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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 21일 18시 25분 등록

<프리다 칼로> 헤이든 헤레라 지음. 김정아 옮김. 민음사.

 

1. 저자에 대하여

 

프리다 칼로 (Frida Kahlo)

 

190776일 멕시코 코요아칸에서 태어났다. 일곱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오른쪽 다리르 절게 되었고, 열여덟 살에는 (1925) 타고 가던 버스를 전차가 들이받는 사고로 척추와 오른쪽 다리, 자궁을 크게 다쳐 일생 동안 서른다섯 차례나 수술을 받아야 했다. 이 사고의 후유증으로 그녀는 그토록 원하던 자기 아이를 평생 갖지 못했다. 사고가 남긴 상흔과 그로 인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은 평생에 걸쳐 그녀의 삶 뿐 아니라 예술 세계에도 큰 영향을 끼쳐 작품의 주요 주제가 되었다. 입원해 있는 동안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929년 평생의 연인이자 정치적 동지 화가 디에고 리베라와 결혼했고, 이후 별거와 이혼(1939), 재결합(1941)을 거듭했다. 1939년 프랑스에서 열린 맥시코전을 통해 국제적인 화가로 성장했다. 앙드레 브르통을 비롯하여 피카소와 칸딘스키, 뒤샹 등으로부터 초현실주의 화가로 인정받았으나, 정작 칼로 자신은 초현실주의와의 관련성을 부인하고 멕시코적 뿌리와 정체성을 고집했다. 그녀의 삶은 매우 연극적이었고 남들 눈에 비친자기 이미지를 관리하는 데 능했으며, 사회적 관습을 존중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리베라부터 트로츠키에 이르기까지 성별을 초월해 사랑을 주고 받았다. 많은 작품 속의 그녀는 피 흘리고 상처받은 모습이나, 시선은 곧고 투명하며 강한 빛을 발한다. 그녀는 굳은 의지로 고통을 이겨나갔으며 나아가 그것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1954713일 사망하기 며칠 전까지도 그녀는 붓을 놓지 않았다. 68혁명 이후 대두된 페미니즘 운동은 그녀의 작품과 인생이 새롭게 조명받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헤이든 헤레라

 

미술사학자, 큐레이터, 폭넓은 강연활동으로 이름났다. 뉴욕대에서 라틴아메리카 미술을 가르쳤으며, 구겐하임 장학금을 받았다. 활발한 기고하며 뉴욕에 살고 있다. 주요 저서 <프리다 칼로의 그림들>,<메리 프랭크와 마티스>,<아실 코기 평전> 등이 있다.

 

이 책은 프리다 칼로를 다룬 전기와 소설 가운데 가장 권위 있는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2002년 미국 미라맥스사에서 영화로 제작되었다.

    

 

2. 내가 저자라면

 

1) 뼈대와 목차

 

연대순으로 서술된다. 소제목은 프리다가 그리 그림의 제목일 때가 많다. 프리다의 그림은 그의 전기이므로.

 

2) 장점 및 보완점

 

프리다 칼로의 전기를 산 건 표지의 독특한 그림 때문이었다. 눈물 흘리고, 전신에 보조기를 달고, 뼈가 부서지고, 마치 해부도를 보듯이 투시되고, 일자눈썹에 동그랗고 예쁜 가슴을 가진 검은 머리 여자다. 붉은 전기는 너무 두꺼웠고 5년 동안 나의 서가에서 잠을 자는 동안 나는 두 번의 이사를 했다.

 

어릴 때 앓았던 소아마비를 앓아 오른쪽 다리를 절었고, 타고 가던 버스를 전차가 들이받는 사고를 당해 척추와 오른쪽 다리, 자궁을 크게 다쳐 일생동안 서른 다섯 차례나 수술을 받았고, 사고의 후유증으로 아이를 자꾸 유산, 결국 엄마가 될 수 없었던 그녀가 고통을 어찌 처리하는 지가 사악한 관전 포인트다. 읽어 가다보니 아이를 원하지만 건강 때문에 반복유산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은 남편이었던 디에고 리베라와의 관계에서 왔더라. 자유연애주의자인 남편의 여자들이 프리다에게 가장 큰 고통거리였다. 모욕감, 수치심이 큰데 프리다 칼로는 많은 여자들을 위로하는 그림을 그려냈다. 그림 속의 프리다는 눈물 흘리고, 동맥이 잘리고, 심장이 파내지고, 화살을 맞는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낳은 사람이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그림을 그리는 게 고통을 통과하는 것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3) 감동적인 장절

 

(1) 그림을 그리는 게 프리다에게 어떻게 구원을 주었는 지를 말해주는 구절들을 읽으면 자신의 고통에 대해 쓰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진실에 진실하다면 그건 치유를 줄 터이다.

 

41 “나는 나만의 현실을 그린다. 나는 그림을 그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림을 그린다. 나는 언제나 별 생각없이 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을 그린다. 이것이 내가 아는 전부다.”

 

41 프리다라는 개인이 가진 이미지가 여성들에게 주는 지극히 사적이고 여성적인 느낌과 그녀의 예술적 독자성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예술에 있어서 프리다는 디에고에게 경쟁심도 존경심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더 나은 화가라고 평가하는 비평가도 적지 않다.

 

103 프리다의 첫 자화상은 그녀의 첫 작품으로, 알레한드로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그녀는 1926년 늦여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상처가 덧나서 코요아칸 집에 갇혀 지낼 때였다. 그녀의 수많은 자화상이 그렇듯이 이 그림 역시 사랑의 징표였다. 그녀는 이것으로 애인을 붙잡아 두고 싶어했다. 편지에 이렇게 썼다. “며칠 내로 초상화가 배달될 거예요. 액자에 넣지 못해 미안해요. 나를 보듯 볼 수 있게 낮은 곳에 걸어 주길.”

이렇듯 최초의 <자화상>은 애원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프리다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고 느꼈을 때 작품을 통해 애정 공세를 펼치곤 했다.

프리다의 흑역사로군. 흑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공감하는 수많은 여자들

 

120 프리다의 판타지가 자기라는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자기에 대해서 깊이 천착했던 것만은 틀림없다. 의사를 꿈꾸던 소녀가 그림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녀에게 그림은 심리적 외과 수술이었다. 프리다는 말한다. 나를 그린 것은 혼자일 때가 많았기 때문이고, 내가 가장 잘 아는 소재가 나이기 때문이다.” 사고가 내 인생 행로를 바꾸어 놓은 후 나는 수많은 장애로 인해 정상적인 소망을 이룰 수 없었고, 이루지 못한 소망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정상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다.”

 

121 그림은 프리다 칼로의 생존을 위한 투쟁인 동시에 자기 창조였다. 삶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림에서도 자기 연출은 세계를 통제하는 수단이었다.

 

123 프리다의 그림에는 강인함과 고통이 공존한다. 그녀가 상처받았거나 울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릴 때마다 자신의 정신적 상처와 육체적 상처를 반복하여 늘어놓던 그녀의 편지가 떠오른다. 둘 다 상대의 관심을 끌려는 절규다. 그러나 아무리 고통스러운 자화상이라도 켤코 감상이나 자기 연민을 찾아볼 수 없다. 여왕 같은 몸가짐과 금욕적인 표정에서는 인내하는 자 특유의 위엄과 결의가 나타난다. 이렇듯 그녀의 자화상에서 드러나는 독특한 호소력과 강인함은 솔직함과 자기연출을 적절하게 혼합한 결과다.

 

 

197 ‘헨리 포드 병원에는 19327월이라고만 쓰여 있다. 이 그림은 프리다 칼로를 당대의 가장 독창적인 화가로 만들어준 끔찍한 자화상 연작 중 첫 번째 작품이다. 작품의 질이나 표현력에 있어서 그녀가 이전에 그렸던 모든 작품을 능가한다. 리베라는 유산 이후 그녀의 그림에 나타난 변화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프리다는 미술 사상 전례 없는 걸작들을 연달아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 작품들은 진리, 현실, 잔인함, 고통이라는 영원한 여성적 가치를 보여준다. 프리다가 디트로이트에 머물던 때만큼 고통에 찬 시를 화폭에 담았던 여성은 이제껏 아무도 없었다.” ...프리다는 병원 침대에 나체로 누워서 피를 흘리고 있다. 굵은 눈물이 뺨 위로 흐르고 아기를 가져서 배가 나와 있다. 자기 몸을 미화시키지 않는 것은 프리다의 특징이다. 그림의 육체는 여성이 바라본 누드이지 남성의 눈으로 이상화된 누드가 아니다. 그녀의 불룩한 배 위에는 여섯 개의 핏줄 같은 붉은 줄이 있는데, 유산할 당시의 그녀의 감정을 상징하는 사물들이 줄 끝에 매달려 있다. 태아, 유산으로 흘린 핏물 위에 아기를 놓았고, 남성의 생식기를 그려넣었다. 그녀는 아기가 작은 디에고이길 원했다. 태아를 포함하여 모성의 실패를 상징하는 모든 물체는 실제 크기와 상관없이 프리다와 거의 같은 크기로 그려졌다. 프리다에 따르면 분홍색 몸통과 받침은 나름대로 여성의 내장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다친 등뼈..척추 측만..상황을 바로잡고 싶었던 프리다는 유산의 주요 원인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정확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의학 서적의 골반 도판을 그대로 본떠 그렸다...달팽이가 더딘 유산 과정을 나타낸다고 언젠가 프리다는 설명했다. 유사은 달팽이처럼 부드럽고, 감춰져 있으면서 동시에 열려 있는 것이었다. ..줄기가 돌출된 섬뜩한 연보라색 난초는 적출된 자궁처럼 보인다. ..프리다의 병원 침대는 푸른 하늘 아래 광막한 들판 위에 떠 있다. 그녀는 고독과 외로움을 표현하기 위해서 침대 아래 지면을 흙색으로 칠했다고 말해 놓고...이불이 없는 채로 시뢰에 놓여 있는 침대는 그녀가 무력하게 노출되어 있는 느낌을 자아낸다. 많은 입원 환자들이 겪는 느낌이다. 픨다는 마음 붙일 곳 없이 떠다니고, 주위로부터 단절되어 있으며, 공허하고 무방비한 상태다.

