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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6월 26일 16시 10분 등록

<신화와 인생> 조지프 캠벨 지음, 다이앤 K. 오스본 엮음. 박중서 옮김. 갈라파고스

 

1. 저자에 대하여

 

생략

 

2. 내가 저자라면

 

1) 뼈대와 목차

 

1983년 수개월 동안 에설런연구소에서 10명 정원의 작은 세미나를 진행했다. 에설런연구소의 소장이 세미나 중에 자기가 참관해도 되냐고 물었을 때 조지프는 말했다. “그건 절적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참석자들 사이에는 이미 외부인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는 성스러운 원이 만들어졌고, 그 안에서만큼은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의심한 바들을 털어놓았으며 마법과 환희에 관한 이야기를 교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연구소의 세미나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오스본은 이 책에 균형과 광휘를 드러내기 위해서 캠벨의 저서에서 가져온 인용문들을 이택릭체와 삽입문의 형태로 수록했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이 인용한 그의 저서는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신화와 함께 한 삶>이다.

전체적으로는 영웅여정과 함께 힌두교식 삶의 세 가지 단계를 중심으로 구분되어 서술되고 있다.

 

2) 장점 및 보완점 평설

 

구성은 간단하다. 그가 평소 자주 말했던 잠언류, 영웅여정에 대한 것, 삶을 3단계로 나누어 관련된 사항을 적었다. 몸에는 7군데의 차크라가 있다. 각 단계마다 계발되는 부분이 다르다. 뱀이 곧추선다는 비유 역시 차크라의 계발단계를 보여주는 비유이다. 결혼, 의무, 돈 등은 1단계, 인가에 살 때 중요한 이슈다. 이 책의 단계구분에 의하면 자신의 천복을 쫒는 부분은 2번째 단계에 들어간다. 옮긴이의 말에 의하면 캠벨은 신화학자보담은 힌두교의 관점을 가진 비교종교학자다. 그는 캠벨의 사상을 한 마디로 한다면 너의 희열을 쫒아라라고 한다. 여기에도 차크라 역시 적용된다. 세 번째 단계의 초입에서 마야를 말한다. 세 번째에서는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삶의 단계를 3개로 나눈게 왜 그런가 싶다. 그게 원래부터 캠벨의 강의에 나와 있는 것인지 엮은이로 소개되는 이가 한 것인지 궁금하다. 나는 삶의 3단계 구분의 출처가 어딘지가 궁금하다.

 

내가 가장 흥미로왔던 부분은 인간 캠벨에 대해 자술해놓은 부분이 어느 책보다 많았다는 점이다. 유럽에 가서 공부를 하던 시절, 대공황 직후 우드스톡에서 책만 들이파던 5, 결혼 등 다른 책에서 찾기 힘든 캠벨의 삶의 조각들이 풍부하다.

 

이 책은 캠밸 저서의 개론서, 입문서로 소개된다. <신화의 힘>,<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읽은 적이 있다. 다이앤이 인용해 놓은 문장의 출처가 뒷부분에 정리가 다 되어 있지만 그 문장들이 캠벨의 강의조 문장들 가운데서 튀어나올 때 이걸 엮은 이가 넣은 걸까? 에설린 연구소의 강의 자리에서 캠벨이 인용한 걸까?’궁금할 때가 자주 있었다. 개론서로는 <신화의 힘>이 낫다는 생각이다. 이유는 한 가지이다. 캠벨의 저서, 융의 저작 인용문이 풍부하게 들어 있지만 그걸 원문 그대로 캠벨의 호흡에 따라 읽는 것과 누군가가 편집해 놓은 상태에서 읽는 게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다. 오히려 에설린여구소에서 했던 강의나 세미나의 강의 원본을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어디까지가 그의 것이고, 어디까지가 엮은 이의 숨결인지가 구분이 안가기 때문이다.

 

3) 감동적인 장절

 

20 진정한 의미란 살아있음 바로 그것이다.

캠벨이 늘 강조하는 한 가지. 살아있음, 살아있다는 실감을 느낀다면 어떤 것도 칭찬받아도 될 듯 하다. 그런데 나는 해야한다는 의무감에 많이 사로잡힌다.

 

21 전사의 방식이란 삶에 대해 라고 하는 것, 그 모든 것에 대해 라고 하는 것이다.

동의합니다와 같은 의미인 듯

 

192 여러분은 차라리 불완전하기로 결심하고, 그것을 감수하면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의 슬픔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한다는 것이다.

 

212 여러분이 자신의 삶의 어떤 사소한 세부사항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모든 것을 해체해 버리는 셈이 된다. 여러분은 반드시 모든 것에 대해서, 심지어 그 소멸에 대해서도 라고 말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의 슬픔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내 작은 주제가이다.

동의에 대한 세 가지 문장이다. 부모에게 동의한다는 말은 그의 사랑, 한계, 아픔까지 모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29 깨뜨리고 나옴은 (남이 보여준) 희열의 모범을 따르고 옛 장소에서 떠나고, 여러분의 영웅 여정을 시작하여 여러분만의 희열을 따르는 것이다. 뱀이 그 허물을 벗어버리듯이 여러분은 지난 날을 팽개치라.

다른 이의(그가 스승이든 부모든) 영웅 여정, 신화에 박수치는 구경꾼이 아니라 나의 천복을 따라 떨쳐 일어서는 게 필요하다. 나는 지금 나의 영웅여정을 시작한 건가?

 

66 결혼은 연애가 아니라 시련이다. 그것은 종교적 훈련, 성찬식, 또 다른 삶에 참여하는 은총이다.

70 배우자와의 관계가 여러분의 삶에서 최우선의 고려사항이 아닌 한 내 생각에 여러분은 결혼했어도 결혼한 상태가 아니다. 반드시 그 관계가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

 

73 결혼이란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상대방에게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그 관계됨에 희생시키는 것이다.

세 가지는 <신화의 힘>에서도 반복된다. 결혼에 대한 캠벨 생각의 핵심이라 할 만한다.

 

73 여자는 삶(생명)의 샤크티(sakti) 즉 에너지이다. 남자는 그 에너지에 올라타 달리는 방법을 배워야 하며, 삶을 향해 직접 지시해서는 안된다. 나는 이를 확신한다. 남자는 여자의 에너지를 전달하는 수단이다. 남자가 무너지지 않는 한, 여러분은 진짜 결혼을 한 것이 아니다. 물론 실생활에서나 성적인 면에서는 대등한 삶을 꾸릴지 몰라도, 결혼은 남성의 주도권이 무너지는 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여성이 에너지이고 남성은 그 에너지에 올라탄 이라는 비유는 뒷 부분에 다시 반복된다. 어찌보면 에너지에 대한 걸 결혼에 적용한 부분으로 읽는다.

 

105 여러분이 의례적으로 마땅히 어떻게 해야만 한다고 여기는 바와 정반대되는 행동이 바로 공감이다. 성배를 발견하는 사람은 그 장소에 온 사람인 동시에 공감의 삶을 사는 사람을 상징한다. 공감의 역동성을 자신의 동기로 삼는 사람만이 성배를 발견한 것이다. 이는 나와 너의 동일성에 관한 자연스러운 인식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성배의 중심이다.

성배를 찾아나선 파르치팔 신화에서 나온 이야기. 어부왕의 상처 치유는 기사는 질문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깨뜨리고 파르치팔이 왜, 어디가 아프냐고 질문하면서 시작되었다. 그의 아픔에 마음이 아팠기 때문에 파르치팔은 기사의 불문율을 깨고 질문한다. 거기서 구원이 왔다.

 

112 여러분 속의 모든 것은 지금 본인에게 요구되는 모험이 끝내 거부되었음을 안다. 그로 이해 분노가 형성된다. 여러분이 긍정적인 방식으로 경험하기를 거부하면 결국 그것은 부정적인 방식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지금 여러분이 따르는 모험이 본인의 진정한 모험이라면 또한 그것이 여러분의 깊은 영적 필요 또는 준비에 적합한 것이라면, 여러분을 돕기 위해 마법의 인도자가 나타날 것이다.

모험을 거부한 이는 황무지에 남음. 나는 지금 두려움 때문에 브런치에 글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 한 달 간 단 한 편도 올리지 않았다. 난임에 대한 글을 올리는 건 어리석은 것처럼 느껴져서다.

 

113 여러분이 그럴 준비가 되어 있다면 이전까지는 문이라곤 없었던 곳에서, 그리고 다른 누구도 겪어보지 못했던 곳에서 여러분을 위한 문이 열릴 것이다.

 

113 여러분이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여러분은 어두운 숲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바다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며, 밤바다로 출항을 개시하는 셈이다.

 

204 일주문. 두 개의 무서운 형체가 수문장 격으로 서있다. 이것들이 이른바 케루빔이다. 그 중 하나는 입을 열고 있고 하나는 다물고 있다. 즉 대립자의 쌍인 것이다. 하나는 죽음의 두려움을 표상하고, 다른 하나는 삶에 대한 욕망을 상징한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유혹은 붓다를 결코 흔들지 못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소유에 대한 것은 어느 관문에서나 질문받고, 시험받는다고 말했다. 어쩌면 아이를 기다리는 과정에서도 소유에 대한 시험을 받는 듯 하다.

 

219 영웅의 여정의 목표는 여러분 자신이 되는 것이다. 즉 여러분 자신을 찾는 것이다.

 

258 여러분이 진정으로 성스러운 공간이라든지, 피난처를 지나려 한다면, 그곳은 우선 황무지가 아니어야 하며, 암브로시아-외부로부터 여러분 안에 불어넣는 기쁨이 아니라 여러분의 내부로부터 나오는 기쁨-의 샘이 있는 어떤 활동 공간, 즉 여러분이 자신의 의지와 자신의 의도와 자신의 소망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 됨으로써 비록 작더라도 하늘나라가 거기 있어야 한다. 내 생각에 모든 사람은 본인이야 알건 모르건 간에 그런 공간을 필요로 한다.

 

263 나는 여러분이 성배 성을 방문할 수 있기 위해 스스로에게 설정해 놓은 것과 같은 종류의 조건을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성스러운 공간이란 곧 성배 성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264 성스러운 공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상징적 환경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즉 영적 삶이 가능하고 여러분 주위의 만사가 영의 고양을 야기하는 곳 말이다.

 

265 성스러운 공간에서는 무슨 일을 하건 간에 그 주위는 은유가 된다.

 

286 여러분이 하는 일에는 무엇에나 정점이 있다. 여러분이 그런 정점에 있을 때 여러분은 최대한도로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300 모든 종교 훈련의 목표는 심리학적 변화다. 여러분은 각자의 자녀를 돌보고, 취객을 진찰하고, 책을 쓰는 등의 일을 하는 와중에도 신들을 알고, 사랑하고, 거기 봉사하는 것에 근거하여 각자의 명상과 의식을 거행할 수 있다. 만물이 곧 브라흐만이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는 한, 여러분이 하는 일이 무엇이든지 명상이 될 수 있다. 그 일의 과정이며, 행동이며, 여러분이 지금 바라보는 대상, 그리고 지금 여러분을 바라보는 대상, 그 모두가 브라흐만이라는 것이다.

 

300 귀환은 어디에서나 광휘를 목격하는 일이다.

 

여성의 영웅여정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구절. 캠벨은 여성은 굳이 통과의례나 영웅여정을 떠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이미 생명 자체이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 한편 남성은 진짜 남자가 되기 위해 가혹한 입문의례를 치른다. 이 부분은 언제나 아리까리하다. 힌두교의 여성성에 대해 읽는게 흥미롭다.

 

312 힌두교에서는 모든 힘, 샤크티가 여성형이다. 따라서 여성은 그 힘의 전체성을 표상하며 남성은 그 여성의 대행자로 묘사된다. 그런 의미에서의 여성이 남성으로부터 느끼는 힘, 융 식으로 말하자면 아니무스-은 사실상 여성의 힘이 특화된 상태, 다시 말해 그 힘이 응용된 상태인 것이다.

 

314 힌두교에서는 태양이 여성이고 달이 남성이다. 달은 태양 속에서 태어나며 태야 속에서 죽으며 매달 태양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거대한 힘인 시바는 달의 신이다. 그의 배우자인 파르파티는 태양의 힘이다. 비록 인도에서는 남성지향적 행동 체계에 대한 예배가 직접 시바에게 향한 것이지만, 이는 사실상 칼리 여신을 향한 것이다. 왜냐하면 예배가 결국 그곳으로 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제로 인도에서는 칼리가 가장 위대한 신이다.

 

314 힌두교의 여신 칼리는 자기 배우자인 남신 시바의 엎드린 몸 위에 서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여신은 죽음의 칼을 휘두르고 있는데, 이 칼은 곧 영적 훈련을 의미한다.

 

316 북부에서 그러니까 유럽의 체계에서 그리고 이른바 양과 음이 있는 중국의 체계에서 남성은 공격자, 즉 활동적인 원칙이고, 여성은 수용적, 수동적인 측면이라는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현상이다. 하지만 인도에서는 이와 반대다. 힌두교의 입장에서는 여성이 샤크티, 즉 척추를 따라 올라오는 뱀의 힘이며, 삶의 에너지의 본질이다. 여성은 활성자이며, 남성은 단지 혼자 있고 싶어할 뿐이다.

 

316 청동 시대라고 부르는 신화 체계에서 여성은 위대한 신이며 모든 힘의 원천이다. 예를 들어서 파라오가 왕좌에 앉은 모습을 그린 이집트의 그림에서 그 왕좌는 그에게 권위를 부여한 것이다. 그 왕좌는 곧 여신 이시스다. 이와 똑같은 신화의 이미지는 성모와 그리스도의 도상에서도 나타난다. 즉 아기 그리스도는 성모의 무릎에 앉는데 그 모습은 파라오가 자기 보좌에 앉은 모습과 똑같다. 즉 여성이 남성의 힘인 것이다. 이 각각의 남성은 세계의 지배자로 일컬어지지만 그 뒤에 항상 있는 것은 바로 여성이다. 마찬가지로 미국 대통령의 옛날 사진을 보면 보통 대통령의 아내는 남편의 뒤에 서 있곤 했다. 거기서도 대통령의 아내는 이시스이며, 대통령은 보좌에 앉은 아기인 것이다.

