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칼럼

연구원들이

  • 어니언
  • 조회 수 2788
  • 댓글 수 4
  • 추천 수 0
2015년 4월 28일 23시 11분 등록

날씨가 좋다. 꽁꽁 얼어붙은 나날들이 아득히 느껴질 정도로 여름이 알알이 맺힌 따뜻한 봄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하루의 정점을 지난 늦은 오후의 볕은 포근하지만 나른하다. 꽃이 진 가지마다 여리여리한 연녹색 잎사귀가 돋아있다. 세상 모든 곳에 봄이 머물러 있다.

 

하남에서 통영대전 고속도로를 따라 달리다 호법에서 중부고속도로로 갈아탄다. 토요일 늦은 오후라 그런지 하행선은 크게 막히는 곳이 없다. 괴산 IC로 나가고 좁은 국도를 따라 얼마간 달려나가면 몇 번 와봐 낯이 익은 지명과 동네가 눈에 들어온다. 비포장 언덕길을 엉금엉금 올라가 차를 주차하고 뒤를 돌아보면 땅이 탁 트여있다. 멀리 비슷한 키의 산봉우리들이 왕관처럼 둘러싸고 있는 둥근 마을이 내려다 보인다. 산그림자가 촘촘히 덮여 간다. 해가 저물 무렵, 여우숲에서 꿈벗 소풍이 열렸다. 작년에 만나 반가운 얼굴들도 있고, 새로운 얼굴들도 있다. 갈색털을 가진 바다가 나타나 얼굴을 들이밀고 아는 척을 한다. 덕풍시장을 지나다 값이 싸길래 샀던 강아지 간식을 좀 주니 차분히 먹는다. 산이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아직 빛이 남아있을 때 오종종 줄을 지어 산을 잠시 올라가 두릅을 딴다. 도깨비 방망이처럼 가시가 돋아난 막대기 같은 줄기 끝에 머리카락처럼 두릅이 달리면 그걸 비틀어 꺾는다. 가시는 작지만 충분히 위력적이다.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난다. 서로 수확한 두릅을 누군가에게 넘긴다. 폭탄돌리기 게임을 하는 것 같다. 명이나물 이파리를 하나 구해 그것으로 손에든 두릅들을 돌돌 말아 손잡이를 만든다. 온갖 것들이 피어있다. 노란 뱀딸기꽃, 보라색 앵초가 사부작거리는 오래된 나뭇가지들 사이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다. 가는 나뭇가지들을 타고 다래 덩쿨이 뻗어있다. 거기 귀여운 다래순이 사닥다리 계단처럼 띄엄띄엄 자라있다. 나무나 꽃의 이름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을 보면 존경스럽다. 이름에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황석영의 소설에는 꽃이름이 많이 나온다. 그가 꽃의 이름들을 하나씩 읊으면 순식간에 소설속 주인공이 되어 꽃들이 가득한 들판을 둘러보는 듯한 기분이 된다. 내가 지금 있는 공간을 조금 더 구석구석 보게 되는 듯한 기분이다. 그러니까 이 넓은 우주에 내가 모르던 작은 부분을 찾아낸 것이다.

산에서 한동안 두릅을 채집하고 백오산방으로 내려가니 식탁이 차려져 있다. 민들레 씨앗이 바람에 날아가는 그림이 그려진 아름다운 접시에 산나물과 도토리묵, 우엉조림, 하얗게 무친 더덕, 김치 등이 놓여있다. 비슷해 보이는 풀들을 종류별로 따와 요리하면 이렇게 다채로운 맛이 난다는 점은 늘 경이롭다. 밥을 먹고 그릇을 정리한 뒤 과자며 술을 하나씩 꺼낸다.