199 우울증과 싸우는 프리다를 돕기 위해 뤼시엔고 디에고는 힘을 합해 그녀가 다른 일에 몰두하게 하려고 했으며, 기운을 차리는 즉시 아프트 밖으로 데리고 나가려고 했다.

 

200 팔레트를 들고 있는 세 번째 팔이 있다. 아마도 그림이 모성의 실패에 대한 해독제라는 것, 프리다에게 예술작품을 낳는 일은 아이를 낳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리라. 프리다는 (디에고의 계산에 따르면) 그 후로도 세 번이나 출산을 시도했다. 그녀는 남편이 더 이상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이를 가지면 그에 대한 영향력이 커질 거라고 확신했다.

 

202 그림은 불임이라는 강박관념에 대한 최고의 해독제였다. (불임은 그녀의 수많은 자화상의 배경으로 사용되는 사막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내 그림은 고통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림은 삶에 의해 완성된다. 나는 세 아이를 잃었다. 그림이 이 모든 것을 대신해 주었다. 일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255 프리다는 산앙헬로 돌아오고 몇 달 동안 디에고의 동지 겸 내조자로 입지를 굳혔다. 그의 응석을 받아주고 그가 아플 때 간호해 주었으며, 그와 싸우고 그에게 벌을 주고 그를 사랑했다. 그 또한 그녀를 후원했고 그녀의 재능을 자랑스러워했으며 그녀의 의견을 존중했고 그녀를 사랑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바람을 피웠다. 이제는 프리다도 바람을 피웠다. 프리다가 낮에 차를 사용하는 것은 남자 또는 여자 애인을 만나러 간다는 뜻이었다.

 

프리다는 국립예비학교 마지막 해에 동성애에 입문했고, 그 일로 큰 상처를 받았다. 그녀의 동성애는 디에고의 자유분방한 사상 세계에 발을 들인 후에 다시 나타났다. 여자 간의 사랑이 흔하고 용인되는 세계였다. 남자들은 작은집()’을 소유했고, 여자는 여자를 소유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프리다는 자신의 양성애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고 디에고도 프리다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273 브로통

이보다 더 철저하게 여성적인 예술은 없다. 최대한의 유혹을 위해서라면 극단적인 순수함과 사악함 사이를 기꺼이 오간다. 프리다 칼로의 예술은 폭탄에 두른 리본이다.”

 

290 어쩌면 <유모와 나><나의 탄생>과 마찬가지로 이중적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프리다의 한쪽이 다른 한쪽에 양분을 제공한다. 어른 프리다의 자아의 핵심이 이중성이라고 할 때 아기 프리다는 그녀의 생명을 유지하는 반쪽이다.

 

356 <두 명의 프리다>는 자기 양육의 이미지다. 프리다는 자기를 위로하고 자기를 보호하고 자기를 강하게 만든다. 다른 종류의 이중성도 작동된다. 프리다는 몇 시간씩 거울에 비친 자신의 영상을 음미하며 그림으로 재현했고, 그러는 동안 자기가 두 가지 정체성(관찰하는 자이자 관찰당하는 자, 내면에서 느껴지는 자아이자 외부에서 보이는 자아)를 가지고 있다는 느낌은 점점 강해졌을 것이다.

 

402 프리다는 1944년 한 비평가에게 자기가 그림을 그릴 수 밖에 없는 세 가지 이유에 관해 얘기했다. 첫째는 어린 시절 사고 당시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를 생생하게 기억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녀가 탄생과 죽음, 그리고 생명을 이끄는 끈을 생각하기 때문이고, 셋째는 어머니가 되기를 소망하기 때문이다.

 

488 프리다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심리적 수술이다. 자기의 영혼을 절개하고 그 안을 들여다보기 때문이다.

 

(2) 프리다 칼로의 여자로서의 고통들이 생생하다. 프리다가 어떻게 균형을 맞추어 나갔는지 궁금했다, 마지막 척추 접합 수술을 받고 입원해서 죽어가면서도 남편의 여자에게 반응해 자살하려 했던, 초연할 수 없었던 여자의 모습은 결혼 안에서 힘들어하는 초상을 보여준다. 그녀는 창조적인 작업(그림)과 남편의 방식으로 다양한 연애관계를 가짐으로써 균형을 맞추려 했다.

 

102 일생동안 프리다는 사랑하는 사람을 붙잡아 두기 위해 자신의 지성과 매력과 고통을 이용했다. 알레한드로의 경우에도 프리다는 사랑을 되찾기 위해 몇 달 동안 싸우면서 눈물로 얼룩진 편지를 보냈다.

 

133 여자를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는 누가 봐도 추남이었지만 철가루를 끌어당기는 자석처럼 자연스러운 여유를 가지고 여자를 끌었다. 사실상 괴물 같은 외모 자체가 그의 매력이었다. (그의 못생긴 외모는 야수 옆에서 미녀 역을 하고 싶어하는 여자에게 완벽한 조건이 되었다.) 그러나 더 큰 매력은 그의 개성이었다. 그는 재기와 활력과 매력을 갖춘 특별한 남자, 개구리 왕자였다. 그는 다정했고 굉장히 육감적이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점은 그가 유명하다는 것, 그리고 명성에 끌리는 여자들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리베라가 쫒아다닌 여자보다 리베라를 쫓아다니는 여자가 더 많았다.

나이, 외모 보다 개성, 그리고 명성 때문에 좋아함. 매우 유용한 무기.

 

멕시코 여자든 외국 여자든 디에고를 좋아하는 이유는 디에고가 여자들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는 여자들이 여러 면에서 남자보다 우수하다고 (예민하고 보다 평화를 사랑하고, 보다 품위가 있다고) 생각했다. “남성들은 원래 야만인입니다. 오늘날까지도 야만인입니다. 역사를 보면, 최초의 진보를 이룬 것은 여성입니다. 남성들은 싸움하고 사냥하는 짐승과 다름없는 상태를 더 좋아했습니다. 여성들은 집에서 예술을 익히고 산업을 일으켰습니다. 최초로 별을 관찰하고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습니다...이 세상에 여성에게 잘 보이려는 (남성의) 소망에서 나오지 않은 발명품이 있다면 내 앞에 가져와 보라고 하세요.”

 

이성에 대한 태도가 보통 마초와 이토록 다른 것은 유럽 체류 경험 때문인 것 같다. 어쨎든 그는 여자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고, 여성의 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이런 그의 태도는 그 당시, 특히 멕시코의 대부분의 여자들에게 흔치 않은 기쁨을 선사했다.

 

물론 리베라는 여성의 육체 또한 높이 평가했다. 그는 아름다움에 대한 열정을 지녔으며 시각적 쾌락에 엄청나게 탐닉했다. 디에고의 모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육체를 그의 눈과 몸에 바친다는 의미였다. 프리다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바람둥이라는 평판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매력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예로부터 여자들이 간직해온 자기 기만적인 소망(나는 그의 사랑을 붙잡고 지키는 사람이 될 것이다. 나에 대한 사랑은 특별할 것이다)의 노예가 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착각을 많은 여자들이 한다. 결국 그는 생긴 대로, 살아오던 대로 산다. 남자가 잘못한 게 아니라, 여자가 착각한 것.

 

151 프리다는 결혼 초기에는 별로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디에고와의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일이었다. 디에고가 과로로 병이 났던 9월에는 그녀는 의사의 처방을 열심히 따랐고, 남편이 의사의 지시를 따르게 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디에고가 회복된 후에는 말도 안 되는 굴욕적 당재판에거 스를 응원한 정신적인 지지자가 되었으며 그가 당에서 축출될 때는 함께 당에서 나왔다. 디에고의 초인적인 작업일정도 프리다의 예술적 야망을 자극하지 못했다. 천재의 엯할은 남편에게 맡기고 어린 아내 역할에 만족할 따름이었다. 그녀에게 남편의 기분을 맞추는 방법을 알려준 건 루페 마린이었다. 어느 날 루페가 찾아와서 집 안을 둘러보더니 시장에서 냄비와 프라이팬을 사오라고 하고는 디에고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답례로 프리다는 초상화를 그려주었다. 디에고의 점심을 챙기는 법도 루페에게 배웠다.

프리다는 결혼에 만족해서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자기 작업을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현재로서 매우 행복하기 때문이다. 결혼 초기의 내 모습과 매우 비슷하다. 내 개인적인 목표나 직업적인 것은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었다. 스스로에 의해서. 참 이상하기도 하지.

 

160 프리다가 테우아나 의상을 선택한 것은 멕시코주의를 받아들인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다. 즉 디에고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서였다. 디에고는 테우아나 의상을 좋아했고, 종종 테우안테펙을 찾아가 사람들이 일하고 노는 모습을 그렸다. 프리다에게 구혼하는 와중에도 테우아나의 아리따운 처녀와 사귄다는 소문이 있었다.

에스파냐 인디언과 포르투갈계 유대인의 혈통을 물려받은 디에고는 프리다 가계의 인디언의 요소를 부각시키는 것을 좋아했으며, 그녀가 진정하고 순수하고 원시적이라고 칭송했다.

 

160 사실 프리다는 부르주아 가정에서 자라난 도시 소녀였고, 후에는 상류 보헤미안으로서 멕스코 인디언의 소박한 삶과는 무관한 환경에서 살아왔다. 원시의 가면 덕분에 여성들은 가혹한 부르주아 도덕률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물론 정치적인 의미도 있었다. 토착 의상을 입은 것은 민족에 충성을 표명하는 방법이었다. 디에고는 프리다의 의상을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161 프리다와 디에고는 결혼하는 순간부터 상대방의 인생 연극에서 중요한 역할을 연기하기 시작했다. 테우아나 의상을 입는 것은 프리다의 설정의 일부였으며, 이를 통해 저널적인 인물인 디에고의 완벽한 동반자로서의 자격을 확보했다.

 

161 프리다는 사람을 대신하는 옷의 마력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일기에서 테우아나 의상이 부재 중 초상화라고 말했다.

 

161 의상은 가면인 동시에 뼈대였다. 옷은 외면적 정체성을 드러냄으로써 내면적 고통을 감추는 효과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상처와 불편한 다리를 숨기고 싶었다. 정교한 포장은 자신의 신체적 결함, 자시가 부서지고 무너지고 죽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보상받으려는 몸부림이었다.