 

319 남성의 일은 생명과 관계하는 것이다. 여성의 일은 생명 자체가 되는 것이다.

 

319 남성의 주된 기능은 그 안에서 여성이 출산을 할 수 있는 환경적 상황을 수립하는 것이며 또한 여성이 미래를 가져올 수 있도록 그 장을 조성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여성이 곧 생명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전체다. 남성은 보호하는 인자이며 여성의 힘의 대행자이다.

 

320 여성이 아이를 낳는 일은 여성의 존재의 일부이며, 또한 여성의 몸 자체에 이미 존재하는 역할을 완수하는 것이다. 하지만 생산이 오로지 아이를 낳는 행위에만 국한될 필요는 없다. 여성이 상징하는 삶 속의 그 힘을, 그 특징을, 그 존재를 드러내는 행위 모두가 곧 생산이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는 일이 생물학적 친자 출산만 아니라면 어떤 식으로 드러날 수 있을까? 나는 불모의 땅이 아니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네.

 

326 이쯤 되어 제기되는 질문은 백이면 백 이런 것이다. “여성의 여행은 없습니까?”

 

326 여성은 은퇴할 때가 되면 이 세상의 손자손녀에 대하여 할머니의 위치에 설 수 있다. 성숙한 그리고 삶을 육성하는 조언을 할 수 있는 역할에 서는 것이다. 여성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생물학적으로나 사회학적으로 삶을 산출하며, 그거고 나서 말년의 단계에 가서는 삶을 육성하고 삶을 인도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말년에 접어든 남자는 여자에 비해 훨씬 내향적이다.

아무나 나이가 들었다고 지혜로운 씨족의 할머니가 될 수 있는게 아니다. 그녀의 두 삶의 단계를 잘 살아내어야 한다.

 

327 만약 어떤 여성이 성취의 장에 들어서는 남성의 과업을 수행한다면, 그녀의 신화는 본질적으로 그 남성 영웅과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그 여성 영웅은 물론 남성이 결코 만나지 못했던 또 다른 어려움이며 이득을 접할 것이지만 남성이건 여성이건 간에 내적 여정, 즉 영적 탐색은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남성의 만다라의 중심 이미지는 종종 빛을 방사하는 보석이나 그와 비슷한 어떤 것이지만, 여성의 경우는 그런 중심 이미지가 아이-자신의 영적 출산으로 낳은 아이-를 팔에 안고 있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왜냐하면 여성의 신체적 특성의 심상이 영적인 현상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성취의 장에 들어가서 남성의 과업을 수행하면 남성영웅신화를 따른다고 말하나? 현대 문명은 여성도 준남성화되어 있어서 남성적인 원리라고 말한데 치중하여 흘러간다. 여성성의 원리 회복이 중요하다.

 

381 예술가는 어떤 구조물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그것은 사회에 대한 봉사라는 방식이 아니라 내부의 동력을 발견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382 여러분의 책임과 여러분의 건강 모두를 유지하면서 여러분의 창조적 측면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밀폐 봉인된 은신처를 만들어 매일 몇 시간가량은 아무것도 침범해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하며, 여러분이 성실하게 지킬 수 있는 시간만큼 그 시간을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이 정도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몇 시간씩 더 자신에게 허락하되 단 여러분이 반드시 해야 하는 작업을 할 시간과 에너지는 반드시 남겨 두어야 한다.

이는 마치 훈련을 하는 것과 유사하다. 여러분은 훈련에 돌입할 때 시간을 설정해 놓으면 그것은 거룩한 시간이다. 여러분의 예술에 대해서도 똑같이 해야 한다. 즉 하루에 정해진 시간만큼을 여러분의 예술에 바치고, 그것을 시종일관 지켜야 한다. 그러면 뭔가를 쓰거나 쓰지 않거나 간에 그 시간 동안은 거기 앉아 있어야 한다. 이것은 소통과 표현, 즉 예술 작업의 두 가지 요소에 대한 명상이다.

매일 자신의 성소에서 2~3시간을 보내는 게 사소하지만 이토록이나 중요한 일이구나.

 

386 흔히 말하는 작가의 슬럼프를 돌파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것은 내가 보기에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중 첫째는 우선 여러분이 말을 걸고 싶은 상대를 하나 찾으라는 것이고, 둘째는 하루에 두 시간 동안은 말 그대로 그 사람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쓰는 시간을 떼어두라는 것이다.

나 역시 슬럼프가 아닌가? 3월 이후로 뭔가를 매일 못쓰고 있다. 북리뷰 역시 이번 주에 열라 달려볼 뿐이네. 왜 이렇게 된 걸까 모르겠지만. 캠벨이 말하는 슬럼프 극복방법을 한 번 적용해 보아도 좋을 듯 하다.

 

413 ‘우선 사회를 바로잡고 나서 그런 다음에 나를 바로잡겠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심지어 하나님의 평화의 저택의 출입문에서조자 입장을 금지당할 것이다. 모든 사회는 악하고, 슬픔이 가득하고, 불공평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따라서 여러분이 진정으로 이 세상을 돕고 싶다면, 여러분이 반드시 가르쳐야 할 것은 앞으로 어떻게 그 안에서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삶에 관한 지식에서 비롯되는 즐거운 슬픔과 서러운 즐거움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몸소 체득하지 못한 사람은 결코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자기 삶에서, 자기가 먼저 그 삶을 살아내야 한다. 거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353 조이스는 적절한 예술의 도움을 받아 아퀴나스에게로 나아간다. 그는 라틴어를 사용해서 심미적 대상이 세 가지 순간을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인테그리타스(integritas) 전일성, 콘소난티아 (consonantia), 조화’, 그리고 클라리타스(claritas) 이 그것이다.

예술을 통해 전일성, 조화, 빛으로 나아간다면 좋겠구나.

 

358 내가 찾아낼 수 있는 유일한 답변은 세잔의 것 뿐이다. “예술은 자연과 나란히 하는 조화다물론 여기서는 두 가지 자연이 모두 관계된다. 즉 저 바깥에 있는 세계고, 또 하나는 우리 안에 있는 자연(본성)의 세계다. 다시 말해서 예술가의 의도가 자연과 나란히 하는 조화를 도모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의도는 십중팔구 교훈이나 외설과 연관되게 마련이라면 그 조화는 여러분의 내부에 있는 뭔가와 공명하고, 여러분을 심미적으로 심취시키고, 여러분은 그렇게 큰 아하의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의 기능이란 유형적이고 가시적인 세계의 소진 가능한 것을 열어젖힘으로써, 그것들을 통해 광휘, 여러분의 안에 있는 것과 똑같은 광휘가 환히 비치게 하는 것이다.

조이스 또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과 같다.

 

359 이런 조화로운 리듬을 막는 두 가지 운동은 붓다의 두 가지 시험과 정확히 일치한다. 하나는 욕망으로 여러분이 대상을 소유하게 만들며, 또 하나는 혐오 또는 두려움으로 여러분이 그 대상으로부터 돌아서게 만든다. 여러분이 어떤 대상을 소유하러 나아가거나 또는 그 대상으로부터 돌아서게 되면, 여러분은 마야가 투사한 미혹적인 호소와 두려움의 세상에 대해 반응하는 것이 된다.

흥미롭다. 종교적인 깨달음 뿐만 아니라 예술이 목표로 하는 조화에서도 붓다의 두 가지 시험이 적용된다.

 

침머의 우화. 구본형 책에서 이 우화를 읽었다. <깊은 인생> 215였다. ‘캠벨의 책을 읽고 있었다로 시작되는 문장이다. 평범한 사람 안에 있는 비범함을 발현시키는 책의 에필로그에서다. ‘나는 자신의 이야기, 즉 나의 신화를 하나 갖기 위해 이 책을 썼다.’

 

167 침머는 인도에서 기원한 재미있는 동물 우화를 즐겨 인용했다. 새끼를 배고 오래 굶주린 암호랑이 한 마리가 염소 떼에게 덤벼들었는데 어찌나 용을 쓰며 달려들었는 지 그만 새끼를 낳아 버리고 어미는 죽어 버렸다.

염소들은 뿔뿔이 흔텅졌다가 나중에 그 목초지로 돌아왔는데 가만 보니 갓 태어난 호랑이와 죽은 어미 호랑이가 있었다. 어버이로서의 본능이 강했던 염소들은 그 불쌍한 새끼 호랑이을 대신 키웠고 그리고하여 그 호랑이는 자기가 마치 염소라고 생각하며 자랐다. 호랑이는 음매 하고 우는 법을 배웠다. 풀을 뜯어 먹는 법도 배웠다. 하지만 풀이 호랑이에게 좋을 리 없으므로 그 녀석은 호랑이 중에서도 가장 비리비리하게 생긴 녀석이 되고 말았다.

새끼 호랑이가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 어디서 큰 수컷 호랑이가 나타나 덤벼드는 바람에 염소 떼가 사방팔방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호랑이이긴 해도 아직 어렸던 이 녀석은 도망도 못가고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자 큰 호랑이가 새끼 호랑이를 보고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뭐야, 너 지금 이 염소들하고 같이 사는 거야?” “음매애애애새끼 호랑이가 대답했다. 그러자 큰 호랑이는 벌컥 화를 냈다. 마치 어느 날 갑자기 히피처럼 머리를 길게 기르고 나타난 아들놈의 모습을 본 아버지가 울화통을 터뜨리듯 말이다. 큰 호랑이는 새끼 호랑이를 몇 번 철썩철썩 때려 주었지만, 새끼 호랑이는 여전히 멍청하게 음매 소리를 내면서 풀만 씹을 뿐이었다. 그러자 큰 호랑이는 새끼 호랑이를 끌고 잔잔한 연못으로 갔다.

잔잔한 연못이란 흔히 인도에서 요가라는 관념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사용된다. 요가의 첫 번째 잠언은 다음과 같다. “요가는 마음의 자발적인 활동을 의식적으로 중지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지속적은 유동체로서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연못의 수면과도 유사하다. .. 새끼 호랑이는 연못을 바라봄으로써 난생 처음으로 자기 얼굴을 바라보게 되었다. 큰 호랑이는 자기 얼굴을 그 옆에 갖다 대고는 말했다. “이것 봐. 네 얼굴도 내 얼굴이랑 비슷하지. 넌 염소가 아니야. 나하고 똑같은 호랑이라구. 그러니 나하고 똑같이 되어야지.”

이것이 구루가 하는 일이다. 내 모습을 마음에 새기고, 나하고 똑같이 되거라. 이는 혼자 하는 수행가는 정반대의 방법인 것이다.

그리하여 새끼 호랑이는 그 메시지를 이했다. 큰 호랑이는 새끼 호랑이를 데리고 자기 굴로 갔다. 그 안에는 최근에 잡은 영양 고기가 남아 있었다. 그 피투성이 고기를 한 입 베어 물면서 큰 호랑이가 말했다. “저는 채식주의자인데요.” “헛소리 하지 말고!” 큰 호랑이가 이렇게 말하며 고기토막을 하나 집어서 새끼 호랑이의 목구멍 속에 쿡 찔러 넣었다 새끼 호랑이는 숨이 막혀 켁켁거렸다. 문헌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진정한 가르침 앞에서 모든 사람이 그러하게 마련이듯이

진정한 가르침과 마주하고 캑캑거리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끼 호랑이는 그것을 자기 핏 속에, 자기 몸 속에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것이 그에게 올바른 먹이였기 때문이다. 새끼 호랑이는 무의식적으로 진짜 호랑이다운 기지개를 켰다. 난생처음으로. 새끼 호랑이의 표효가 터져나왔다. 호랑이 기본 포효 1번이었다. 큰 호랑이가 말했다. “그거야. 이젠 너도 제대로 된거야. 이제 숲으로 들어가서 호랑이다운 먹이를 찾아 먹자.”

플라톤의 <향연>에 나오는 자웅동체 우화, 동성애까지 포함함

 

45 플라톤의 <향연>에 나오는 우화도 고려해 보라. 여기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창세기와 동일한 신하를 다음과 같이 좀 장난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최초의 사람은 둥근 모양을 하고 있었으며, 팔과 다리는 각각 네 개씩 달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생긴 두 얼굴이 서로 반대편을 향하여 붙은 채로 둥근 목 위에 달려 있었습니다. 귀는 네 개고 생식기는 둘이었지요. 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이것들에서 미루어 짐작이 갈 줄 압니다.” 플라톤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 최초의 인간들은 남성-남성과 남성-여성, 그리고 여성-여성의 세 종류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놀라운 힘을 가졌다. 신들은 그들의 위력을 두려워하였다. 따라서 제우스는 그 인간들을 모두 두 동강 내기로 결심했다. 마치 사과를 절여서 저장하려고 할 때 절반으로 쪼개듯 말이다... “그래서 본래의 몸이 갈라졌을 때, 그 반쪽은 각각 다른 반쪽을 그리워하고 다시 한 몸이 되려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은 서로 목을 끌어안고 꼭 붙어 있으려고 하였으며, 또 서로 떠나서는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굶어죽고 말았습니다...이렇듯 서로 사랑하는 것은 먼 옛날부터 그들 속에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는 본래의 몸뚱이 부분을 다시 한데 모아 둘에서 하나게 되게 하여, 인간 보연의 모습을 회복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런즉 서로 분리되어 있는 우리들 각자는 한 인간의 나머지 절반입니다. 마치 넙치처럼 한 쪽 면만 갖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람마다 자기의 다른 반쪽을 항상 찾는 것입니다.”

