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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 21일 17시 35분 등록

<조지아 오키프 그리고 스티글리츠> 헌터 드로호조스카필프 지음, 이화경 옮김. 민음사.

 

 

1. 저자에 대하여

 

지은이 헌터 드로호조스카필프

미술 평론가, 저널리스트, 오티스 미술대학 교수 역임

 

옮긴이 이화경

작가. 저서. 소설 <수화> 장편 소설 <나비를 태우는 강>, 비평집 <이상 문학에 나타난 주체와 욕망에 관한 연구>, 인도 동화 번역집<그림자개>

 

2. 내가 저자라면

 

1) 뼈대와 목차

 

오키프의 전기는 세 시절로 구분된다.

 

1부 시작 (1848년부터 1917년까지)

2부 변화 (1918년부터 1946년까지)

3부 개화 (1947년부터 1986년까지)

 

시대 구분은 그녀는 자기의 인생이 스티글리츠를 만나기 전, 스티글리츠를 만났던 기간, 스티글리츠를 만나 후 이렇게 세 단계로 나뉜다고 말했다. (631p)”에 것일까? 1918년에 그녀는 뉴욕으로 올라은다. 곧 스티글리츠와 연인이 되고 결혼한다. 1947년은 스티글리츠에게 도로시 노먼이라는 연인이 생기면서 오키프가 사막으로 들어간 때다. 이혼을 하지는 않았지만 스티글리츠와 정서적, 물리적으로 거리를 두었다. 그런 것도 같다.

 

 

2) 장점 및 보완점 평설

 

여성이 화가가 되는 사람이 거의 없던 시절, 자신의 삶으로 길을 낸 사람 조지아 오키프. 그녀와 나의 사소한 인연을 말해보려 한다. 종로 어린이도서관에서 남의 대출카드로 빌린 화가의 일대기에서 우연히 오키프의 사진을 보았다. 화장기 없이 좀 말랐다 싶지만 눈빛이 반짝이는 여자가 사막에서 머리에 스카프를 두르고, 해골그림을 그리고 있다. 작은 차를 개조했는지 화구들이 차 뒤편에 실려 있었다. 차 뒷문을 올리고 캠핑을 하듯 차양막을 쳤다. 스티글리츠가 찍은 누드사진 속의 섬세하고 병약해 보이고, 약간 퇴폐적인 분위기의 젊은 여자보다 50대 이상으로 보이는 이 사진에 매혹당했다. 우리 집에는 오키프의 해바라기가 한 그루 있다. 예술의 전당 아트샵에서 사서 금색 액자로 표구했다. 결혼하고 두 번째 집인 이 집은 동남향인데도 불구하고 앞 건물 때문에 해가 잠깐 든다. 전세금 3천을 올리고 거실이 생겼어요.” 라고 했을 때 우리 엄마는 살림을 늘려가니 성공한 거네.” 기뻐하고 칭찬하셨다. 오키프의 해바라기는 거실 한 가운데에 피어있다. 벽난로, , 모닥불의 상징이다. 생명력이 가득한 그 그림을 그릴 때 오키프는 태양이 쏟아지는 뜨거운 한낮에 있었을 거다.

 

오키프의 이야기의 시원은 진 시노다 볼린의 <우리 속에 있는 여신들> 책이다. 캠벨이 마음에 드는 작가의 책을 다 읽고, 그 작가가 읽은 것을 읽으라고 했다. 나는 진 시노다 볼린의 책 중 한국에 번역된 책은 다 읽었다. 여러 번 읽었다. 이제 그 책에서 관심을 끌던 이들에 대해 읽어볼 참이다. 메데이아, 조지아 오키프, 싸이키, 글로리아 스타이넘 같은 여자들.

 

오키프는 아르테미스 원형을 많이 가진 여자로 소개되었다. 궁수였던 아르테미스 여신처럼 아르테미스 원형을 가진 여성은 장기적인 관점을 가지고 목표지향적인 삶을 산다. 황야를 쏘다니고 자연과 이국 문화를 탐험하길 즐긴다. 자신의 주관적 가치를 가진 것에 몰두할 수 있는 집중력을 가졌다. 아르테미스 원형을 구현하는 여자들은 할머니 나이가 되어도 운동과 모험을 계속한다. 오키프를 데메테르 부분에서 또 한 번 거론한다. 자기보다 배는 나이가 많은 남자와 살았던 오키프가 아이 낳기를 포기하는 과정에서다. 자기답게 사는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여성과 남성 모두 두 가지, 원래 타고난 원형과 사회문화적 압력(가부장제)의 영향을 받는다. 삶의 국면마다 선택할 때 원형은 영향을 끼친다. 중요한 타인 역시 의사결정에 힘을 행사한다. 남편 스티글리츠가 반대했기 때문에 오키프는 아이를 낳지 않도록 결정한다. 두 가지 이유다. 하나는 아이가 있으면 그녀의 창조성을 그림이 아니라 육아에 쏟게 된다는 것, 또 하나는 스티글리츠가 전처에게 낳은 딸 키티가 산후우울증으로 입원해 정신분열병에서 회복되지 못한 채 평생을 정신병원에서 보낸 거다. 나는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정하는 부분에 대해 자세히 읽어보고 싶었다.

 

10년에 걸쳐 오키프를 알고 있던 수십 명의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그녀가 썼거나 그녀에 대해 썼던 수천 통의 편지를 읽은 저자는 작품도록을 넘기면서 그녀의 생과 작품을 면밀히 연결시키고 있다. 모더니즘 예술사에서 신화를 창조했지만, 그 신화 뒤에 가려진 한 살아있는 여인의 진솔한 초상을 그려내고자 했던 저자의 소망, 우상화가 아니라 사실에 충실한 텍스트가 되길 바라던 오키프의 바램에 이 전기는 충실하다.

 

책을 읽는 나의 관전 포인트, 시점을 기입하고 싶다. 세상에 온전한 객관이란게 있을까? 자기가 신은 신발에 따라 놓인 위치에 따라 보이는 게 다르다. 현재 나의 상황이 책을 읽는 관점이다. 나는 결혼 3년차이고 아이가 없다. 1년 반 휴직을 해서 적극적으로 기다렸다. 6개월 뒤에는 복직해야 한다. 44세이기 때문에 아이가 생길 확률 : 안 생길 확률 = 1:9 . 그래도 시험관을 계속 할거다. 올해 안에는 2~3번 더 할 수 있으리라. 나의 큰 과제는 어떻게 아이 갖기에 대해 의사결정 할 건가다. 관련 책을 읽어보고 있다. 상실감은 아이 없이 늙은 남자와 살면서 유방종양제거 수술을 받은 오키프처럼 시시때때로 느껴지리라. 98세까지 살았던 오키프처럼 장수할 수 없다고 쳐도 우리 집안 여자들 평균, 한국여성 평균 수명을 감안하면 44세인 현재 기대수명은 아직 반이나 남았다. 나는 오키프의 전기를 44세부터 읽기 시작했다. 그다음 어린 시절을 읽고, 스티글리츠와 만나는 부분을 맨 나중에 읽었다.

 

1) 오키프는 아르테미스 기질이 맞다. 내가 예를 든다면 오키프를 대표적인 인물로 상정하겠음.

어릴 때 오빠와 경쟁함. 권력에의 감각이 있었음. 제 멋대로 하는 아이였다.

트레킹, 자연 속 산책, 수영에서 에너지를 얻음

자신의 관점을 흔들림 없이 견지해 나감. 심난한 일이 있더라도 그녀는 규칙적으로 지독한 작업량을 채운다.

안주인 노릇이나 애들을 시중드는 노릇을 싫어한다.

남편의 여자 때문에 고통 당할 때 거리를 두고 가장 가기답다고 여겨지는 장소에 칩거했다.

늦게 운전을 배우고 해외여행을 떠났다. 그녀가 60, 70대에 유럽, 페루, 동남아시아를 돌아다니며 스케치를 했다.

눈물 보이고 상처받기 보담 잔혹히 대하고 분리하고 복수한다. 노먼의 사진을 회고전에서 빼버리는 식으로.

스티글리츠 이전의 남자들에게도 먼저 고백하고 대쉬한다. 독립과 의존 사이의 갈등을 많이 느꼈다.

운동을 꾸준히 하고, 좋은 음식에 집중해서 나이 들어서도 꼿꼿하고 건강했고 98세 까지 정열적으로 살았다.

운전으로 독립성을 성취하였다.

그림에 대해서라면 다른 여자들만큼 균형잡기에서 고생한 것 같지는 않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분명히, 정확히 알고 있었고 비교적 흔들림 없이 추구해 나갔다.

 

2) ‘불륜개념에 나는 특별히 민감하다. 이 책을 읽다가 남녀관계에 대해서는 불륜이라는 기준을 적용하기가 어렵지 않나 싶어 혼란스러워졌다. 오키프와 스티글리츠의 관계 또한 에멀린에게는 노먼 같은 거였다. 결국 남자와 여자는 외로울 때, 새로운 사람이 필요하지 않나. 기존의 견고한 선입견에 도전하는 이런 게 좋다.

