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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 22일 22시 32분 등록

 표정그리기(1)

2008.9.10. 수요일


수업을 마칠 무렵 마크선생님께서는 그만하고 싶으면 거기에서 멈추어도 좋다고 하셨다.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내가 무척 어려워했기 때문이었다고 짐작해본다. 그렇게 말씀은 하셨지만... 마크 선생님 자신이라면 좀더 그리겠다고 하셨다. 어느 정도나 그린 것 같냐고 물었을 때, ‘밑을 깔아준 정도’, ‘지금부터 세세하게 들어가야죠.’ 라고 하셨다. 그 말씀은 하기 싫으면 여기에서 멈추어도 좋지만 더 세세하게 그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20080910-3.jpg 


화실 문닫을 시간이 되어서 자리를 정리하며, 하루 동안 그린 그림을 사진에 담으면서 술렁거린다. (마크 선생님은 화실에서 연습하는 그림을 매번 찍어서 화실카페에 올려놓는다. 여러 사람들이 어떻게 그려나가는가를 보여주는 자료가 되게 관리한다.) 옆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며 묻는다. 여기서 그만 그릴거냐고. 물론 나도 아니다. 여기서 멈추면 재미난 부분을 놓칠 것 같다. 내게 물었던 그들의 심정도 그럴 것이다.


나는 가끔 옆 사람이 그리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림 배우는 책에서는 무엇을 그린다, 어떻게 그린다, 설명을 하지만 책에 실린 사진은 그림을 그려가는 과정의 아주 일부분일 뿐이고, 부분사진과 전체사진이 다 나오는 것도 드물다. 또한 손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손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지는 절대로 나오지 않는다. 선을 얼마나 길게 사용하는지, 손을 위에서 아래로 움직이는지, 색칠은 바깥에서 안으로 갔는지, 혹은 선을 먼저 긋고 안쪽부터 밖으로 채워나갔는지 따위는 알지 못한다.


옆에서 내가 더 그리기를 바라는 사람의 심정은 아마도 나와 같을 것이다. 그나마 내가 그리는 동안은 어떻게 그리는지 몇 단계라도 보게 될 테니까. 내가 늘 그들이 그리는 그림과 과정을 보고 싶어하듯이.



2008.9.17 수요일


어떻게 얼마만큼 어디를 가고 있는지 빨리 머리 속을 정리하자.

지난번에 마치면서 이번에 ‘더 부드럽게 하겠다’ 했고, ‘사람들에게 표정을 주겠다’했다. 사랑스런 표정 상대를 바라보고 있는 그 모습 자체뿐 아니라 상대에게 향하는 마음을, 표정까지 그리고 싶었다.


그리다가 가끔 서서 뒤로 몇 발짝 물러서 그림을 보았다. 그림 속의 여인은 매우 도도해 보였다. 새침함 속에서도 다가서는 마음. 남자의 표정에서는 그윽히 내려다보고 있는데, 눈빛은 사진 속에서 보이지 않지만, (마음으로 보면) 이미 다가서서 감싸는 마음.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그렇지만 느껴지는 것)까지 넣고 싶다.


사람의 얼굴에서 미묘한 차이가 사람을 부드럽게 보이도록 하기도 하고, 거칠게 보이게도 한다. 같은 얼굴인데 훌쩍 나이를 먹어버리기도 한다. 아이와 노인의 초상화에서는 아이는 더 나이를 먹게 그렸고, 노인은 주름이 없어져 훨씬 젊어졌었다. 직장동료의 아들녀석을 그린 그림에서는 100일 정도 지난 놈을 서너살 먹게 그려버렸다. 사람의 얼굴에서는 아주 미묘한 차이가 전체를 바꾸어 버리는 것이다.


먼저 그렸던 선들이 지우개질을 해도 여전히 남아서 수정이 안 된다. 검은 바탕에 흰색으로 진하게 그어버린 선들, 지워도 엷게 자국이 남아있다. 그런 것들은 검은색으로 칠해서 덮어버리라고 조언을 해 주신다. 공기와 얼굴 윤곽은 검은색을 바깥에 칠해서 흰 얼굴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라고 하셨다. 그렇게 일부를 수정했다. 몇 번이고 다시 그어서 남아있던 자국들을 엷게 검은 색을 발라서 지우고, 바깥으로 삐쳐 나온 흰색들을 검은 색으로 눌러버린다. 


잘못된 선들을 감추어 버렸는데, 그렇게 고치면서도 정확히 어디가 이상한지 잘 모르겠다. 몇 번을 봐서도 어색하기는 한데 어디를 어떻게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는 중에 여자의 진한 눈썹을 그렸다. 진하게 검은색으로 꾹 눌러서 그렸다. 뒤쪽에서 마크 선생님께서 보시고 눈썹이 이상하다고 다시 한번 그려보라고 하셨다. 눈썹이 코 있는 쪽으로는 진한데 눈썹꼬리부분에서는 연해지게 그려보라고. 괴상하게 보이는 눈썹을 지우고 다시 그렸다. 그래도 여전히 아쉽다. 목선이 이상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사진에서 코선을 아래로 내려그으면 그곳에 목선이 있다고 하셨다. 사진을 보고 사진에서 코선을 내려 그어서 확인했다. 정말이지 목은 너무 가늘게 그려졌다. 그것을 왜 보지 못했을까? 처음에 밑그림을 그릴 때 잡아둔 것을 나는 잘 수정하지 않는 편인 것 같다. 밑그림을 그릴 때는 ‘지금 좀 엉성해도 나중에 그리면서 고치면 돼.’라고 생각했던 것을 까맣게 잊고 있는 걸 보면. 어쩌면 그때 어느 정도 비례를 맞추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내 무의식에는 ‘여자의 가는 목선’ 이라는 관념이 차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목선을 앞쪽으로 당겨 수정하면서 목 뒷덜미쪽도 고쳤다.