사랑의 다섯 가지 단계 또는 종류 힌두교

 

60 힌두교 비슈누 식으로 사랑을 분석해보면, 사랑에는 다섯 가지의 단계와 함께 그 각각의 단계를 대표하는 모델이 하나씩 있다. 깨달음을 찾고 성취하는 모든 훈련은 이 경로의 에너지로부터 수행될 수 있다.

사랑의 첫째 단계는 주인에 대한 하인의 사랑으로, 가장 낮은 단계의 사랑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종교적 사고에 대해서나 사랑에 대해서 스스로를 헌신할 만한 시간이 많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방법이다. 이 첫 번째 단계를 대표하는 모델은 (인도 신화에 나오는) 작은 원숭이 왕이며 라마의 하인인 하누만이다.

두 번째 단계는 친구와 친구의 관계로 우리(즉 서구인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자각이다. 이 두 번째 사랑의 모델은 친구대 친구, 가령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사랑이라든지, 또는 어떤 것이나 어떤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어떤 명령을 따르는 것이라기보다는 자발적인 행동으로서의 사랑을 경험할 때마다 여러분은 제1단계에서 벗어나 제2단계로 진입하는 셈이다.

세 번째 사랑은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다. 이것은 친구의 친구대 사랑에 비해 훨씬 친밀하고 강력한 사랑이다. 이 세 번째 사랑의 이미지는 성탄 구유, 즉 우리 자신의 마음 속에 들어올 예수를 상징하는 그 아기가 태어난 장소이다. 이것은 성스러운 힘이 여러분 안에 들어있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자각되는 것에 대한 상징이다. 여러분은 그 영적인 아이를 여러분 속에 입양하는 것이다.

사랑의 네 번째 단계는 배우자 대 배우자의 관계로, 여기서는 자웅동체의 또는 다른 한쪽의 발견이라는 문제가 대두된다.

이제 우리는 사랑의 가장 높은 단계인 다섯 번째에 이르는데, 이것은 강박감에 사로잡힌, 억제하기 어려운 금지된 사랑으로 여기에는 오로지 사랑뿐이어서 여러분은 하나님과 관계된 자신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나오게 된다. ‘르 포(광인)’ 즉 사랑에 몰두한 까닭에 결국 미쳐버린 사람이 되는 것이다.

결혼의 경우 우리는 여전히 사회며 이웃과의 관계를 조화롭게 유지할 수 있지만 다섯번째의 사랑에 도달하면 사랑 이외의 것들은 모조리 사라지고, 상대방에 대한 일방적인 집착만 있을 뿐이다.

 

 

책 안에는 캠벨이 자신의 삶에 대해서 말해놓은 부분이 많다. 캠벨의 저서 중에서 가장 많이 자신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저서가 아닐지.

유럽유학 후 돈이 없음

 

82 내가 유럽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지 3주 만에 월스트리트의 주가가 대폭락했다. 당시 내가 지닌 유일한 재산은 대학의 어느 재즈 밴드에서 연주를 해서 모은 것뿐이었다. 다해서 수천 달러 가량 되었는데, 그 당시에는 제법 큰 돈이었다. 나는 그 돈이 완전히 바닥날 때까지 버텼다. 다시 말해 이후 5년 동안 나는 땡전 한 푼 벌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 내가 깨달은 사실은 만약 부양할 가족이 없었다면 돈인 전혀 없어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82 나는 이제까지 돈에 관해 완전히 무심한 삶을 살아왔다. 대신 나는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함으로써 제법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그렇게 하면 결국은 돈이 따라오게 된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삶에 선사하는 것과 삶이 여러분에게 보답하는 것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도

같기 때문이다.

우드스톡에서 5년간 책읽기, 방랑 등 캠벨의 인생에 대한 자술

 

86 나는 일찍이 유럽에 가서 공부할 수 있는 장학금을 받고 파리 대학교로 유학을 갔다. 나는 중세 프랑스어와 프로방스어, 그리고 음유시인들의 시를 공부했다. 유럽에 가서야 나는 현대 예술을 발견했다. 제임스 조이스, 피카소, 몬드리안 등을 말이다. 1927년부터 1928년까지의 파리는 매우 특별한 곳이었다. 그 다음에는 독일로 가서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면서 힌두교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융을 발견하게 된 것도 독일에서다.

나는 대학으로 가서 이렇게 말했다. “저기요. 나는 저 유리병 속으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학위 취득을 위한 필수과목을 모두 수강한 상태였고, 이제 그 망할 놈의 논문만 쓰면 땡이었다. 하지만 대학 측에서는 내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서 공부를 계속하도록 허락해 주지 않았다. 결국 이까짓 것 개난 줘 버리자고 생각했다. 대신 나는 숲 속으로 들어가 5년 동안 독서로 시간을 보냈다. 그리하여 나는 박사학위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덕분에 나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자유로웠고 아무런 책임질 일도 없었다. 그야말로 경이로웠다.

 

88 1929년부터 1934년까지의 5년간이었다. 나는 뉴욕 주 우드스톡의 작은 오두막에 살면서 그저 책만 파고 들었다. 그저 읽고, 또 읽고, 읽으면서 노트 필기를 했다. 그 당시는 대공황의 와중이었다. 돈이라곤 한 푼도 없었지만 당시 뉴욕에는 스테처트 헤프너라는 큰 서점이 있어서 나는 거기다가 책을 주문했다. 하지만 특히 프로베니우스의 책들은 매우 비쌌다. 그 즉시 책값을 지불하지는 않았다. 대공황 때는 다들 그랬다. 서점에서는 내가 일자리를 구할 때까지는 기다려 주었고, 나는 일자리를 구하고 나서 책값을 냈다. 그야말로 훌륭한 태도였다. 나로선 지금도 감사해 마지 않는 일이다.

나는 조이스와 토마스 만과 슈펭글러를 읽었다. 슈펭글러는 니체를 언급했다. 나는 니체도 읽었다. 그러다가 니체를 읽으려면 소펜하우어를 먼저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쇼펜하우어도 읽었다. 그러다가 쇼펜하우어를 읽으려면 칸트를 먼저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시긍로 해서 칸트도 읽었. 일단 거기까지만 가도 되긴 했지만, 칸트를 출발점으로 삼자니 상당히 힘들었다. 그래서 거기서 다시 괴테로 거슬러 올라갔다.

5년동안 나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비록 잠시 동안이라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계속 살아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점은 확신하고 있었다. 한 번은 작은 서랍장의 맨 위 서랍 안에 1달러짜리 지폐 한 장을 넣어두고는, 그 돈이 거기 남아 있는 한 아직 빈털터리까지는 아니라고 자위한 적도 있었다. 정말이지 놀라웠다. 나는 아무런 책임도 지고 있지 않았다. 전혀. 정말 재미있었다. 일기를 쓰고,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내려 애써 보았다. 나는 여전히 그 당시의 물건들을 가지고 있. 이제 와서 그 물건들을 다시 들여다 보면 전혀 믿을 수 없을 정도다.

 

89 나는 완벽한 삶을 산 것 같다. 내가 필요로 하는 것들은 내가 필요로 하는 바로 그 순간에 맞춰 나타나 주었다. 내가 그 당시에 가장 필요로 했던 것은 5년 동안 직업도 없이 지낼 수 있는 삶이었다. 그게 가장 절실했다.

 

91 우드스툭에서 지내던 와중에 나는 일자리를 알아보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소형차인 포드모델 A를 타고 대공황 중에 미국 대륙을 횡단했다....일단 서부 연안에 도착하고 보인 나는 실업자 신세였고, 게다가 캘리포니아까지 왔으니 더 이상은 서쪽으로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다. 나는 1925년에 하와이에 다녀오는 배 안에서 새너제이에 사는 여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이후 우리는 작은 엽서를 통해 장거리 서신 교환을 했다. ‘아이델한테 잠깐 들러서 인사나 하고 가지 뭐’...그녀의 형부란 존 스타인백이었고 우리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뭔가를 의도적, 계획적으로 노력하기 보담 우연에 맡겨진 면이 많구나.

 

97 모든 것은 자연스레 눈에 띄게 되는데, 왜냐하면 모든 것이 가능성이며, 모든 것이 단서이며,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경이로운 일이다. 만차 여러분의 코가 여러분을 올바른 곳으로 인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여러분이 그와 같은 여행을 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놀라운 순간들을 향해 나아가는 셈이다. 가령 내가 카멜 도서관에서 우연히 손을 뻗어 한 권의 책, 그러니까 내 인생을 뒤바꾼 책을 발견한 것처럼. 정말로 그랬다.

 

98 나는 여덟 달 동안 방랑 생활을 했다. 캘리포니아에서 1년을 보낸 뒤 나는 뉴욕으로 돌아왔다.

 

99 여러분도 방랑을 하게 되면, 당장 그날 하루무엇을 할 것인지는 생각하되, ‘내일은 뭘 해야지하고 미리 생각해 둔 것에 매달리지는 말아야 한다. 여러분이 아무런 책임질 일을 갖고 있지 않을 경우, 여러분은 다음 두 가지를 결코 걱정해서는 안된다. 하나는 굶는 것이며, 또 하나는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다. 방랑하는 시간은 긍정적인 시간이다. 새로운 것도 생각하지 말고, 성취도 생각하지 말고, 하여간 그와 비슷한 것은 절대 생각하지 마라. 그냥 이런 생각만 하라. “내가 어디에 가야 기분이 좋을까? 내가 뭘해야 행복할까?”

진짜다. 이런 너무 간단한 일이다. 여러분을 옥죄는 생각을 머릿 속에서 싹 지워버리면, 여러분은 마치 룰렛 바퀴 위의 공처럼 자신이 어디에 안착할 것인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룰렛 속은 결코 , 여기 내려 앉는 것보다는 차라리 저기 내려 앉아야 사람들이 나를 더 좋아할 거야.’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것을 받아들이고, 여러분의 마음에 드는 곳에 머물라. 중요한 것은 여러분 스스로가 나의자리라고 생각하는 곳에 머무르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야 그저 그들만의생각일 뿐이니까.

 

100 우리 부모님은 한 번도 나를 몰아세운 적이 없다. 그런 면에서 나는 정말 운이 좋았다. 새러 로렌스에서 교직 제안이 들어왔을 때에도 나는 일자리가 필요없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일자리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봤자 내 독서에 방해만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그 학교에 예쁜 여학생들이 와글거리는 것을 보고 나니 문득 , 이것도 나쁘진 않겠다라는 생각이 드렁. 마침내 일자리를 얻을 무렵 나는 딱 서른살잉는데 그 때 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 난 사실 네가 가방끈만 긴 날건달이 될 줄 알았지 뭐냐하지만 내가 일자리를 얻기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결코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내신 적이 없었다. 우리 아버지야 말로 정말 훌륭한 분이었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 나왔을 때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예언하건대, 이 책은 정말 대단한 책이 될 것이다.” 아버지는 물로 그 책을 결코 펼쳐 보지도 않으셨지만, 당신 아들이 뭔가 큰일을 해냈음을 아셨던 것이다.

 

아내와 만나게 된 사연. 그는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화의 힘>에서도 사랑과 결혼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는 자기 인생에서 이것을 적용했을까 궁금했었다.

 

47 내 경우에는 새러 로렌스 칼리지에서 강의하면서 예쁜 여학생들을 많이 상대했는데, 그러다 보면 어딘가 약간 마음이 들뜨는 느낌이 드는 강의가 분명히 있었다. 6개월이나 걸려서야 나는 그 원인 제공자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고, 그 순간 나는 이미 사랑에 빠졌음을 깨달았다. 실제로는 지금의 내 아내를 처음 봤을 때부터 그런 느낌을 받았지만 나는 한동안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계속 강의를 들었고, 나는 마음이 계속 들떠 있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하는 것일까? 마침내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를 알아냈고, 그야말로 순수하고 아름다운 관계가 시작되었으며, 나는 한참 뒤에야 내 마음을 전하기 위해 아주 은근한 표시를 했다. 곧 졸업할 그녀에게 책을 한 권 선물한 것이었다. 바로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이었다. 작은 선물이었지만 의미심장한 것이기도 했다. 나 자신의 그런 투사의 배후에는 뭔가가 있었다.

결혼에 대한 캠벨의 징조 결혼=죽음

 

69 그것 말고도 우리 결혼에는 일종의 징조가 있었다. 당시 나는 한해 임대료가 20달러밖에 안되는 우드스톡의 매버릭 로드의 작은 집에서 살고 있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우리 신혼부부는 차를 타고 그 집으로 향했다. 매버릭 로드에 접어든 순간, 반대편에서 영구차 한 대가 나타나 우리 앞으로 지나갔다. 이제껏 그 동네에서는 영구차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에 나는 그것이 우리 부부가 죽을 때까지 함께 할 것이라는 징조라고 생각했다. 정말이다.

진의 늑장

 

297 당시 내가 지닌 문제 가운데 하나는 아내인 진이 뭘 하든 항상 늑장을 부린다는 것이었다. 가령 아내와 어디서 만나기로 약속을 할 경우, 내가 먼저 도착해서 30분 가량 기다리는 것은 다반사였다. 물론 남자가 여자를 기다리는 것은 어찌 보면 정상일 수 있다. 여자들의 경우는 일단 집밖으로 나오기 위해서는 이것저것 해야 할 일들이 많기 때문에 30분의 시간도 어찌 보면 부족할 수 있다.

게다가 요즘 뉴욕에서라면 어딜 가든지 약속에 30분 늦는 것은 보통이다. 하지만 진의 문재는 항상 자기가 약속장소에 도착해야 할 시간을 오히려 출발 시간으로 여긴다는 데 있었다. 그래서 나는 고민 끝에 집사람을 그렇게 오래 기다려야 하는 문제를 앨런에게 털어놓았다. “이 노릇을 어떻게 해야 할까? 기다리다 보면 화가 치밀고 그러다가 결국 집사람이 나타나면 거기다 대고 짜증을 부리게 되거든.”

