‘잉여 인간’의 규정은 대학 진학 여부다. 그러나 오늘날의 잉여 인간들은 ‘학벌 사회의 잉여 인간들’이다. 오늘날의 루저 문화는 대학에 진학한 이들이 좌절에 빠져드는 정서인 것이다.


p149 학벌 사회는 균질화된 학벌 엘리트들의 대다수를 대기업들이 안정적으로 고용해줄 수 있을 때에 제댈 작동할 수 있는 체제다. 그러나 IMF 이후 이 체제는 끊임없이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대학생들은 이전과는 달리 고등학생 때보다도 더욱 치열한 경쟁의 공간에 노출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은 일자리’의 숫자는 점점 줄어만 간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이전 시대의 이민과 로미들이 한없이 부러워하던 명문대생임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말하자면 이들은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다 했고, 그래서 경쟁에서도 승리를 거뒀는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날에 희망이 없는 그런 열패자들이다. 학벌 사회의 승자이면서 잉여 인간이 된 것이다. 이들의 열패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수월하게 취직했던 몇 학번 위의 선배들이나 얼마 안 되는 자리를 잡아채는 데 성공한 친구들과 자신을 끝없이 비교하게 되기 때문이다.


p153~154 자신이 포함될 수도 포함되지 않을 수도 있는 현실에는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지만 자신이 벗어날 수 없는 조건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가진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고통을 수반하는 일일 게다. 이들에게 <88만원 세대> 담론은 벗어날 수 없는, 받아들여야 하는 조건일 뿐이다. 그렇다면 체념하고 위로하는 것이 빠르다.


p155 엄친아라는 말의 의미를 자조적으로 수용하는 젊은이들의 문맥에서, 부모의 욕망에 저항하는 자녀의 욕망은 이 시대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p157 우리 시대의 ‘승리자’인 엄친아들의 문제는 그들에게선 ‘시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내가 모르는 쾌락을 누린다는 의구심’을 느낄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엄친아들이 승리자인 세상은 젊은이들에게 완벽하게 이해 가능한 세상이다. 그 세상엔 신기한 것도 내가 모르는 것도 없고 다만 나의 욕망, 아니 부모님의 욕망에 엄밀하게 조응하여 움직이는 피에로들이 있을 뿐이다.


p158~159 시대의 조류인 ‘냉소’에 기대어 단언해보자면, 더 이상 이 세상에 새로운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루저는 새로운 것을 만들 수는 없다. 1990년대에 일본의 사회학자인 미야다이 신지는 길거리에서 원조교제를 하는 여고생들이 새로운 삶의 방법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가족, 학교, 지역사회를 넘어서는 길거리라는 제4공간에서 여고생들은 성적 자기결정권을 가지고 나름대로 후기 근대에 적응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그 사회학자는 십 년 후에 그 여고생들이 정신 치료를 받게 되었음을 깨닫고 자신의 주장을 철회한다. 일자리나 수입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새로운 공간’에서 안도감을 얻는 이들이 그 모습 그대로 삶을 지속할 수는 없다. 결국 경제구조를 뛰어넘을 수 있는 ‘새로운 것’은 체제를 섣부르게 극복하려는 기성세대의 욕망 속에서나 존재한다. 나는 이 사례가 2008년 촛불시위를 주도한 십대 ‘여고생’들에 대한 한국 진보 지식인들의 ‘열광’에 정확하게 포개진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향후 어떤 세상에서 어떻게 살 수 있을지는 생각하지 않고 ‘새로운 아이들’이 나왔다는 열광을 반복하는 것이다.


‘88만원 세대론'의 딜레마


p161~162 세대론이 계급 문제를 은폐하고 우익들에게 이용당할 수밖에 없는 담론이라는 좌파들의 개탄이 있었고, 세대 불평등이 통계 자료에 유의미하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어느 사회학자의 타당한 지적도 있었다. *신광영, 세대, 계급과 불평등


