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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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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23일 11시 41분 등록

[출간기획안]


■ 제목 사랑보다 분노


■ 저자 소개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하고 소소한 개인으로 매번 보호색을 갈아입는데 지쳐 소멸해 버릴 뻔하다가 ‘분노’의 에너지로 재생하는 중이다 목소리를 잃은 ‘문제족’에서 탈피하기 위해선 ‘정당한 분노’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아 가는 중이다. 사회의 문제는 개인의 변화로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양산하는 구조의 변화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정당한 분노’를 인식하고 표출할 방법을 찾고 있다. 우선, 이 책을 통해 자기만의 고유의 색으로 세상을 살아가자고 부르짓는 분노의 선구자, 분노의 선동쟁이가 되는 것을 방법으로 삼았다.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어쨌든, 기-승-전-‘복지’를 외치며 복지사회를 염원하고 있다.


■ 이 책을 쓰는 이유

   이 책은, 첫째, 내 삶에 대한 위로와 격려이다. 지치고 힘든 삶, 나 혼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위안하던 것에 대한 위로와 반성, 사회변화에 맞추어 수동적으로 변해가는 모습에 대한 자각과 반성에서 출발했다. 둘째, 분노의 패러다임 전환을 촉구한다. 사회의 불안과 패배적인 분위기는 ‘분노’가 금기된, 분노하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사회에 대한 분노가 불온시되는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셋째, 공동체 사회에 대한 인식이다. 사회구성원 모두가 행복하게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정치권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 정책에 대한 관심과 참여의 ‘분노’가 필요하다.


■ 이 책의 독자

  살아가는데 분노가 솟는 사람들과 살아가는데 분노하는 것이 힘든 사람들


■ 목차

여는 글_사랑보다 분노


1장 미안하다, 분노(憤怒)해서  


왜 분노하는가

 - 생은 분노다

 - 누군들 이렇게 살고 싶었으랴

 - 분노유발자들

 - 갑을가든의 병정들

 - 욕망하고 욕구하고 요구하고

 - 욕망의 결여 vs 욕망의 과잉


분노의 방향이 어디로 흐르는가

 - 집밖을 떠나지 않는 분노

 - 집을 탈출한 분노

 - 마냥 분노한다

 - 그리하여 병든 사회


2장 미안하다, 분노(奮怒)하지 못해서 


분노 명명법

- 분노 삼종세트를 소개합니다

- 한국인, 화병의 역사는 길다

- 개인적 일탈. 정신병이시군요

- 한 성깔하시네요


부추기며 금기하기

- 인생은 희애락이야

- 두려움이 금기를 만든다

- 푸른 수염의 아내들처럼

- 한놈만 팬다

- 카멜레온의 세상에서


바쁜 세상이란 말이야

- 감정을 잃다

- 갑을가든에서 살아가기

- 스스로 입은 보호색

- 부자가 라면을 먹을 때

- 재크와 콩나무를 너무 봤어

- 해야 할 일이 많아

- 뭘 해야 할지 모를 뿐이지


3장 미안하다, 분노(分怒)하자   


지금은 분노해야 할 때

- 사랑할 시간도 모자라니까

- 빵을 먹기 위한 말 한마디

- 분노의 정치학

- 투표가 정답은 아니니까

- 무관심은 무관심이지

- 리필! 리콜! 콜?


분노의 미학

 - 분노활용법

 - 분노는 에너지

 - 건강한 분노가 일으키는 힘

 

분노를 다시 생각해

 - 분노는 허들링이다

 - 나눔의 다른 이름

 - 폭력이 아닌 저항이다

 -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분노 사용설명서

 - 금기는 깨는 것이 달콤해

 - 분노를 창조해, 창의력있게

 - 조금씩, 뜨겁게. 절대로 멈추지마


닫는 글_역시 분노다!



