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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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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 21일 20시 08분 등록

한 때,

어둠이 밀려오면 가스렌지 후드를 빼내고 그 윙윙거리는 소리를 즐기곤 했었다. 혹자는 취미치고는 유별스럽다고 할지 모르지만 간단한 설명을 덧붙이자면 사연인 즉 다음과 같다.

여행을 무척이나 좋아했었다. 물론 지금도 일상을 여행처럼 지내고 있지만 몇 년 전에는 마음의 8할은 늘 떠남으로 채워져 있었다. 짧은 일정의 국내 여행은 마음대로 여행이었지만 마음먹고 떠나는 해외여행은 밤 비행을 특히 즐겼다. 비행기는 하늘과 하늘 사이를 유영하고, 그 속에서 한 잔의 포도주를 마시며 우주의 침묵을 지켜보는 재미는 형언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여기에 더해서 여행의 묘미를 최상의 것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중저음의 비행기 소리다. 이는 ‘무도회의 권유’ 전반부에 나오는 첼로의 중저음을 3도 정도 올린 것 같다고나 할까? 아무튼 칠천 피트 상공에서 시속 385km정도로 나는 비행기를 통해서 나오는 울림은 색다른 감흥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수 없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그 여운을 즐기고자, 혹은 사정이 여의치 않아 또 다른 여행이 어려울 때는 대리 만족의 방법으로 가스렌지 후드 소리를 배경으로 하여 흡사 밤비행기를 타고 있는 양 나에게 최면을 거는 것이었다.

여름 방학이 시작되기 일주일전에 떠나는 4주 가량의 호주 현지 영어연수를 위한 비행기 탑승시간은 오후 7시 20분, 말하자면 밤 비행을 즐길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이었다. 개인적으로 떠나는 여행이라면 비행기 시간은 내 의지에 달렸다고 하겠지만 단체로 가는 일정이라 개인적 의사와는 무관한지라 일정과 연수 내용에 관계없이 떠나는 날부터 최고의 상태였다.

구석진 창가 자리.

한 잔의 포도주를 들고 느긋한 마음으로 창밖을 응시한다. 비행기가 정시에 이륙했기에 창밖은 아직도 밝다. 도시는 순식간에 한 폭의 그림 속에 남아있고 하늘은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베토오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으면서 나는 서서히 사람의 탈을 벗어던진다. 포도주도 온 몸 구석구석을 돌면서 모든 세포의 마디마디를 풀기 시작한다. 허식도 풀고 맺힘도 풀고 세상과의 끈도 풀어 제친다. 가끔은 집에 두고 온 가스렌지 위에 달린 후드의 윙윙거림의 그리움이 밀려오지만 그것은 한 순간뿐이다. 지금부터 나는 장장 10시간이 넘는 긴 시간을 황홀의 늪에서 자유형을 즐길 것이다. 나이 마흔이 지나서도 비행기 기장이 되고 싶었음은 이 밤비행기의 장3도와 5도의 어울림의 소리를 그리워함이라.

멜버른공항에서 입국 수속을 마치고 대합실로 나오니 현지 연수 staff들이 총 출동하여 환영이다. 이미 구면이 된 Mary와 Morie, 그리고 구면과 같은 느낌의 연수프로그램 총 책임을 맡고 있는 Debby와 유일 남자 Mark가 그들이다. 연수라는 어휘가 가지는 팍팍함을 덜어내자 Mark와 십 분가량을 가벼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물론 반은 즐거움을 담은 농담이다.

홈스테이로 지정된 집에 도착한 시각은 정오가 조금 지나서다. 오리털파카를 입고 들어선 집안에는 꽃향기가 가득하다. 꽃향기가 무슨 특별한 이야기 거리가 되랴만, 우리나라와는 달리 한겨울인 호주에서 천리향 향기가 진동을 함은 아무래도 평범한 느낌은 아닌 게 분명하다. 내 방이라고 이름 붙여진 곳에 여행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꽃향기의 근원을 찾아 나선다. 대문을 나서니 온 거리며 마을이 꽃으로 둘러싸여있다. 홍매화임에 분명한 한 그루의 나무가 대문 앞 모퉁이에 서서 온 가지에 꽃봉오리를 달고 있으며 대문 없는 집집마다의 뜰은 푸른 잔디와 꽃들로 가득 차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정원 모두를 타인을 위해 기꺼이 다 들어내어 놓았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들은 현명한지라, 그렇게 내어줌이 정원을 더 풍요하게 해 준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다.

비행시간에 이어서 두 번째의 행운

연수를 받는 곳까지의 거리가 다른 연수생들과는 달리 꽤 멀지만 1시간 정도의 출근시간은 꽃으로 보상받고도 남는다. 이 제 내일 새벽부터 나는 이 마을을 내 머리 구석구석에 모두 담을 것이다. 바람에 날리는 꽃향기는 손끝으로 주울 것이며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의 가는 떨림은 느긋이 바라보는 것으로 그와 소통을 시도할 것이다. 아침을 거른 시장기는 꽃향기로 이미 채워진 후라 늦은 아침을 겸한 점심을 해가 바다 한 가운데로 떨어질 무렵에야 한다. 빵 두 조각에 과일 몇 조각.