 

201 프리다가 간절히 아이를 원했다는 증거는 코요아칸의 푸른 집에서 발견된다. 그녀는 출산에 관련된 책을 많이 샀고, 1941년에 엘로에서 박사가 포름알데히드 병에 담긴 태아를 선물하자 침실에 잘 보관했다. 또 상당수의 인형과 인형 집을 수집했다.

 

202 프리다는 아이를 가고 싶은 소망을 다른 사람의 아이들에게 전이시켰다. 특히 디에고와 루페 마린의 두딸, 크리스티나의 두 남매를 사랑했다.

 

202 수많은 애완동물에도 따뜻한 관심을 쏟았다. 한 무리의 강아지와 여러 종의 원숭이, 고양이, 앵무새, 비둘기, 독수리 한 마리, 사슴 한 마리를 키웠다. 원숭이와 앵무새가 프리다의 자화상에 등장할 때는 아이들 대신인 것처럼 보였다.

 

213 아스텍인들의 종교에서 분만 중인 여성은 희생 제물을 포획한 전사와 대등한 존재이다. 새 시대의 탄생을 알리기 때문이다.

 

214 스스로를 낳은 사람, 자기의 살을 가지고 가장 멋진 시를 쓴 사람 (프리다의 일기)

 

237 삶에 의해 살해당할 지경이라니? 리베라 부부가 멕시코로 돌아온 직후 몇 달 지나지 않아 단란한 새 생활을 시작하고 싶다는 프리다의 소망은 깨졌다. 디에고가 그녀의 동생 크리스티나와 연애를 시작한 것이다. 고통의 나날을 보내던 프리자는 디에고가 좋아하던 긴 머리를 잘라 버렸고, 테우아나 의상도 더 이상 걸치지 않았다. 닥쳐 온 고통이 너무 커서 도저히 가록할 수 없다는 듯, 그녀는 자기 경험을 그리는 대신 자신의 고통이 투사된 다른 여자의 불행을 모셔하 <작은 칼자국 몇 개>를 그렸다.

 

242 크리스티나와 리베라의 관계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오래간 것 같다. <작은 칼자국 몇 개>1935년까지 계속되었음을 말해주는 증거다. 그 해 초에 프리다는 산앙헬 집을 나와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거미 원숭이를 데리고 멕시코시티 중심가 인수르헨테스 거리 432번지 조그만 현대식 아파트로 들어갔다. 이것이 그들의 첫 번째 별거였다. ..이때부터 이상한 규칙이 생겼다. 프리다와 디에고는 따로 살았지만 계속 만났다. 그는 옷 몇 벌을 그녀의 아파트에 놔두었고 자매에게 똑같이 잘해주려고 애썼다.

 

284 트로츠키와 프리다의 관게가 끝난 후 리베라 부부 사이에는 공존과 자유라는 생활 양식이 자리 잡았다. 프리다와 디에고는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놀았다. 연애 사건도 잦았다. 프리다는 디에고의 외도를 비웃으며 자기도 은밀하게 외도를 즐겼다. 또 그녀는 화가로서의 삶을 보다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고, 좀더 규칙적으로 작업하며 엄청나게 기교를 향상시켰다. 1937년과 1938년 사이에 지난 8년간 결혼 생활을 하며 그린 것보다 더 많은 그림을 그렸다.

 

287 프리다는 많은 작품을 그렸을 뿐 아니라 예술을 페르소나와 일치시키는 데에도 익숙해졌다. 또 기교도 더욱 향상되었고, 예술과 영감을 일치시키는 데도 훨씬 능숙해졌다. 세련된 기교로 삶에서 일어난 사건을 그리는 동시에 자신의 내면을 통찰했고, 내면과 세계의 관계를 인식하는 방식을 그렸다.

 

377 엘로에서 박사의 편지

디에고는 당신을 무척이나 사랑합니다. 당신도 그를 사랑하지요. 당신이 더 잘 알겠지만 그는 당신 외에도 엄청나게 사랑하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그림과 여자입니다. 그는 과거에도 일부일처제를 따르지 않았고 앞으로도 따르지 않을 거요. 일부일처제란 정신박약적이고 반생물학적인 제도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당신이 이런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따면, 이런 상황에서 그와 함께 평화롭게 살기 위해 작업에 몰두함으로써 질투심을 묻어 버릴 수 있다면,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가르치고 무슨 일이 있건 간에 밤마다 이레 지쳐 잠자리에 들 때까지 그림에 몰두할 수 있다면, 진실로 그렇다면 그와 결혼하세요. 잘 생각해보고 결정하세요.”

 

381 디에고는 여러 차례 그녀에게 청혼했고, 그때마다 엘로에서 박사가 다리를 놓았다. 박사는 프리다에게는 디에고가 변하지 않을 거라고 경고했고, 디에고에게는 이혼이 프리다의 병을 악화시켰으며 그녀와 다시 결혼하는 것이 그녀의 건강을 회복시키는 길이라고 말했다... 디에고는 이혼이 두 사람 모두에게 악영향을 끼친다고 말했다.

 

382 디에고가 당신에게 끌리는 이유는 당신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에요. 그가 완전히 당신을 구속하지 못한다면, 계속 당신을 찾아다니며 필요로 할 거예요. 물론 사람들은 그의 곁에 마물면서 그를 돕고 돌봐 주는 동반자가 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그는 바로 그런 것을 견디지 못해요. 그는 골목을 한 번 꺽을 때마다 사랑에 빠지는 인간이에요 당신이 계속 잡히지 않는 곳에 있다면 그는 당신의 사람이 될 겁니다. 당신이 계속 유혹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완전히 구속되지 말고 자신의 인생을 사세요. “이게 나다. 나는 가치 있는 인간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뭔가가 내면에 자리 잡고 있을 때 위기도 그자지 힘겹지 않을 거니다.

 

401 세월이 흐르고 자식을 가질 수 없는 것이 기정사실이 됨에 따라 프리다는 자연에 대하여 점점 더 특별한 교감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402 자연의 다산성은 프리다에게 임신의 좌절을 가슴 아프게 환기시켰다. 실제로 그녀는 <태양과 생명>을 그릴 당시 또 한번의 유산을 경험했다. 리베라의 아이가 아닌 다른 애인의 아이였다.

 

447 그녀의 병이 정신적 외상의 주기와 일치했던 것을 감안하면, 그녀가 병을 이용해서 디에고를 붙잡거나 되찾으려 했다고 생각할 수 있. 엘리 울프에 의하면 <작은 사슴>은 디에고와 함께 사는 고통과 관련된 그림이다.

 

460 가까운 친구에게는 결혼생활의 어려움을 한탄했다. 단둘이 있을 때면 디에고와 함께 사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지 이야기했다. 그녀는 그의 연애 행각에 끝내 익숙해지지 못했다. 매번 상처를 받았고 고통을 겪었다. 디에고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섹스가 오줌싸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프리다에게는 질투를 느꼈다.

 

498 프리다는 디에고와 라켈의 관게를 의심한 나머지 질투로 침대 천개에 목을 매려 했다. 간호사가 제때에 발견하고 끌어내리지 않았다면 그녀는 죽었을 것이다.

 

517 전날 밤에 디에고가 병원에서 프리다와 함께 지냈다. 상태가 안좋은 날이었지만 디에고와 함께 있어 행복했다. 그러나 그때1층 간호사가 와서 리베라씨 누가 찾아왔습니다. 전시회 개막식에 가야한다고 합니다.” 찾아온 사람은 바로 그의 작업실 여자였다. 디에고는 프리다를 떠났다. 다음 날 아침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갔다. 그녀는 거기에 잠들어 있었다. 그날 아침 자살하여 했던 것이다.

 

 

3.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서문

 

37 죽음이 1년도 채 남지 않은 19534, 47세의 프리다 칼로는 고국 멕시코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병세가 매우 악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참석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멕시코시티 현대 미술관이 문을 여는 오후 8, 구급차 한 대가 문 앞에 멈춰 섰다. 평소 즐겨 입던 멕시코 의상을 차려입은 화가는 들것에 실려져 전시실에 설치된 침대로 옮겨졌다.

전기의 첫 문장이다. 인상적인 장면으로 쑥 들어간다. 서문에서 그녀의 인생을 요약한다. 개인적인 친교 경험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저자의 프리다 칼로에 대한 경탄은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녀의 고통과 함께.

 

37 이 행사는 그 특별한 여인의 인생에 있어서 절정인 동시에 독립적 순간이었다. 또 인간 프리다와 화가 프리다의 여러 자질을 입증해 주었다. 그녀는 육체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의연한 태도를 보였으며 불굴의 투지를 소유했고, 경이로움과 특별함에 집착했으며 화려한 가면을 씀으로서 자신의 사생활과 기품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37 그녀는 길지 않은 생애동안 200여점의 작품을 남겼으며 그중 다수가 자화상이었다.

1907에 태어나 1954에 돌아갔다. 40대 후반까지 살았네. 자화상이 이렇게 많은 건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있어야 하는 순간이 많아서인가? 자화상에다 모든 걸 담을 수 있었던 듯.

 

38 일단 그녀는 외양부터가 독특했다. 전체적으로 아름답다고 할 만했고, 약간의 결점은 오히려 그녀의 매력을 더해 주었다. 눈썹은 일자로 이어져 있었고 육감적인 입술 위에는 콧수염의 흔적이 있었다.

 

38 그녀는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속어를 즐겨 썼다. 한 친구는 그녀의 말에 강인함이 있다고 했는데 그녀의 편지에서도 그런 강인함을 찾아볼 수 있다. 그녀는 에스파냐어로 욕하는 걸 즐겨했다. 프리다처럼 여성스런 사람이 (게다가 그녀가 여왕처럼 고결하게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다녔다) 비속어를 내뱉을 때 효과는 더욱 컸다. 그녀는 옷차림이 화려한 편이었다. 고급 양장점 옷보다는 너무 길어서 바닥에 끌리는 멕시코 전통 의상을 훨씬 더 좋아했다. 사람들은 어디에서 서커스 공연하나?“라고 짓꿎게 물었지만 프리다 칼로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멕시코 전통의상을 입게 된 계기는 프리다 칼로의 개성에서 출발한 게 아니라 디에고 리베라가 민중적인 것을 중시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동조하거나 노력하는 걸 보이고 싶었던 것 같은데. 어쨎든 멕시코 전통의상은 프리다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불편한 오른 다리를 가리기엔 길고 화려한 치마가 적합.