 

- 결혼 25주년일 때 오키프는 31살이었고, 스티글리츠는 오키프의 어머니와 동갑인 52살이었다. 에멀린은 45. 노먼이 키티보다 7살 어렸다고 했는데 그들이 만났을 때 오키프는 41살이었고, 스티글리츠는 62, 노먼은 22살이다. 오키프와의 관계는 미술계에서 291 화랑같은 실험적인 걸 하고, 자기 잡지를 갖고 있고, 많은 신인들을 발굴하고 소개하던 영향력 있는 배후자로 보였던 스티글리츠가 그녀의 그림을 이해하고 후원하는 모습으로 출발했다. 후원자와 화가의 관계가 누드사진을 찍으면서 연인으로 발전한다. 이 관계 이전에 에멀린과의 결혼은 실질적인 내용이 비어 있었다. 노먼이 나타난 때 역시 비슷하다. 노먼은 부유한 유부녀였고 열정을 쏟고 자기를 발견할 꺼리가 필요했다. 열정적이고 경험많고 친절한 스티글리츠에게 찬사를 바쳤다. ‘내 것은 로맨스 남의 것은 불륜이라고 할 수 없으리라. 세 여자의 사랑과 결혼이 똑같은 무게였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스티글리츠에겐 모두 삶의 동반자들 또는 주요 인물들이었다.

 

- 키티가 그 와중에 정신분열병에서 벗어나오지 못했던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다. 부모의 결혼이 결단날 때 이미 성인이었는데도 키티는 영향을 많이 받는다. 스티글리츠가 평생 그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오키프는 감정적 거리를 유지하고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스티글리츠가 매력이 있으니까 62살에 22살짜리 여자를 만날 수 있지 않았을까?

 

- 에멀린과의 결혼은 텅 비어 있었다. 파울라와의 관계 오키르, 노먼과의 관계를 시작하고 끝낸 걸 보면 스티글리츠는 자신이 찬양받는 것을 몹시 즐긴다는 걸 알 수 있다. 정확히 이 권력 관계에 따라 그가 약자가 되었을 때 그는 다른 여자, 더 어리고 경험없고, 자신을 찬양하는 여자를 찾아냈다. 에멀린은 상속녀였기 때문에 그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지 않았다. 오키는 당당하고 부양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졌다

오키프의 결혼은 키티의 회복 가능성을 위해 진행되었고, 그 와중에도 그는 많은 여자들을 집적거린다.

스티글리츠는 많은 여자들을 관여한다.

노먼의 결혼 역시 비어 있다.

 

3) 놀라운 건 남편의 연애 때문에 오키프가 고통을 당했지만 희생자 역할에 머물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녀는 분명히 고통당했다. 2달간 신경쇠약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우울증을 겪었다. 유방에 생긴 양성종양을 제거하는 동안 그녀의 남편은 다른 여자와 즐겁게 연애중인 걸 견뎌내야했다. 이것이 상처가 되었던 그녀는 스티글리츠 사후에 장례식장에서도 그녀를 외면했고, 회곤전을 열 때도 노먼의 사진을 뺐다. 화랑의 전적인 운영권을 요구함으로써 노먼을 배제했다. 오키프가 권력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한 보복이었다. 이런 것보다 내 관심을 끈 것은 어떻게 희생자가 되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자신의 영역을 확고히 다녀나갔느냐다.

 

그녀가 선택한 방식은 자기 돌보기였다. 가장 먼저 자신을 편안하게 하는 장소를 선택해 그곳에 머무른다. 자연이었다. 두 번째는 거리두기. 그 와중에도 자신의 관심사를 지독한 작업량으로 그려낸다. 나우의 이론을 가슴에 품고 실현한다. 흥미로운 점은 그녀의 힘이 대등하거나 그 이상이 되자 그녀는 그 관계에 많은 위협을 받지 않았다는 거다. 그들은 화상과 화가라는 동업관계를 유지했다.

 

4) 화가는 하루 아침에 저절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오키프네 일곱 아이들은 11살 때 부모에 의해서 집에서 미술 수업을 받았다. 미술 교본을 베끼는 식으로 공부를 시켰다. 종교단체에서 운영하는 중고등학교로 진학했을 때도 부모는 수업료 외에도 미술 과외비를 지불했다.

재능을 전제로 하지만 오키프는 화가가 되기로 열두살 때 선택했다. 재능이 비슷했던 형제자매들은 경제적 자립에 더 유리한 간호사를 선택했다.

- 오키프는 부모(프랭크와 이다)에 의해 미술대학에 갔다. 학교 선생님이 오키프가 재능이 있 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집이 어려워서 삽화가로 2년 살았다. 임시직 교사부터 정규직 교사를 했고, 교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사범대학에 다시 간 건 27살때였다. 이때도 학비를 이모가 대어주었다. 오키프는 다른 일은 잘라내고 해야할 일에 집중했다.

- 스티글리츠의 291 화랑에 작품을 보낸 건 자신의 그림을 이해해 줄 누군가가 필요했기 때 문이었다.

- 오키프는 그녀의 그림보다 스티글리츠의 누드사진의 주인공으로, 정부로 먼저 알려졌다. 사 람들은 스티글리츠가 창조한 오키프의 모습을 끊임없이 소비했다. 그녀의 그림에서 성적인 의미를 찾으려 했다. 오키프는 이런 선입견과 싸워야 했고, 그게 전시회를 열면서도 우울증 을 주었다. 그러나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 스티글리츠는 그녀에게 거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보다 커짐으로써 그를 지탱하던 힘의 우위 에서 벗어났다. 그들은 공통 관심사가 있었고, 성적인 끌림도 있었는데 왜 헤어졌을까? 남 녀관계에도 이런 권력 관계가 있는 게 아닐까?

- 오키프의 투쟁은 자신 안에 있는 것을 남들이 뭐라고 하든 그려내는 것이었다. 아무도 그녀 의 생각과 사물을 보는 방식을 인정하지 않을 때도 자신을 믿고 작업했다. 그녀는 남자들과 근본적으로 다르게 보고 느끼는 걸 알게 되었다.

 

5) 오키프 전기를 읽으니까 위인전의 주인공에게 나를 빗대어 반성하고 배우려 하고 싶으네.

제일 인상깊은 건 자기답게 산거다. 그녀는 그림을 선택했고 자기가 원하는 곳에서 살았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늦게 운전을 배우고, 여행 가고 캠팽, 트레팅을 갔다. 남편의 다른 사람으로 인해 더 가속화되었다. 자기답게 사는 삶이 고통을 견디게 해 주었다.

둘째, 여성적 시각에 대해 그냥 밀어붙인 거. 오키프의 투쟁은 자신 안에 있는 것을 남들이 뭐라고 하든 그려내는 것이었다. 아무도 그녀의 생각과 사물을 보는 방식대로 하지 않고, 선례가 없었기 때문에 인정하지 않을 때도 자신을 믿고 작업했다. 그녀는 남자들과 근본적으로 다르게 보고 느끼는 걸 알게 되었다. 나의 느낌 역시 그렇지 않을까? 남들에게 하찮은 것이지만 나에게 진실로 진실한 것이라면 펼쳐보여도 되지 않을까? 내가 꽂혀 있는 주제를 그냥 밀어붙이기가 겁난다. 결혼과 신화, 아이를 기다리는 것 그것에 대해 기록한다는 것도 그렇다. 매력적인 형태, 쓸모있는 형태였으면 좋겠다. 오키프는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을 때 꽃을 확대해서 그렸다. 사실 평생이 걸린 작업이다. 오키프라 작업을 하던 건 순전히 엄청난 성실과

 

 

 

3) 감동적인 장절


(1) 오키프의 아르테미스

 

24 조지아의 아버지가 새벽부터 황혼까지 농장 일을 하는 동안 어머니는 일곱 아이들의 필요를 채워줘야 했다. 이다는 자식들 한 명 한 명에게 친밀감을 보일 시간도 없었고, 체질상 맞지도 않았다. “어렸을 때 나는 어머니로부터 얻지 못한 어떤 애정을 갈망했던 걸로 기억한다라고 조지아는 나중에 술회한다. 손님이 오면 조지아는 뒷방에 숨어야 했다.....뒷방에 감금된 것은 몹시 심한 정신적 상처였기에 조지아가 1976년 자신의 자서전에 상세히 기록한 몇 안되는 유년의 경험들 중 하나였다.

오키프의 어머니는 냉랭하고 정서적으로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어머니였다. 자립심이 강하다. 아버지는 결혼 초부터 재산에서 약했고, 평생에 걸쳐 실패를 거듭했다. 부모의 결혼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

 

25 장녀인 조지아는 여동생들보다 훨씬 버릇없었다. 어린 여동생들이 한 침대에서 뒹굴 때, 조지아는 어릴 때부터 자기 방이 있었다. 조지아는 나중에 인정했다. “나는 권력에 대한 감각이 있었고, 언제나 그 힘을 행사했다.”

 

25 조지아는 부모님이 큰아들인 프랜시스에게 가장 헌신적이라는 사실을 견디지 못했다. 조지아는 그를 경쟁상대로 보았고, 도보경주에서부터 학교 공부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오빠를 이기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26 조지아는 몇 시간씩 흙길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봄과 여름에는 야생화가 전선과 목책을 거슬러 올라 꽃을 피우고, 초원을 넘어 끝없는 지평선까지 펼쳐졌다. 가을과 겨울이면 조지아는 침실 창문 너머로 드넓은 청동빛 하늘을 내다보았다. 내가 비롯한 곳, 그 대지가 모든 것을 뜻한다.” 그 땅은 어린 조지아에게 웅장한 공간에 대한 인상을 남겼고, 조지아는 이것이 그녀가 예술가로서 발전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것이었으며 심지어 결정적인 것이었다고 말한다. 생은 그 대지에 달려 있다.”

내가 태어난 대지에 의하면 나는 어디에 놓일 때 편안할 건가?’