추위로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한지라 어깨며 팔다리가 아프다. 방을 나서도 방을 들어서도 그리고 이불 속을 파고들어도 춥기는 마찬가지다. 어둠을 헤치고 살금살금 대문을 나선다. 꽃향기가 진동을 한다. 낯설지 않는 이국의 마을, 집을 잃을 염려도 낯선 이방인을 만날 두려움도 없다. 그냥 이 새벽의 향기로움이 좋을 뿐이다. 몸은 오히려 밖에서 풀린다. 물론 두툼한 잠바 때문인지는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그 이유만은 아니다. 이불을 2개나 덮고 잤지만 여전히 추웠던 나로서는 맑고 산뜻한 새벽공기, 그리고 간간히 만나는 큰 키에 금발 은발의 새벽 산책객들이 흩뿌리는 싱그러움, 그리고 밤새껏 대지로부터 뿜어 올린 땅의 온기를 송두리째 쏟아내고 있는 나무들의 힘임을.

한 시간 가량의 산책길에서 돌아와 Host Jennifer와 그의 유일한 가족 Timmy와 인사를 나눈다. Timmy는 이미 노화의 길로 접어들어 눈이 멀어가고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온몸이 심하게 떨리는 15년생 된 개의 이름이다. 살아있는 개보다 인형으로 만들어진 개와 더 친한 나에게 Timmy, 그는 존재로 나에게 다가올지 모를 일이다.

이틀간의 ‘현지적응기간’이라는 이름의 휴식을 마치고 처음 시작되는 강의시간이다. 집과 강의 장소와 거리가 꽤나 먼지라 새벽 산책시간까지 계산을 하면 강의가 있는 매일 아침은 새벽 5시 이전에는 일어나야 한다. 물론 추위가 나를 5시 이전에 깨워 주겠지만 강의가 피곤함을 더 해 줄지, 아니면 이국이라는 땅에서 느끼는 가끔의 외로움조차도 날려 줄지는 모른다.

아침 9시부터 시작해서 오후 5시에야 끝나는 강의는 평소에 필요한 에너지의 두 배를 필요로 하는 강도 높은 과정이었다. 2시간 연속으로 실시되는 강의는 모든 촉수를 곤두세워야하고 끝없이 달려오는 질문에 응답하느라 잠시의 여유는 사치스럽다고 해야 할 정도다. 그러나 수업이 끝나고 tram을 타고 집으로 향하는 길은 행복하기 그지없었다. 과제가 많음은 추운 밤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되고 휴일의 달콤함을 더해 주는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7월 28일

끝없이 펼쳐지는 목장의 초원위에 소들이 한가롭다. 유난히 소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감탄사를 연발할 뿐이다. great ocean으로 현장연수를 떠나는 이 시간, 난 저 목장으로 달려가 하루 동안을 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솔직한 심정이다. 소들은 순수하고 꾸밈없다. 푸르른 목초만 있으면 그들은 행복하며 더 가지고자 안달도 부리지 않는다. 생각해 보라. 그들이 어디 우쭐대거나 더 많이 가지려고 다투기를 한 적이 있는가!

남극 가까이서 바닷바람이 불어온다. 유칼립투스나무 사이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겨울바람답지 않게 훈훈함을 담고 있으며 가끔은 끝없이 이어지는 바다풍경에 지루함을 느끼지만 이태리 출신의 기사 분의 독특한 이태리식 영어발음이 그 공간을 매워준다. 겨울을 안고 바닷가를 거닐며 생에 최고 젊은 날의 내 모습을 영상에 담아본다. 웃고 노래하고 그리고 가슴을 열고 달리는 내 모습에 내가 나에게 찬사를 보낸다. 새로운 날들은 이렇게 다가오고 모든 것은 또한 이렇게 지나가리라.

멜버른에서의 주말은 월요일 아침에 시작된다.

월요일이면 여러 여행지가 한가할 뿐만 아니라 각가지 요금도 저렴한 것을 최대한 활용하자는 목적의 현지 연수 프로그램을 담당하고 있는 Debby의 아이디어다.