 

38 1929년에 프리다는 디에고 리베라의 세 번째 아내가 되었다.

1907년에 태어나 1929년에 결혼했으니 22살 또는 23살 때네.

39 멕시코시티에 있는 리베라의 저택은 전 세계 지식인의 메카였다.... 디에고는 사람들의 시건을 끄는 것을 광적으로 좋아했기 때문에 그들의 결혼생활은 공무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언론에서는 앞 다투어 이들 부부에 관련한 모든 사건, 그들의 사랑과 다툼과 별거 소식을 선정적으로 보도했다.

 

39 디에고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가, 프리다는 디에고의 사원을 지키는 고집 센 여사제였다.

 

39 프리다는 활력과 지성과 성적 매력으로 숱한 남자들을 사로잡았으며 (애인도 많았다) 동성애를 즐겼다는 증거도 있다. 리베라는 그녀의 여자 애인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았지만, 남자 애인에게는 과격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다른 사람과 칫솔을 같이 쓰고 싶지 않다고 고함치며 권총으로 위협하기도 했다.

 

39 프리다가 열여덟살이던 1925917, 하교 길에 탔던 버스가 전차와 충돌했다. 그녀는 사고 현장에서 말 그대로 쇠기둥에 박혔다. 척추가 부러지고 골반이 부서지고 한쪽 발이 으깨졌다.

 

40 사고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녀의 삶은 고통과 병마와의투쟁으로 점철되었다. 그녀는 아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끝내 가질 수 없었고, (부서진 골반 때문에 자꾸 유산을 했고, 세 번 이상 중절을 해야 했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곧잘 배신을 당했으며, 때로는 버림을 받았다.

프라다의 고통, , 유산, 배신

 

41 “나는 나만의 현실을 그린다. 나는 그림을 그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림을 그린다. 나는 언제나 별 생각없이 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을 그린다. 이것이 내가 아는 전부다.”

 

41 피 흘리고 찢기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면서 그녀는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여기서 그녀가 보여주는 놀라우리만치 솔직한 모습은 유머와 판타지로 완화된다.

 

41 그녀의 그림은 대개 소품이다. 그림의 크기는 주제의 친근함과 어울린다.

 

41 개개의 작품은 그녀의 가슴 아픈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숨죽인 흐느낌처럼, 응어리진 감정처럼 너무나 강렬해서 폭발해 버릴 것만 같았다.

 

41 프리다라는 개인이 가진 이미지가 여성들에게 주는 지극히 사적이고 여성적인 느낌과 그녀의 예술적 독자성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예술에 있어서 프리다는 디에고에게 경쟁심도 존경심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더 나은 화가라고 평가하는 비평가도 적지 않다.

 

42 자기가 이토록 많은 추억을 남긴 것을 알았다면 프리다도 기뻐했을 것이다. 그녀는 자기 스스로 전설을 창조해냈다.

 

42 진실은 전설을 추방하지 않는다. 진실의 렌즈를 통과한 후에도 프리다 칼로의 생애는 그녀의 전설처럼 특별할 것이다.

 

42 너무나 복잡하고 뒤얽힌 자의식을 소유한 인물이었기에 그녀의 전설은 어긋남과 모호함과 모순으로 가득하다. 그녀의 실상을 파헤쳐도 괜찮을까 망설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녀가 창조한 이미지가 손상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서문이 잔잔하고 아름답고 무엇보다 신뢰스럽다. 전기를 쓰기로 한 화가에 대한 경탄과 사랑이 묻어있으면서도 호들갑떨거나 무조건 숭배하지 않는다.

 

파란담장집

 

43 프리다 칼로의 이야기는 시작하는 곳과 끝나는 곳이 같다.

코요아칸의 집. 단층 회벽 건물, 담장은 밝은 푸른색. 유리창이 많은 집. 열대식물, 분수, 옛 멕시코 신상들. 프리다 칼로의 아버지가 지은 집.

 

44 사실 프리다는 190776일에 태어났다. 하지만 그녀는 출생증명서와는 달리 1910년을 태어난 해로 삼았다. 1910년은 멕시코 혁명이 일어난 해였다. 그녀는 스스로를 혁명의 딸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멕시코시티가 혼란과 유혈과 가득한 때 자신과 멕시코가 동시에 태어났다고 믿었던 것이다....“191077일 이곳에서 프리다 칼로가 태어났다는 박물관의 문구는 진실을 아름답게 만드는 장식일 뿐이다. 프리다의 전설의 일부이다.

 

45 칼로의 조부모 야콥 하인리히 칼로 헨리에트 카우프만 칼로는 현재 루마니아 영토인 아라드 출신의 헝가리계 유대인으로 독일로 이주하여 바덴바덴에 정착했고 1872년 빌헬름이 태어났다. 야콥 칼로는 보석상이었다. 1890년 빌헬름 칼로는 낙상하여 머리를 다쳤고 이때부터 간질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재혼했다. 1891년에 아버지는 열아홉 아들에게 멕시코로 가기에 충분한 여비를 주었다. 빌헬름은 이름을 기예르모로 바꾸고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열아홉살 아들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영향을 끼쳤을까? 독일에서 멕시코로 이주했음은?

 

1894년에 그는 멕시코 여인과 결혼했는데 그녀는 4년 후 둘째 딸을 낳다가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전부인이 죽던 날 밤 할머니를 불렀고, 할머니는 어머니를 데려왔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같은 가게에서 일하고 있었다.”

전처에게서 난 첫째딸, 둘째딸은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수녀원에 보내졌다.(4, 1) 23(1894)에 결혼해 4년 뒤(1898)에 상처했다. 스물여섯에 스물넷인 프리다의 어머니와 결혼했다니 상처하자마자 재혼한 듯 하다. 첫째 아내에 대한 애도, 이별이 충분히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으리라. 출산 중에 아내가 죽을 때의 가족체의 반응은? 그리고 둘째 결혼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반응은? (나의 가설 :

(1) 전 부인을 사랑했다면, 그 죽음에 얽매여 있었을 수 있다. 딸들 중 누군가를 첫 번째 부인으로 동일시해서 볼 수도. 두 번째 부인인 어머니가 첫 번째 부인을 존중하기 않았다면 딸들 중 하나가 이전 부인을 대리해 어머니와 대립할 수도 있다. 가족체의 소속의 법칙에 의해)

(2) 두 번째 결혼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아버지의 첫 번째 부인과 태어나는 날 엄마를 잃은 둘째 언니에게 생명의 빚이 있다. 갚으려 할 거다.

 

46 1876년 오악사카에서 태어난 마킬데 칼데론 이 곤살레스는 열두 남매 중 첫째였다. 어머니 이사벨 곤살레스 이 곤살레스는 에스파냐 장교의 딸로 수녀원 교육을 받았다. 마틸데의 아버지 안토니오 칼데론은 인디언 혈통의 사진작가. 프리다에 따르면 그녀의 어머니는 글을 몰랐지만 똑똑했고 부족한 교육을 신앙으로 보충했다.

 

46 스물여섯 살의 이민자 칼로씨는 태생은 유대인, 신조는 무신론에 간질 증세까지 있었다. 유럽 것이 멕시코적인 것보다 훨씬 좋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그는 똑똑하고 근면했으며 귀가 좀 튀어나오기는 했지만 잘 생긴 편이었다.

 

46 마틸데는 스물 네 살이었고 혼기를 놓친 상태였다. 프리다의 어머니는 남편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적어도 괜찮은 상대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마틸데 칼데론 데 칼로는 남편에게 전업 사진작가가 될 것을 권했다. 그것은 그녀 아버지의 직업이었다.

 

47 프리다의 아버지는 유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말수가 적었고, 그의 침묵은 강력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종류의 비통한 분위기가 그를 감싸고 있었다. 그는 멕시코에서 진정으로 편안함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48 프리다 칼로의 신체적 특징이 어디서 왔는지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친할머니로부터 진한 일자 눈썹을 물려받았다. “나는 아버지의 눈과 어머니의 몸을 닮았다.” 그림에서 기예르모 칼로는 사람을 꿰뚫어볼 듯한 눈빛을 하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 똑같은 눈빛이 딸에게도 나타난다. 다만 딸의 눈빛은 사람의 넋을 뒤흔들 듯 강렬하다.

아버지의 눈빛을 딸이 닮았다.

 

어린 시절

 

 

50 아버지 : 빌헬름(기예르모) 칼로. 헝가리계 유태인. 독일에서 멕시코로 이주.

첫 번째 부인: 멕시코 여인, 둘째 아이 출산 중 사망 (아이는 생존)

어머니 (두번째 부인) : 마틸데 칼로. 멕시코 여인

첫째 : 마리아 루이사 ()

둘째 : 마가리타 () - 나중에 수녀가 됨.

셋째 : 마틸데 ()

넷째 : 아드리아나 ()

다섯째 : 프리다 ()

여섯째 : 크리스티나 ()

딸들이 다 종교의 영향, 특징없는 여자 이름을 가졌는데 프리다만이 독일식 이름

 

마그달레나 카르멘 프리다 칼로. 첫 번째, 두 번째는 세례명, 세 번째는 가족들이 부르는 이름. 독일어로 평화를 상징. 나치즘 발흥 후 독일어 frieda에서 e를 빼버림. (1930년대 프리다의 선택)

 

51 프리다가 태어난 직후에 어머니가 병이 나서 그녀는 잠시 동안 인디언 유모의 젖을 먹고 자랐다. 원주민 여인의 젖을 먹고 자랐다는 사실은 훗날 그녀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녀의 그림에서 유모는 멕시코 전통의 신화적 상징으로, 자기는 유모의 젖을 빠는 아기로 나온다.

원주민 유모가 아니라도 프리다는 멕시코 여인의 딸이니 멕시코 여인이다.

 

52 프리다의 부모에게 혁명은 모험이 아니라 재난이었다. 정권이 몰락하고 10년 동안 내전이 이어지자 다시 가난해졌다. 도통 주문이 들어오지 않았다. 남자에게는 돈 버는 요령이 없었고, 사진 장비를 살 돈이 없을 때도 많았다. 집을 저당 잡혔고, 거실의 프랑스제 가구를 팔았으며, 생계를 위해 하숙을 치기도 했다. 기예르모 칼로가 점점 더 말이 없어지고 염세적으로 되어 가자 아내가 살림을 맡았다.