p162 이 담론의 종착지는 묵시론적 예언을 듣고 ‘혹시 나도 88만원 정도를 벌게 될지도 모른다고 불안감을 느끼게 된 젊은이들’이다. 그들의 불안감이 <88만원 세대>를 베스트셀러로 만들었다. 그 불안감은 한국 사회의 불평등을 온전히 대변하지 않으며, 더구나 ‘미래’에 방점이 찍혀 있다. 그러므로 ‘세대 불평등’이란 것이 통계 자료에서 드러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p163 한국의 지배계급이 정말로 ‘삼성의 몰락=대한민국의 멸망’이란 등식을 믿는다면 지금은 ‘지속가능한 삼성’을 위해 도시락을 싸들고 다님 저 재벌 총수를 설득할 때다. 하지만 소위 ‘보수 진영’에선 이건희를 비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p165 비정규직 노동자를 외면하고 사회문제를 외면하면 자신들만은 살줄 알았던 그 노동자들이 하루아침에 해고됐다. 이들의 투쟁을 외면하면 우리는 언제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p167 이렇게 문제가 확실한데도 ‘이기적 개인들의 선택’을 효율적으로 조정하기 위한 사회정책을 입안하려는 시도는 지극히 미약하다. 체제는 스스로 변하지 않는다. 뺏기기 시작한 사람들은 계속 뺏길 것이고 욕망을 거세당한 이들은 그 룰 속엣 아등바등 뛰어갈 것이다.


p167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이 본인의 거세당한 욕망을 ‘권리’로 인지하고, 그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현재 투쟁하는 이들과 연대하는 세상은 지금으로선 하나의 꿈이다. 그렇게 노동자들의 ‘고립’은 투쟁의 성공보다 투쟁 자체가 꿈이 되어버린 세태를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p168 한국의 중산층은 부동산 가격의 지속적인 상승을 통해 자산을 축적했고, 약해진 기업의 경쟁력을 신규 노동시장에 진입한 이들의 임금을 낮추면서 보충해왔다.

      적나라하게 요약한다면 ‘집값’은 높이고 ‘사람값’은 낮추는 체제를 운용해온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 체제를 지지해왔던 중산층 자신들의 자녀조차 월급으론 독립을 꿈꾸지 못하게 된 ‘멋진 신세계’다. 신나게 날다가 되돌아와 던진 사람의 뒤통수를 치는 부메랑이다. 이 ‘멋진 신세계’에선 “요즘 집값이 너무 비싸니 내가 몇 억 보태줘야지 뭐”라고 생각할 수 있는 부모를 가진 이들만 구원받을 수 있다.


누가 우리를 명명하는가


p171~172 IMF 이후를 지배한 것은 40~50대 장년 세대들의 삶에 대한 연민이었고, 이른바 ‘아버지 신드롬으로 대변되는 ’가부장의 귀환‘이었다. 물론 사회가 가부장의 역할을 강조하게 된 것은 역설적으로 가계의 붕괴 때문에 가부장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게 된 세태를 보여주는 것이긴 하다. 그러나 한국 사회가 경제 위기의 충격을 ’가족 이데올로기‘의 강화를 통해 극복하면서, X세대가 표상했던 ’자유‘의 이념은 서구의 68혁명과 같은 ’권위주의에 대한 거부‘의 길로 나아가지 못하고 ’소비의 자유‘로만 머무르게 되었다. 이후 한국 사회의 세대론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소비의 주체를 찾아다니며 자본의 이해에 따랐다.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 유행했던 세대의 이름들은 주로 기업들의 마케팅 전략과 관련이 있었다.


p174 어떤 이들은 세대론이란 접근 자체를 비판한다. '세대론‘이 복잡한 사회문제를 특정 세대의 책임으로 단순하게 전가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 이를테면 청년 세대에게 사회경제적 문제나 선거의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 보수니 진보니 하는 진영을 막론하고 세대론의 단점이다.


p175 청년 실업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지만 신문의 시선은 청년 세대가 아니라 그들의 늦은 독립으로 고통받는 부모 세대에 있었다. 그리고 대체로 청년 세대의 부모 세대는 베이비부머에 해당했다. 신문은 ‘청년 실업 70만’과 ‘외국인 노동자 100만’을 같은 지면의 헤드로 뽑았다. 청년 세대가 눈높이를 낮추지 않아서 외국인 노동자를 쓰게 되어 사회문제가 생기고 한국 경제의 활력이 떨어졌다는 메시지를 노골적으로 전달하는 것이었다.