주말 아침, jennifer가 출근을 하고 나면 집주인은 timmy가 대신 맡고 나는 timmy의 주인이 된다. 그를 은근한 목소리로 불러 쓰다듬어 주기도 하고 괜한 시비도 걸어본다. 그것도 시들해지면 tram을 타고 야외 풍경을 감상하거나 동네를 한 바퀴 돈다. Ann은 동네 산책길에서 만난 베트남이 고향인 할머니다. 그녀의 뜰은 온갖 꽃들로 가득 차 있어 나의 발걸음은 항상 그녀의 집 앞에서 멈춘다. Ann은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반색을 하며 청하지도 않았는데 히야신스를 닮은 꽃모종 몇 포기를 건넨다. 곧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이야기를 굳이 할 필요가 없기에 감사의 마음으로 받아 jennifer의 뜰에 심었다. 시드니에 살고 있는 그녀의 딸이 베트남어 자막이 딸린 한국 드라마를 수시로 보낸 준다기에 인사치레로 서울을 한 번 방문할 생각은 없느냐고 묻는다. 서울에 오게 되면 꼭 전화하라는 말과 함께.

큰딸과 전화통화를 했다. 목소리는 여전히 밝고 명랑하다. 동생 도시락을 맛나게 싸 주었단다. 그리운 마음 간절하여 전화 중간 중간에 눈물을 찔끔거렸다. 막둥이 인혜와는 통화가 어려운지라 몇 번이고 동생 잘 챙겨주어서 고맙다는 말로 보고 싶음을 대신한다. 아빠는 뉴질랜드에서 오신 큰 아빠를 만나러 나가셨단다. 호주로 올 때 가까운 뉴질랜드에 가서 남편의 둘째 형인 아이들의 큰아빠를 뵙고 오라는 당부의 말이 떠오른다. 이제 뉴질랜드를 굳이 방문할 필요는 없게 되었다. 남편의 부탁이었지만 사실 처음부터 뉴질랜드를 갈 생각은 없었거니와 그럴만한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멜버른에서의 마지막 날

Debby의 집을 방문했다. 그녀는 여전히 밝고 친절했으며 힘이 넘쳤다. 강의실에서의 카리스마가 개인적 만남에서는 생기 있음으로 보임이라.

각가지 음식을 앞에 두고 우리는 행복했고 즐거웠다. 이야기는 그녀가 이끌어 나갔으나 우리도 결코 청취자의 자리만 지키고 있지는 않았다. 세심한 그녀가 우리를 객석에만 앉혀 두지 않는 다는 것쯤은 3주간의 강의를 통해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식사 후 그녀는 우리를 집 안 곳곳으로 안내해 주었다. 3층으로 된 아름다운 집은 사내아이 넷에 남편을 포함한 다섯 남자의 흔적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67년 이상 된 오래된 차, 산악자전거, 오래된 타자기, 수동식 전화기 등 시대를 뛰어넘는 물건들과 힘이 넘치는 것들이 곳곳에 쌓여있다. 구경하는 우리도, 안내하는 그녀도 흥분되기는 마찬가지다. 6인 가족과 함께 6,000km의 긴 여행을 했다는 벤을 타고 기차역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그녀 Debby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 구름한 점 없는 멜버른의 하늘이 그녀의 밝고 맑음에 버금간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세인트 길다 비치에 들렸다. 하늘과 바다는 맞닿아 출렁거리고 바람은 세찼다. 흔들거리는 나무다리를 지나면서 바다 한가운데로 날아갈 것만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항구로부터 1km남짓 떨어진 나무를 이어 만들어 놓은 방파제에서 바라보는 항구는 아름다움, 꿈, 낭만, 그리고 머나먼 이국 그 자체였다. 높은 건물과 쑥쑥 솟아오른 야자수는 그림처럼 아름다웠고 낮게 드리워진 검은 구름은 Tom Robert의 그림을 연상케 했다. 20세기 초반에 영국에서 머나먼 호주 신대륙으로 건너온 그에게 비친 이 항구가 지금 이 모습과 같았으리라.

후두둑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조차 감미로워 목청껏 소리를 질러본다. 겨울 바닷가 비오는 저녁인데도 반팔 윗도리에 반바지 차림으로 바닷가를 달리는 사내의 모습이 전혀 낯설거나 어색하지 않다.

집으로 돌아오니 Host Jennifer 가 일찍 퇴근하여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의 마지막 멜버른의 밤을 위하여 special dinner를 준비했단다. 이태리식 라자냐, 레몬케익, 샐러드 그리고 마늘빵이다. 점심을 넉넉히 먹은 관계로 그녀가 즐거워 할 만큼 먹지는 못하였으나 적당히, 아주 적당히 취할 만큼의 삼페인으로 그녀와의 짧은 인연을 대신했다. Jennifer는 자기 자신의 이야기에 유쾌해 했고 우리는 열심히 귀 기울어 줌으로서 그녀에 대한 예의를 다했다.

멜버른의 밤하늘은 여전히 맑고 아름답다. 꽃향기 가득한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본다. 식구들이 그리울 때마다 몇 번이고 돌고 하던 향기 가득한 마을이다. 지금 이 시간, 집과 가족이 그립지만 서울로 다시 돌아간 날, 이 이름답고 유쾌한 사람들이 사는 이곳, 밤은 추우나 한낮은 봄 날씨 같은 이 아름다운 멜버른을 다시 그리워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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