 

40 조지아는 늘 그렇듯 자연에서 위안을 얻었다. 날마다 조지아는 급우들과 함께 선생님이 이끄는 오후 산책을 즐겼다.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안개 자욱한 블루리지 산맥이 멀리서 유혹했고, 조지아는 학교에서 금지한 하이킹을 위해 친구들과 몰래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하이킹은 그 시절 내게 가장 멋진 일이었다. 나는 학교가 정말 싫었다.”

나도 하이킹을 갈까? 남들이 정한 대로, 정한 곳에서 사는 게 지겨워졌을 때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힘을 주는 일.

 

41 ~은 아침마다 조지아가 요크 강에서 수영하는 걸 보고 경악했다.

 

158 오키프는 여성성을 강조한 스타일의 옷을 입는 것을 꺼렸다.

 

163 여전히 오키프는 의미있는 관계를 갈망했다. 그녀는 맥마흔에게 여동생인 애니타가 눈 맞아 달아난 뒤 낙태했다는 사연을 전하면서 맥마흔이 자신의 아이 아빠가 되어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다시 한 번 오키프가 먼저 한 걸음 다가갔고, 다시 한 번 맥마흔은 주저했다. 그러자 오키프는 그에게 편지 쓰는 것을 멈췄다. 여자들에게 투표할 권리조차 허용하지 않았던 시대에 오키프는 남자와 똑같이 행동하면서 자신이 살던 시대를 앞서 나갔다. 역할 모델은 없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강한 본능을 따랐다. 사람의 마음을 강하게 끄는 스티글리츠의 편지는 맥마흔의 소심하고 과묵하고 여러 모로 오키프를 지지해주지 못하는 부족함을 메워 주었다.

이 여자는 자기가 먼저 청혼한다. 남자들은 달아난다.

 

182 어쨎든 그들 모두 지금은 없어요. 나는 지금 멋진 자유의 몸이 되었는데 정말 끝내 주는 기분이랍니다. 누군가는 이것을 변덕이라고 부르겠죠. 웃긴 소리예요. 나로서는 내가 좀 더 나 자신의 주인이 되었다는 느낌이예요. 나는 늘 누군가를 많이 좋아하면 노예가 된 기분이었거든요.

그녀는 남녀 관계가 없을 때 자유로움을 느끼는 부류.

 

235 오키프가 자신의 독립을 위해서는 어떤 타협이나 양보도 쉽게 하지 않았다. 그녀가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누리지는 못했지만 오랫동안 혼자 힘으로 먹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작스레 스티글리츠네 식구들과 여름을 함께 한 데 이어 그해의 남은 기간 동안에도 그들과 함께 지내야 했다. 한숨만 나올 판이었다. “나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게 쉽지 않았다. 스티글리츠 주위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있었다.”

제 손으로 벌어먹고 산 여자들은 자존감과 함께 독립심이 있다.

 

235 조지호수로 가는 연례 여행 전에 그녀는 메인 주의 뉴욕 비치에서 홀로 휴가를 보내기로 결심했다. 2년 만에 처음으로 그녀는 스티글리츠와 떨어져 지냈다. 대서양이 머릴 내다보이는 전망 좋은 방을 하나 얻었다. 잿빛 여명이 동터 오는 시간에 일어나 커피를 마셨다. 기쁨으로 충만한 어린아이처럼 바다로 달려 나가 파도가 부서지는 것과 젖은 모래사장에 잔잔하게 물결치는 것을 보았다. 산책을 하고 해변에서 조개와 조약돌을 주우며 보냈다. 이곳에서 고독이 주는 위안을 맛보았다.

조지호수의 연례행사는 마치 한국의 며느리들에게 제사나 명절같은 것이리라. 그 전에 하루나 반나절이라도 여유되는 대로 자신을 위로하는 곳에서 휴가를 보내는 것도 지혜다.

 

249 오키프는 그 당시 대다수 전문직 여성들처럼 잡다한 집안일을 책임지면서 힘겹게 자기만의 시간을 만들어야 했다. 매년 그들의 여름 별장에 가기 전이면, 그녀는 완벽하게 식기 세트를 포함해서 뉴욕 아파트의 짐을 싸서 기차로 보냈다.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그림을 그렸지만 사람들이 나에게 기대하는 역할도 소홀히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뇌졸중과 고통스러운 발작 때문에 몸이 일부 마비된 헤드윅은 심술을 부렸다. 모든 식구들의 격한 성질머리를 가라앉히는 것 밖에 매력적인 점이라고는 하나도 찾을 수없다. 실제로 그녀가 그해 여름에 그린 그림들은 대부분 열의가 없어보인다.

겨우 여름 별장에서 같이 사는 남자의 어머니의 성질 받아내는 정도였다. 모시고 산 것도 아니었고, 아이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집안일과 일(예술)을 병행하는 건 어려운 일인가? 작가에게는 다른 전문직, 8시간 노동을 하는 일을 하는 여자들보다 더 힘든건가?

 

327 호텔 직원들이 집 안의 모든 잡일을 해 주었는데 오키프는 그림을 그리는 시간을 방해하는 잡다한 일들로부터 해방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특히 조지 호수에서 엄청난 집안 일에 질린 후로 더욱 그랬다. 요리사와 가정부에 익숙한 스티글리츠는 더 이상 오키프가 직접 해주길 기대하지 않았다. 셀턴으로 이사한 것은 새로운 경계를 나타냈는데 그것은 결혼이 오키프에게 단순히 집안일을 떠맡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328 그녀는 작업하지 않을 때는 그리고 있던 작품을 천으로 덮어놓았다. 산호, 조가비, 조약돌, 꽃 병 안에 든 말라 버린 풀 등이 아파트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329 하루 종일 작업하고 나서 지치면 오래도록 산책을 했다.

 

488 오키프는 늘 새벽에 일어나 커피를 마시고 다음에 그릴 소재를 찾아 산책을 나섰다. 샤봇은 그해 가을 오키프에 대한 첫 인상을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집 뒤의 언덕에 비친 첫 일출을 놓친 적이 없었다. 특별한 색이나 효과를 포착하려고 할 때는 잠옷을 입은 채 초원으로 달려 나갔다."

오키프는 98세까지 살면서 끊임없이 세계 여행을 다니고, 야생의 자연 속을 트래킹하고 캠핑을 했다. 그녀는 아르테미스 여신을 연상시킨다. 자기답게 살고 있다.

 

561 “나는 자연의 N을 대문자로 쓰고 그것을 나의 교회라고 부른다.”는 프랭크룅드 라이트의 견해에 오키프는 공감했다.

 

588 예순다섯 살의 오키프는 처음으로 유럽여행을 갔다.

 

592 운동을 소홀히 하지 않았던 오키프는 말년에도 똑바른 자세와 우아하고 고상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596 예순 아홉 살의 오키프는 두 달간 페루 여행을 결심했다..

 

604 내가 스티글리츠와 결혼했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그건 사적인 개인사일 뿐 알려야 할 어떤 타당한 이유도 모르겠군요. 한 사람의 화가로서 나의 업적은 그딴 주변적인 설명 없이도 버틸 수 있습니다.

 

604 노먼과 달리 오키프는 스티글리츠와 거리를 두고 싶어했다.

 

604 오키프는 1953년부터 56년까지 전기 작업을 지속할 수 있도록 돈을 정기적으로 보냈다. 오키프는 자신을 찬양하기 보담 사실에 바탕을 둔 정확성을 요청했다.

 

617 일흔 두 살의 오키프는 일본, 대만, 홍콩, 호치민, 방콕, 피지, 타히티, 한국, 필리핀, 호놀룰루를 거치는 6주간의 여행을 감행했다.

 

 

(2) 불륜? 다 같은 사랑일뿐

 

66 아프레드 스티글리츠는 독일 태생의 유대인계 부모인 에드워드와 헤드윅 스티글리츠 사이에서 태어난 유복한 가정의 장남이었다. 헤드워드 스티글리츠는 1849년에 미국에서 모직물을 수출하고 셔츠를 만드는 개인 사업을 번창시켰다. 그는 엄격한 완벽주의자이자 원칙론자였지만 여자에 약했다. 잘 생긴데다 쫙 빼입고 다녔고, 아내의 결혼하지 않은 여동생들인 이다와 로자 베르너와 터무니없는 바람을 피우기도 했다. 1865년에 로자는 표면상으로는 핏줄인 조카들을 키우기 위해 언니와 형부와 형부와 살기 위해 왔다. 헤드윅이 잇따른 임신 때문에 남편과 관계할 수 없을 때마다 로자와 에드워드는 6년 이상 부족절한 연애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알프레스 스티글리츠 이후로 헤드윅은 1965년에 플로라를 1867년에 레오폴드와 줄이어스 쌍둥이 아들을, 1869년에 아그네스를, 1871년에 셀마를 낳았다.

알프레드의 아버지는 아내, 아내의 자매와 중혼이라 할 만한 관계였다. 그가 어머니의 영역에 있을 때 어머니로부터 고통을 하소연하는 소리를 들었을지라도 사람은 물드는 것이고, 본 대로 행하는 존재이므로 아버지와 비슷한 사람이 되었을 거라 예측이 가능. 저 시대는 알프레드 아버지의 방식이 보편적인 것이었나?

 

67 알프레드는 예술가들을 재정적으로 후원하는데 헌신하는 것, 완벽주의, 불같은 성미를 지닌 에드워드 스티글리츠의 성격적 특성을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그는 또한 아버지의 사업적 안목도 지녔지만 애초에 사업의 길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돈이 부모를 행복하지 못하게 만든 원인이었다고 믿었다. 그는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생활비를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다고 꾸짖는 것을 보았고 늘 어머니 편을 들었지만, 이렇게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에게 반항하고 대들어 봤자 헛되고 참을 수 없으며 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으면서도 나는 아버지를 존경했다.”