여성의 얼굴에 그림자를 보강했다. 그림자를 그릴려면 밝은 부분을 밝게, 그늘진 부분을 더 어둡게 해야한다. 그림자는 얼굴의 윤곽을 따라서 생기기 때문에 그림자가 드러나면 형태가 드러난다. 특히 입술부분이 그렇다. 몇 번이고 손을 입꼬리를 손질했다. 어떻게 하면 입체감이 살아날지 머리 속으로는 알지만 그리고 나면 왠지 어색해서 눈에 보이는 데로 하고 있는지 의심도 한다. 부분이 이상한 것인지 전체가 조화가 안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여성의 얼굴은 어느 정도 잡았다 싶었다. 남성의 얼굴은 어찌해야 할지 막막해한다. 그래서 자꾸 미루어 둔 것이다. 모델로 보고 있는 사진이 윤곽이 뚜렷하다 해도, 아무리 눈을 크게 떠도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흐릿하게 보이는 얼굴을 흐릿하게 그려서 표현해야 하는데 표정까지 넣을 욕심을 부리고 있다.


클라크 게이블. 매력적이다.


머리카락은 그리지 않고 전체적으로 윤곽만을 따라서 형태만을 잡아 두었다.  마크 선생님께서 클라크게이블의 머리카락을 진하게 해보라고 하셨다. ‘꼭 그래야 하나?’ 사진을 들여다 보니 머리가 까맣다. 까맣다. 까맣다. ‘검은색 종이에 검은색? 그게 나타날까?’ 의심이 먼저다.  의심하고 머뭇거리는 사이에 마크 선생님께서 머리에 일부분을 까맣게 칠하신다. 나는 그 사이에 한발 물러서서 보고 있다. 그림 속의 남자의 머리가 까맣게 된다. 까만 머리 덕분에 생기가 추가 된다. ‘검은 종이에 검은색’은 별 효과를 못 낼 거라는 내 의심을 깨뜨려 버린다. 검은 색 종이가 검을 거라는 착각이 깨지는 순간이다. 예전에 한번 깨졌었는 데 또 그런 생각을 품었다니. 어쩌면 ‘검은 색은 검다’라는 것은 참으로 깨지지 어려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보다 더 검은 것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검은 색 위에 그보다 더 검은 색을 넣을 수 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해 보고서야 받아들인다.


머리를 검게 하고 나니, 다른 부분도 더불어 검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콧수염을 그려 넣었다. 먼저 이 사진을 보고 그려본 분(화실의 동료 아저씨, 박현만)이 조언을 해주신다. 남자의 입술 선이 조금 더 바깥쪽으로 나와야 한다고. 자신도 이 그림을 그려봐서 형태가 보인다고 하셨다. 나는 이 분의 그림에 반했었다. 마지막 단계까지 서두르지 않고 차분히 가시는 분이다. 지우개를 연필처럼 잘 사용하셨다. 자신이 이 그림을 그릴 때는 색지에 전체적으로 검게 칠하느라고 고생하셨다 한다. 꼼꼼하신 성격에 얼마나 고생하셨을까. (내 기억속에서는 붉은 색, 색지였던 것 같은데, 예전에 찍어둔 사진을 찾아보니 파란색 색지위에 같은 그림을 그리셨다.) 그런데 나는 검은색 색지위에 흰색으로 쉽게 그리는 것 같다며 기가 막혀 하신다. 자기는 왜 그 고생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나는 속으로 동의했다. 그렇다. 나 같으면 그런 고생 시작도 안할 거라고. 갑갑해서 죽겠다는 소리를 먼저 해버릴 것이다. 검은색 색지는 마크 선생님께서 추천하신 것이다. 내가 다른 색지를 빼 서 화판에 걸었을 때, 검은색에 그리면 좋다고 하셔서 색지를 고를 때 봐두었던 게 생각나서 마지막으로 한 장 남은 것을 찾아다가 교체했었다.



남자의 시꺼먼 얼굴에 몇 군데 밝게 보이는 데를 희게 만들었다. 부족했다.


‘클라크 게이블은 늙어보인다. 그런데 그림 속의 남자는 매끈해 보인다.' 클라크 게이블의 중후한 매력이 드러나지 않았다고 하셨다. 그것은 아직 어찌해야할지 모르겠다. 전체적인 인상이 사진보다 매우 매끈하게 보인다는 것 뿐. 왜 매끈하게 보이는지를 알지 못한다.


20080917-2.JPG 


화실을 마칠 시간이 되면 마크 선생님께서 한바퀴 도시면서 그날 연습한 그림들을 모두 사진을 찍으시는데 내가 연습한 것을 찍으신다. 마크선생님이 보시기에 여자의 얼굴이 청동조각상처럼 보인다고 하셨다. 물러서서 보았다. 여자의 얼굴은 밝음과 어두움이 대조를 이루어서 매끈해 보이면서 차가워보였다. 나는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여성의 얼굴은 거의 완성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눈 주변은 조금 더 손을 봐야겠지만 전체적으로는 다 되었다고 생각했다. 여성에게 넣고 싶은 것은 도도한 매력이었는데, 청동조각처럼 차가운 인상을 풍긴다. 차가움이 아니라 도도함을 넣고 싶었는데.... 왜 이렇게 차갑게 보이지? 모르겠다. 남성이야 덜 그렸으니까 엉성하다고 인정하는데... 여성은 왜?


20080917-3.JPG 

 20080917-4.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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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표정이 들어나지 않는 사람들인데.. 나는 욕심을 부린다.
작은 차이 때문에 나타나는 무엇인가를 찾고 싶은 욕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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