■ 여는 글_사랑보다 분노


요람에서 무덤까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정치란 말의 쓰임은 이상하다. 그 모든 사회적 활동의 산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특정인’을 가리키는 말로 치부된다. 감히 ‘우리’가 관심가질 만한 것이 못되는 것으로 보는 듯도 하다. 물론, 정치는 좁은 의미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다. 그래서라고 보기엔 애매하지만 그 ‘다스리는’ 주체를 전적으로 ‘한 사람만의 역할’로 치부하는 것은 그의 강한 힘을 믿어서일까. 그 강한 힘에 눌려서일까.

 어쨌든 그렇게 어느덧 ‘정치를 말하는 것’은 그 ‘한 사람’에 대한 ‘불충’이 되어 버렸다. 나아가 정치이야기의 귀결은 싸움이 되고 만다. 특히 ‘지역’이라는 특수성을 내세우게 되면 그 싸움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 버린다. 그 파도는 어디로 얼마만큼 덮쳐 갈지 모르겠다. 과장되어 말하지만 폼페이 화산 폭발만큼의 위력을 가지는 것 같다. 이만큼의 위력을 가졌음에도 우리의 정치이야기와 정치의식은 여전히 ‘하위’적인 상태에서 이루어지고 있을 뿐이다. ‘정치’가 무엇을 위한 방향의 이야기가 아니라 네 편, 내 편을 가르는 구별짓기의 다른 이름인 까닭이다.

 처음부터 이러하진 않았을 것이다. 아니, 처음부터 그랬던가. 성숙하지 못한 정치인과 정치의식이 한국적인 토대에 스멀스멀 자리잡는 방식이 그러했고 그것을 이어가는 방식이 그러했다. 우리의 정치는 ‘우리가 말할 것’이 아닌 너무도 멀리, 높이 있는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호모 폴리티쿠스라고 오랫동안 명명된 이름 하나를 가지고도 어느새 정치적인 인간에서는 상당히 소외되어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느끼듯이 뚜렷하게 정치는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래서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음각처럼 내려않는 것이 아니라 말해야 할 것이라고 양각처럼 도드라져야 할 것이다. 멀리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분명 정치는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하며 사회질서를 바로잡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결국 다양한 가치에 둘러싸이게 된다. 사람들의 욕구는 다양하니까. 그래서 정치란 이러한 가치를 권위적으로 배분하는 일이라고 누누이 들어왔다. 가치를 권위적으로 배분한다. ‘권력적’으로가 아니라. 이러한 사람들 간의 의견차와 이해관계를 해결하는 이러한 모든 과정들이 정치과정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과정을 통해서 ‘정책’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정치에 관여하고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여기에 있다. 정치는 ‘한 개인’의 것도 국회의원이라 불리는 그와 동류의 ‘정치인’들의 것이 아니라는 아주 기초적이고 선거 때만 되면 반복적으로 듣는 말은 잠시 접어두겠다. 정치가 ‘정책’을 만들어낸다는 사실만을 잊지 않으면 된다. 정책이란 우리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이 정책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역사를 뒤돌아보면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 피폐화된 삶들을 무수히 만날 수 있다. 또한, 그 폐해를 지금도 겪고 있는 우리이다. 좀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양한 정책들을 통해 소외됨이 없이 행복한 삶을 꿈꾸는 우리이지만 정치를 통해 정책이 탄생한다는 것을 잊어버리게 되는 선택을 하고 있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어 버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래서 일어나는 현실의 모습들은 온통 분노다.

 선거 때면, 실업정책이 제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실업자이든, 보육정책이 보다 확고하게 되기를 바라는 부모이든, 교육정책이 획기적으로 변화되기를 바라는 학부모든, 취업과 육아가 효율적으로 양립하기를 바라는 여성이든, 구조조정을 당하지 않고 정규직으로 계속 일할 수 있기를 바라는 직장인이든, 노인연금보험이 좀더 안정되기를 바라는 노인이든, 사회보장이 좀더 사회적 약자가 자립할 수 있는 정도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이든……. 자신이 바라는 정책을 지지하기보다 결국엔 ‘부자 만들어 줄게’를 전폭적으로 지지한다.