그러자 앨런이 말했다. “내가 보기에 자네의 문제는 집사람이 거기 도착하기를 바란다는 것, 그리하여 자네가 속해 있지 않은 어떤 상황을 열망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 명심하게. 줄곧 현실과는 다른 일을 생각함으로써 자네는 거기서 진을 기다리는 동안 할 수 있었던 다른 경험들을 망치고 있는 셈임을 말이야.”

그때 이후로 진을 기다리는 것은 일종의 영적 훈련이 되었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다짐했다. “진이 벌써 도착했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야 해. 주위를 둘러보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 살펴 봐야지.” 그러고 나면 내가 있는 장소는 어찌나 흥미진진한지. 나로선 집사람을 기다리는 동안 지루할 새가 없을 지경이다. 가끔은 진이 나를 기다리게 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 정도니 말이다. 나로선 이런 일이 가능하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앨런은 내겐 현실이 지금과는 달랐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을 차단해보도록 조언을 준 것이었다. 이것은 두려움과 욕망이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 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으리라.

 

 

 

3.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조지프에게, 젊은 파르치팔에게, 불멸의 인물에게

 

들어가는 말 ; 캠벨 사상의 진소, 그 아름다운 내면과의 마주침

 

9 첫 번째 단계(현세에서의 삶)는 주로 골반에 위치한 에너지의 중심부 (차크라)의 주제-생존, 섹스, -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조지프는 돈, 이성, 노년의 양상, 죽음, 결혼, 전쟁, 출산, 제의 등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있다.

 

9 두 번째 단계(깨달음의 길)는 우리 스스로에 대한 깊은 사랑과 진리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자신을 사랑함으로써 우리는 스스로의 희열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며, 캠벨에 따르면 여기서 희열이란 우리의 가장 높은 종교적 열광(enthusiasm)을 의미한다. ‘엔테오스(entheos)’라는 단어는 신으로 가득 찬이라는 뜻이다. 우리를 신성으로 가득 채우는 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 즉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곳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바꾸기 위해 모두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10 우리가 마지막 층위(성스러운 삶과의 조우)까지 성장해 나아가면, 우리는 스스로의 선택을 통해 환영(마야, maya)의 차단막을 걷어 올리고 지상에 펼쳐져 있는 아버지의 왕국을 드러낼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마야를 만든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천체의 리듬이 우리 속으로 들어오고, 우주의 박동이 우리의 것이 된다.

 

10 조지프는 상징 그 너머를, 즉 그것이 표상하고 있는 풍부함을 바라보는 법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상징 그 너머를 바라볼 수 없는 사람들은 기껏 식당까지 찾아가서는 메뉴판만 먹어치우고정작 메뉴판에 나온 진짜 음식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과 같다.

 

11 환희 속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건강이었다. 조지프의 말을 그대로 따르자면 우리 각자의 희열을 따르는 것은 방종한 것이 아니라, 외려 생명력이 넘치는 것이었다.

 

11 나는 우리가 신들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기만 하면, 신들은 우리를 향해 열 걸음을 다가서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한 걸음, 여정의 그 영웅적인 첫 걸음은 여러분의 울타리 바깥으로 또는 그 가장자리 너머로 나아가는 것이며 우리는 가끔 심지어 도움을 받고 있음을 깨닫기도 전에 발걸음을 먼저 내딛어야만 한다.

 

11 카를 융과 마찬가지로 조지프는 노년기를 인생의 감소기로 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만개의 시기로 보았다.

 

12 인생에 대해 작별을 고하지 못하는 노인은 인생을 포용할 수 없는 젊은이와 마찬가지로 연약하고 병약하게 보인다.”

 

13 조지프와 일하고 난 다음부터, 나는 매년 크리스마스 때마다 내 안의 영적이고 창조적인 아이의 탄생을 기념하고 있다.

 

14 스코틀랜드 핀드혼 사람들은 굳게 믿고 있다. 나무의 의식이 제재소 너머까지도 이어진다고, 즉 나무들이 자신들의 몸으로 만들어진 집은 물론이고 거기 사는 사람들까지도 알고 있다고.

 

도입의 단계 : 영웅의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19 여러분의 지금 모습 그대로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평생 누릴 특권이다.

 

20 진정한 의미란 살아있음 바로 그것이다.

 

21 전사의 방식이란 삶에 대해 라고 하는 것, 그 모든 것에 대해 라고 하는 것이다.

 

21 이 세상의 슬픔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라. 우리는 이 세상의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지만 기쁨 안에서 사는 삶을 선택할 수는 있다.

 

23 현재의 형상에만 매달리면 우리는 다음의 형상을 지니지 못하게 된다. 계란을 깨뜨리지 않고서 오믈렛을 만들 수 있겠는가. 파괴가 있은 다음에 창조가 있다.

 

26 우리 안의 더 깊은 힘을 찾아내는 기회는 삶이 가장 힘겹게 느껴질 대 비로소 찾아온다.

 

27 여러분이 현재 처한 상황을 희극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면 여러분은 영적인 거리를 얻게 된다. 결국 유머 감각이 여러분을 구원하리라.

 

28 영원은 여기와 지금으로 이루어진 차원이다.

 

28 여러분 자신의 중심에서 살아가라.

 

29 깨뜨리고 나옴은 (남이 보여준) 희열의 모범을 따르고 옛 장소에서 떠나고, 여러분의 영웅 여정을 시작하여 여러분만의 희열을 따르는 것이다. 뱀이 그 허물을 벗어버리듯이 여러분은 지난 날을 팽개치라.

 

 

의식의 첫 번째 단계 : 현세에서의 삶

 

43 기독교와 유대교는 귀양살이의 종교다. 인간은 동산에서 쫒겨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44 결혼이란 자웅동체를 재건하는 일이다. 여러분이 오로지 사랑 때문에 결혼한다면 그 결혼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여러분은 또 다른 충위에서도 결혼하여 자웅동체를 재건하고, 완벽한 전체를 만드는 남자와 여자가 되어야 한다.

 

자웅동체, 동성애까지 포함함

45 플라톤의 <향연>에 나오는 우화도 고려해 보라. 여기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창세기와 동일한 신하를 다음과 같이 좀 장난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최초의 사람은 둥근 모양을 하고 있었으며, 팔과 다리는 각각 네 개씩 달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생긴 두 얼굴이 서로 반대편을 향하여 붙은 채로 둥근 목 위에 달려 있었습니다. 귀는 네 개고 생식기는 둘이었지요. 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이것들에서 미루어 짐작이 갈 줄 압니다.” 플라톤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 최초의 인간들은 남성-남성과 남성-여성, 그리고 여성-여성의 세 종류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놀라운 힘을 가졌다. 신들은 그들의 위력을 두려워하였다. 따라서 제우스는 그 인간들을 모두 두 동강 내기로 결심했다. 마치 사과를 절여서 저장하려고 할 때 절반으로 쪼개듯 말이다... “그래서 본래의 몸이 갈라졌을 때, 그 반쪽은 각각 다른 반쪽을 그리워하고 다시 한 몸이 되려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은 서로 목을 끌어안고 꼭 붙어 있으려고 하였으며, 또 서로 떠나서는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굶어죽고 말았습니다...이렇듯 서로 사랑하는 것은 먼 옛날부터 그들 속에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는 본래의 몸뚱이 부분을 다시 한데 모아 둘에서 하나게 되게 하여, 인간 보연의 모습을 회복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런즉 서로 분리되어 있는 우리들 각자는 한 인간의 나머지 절반입니다. 마치 넙치처럼 한 쪽 면만 갖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람마다 자기의 다른 반쪽을 항상 찾는 것입니다.”

어린시절. 융이 돌 놀이를 다시 시작한 것을 이야기하면서 다룬 예.

 

261 내 경우에는 열한 살 때부터 열다섯 살까지 아메리카 인디언에 관해 열광한 적이 있었다. 우리 부모님은 미국 인종국의 보고서인 파크먼 전집을 비롯해서 그 주제에 관한 갖가지 책들을 사주셨다. 나는 제법 훌륭한 소규모 장서를 갖고 있었으며, 책 버팀대로 사용하는 멋진 인디언 두상들이며, 나바호 족 깔개 등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집에 불이 나고 말아싿. 우리 가족에게는 크나큰 재난이었다. 그 사로로 인해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내 물건들도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 와서 깨달은 사실이지만 내가 훗날 나 자신을 위해 만든 성스러운 공간, 즉 내가 글을 쓸 때 사용하는 방은 사실상 내 어린 시절의 공간의 재건, 또는 재가동이라 해도 무방하리라.

 

캠벨의 삶. 아내와 만나게 된 사연

47 내 경우에는 새러 로렌스 칼리지에서 강의하면서 예쁜 여학생들을 많이 상대했는데, 그러다 보면 어딘가 약간 마음이 들뜨는 느낌이 드는 강의가 분명히 있었다. 6개월이나 걸려서야 나는 그 원인 제공자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고, 그 순간 나는 이미 사랑에 빠졌음을 깨달았다. 실제로는 지금의 내 아내를 처음 봤을 때부터 그런 느낌을 받았지만 나는 한동안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계속 강의를 들었고, 나는 마음이 계속 들떠 있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하는 것일까? 마침내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를 알아냈고, 그야말로 순수하고 아름다운 관계가 시작되었으며, 나는 한참 뒤에야 내 마음을 전하기 위해 아주 은근한 표시를 했다. 곧 졸업할 그녀에게 책을 한 권 선물한 것이었다. 바로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이었다. 작은 선물이었지만 의미심장한 것이기도 했다. 나 자신의 그런 투사의 배후에는 뭔가가 있었다.

 

58 노년에 이르면 여러분은 긴급한 일과로부터 해방되고 그 무엇보다도 더 생생한 자신의 기억 시스템 속으로 침잠한다. 여러분의 부모님과 함께 했던 중대한 순간들이 이제 거기 여러분과 함께 있는 것이다. 그 순간들이 중요해진다.

 

사랑의 다섯 가지 단계 또는 종류 힌두교

 

60 힌두교 비슈누 식으로 사랑을 분석해보면, 사랑에는 다섯 가지의 단계와 함께 그 각각의 단계를 대표하는 모델이 하나씩 있다. 깨달음을 찾고 성취하는 모든 훈련은 이 경로의 에너지로부터 수행될 수 있다.

사랑의 첫째 단계는 주인에 대한 하인의 사랑으로, 가장 낮은 단계의 사랑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종교적 사고에 대해서나 사랑에 대해서 스스로를 헌신할 만한 시간이 많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방법이다. 이 첫 번째 단계를 대표하는 모델은 (인도 신화에 나오는) 작은 원숭이 왕이며 라마의 하인인 하누만이다.

두 번째 단계는 친구와 친구의 관계로 우리(즉 서구인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자각이다. 이 두 번째 사랑의 모델은 친구대 친구, 가령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사랑이라든지, 또는 어떤 것이나 어떤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어떤 명령을 따르는 것이라기보다는 자발적인 행동으로서의 사랑을 경험할 때마다 여러분은 제1단계에서 벗어나 제2단계로 진입하는 셈이다.

세 번째 사랑은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다. 이것은 친구의 친구대 사랑에 비해 훨씬 친밀하고 강력한 사랑이다. 이 세 번째 사랑의 이미지는 성탄 구유, 즉 우리 자신의 마음 속에 들어올 예수를 상징하는 그 아기가 태어난 장소이다. 이것은 성스러운 힘이 여러분 안에 들어있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자각되는 것에 대한 상징이다. 여러분은 그 영적인 아이를 여러분 속에 입양하는 것이다.

사랑의 네 번째 단계는 배우자 대 배우자의 관계로, 여기서는 자웅동체의 또는 다른 한쪽의 발견이라는 문제가 대두된다.

이제 우리는 사랑의 가장 높은 단계인 다섯 번째에 이르는데, 이것은 강박감에 사로잡힌, 억제하기 어려운 금지된 사랑으로 여기에는 오로지 사랑뿐이어서 여러분은 하나님과 관계된 자신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나오게 된다. ‘르 포(광인)’ 즉 사랑에 몰두한 까닭에 결국 미쳐버린 사람이 되는 것이다.

결혼의 경우 우리는 여전히 사회며 이웃과의 관계를 조화롭게 유지할 수 있지만 다섯번째의 사랑에 도달하면 사랑 이외의 것들은 모조리 사라지고, 상대방에 대한 일방적인 집착만 있을 뿐이다.

 

 

66 내 생각에는 두 사람이 함께 사는 삶의 실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결혼을 깨는 요인인 것 같다.

 

66 결혼은 연애가 아니라 시련이다. 그것은 종교적 훈련, 성탄식, 또 다른 삶에 참여하는 은총이다.

 

68 자녀가 떠남과 동시에 결딴나 버리는 결혼의 경우, 부모의 책임감은 자녀에 대한 것이지, 결코 서로에 대한 것이 아니다. 결국 자녀가 떠나고 나면 둘 사이의 유대도 사라지는 것이다.

 

66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책임이 사랑의 구성요소라는 것이 아니라, 다만 책임감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뜻이다.

 

69 내 생각에 결혼이란 상대방을 책임지고 사랑함으로써 상대방과 진정한 일체가 되는 것이다. 여러분 자신을 누군가에게 헌신하는 것, 즉 여러분 혼자의 운명을 두 사람의 운명으로 전환하는 것은 평생에 걸친 헌신이다.

결혼에 대한 캠벨의 징조 결혼=죽음

 

69 그것 말고도 우리 결혼에는 일종의 징조가 있었다. 당시 나는 한해 임대료가 20달러밖에 안되는 우드스톡의 매버릭 로드의 작은 집에서 살고 있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우리 신혼부부는 차를 타고 그 집으로 향했다. 매버릭 로드에 접어든 순간, 반대편에서 영구차 한 대가 나타나 우리 앞으로 지나갔다. 이제껏 그 동네에서는 영구차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에 나는 그것이 우리 부부가 죽을 때까지 함께 할 것이라는 징조라고 생각했다. 정말이다.