 

68 헤드윅과 로자 두 여자가 아버지를 애지중지 떠받들고 모시는 모습은 모든 아이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알프레드의 아버니는 두 자매와 중혼 관계를 가진 셈. 아들로서 어머니의 아픔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보고 자란대로 하는 게 당연. 아들들은 저런 식의 중혼, 1부 다처제의 남녀관계를 유지할 거고, 딸들 역시 비슷한 셋팅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68 학업에 싫증이 난 그는 한 달에 1200달러나 되는, 아끼지 않아도 되는 넉넉한 용돈으로 대부분 카페에서 소설을 읽으며 지냈다.

그는 스스로 일을 해서 돈을 번 게 아니었구나. 부모의 유산으로 살았고, 부모의 지원금으로 예술을 만들어냈다. 어쩐지 좀 기생적.

 

70 1888년 엘프레드와 형제들은 여동생 플로라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7년 만에 뉴욕에 왔다. 가을에 독일로 돌아가자 마자 앨프레드는 파울라라는 창녀와 관계를 맺었다. 스물다섯 청년이었지만 파울라는 스티글리츠가 거의 처음으로 성관계를 맺은 여자였다. 자신의 아파트에서 같이 살자고 그녀에게 청했다. 파울라는 사진작품의 <햇빛과 그림자 : 파울라>의 모델이다. 파울라의 관계는 알프레드에게 의미심장했기에 1890년에 그녀와 헤어진 뒤에도 다른 후원자가 카페의 경영자로 그녀를 앉혀놓았따는 말을 들을 때까지 한 달에 150달러씩 보냈다.

파울라가 그의 첫 번째 부인, 에멀린은 두 번째, 조지아 오키프는 세 번째, 도로시 노먼은 네 번째 부인. (짬짬이 만난 단기성 여자들은 제외) 이런 경우 어떤 역학이 발생할까? 첫 번째 상대와의 유대감이 가장 강할 것이다.

 

72 에멀린의 부모는 죽었고 그녀의 보호자인 오메르마이어는 위층에 있었다. 오메르마이어가 나중에 두 사람이 결혼을 약속한 걸로 말한 걸로 보아 앨프레드가 약간 방종하게 굴었던 게 틀림없다. 오베르마이어는 에멀린의 순결함에 대한 평판이 의혹을 사게 되었다며 앨프레드에게 책임을 물었다. 앨프레드가 반박하자, 오베르마이어는 좀 더 높은 권위를 지닌 에드워드 스티글리츠에게 가서 아들로 하여금 약속을 지키게 하라며 압력을 가했다. 이 사건에는 도덕적인 책임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문제도 연루되어 있었다. 주식시장은 하락했고, 미국은 18936월에 경제 불황으로 들어섰다. 에드워드 스티글리츠는 주식시장에서 엄청난 돈을 잃었기 때문에 재산을 지키기 위해 다시 일에 착수했다. 에멀린 오베르마이어는 그녀의 아버지인 데이비드 오베르마이어가 여러 사업으로 다져 놓은 재산의 상속녀였다. 앨프레드는 결코 스스로는 돈을 벌지 못하리라는 게 분명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상속받을 상당한 재산은 그에게 큰 도움이 될 터였다. 그녀 가족의 회사 내에서 에멀린의 지분은 연간 3000달러의 넉넉한 수입을 보장했고, 에드워드 스티글리츠는 아들을 위한 수입으로 그 정도 금액이면 적절하다고 여겼다. 두 남녀는 제 경비를 나누는데 동의했다. 에멀린은 자신의 사치스러운 삶을 유지하는 것과 아이들 양육에 돈을 쓰고, 에멀린이 그의 모험적 시도에 드는 비용을 종종 대주긴 했지만 어쨎든 스티글리츠는 사진 작업에 들어갈 경비를 스스로 지불하기로 했다.

189311월에 그들은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시작부터 삐거덕거리는 결혼이었다. 싀글리츠는 아내의 부르주아적인 열망을 경멸했고, 그런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에멀린은 스티글리츠가 자신의 몸에 손도 못대게 했다....189455일에야 신혼여행을 떠났지만 다섯 달 동안 함께 한 유럽여행은 둘의 차이점을 증폭시키기만 했다. ..스티그리츠는 여전히 초야도 치르지 않은 채 9월에 미국으로 배를 타고돌아왔다. 18951월에 스티글리츠는 심각한 폐렴에 걸렸다. 놀란 에멀린은 후회하면서 앞으로 잠자리를 같이 하겠느니 죽지만 말아달라고 했다. 그는 기적적으로 회복했고 플로리다 주에 있는 로크리지로 휴양을 떠났다. 마침내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했다.

문제가 있는 부부네. 사랑해서 결혼해도 유지될까 말까한데 시작부터 계산으로 만났네. 에멀린이 얻는 건 뭘까? 이 서술은 아마도 스티글리츠의 입장에서 쓴 것 같은데.

 

74 비록 결혼생활이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스티글리츠 부부는 1898927일 딸 캐서린이 태어남으로써 겉보기에는 좀 더 나은 부부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딸 때문에 몹시 기뻤던 스티글리츠는 엄마 품에 안긴 갓난아기를 키티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아기의 사진 여행>이란 제목의 사진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했다. 그는 딸의 출생을 통해 진정한 인물 초상란 출생 때 찍은 사진들로 시작하여 그 주체의 온 인생을 통해 지속되는 것이라는 견해를 구체화했다. 키티의 연대기는 4년 뒤 아이에게 자아의식이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느낀 에멀린 때문에 중단되고 말았다. 스티글리츠는 사진을 찍는 것을 통해서 그 사람에 대한 호감을 표현했는데, 이렇게 딸과의 소통이 억지로 중단되자 딸에 대한 감정이 서먹해졌다. 그 후로 스티글리츠는 키티와 에멀린을 특별한 경우에만 이례적으로 찍었다.

딸은 결혼 후 6년 후에 태어났다. 사진 찍은 걸 통해 소통하는 남자에게서 딸을 사진 찍지 못하게 했으니 에멀린이 아버지를 딸에게서 떼어놓은 셈. 에멀린은 사진찍거나 그림 그리는 남자가 사랑하는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 듯. 에멀린 탓만 할 순 없다. 처음부터 스티글리츠는 상속재산이 있어서 자신이 돈을 안 벌고도 살 수 있는 조건을 가진 여자를 찾았지, 사랑하는 대상이나, 예술의 동지를 찾은 게 아니었다.

 

87 스티글리츠는 예술적 과정이 자아를 표현하는 영적 여행임을 깨달았고, 그의 화랑은 예술적 탐구를 위한 하나의 실험실이었고, 자신은 그 영적 매개자였다. 그는 화랑을 사업체로 운영하자는 제안을 거절했고, 화상이 아니라 예술계에서 대단한 거물인 양 행동하는 사람으로 악명 높았다. ...“스티글리츠는 만약 사람들이 돈이 있어서 작품을 구입하려는 것 같으면 그림 값을 두 배로 올렸고, 어떤 사람이 화랑에 들어와서 뭔가에 푹 빠졌는데 가진 거라곤 마음 밖에 없는 것 같으면 반값에 주는 사람이었다.” 그런 이유들 때문에 예술가들은 291 화랑에서 열리는 전시회를 사랑했다.

저런 말을 했다면 나도 존경했겠다. 상업적 예술과 순수예술을 완전히 구분하기 보담 예술을 생활 속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걸로 넓게 이해하고, 자신이 만들어낸 예술품을 팔아서 생활이 가능한 게 당연하다는 게 내 인식이긴 하지만

 

145 오키프는 자신보다 나이 많은 유부남 스티글리츠를 정신적 스승으로 여겼고 스티글리츠는 그러한 대우를 즐겼다.

 

151 스티글리츠의 격려 덕분에 오키프는 그해 여름 그림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고, 최소한 마흔 점 남짓 작품을 그릴 수 있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우울과 맥마흔과의 로맨스에 대한 불안에도 불구하고, 오키프는 예술이란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감정의 억압이라는 시인 T.S. 엘리엇의 견해를 따랐다.

오키프에게 스티글리츠가 격려를 주고, 작품에 열중할 수 있도록 돕는 후원자였듯, 노먼에게도 자신을 발견하고 열정을 쏟을 곳을 찾게 하는 후원자였을 것이다. 사실 오키프에게 일어난 일이 노먼에게도 그대로 일어났다. 스티글리츠는 자신을 살게 하는 그런 지도자역할 자체에 매료된 듯 하다. 어떤 남자에게 그것만큼 강력한 게 있을까? 스티글리츠와 예술의 측면에서 아무런 공토점이 없었던 에멀린은 예외적인 경우다. 그러나 그녀는 경제적인 안정감을 제공한 부인이다.

 

191 재정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오키프라는 여자와 대면하면서 스트랜드는 자신이 처한 상황의 한계를 직시해야 했다. 검소한 가정에서 자란 젊은 예술가로서는, 그 자신조차 지탱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동료 화가를 그저 내버려둘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스티글리츠에게 자신은 오키프로부터 손을 떼겠다는 편지를 썼다.. 그리고 놀랍게도 자신의 친구인 오키프와 스티글리츠가 운명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과 그녀는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붙잡아야 합니다. 서로를 위해서요.”