p178 한국 사회의 계층간 불평등은 임금 격차보다는 부동산 자산의 격차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p179 수도권의 부동산이 이미 한계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지역민들은 아직도 부동산 가격 상승에 대한 기대 심리를 가지고 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저자 박해천은 대선 직전, 지난 5년간 부동산 가격 상승을 경험한 지역민들의 기대 심리가 보수 정권을 지지하게 될지 모른다고 예언했고 그것은 대선 결과로 증명되고야 말았다. 수도권 사람들은 부동산을 활용한 자산 축적의 가능성을 이미 포기했지만, 그들의 욕망이 ‘폭주 기관차’가 되어 다른 지역민들의 기대 심리까지 견인하고 있는 것이다.


p180 '계층 불평등의 세대 전이‘라 표현할 수 있는 ’세대 문제‘는 사회 전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중간계급이라는 특정 계층의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들 계층이 사실상 그간 한국의 내수 경제를 지탱해왔단 점을 생각하면 이들 내부의 ’세대 문제‘야말로 디스토피아적 미래라 할 수 있다.


p187 스콧 버거슨은 촛불시위에 대해 타당한 분석을 내놓았다. 촛불이라는 것은 죽음에 대한 애도라는 상징을 가지고 있는데, 2008년의 시위가 애도한 것은 ‘예상되는 미래의 죽음’에 대한 애도라는 점에서 하나의 판타지가 아니겠냐고. …

     2008년에 죽음에 대한 애도라는 상징을 가진 촛불이라는 기호가 시위를 위해 봉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가 아미 2002년에 여중생들의 죽음을 애도하며 촛불을 든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02년의 촛불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 직전에 있었던 월드컵 거리 응원의 경험 때문이었다.


p190 2008년 촛불시위의 현장, 거리에 존재했던 ‘주권’은 자신의 적대자를 ‘외국인’으로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폐쇄적이고 통합적인 나였다. *스콧 버거슨과 친구들, <발칙한 한국한>. 왜 우리는 무력한 촛불이 되었나.

왜 세대론이 우리를 괴롭힐까


p195~196 나는 촛불시위의 동력성은 중심부에 대한 주변부의 저항이 아니라, 모두가 중심에 포섭되고 싶어하는 욕망에서 나왔다고 판단한다.


p196 지금 소위 ‘깨어 있는 시민’들은 2000년대의 촛불시위들이 모두 ‘노무현을 좋아하는 시민’들이 만들어낸 것이었다고 착각하고 있다.


p200 부르주아에 대항하는 노동계급의 의식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들 노동계급을 뛰어넘어 ‘시민’이 되려고 한다.


p204 "미친 소, 너나 먹어!“라는 촛불시위대의 외침은 문화평론가 이택광의 말대로 ‘쾌락의 평등주의’를 보여준다. 이는 다른 시민이 누리는 쾌락을 나도 누려야 한다는 욕망에서 나오는, 한국 시민들의 활동 전반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이다. 그리고 박권일은 한국 사회의 평등주의는 사회 구성원들의 평등을 문제 삼지 않는다. 그들은 대체로 ‘나’와 ‘부자’ 사이의 평등만 문제 삼을 뿐이다.


한국에 파시즘이 도래하는 날


p208 한국의 시민들은 일상적으로 ‘정치는 잘나고 똑똑한 놈들이 하는 것’이라고 말하니 말이다.


3부 내려가는 시대에 살아남기 : 사회적 열패감과 무기력을 넘어


소통없는 시대에 사람들을 설득하는 법


p215 한국 사회의 정치적 민주화가 다시 독재사회로 역전될 수 없겠지만, 여전히 ‘침묵’이 처세의 미덕이 되는 사회다.


p216 인터넷이 토론의 온상이 된 것은 다른 곳에서 토론을 할 수 없기 때문이며, 다른 곳에서 얘기할 수 없는 정치적・사회적 약자들이 ‘도망 다니면서 자신의 주장을 개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p219 우리는 주로 자신이 관심있는 문제, 그래서 잘 알고 있다고 믿는 문제에 대해 어떤 이가 헛소리를 하면 분노하여 논쟁의 욕망을 느끼게 된다.