 

70 배우자와의 관계가 여러분의 삶에서 최우선의 고려사항이 아닌 한 내 생각에 여러분은 결혼했어도 결혼한 상태가 아니다. 반드시 그 관계가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

 

72 아내를 고르려면 그 여자의 어머니를 먼저 봐야 한다. 만약 그 어머니가 훌륭한 여자고, 여러분이 이상적으로 간주할 만한 종류의 사람이라면, 그 딸들 가운데 누구와 결혼하더라도 그녀는 여러분을 위한 삶을 구현할 것이다.

 

72 결혼은 여자가 주도하고 남자가 따라가는 것이다.

 

73 여자는 삶(생명)의 샤크티(sakti) 즉 에너지이다. 남자는 그 에너지에 올라타 달리는 방법을 배워야 하며, 삶을 향해 직접 지시해서는 안된다. 나는 이를 확신한다. 남자는 여자의 에너지를 전달하는 수단이다. 남자가 무너지지 않는 한, 여러분은 진짜 결혼을 한 것이 아니다. 물론 실생활에서나 성적인 면에서는 대등한 삶을 꾸릴지 몰라도, 결혼은 남성의 주도권이 무너지는 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73 진과 결혼할 당시, 나는 그것이 십자가형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신랑이 신부에게 가는 것은 십자가로 가는 것과 같다. 그리고 신부 역시 신랑에게 자기 자신을 똑같이 내놓는다. 결국 이것은 호혜적인 십자가형이나 마찬가지다.

 

73 결혼이란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상대방에게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그 관계됨에 희생시키는 것이다.

 

74 내 생각에 무조건적인 사랑은 성배가 아닐까 싶다.

 

75 공감의 위력을 깨달은 사람은 성배를 발견한 사람이다.

 

75 내 생각에 이것은 성배의 이미지가 의미하는 바와 뭔가 연관이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성배 왕의 치료에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다름 아닌 상대방의 고통에 관한 질문을 망설임 없이 던지는 자발적인 행동이기 때문이다.

 

79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만약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할 경우에, 그로 인해 잘못 교육받은 사람은 결국 신화적 의미에서 이른바 황무지라고 일컫는 상황에 처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그에게 말을 걸지 않고 그는 세상에 말을 걸지 않는다.

 

80 아들은 아버지가 했던 것과 비슷한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에, 아버지는 긍정적인 면으로나 부정적인 면으로나 아들의 모델이 된다.

 

81 딸에게 있어 아버지는 여러 가지 면에서 남성적 원리와 맺는 최초의 친밀한 관계인 셈이다. 아버지가 없으면, 어머니가 반드시 부모의 두 가지 역할을 모두 감당해야 하며, 내 생각에 그 아이는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에 대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어머니를 원망할 것 같다. “분명히 나의 인도자와 메신저가 되어줄 사람을 내게서 앗아가 버린 사람은 바로 어머니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82 돈은 응결된 에너지이므로 돈을 포기하는 것은 삶의 가능성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유럽유학 후 돈이 없음

82 내가 유럽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지 3주 만에 월스트리트의 주가가 대폭락했다. 당시 내가 지닌 유일한 재산은 대학의 어느 재즈 밴드에서 연주를 해서 모은 것뿐이었다. 다해서 수천 달러 가량 되었는데, 그 당시에는 제법 큰 돈이었다. 나는 그 돈이 완전히 바닥날 때까지 버텼다. 다시 말해 이후 5년 동안 나는 땡전 한 푼 벌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 내가 깨달은 사실은 만약 부양할 가족이 없었다면 돈인 전혀 없어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82 나는 이제까지 돈에 관해 완전히 무심한 삶을 살아왔다. 대신 나는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함으로써 제법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그렇게 하면 결국은 돈이 따라오게 된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삶에 선사하는 것과 삶이 여러분에게 보답하는 것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도 같기 때문이다.

83 나는 매우 흥미로우면서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이른바 훌륭한 부자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삶의 에너지로서 경험되는 돈은 실제로 명상이나 다름없으며, 그것을 축적하는 대신 흘려보내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삶에 참여하는 한 가지 방법이기도 하다. 돈에 몰두한 삶으로부터 뭔가 아름다운 것이 자라날 수 있다는 사실이 내겐 매우 놀라웠다. 오늘날 살아가는데 있어서 돈은 행동을 촉진시키는 에너지의 원천이다.

 

85여러분에게는 에너지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에너지를 흘려 보낼 경로의 모델을 제공하는 사고력도 필요하다. 그래야만 여러분의 삶은 진정으로 꽃필 수 있다.

 

우드스톡에서 방랑 등 캠벨의 인생에 대한 자술

 

86 나는 일찍이 유럽에 가서 공부할 수 있는 장학금을 받고 파리 대학교로 유학을 갔다. 나는 중세 프랑스어와 프로방스어, 그리고 음유시인들의 시를 공부했다. 유럽에 가서야 나는 현대 예술을 발견했다. 제임스 조이스, 피카소, 몬드리안 등을 말이다. 1927년부터 1928년까지의 파리는 매우 특별한 곳이었다. 그 다음에는 독일로 가서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면서 힌두교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융을 발견하게 된 것도 독일에서다.

나는 대학으로 가서 이렇게 말했다. “저기요. 나는 저 유리병 속으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학위 취득을 위한 필수과목을 모두 수강한 상태였고, 이제 그 망할 놈의 논문만 쓰면 땡이었다. 하지만 대학 측에서는 내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서 공부를 계속하도록 허락해 주지 않았다. 결국 이까짓 것 개난 줘 버리자고 생각했다. 대신 나는 숲 속으로 들어가 5년 동안 독서로 시간을 보냈다. 그리하여 나는 박사학위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덕분에 나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자유로웠고 아무런 책임질 일도 없었다. 그야말로 경이로웠다.

 

88 1929년부터 1934년까지의 5년간이었다. 나는 뉴욕 주 우드스톡의 작은 오두막에 살면서 그저 책만 파고 들었다. 그저 읽고, 또 읽고, 읽으면서 노트 필기를 했다. 그 당시는 대공황의 와중이었다. 돈이라곤 한 푼도 없었지만 당시 뉴욕에는 스테처트 헤프너라는 큰 서점이 있어서 나는 거기다가 책을 주문했다. 하지만 특히 프로베니우스의 책들은 매우 비쌌다. 그 즉시 책값을 지불하지는 않았다. 대공황 때는 다들 그랬다. 서점에서는 내가 일자리를 구할 때까지는 기다려 주었고, 나는 일자리를 구하고 나서 책값을 냈다. 그야말로 훌륭한 태도였다. 나로선 지금도 감사해 마지 않는 일이다.

나는 조이스와 토마스 만과 슈펭글러를 읽었다. 슈펭글러는 니체를 언급했다. 나는 니체도 읽었다. 그러다가 니체를 읽으려면 소펜하우어를 먼저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쇼펜하우어도 읽었다. 그러다가 쇼펜하우어를 읽으려면 칸트를 먼저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시긍로 해서 칸트도 읽었. 일단 거기까지만 가도 되긴 했지만, 칸트를 출발점으로 삼자니 상당히 힘들었다. 그래서 거기서 다시 괴테로 거슬러 올라갔다.

5년동안 나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비록 잠시 동안이라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계속 살아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점은 확신하고 있었다. 한 번은 작은 서랍장의 맨 위 서랍 안에 1달러짜리 지폐 한 장을 넣어두고는, 그 돈이 거기 남아 있는 한 아직 빈털터리까지는 아니라고 자위한 적도 있었다. 정말이지 놀라웠다. 나는 아무런 책임도 지고 있지 않았다. 전혀. 정말 재미있었다. 일기를 쓰고,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내려 애써 보았다. 나는 여전히 그 당시의 물건들을 가지고 있. 이제 와서 그 물건들을 다시 들여다 보면 전혀 믿을 수 없을 정도다.

 

89 나는 완벽한 삶을 산 것 같다. 내가 필요로 하는 것들은 내가 필요로 하는 바로 그 순간에 맞춰 나타나 주었다. 내가 그 당시에 가장 필요로 했던 것은 5년 동안 직업도 없이 지낼 수 있는 삶이었다. 그게 가장 절실했다.

 

91 우드스툭에서 지내던 와중에 나는 일자리를 알아보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소형차인 포드모델 A를 타고 대공황 중에 미국 대륙을 횡단했다....일단 서부 연안에 도착하고 보인 나는 실업자 신세였고, 게다가 캘리포니아까지 왔으니 더 이상은 서쪽으로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다. 나는 1925년에 하와이에 다녀오는 배 안에서 새너제이에 사는 여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이후 우리는 작은 엽서를 통해 장거리 서신 교환을 했다. ‘아이델한테 잠깐 들러서 인사나 하고 가지 뭐’...그녀의 형부란 존 스타인백이었고 우리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뭔가를 의도적, 계획적으로 노력하기 보담 우연에 맡겨진 면이 많구나.

 

97 모든 것은 자연스레 눈에 띄게 되는데, 왜냐하면 모든 것이 가능성이며, 모든 것이 단서이며,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경이로운 일이다. 만차 여러분의 코가 여러분을 올바른 곳으로 인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여러분이 그와 같은 여행을 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놀라운 순간들을 향해 나아가는 셈이다. 가령 내가 카멜 도서관에서 우연히 손을 뻗어 한 권의 책, 그러니까 내 인생을 뒤바꾼 책을 발견한 것처럼. 정말로 그랬다.

 

98 나는 여덟 달 동안 방랑 생활을 했다. 캘리포니아에서 1년을 보낸 뒤 나는 뉴욕으로 돌아왔다.

 

99 여러분도 방랑을 하게 되면, 당장 그날 하루무엇을 할 것인지는 생각하되, ‘내일은 뭘 해야지하고 미리 생각해 둔 것에 매달리지는 말아야 한다. 여러분이 아무런 책임질 일을 갖고 있지 않을 경우, 여러분은 다음 두 가지를 결코 걱정해서는 안된다. 하나는 굶는 것이며, 또 하나는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다. 방랑하는 시간은 긍정적인 시간이다. 새로운 것도 생각하지 말고, 성취도 생각하지 말고, 하여간 그와 비슷한 것은 절대 생각하지 마라. 그냥 이런 생각만 하라. “내가 어디에 가야 기분이 좋을까? 내가 뭘해야 행복할까?”

진짜다. 이런 너무 간단한 일이다. 여러분을 옥죄는 생각을 머릿 속에서 싹 지워버리면, 여러분은 마치 룰렛 바퀴 위의 공처럼 자신이 어디에 안착할 것인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룰렛 속은 결코 , 여기 내려 앉는 것보다는 차라리 저기 내려 앉아야 사람들이 나를 더 좋아할 거야.’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것을 받아들이고, 여러분의 마음에 드는 곳에 머물라. 중요한 것은 여러분 스스로가 나의자리라고 생각하는 곳에 머무르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야 그저 그들만의생각일 뿐이니까.

 

100 우리 부모님은 한 번도 나를 몰아세운 적이 없다. 그런 면에서 나는 정말 운이 좋았다. 새러 로렌스에서 교직 제안이 들어왔을 때에도 나는 일자리가 필요없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일자리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봤자 내 독서에 방해만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그 학교에 예쁜 여학생들이 와글거리는 것을 보고 나니 문득 , 이것도 나쁘진 않겠다라는 생각이 드렁. 마침내 일자리를 얻을 무렵 나는 딱 서른살잉는데 그 때 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 난 사실 네가 가방끈만 긴 날건달이 될 줄 알았지 뭐냐하지만 내가 일자리를 얻기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결코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내신 적이 없었다. 우리 아버지야 말로 정말 훌륭한 분이었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 나왔을 때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예언하건대, 이 책은 정말 대단한 책이 될 것이다.” 아버지는 물로 그 책을 결코 펼쳐 보지도 않으셨지만, 당신 아들이 뭔가 큰일을 해냈음을 아셨던 것이다.

 

105 삶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지금 하는 일에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느냐는 것이다. 만약 그런 느낌이 없을 겨우, 여러분은 그저 삶에 관한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 따라 살아가는 셈이다.

 

105 여러분이 의례적으로 마땅히 어떻게 해야만 한다고 여기는 바와 정반대되는 행동이 바로 공감이다. 성배를 발견하는 사람은 그 장소에 온 사람인 동시에 공감의 삶을 사는 사람을 상징한다. 공감의 역동성을 자신의 동기로 삼는 사람만이 성배를 발견한 것이다. 이는 나와 너의 동일성에 관한 자연스러운 인식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성배의 중심이다.

 

109 천국이란 여러분 속에 있는 영원한 생명의 상징이다. 그것은 영원히 여러분 자신의 근본적인 측면이다. 그것이 바로 환희이다. 그다음 현세의 삶은 하나님에 대한..지식과 사랑과 봉사를 즉, 여러분과 만물 내에 존재하는 삶의 에너지를 생성할 것을 요구한다. 내 경험은 무엇이냐 하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며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 나는 내가 성배의 성에 있음을 느낀다.

 

110 심지어 오늘날에도 가령 설교대며 오늘날의 다른 매스미디어가 제공하고 외쳐대는 삶의 가치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 무기력한 종류에 속한 사람들만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조용한 자기에서 상당히 깊은 영적 탐구와 발견이 현재까지도 이 세상에서 신성화된 사회적 중심부의 바깥에서 그들의 시야와 통제를 벗어난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작은 집단으로, 여기저기서, 그리고 보다 자주, 보다 전형적으로 자기 주위를 둘러본 사람이면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하나둘씩 그들 스스로가 선택한 숲 속, 그러한 지점으로, 즉 그들이 보기에 가장 어두운 곳으로, 그리고 아무런 길이나 오솔길이 없는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112 여러분 속의 모든 것은 지금 본인에게 요구되는 모험이 끝내 거부되었음을 안다. 그로 이해 분노가 형성된다. 여러분이 긍정적인 방식으로 경험하기를 거부하면 결국 그것은 부정적인 방식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지금 여러분이 따르는 모험이 본인의 진정한 모험이라면 또한 그것이 여러분의 깊은 영적 필요 또는 준비에 적합한 것이라면, 여러분을 돕기 위해 마법의 인도자가 나타날 것이다.