 

202 쉽게 부서지고 예민한 오키프의 성품은 스티글리츠가 지난 근본적인 빅토리아식 여성관, 즉 여자는 유약하고 보호받아야 할 존재라는 시각에 들어맞았다. 그가 동시대 여성의 권리 등을 포함한 현대적 원칙들에 지적으로 동의했다고 하더라도 19세기 후반에 젊은 시절을 보낸 그는 보수적인 가치들을 중시했다. 이것 역시 오키프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스티글리츠의 많은 모순 중의 하나였다.

빅토리아식 여성관이라고 하지만, 나는 이런 관점이 여전히 내가 살고 있는 시대의 남성과 여성 안에도 있다고 본다. 이 모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일단은 인정해주는 게 좋겠다. 이런 게 필요하다고 인정해주고 좀 숙여주어도 좋을 듯. 왜 무엇을 위해?

 

203 형제들이 찬성하든 말든, 오키프는 스티글리츠의 연인이 되면 어떤 보상을 받으리라는 걸 알았다. 그를 통해 따뜻하고 독립적인 공간인 작업실을 얻을 터이고, 그러면 그저 만족하며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204 엘리자베스의 작업실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스티글리츠와 오키프는 연인 사이가 되었다. 지난 3년 동안 사귄 남자들과 달리 스티글리츠는 그녀의 예술이나 변덕스런 성격에 위협적이지 않았다.

나이든 남자의 장점, 또는 결혼을 전제로 하지 않는 사이의 장점.

 

205 오키프를 향한 열정을 스티글리츠는 수많은 초상사진에 담았다. 그들이 관계를 맺었던 초기 2년 동안 오키프의 사진을 200점 이상 찍었다.

 

206 “사진을 찍을 때 나는 사랑을 한다.” 오키프를 찍은 사진을 보면 스티글리츠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08 그는 자신이 이상형으로 삼았던 수동성과 아름다움, 병약함과 비극미를 갖춘 여자의 이미지를 구현해냈다. 스티글리츠의 인물 사진에서 오키프는 거의 웃지 않고 있다.

자신이 보고싶은 것을 보도록 연출. 오키프를 본 게 아니라 자기 안의 여성상을 오키프를 통해서 구현.

 

224 팽팽한 알력과 대립은 대부분 재정 문제를 끼고 일어났다. 스티글리츠는 에멀린으로부터 돈을 받는 것 외에도 주식에 투자하여 돈을 번 처남에게서도 돈을 빌린 상태였다. 설령 그이 잘 나가는 형제들이 정기적으로 화랑에 있는 그림과 사진을 사준다고 해도 그의 재정은 독립을 보장해 줄 만큼 되지 못했다. 스티글리츠의 돈 문제는 젊은 시절에도 그랬듯 여전히 복잡하게 얽혀 갈등을 일으켰다. 심지어 사진으로 사업을 시작한 첫 몇 년 동안 이후 지금까지 그는 아버지로부터 보조를 받고서도 거의 이익을 남기지 못했으면서 그저 예술가답게 그리고 신사답게 사는 것에만 혼신을 다했다. 그는 초상사진을 찍어달라는 수많은 저명인사들의 요구를 거절했고, 자신의 잡지가 아닌 다른 잡지에 자기 작품을 싣는 것도 꺼려했다. 그는 291 화랑을 예술혼의 요새이자 창조성의 사원으로 생각했다.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한 사람이었네. 작품으로 돈을 벌고, 생계를 유지하는 건 당연하다. 에멀린과의 재정에서의 균현은 에멀린이 더 중량. 이런 상태에서는 다른 이를 만나는 게 당연할 지도. 주고받기 균형이 깨어졌다. 에멀린이 더 많이 주고 있었기 때문에 버림받은 건 당연하다.

 

225 오키프는 스티글리츠의 재정 상태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고 돈을 둘러싸고 생기는 경영상의 분란에는 신경을 껐다. 그 바닥의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오키프도 그가 부자인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상대적으로 이류에 해당하는 작가의 작품을 수집하고 널리 알리는 후원자로서 놀라운 업적을 이루었다.

 

226 억세고 자의식 강했던 에멀린 과는 달리 오키프는 가냘프고 에로틱했다.

똑같은 일이 오키프에게도 일어난다. 오키프도 에멀린처럼 나이를 먹고, 더 많은 돈을 벌고, 억세고 자의식 강해졌다. 스티글리츠가 필요로 하는 연약한 여성 이미지에서 벗어났다.

 

305 서른일곱이 된 오키프는 스티글리츠로부터 처음 몇 해 동안 느꼈던 스타에 대한 동경과 경외감을 잃었다. ...“내가 요리를 안 하면 먹을 것이라곤 없다는 것과, 먹고 난 후에 내가 설거지를 안하면 저이가 하려고 들지만 ... 자신의 일은 자신이 해야한다는 신조를 가지고 있지만 마음은 그렇지만 별 쓸모가 없어요.”

문제는 그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에서 비롯된 경탄과 동경, 경외감을 스티글리츠가 계속 필요로 했다는 점. 노먼을 그걸 제공하는 여자였다. 노먼의 인생은 스티글리츠로 인해 개발되고, 그의 사후에도 계속 살아가며 변화를 거듭했을 거다. 스티글리츠는 결혼 안에서 관계, 사랑을 가꾸는 시도에 번번이 실패하고 다른 상대를 찾아 해결한다.

 

350 그녀는 오키프보다 열 여덟 살이 아래였고, 키티보다 일곱 살 아래였으며, 예순두 살의 스티글리츠보다는 무려 마흔 살이나 어렸다. 스티글리츠의 미묘하게 찡그린 입술과 억세고 희끗희끗한 수염, 사람을 꿰뚫는 듯한 날카롭고 깊은 눈을 보았을 때 그녀는 아주 잠시 내면의 음악이 솟구쳤다고 회상했다.

(62, 22)

 

364 스티글리츠는 노먼에게 언제든지 더 룸으로 오라면서 나와 함께하면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소. 본인이 그걸 선택한다면 말이오.” 라고 썼다. 노먼은 날마다 화랑에 들렀고, 수많은 질문을 해댔고, 스티글리츠의 답변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구원자 노릇, 나라도 마다하지 않았으리라.

 

366 “스티글리츠를 애인으로 삼는 것은 젊은 여자라면 누구에게나 행운이었을 것이다.” 노먼은 말했다. 성관계를 얼마나 자주 맺었느냐는 질문에 노먼은 가능한 한 자구라고 짧게 대답했고, 때로는 일주일에 여러 번 관계할 때도 있었다고 시인했다. 스티글리츠는 남편인 에드워드에게서 노먼의 나체를 찍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아내를 찍은 나체 사진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에드워드의 정신 불안증 경력은 정신분열로 발전했다. 자책과 후회의 감정이 들면 그는 침울해지고 폭력적이 되었다. 에드워드는 아내와 스티글리츠의 관계의 본질을 인식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무시하기로 했을 것이다. 오키프는 남편의 속성을 모르는 여자가 아니었다.

노먼의 남편은 이들 관계를 알고 있었을텐데 그냥 감수하기로 한 것 역시 그의 선택.

 

430 마흔 네번째 생일 즈음 셸턴에서 오키프는 우연찮게 노먼과 같이 있는 스티글리츠를 발견했다. 스티글리츠은 계속해서 노먼을 아파트로 불러와 그녀의 나체를 찍고 잠자리를 함께 해 왔던 것이다.

 

433 그녀가 증오하는 경쟁자의 사진이었지만 예술가로서 스티글리츠에게 느끼는 존경심을 감출 수는 없었다. “스티글리츠가 노먼의 사진들을 전시하는 것은 기뻐요. 그러나 그 작품들은 나를 정말로 슬프게 합니다.”

 

687 그녀는 약 70년 전 거기서 불과 100미터도 안되는 거리에 있던 스티글리츠의 집에서 자신과 위대한 사진작가가 그의 아내 에멀린에게 발각되었던 기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스티글리츠는 에멀린과의 결혼 25주년에 오키프와 살기 시작했다. 3년 후에 이혼했다. 딸 키티는 평생 신경쇠약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나는 오키프에게 노먼이 상처였던 것처럼 에멀린에게는 오키프가 상처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에멀린이 줄 수 없는 걸 오키프가 주었고, 오키프가 줄 수 없는 걸 노먼이 주었다. 스티글리츠는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그녀들이 갖고 있는 동안 취했다. 부모의 남녀관계에 끼어들어 고통을 당한 딸이 가엾지만 남녀관계는 그 남녀들의 몫으로 남겨둠이 마땅하다.

 

466 그녀는 새 펜트 하우스를 살만한 여유가 생겼다. 스티글리츠는 옮기지 않겠다고 했으나 어쨎든 자신은 가겠다고 차갑게 반응했다. 비평가 클로드 브래그던은 스티글리츠는 너무 유약해졌고, 오키프는 너무 강해졌다고 한 마디로 요약했다. 그들은 침실을 함께 썼는데 그 모습은 인위적으로나마 친밀함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셀턴과 마찬가지로 이스트 강이 바라다 보이는 창에는 커튼이 없었다. 임대료와 전화는 오키프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고, 모든 요금을 그녀가 지불했다. 이사온 지 몇 달이 지나서도 스티글리츠는 짐을 풀지 않았다. 스티글리츠의 친구들을 토요일 저녁식사에 초대할라치면 요리사 겸 가정부가 모든 일을 다 준비했다. 오키프는 더 이상 성가시게 안주인 역할을 하지 않았고, 집에 있어도 구석에 앉아 바느질이나 했다.

역할 전도. 오키프처럼 나중에 커질 수 있는 이가 많지 않다.