오늘날의 대학은 무엇인가


p232~233 그들의 불만 때문이 아니라 그것의 파급 효과 때문이다. 말하자면 ‘사회’와 ‘부모’다. 사회의 입장에서는 청년층이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를 지탱하는 저임금 노동자로 편입되지 않는 상황이 괴롭다. 그리고 부모 입장에서는 많은 돈 들여 키운 자녀가 안정적인 정규직 일자리에 편입되지 않는 상황이 괴롭다. 이 청년층의 부모들은 하필 이 사회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베이비부머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들의 미취업에 불만을 가지는 두 주체의 이해관계는 충돌한다. 사실 두 주체는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한 현상에 대한 다른 관점의 반영이다. 가령 그들의 부모들은 자기 자녀에 대해서는 “이 사회에서는 첫 직장이 제일 중요하니 일이 년 더 내 돈 받고 살더라도 좋은 곳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하지만 신문을 펴 들고 외국인 노동자가 많다는 소식을 보면 “요즘 애들이 눈높이를 안 낮춰서……”라며 혀를 끌끌 찬다. 청년실업, 결혼, 부동산 문제 등에 대한 보수 언론의 보도를 유심히 살펴보면 그들의 우려가 정확히 청년이 아닌 그들 부모들의 문제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최근 한두 해만의 현상은 아니다. 


p235 사회문제를 거시적으로 조망하는 시야를 잃어버린 대학생들에게 사회에 관심을 가지라고 요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부당한 요구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사람들은 왜 파업을 불편해 할까


p244~245 공장의 일자리가 평범한 사람들로 하여금 투쟁에 나서지 못하게 할 만큼 열악하고, 업주들이 약간의 투쟁으로도 요구 조건을 들어준다는 기대를 결코 할 수 없는 현실에선 그렇다. 이런 부조리한 세계, 그러니까 우리 세계에서 투쟁하는 해고 노동자들은 대체로 뭔가 특이한 이력이나 성품을 지닌 이들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사실’을 진보 언론들이 숨기는 것을 조소하며 투쟁의 뒤편에 평범한 노동자가 아닌 ‘직업적 시위꾼’들이 준동하는 현실을 비웃을 것이다. 그렇게 많은 시민들은 객관적으로 ‘말이 안 되는’ 처우를 받고 사는 것으로 보이지만 왜 투쟁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싶은 사람들을 접할 때, 이 사안에 대해 적당한 동정을 표하다가 투쟁이 길어지면 ‘외면’하게 된다.


p246 경제민주화를 주장하는 자유주의 경제학자 중 한 사람인 김기원 교수도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정리해고는 기업의 정당한 권리이며, 그로 인한 문제는 복지국가를 만들어서 해결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김기원이 쌍용차 청문회에서 안타까움을 느꼈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른바 ‘유연 안정성’ 테제다.


p247 쌍용차 투쟁은 분명히 분노할 수밖에 없는 그 말도 안되는 기획 부도 및 해고 과정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비정규직을 외면하며 제 잇속을 차려왔던 정규직도 가장 참혹한 희생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는 측면이 있다. 파업 종료 이후 3년 동안 스무 면이 넘는 사람들이 참혹한 죽음을 맞은 것을 널리 말하면서도 또한 노동운동 내부에서 이런 부분을 고민해야 한다.


p248 변혁이란 적어도 여러 사람이 함께할 수 있을 때 오는 것이지 이념이 투철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삿대질하고 호통친다고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p252 파업을 이적 행위라 보지 않고 자신이 노동자라는 사실을 마지못해나마 긍정할 수 있는 이들이 파업에 대해 가지는 모종의 불편함의 원인을 파헤쳐야 한다.


p255 우리의 정치의식은 정부가 삶의 문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요구를 하는 것에 이르지 못했고, 여전히 ‘민주주의 vs 독재’의 구도로 사태를 파악한다. 이것은 ‘민주 vs 독재’의 구도이며, 더 나아가 ‘공익 vs 사익’의 구도가 된다. 민주주의를 주장하고 각자 공익을 말하는 이들끼리의 의견도 다를 수 있고 그런 이들이 내세운 정책도 서민을 힘들게 할 수 있다는 ‘상식’은 이들의 의지 체계에 들어오지 못한다.


p257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이해관계가 개입하지 않은 사건을 지켜볼 때는 약자에 감정이입을 하려고 한다. 심지어는 능력을 키우기 위한 무한 경쟁과 약자의 도태의 필요성을 기꺼이 말하는 아저씨들도 드라마나 뉴스를 볼 때는 그렇게 한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이 사회적인 문제에서 ‘진보적인’ 시선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마음속으로 상정하는 ‘약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무기를 뻔뻔할 정도로 활용해서 제 권리를 지키려는 현실 영합적인 ‘을’이 아니라 어떠한 자력 구제 장치도 가지지 못하고 가해자에게 짓밟히는 ‘피해자’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태가 가해자-피해자 이분법으로 명료하게 드러나지 않는 경우 (그러니까 대부분의 경우에) 그들은 판단을 유보하거나 포기하곤 한다.