 

113 여러분이 그럴 준비가 되어 있다면 이전까지는 문이라곤 없었던 곳에서, 그리고 다른 누구도 겪어보지 못했던 곳에서 여러분을 위한 문이 열릴 것이다.

 

113 여러분이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여러분은 어두운 숲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바다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며, 밤바다로 출항을 개시하는 셈이다.

 

116 그 선물을 도로 가져와서 그것을 합리적인 삶 속으로 통합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는 오히려 지하로 내려가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여러분이 반드시 가지고 돌아와야 할는 것은 바로 이 세계에 결여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그것을 가지러 간 것이다. 또한 그것이 결여됨으로써 이 세계는 그것을 가져야 할 필요조차 알지 못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귀환하게 됨으로써 이 세계에 은혜를 베풀게 되는데 아무도 반기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건가? 세 가지 반응이 있다.

첫째, 나는 다시 숲으로 돌아가겠어. 은둔해 버린다. 귀환의 거부

둘째, ‘그들은 무엇을 원할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영리적인 방법으로 제공. 명성은 최고조에 다랗고, 이전까지 여러분이 갖고 있던 것은 사라져 버린다. 여러분은 공무를 담당하게 되고, 보석을 포기하게 된다.

셋째, 여러분이 되돌아온 그 영역 중에서, 여러분이 주려는 것을 최소한으로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국면을 일부나마 찾아내려 노력하는 것이다. 이 세계가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에 맞추거나 전달할 수단을 발견하려 노력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당한 공감과 인내가 필요하다. 벽에 금간곳을 찾아낸 다음 오로지 준비된 사람들에게만 여러번의 보석을 주는 것이다.

이런 시도가 모두 실패한다면 여러분은 남을 가르치는 직업을 얻어서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소개할 수 있다. 예술가가 학생을 가르치기도 하는 예가 이른 경우다. 각자의 창작을 하는 한편, 주업 말고 뭔가 부업을 하나쯤 지닌 셈이다.

 

120 융은 일생의 곡선이 딱 반으로 나누어진다고 말했다. 그 중 절반은 관계의 시간이며, 나머지 후반은 자기 안의 삶의 감각을 발견하는 시간이다. 여러분 자신의 내부를 향한 삶으로 가는 시기이다.

 

122 전형적으로 중년은 달성의 기간이 아니라 깨달음의 기간이며, 또한 성취의 기간이 되어야 마땅하다.

 

124 나 역시 책을 세 권 쓰려는 계획을 품고 숲으로 정확히 말하며 하와이로 떠났으니 이것 역시 출가다. 나는 강연을 중단했고, 책과 노트만 들고 그곳에 머무르며, 그저 연구에만 집중했. 출가는 말 그대로 죽음과 부활을 의미한다. ..그러고 보면 내가 있는 곳은 은둔을 위한 숲 치고는 상당히 괜찮은 곳인 셈이다.

 

128 여러분은 자신의 삶을 위한 의례를 갖추어야 한다. 의례의 기능이란 오로지 여러분의 마음을 지금 여러분이 하는 일의 의미에 집중케 하는 것 뿐이다. 예를 들어 결혼 의례는 여러분이 계속 한 개인으로 남는 대신, 이제 한 쌍의 반쪽이 되기를 배우는 과정에서 내딛는 걸음에 관한 묵상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132 대부분의 사춘기와 입문제의에서 핵심적인 의례는 바로 여러분의 이름이 바뀌게 되는 죽음과 부활의 의례다. 여러분은 과거의 이름을 지닌 채 죽었다가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고 부활하는 것이다.

 

134 반면 남자는 문제를 찾아서 밖으로 나가야 한다. 남자는 이와 비견할만한 경험을 가지지 못하다. 대부분의 남성 입문제의가 그토록 폭력적인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남자는 자신이 더 이상은 어린 소년이 아님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또 청년이 자기 어머니로부터 벗어나야만 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반면 자녀에게 매달리는 어머니는 청년의 삶에 있어 끔찍한 무게가 아닐 수 없다. 원시 문화의 경우 어머니와 아들은 확고히 결별하곤 했다.

 

141 사람들은 자신을 덧없는 육체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자기 육체를 단순한 의식의 수레로 여기고 의식을 우리 모두를 통해 현현하는 존재로 여길 수도 있다.

 

142 아즈텍에서는 임종을 맞이한 사람에게 이렇게 기도한다. “자녀여 그대는 이승의 삶이라는 수고로운 시련을 다 치러내고 승리한 자이니라. 이제 우리 주님이 그대를 데려갔으니, 그 얼마나 기쁜 일이랴? 우리 역시 영원히 이승에 있는 것은 아니요. 잠시 다녀가는 것뿐이라...”

 

144 오직 탄생-낡은 것의 탄생이 아닌, 새로운 것의 탄생-만이 죽음을 진정으로 정복할 수 있다. 죽음의 끈질긴 재현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내부에, 사회의 내부에 끊임없는 탄생의 재현(팔링게네시아 palingenesia)가 있어야 하며, 우리가 이 땅에 오래 잔존하려면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149 내가 보기에 죽음 이후의 삶에 관한 생각은 나쁜 생각이다. 왜냐하면 그 생각 때문에 여러분은 지금 여기, 즉 여러분이 살아 있는 이 유일무이한 순간을 음미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순간들은 그야말로 유일하며 결코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이 사실 때문에 삶은 특유의 통렬함을 지니는 것이며, 여러분은 지금 경험하는 것에 대해 주의를 집중해야만 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차라리 지금, 바로 여기서 행복한 편이 더 낫다. 여러분으로선 영원한 지금, 바로 여기를 경험하는 것이 더 낫다.

 

 

의식의 두 번째 단계 : 깨달음을 향한 길

 

침머의 우화. 구본형 책에서 이 우화를 읽었다. <깊은 인생> 215였다. ‘캠벨의 책을 읽고 있었다로 시작되는 문장이다. 평범한 사람 안에 있는 비범함을 발현시키는 책의 에필로그에서다. ‘나는 자신의 이야기, 즉 나의 신화를 하나 갖기 위해 이 책을 썼다.’

 

167 침머는 인도에서 기원한 재미있는 동물 우화를 즐겨 인용했다. 새끼를 배고 오래 굶주린 암호랑이 한 마리가 염소 떼에게 덤벼들었는데 어찌나 용을 쓰며 달려들었는 지 그만 새끼를 낳아 버리고 어미는 죽어 버렸다.

염소들은 뿔뿔이 흔텅졌다가 나중에 그 목초지로 돌아왔는데 가만 보니 갓 태어난 호랑이와 죽은 어미 호랑이가 있었다. 어버이로서의 본능이 강했던 염소들은 그 불쌍한 새끼 호랑이을 대신 키웠고 그리고하여 그 호랑이는 자기가 마치 염소라고 생각하며 자랐다. 호랑이는 음매 하고 우는 법을 배웠다. 풀을 뜯어 먹는 법도 배웠다. 하지만 풀이 호랑이에게 좋을 리 없으므로 그 녀석은 호랑이 중에서도 가장 비리비리하게 생긴 녀석이 되고 말았다.

새끼 호랑이가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 어디서 큰 수컷 호랑이가 나타나 덤벼드는 바람에 염소 떼가 사방팔방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호랑이이긴 해도 아직 어렸던 이 녀석은 도망도 못가고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자 큰 호랑이가 새끼 호랑이를 보고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뭐야, 너 지금 이 염소들하고 같이 사는 거야?” “음매애애애새끼 호랑이가 대답했다. 그러자 큰 호랑이는 벌컥 화를 냈다. 마치 어느 날 갑자기 히피처럼 머리를 길게 기르고 나타난 아들놈의 모습을 본 아버지가 울화통을 터뜨리듯 말이다. 큰 호랑이는 새끼 호랑이를 몇 번 철썩철썩 때려 주었지만, 새끼 호랑이는 여전히 멍청하게 음매 소리를 내면서 풀만 씹을 뿐이었다. 그러자 큰 호랑이는 새끼 호랑이를 끌고 잔잔한 연못으로 갔다.

잔잔한 연못이란 흔히 인도에서 요가라는 관념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사용된다. 요가의 첫 번째 잠언은 다음과 같다. “요가는 마음의 자발적인 활동을 의식적으로 중지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지속적은 유동체로서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연못의 수면과도 유사하다. .. 새끼 호랑이는 연못을 바라봄으로써 난생 처음으로 자기 얼굴을 바라보게 되었다. 큰 호랑이는 자기 얼굴을 그 옆에 갖다 대고는 말했다. “이것 봐. 네 얼굴도 내 얼굴이랑 비슷하지. 넌 염소가 아니야. 나하고 똑같은 호랑이라구. 그러니 나하고 똑같이 되어야지.”

이것이 구루가 하는 일이다. 내 모습을 마음에 새기고, 나하고 똑같이 되거라. 이는 혼자 하는 수행가는 정반대의 방법인 것이다.

그리하여 새끼 호랑이는 그 메시지를 이했다. 큰 호랑이는 새끼 호랑이를 데리고 자기 굴로 갔다. 그 안에는 최근에 잡은 영양 고기가 남아 있었다. 그 피투성이 고기를 한 입 베어 물면서 큰 호랑이가 말했다. “저는 채식주의자인데요.” “헛소리 하지 말고!” 큰 호랑이가 이렇게 말하며 고기토막을 하나 집어서 새끼 호랑이의 목구멍 속에 쿡 찔러 넣었다 새끼 호랑이는 숨이 막혀 켁켁거렸다. 문헌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진정한 가르침 앞에서 모든 사람이 그러하게 마련이듯이

진정한 가르침과 마주하고 캑캑거리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끼 호랑이는 그것을 자기 핏 속에, 자기 몸 속에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것이 그에게 올바른 먹이였기 때문이다. 새끼 호랑이는 무의식적으로 진짜 호랑이다운 기지개를 켰다. 난생처음으로. 새끼 호랑이의 표효가 터져나왔다. 호랑이 기본 포효 1번이었다. 큰 호랑이가 말했다. “그거야. 이젠 너도 제대로 된거야. 이제 숲으로 들어가서 호랑이다운 먹이를 찾아 먹자.”

 

171 삶은 슬픔으로 가득하다. 그런 삶과 함께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여기서 아름다운 공식이 나온다. “이 세상의 슬픔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한다.”

 

173 융은 1909년에 이르러서야 신화와 꿈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175 꿈은 의식하는 마음을 향해 무의식이 하는 이야기의 어휘다.

 

190 자기 구루가 이른바 절대 진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니체의 말마따나 개념의 간질병을 앓고 있는 셈이다. 즉 어떤 관념을 지니게 됨으로써 결국 미쳐 버린 사람이다. 여러분이 절대 진리를 지녔다고 생각하는 것은 광기의 일종이다.

 

192 여러분은 차라리 불완전하기로 결심하고, 그것을 감수하면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의 슬픔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한다는 것이다.

 

201 분명한 사실은 만약 이것들로부터 어떤 가치를 뽑아내야만 한다면 나 역시나 이런 이야기의 원초적이고 본래적인 생각은 이와 유사한 어떤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그 육체들이 간 곳은 외부 우주가 아니라 내부 우주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런 은유적인 여정에 의해 암시되는 바는 영혼에 있어서의 마음의 귀환이다.

 

201 심리학의 한계는 신학의 한계와 똑같다. 그것들은 초월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징화와 관계가 있으며 이 두 가지의 한계도 똑같다.

 

204 일주문. 두 개의 무서운 형체가 수문장 격으로 서있다. 이것들이 이른바 케루빔이다. 그 중 하나는 입을 열고 있고 하나는 다물고 있다. 즉 대립자의 쌍인 것이다. 하나는 죽음의 두려움을 표상하고, 다른 하나는 삶에 대한 욕망을 상징한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유혹은 붓다를 결코 흔들지 못한다.

 

205 모든 것에 대한 불교도의 해석은 심리적인 변화다. 기독교의 해석은 채무와 변제다.

 

206 내가 보기에 기독교와 불교는 똑같은 것은 두 가지 어휘로 이야기하는 것에 불과하다.

 

208 생존을 위하여 개인의 사냥 기술에 의존하던 부족민들은 개인을 육성하였다. 심지어 불멸이라는 개념도 개인적인 것이지 집단적인 것은 아니었다. 나아가서 영적 지도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주로 샤만들이었는데 이들은 임명을 받고 기름부음을 받아서 조직의 일원이 된 사제들, 즉 사회적으로 임명된 사제가 아니라, 개인적인 영적 경험을 통하여 영적이 힘을 부여받은 개인들이었다.

 

211 전사의 방식이란 삶에 대해 예라고 하는 것, 그 모든 것에 대해 라고 하는 것이다.

 

212 여러분이 자신의 삶의 어떤 사소한 세부사항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모든 것을 해체해 버리는 셈이 된다. 여러분은 반드시 모든 것에 대해서, 심지어 그 소멸에 대해서도 라고 말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의 슬픔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내 작은 주제가이다.

 

215 지옥이란 여러분의 삶의 경험의 구체화이며 여러분이 집착하는 곳, 바로 황무지이다. 지옥에 있으면 여러분은 어찌나 스스로에게 매여 있는 지 은혜가 들어올 수 없다.

 

216 기쁨이 있는 곳을 찾으라. 그러면 기쁨이 고통을 태워 버릴 것이다.

 

219 영웅의 여정의 목표는 여러분 자신이 되는 것이다. 즉 여러분 자신을 찾는 것이다.

 

222 사람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노력해야 할 일은 바로 의식을 확장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지식과 사랑이 보다 더 크고 더 큰 지평을 얻게 하는 일이다.