 너도 나도 부자가 되는 길이 있다면 그것이 다같이 꿈꾸는 행복한 세상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누군가는 부자가 되지 않아야 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얘기는 달라질 것이다. ‘너만’ 부자로 만들어 준다는 미다스의 손에 현혹되지 않고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모색하면 한다.

 어쩌면 그것의 시작과 끝은 ‘요람에서 무덤까지’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정착되는 데서 이루어질 것이다. 이 말 역시 오랜 정치과정에서 반복적으로 나온 말이다. 모든 정치가 만들어내는 정책 중에서도 우리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는 것은 ‘정책’이며 우리가 정당하게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 방법 역시 정책에 관한 것이다.

 

분노하고 분노해요


 사랑에도 다른 이름이 있다. 잔인한 사랑, 끔찍한 사랑, 위험한 사랑. 증오의 사랑 등등 말이다. 그러니까 ‘사랑’이란 말을 구구절절하게 따져보면 무조건 좋고 긍정적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분노도 다르지 않다. 모든 감정의 기능에는 그것의 장단점이 있기 마련이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느끼는 것 인생의 본성이고 필연이다. 그 중에 하나, 분노. 분노에도 거룩한, 조용한, 필요한, 분노가 있다. 물론 더없이 폭력적인 분노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폭력적이고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는 분노만을 생각한다. 그러한 이미지로 인해 분노를 하지 않을 것을 주문받고 금기당한다.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이 무조건적인 충성과 복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듯 사랑의 한 방식으로 분노가 가능하다. 하나의 표현 우리가 분노라는 것에 특정한 이미지만을 잡아끌고 있음을,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분노’를 무조건적으로 성질을 폭발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분노가 폭력으로 직결되는 것도 아니다. ‘분노’란 물론, 마음 속의 ‘화’일 수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의 인식’이 될 것이다. 반복된 패배감과 무기력에서, 무관심에서, 내 몫의 밥그릇 챙기기에도 버겁다며 외면해 버리고 있는 현실에서 ‘분노’하는 것이 당연한 것은 그것이 ‘관심’의 출발이 되기 때문이다. ‘분노’를 나쁜 것으로 폭력과 동일시하는 이들은 ‘분노’를 개인적인 것으로 여기는 까닭이다. 그들의 분노는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 사회를 향해서가 아니라 개인에게로 향하고 있다. 그것은 자살로, 타인에 대한 분풀이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사회는 분노의 방향이 엉뚱한 대로 흐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정치사회적인 문제 속에 삶의 긍정을 잃고 무기력해진 개인의 스스에게, 타인에게, 사람에게로 향하는 파괴적인 분노를 제도적인 문제로 인식하여 바꾸어야 한다. 그래서 분노의 정의는 다시 필요하고, 분노의 힘에 대해 알아나가야 한다.

 분노는 살아갈 수 있는 힘이자 에너지가 될 수 있다. 그것은 분노는 사람에 대한 연민이자 공감의 표시다. 이 ‘사회’에 대판 분노는 결국 사람살이에 관한 것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자유와 행복이 빼앗긴 지점에서 나는 개인에 대한 ‘위로’가 아니라 사회에 대한 ‘분노’를 말한다. 그것은 개인적 차원의 울분이 아니라 당연한 권리로서의 목소리자 의무이다. 그것은 잘못된 정책에 대한 ‘저항’의 표현이다. 우리의 분노는 질척거리는 격분에 가득 찬 ‘분노’가 아니라 담백한 ‘분노’다. 그것은 개인의 이익을 위해 높인 분노가 아니라 이 사회에서 당연히 지켜져야 할 보편적 정의에 대한 ‘분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분노를 나누어야 한다. 개인의 고통에 찬 ‘분노’를 나누고 제도적인 문제에 대해 인식하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들을 나누어야 한다. 분노하고, 공감하고, 저항하여 우리가 이루어내야 할 것은 인간다운 삶의 회복이다.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삶을 사는 것, 인간다운 삶을 살아낼 수 있는 최소한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분노한다가 아니라, 너도 분노하라고, 우리 모두 분노하자고 말한다. 개인의 분노의 경험 속에서 분노의 에너지가 파괴의 에너지가 아니라 창조의 에너지가 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보자고 말이다. 그것은 일단, 문제의 인식, 분노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결핍’이 가져오는 분노를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결핍’에만 주목하고 ‘분노’에는 주목하지 않는다. 결핍이 현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분노는 원인과 해결을 위한 모색점이 담겨 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아니, 무덤을 넘어서까지도 우리는 분노해야 한다.