타지에 사는 남자가 어떻게 힘을 받을 수 있을까? 프리다는 멕시코 여인이었던 어머니의 땅(모국)에 그대로 살았다. 멕시코인이 되는 게 자연스럽다.

 

52 그녀는 딸들에게 멕시코 전통적인 가정교육 방식에 따라 가사와 예술을 가르쳤고, 종교적인 믿음을 심어주려 했다. 날마다 딸들을 교회에 데려갔고, 부활 주간에도 피정에도 데려갔다. 그녀에게 종교는 대단히 중요했다. 프리다도 어릴 때부터 바느질, 자수, 요리, 청소를 배웠다. (평생 그녀는 자기 집이 잘 가꿔져 있고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는 것에 상당한 자부심을 느꼈다.)

 

53 내가 일곱 살 때 열다섯 살이던 언니 마틸데가 남자친구와 도망가는 걸 도와주었다...발코니 창을 열어주었다...나는 언니에게 여러 번 놀러갔고 어머니를 설득하여 그들을 만나게 하려 했지만 어머니는 원하지 않았다.

이걸 7살 아이에게 책임을 지울 수 있을까? 프리다는 자기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

54 프리다는 어머니에게 사랑과 경멸이라는 모순된 감정을 함께 품었다. 이는 그녀가 인터뷰에서 어머니가 잔인한동시에 아주 친절하고 능동적이며 현명하다고 말했던 것에도 들어나다. 그녀는 우리 대장이라고 부르던 어머니와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싸움은 나이가 들수록 격렬해져갔다. 그러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프리다는 울음을 그칠 수 없었다.

 

55 여섯 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아홉 달 동안 방에서 나올 수 없었다.

어릴 때 많이 아팠던. 후유증을 갖게 된 아이

 

56 어른이 되었을 때 프리다는 자신의 내면에 몰입하는 면과 외향적인 면이 묘하게 결합된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성격은 병상에 누워있던 어린 시절에 내면세계의 백일몽과 백일몽과 바깥세상의 인간관계 사이에서 심한 불일치를 경험했기 때문인 듯 하다. 그녀는 상상 속의 친구를 갖고 싶다는 꿈, 슾믕르 달래줄 벗을 갖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그게 애인, 배우자에 대한 집중, 짝을 향한 지향으로 발전하는 건 프리다의 타고난 성향일수도.

 

57 내 장난감은 스케이트나 자전거처럼 남자 아이가 갖고 노는 것이었다.

 

57 다리를 감추느라 가는 종아리 위로 야말을 서너 켤레씩 덧신었고, 오른 쪽 굽이 높은 신발을 신었다. 친구들은 장애에도 불국하고 그녀가 운동을 열심히 한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58 그녀는 상처입은 새였다. 상처입은 그녀는 다른 아이들과는 달랐고 외로울 때가 많았다. 또래들이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서 시야를 넓히고 단짝 친구를 사귈 나이에 집에만 있어야 했다. 병이 나아 다시 학교에 갔을 때는 놀림을 받고 따돌림을 당했다. 말괄량이가 된 것이나 나중에 명물이 된 것도 과도한 보상심리에서 기인한 일이었다.

 

59 그녀는 평생 병으로 약해진 다릴 증오했고, 기다란 멕시코 민속의상으로 가리고 다녔다. 그리고 가장 멕시코적인 멕시코인이 됨으로써 불구가 된 몸과 마음의 상처들을 상쇄하려 했다.

 

59 기예르모 칼로는 여섯 아이 중에서 유난히 프리다를 사랑했다. 좀처럼 애정표현을 하지 않는 그지만, “프리다, 사랑하는 프리다라고 부르곤 했다. 그는 딸에게서 극도로 예민한 자신의 감수성과 폐쇄성, 불안을 감지했다. 칼로는 프리다가 우리 딸들 중에서 제일 똑똑하지. 그 아이가 가장 많이 나를 닮았어.”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정해진 습관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으로 자식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는 못했다.

 

61 프리다가 소아마비를 앓고 나서 두 사람은 훨씬 더 가까워졌다. 질병과 고독의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유대감이 생겼던 것이다. 프리다의 기억에 따르면 아버지는 주로 그녀가 잠자리에 들 시간에 발작을 일으켰다.

 

60 스튜디오가 집에서 멀었기 때문에 그는 한낮에 집에 와서 성대한 정찬을 먹는 멕시코 관습을 따를 수가 없었다. 대신에 칼로 부인은 도시락을 싸서 하인 편에 보냈다. ..조그만 서재와 암실이 있는 스튜디오는 그만의 은밀하고 완벽한 세계였다....당시 멕시코의 교양있는 유럽인들처럼 그 역시 작지만 정선된 서재를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이 독일어 책으로 실러와 괴테의 책뿐만 아니라 철학책도 많았다. 그는 딸들에게 철학은 인간을 사려 깊게 하고 책임감을 갖게 한다.” 라고 가르친 적도 있다. 책상 위에 걸려 있는 대형 초상화가 서재 전체를 압도했다. 그의 영웅, 쇼펜하우어의 초상이었다. 기예르모 칼로는 매일 밤 같은 시간에 퇴근했고, 가족들과 엄숙하고 다정하게 인사를 나누고는 곧장 독일제 피아노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 한 시간 동안 나오지 않았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의 선율이 벽을 타고 조그맣게 들려왔다. 방에서 나오면 호자 식사를 했고 아내는 곁에서 말없이 시중을 들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면 다시 피아노를 쳤다. 자기 전에는 항상 책을 읽었다.

외롭다. 멕시코에 정착해서, 멕시코 여자와 두 번 결혼해 여섯 아이를 낳고 살면서도, 고향 독일을 그리워하는 사람. 점심 저녁을 혼자서 먹었다. 부인과 가족, 주변 멕시코인들과 거의 교류 없이 개인 스튜디오와 서재에 처박혀 지냈다. 자기 작업, 음악, 책이 친구였다. 난치성 질병인 간질, 이주, 아내를 잃음 이런 것이 영향을 끼쳤을까? 이런 위축되고 외로운 아버지에 대한 연민을 느끼는 건 나의 투사겠지.

 

61 사진 수정 작업에 필요한 미세한 붓놀림과 소규모의 화폭은 프리다의 제2의 본성이 되었고, 아버지가 찍은 인물 사진의 형식성은 그녀가 초상화에 접근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62 그의 표면적인 고요는 자제력과 과묵함에서 나오는 것이지 진정한 평화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62 아버지의 반신상 아래 두루마리에 이렇게 썼다. “나는 아버지를 그렸다. 이름은 빌헬름 칼로. 혈통은 헝가리계 독일인. 직업은 화가이자 사진작가. 너그럽고 훌륭한 성품인데다 지적이었다. 그리고 용감했다. 60년 동안 간질에 시달렸지만 작업을 멈추지 않았고 히틀러를 흠모하면서도 그와 맞서 싸웠다. 그의 딸 프리다 칼로

프리다도 용감했다. 고통에 시달렸지만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예비학교의 소녀

 

 

 

63 1922 멕시코 최고의 교육기관인 국립예비학교에 입학했다...동급생들은 멕시코 최고의 젊은이들이었다. 국립예비학교 학생들은 착창시절에 이미 학교와 대학의 변화에 일익을 담당했으며 졸업할 무렵에는 국가의 지도자로 성장했다. 프리다가 혁명이 발발한 해를 자기가 태어난 해로 정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결정의 이면에는 예비학교 시절의 격정의 나날이 존재했다.

 

64 멕시코인들이 멕시코를 되찾기까지는 10년간의 혁명기를 거쳐야 했다. ...멕시코인들이 당당하게 정체성을 주장했고 프랑스와 에스파냐에서 빌려왔던 이념과 유형을 거부하고 토착 문화에 환호했다.

 

바스콘셀로스의 목표는 멕시코 교육을 진정 멕시코적인 교육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멕시코 교육은 우리 피, 우리 말, 우리 사람위에 세워져야 했다.....문맹과의 전쟁...오지로 진군..도서관 설치, 운동장과 수영장 건설, 야외 예술학교 조직...바스콘셀로스는 예술이 사회 변혁을 고취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철학은 직관의 철학으로 이전의 과학인들이 숭배했던 논리나 경험주의와는 상반된 것이었다...플라톤의 <대화>, 단테의 <신곡>, 괴테 <파우스트> kx은 고전을 염가로 출판하게 했으며, 문맹자를 위한 무료공연 마련, 벽화 의뢰...이러한 열정과 적극적 행동주의, 분노와 개혁주의의 열광 분위기는 프리다가 진학할 당시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그녀가 가정이라는 안전한 울타리를 벗어나 동네라는 익숙한 리듬을 깨뜨리고, 한 시간 동안 전차에 몸을 싣고 도시의 새학교 입학

일정 나이가 되면 이런 시도가 필요하다.

 

66 프리다가 예비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여학생 입학이 허용된 직후였다. 2000명 학생 중 여학생은 서른 다섯 명. 마틸데 칼데론 데 칼로는 딸이 그런 위험한 곳에 가는 데 반대했으나 기예르모 칼로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아들이 없었던 그는 자신의 좌절된 학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제일 아끼는 딸에게 희망을 걸었다. 가장 똑똑한 아들을 교육시키는 오랜 전통에 따라 프리다도 예비 전문가 대열에 합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프리다가 예비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했다는 것은 그녀에게 장래성이 있다는 증거였다. 의대에 갈 수 있는 5년 과정을 선택했다. (열네살+

 

69 프리다의 친구는 카추차 회원이었다. ..학창 시절에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특정 활동이나 대의명분이라기 보담은 불손한 태도였다. 그들은 정치 문제에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민족주의가 가미된 낭만적 사회주의를 신봉했다. 또 바스콘셀로스의 추종자로서 조국의 미래에 대한 드높은 이상을 품었고, 학교 개혁을 선동했다. 그러나 교실을 무정부적 상태로 만들곤 했으며 장난이 도를 넘을 때도 있었다.

 

70 프리다가 우리에게 끌린 건 우리가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다.

 

70 카추차 회원들의 아지트를 학교 근처에 있는 이베로 아메리카 도서관이었다.