 

229 그만 다녀야 할 이유를 깨닫기 전까지는 가톨릭교회 출석을 그만두지 않기로 다시 말해서 내가 그 상징을 풀어헤치고 그 상징들이 무엇을 지칭, 의미하는지를 알기 전까지는 그만두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 모두를 정리하는 데 아홉 해가 걸렸다. 그러고 나자 그것은 마치 낡아 빠진 셔츠처럼 자연스레 떨어져 나갔다. 그 상징이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면 그것은 단지 명령으로서 거기 있을 뿐이고, 그런 일들은 계속해서 더 많이 지속될 것이다.

 

231 신을 선택하는 것은 다시 말해서 여러분이 이 세계를 보는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다.

 

232 부족들에게 신들은 힘을 의인화한 것이었다. 나중에 가서는 그것들이 힘의 원천이 되었다.

 

235 그는 자신의 고난을 자신이 이른바 신들을 향한 보답으로서의 예배에서 자신이 행한 일 때문인 것으로 해석하려 한다. 이처럼 만약 여러분이 예배를 이른바 뭔가를 향한 보답이라는 견지에서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완전히 잘못된 길에 들어선 셈이다. 욥기는 사실 그런 관념을 박살내고 있.

욥기에 대한 설명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240 융은 이른바 미확인 비행물체에 관한 현대인의 신화가 원시 인류의 환상적 기대를 이야기해 주고 있다고 썼다. 사람들은 외부세계로부터 방문자가 와 주기를 고대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의 구원이 그로부터 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주 시대의 개막은 우리에게 외계로의 여행이 우리를 다시 내부 우주로 전환시킨다는 사실을 되새겨 주었다.

 

241 부활절, 또는 부활에 있어서 항상 기본이 되는 것은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힘이다. 여러분이 부활을 원한다면 여러분은 반드시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

 

241 만약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힘을 오로지 역사적 용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우리를 향한 그 상징의 직접적 언급을 잃어버린다.

 

246 오해는 다름이 아니라 영적이고 신화적인 상징을 마치 그것들이 역사적 사건을 가리키다고 독해함으로써 생긴다.

 

250 아버지의 나라는 지상에 펼쳐져 있으나 사람들이 그것을 보지 못하느니라. 이것이 바로 영지주의다. 영지주의는 서구에서 불교에 상응하는 것이다.

일체유심조를 말하는 듯.

 

253 붓다와 예수 두 사람에게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다른 모든 스승들을 뛰어남은 한 스승의 신화는 표준적인 주제다.

 

256 나는 스물다섯 살이 될 때까지 기독교를 구체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솔직히 나는 그토록 풍부한 상징에 일찍이 노출되었다는 것에 대해 오히려 감사해아만 할 것이다.

 

258 여러분이 진정으로 성스러운 공간이라든지, 피난처를 지나려 한다면, 그곳은 우선 황무지가 아니어야 하며, 암브로시아-외부로부터 여러분 안에 불어넣는 기쁨이 아니라 여러분의 내부로부터 나오는 기쁨-의 샘이 있는 어떤 활동 공간, 즉 여러분이 자신의 의지와 자신의 의도와 자신의 소망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 됨으로써 비록 작더라도 하늘나라가 거기 있어야 한다. 내 생각에 모든 사람은 본인이야 알건 모르건 간에 그런 공간을 필요로 한다.

 

259 우리 모두에게는 성스러운 공간과 성스러운 시간과 즐거운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런 이후에는 거의 모든 것이 지속적이고 늘어나는 기쁨이 된다.

 

259 내 경우에는 읽을 때는 재미있지만 어떤 결론도 내려주지 않는 책이 장난감 노릇을 한다.

 

259 융이 자신의 삶에 깃든 신화를 밝혀내리라고 결심했을 때 그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었다. “내가 어린 시절에 즐겨하던 놀이는 무엇이었나?” 바로 돌멩이를 가지고 마을과 거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261 내 경우에는 열한 살 때부터 열다섯 살까지 아메리카 인디언에 관해 열광한 적이 있었다. 우리 부모님은 미국 인종국의 보고서인 파크먼 전집을 비롯해서 그 주제에 관한 갖가지 책들을 사주셨다. 나는 제법 훌륭한 소규모 장서를 갖고 있었으며, 책 버팀대로 사용하는 멋진 인디언 두상들이며, 나바호 족 깔개 등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집에 불이 나고 말아싿. 우리 가족에게는 크나큰 재난이었다. 그 사로로 인해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내 물건들도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 와서 깨달은 사실이지만 내가 훗날 나 자신을 위해 만든 성스러운 공간, 즉 내가 글을 쓸 때 사용하는 방은 사실상 내 어린 시절의 공간의 재건, 또는 재가동이라 해도 무방하리라.

 

262 성스러운 공간은 속세로부터 완전히 밀폐봉인 되어 있다.

 

263 나는 여러분이 성배 성을 방문할 수 있기 위해 스스로에게 설정해 놓은 것과 같은 종류의 조건을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성스러운 공간이란 곧 성배 성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264 성스러운 공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상징적 환경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즉 영적 삶이 가능하고 여러분 주위의 만사가 영의 고양을 야기하는 곳 말이다.

 

265 성스러운 공간에서는 무슨 일을 하건 간에 그 주위는 은유가 된다.

 

266 “여기는 일종의 약진이 가능하겠군요. 이곳은 내가 있고 싶은 공간으로 나를 데려가 줄 수 있는 훈련을 할 수 있는 장소야.”

 

275 여러분은 불교가 엘리트 종교일 뿐만 아니라 대중종교임을 기억해야 한다. 대중종교라면 마땅히 명상을 위한 기반을 제공해야만 한다. 따라서 불교에는 사리 숭배의 오랜 역사가 있다. 초기 불교계의 기념비들인 거대한 사리탑들은 모두 사리를 담은 무덤이다. 각각의 사리탑 안에는 하나의 사리가 들어 있는데, 이는 가톨릭교회가 제각기 성골위에 지어졌다고 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모두가 명상을 위한 기반이 되는 것이다.

 

279 이 세상에 살면서 깨달음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입멸의 축복을 거부한 자, 그리하여 완전한 지식의 소유자로서 이 세상에 남아 만물의 횃불, 안내자, 자비로운 구세주 노릇을 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279 보디사트바는 이 세상의 슬픔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는 자이다.

 

285 문수보살은 이른바 판별의 검을 들고 나타나는 것으로 묘사된다. 여기서 말하는 판별이란 영원간의 판별과 연관이 있다.

 

285 그 장검은 보통 자비의 도구로서 길을 내는데 쓰인다.

 

285 여러분이 뭔가를 욕망하고 뭔가를 두려워할 때 그것이 바로 유한이다. 붓다가 겪은 세 가지 시험-욕망, 두려움, 의무-는 시간의 장에서 여러분을 붙잡고 있는 것들이다.

 

285 여러분이 스스로의 안에서 타오르는 불길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여러분의 행동은 운동이나, 피아노로 어떤 곡을 연주하거나 또 어떤 실천에서나 용이해지게 된다. 여러분이 각각의 분야에 종사하는 동안, 스스로의 안에 있는 그 정적인 장소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여러분의 실천은 명인의 경지에 이를 것이다. 사무라이가 바로 이런 식이다. 진짜 운동선수도 마찬가지다.

 

286 여러분이 하는 일에는 무엇에나 정점이 있다. 여러분이 그런 정점에 있을 때 여러분은 최대한도로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287 칼리라는 단어는 검다는 뜻과 시간이라는 뜻 모두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시간이란 만물이 산출되고 또 돌아가는 수수께끼의 검은 심연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칼리다. 이 여신의 이미지는 불탄 땅 다시 말해 시체들이 불탄 장소 위에서 춤을 추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것은 소멸이다. 그녀는 자기 남편이기도 한 시바 남신의 시체 위에서 춤을 춘다. 여러분의 신은 그것을 넘어서기 위한 최후의 장애물이다.

 

295 여러분이 자기 안의 그리스도의 충위에 있는 스스로에게 도달할 수 없다면 여러분은 기독교인이 아닌 셈이다. 그리고 여러분이 어느 정도 층위의 자각에 도달했는지에 따라 여러분의 예배는 다른 사람들의 예배와 다를 것이니, 이는 모두가 한 교회에 있다고 해도 똑같은 층위에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진의 늑장

297 당시 내가 지닌 문제 가운데 하나는 아내인 진이 뭘 하든 항상 늑장을 부린다는 것이었다. 가령 아내와 어디서 만나기로 약속을 할 경우, 내가 먼저 도착해서 30분 가량 기다리는 것은 다반사였다. 물론 남자가 여자를 기다리는 것은 어찌 보면 정상일 수 있다. 여자들의 경우는 일단 집밖으로 나오기 위해서는 이것저것 해야 할 일들이 많기 때문에 30분의 시간도 어찌 보면 부족할 수 있다.

게다가 요즘 뉴욕에서라면 어딜 가든지 약속에 30분 늦는 것은 보통이다. 하지만 진의 문재는 항상 자기가 약속장소에 도착해야 할 시간을 오히려 출발 시간으로 여긴다는 데 있었다. 그래서 나는 고민 끝에 집사람을 그렇게 오래 기다려야 하는 문제를 앨런에게 털어놓았다. “이 노릇을 어떻게 해야 할까? 기다리다 보면 화가 치밀고 그러다가 결국 집사람이 나타나면 거기다 대고 짜증을 부리게 되거든.”

그러자 앨런이 말했다. “내가 보기에 자네의 문제는 집사람이 거기 도착하기를 바란다는 것, 그리하여 자네가 속해 있지 않은 어떤 상황을 열망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 명심하게. 줄곧 현실과는 다른 일을 생각함으로써 자네는 거기서 진을 기다리는 동안 할 수 있었던 다른 경험들을 망치고 있는 셈임을 말이야.”

그때 이후로 진을 기다리는 것은 일종의 영적 훈련이 되었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다짐했다. “진이 벌써 도착했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야 해. 주위를 둘러보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 살펴 봐야지.” 그러고 나면 내가 있는 장소는 어찌나 흥미진진한지. 나로선 집사람을 기다리는 동안 지루할 새가 없을 지경이다. 가끔은 진이 나를 기다리게 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 정도니 말이다. 나로선 이런 일이 가능하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앨런은 내겐 현실이 지금과는 달랐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을 차단해보도록 조언을 준 것이었다. 이것은 두려움과 욕망이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 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으리라.

 

300 모든 종교 훈련의 목표는 심리학적 변화다. 여러분은 각자의 자녀를 돌보고, 취객을 진찰하고, 책을 쓰는 등의 일을 하는 와중에도 신들을 알고, 사랑하고, 거기 봉사하는 것에 근거하여 각자의 명상과 의식을 거행할 수 있다. 만물이 곧 브라흐만이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는 한, 여러분이 하는 일이 무엇이든지 명상이 될 수 있다. 그 일의 과정이며, 행동이며, 여러분이 지금 바라보는 대상, 그리고 지금 여러분을 바라보는 대상, 그 모두가 브라흐만이라는 것이다.

 

300 귀환은 어디에서나 광휘를 목격하는 일이다.

 

304 삶이란 항상 슬픔이 가득하게 마련이다. 우리는 삶을 바꿀 수는 없지만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바꿀 수는 있다.

 

305 여러분의 힘을 두려워하는 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더 낮은 체계에 헌신하도록 한다.

 

312 힌두교에서는 모든 힘, 샤크티가 여성형이다. 따라서 여성은 그 힘의 전체성을 표상하며 남성은 그 여성의 대행자로 묘사된다. 그런 의미에서의 여성이 남성으로부터 느끼는 힘, 융 식으로 말하자면 아니무스-은 사실상 여성의 힘이 특화된 상태, 다시 말해 그 힘이 응용된 상태인 것이다.

 

314 힌두교에서는 태양이 여성이고 달이 남성이다. 달은 태양 속에서 태어나며 태야 속에서 죽으며 매달 태양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거대한 힘인 시바는 달의 신이다. 그의 배우자인 파르파티는 태양의 힘이다. 비록 인도에서는 남성지향적 행동 체계에 대한 예배가 직접 시바에게 향한 것이지만, 이는 사실상 칼리 여신을 향한 것이다. 왜냐하면 예배가 결국 그곳으로 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제로 인도에서는 칼리가 가장 위대한 신이다.

 

314 힌두교의 여신 칼리는 자기 배우자인 남신 시바의 엎드린 몸 위에 서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여신은 죽음의 칼을 휘두르고 있는데, 이 칼은 곧 영적 훈련을 의미한다.

 

316 북부에서 그러니까 유럽의 체계에서 그리고 이른바 양과 음이 있는 중국의 체계에서 남성은 공격자, 즉 활동적인 원칙이고, 여성은 수용적, 수동적인 측면이라는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현상이다. 하지만 인도에서는 이와 반대다. 힌두교의 입장에서는 여성이 샤크티, 즉 척추를 따라 올라오는 뱀의 힘이며, 삶의 에너지의 본질이다. 여성은 활성자이며, 남성은 단지 혼자 있고 싶어할 뿐이다.

 

316 청동 시대라고 부르는 신화 체계에서 여성은 위대한 신이며 모든 힘의 원천이다. 예를 들어서 파라오가 왕좌에 앉은 모습을 그린 이집트의 그림에서 그 왕좌는 그에게 권위를 부여한 것이다. 그 왕좌는 곧 여신 이시스다. 이와 똑같은 신화의 이미지는 성모와 그리스도의 도상에서도 나타난다. 즉 아기 그리스도는 성모의 무릎에 앉는데 그 모습은 파라오가 자기 보좌에 앉은 모습과 똑같다. 즉 여성이 남성의 힘인 것이다. 이 각각의 남성은 세계의 지배자로 일컬어지지만 그 뒤에 항상 있는 것은 바로 여성이다. 마찬가지로 미국 대통령의 옛날 사진을 보면 보통 대통령의 아내는 남편의 뒤에 서 있곤 했다. 거기서도 대통령의 아내는 이시스이며, 대통령은 보좌에 앉은 아기인 것이다.