감정을 잃다

이모티콘(emoticon)을 날림

 한국인들은 언어적으로 상당히 우물쭈물한 사람이다.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서툴고 에둘러 이야기하고 핵심을 뒤늦게 찌른다. 이러한 탓인지 아닌지 색깔 표현은 상당히 세심하다. 검은색을 서양에서 black이라 한다. 농도가 다를 땐 그저 짙다, 옅다 정도로 얘기한다. 하지만 우리는 검다, 거무튀튀하다, 거무스름하다, 거무죽죽하다, 거무끼리하다, 새카맣다, 시커멓다, 까무잡잡하다 등 그 색깔의 표현이 끝이 없다.

 한국인들이 유난히 시각이 발달해서일까. 기껏해야 좋은 시력이 1.5가 평균이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대부분은 안경으로 혹은 콘텐츠렌즈와 라식 등의 수술로 교정한 시력이다. 몽골인들은 시력이 9.0이 있으며 보통 4.0이라고 한다. 몽골인의 시력을 알기 전까지는 시력의 최고가 2.0인줄만 알았다. 이러한 몽골인의 시력을 유목민의 시력이라고 하니 농경인의 후예인 우리들의 시력은, 조상이나 지금 우리들이야 별반 다를 리 없을 것이다. 그러니 색깔의 세심한 표현은 시력이 관건이 아니라, 생각의, 언어의, 인식의 경향일지 모른다.

 왜 한국인들은 유독 이렇게 색깔에 민감할까. 왜 늘 에둘러 말할까. 색깔에 상징을 더하여 표현하는 경향을 즐기는 것일까. 그럼에도 감정을 정확하게 인지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이모티콘이 등장하는 사회다. 이모티콘(emoticon)은 ‘감정’을 의미하는 영어 ‘emotion’과 ‘유사기호’를 의미하는 ‘icon’의 합성어이다. 인터넷 상에서 감정을 표시하는 기호다. 다양한 감정의 스펙트럼이 기호화되어 펼쳐져있다.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의 얼굴에서, 목소리에서, 몸짓에서 감정을 읽어내듯, SNS의 세상에선 이러한 이모티콘을 통해 감정을 알아간다. 심지어 다양한 이모티콘이 자본과 결합하여 코인을 요구하기도 한다. 자판기를 누르듯 우린 이모티콘을 누른다. 

 문자 메시지를 하거나 카톡을 날릴 때면 다양한 이모티콘을 보면서 잠시 헷갈린다. 이 이모티콘이 적당한가? 아닌가? 순간 순간 재빠르게 글이 날아오는 카톡 세상-그렇기에 이런 이모티콘과 스티커들이 활발하게 성장하였을 것이지만-에서 얼마쯤 당황한다. 즉각적인 나의 감정을 잘 모르겠기에 그렇다. 내 감정임에도 그렇다. 그러고 나면, 더러 문장의 맥락에서 내 감정과는 일면 무관해 보이는, 으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모티콘을 날린다. 퍽~~푸욱. 이모티콘에 따라 또다시 이모티콘만이 몇 번을 오가는 대화가 이뤄진다. 웃거나 깔깔거리거나 째려보거나 등등의. 감정을 날린 손길을 타고 내 얼굴도 그와 같은 표정을 담고 있을까. 화면 전체를 장악하며 움직이는 이모티콘을 보며 뒤따라 나오는 이모티콘의 홍수를 보면서 생각한다. 우리는,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잘 알고 있는 건가. 상대방에게 자신의 감정을 잘 내보이고 있는 건가.