 

71 그들은 줄기차게 책을 읽었다. 뒤마에서 마리아노 아수엘라까지, 성경에서 <고뇌>에 이르기까지 모든 책을 읽었다. 에스파냐 문학과 러시아 문학의 걸작들을 탐독했고, 멕시코 현대 소설도 부지런히 일겅. 그 결과 프리다는 에스파냐어에 이어 영어, 독일어까지 읽을 수 있게 되었다.

 

72 힘들이지 않고도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었다. 지루하거나 수업준비를 안해오는 교사의 강의에 출석하지 않는 것이 자신의 권리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출석하면 수업이 활기를 띄었다.

 

73 예비학교의 대강당인 볼리바르 원형 극장 벽화를 의뢰받은 디에고 리베라는 무척 개성이 강한 인물이었다. 서른여섯 살이던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했고 어마어마하게 뚱뚱했다.....교사와 공무원이 검은 야복에 풀 먹인 칼라를 달고 중절모를 쓰던 시절이었다. 그는 카우보이 모자, 커다란 검은색 광부 신발에 넓은 혁대를 둘렀다. ...프리다는 디에고만 보면 장난치고 싶어 안달이었다. (도시락에서 음식 꺼내가기, 계단에 비누칠하기)리베라가 작업하는 동안 아름다운 모델들이 계속 찾아와 말동무가 되어 주었다. 그중 하나가 그의 정부 루페 마린이었다. (그들은 1922년에 결혼했다.) 또 다른 모델은...

 

74 디에고의 자서전 <나의 예술, 나의 인생> 어느날 밤 나는 작업대 위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루페는 밑에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문이 활짝 열리며 열 살 내지 열두살 정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뛰어들어왔다. 여느 고등학생과 똑같은 차림을 하고 있지만 태도는 얼핏 봐도 달랐다. 어딘지 모르게 위엄과 자신감이 있었고, 눈동자는 야릇한 빛을 뿜었다. 그녀는 아직 어린아이처럼 귀여웠으나 가슴은 꽤 성숙해 보였다... 몇 시간이 지나자 루페는 질투심에 불타 여자아이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여자아이는 루페에게 신경쓰지 않았다. 무론 그 때문에 루페가 더 화가 났다.

이런 장면에서 루페와 프리다가 자리를 바꾸고 다른 여자들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사실 프리다도 그런 여자 중 하나였다.

 

75 디에고를 사랑하는 것과는 별도로 학창 시절 프리다는 카추차의 독보적인 리더 알레한드로 고메스 아리아스와 사귀었다.

 

76 프리다는 자라면서 위대한 남자들에게 끌리게 되는데, 이같으 그녀의 애정 편력은 알레한드로에 대한 사랑으로 시작되었다.

 

76 알레한드로는 프리다가 보낸 편지를 아직도 가지고 있다. 편지에는 어린아이에서 사춘기 소녀로, 다시 성숙한 여인으로 성장하는 그녀의 인생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또 자신의 인생과 감정을 표현하려는 충동이 드러난다. 그녀가 자화상을 그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도 이러한 충동 때문이었던 것 같다.

 

86 아버지를 돕는 것 말고는 일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잠시 약국에서 경리로 일했지만 만만치 않았다. 하루 매상을 정리할 때면 금고 안의 돈이 남거나 모자랐고, 수지를 맞추기 위해서 자기 급료를 보태야 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1938년에 그녀는 한 친구에게 자기는 한 여선생과 동성연애를 시작했고 관계는 상처를 남겼으며, 부모님이 그 관계를 알게 되고 추문이 일어서 상처가 더 깊었다.

 

86 목재소 회계, 속기와 타자를 배워 교육부 도서관 취직

 

87 다음 직장은 비교적 재미있었다. 아버지의 친구이자 상업적으로 성공한 판화가 페르나르도 페르난데스의 유급조수 자리였다. 페르난데스는 프리다에게 스웨덴 인상파 안데르스 소른의 판화를 베끼게하면서, 그림 그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고, 프리다에게 엄청난 재능이 있음을 발견했다. 알레한드로에 따르면 프리다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잠시 그와 연애했다고 한다.

직장을 구한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한 화가도 처음에는 우리와 똑같은 범인, 시민이었음을 알게 된다. 생경스럽네.

 

87 모든 사진 속에서 그녀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똑바로 카메라를 응시한다. 그녀의 눈빛에는 분명 관능과 어두운 아이러니가 뒤섞여 있다. 이런 눈빛은 그녀의 많은 자화상 속에서 다시 나타난다.

 

고통사고

 

88 아무리 긴 시간이 흘러도 생각만 나면 움찔하게 되는 일들이 있다. 이 또한 그런 일 가운데 하나였다. 전차가 나무로 만든 버스를 들이받았고, 그로 인해 프리다 칼로의 인생이 바뀌었다.

 

88 사고는 1925917일 늦게 일어났다. 코요아칸 행 버스는 거의 만원이었지만 알레한드로와 프리다는 뒤쪽에 나란히 앉을 수 있었다.

 

90 그녀는 요추 세 군데, 쇄골과 세 번째, 네 번째 갈비뼈가 부러졌다. 오른쪽 다리 열한군데에 골절상을 입었고, 오른발은 탈구되고 으깨졌다. 왼쪽 어깨는 관절이 빠졌고, 골반 세 군데가 부러졌다. 강철 난간은 그녀의 복부를 글자 그대로 꼬치에 꿰듯이 수평으로 관통하여 왼쪽 옆구리로 들어가 질로 나왔다. 그녀는 자기 말대로 처녀성을 상실했다.’ ..의사들은 몽타주 사진을 제작하듯 프리다의 몸을 조립해야 했다.

 

91 어머니는 충격으로 한 달 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상심한 나머지 병이 났다.

91 한 달동안 프리다는 반듯이 누워만 있었다. 석고 붕대와 기계 장치 속에 감금된 상태였다.

 

91 가족을 만날 수 없었던 마틸데는 여동생을 도와줄 기회가 생겨서 기뻐했다. 신문에서 사고 기사를 읽고 즉시 달려왔다. 병원 가까이에 살았기 때문에 매일 올 수 있었다. 뚱뚱하고 못생겼지만 유머 감각이 뛰어났다. 마틸데 때문에 병원 모든 환자들이 박장대소했다. 또 마틸데는 뜨개질을 하거나 환자들을 돕는 간호사의 일손을 도왔다. 마틸데와 친구들이 돌아가 버리면 프리다는 자기가 죽을 뻔한 기억과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렸다.

 

91 병원에서 죽음이 밤마다 나의 침대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춘다.

 

92 “견뎌야 해요. 나는 고통에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고통과 인내는 사고 이후 그녀의 삶에서 핵심주제가 되었다.

 

93 코요아칸 사람들과 나이든 아줌마들은 안 와도 좋으니까 단 하루만이라도 당신이 온다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을텐데. 알렉스 다시 만나는 날 당신에게 키스할 것 같아요...올 수 없다면 편지라도 써주세요...당신이 오면 얼마나 좋을까? 어머니와 동생에게 당신이 왔으면 좋겠다고 이미 말해놓았어요...당신이 언제 올지 알려주면 좋겟어요. 혹시라도 같은 날 성가신 사람들이 온다면 말릴게요....그러나 알레한드로는 가지 않았다. 적어도 그녀가 원하는 만큼 자주 가지는 않았다.

가장 큰 위로가 남자친구에게서 온다고 생각하는구나. 이런 특징이 남편(의 불륜)에게서 고통받는 조건이다.

 

102 일생동안 프리다는 사랑하는 사람을 붙잡아 두기 위해 자신의 지성과 매력과 고통을 이용했다. 알레한드로의 경우에도 프리다는 사랑을 되찾기 위해 몇 달 동안 싸우면서 눈물로 얼룩진 편지를 보냈다.

 

103 프리다의 첫 자화상은 그녀의 첫 작품으로, 알레한드로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그녀는 1926년 늦여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상처가 덧나서 코요아칸 집에 갇혀 지낼 때였다. 그녀의 수많은 자화상이 그렇듯이 이 그림 역시 사랑의 징표였다. 그녀는 이것으로 애인을 붙잡아 두고 싶어했다. 편지에 이렇게 썼다. “며칠 내로 초상화가 배달될 거예요. 액자에 넣지 못해 미안해요. 나를 보듯 볼 수 있게 낮은 곳에 걸어 주길.”

이렇듯 최초의 <자화상>은 애원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프리다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고 느꼈을 때 작품을 통해 애정 공세를 펼치곤 했다.

프리다의 흑역사로군. 흑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공감하는 수많은 여자들

 

망가진 척추

 

106 1925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프리다의 삶은 서서히 망가져 가는 육체와의 지난한 투쟁이었다. 그녀는 항상 피로를 느꼈고, 척추와 오른쪽 다리에 거의 항상 통증이 있었다. 어느 정도 건강을 되찾은 후에는 다리를 저는 것이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어린시절 친구 올가 캄포스에 따르면 프리다는 사고 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서른 두 번의 외과 수술을 받았으며, 대부분 척추수술과 오른발 수술이었다.

신뢰로운 출처

 

106 치료를 제대로 받을 수 없었던 건 집안 형편 때문이었다. 형편이 나아진 후로는 치료가 소용없었다.

 

107 그녀가 자기 인생을 변화시킬 일을 찾아낸 것은 거의 우연이었다.

 

107 “그때는 어렸기 때문에 이러한 불행도 그다지 비극적이라고 여겨지지가 않았다. 나에게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에너지가 있었다. 의학 공부가 아니라도 괜찮았다. 그래서 별로 신경쓰지 않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07 프리다는 재능이 있었다. 그러나 페르난데스의 조수로 일하기 전까지 여학생 프리다가 예술적 야망을 들어낸 적은 없다.

 

107 학우들의 기억에 따르면 그녀는 미술에 관심이 있었지만, 그저 벽화 작업 구경을 즐겼을 뿐이며, ‘예술적인 성향을 지니고는 있었지만 그저 벽화 작업 구경을 즐겼을 뿐이며, ‘예술적인 성향을 지니고는 있었지만 기껏해야 교과서에 줄기차게 낙서를 했을 뿐이었다.

 

108 미술사학자 안토니오 오드리게스에게

이런 출처 밝힘이 이 책의 신뢰도를 높인다. 저자 역시 미술사학자였다.