 

319 남성의 일은 생명과 관계하는 것이다. 여성의 일은 생명 자체가 되는 것이다.

 

319 남성의 주된 기능은 그 안에서 여성이 출산을 할 수 있는 환경적 상황을 수립하는 것이며 또한 여성이 미래를 가져올 수 있도록 그 장을 조성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여성이 곧 생명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전체다. 남성은 보호하는 인자이며 여성의 힘의 대행자이다.

 

320 여성이 아이를 낳는 일은 여성의 존재의 일부이며, 또한 여성의 몸 자체에 이미 존재하는 역할을 완수하는 것이다. 하지만 생산이 오로지 아이를 낳는 행위에만 국한될 필요는 없다. 여성이 상징하는 삶 속의 그 힘을, 그 특징을, 그 존재를 드러내는 행위 모두가 곧 생산이기 때문이다.

 

326 이쯤되어 제기되는 질문은 백이면 백 이런 것이다. “여성의 여행은 없습니까?”

 

326 여성은 은퇴할 때가 되면 이 세상의 손자손녀에 대하여 할머니의 위치에 설 수 있다. 성숙한 그리고 삶을 육성하는 조언을 할 수 있는 역할에 서는 것이다. 여성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생물학적으로나 사회학적으로 삶을 산출하며, 그거고 나서 말년의 단계에 가서는 삶을 육성하고 삶을 인도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말년에 접어든 남자는 여자에 비해 훨씬 내향적이다.

 

327 만약 어떤 여성이 성취의 장에 들어서는 남성의 과업을 수행한다면, 그녀의 신화는 본질적으로 그 남성 영웅과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그 여성 영웅은 물론 남성이 결코 만나지 못했던 또 다른 어려움이며 이득을 접할 것이지만 남성이건 여성이건 간에 내적 여정, 즉 영적 탐색은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남성의 만다라의 중심 이미지는 종종 빛을 방사하는 보석이나 그와 비슷한 어떤 것이지만, 여성의 경우는 그런 중심 이미지가 아이-자신의 영적 출산으로 낳은 아이-를 팔에 안고 있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왜냐하면 여성의 신체적 특성의 심상이 영적인 현상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328 예술가인 진은 적극적 역할을 충분히 성취했으며, 따라서 그녀의 난국은 본질적으로 남성의 것과 똑같다.

 

328 내가 알기로는 여성들이 이처럼 비인습적인 삶의 방식을 지닐 수 있는 유일한 분야는 물론 학계를 제외한다면 예술계뿐이다.

 

329 문학을 통틀어 여성의 모험을 다룬 작품은 거의 없다. 그 이유는 여성은 이미 그것이며 여성에게 있어서의 유일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그것을 자각하느냐 뿐이기 때문이다. 그림동화에서 어린 소녀들의 모험에 관한 이야기가 몇 가지 있는데 그 대부분은 여성스러움을 받아들이기 위한 문턱으로 들어서기 직전의 망설임을 다루고 있다.

 

329 남성이 표상하는 것은 여성의 힘의 대행자, 그것도 특정한 종류의 기능을 지시받는 대행자이다.

 

329 남성 안의 여성적 요소란 여성 안의 여성적 요소에 비하자면 극히 미미한 것에 불과하다.

 

332 내가 이 젊은 여성들을 가르칠 때, 나는 그들을 문헌학자나 역사학자로 탈바꿈시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그들에게 뭐하러 이런 것들을 가르칠까? ..그들은 장차 가정을 꾸릴 것이고, 그들이 50대에 이르면 자녀들도 독립해서 나름의 가정을 꾸림으로써 그들도 혼자가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의도는 어떻게 하면 인생 여정의 후반부 동안에 세계를 읽을 수 있는 지 그에 관한 영적 메시지를 그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되었다. ..그들은 내 방법이 효과를 발휘했다고, 즉 그들의 삶에서 현재의 국면에 내가 일종의 자양분을 제공하는 데 성공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일본이나 옛날 동양의 전통 같은 경우, 그리고 심지어 플라톤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 고대 그리스에서도 주부와 기녀가 전혀 다른 종류의 여성이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기녀는 예술과 문학과 이야기에 있어서 매우 능숙했던 여성이었다. 기녀의 삶의 방식은 주부-이들 전통에서는 여성의 삶의 성취라고 공인되던-의 삶의 방식과는 전혀 달랐다.

여성에게 인문학을 가르치는 목표를 이정도로 보다니, 좀 실망인걸

 

 

의식의 세 번째 단계 : 성스러운 삶과의 조우

 

352 조이스는 이른바 적절한 예술부적절한 예술을 구분한다. ‘적절한 예술을 구분한다. ‘적절한 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이른바 실제로 예술에 속하는 바를 의미한다. 반면 부적절한 예술은 예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에 봉사하는 예술을 말한다. 나아가 관찰자의 태도를 예로 들면서 조이스는 적절한 예술은 정적인 것이며 따라서 심미적으로 도취되는 반면, 부적절한 예술은 활동적이며 움직임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을 욕망으로, 아니면 두려움과 혐오로 이끈다는 의미다. 대상, 즉 유형의 대상을 향한 욕망을 부추기는 예술은 그는 외설적이라고 말한다. 대상을 향한 혐오나 두려움을 부추기는 예술은 교훈적이라고 말한다.

 

353 조이스는 적절한 예술의 도움을 받아 아퀴나스에게로 나아간다. 그는 라틴어를 사용해서 심미적 대상이 세 가지 순간을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인테그리타스(integritas) 전일성, 콘소난티아 (consonantia), 조화’, 그리고 클라리타스(claritas) 이 그것이다.

 

354 이른바 의존적 기인, 또는 상호적 발생이라는 불교의 교리는 풀러가 말한 시너지의 원리에 상응한다.

 

358 음악의 구조와 건축의 구조 사이에는 관계가 있다. 모든 건축은 공간 속의 구조다.

 

358 내가 찾아낼 수 있는 유일한 답변은 세잔의 것 뿐이다. “예술은 자연과 나란히 하는 조화다물론 여기서는 두 가지 자연이 모두 관계된다. 즉 저 바깥에 있는 세계고, 또 하나는 우리 안에 있는 자연(본성)의 세계다. 다시 말해서 예술가의 의도가 자연과 나란히 하는 조화를 도모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의도는 십중팔구 교훈이나 외설과 연관되게 마련이라면 그 조화는 여러분의 내부에 있는 뭔가와 공명하고, 여러분을 심미적으로 심취시키고, 여러분은 그렇게 큰 아하의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의 기능이란 유형적이고 가시적인 세계의 소진 가능한 것을 열어 젖힘으로써, 그것들을 통해 광휘, 여러분의 안에 있는 것과 똑같은 광휘가 환히 비치게 하는 것이다.

 

359 이런 조화로운 리듬을 막는 두 가지 운동은 붓다의 두 가지 시험과 정확히 일치한다. 하나는 욕망으로 여러분이 대상을 소유하게 만들며, 또 하나는 혐오 또는 두려움으로 여러분이 그 대상으로부터 돌아서게 만든다. 여러분이 어떤 대상을 소유하러 나아가거나 또는 그 대상으로부터 돌아서게 되면, 여러분은 마야가 투사한 미혹적인 호소와 두려움의 세상에 대해 반응하는 것이 된다.

 

360 심미적 도구는 심미적 도취를 유발하는 아름다움의 리듬의 도구는 마야의 드러내 보이는 힘이다.

 

364 내 삶은 한 가지 직업, 한 명의 아내, 한 명의 이미지였다. 바로 성배다. 이것은 보수주의라 알려져 있다.

 

370 예술가는 예술 작품을 완성한 사람이지, 단순히 완성하려는 의도를 품었다고 해서 예술가라고 할 수는 없다.

 

374 ‘치료요법으로서의 예술예술로서의 예술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치료요법은 한 사람을 인간적이게 만들고, ’예술로서의 예수은 그 사람을 인간성을 넘어 새로운 차원으로 데려간다. ..예술을 통한 치료요법의 실시는 그 사람을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려놓는다. 그를 조화로운 인간으로 되돌려놓는 것이다. 하지만 예술은 조화로운 인간으로부터 출발한다. “예술은 자연과 평행한 조화다.” 그리고 만약 그 사람이 아직 자연에 평행하지 못하다면 예술은 그 사람을 그 지점까지 데려가기 위한 치료요법에 불과하다. ’치료요법으로서의 예술은 이른바 회복을 위한 것이다. 이것은 그것을 실시하는 사람 본인을 제외하면누구에게도 예술이 아니다.

 

381 예술가는 어떤 구조물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그것은 사회에 대한 봉사라는 방식이 아니라 내부의 동력을 발견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382 여러분의 책임과 여러분의 건강 모두를 유지하면서 여러분의 창조적 측면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밀폐 봉인된 은신처를 만들어 매일 몇 시간가량은 아무것도 침범해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하며, 여러분이 성실하게 지킬 수 있는 시간만큼 그 시간을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이 정도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몇 시간씩 더 자신에게 허락하되 단 여러분이 반드시 해야 하는 작업을 할 시간과 에너지는 반드시 남겨 두어야 한다.

이는 마치 훈련을 하는 것과 유사하다. 여러분은 훈련에 돌입할 때 시간을 설정해 놓으면 그것은 거룩한 시간이다. 여러분의 예술에 대해서도 똑같이 해야 한다. 즉 하루에 정해진 시간만큼을 여러분의 예술에 바치고, 그것을 시종일관 지켜야 한다. 그러면 뭔가를 쓰거나 쓰지 않거나 간에 그 시간 동안은 거기 앉아 있어야 한다. 이것은 소통과 표현, 즉 예술 작업의 두 가지 요소에 대한 명상이다.

 

385 내가 글쓰기를 시작할 때에는 새러 로렌스의 내 제자들을, 다시 말해 내가 상대하는 실제 사람들을 생각했다. 나는 그들의 생각을 알았고, 그들에게 건네야 하는 말의 종류를 알았다.

 

386 흔히 말하는 작가의 슬럼프를 돌파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것은 내가 보기에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중 첫째는 우선 여러분이 말을 걸고 싶은 상대를 하나 찾으라는 것이고, 둘째는 하루에 두 시간 동안은 말 그대로 그 사람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쓰는 시간을 떼어두라는 것이다.

 

390 진정한 예술가는 자신에게 찾아온 재능을 표현하는 것이며, 그 재능의 수용은 다음과 같은 뜻을 암시하고 있다. “나는 그걸 드러내 보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간혹 예술가는 창조적으로 뛰어듦으로써 매우 환희를 느끼게 되는데, 이를 여러분은 삶에서 유리됨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것은 또한 요가에서 문제가 되는 것 가운데 하나다. 깨달음이 찾아오면 삶에서 유리되고, 여러분은 다시 돌아갈 수 없다. 이것은 예술가이지만 아직 자신의 삶에 그 깨달음을 적용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392 내가 이해하는 바 예술은 마땅히 마야의 드러내 보이는 힘이 되어야 한다. 즉 음악과 무용과 시각예술과 문학에서 성스럽게도 넘쳐나는 아름다움을 생산하는, 즉 실용적인 유용성은 없고 다만 그 내부의 차원을 열어젖히는 심미적인 도취를 위한 대상을 생산하는 것이다.

 

403 조이스의 비법은 어디에서나 상징을 보는 것이다.

 

406 뱀과 달은 모두 옛것에 대해 죽고 각자의 그늘을 벗어던지고 다시 태어난다.

 

413 ‘우선 사회를 바로잡고 나서 그런 다음에 나를 바로잡겠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심지어 하나님의 평화의 저택의 출입문에서조자 입장을 금지당할 것이다. 모든 사회는 악하고, 슬픔이 가득하고, 불공평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따라서 여러분이 진정으로 이 세상을 돕고 싶다면, 여러분이 반드시 가르쳐야 할 것은 앞으로 어떻게 그 안에서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삶에 관한 지식에서 비롯되는 즐거운 슬픔과 서러운 즐거움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몸소 체득하지 못한 사람은 결코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425 여러분이 모든 것을 원한다면 신들은 그것을 주리라. 하지만 여러분은 반드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옮긴이의 말

 

428 이 책은 1983년에 에설런 연구소에서 조지프 캠벨의 강의를 들었던 다이앤 K. 오스본의 필기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거기다가 기존에 출간된 캠벨의 저서 가운데 관련된 부분의 인용문들을 발췌, 수록한 방식으로 꾸며진 일종의 선집이다. 캠벨의 강의록으로서 그의 사상에 대한 개론적인 성격의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429 이 책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책은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신화와 함께 하는 삶>이다.

 

430 사실 캠벨의 주 전공은 종교학, 그 중에서도 인도의 전통에 비중을 많이 둔 비교종교학이라고 할 수 있다. 신화 연구는 그러한 학문의 추구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된 것이며, 보다 더 근본적인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수단이었을 뿐이다.

 

430 캠벨의 사상을 굳이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힌두교 불교 전통에 근거한 일종의 범신론이라고 할 수 있다. 캠벨은 기독교나 불교나 힌두교 등 세계의 다양한 종교들이 결국 한 점으로 모인다고 믿었고, 그 배후의 어떤 절대적 가치를 신봉했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나 신의 가면은 하나같은 그런 어떤 절대적 가치의 외양을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그는 특정 종교의 독단을 배제하고 궁극의 길은 하나로 통한다는 의미에서 겸손과 양보를 주장했다.

 

430 특히 이 책은 대중에게 알려진 신화학자로서 캠벨의 모습보다는 오히려 인간 캠벨의 모습을 더 많이 보여주고 있다. 여러 주제에 대한 그의 진솔한 고백은 평생을 신화와 종교와 은유의 해석에 바친 어느 노학자의 인생철학에 가깝다. 캠벨의 인생철학은 이른바 희열을 좇으라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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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4 15:58:06 *.47.55.101

정성스런 리뷰, 잘 읽었어요.

"진정한 의미란 살아있음 바로 그것이다."

Thanks! msn032.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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