 

창조적 부적응자. 어제와 다른 오늘을 꿈꾸는 사람들. 이 말은 선동적이다. 어딘가 열정의 불을 싸지르는 힘을 지녔다. 그러나 막상 현실의 팍팍한 틈바구니에서 꿈을 좇아보면 하루가 몹시 고단하다. 후줄근해져서 퇴근 지하철을 타러 플랫폼을 걸어갈 때, 점심시간에도 업무에 묶여 창밖에 쏟아지는 봄이 야속하게 느껴질 때, 늦은밤 퇴근하며 문득 흐드러지게 피어있다가 살랑살랑 흩날리며 벚꽃이 지는 모습을 볼 때, 더 이상 어떤 새로운 것을 생각해내지 못할 정도로 진을 빼고 난 하루는 무딘 칼처럼 흐릿해지곤 한다. 집에 가면 겨우 씻고 몸을 던지듯이 잠에 빠져든다. 이상과 지엄한 현실 사이에서 여기저기 부딪히고,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나날들이 생기고, 의지가 약해져 잠들어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흔들리고 잠시 쉬더라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여기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그런 경험을 모두 가지고 있다. 경험은 근거 없는 낙관주의를 무너뜨린다. 하노이 전쟁 포로 수용소에서 8년을 버틴 스톡데일 장군이 떠오른다. 현실이라는 좁은 삶의 터전에서 우리는 탈출을 시도한다. 그것은 대부분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리는 작업이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결국에는 성공할 거라는 믿음을 가져야 하며, 동시에 눈앞에 닥친 현실 속의 가장 냉혹한 사실들을 직시해야 한다. 이 두 가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이 패러독스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결과적으로 경험과 고통이 우리를 키운다. 우리는 가혹한 현실뿐 아니라 알맹이가 없는 낙관으로부터도 스스로를 지키는 법을 배운다.

 

여우숲으로 오래 전에 배달왔던 안동소주를 마셨더니 속이 뜨겁다. 백오산방 데크로 술잔을 들고 나왔다. 산과 바다가 제 주인에게 얼굴을 부비고, 펄쩍펄쩍 뛰어오른다. 깊고 어두운 숲에서 낯선 새 울음소리가 들린다. 소쩍새란다. 노래를 안주삼아 술을 마시니 독한 줄을 모르겠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라는, 시인의 섬세한 예리함에 새삼 감탄한다. 아마 국화는 지금 혼자일 것이다. 소쩍새도 그럴 것이다. 특히나 이 어둡고 긴 밤은. 모두가 잠든 밤에도 오롯이 혼자 깨어있는 누군가가 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노래를 했을 것이다. 그것이 언젠가, 어디선가 꽃으로 피어나길 바라면서.

 

라면을 하나씩 나눠 먹었다. 봉규 아저씨는 재주가 아주 많은데, 그 중 라면을 정말 맛있게 드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늦은 시간까지 모여 있다가 숙소로 돌아갔다. 18개월 된 어린 유주가 많이 울었다. 초저녁부터 잠들었다가 깬 뒤이고, 잠자리가 낯선데다 아빠도 없어서 무서웠던 모양이다. 조카들 생각이 났다. 어설프게 도와주면 더 울까봐 가만히 누워있었다. 다행히 나는 어떤 상황에서든 잠을 잘 잔다. 아이가 울어도 괜찮을만큼 내가 커진 것 같아 흐뭇하다.

 

아침에 일어나는데 머리가 아프다. 이것저것 섞어 마셔서 그랬던 것 같다.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가니 또 두통은 괜찮아진다. 백오산방에 가니 아침 식사가 차려져 있다. 어제와 비슷한 반찬들에 명이나물 장아찌가 나왔다. 용규 아저씨가 아무리 봐도 문구용 가위같은 가위로 먹을만한 크기로 잘라주셨다. 짭조름해서 아주 맛있었다.

 

봉규 아저씨는 먼저 집으로 향하고, 남은 우리들은 밭을 돌아다니며 명이를 채집했다. 잎사귀 세장 중 두 장을 딸 것. 같이 따는 다른 분들은 시간에 비례해 양이 늘어나는데, 내 바구니만 열심히 따도 그대로다. 농촌으로 시집 가면 혼날거라고들 하셔서 크게 웃었다. 한참 따는데 깊은 산 속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볕에 달아오른 목덜미가 시원하다. 명이도 따고 다래순도 땄다. 집에 돌아오니 엄마가 그것으로 장아찌를 담고 나물을 만들어주셨다.