예전부터 아버지의 조그만 사진관 구석에는 유화 물감 상자와 붓통으로 쓰이는 낡은 꽃병과 팔레트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순전히 취미로 코요아칸의 강가에서 풍경화나 정물화를 긜거나 판화를 베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물감 상자에 (흔한 말로) 눈독을 들였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오랫동안 아팠다는 이유로 나는 아버지에게 물감을 달라고 졸랐습니다. 아버지는 아픈 동생에게 장난감을 빼앗기는 소년처럼 물감을 대여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목수에게 특수 이젤을 주문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누워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이젤을 침대에 설치했습니다. 석고 붕대 때문에 일어나 앉을 수가 없었거든요. 이렇게 해서 그림을 시작했습니다.”

 

109 상처가 재발했던 1926년부터 1927년까지 프리다가 알레한드로에게 보낸 편지들을 읽다 보면, 삶에 대한 그녀의 강렬한 의욕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또 자신의 애처로운 고독과 끔찍한 육체적 고통을 이용해서 애인을 붙잡는 전략도 놀랍다. 한 친구의 말대로 그녀는 연민이 사랑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11 그의 가족이 프리다와 떼어놓기 위해서 해외로 보냈다는 말도 있다. 알레한드로 자신도 나날이 집착이 더해 가고 요구가 많아지는 프리다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그가 자신의 연인에게 깊은 애착을 가지고 있었고, 일생 동안 그녀를 돌봐 준 것은 사실이지만, 과거의 남자 관계와 당시의 건강 상태를 생각하면 그녀에게 거리를 두고 싶었을 것이다.

집착이 그녀가 원하는 바를 더 멀어지게 한다.

 

119 멕시코에서 프리다의 사고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 운명을 들먹인다.

..프리다 자신도 고통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자기 운명의 짐을지지 않을 수 없다면, 가볍다고 생각하며 견뎌야 했다.

 

120 그녀가 죽음을 조롱한 것은 가톨릭 신자가 가톨릭을 비아냥 거리는 것이나 유대인이 유대인 농담을 늘어놓는 것과도 흡사했다. 죽음은 그녀의 친구이자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120 프리다의 판타지가 자기라는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자기에 대해서 깊이 천착했던 것만은 틀림없다. 의사를 꿈꾸던 소녀가 그림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녀에게 그림은 심리적 외과 수술이었다. 프리다는 말한다. 나를 그린 것은 혼자일 때가 많았기 때문이고, 내가 가장 잘 아는 소재가 나이기 때문이다.” 사고가 내 인생 행로를 바꾸어 놓은 후 나는 수많은 장애로 인해 정상적인 소망을 이룰 수 없었고, 이루지 못한 소망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정상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다.”

 

121 그림은 프리다 칼로의 생존을 위한 투쟁인 동시에 자기 창조였다. 삶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림에서도 자기 연출은 세계를 통제하는 수단이었다.

 

121 프리다는 자신을 잉태한 유일한 화가다.

 

121 두 명의 프리다가 항상 싸우고 있었다. 하나는 죽은 프리다이고, 하나는 살아있는 프리다였다.

 

123 프리다의 그림에는 강인함과 고통이 공존한다. 그녀가 상처받았거나 울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릴 때마다 자신의 정신적 상처와 육체적 상처를 반복하여 늘어놓던 그녀의 편지가 떠오른다. 둘 다 상대의 관심을 끌려는 절규다. 그러나 아무리 고통스러운 자화상이라도 켤코 감상이나 자기 연민을 찾아볼 수 없다. 여왕 같은 몸가짐과 금욕적인 표정에서는 인내하는 자 특유의 위엄과 결의가 나타난다. 이렇듯 그녀의 자화상에서 드러나는 독특한 호소력과 강인함은 솔직함과 자기연출을 적절하게 혼합한 결과다.

 

 

개구리왕자 디에고

128 프리다가 디에고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마흔한 살이었고, 멕시코에서 가장 유명한 동시에 가장 악명 높은 화가였다. 멕시코 역사상 디에고보다 많은 벽화를 그린 사람은 없다. “나는 단순한 화가가 아니다. 나는 나무가 꽃과 열매를 생산하듯 그림을 생산하는 생물적 기능을 수행하는 인간이다.” 그는 일 중독자였고 정치적 요청이든 질병이든 사소한 일상의 문제든 일을 방해하는 모든 것에 짜증을 냈다. 한 번에 며칠씩 쉬지 않고 작업을 하곤 했다. 그럴 때는 작업대 위에서 밥을 먹었고, 필요하면 거기서 잠을 잤다. 그는 친구들과 구경꾼들에 둘러싸여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자기가 꾸며낸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었다...기벽이 심하고 즉흥적일 정도로 그림 그리는 속도가 빨랐지만, 사실 그는 능란하고 신중한 화가였고 완벽한 전문가였다. 그는 세 살 때부터 그림을 그렸다. 1887년생. 아버지는 교사였고 어머니는 사탕 가게를 하는 신앙심 깊은 젊은 여성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신동이었다. 11살 때부터 낮에는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밤에는 멕시코에서 가장 좋은 미술학교 산 카를로스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받았다. 1907(21) 유럽으로 유학을 갔다. 에스파냐에서 1년 보내고 파리에 자리 잡았으며 여행하다가 1921(35)년에 돌아왔다. 사실혼 관계였던 러시아인 아내는 오지 않았다.

 

131 혁명 이후 멕시코 부유층은 에스파냐 화가 이그나시오 술로아가의 작품 대신 톨텍, 마야, 아스텍 문명의 신상을 수집했다. 민속 공예도 예술 작품으로 받아들여졌다. 단순한 골동품이나 잡동사니가 아니라 진정한 민중 정신의 표현으로 평가받았다. 수공예도 부활했다. 멕시코 도시민은 시장에서 파는 밝은 색 장식물이나 농가용 가구로 집안을 꾸몄다. 멕시코 도시 여성들은 멕시코 지방의상을 찬양하고 연구했으며 때로는 입고 다니기도 했다. 세련된 식탁에는 프랑스 요리대신 멕시코 음식이 차려졌다.

프라다의 멕시코주의는 개인적인 산물이 아니라 이런 시대적 환경의 영향을 받았다.

 

132 훨씬 더 순수한 입장에서 멕시코주의에 접근한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민족주의적 열정의 발로에서 멕시코주의에 접근한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민족주의적 열정의 발로에서 진정한 비식민 예술을 추구했고, 외국의 영향을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멕시코 민중 미술의 단순한 형식과 알기 쉬운 소재를 차용함으로써 유럽 아방가르드 회화의 엘리트적 가치에서 벗어나 보다 직접적이고 소박한 양식을 창안하려 했다. 외국 기업의 멕시코 유전 소유에 분개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멕시코가 유럽 양식을 모방하는 것에 분개했다. 디에고 리베라는 바로 이러한 민족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유럽의 전통과 멕시코의 뿌리를 융합해야 할 필요성을 솔직하게 인정할 때도 있었지만, 유럽 여행을 본떠서 멕시코 문화의 반식민 상태를 영속화하는 유럽의 시녀가짜 화가에게는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133 19285월에 바스콘셀로스 선거 운동에 참여하라는 멕시코 공산당의 부름을 받고 서둘러 귀국했다. (훗날 그는 자기가 대통령 출마 요청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133 8. 아름다운 루페 마린과의 결혼 생활은 이미 파경에 이르러 있었다. 결혼 생활은 시끄러웠다. 육체적으로 격렬하고 폭력적인 관계였다. ..루페에 따르면 결별의 원인은 디에고와 티나 모도티의 연애관계였다. 티나는 디에고가 차핑고 국립 농업 학교에서 벽화를 그를 때 루페와 함께 누드모델이 되었고 이때부터 그들의 관계가 시작되었다. 루페는 전에도 디에고의 바람기를 겪은 적이 있었다. 그녀는 인내를 배웠고, 때로는 앙갚음하는 법도 배웠다. 언젠가 루페는 놀란 손님들이 보는 앞에서 여자의 머리채를 잡아 뽑고, 디에고의 무수한 그림을 잡아 찢고, 남편에게 주먹 세례를 퍼부었다. 또 한 번은 디에고가 수집한 콜럼버스 이전 시대 신상들을 깨뜨려서 깨진 조각으로 수프를 만들었다. 그러나 루페는 차핑고 벽화 속에서 다른 여자와 함께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만은 참을 수 없었다. 루페는 두 딸과 함께 떠났다.

루페와 디에고의 두 딸이 떠남으로써 프리다 칼로에게 기회가 생겼다. 이런 식의 전철을 살펴보면 그녀역시 똑같은 방식으로 다른 여자의 존재에 속 썩을 거라는 게 예측된다. 그녀는 루페와 다른 방식을 선택할까?

 

133 여자를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는 누가 봐도 추남이었지만 철가루를 끌어당기는 자석처럼 자연스러운 여유를 가지고 여자를 끌었다. 사실상 괴물 같은 외모 자체가 그의 매력이었다. (그의 못생긴 외모는 야수 옆에서 미녀 역을 하고 싶어하는 여자에게 완벽한 조건이 되었다.) 그러나 더 큰 매력은 그의 개성이었다. 그는 재기와 활력과 매력을 갖춘 특별한 남자, 개구리 왕자였다. 그는 다정했고 굉장히 육감적이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점은 그가 유명하다는 것, 그리고 명성에 끌리는 여자들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리베라가 쫒아다닌 여자보다 리베라를 쫓아다니는 여자가 더 많았다.

나이, 외모 보다 개성, 그리고 명성 때문에 좋아함. 매우 유용한 무기.

 

멕시코 여자든 외국 여자든 디에고를 좋아하는 이유는 디에고가 여자들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는 여자들이 여러 면에서 남자보다 우수하다고 (예민하고 보다 평화를 사랑하고, 보다 품위가 있다고) 생각했다. “남성들은 원래 야만인입니다. 오늘날까지도 야만인입니다. 역사를 보면, 최초의 진보를 이룬 것은 여성입니다. 남성들은 싸움하고 사냥하는 짐승과 다름없는 상태를 더 좋아했습니다. 여성들은 집에서 예술을 익히고 산업을 일으켰습니다. 최초로 별을 관찰하고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습니다...이 세상에 여성에게 잘 보이려는 (남성의) 소망에서 나오지 않은 발명품이 있다면 내 앞에 가져와 보라고 하세요.”