 

473 오키프는 스티글리츠를 동업자로 여기게 되었다. 그녀의 경력에서 빚을 진 인색한 노인 같은 사람으로 말이다. 그녀가 이러한 생각을 내면화하고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게 되자 그들의 애정도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537 스티글리츠는 713일 토요일 새벽에 세상을 떠났다. 캘러리는 노먼도 불렀다. 정신없이 달려온 노먼은 죽기 전 의식불명 상태의 스티글리츠를 보았다. 오키프가 도착한 후 노먼은 병원에 가지 않았다. 노먼은 리 스티글리츠와 함께 영구차를 탔다. 장례식장에서 그녀는 스티글리츠의 시신에 인사를 하기 위해 늘어선 사람들 뒤에 있었다. 오키프는 그녀를 완전히 모른 체 했다. 오키프는 자제하느라 긴장한 모습이었지만 노먼은 완전히 마음에 충격을 받아 울고만 있었다고 전했다. 장례식 다음 날 오키프는 아메리칸 플레이스의 절대적인 관리 감독권을 요구했다. 그녀는 뉴멕시코로 돌아갈 것이므로 노먼에게 가을까지 그녀의 물건을 치워달라고 했다. 오키프는 노먼과 스티글리츠의 관계가 정말로 혐오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노라는 통고로 결말을 지었다.

오키프는 자신의 마음가는 대로 복수했다.

 

(3)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정했던 데 영향을 준 것들을 따로 모았다. 스티글리츠의 딸 키티의 이야기가 절반이네

 

223 에멀린은 키티에게 남편의 편지를 보여줌으로써 앙갚음을 했다. 예상대로 키티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아버지에게 사랑하는 아버지. 아버지는 내가 아버지의 솔직함과 진심을 얼마나 어이없어하는 지 상상도 못할 거예요.” 스티글리츠는 분명 곧 전처가 될 아내의 감정보다는 딸아이의 시선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키티가 에멀린에게 희생당하네. 에멀린이 지혜로왔다면 키티를 두 사람의 남녀관계에 연루시키지 않고 보호할 수 있었을텐데. 그럼 정신병이 발병해 평생을 정신병원에서 보내지 않을 수 있었을지도. 이미 기질 자체가 약했는데 어떤 사건이 있어 드러난 것일테지만.

 

 

241 주변에서 아이가 태어나자, 오키프도 아이를 잦는 문제를 심사숙고했다. 스티글리츠는 키티와 거의 왕래가 없었고, 에멀린과는 공식적으로 이혼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아이를 갖는다는 생각을 반기지 않았다. 오키프는 아이를 원했지만, 아이를 낳으면 아이가 애정을 요구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아이를 데리고 그림을 지속하기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연인의 주장을 진심으로 믿었다. 스티글리츠는 갓난아이가 태어나게 되면 오키프의 역동적인 창조성을 아이에게 쏟게 될 것을 알았다. 스티글리츠는 확고한 의지를 표현했고 결국 오키프는 단념해야 했다. 그는 나보더 더 예민한 사람이다. 내 생각이 정말로 옳다고 생각하면 그를 지치게 만들곤 했다. 하지만 내가 그와 논쟁을 벌이는 일은 드물었다. 그는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동의하지 않으면 완전히 그 사람을 박살낼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오키프가 아이를 낳을 건지 결정하는데 헤라가 영향을 끼치고 있다. 남편의 의견을 듣는 부분.

 

259 스티글리츠는 딸과의 관계 때문에 괴로웠다. 키티는 6월에 밀턴 스프레이그 스턴스와 결혼식을 올렸는데 그를 초대하지 않았다.

크게 고통스러웠겠다.

 

277 여름이 시작될 무렵, 키티는 아들 밀턴 스턴스 주니어를 낳은 지 며칠 후 심한 우울증에 빠져 병원에 입원했다. 에멀린도 딸을 낳은 후에 우울증으로 고통을 겪었었다. 스티글리츠는 병원에 있는 키티를 병문안한 뒤에 일정대로 조지 호수에서 여름을 보내기로 했지만 죄책감이 들었다.

스티글리츠가 오키프와의 결혼에 지불한 비용. 그러나 발병의 원인이 꼭 두 사람의 남녀관계라고 과잉해석할 필요는 없다.

 

277 아이는 1922년 두 사람에게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스티글리치의 비서 마리와 두 살짜리 아이는 10주 동안 조지 호수에 머물렀는데 가족이 아닌 사람으로는 가장 긴 체류를 한 셈이었었다. 둘째아이까지 임신한 그녀를 머무를 수 있게 한 건 너그러운 제안이었을 것이다. 마리와 아이의 사진을 찍었다.

 

278 오키프는 스티글리츠와 마리 사이의 어떤 친밀함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감지했고 그 딸아이를 참아줄 수 없었다. 오키프가 아이 갖는 것을 거부하는 스티글리츠가 다른 계집아이에게 달콤한 말을 속삭이는 것은 분통 터지는 일이었다. 어린 계집애 때문에 늘어나는 설거지와 요리로 힘들어진 오키프는 엄마인 마리와 아이 둘 다에게 싫은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313 주치의는 오키프와 스티글리츠가 그들 관계를 공식화하면, 부모가 재결합할 수 있으리라는 키티의 망상이 줄어들 것이라고 제안했다. 오키프는 동생 캐서린에게 자기들은 키티를 위해 결혼한다고 털어놓았다.

 

314 결혼식은 19241211일에 치안판사의 사무실에서 거행되었다. 결혼식의 어떤 의례적인 형식도 갖추지 않았다. 반지도 교환하지 않았고, 결혼선서를 암송한 뒤에 사랑이니 명예니 복종이니하는 말들을 읊조리는 것을 거절했다. 피로연도 없었다. 그녀는 남편의 성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왜 내가 다른 누군가의 잘나빠진 이름을 떠맡아야 하지? 그래서 사람들이 나더러 스티글리츠 부인이라고 할 때마다 나는 오키프 양이라고 정정하곤 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들의 결혼은 키티의 회복에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키티는 1971년 죽는 날까지 정신분열증 환자로 병원에 수용되었다. 비록 에멀린이 일주일에 한 번씩 병문안을 갔지만 스티글리츠는 그 후 다시는 딸을 본 적이 없었다. 키티의 남편은 아이를 혼자 길렀다. 외할아버지와는 직접 만난 적이 없었다.

어찌보면 스티글리츠는 오키프와 결혼하면서 딸을 잃었다. 그게 오키프 탓일까? 키티의 운명, 스티글리츠의 운명이다.

 

355 가슴에 생긴 양성 멍울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아이없이 늙은 남편과 함께 사는 마흔 살의 오키프가 처음으로 자신의 유한성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경험이었다.

 

 

(4) 조지아 오키프의 자기 돌보기

 

342 수영과 오랜 산책의 날이 이어졌다.

 

344 스티글리츠가 건성건성 위로한다고 애쓰는 동안, 오키프는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그의 성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내면의 벽을 쌓고 있었다. 텍사스에서 살았던 초반에 그랬듯이 스스로를 돌보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것은 내면에서 울리는 소리를 듣는 것을 의미했다.

 

345 비록 대합조개의 형태가 여성의 음문 같기는 하지만 차분하게 억제되어 있다. 오키프의 그림이 그녀의 자화상이라면 이 대합조개는 닫혀 버린 한 여성을 보여준다. 벌어진 대합조개들은 그 형태 면에서 볼 때 불임의 자궁을 상징한다. 오키프는 나중에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나도 모르게 내 삶을, 내 인생에서 일어난 일들을 그려왔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347 방의 커다란 창문들을 꾸미지 않았다. 벽을 보랏빛 띤 회색으로 칠하고 방 분위기를 무난하게 보이기 위해 가구에 흰색 모슬린 천을 씌웠다. 센턴에서 오키프는 처음으로 불필요한 장식을 모두 없앤 그녀만의 삶의 스타일, 즉 살고 있는 방을 가능하면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놓아두는게 자신의 기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367 수술을 받고 난 후라 여전히 힘이 없는 오키프는 칼라 그림을 둘러싼 거짓말에 스트레스를 받는 데다 스물세 살짜리 젊은 여성과 불륜을 저지르는 남편을 참을 수가 없어서 잠적해 버렸다. 해변에 철썩이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잠들었고 신선한 해산물 요리를 즐겼다. 바다로 향한 넓은 산책로를 달리는 것을 사랑했다.

 

370 오키프는 조지호수의 관광명소인 프로스펙트 산을 등반했다. 스티글리츠는 심장이 아파 못 가겠다고 거절했다. 그 다음주에 그는 극심한 협심증으로 발작을 일으킨 뒤 석 주 동안이나 침대에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 했다.

늙은 그에게는 젊은 노먼과의 연애가 대단히 의미있었겠다. 자기보다 40살이나 어린 여자에게 자신이 매력적이고, 여전히 파워풀한 영향력을 끼친다는 건 매우 살맛 나는 일이었으리라. 그리고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도 어떻게 함부로 매도할 수 있겠는가? 오키프와의 사이에 있었던 것이 사랑이듯, 노먼과의 사이도 사랑이다.

 

371 그해 여름에 심란한 일이 많았는데도 오키프는 좀 더 큰 양귀비 그림 두 점을 그렸다.

심난하든 말든, 몸이 아프든 말든 작업을 꾸준히 지독히 몰두해서 해낸다.

 

374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시간을 얻으려고 고투하면서 오키프는 스티글리츠가 막무가내로 동반자 역할을 요구하는 것에 좌절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집 안에 사람이 북적이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면 나는 석 주 동안이나 그림을 그리지 못하곤 했다.” 수년 동안 오키프는 뭔가를 끝없이 요구하는 남편에 맞추기 위해 자신의 욕구를 기꺼이 포기했다. 하지만 그가 도로시 노먼과 끈끈한 관계를 맺는 것을 보고 난 뒤로는 신의를 거의 잃어버린 듯 했다. 1929년 봄에 그들은 자주 말다툼을 벌였는데 스티글리츠가 고함을 지르면 오키프가 울곤 했다.