 감정을 분석하여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는 로봇까지 나온다고 한다. 거짓말탐지기도 감정반응이긴 하다. 영화 인터스텔라에 나오는 로봇 타스는 유머까지도 구사한다. 더구나 농담의 비율 조정도 가능하다. 어떻게 설정을 해 놓을 것인가. 진실 70%, 농담 30%로 설정이든  농담 10%, 진실 90%의 설정이든 농담과 유머가 가능한 로봇의 진심(?)을 이해하는 건 그와 대화를 나누는 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대화라는 것은 나와 상대방과의 교감이니 말이다. 그러니 10%의 농담을 받아들이든 70%의 농담을 받아들이든 어느 한 면을, 오로지 받아들이면 그것은 진실 100%로 다가올 수 있다. 그 비율을 효율적으로 조정한다는 게 가능하긴 한 걸까. 사실, 많은 시간 동안 감정을 속이는 것은 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감정 뒤에 농담이란 말을 덧씌우면 될 일이었다. 감정이란 늘 아쉽게 표출되는 언어였다. 직장인이기에 그러했고 직업적으로 단련되어 그러했고 인간관계 속에서 감정을 위장하는 일은 언제나 가능한 일이었다. 오히려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을 뿐이다. 오죽하면 감정노동이란 말이 존재할까. 우리의 감정은 이모티콘에 갇혀 진실 100%가 아니라 농담과 거짓의 농도가 70%인 사회에 살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진실한 마음을 표출할 길 없는 우리 사회에서 이모티콘의 등장은 행복인지도 모른다. 조금은 유머를 간직한 기호화된 패턴에 감정을 의탁하여 적당히 농담이 섞인 표현으로 위장하면 오케이. 어쩌면 방금 날린 저 이모티콘이 정말로 나의 감정일지 모른다. 색깔의 조각조각의 표현을 언어로 찾아내듯 감정의 조각조각을 더 표현하기에 이모티콘도 진화되는지 모른다. 그만큼 우리의 감정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말은, 기호는 모자란 것이 아닐까.

 다양한 색깔의 표현, 감각적인 우리의 언어가 달리 느껴진다. 세심하고 예민한 감성을 가진 우리들이기에 보다 그것을 잘 구분하여 말하고자 하였던 것이 아니었더라고 말이다. 새삼 ‘빨갛다’라는 것을 정확히 말하지 못하는 표현으로 습성으로 여겨진다. 빨간 것을 빨갛다하지 않고 불그스름하다, 발그레하다, 발그족족하다, 볼그댕댕하다라고 말하는. 노랗다라고 말하지 않고 누르죽죽하다, 노르께하다, 노릇노릇하다, 노르무레하다, 누렇다라고 말하는 우리의 언어적 습성. 세심한 감정의 골을 고대로 내보내지 못하고 돌려 말하고 감춰 말해야 하는 우리의 감성. 누가 우리에게 말할 권리를 잃어버리게 한 것일까. 무엇이 우리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주저하게 한 것일까. 이모티콘으로 보내는 그 감정의 언어가, 감정의 표현이 지금 얼굴에도 그대로 나타나는 감정일까.

 우리는 감정을 잃어버린 것일까. 저 깊숙이 감추어 둔 것일까. 건들면 여러 갈래로 나올 세심한 우리의 감정의 골은 모두 어디로 흘러가고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아니면 우리는 이 세심한 언어적 습성과 감정을 찾아낼 말을 찾기 위해 헤매고 있는 것일까. 보다 다양한 이모티콘으로 세심한 우리의 감성을 말하기 위해서 계속 이모티콘을 찾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그러한 이모티콘을 누르기 위해서 코인이 필요한 우리는, 코인이 필요하지 않은 이모티콘, 감정만을 날리고 있는지 모른다. 새로운 이모티콘에 필요한 코인을 얻기까지는 코인을 얻느라 이모티콘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모르는 채 계속 살아갈런지도 모른다.