 

다음날 바로 출근을 했다. 지하철이 많이 붐벼서 창문밖에 서서 가는데 바람에 너울거리던 나무가 아른거린다. 참지 못하고 터져 나온 꽃들도 따라 흔들린다. 명이나물의 작은 봉오리와 가느다란 모가지, 선녀 부채 같은 넓은 이파리도 몸을 흔든다. 그들은 춤을 추고 있는 듯하다. 햇볕에 반짝이는 이파리가 아름답다. 우아하고 부드럽다. 아름다운 삶의 양식을 곁에 두고 자주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자연은 아주 중요한 참고자료다. 아무리 바람이 흔들어놓더라도 그것을 자신의 춤으로 바꾸는 것. 솨아하는 멋진 소리를 만들어내며, 아무도 없는 외로운 곳에서도 자신의 꽃을 키워내는 것.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멋지게 피워내는 것. 그것이 그렇게 괴롭기만 한 여정은 아니라는 것. 특히나 같이 갈 사람들이 있다는 것.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 마음에 들어오는 주말이었다.

IP *.128.229.158

프로필 이미지
2015.04.29 12:31:50 *.115.32.2

힘이 되는 시간이었어요. 삐리리~~~적절한 타임에 들려오는 소리 또한 아름다웠어요.

프로필 이미지
2015.04.30 12:54:51 *.122.242.73

총무님, 준비하신다고 고생많으셨어요.

오카리나를 마음껏 불수 있는 깊은 산중과 함께 술마시던 사람들이 참 그립네요. 

멋진 기억이여요. 

프로필 이미지
2015.04.29 21:18:37 *.246.141.195

하...글 참 좋아지네요. 점점...

프로필 이미지
2015.04.30 13:06:08 *.122.242.73

격려 감사합니다. ㅎㅎ 좋은 주말을 보냈더니 잘 써진 것 같습니다. ㅋㅋ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612 [칼럼#3]나에게 쓰는 편지 [3] 모닝 2017.04.30 1287
4611 [칼럼3] 편지, 그 아련한 기억들(정승훈) [1] 오늘 후회없이 2017.04.29 967
4610 #2. 내가 찾은 나를 찾기위한 방법(김기상) [4] ggumdream 2017.04.24 1444
4609 봄날이 가고 있다. 내 삶도 어딘가로 가고 있다 file [6] 송의섭 2017.04.24 1066
4608 #2 땅끝 마을의 추억_이수정 [12] 알로하 2017.04.24 1048
4607 [칼럼 2] 청개구리와 주홍글씨 (윤정욱) [5] 윤정욱 2017.04.24 981
4606 #2 어디에 있을 것인가?(이정학) [5] 모닝 2017.04.23 959
4605 [칼럼2] 왜 여행을 떠날까(정승훈) [5] 오늘 후회없이 2017.04.22 958
4604 <칼럼 #2> 행복의 첫걸음 - 장성한 [5] 뚱냥이 2017.04.21 1068
4603 빨간약을드실래요? 파란약을 드실래요? file [8] 송의섭 2017.04.17 2356
4602 마흔 세살, 혁명의 시작!!(김기상) [7] ggumdream 2017.04.17 990
4601 좋은 금요일 (Good Friday)_이수정 [6] 알로하 2017.04.17 1258
4600 꽃이 보이기 시작한 남자_장성한 [10] 뚱냥이 2017.04.17 1010
4599 칼럼_2주차_기숙사 그리고 주말 오후 세시의 짧은 단상 [5] 윤정욱 2017.04.16 1008
4598 마흔, 유혹할 수 없는 나이 [7] 모닝 2017.04.16 960
4597 [칼럼1] 마흔에 채운 책에 대한 허기(정승훈) [5] 오늘 후회없이 2017.04.16 1010
» 꿈벗 소풍 후 [4] 어니언 2015.04.28 2788
4595 2주기 즈음 [4] 어니언 2015.04.13 2293
4594 내겐 너무 아름다운 당신-추모제 후기 [10] 왕참치 2015.04.13 2717
4593 덕분에 좋은 여행 file [2] 희동이 2015.04.02 22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