오키프는 성미에 맞지않는 안주인노릇을 노먼 등장 이후로 집어치운다.

 

375 두 그림 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 서려 있다. 오키프는 가능하면 남서부로 돌아가 스티글리츠로부터 벗어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를 간절히 원했다.

 

379 오키프를 사로잡은 것은 사교모임이 아니었다. 땅이었다. “뉴욕에서는 결코 느끼지 못했던 것을 이곳에서 느끼고 있어요. 마침내 내게 딱 맞는 곳에 돌아온 느낌이예요. 내 자신으로 돌아온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곳이 좋아요.”

 

381 오키프는 그 여름에 그렸던 그림들에 흡족했다. “뉴멕시코에 있다는 것 자체가 작업의 반절을 했다는 것이다.”

 

395 어쨌든 타오스에서 몇 달 간 있었던 것은 그녀에게 신선한 힘을 불어넣어주었다. 스티글리츠는 그런 그녀를 감지했고, 카메라를 꺼내들어 그녀의 인물 사진 연작에 작품을 함께 적었다. 이번에 찍은 작품 속에서 오키프는 산선수전을 다 겪고 난 뒤의 탈속함을 보였다. 그녀의 표정은 독립적이고 장난기가 어려 있으면서 원숙했다. 그녀는 새롭게 얻은 독립의 상징인 소중한 차 옆에 서 있었다. 그녀는 큰 도시 뉴욕에서도 운전할 수 있도록 부지런히 운전 연습을 했다. “내가 운전을 완전하게 할 줄 알게 되면 세상 그 어디든 자유롭게 돌아다닐 거예요.”

저런 곳에 살아야 한다. / 운전의 의미 - 독립

 

413 일에 파묻히는 게 좋을 거예요. 일이 전부죠. 정말로 일이 전부예요.

일은 노먼과 스티글리츠의 연애를 견디는 힘, 보약

 

441 오키프는 혼자 자고 먹으면서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여동생의 아파트로 옮겼다. 그리고 스티글리츠의 방문을 허락하지 않았다. 오키프의 심장은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442 오키프의 증상은 '신경성 노이로제'라는 진단을 받았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두 달 동안 오키프는 이스트 강이 내다보이는 창이 있는 작은 방에 갇혀 지냈다. 주치의는 스티글리츠의 면회도 금지시켰다. 스티글리츠는 '정말 끔찍한 일이다.'고 고백했다. 그는 신경쇠약에 걸린 오키프에게서 역시 신경쇠약에 걸려 크레이그 하우스에 유폐된 딸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2달동안 정신병원에 입원했었다. 고통이 컸다. 말년에 보여준 오키프의 행적은 '이 여자는 타고나길 씩씩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자신의 경력을 스스로 관리하고, 사막에서 홀로 살았고, 가족이나 고용인들과 인정으로 얽히지 않았다. 유언장에도 조카들은 언급되지 않았고 마지막 10년간 옆에 있어준 이에게 재산을 물려주었다. 그런데 두 달 간 입원했었다는 걸 읽으면 그녀 역시 여성으로서 고통을 당했고, 거기서 벗어나오는 발버둥을 통해 강해진 걸 알 수 있다.

 

446 조지 호수에서 오키프는 햇볕을 쬐며 가만히 누워 가정부인 마거릿 프로서에게 식사를 가져오도록 했다. 그녀는 몸무게가 64킬로에 육박하도록 먹어댔고, 자신의 속옷이 더 이상 맞지 않자 스티슬리츠이 속옷을 입기 시작했다. 해가 뜨면 일어나던 평소의 모습과 달리 아침 10시까지 잤다.

우울증

 

453 운전하며 복숭아와 크림이 얹힌 파르페같은 산들을 지나자 세로 페더널이라 부르는 푸른 메사와 마주하고 있는 고원이 나왔다. 그곳은 백악질의 헤메스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거기서 그녀는 집처럼 편안함을 느꼈다. 지질층은 텍사스에서 그녀가 좋아했던 팰러두로캐니언의 색조를 띠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자신이 자연이 주는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광범위한 색에 자극받고 있음을 알았다.

언제나 위안은 자연

 

455 미래가 분명치는 않았으나 오키프는 1933년에 타오스로 이사를 결심한다. "나는 내가 많은 사람들 가운데 사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걸 안다. 그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나를 지치게 한다."

타오스는 줄리아 카메론이 <아티스트 웨이> 책에서 거론한 장소이기도 하다.

 

460 그해에 만든 작품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녀가 예전에 지녔던 힘과 누구도 예측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개척하던 예술 의지를 되찾았다는 것이다.

 

 

(5) 화가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29 조지아는 자신의 시각적 기억이 그녀가 걸음마를 떼기 전부터 형성되었으며, 갓난아기 적 누비이불의 세세한 부분과 불빛의 밝기를 기억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어머니의 친구가 입혀 준 드레스와 옷장에 그려진 팬지꽃의 세부까지 기억했다. 사물의 형상에 관한 조지아의 상서로운 친화력이 즉시 미술로 옮겨지지는 않았다.

시각적 기억력이 뛰어났다.

 

29 11살 때 처음 미술 교육을 받기 시작

홈스쿨을 하면서 방문교사처럼 배운 듯. 오키프의 부모(특히 엄마 이다가 주도하여) 자식들에게 모두 미술 교육을 시킴

 

30 사라 만은 오키프네 딸들에게 프랑 시리즈 책인 <미술교육 교재>를 모사하도록 가르쳤다.

 

31 조지아는 열두 살을 넘기고 얼마 안 있어 자신이 앞으로 무슨 일을 할지 결정했다. “나는 예술가가 될 거야조지아가 자신의 입장을 정하자, 가족들은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세세한 부분들까지 물어왔다.

조지아는 자신의 생의 감각, 목표를 일찍 알았다.

 

33 조지아의 부모는 80달러의 학비에 유화, 도자기, 테피스트리, 크레용으로 하는 미술수업을 위해 추가로 20달러를 더 냈다.

중고등학교 때도 부모님이 조지아에게 미술교육을 시키고 있네.

 

45 오키프네 형편을 좀 알고 있던 윌리스 교장은 조지아의 부모에게 그녀가 발군의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격찬하는 편지를 썼다. 윌리스 선생은 조지아가 미술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대학에 보내야 한다고 부모를 고무시켰다. 여름이 막바지에 이르자 조지아의 부모는 궁핍한 재정 상황에도 불구하고, 윌리스 선생의 조언에 따랐다. 그들은 조지아를 시카고 예술대학에 입학시켰다.

미술대학에 갔다. 학교 교사의 추천을 받아들여 그녀의 부모가 딸의 미대 진학을 추진

 

90 비록 오키프가 어머니와 사이좋게 지내는 일은 드물었지만, 지금은 불평 따위를 표현하기 힘든 때였다. 그해 여름 내내 오키프는 먼지를 쓸고 닦고, 집안 살림을 하고, 식사만 제공하는 하숙생들을 위해 요리를 하고, 동생들을 돌보았다. ..스물한 번째 생일 이틀 전, 오키프는 가족을 돕기 위해 일자리를 구하러 시카고로 가는 기차를 탔다. 교사자격증이 없어서 상업 미술이 그녀에겐 최선의 선택이었다. 오키프는 다양한 광고 대행사들에게 신문과 잡지 광고를 위해 레이스와 자수의 도안을 그리는 일거리들을 찾았다. 1908년 당신 일하는 여자들은 거창한 직업적 목표를 추구하지는 않았다. 천한 일은 주로 중하층 계급이나 기울어 가는 환경의 여성들이 맡았다. 그런 일은 혹독하고 품위와는 거리가 멀었는데 그렇다고 특별히 돈벌이가 되지도 않았다.

21살에 생계를 위해 삽화가로 취직해서 2년 일한다. 현재의 나에게는 취지해서 일하는게 매우 당연한 일인데 저 시대 여성에게는, 게대가 중산층 교육을 받은 오키프에게는 안 당연했을 수도 있구나. 어릴 때 농장에서 살면서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91 작업 분량에 따라 돈이 지급되었기 때문에 오키프는 자신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시간적 여력이 거의 없었다. 그 후 2년 동안 조지아는 꾸준히 애쓰며 일했지만 형편은 비참했다. 당시의 조지아에 대해 한 친구는 이렇게 회고했다. “그림은 조지아의 열정의 한복판에 남아 있었지만, 그림은 전부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 그림에 전념할 수 없게 된 이후로 그녀는 붓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녀는 그림에 대한 욕망을 불러일으킨다며 불감이나 테레빈유 냄새를 견딜 수 없어했다.”

2년 간 삽화를 그리며 지낸 이력이 있었구나.

 

99 오키프는 다우의 이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다우가 고수하는 신념의 골자는 미적인 방식으로 공간을 채우라는 것, 이것이 바로 관심을 끄는 것이었다. 결국 모든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그러니까 컵 하나와 컵 받침 하나를 살 때조차 선택을 해야 한다. 이 시기에 나는 유화 물감과 수채화 물감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기술을 갖게 되었다. 다우는 나에게 그것을 가지고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주었다.”