빵을 먹기 위한 말 한마디

 빵이 없으면 케익을 먹으라고 하세요.

 이 한마디가 왕비 마리앙트와네트를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백성의 어려움에 대해 알지 못하며 오만하고 사치스러운 한 나라의 왕비로. 철없고 무지한 이 말은 백성들에게 각인되어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된 것으로 얘기되고 있다. 실제로는 마리앙트와네트가 한 말은 아니라고 한다. 그 말의 처음 쓰임도 왕비의 백성에 대한 측은지심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말은 현재에도 가진 자들의 오만함과 무지함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된다. 일반 백성들의 실제 생활에 대한 무심함을 넘어선 몰이해, 불통의 극치가 종국엔 혁명이란 이름을 연결하는 고리가 되었다.

 마리앙트와네트 이후의 시대에도 저러한 말들은 통치자의 생각에서 입으로 많이 내뱉어 진 다. 우리나라만 해도 대통령이나 당대표, 국회의원, 장관, 총리들의 입에서 반복되어 나타나는 문구이기도 하다. 특히 지금과 같은 ‘복지과잉’의 진단시대에는 더더욱 난무하며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다. 마리앙트와네트는 하지도 않은 말들이 불씨가 되어 오랜 시간 동안 불통과 무지함의 아이콘이 되었는데 불행히도 정보기술의 발달로 ‘누구의 말씀’인지 잘 알게 되는 오늘날에 저러한 말들을 부지기수로 듣고 있는 우리네는 왜 이렇게 잠잠할까.

 다시금 생각해보니 우리들의 마리앙트와네트는 ‘빵대신 케익’을 외치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주기 때문인 것 같다. 충분한 빵을 세상에 내놓는 것으로 말이다. 아, 물론 세심하게 커피까지도 잊지 않고 말이다.

 나는 간혹 길치가 되긴 하지만 언제부턴가 더더욱 길을 잘못 찾는 것 같았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니 가도 가도 거리가 같기 때문이었다. 랜드마크를 찾아, 중간 지점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길을 두리번거리다 보면 여기도 저기도 아까 본 편의점과 커피숍과 빵집이 즐비한 것이다. 현재 위치에서 좀 비껴나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앞으로 가야 할 길에도 저 건너편에도 파리바게뜨와 뚜레주르와 까페베네의 홍수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달로와요’ ‘아티제’ ‘오젠’ ‘베키아 에 누보’ ‘블리스’가 연이어 등장하다고 다시 사라졌다.

 무슨 말들의 전쟁이냐고? 빵대신 케익을 먹으란 말을 외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차려놓은 빵과 커피점들이 즐비했다는 말이다. 한때 ‘재벌 딸들의 빵전쟁’이라 불릴 정도로 재벌가의 베이커리 사업 진출이 활발했다. 이들이 딸들이라는 우연에 더해 ‘재벌딸의 빵전쟁’이 되었는데 이들의 베이커리 사업 진출은 그들의 안정된 자산-거대한 건물과 유통구조-로 손쉽게 수익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재산 분배에서 계열사를 받지 못한 딸들을 위한 선물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한다. 어쨌든 프랜차이즈 업체에 밀리고 이런 재벌딸들의 빵전쟁에 밀려 수많은 소상공인들이 그들의 빵집을 접어야 했다. 여전히 프랜차이즈 빵집과 커피숍이 증가하고 동네빵집이 되돌아오진 않았으나 그녀들의 빵전쟁이 막을 내린 것은 ‘말 한마디’1)다.

 물론 끊임없이 재벌들의 골목상권에 대한 원성이 높기도 했으니 그 때가 선거의 해라는 과도한 해석으로 진정성을 의심하지는 않겠다. 유력 대선 후보도 동일한 행보도 그 때 더해졌다 해도 ‘선거의 해’가 가지는 그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고 묵묵히 결과는 받아들이겠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그녀들의 ‘빵드세요’는 마감을 했으니까.