     하긴 구체적인 피해를 당하고 있는 어떤 약자에 대한 관심이 없다면 우리가 오지랖 넓게 남의 일에 관심을 가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본능처럼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그런 도식에서 정치적인 관심이란 것도 자라나는 것일 게다. 그러므로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도식 자체는 아니고, 추후에 사회 현실이 머릿속 멜로드라마와 다른 것임이 밝혀졌을 때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는 것이다.


당사자 운동을 위한 조건


p266~267 학생운동권, 혹은 학생정치 조직에서 20대 문제를 해결할 대안이 나오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것은 단지 그들이 부족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평균적인 20대들이 정치적인 접근이나 연대를 통한 문제 해결방식에 대해 신뢰를 잃었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집단이나 어떤 연대의식이 특정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 그러므로 가치 지향을 품고 다른 이들에게 말하는 것은 결코 손해 보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다. 이 인식이 없는 상황에서 정치조직 가입을 권유한다는 것은 곱셈의 효용성을 의심하는 이에게 인수분해를 가르치는 것과 같다. 학생운동 조직이 '88만원 세대'의 미래에 돌파구를 가져오리라는 희망이 들지 않는 이유이다.


잉여 세대를 위한 정치가 가능할까


p284 20대는 산업화 세대가 더 이상 산업화가 되지 않는 이유로 자신들을 지목해도, 민주화 세대가 더 이상 민주화가 되지 않는 이유로 자신들을 지목해도, 군소리 없이 듣기만 했다. 어쩔 때는 자기네들 스스로 그 말이 좋다고 여기저기 퍼다 나르는 마조히즘적인 작태를 보이기도 했다. 냉소적으로 말한다면 시대를 잘 만나 예술을 그 정도로 할 수 있었다 평할 수 있는 김형태나 신해철 같은 이들이 청년의 무기력함이나 정치 무관심을 질타해도 그게 옳은 말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부모로부터 많은 투자를 받았으나 그 투자를 회수할 방법을 찾지 못하는 20대들은 부채감에 시달린다. 그 부채감이 그들로부터 말을 빼앗아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이나 현실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얘기하지 않고 자신들을 모든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사회에서 겉돌게 된다. 


p290 정치적으로 무능한 오늘날 20대의 현실은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비평'의 대상이다. 그리고 비평을 넘어 상황의 변화를 꾀하기 위해서는, 결국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서는 정치적 행동이 절실하다. 


시대를 해석한다는 것


p295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세 번 바꾸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한 번은 그의 당선을 통해, 다른 한 번은 그의 통치를 통해, 마지막 한 번은 그의 죽음을 통해 말이다. 첫 번째 것이 386세대의 재정치화와 어떤 386후세대의 정치화를 이끌어냈다면, 두 번째 것은 상당수 386 후세대를 냉소주의와 허무주의로 이끌었다. 그리고 마지막 것이 만들어낸 '깨어 있는 시민'이라 불러야 할 정치화된 386후세대 그룹이 첫 번째 유산과 연합하여 두 번째 유산에 적대하고 있는 현실이다.


나오며 : 이 세대에 남은 것들


p300 “특정 세대가 사회적으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인정하는 어떤 생산 과정에 참여하기가 지극히 어려워진 현상은 한 세대를 무기력증과 우울함이 결합한 어떤 저신 상태로 내몰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건조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생산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존재하기에 필요한 만큼을 생산한다. 그리고 존재의 이유는 맹목적이며, 가치 판단의 대상이 아니다.”