 

103 오키프는 여동생들에게 자신의 수업에 들어오라고 부추겼는데, 동생 애니타가 진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애니타는 결국 먹고 사는 데 좀 더 실용적인 간호사라는 직업을 선택했다. 이다는 자신이 가족 중에서 그림에 가장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녀 역시 병든 부모님을 보살피면서 간호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오키프네 자식들 모두에게 절대적인 관심사였고 화가는 그다지 안정적인 삶이 아니었다. 이 시기에 자매들이 내린 결정에 대해 오키프는 이렇게 한 마디 했다. 내가 대단히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재주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엄청나게 머리 아프고 정말로 정말로 고된 작업이다.”

놀랍게도 오키프가 어릴 때, 형제들 중에서 가장 재능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더 재능있는 형제자매가 있었지만 오키프만이 화가가 되기로 결정, 선택했고, 그 선택에 모든 걸 쏟아부어 가꾸었다.

137 오키프는 자신의 아이디어나 방식을 검열하지 않고 싼 종이에 빠르게 작업하면서 수십 장의 소묘를 완성했다. 그 중에 많은 작품들이 추상의 경계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대가의 추상이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게 아니라 이런 습작의 시절을 반드시 겪어낸 뒤에야 가능하다. 그런 과정을 생략하려 하고 있진 않은지.

 

246 스티글리츠와 그의 많은 동료들은 남자들은 분석적이고 과학적인 반면에 여자들은 자연에 좀 더 가까운 존재이자 직관적이며 심지어 원시적이라고 이상화한 것이다. 비평가들은 그녀가 늙어가는 거장에게 활기를 되찾아 주는 역할을 했다고 평하기에 바빴다.

 

248 오키프는 그가 자신의 미술을 세상에 알리기 위한 광고활동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걸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273 전시회(6년만의 오키프 개인전)가 있은 지 일주일 쯤 되었을 때 오키프는 감기와 심한 우울증으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점점 더 그녀는 자신의 몸과 성에 대한 언급이 진지한 예술가로서 자신의 신뢰성을 해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했다. 그녀는 스티글리츠가 그런 평가를 부추기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곱절로 힘이 빠졌다.

 

360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명성을 쌓아가는데 점점 뚜렷한 진전을 보이고 있다. 또한 그녀는 누가 뭐라고 하든 동요하지 않고 수없이 오고가는 말들에 신경쓰지 않고, 자신의 이력을 쌓기 시작하던 때에 명확하게 지향했던 이상을 향해 차분히 전진하고 있는 듯 하다.

 

363 화룻밤에 화가를 만들 수 있다는 관념, 천재만이 화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그릇된 것이다. 화가들은 경험이라는 어려운 시련의 도장에서 훈련된 존재들이다.

685 오키프는 눈이 거의 안 보이기는 했지만 1980년대 초에는 여전히 촉각에 의지해서 도자기를 만들며 작업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내가 오키프의 그림을 한 점 갖고 싶어진 이유다. 화가가 시력을 잃어버린 뒤에도 창조적인 작업을 했다. 그리는 데서 도자기 작업을 함으로써. 그리고 나는 집에 그녀의 해바라기 그림을 갖고 있다. 예술의 전당 아트샵에서 샀다. 이 그림은 스티글리츠가 찍었던 누드 사진 속의 젊고 병약해 보이는 여자가 아니다. 작열하는 태양 속에서 머플러를 두르고 그림을 그리는 오키프의 시절에 그린 것이다.

 

 

(6) 진실에 진실한 작가

 

140 밤새도록 작업을 하고 나서 오키프는 그 결과물이 여성스럽다고 느꼈지만 그것이 함축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한 여자의 감정이다. 어떤 방식을 통하여 나를 만족시키는 감정인 것이다. 거기에는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을 말하는 것은 매우 뻔뻔스러운 것이다.”

 

68 1922. 그녀는 누군가의 평가에 좌지우지되지 않고 그리고 싶은 대로 작업하겠노라고 결심하면서 열정적으로 그려 대던 예전의 에너지를 완전히 회복했다. “그것이 얼마나 좋은 지, 나쁜 지 이도 저도 아닌지 내가 결정한다. 비평가들은 그 후에 그들 좋을 대로 쓸 수 있는 거다. 나 자신은 이미 결정을 내렸고, 그러니 감언이설이든 비평이든 모든 것은 헛되며, 나는 완전히 자유롭다.”

 

271 오키프는 결구 자신의 작품이 육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남자들의 작품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상태의 표현임을 이해했다.

 

271 그러나 스티글리츠는 성이 팔린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273 영혼의 목소리를 솔직하게 고백함으로써 스스로를 해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녀 자신의 세계 안에서 예술을 해야 한다는 명분을 진전시켰다.

 

290 오키프의 양식은 그녀만의 것이었다. 오키프의 작품은 어느 누구의 작품을 연상하거나 모방하면서 나온 부수적인 파생물이 아니었다. 이곳 미국에서 다른 어떤 여자도 이토록 깊이 개인적인 언어를 창조하지 못했다.

 

316 만일 내가 다른 사람들, 특히 권위 있는 사람들이 무어라 말할지 생각하느라 하던 일을 멈췄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319 오키프의 예술이 한층 성숙해지자 그녀는 자신의 작품이 그 남자들의 작품과 사실상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남자들의 대열에 합류하기보다는 오히려 점점 더 자신의 그림에 예쁜 색조를 활용함으로써 고유의 차별성을 찾기로 했다. ..현대 미술에서 꽃은 감상적이거나 너무 상투적이고 진부한 여성성으로 치부될 수 있는 위험한 소재였다. 오키프의 꽃은 특별히 여성적인 강렬함을 지니고 있는데..대개 남성과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보여주는 듯 하다라고 들었다. 오키프는 전혀 감상적이지 않은 도구인 카메라 렌즈에 기대어 꽃들의 명암을 강화하고 구체화했다.

 

320 오키프는 꽃이 지닌 본연의 색채에 끌렸다. 모네처럼 그녀는 더 많은 시간을 꽃들의 미묘하고 빛나는 색채를 연구하는데 전념하기 위해 조지호수에서 자줏빛 피튜니아 꽃밭을 가꾸며 정원에서 소일했다. 그녀가 확대한 꽃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1924년 여름에 자신의 꽃들을 심으면서부터다.

 

321 그녀는 예쁘다는 말이 여성적인 창의석을 연상시킨다는 점 때문에 비웃음을 당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대응은 예쁜 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예쁘다라는 말을 열등한 것의 범주에 넣어 버리는 남자들의 억측을 전복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여성이 그들의 예술을 동등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참된 방식은 여성 자신의 감각과 경험, 배경에 따라 다르게 예술을 하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바로 그런 다름이 지난 40년에 걸쳐 예술의 역사를 다시 쓰려는 투쟁의 장이었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일부 비평가들이 천진난만하기 짝이 없다거나 소녀 취향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오키프의 꽃 그림들은 장르를 서열화하는 진부한 사고를 깨부수는 수중 폭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얄궂게도 오키프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언어(즉 꽃이나 파스텔 색조)를 찾으려고 투쟁한 방식은 정확히 스티글리츠가 가장 비아냥 거렸던 미학적 결정이었다. ..결국 오키프는 그의 간섭을 참을 수 없게 되었다.

 

335 사람들은 꽃을 보면 수많은 연상을 한다. 손을 내밀어 만져 보거나 냄새를 맡아보기 위해 몸을 기울인다. 혹은 거의 아무 생각없이 입술에 대보거나 누군가를 기쁘게 해 주려고 선물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로 꽃 한 송이를 보기 위해 시간을 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는 각각의 꽃들이 내게 어떤 존재인가를 그렸고, 다른 사람들도 내가 볼 수 있는 것을 볼 수 있도록 충분히 크게 그렸다.

 

338 많은 일들을 겪은 여자, 삶을 표현하는데 색과 선을 쓰는 여자는 아마도 남자가 할 수 없는 무언가를 들려줄 지도 모릅니다. 나는 오직 여자만이 탐험할 수 있는 여자에 대해 탐사되지 않은 미지의 어떤 것이 있다고 느낍니다.

 

532 그녀의 작업에서 그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거대한 꽃그림들, 뉴욕의 도시 풍경과 뉴멕시코의 풍경화, 푹신한 산 그림과 떠 있는 뼈들을 그린 그림들이 나열된 1915년부터 1945년까지 쉰 일곱 점의 작품을 되돌아보면서 오키프는 자신이 후퇴했던 시절이 있었음을 알아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스티글리츠의 만족을 위해 그림을 그려왔던 것이다. 스티글리츠와 살기 전에 그린 초기 추상화만이 진실로 그녀의 것이었다.

녀가 말한 대로 오키프는 미술계의 중심에 서 있는 스티글리츠를 통해 도움을 받았다. 그의 정부라는 추문을 견뎠다. 그런데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의 꿈, 원하는 것에 전부를 건 게 중요하다. 그녀는 어쨎든 계속해서 자신의 길에 에너지를 투입했고, 산출을 냈다. 그것을 관리한하는 데 매우 엄격했다. 그녀의 마음에 안 드는 작품은 모두 없앴다.

 

535 그들은 오키프가 처음으로 그렸던 꽃 그림들에 대해 스티글리츠의 비난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 그림은 바로 자신들에게 재정적으로 안정을 가져다 준 작품이었다. 그렇게 그들 사이의 일종의 치유가 이루어졌다. 그래서 떠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624 오키프는 성공하는데 자기 훈련이 필요했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이 되고 싶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결정하면 당신은 그 사람에 이릅니다. 그건 깔끔함이 몸에 배는 것과 같은 거예요."

모든 사람이 이렇지는 않을 듯.

 

 

 

3.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서문


너무 장황하므로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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