 내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이거다. 어느 드라마 제목이었던가, ‘따뜻한 말 한마디’. 아니, 우리가 빵을 먹기 위한 ‘그 말 한마디 말’ 말이다. 생각할수록 말의 힘은 강하지 않은가. 변하지 않을 이 자본주의의 시대에 자본의 위력은 더욱 강하고 틈이 없다. 이 사회에서 자본에 의해 스러지지만, 그렇기에 또한 서민들 역시도 자본을 얻기 위해 필사적일 수밖에 없다. 물론 자본에 대항하는 힘없는 빵들은 부풀기도 전에, 부풀 시간도 공간도 없이 쉬이 사라져버린다. 그런 자본이 (잠시) ‘멈칫’하도록 만든 말. 권력이 더해진 말이다. 자본과 권력은 본디 결탁하여 위력을 더하고 그들간의 끊임없는 결탁과 반목이 이뤄진다. 그들의 관계란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처럼 맞물려 있으니까. 그러나 표면적으로 자본을 누를 수 있는 권력의 말을 만나면 우리는 열광한다. 그 말의 힘이 힘없는 빵들을 부풀게 해줄 이스트인 것마냥 기대하는 까닭이다. 말이 권력이 아니라 진정한 말이 되어야 할 중요한 시점이다.

 경제사회를 떠나 민주사회, 시민사회라고 강조하는데, 시민사회의 권력은 시민이라고 하는데 우리에게 정말 권력이 있는 것일까. 우리는 몰라서 그 권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일까. 매번 선거 때만이 활용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는 걸까. 시민에게 ‘권력’은 없는가. 있지만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인가. 우선 활용되어야, 그것의 쓰임을 알 것이다.

 우리들이 내밀어야 하는 말 한마디는 무엇일까. 세상에 소리쳐야 할 말 한마디, 아니 소리치지 않고 덤덤히 해야 할 말. 그 말 한마디를 하고, 듣고, 싶다.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그런 저녁.

 당신의 하루가 저문다. 늘 그렇듯 피곤한 저녁이다. 업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쳐진 어깨와 무거운 발걸음이 함께 한다. 특히 몇 주간, 며칠째 야근을 반복한 주말 저녁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감기몸살까지 얹어지면 몸과 마음의 스트레스는 절정에 이른다. 그래도 실업과 구직난의 폭풍 속에서 눈뜨면 출근할 곳이 있다는 것을 다행이라 생각하며 성실의 표본으로 직장인의 하루를 마감하고 오는 길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오늘의 휴식이, 편안한 잠이 절실하다. 집이라는 공간은 비를 막아주고 추위를 막아주는 기본 이외 경제적 위치를 지적하는 것 이상으로 아주 중요한, 정말로 중요한, 심신의 안정을 주는 곳이니까. 아니, 주어야 하는 곳이니까. 즐거운 나의 집을 흥얼거릴 수 있을 만큼의 기력은 없지만, 어쨌든 당신의 집, 잠자리에서 이 모든 고단함을……. 이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비가 퍼붓기 전 편안하게 몸을 뉘일 수 있는 집에 도착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비가 거세게 내린대도 강철로 만든 집이라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안전하고, 안전하니까. 다만 잠을 잘 수 없게 할 뿐이다. 감기몸살에 피곤한 몸을 쉬려 했지만 당신은 한밤의 폭우에 잠에서 깨어난다. 수면을 방해받는 일이 얼마만큼의 극심한 스트레스를 가져오는 지는 여러 연구들을 거론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푸석한 몸으로 수면을 방해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비가 지붕을 때리는 소리는 리듬감이 전혀 없는 소음을 만들고 있다. 강철 지붕으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만들어내는 무자비한 소리가 당신의 수면을 방해한 것이다. 어랏, 저 강철지붕은 얼마 전 정부가 대대적인 세금을 투입해 교체한 것이다. 이 일대의 모든 지붕을 교체했으니 오늘 밤 잠못 이루는 이는 당신만아 아니라 마을 전체의 사람들로 확대된다.