3. ‘내가 저자라면’


■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목차 및 전체적 뼈대


들어가며 : 잉여 시대를 명랑하게 돌파하는 청춘 여행

1부 잉여의 이유 : 어쩌다 우리 인생이 이렇게 되었을까

 자의식

 창작욕

 파편화

 청춘의 유예

 단골집이 필요 없는 세대

 후배의 실종

 문어체 소년의 취미

 세입자의 서재

 학벌 사회

 경쟁

 의미 부여

 문화 자본

 그 남자와 그 가족

 스타 리그

 우리편 전문가와 냉소

 소수에 대한 혐오

 교양의 실종

 군대와 영어

 정치의 소비

 내려가는 사회

 

2부 루저들의 사회 : 여긴 어디? 나는 누구?

 20대 멘토 담론의 현실

 루저는 ‘세상 속의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88만원 세대론'의 딜레마

 누가 우리를 명명하는가

 왜 세대론이 우리를 괴롭힐까

 한국에 파시즘이 도래하는 날

 

3부 내려가는 시대에 살아남기 : 사회적 열패감과 무기력을 넘어

 소통없는 시대에 사람들을 설득하는 법

 오늘날의 대학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왜 파업을 불편해 할까

 당사자 운동을 위한 조건

 잉여 세대를 위한 정치가 가능할까

 시대를 해석한다는 것

 

나오며 : 이 세대에 남은 것들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제목에서 보듯 이 책은 세대론에 관한 담론이다. 청춘, 이십대의 목소리를 보여주는데 저자가 2007년부터 2013년까지 일간지와 계간지에 쓴 칼럼과 기고문 등을 바탕으로 한다.

 저자는 청년 세대가 가지는 냉소와 무기력을 발견하고 이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지금 사회는 ‘청년’ 문제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고 저자는 이것은 청년들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청년 집단의 문제가 아니라 후기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사회적 충격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좌절되는 이 시대에 대한 청년들의 냉소와 열폭과 무기력을 낳은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탐구하면서 청년들을 바라보는 청년세대가 말하는 진짜 청년들의 모습이다.

 저자는 청년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1부에서 청년 문제를 이야기하며 자신의 일상을 드러내고 2부에서는 청년 문제에 대한 담론을 이야기한다. 3부에서는 사회문제와 청년 문제를 함께 바라보며 어떠한 인식이 필요한지를 이야기한다.


■ 보완점


 이 책이 출간된 것은 2013년도 초반이다. 저자가 2007년부터 쓴 글에서 시작되었다 하니, 1983년생인 저자가 20대였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러니 정말로 20대가 쓴 20대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20대에서 30대가 말하는 자신들의 이야기보다 다른 세대가 보는, 이삼십대의 이야기가 많았다. 그리하여 걱정스럽고 우려스러운(같은 말인가^^::) 이십대 담론이 즐비했다. 더불어 암울한 미래를 염려하며 그들은 청춘들에게, 젊은 세대에게 좀더 열정적으로 살 것을 채찍질하거나 좀더 이기적이지 않기를 주문했다. 혹은 그들의 삶을 반면교사로 삶아 자신들의 삶과 비교하여 새롭게, 미래에 대한 다짐을 하거나 새로운 자신들의 역할을 정립하거나.

 그러한 비판과 혹은 격려를 들어야 했던 이삼십대의 목소리는 어떠할지, 이 책의 저자를 통해서 그들이 바라보는 이 시대와, 그들의 세대의 관심사를 들을 수 있었다. 뭐, 어찌보면 결론은 다르지 않은 듯한 이야기이다. 어쨌거나 지금 세상살이는 힘들다는 것이고, 문제가 많다는 것이고, 누구든 나서서 이 문제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러려니 여러 여건이 안 된다는 것이고, 그런 사회 속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지쳤다는 것이다. 익숙하게 들어오던 비판에 선 이십대를 바라보는 눈에서 이십대가 자신을 바라보는 자조적인 모습들이 더 많이 비쳐진다. 그러나 이 또한 청춘의 한 단면인 것. 

 키보드 워리어, 인터넷 논객이라는 수식어 때문이지 자신을 이야기하는 부분들에선 블로그느낌이 났다. 하긴, 요즘처럼 블로그에 글을 쓰고 책을 내는 것이 보편화된 상황에서 블로그글과 책쓰기 글이 따로 있을까만은. 인터넷을 하는 세대임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유저들이 사용하는 용어가,,,낯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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