 당신은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다. 강철 지붕으로 교체해 달라고 요구한 것이 당신이 아니듯 마을 사람들이 아니었고 왜 지붕이 강철, 아니 금속판으로 교체되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비가 내리는 밤마다 소란을 피운 것이 저 금속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이었다는 것만, 그것이 오늘도 당신의 잠을 방해했다는 것만 알 뿐이다. 극도로 피곤하다. 감기몸살이 다시 도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지난번 말라리아가 재발했거나.

 당신과 당신의 마을 사람들이 말라리아로 힘든 나날을 보낸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마을의 감염률이 증가하면서 즉각적인 해결책이 마련되었다. DDT를 살포하는 것이다. 말라리아의 원인 모기를 박멸하기 위함이다. 과연 DDT 살포의 효험으로 모기가 박멸된 것인지 말라리아가 점차 쇠퇴했다. 다시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 마을의 지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집은 한밤중에 무너지기도 한낮에 무너지기도 했다. 안전하고 튼튼한 집은 사라지고 집은 말 그대로 위협이 되었다. 조사 결과, 풀과 나무줄기를 엮어 만든 초가집 지중을 먹어치우던 벌레들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벌레들의 증가는 천적인 기생 말벌(parasitic wasps)이 DDT로 인해 죽으면서 생긴 결과다. 정부는 더 이상 벌레가 갉아 먹지 않기 위해 초가집 지붕을 금속판으로 교체한 것이다. 그것이 오늘같이 비오는 날 잠 못 이루는 드럼 연주를 만든 것이다.

 상황은 다시 악화되었다. 잠 못 들어 초췌해진 마을 사람들은 다시 또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들의 건강 악화 요인을 살펴본 바, 근원은 DDT로 돌아간다. 말라리아 퇴치를 위해, 모기 박멸을 위해 살포한 DDT에도 살아남는 벌레들이 있다. 이 벌레들을 도마뱀들이 잡아먹은 것이다. DDT가 몸에 쌓여 행동이 굼떠진 도마뱀들을 이번에는 고양이들이 잡아먹기 시작했다. 결국 고양이 역시 점차로 죽어나갔다. 톰의 약세는 제리의 강세를 가져오는 것이 톰과 제리의 법칙이다. 고양이 톰이 죽어가면서 제리 쥐의 비약적인 증가가 일어났다. 쥐의 증가는, 다시 말해 발진티푸스며 각종 전염병의 탄생을 말하는 것이었다1).

 이 모든 상황을 겪으며, 당신과 당신이 마을 사람들은 어떤 기분이 드는가. 우리는 오늘을 마감하는 잠자리가 편안하기를 바란다. 내일은 좀 더 나아지기를 희망하며 말이다. 그러나 내일도, 그 다음날에도 더 나아지리라는 기대가 무너져 버린 것을 알게 되면, 희망한다는 것이 좀처럼 쉽지 않은 상황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 어떤 감정에 휩싸이게 되는가.

 하나의 사회가 잘 굴러가기를 바라는, 그리고 그 속의 건강한 구성원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당신의 하루가 이렇게 저물고 있다. 편안한 하루, 그리고 좀 더 나은 내일이라는 희망을 꿈꾸는 오늘의 당신이 오늘밤의 편안한 잠자리를 걷어 채인 당신이 깊이 생각해봐야 할 밤이다. 그저 내일이면 ‘누군가’가 그날 하루의 즉각적인 해결책을 마련하겠거니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어서는 곤란하다. 이 금속 지붕을 때리는 비는 곧 그칠 수 있지만 다시 내릴 것이므로. 그러므로 ‘누군가’가 해줄 것이다가 아니라, 무엇이 필요한지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고 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더 이상 정부의 단편적인 해결책만을 지켜보고 있다가는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 채 새로운 문제들만을 떠안을 것이다. 그렇게 계속 DDT만 축적될 것이다. 그래서, 해결된 것은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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