 

이성에 대한 태도가 보통 마초와 이토록 다른 것은 유럽 체류 경험 때문인 것 같다. 어쨎든 그는 여자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고, 여성의 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이런 그의 태도는 그 당시, 특히 멕시코의 대부분의 여자들에게 흔치 않은 기쁨을 선사했다.

 

물론 리베라는 여성의 육체 또한 높이 평가했다. 그는 아름다움에 대한 열정을 지녔으며 시각적 쾌락에 엄청나게 탐닉했다. 디에고의 모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육체를 그의 눈과 몸에 바친다는 의미였다. 프리다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바람둥이라는 평판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매력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예로부터 여자들이 간직해온 자기 기만적인 소망(나는 그의 사랑을 붙잡고 지키는 사람이 될 것이다. 나에 대한 사랑은 특별할 것이다)의 노예가 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착각을 많은 여자들이 한다. 결국 그는 생긴 대로, 살아오던 대로 산다. 남자가 잘못한 게 아니라, 여자가 착각한 것.

 

135 의사들이 집 밖에 나가도 좋다고 하자마자 나는 그림을 들고 디에고 리베라를 보러 갔다. 당시에 그는 교육부 복도 벽화를 그리고 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 밖에 몰랐지만 그를 굉장히 존경하고 있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디에고, 내려와요.”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언제나 그렇듯 누구보다 겸손하고 다정하게 내려왔다. “이봐요. 당신이 바람둥이라는 건 알지만, 나는 수작을 부리러 온 것은 아니에요. 내 그림을 보여주러 왔어요. 흥미가 있으면 있다고, 아니면 아니라고 말해 줘요. 그래야 다른 일을 찾아서 부모님을 도울 수 있으니까.”

진짜 작가에게 물어봐도 좋겠다. ()의 대답이라면 계속 할지 그만 둘지를 결정할 수 있을 만큼 신뢰하는 작가나 코치에게.

 

137 그림에는 흔치 않는 표현력과 정확한 성격 묘사와 진정한 엄격함이 드러나 있었다. 야심만만한 초보자는 독창성이라는 미명하에 기교를 부리는 경우가 많지만, 그녀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녀의 그림에는 형태의 근원적 솔직함과 예술적 개성이 있었다. 그림에서 전해지는 생생한 관능미는 무정하고 민감한 관찰력으로 완성되었다. 내게는 이 소녀가 진짜 화가라는 사실이 분명해 보였다.

 

코끼리와 비둘기

 

 

140 그들이 어떻게 만났든간에 관계는 급속도로 진전됐다. 디에고는 일요일 오후마다 코요아칸에서 프리다를 만났으며, 프리다는 작업 중인 디에고 곁에서 보내는 시간이 점점 더 많아졌다. 루페는 디에고와 헤어진 후에도 끊임없이 질투했다.

전처 2명의 존재를 어떻게 존중할 건가? 그리고 수많은 여자들을 어떻게 대할 건가? 3번째 부인이면서 자유연애자인 남자를 선택한 프리다 결혼의 뻔한 과제

 

140 그녀의 솔직함이 그를 무장해제시켰고, 풋풋한 젊음과 가식없는 성적 매력이 묘하게 뒤섞여 그를 유혹했다. 그녀의 배짱과 짓궂은 장난은 그의 소년 같은 장난기를 자극했다.

 

141 디에고가 보기에 보기에 또 다른 매력은 민첩하고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정신이었다. 디에고처럼 그녀 역시 싫증을 잘 냈다. “그가 짜증을 내는 이유는 두 가지 뿐이다. 작업 시간을 뺏기는 것, 그리고 우둔함. 그는 한 명의 어리석은 친구보다 여러 명의 똑똑한 적이 낫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프리다와 디에고는 서로를 지루하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와 비슷한 친구를 가지게 된 것을 기뻐했다. 두 사람의 인생관은 아니러니와 유쾌함, 블랙 유머가 한데 목아들어 있었다. 그들은 부르주아 도덕률을 거부했고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토론했다. 한편 그들이 생각하는 사실주의는 판타지로 메워져 있었다. 그들은 현실적 태도를 존중하는 만큼이나 난센스와 상상력을 찬양했다.

 

141 프리다는 청년 공산당 연맹에 가입했고, 노동자 집회에도 참석했으며, 비밀 회의에 참석했고, 가끔 연설도 했다. 알레한드로 고메스 아리아스는 프리다의 변화를 아쉬워했다. “그녀는 더 이상 흰 블라우스를 입지 않았다. 그 대신 검거나 붉은 셔츠를 입었고, 망치와 낫이 그려진 에나멜 핀을 꽂았다. 남자들에게 신경 쓰지 않았던 그녀는 덧댄 청바지나 가죽 재킷을 입기도 했다.” 어쩌면 디에고는 이런 모습에도 반했을 것이다.

 

142 열애 기간 동안 프리다는 새로운 자신감을 가지고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그녀는 디에고가 세계에서 제일 위대한 화가라고 생각했다. 그가 자신의 작품을 좋아한다는 것은 그림을 계속할 가치가 있다는 뜻이었다.

 

142 현명하게도 디에고는 프리다에게 조언을 했을 뿐 가르치려 들지는 않았다. 그녀의 타고난 재능을 망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리다는 그를 스승으로 삼았으며, 그의 옆에서 그림을 배웠다. 그녀가 성숙해 감에 따라 디에고적 스타일은 사라지게 되었지만, 그의 가르침은 잊혀지지 않았다.

 

143 프리다의 색채는 (초기작에서 차용했던) 유럽적 전통에서 벗어나 있다. 파리에서 돌아온 디에고가 자신의 색채를 멕시코화하기로 결심했던 것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었다. 고전적회화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에 관습에서 벗어나기가 더 수월했을 수도 있다. 그녀의 모든 작품은 디에고보다 원시적이다. 프리다가 초기작에서 소박한 민속 기법을 차용한 까닭은 미숙함에서 오는 어색함을 위장하기 위한 것인 반면, 후기작의 원시주의는 멕시코적 색체와 함께 그녀가 의도적으로 선택한 효과적인 표현 양식이다.

 

144 디에고의 아이 그림 다수가 판에 막힌 귀여움(관광 사업을 계산에 넣은 동그란 뺨과 더 동그란 눈)을 보여주는 반면에 프리다가 그린 아이들은 언제나 특수성과 진정성을 보여준다. 디에고와는 달리 날카로운 관찰력이 필요한 디테일(커다란 귀, 빼빼 마른 팔, 뼈가 튀어나온 팔꿈치, 자꾸만 뻗치는 머리카락, 치맛단 밑으로 보이는 속옷)로 가득하다.

 

144 프리다의 지성은 디에고와는 다르게 나타났다. 그녀는 이론을 피하면서 특수성을 꿰뚫어 보았다. 옷과 얼굴의 디테일에 주목하고, 개개인의 삶을 포착하려고 했다. 디에고는 한발 물러선 추상적 고지에서 눈에 보이는 세계 전체를 포괄했다. 그의 벽화에는 사회 전체와 역사의 행진이 총체적으로 담겨있다. 반면에 프리다의 소개 (친구, 동물, 정물,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 자신)는 그녀 곁에 있었다. 그녀의 진정한 소재는 기쁨보다 슬픔을 포함한 자기 내면의 풍경이었다. 그녀의 이미지는 언제나 자기에게 일어난 사건들과 밀접하게 연관되며 체험의 직접성을 전달한다.

 

145 프리다는 도도해 보인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우리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당시에 그녀를 실제로 만났던 누군가는 그녀가 독수리처럼 눈부시다라고 말한 적도 있다. 그녀는 디에고에게 작업대에서 내려오라고 명령할 정도로 맹랑했던 동시에 그 말에 그가 서둘러 내려올 정도로 매력이 있었던 것이다.

 

146 디에고는 적어도 부유하고 관대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프리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가족까지 부양해줄만한 사람이었다. (실제로 디에고는 프리다와 결혼한 직후에 저당 잡힌 칼로 가족의 코요아칸 저택을 되찾아 주었다.)

프리다에게 이득이 많네. 남편의 바람질로만 뭐라 할 수 없군.

 

한때 프리다는 어머니가 인색하다고 비난했지만 정작 자기 딸이 부자와 결혼하는 것에 반대한 사람은 마틸데 칼데론이었다. 못생기고 뚱뚱한 마흔 두 살짜리 공산주의자, 게다가 무신론자인 그가 탐탁지 않았던 것이다.

 

147 아버지 말고는 아무도 결혼식에 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디에고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딸이 병자라는 것, 평생 병자로 지내리라는 것을 명심하게. 내 딸은 총명하지만 예쁘지는 않다네. 잘 생각해서 결혼하게. 그래도 결혼하고 싶다면 허락해주겠네.”

 

147 이들은 오래된 코요아칸 시청 건물에서 시장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148 루페는 디에고의 연애사에 무심한 척 하면서, 그의 결혼식에 참석할 정도로 마음이 넒음을 과시하고 다녔다...가까운 친구들과 친천들을 위해서 마련한 결혼식 피로연에 프리다는 거리낌 없이 루페를 초대했다. 그녀는 파티에 나타나 내무 즐거운 듯이 행동했다. 그러다가 프리다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신부의 스커트를 치켜들고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여러분! 이 막대기 두 개가 보입니까? 이게 바로 디에고가 나 대신 가지게 된 다리랍니다.” 그리고는 의기양양하게 그 집을 나갔다.

두 번째 부인은 결혼식 피로연에 초대받았다. 프리다로서는 그녀에 대한 유감이 별로 없었다. 루페는 나름의 유감을 그녀의 방식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두 딸이 디에고와의 사이에 있기 있기 때문에 디에고와의 연결은 영속적이다. 루페가 이런 태도를 지속한다면 프리다는 고생 좀 하겠다. 유감스럽게 헤어진 전처들의 모양새네. 루페는 디에고에게 화가 나 있는 것 같은데 프리다에게 푼다.

신혼부부

 

150 벽화가는 별로 믿을 만한 당직자가 아니었다. 항상 회의에 늦었고, 회의에 참석해서는 카리스마로 좌중을 압도하려 들었다. 결국 그는 자기를 당에서 제명하는 회의를 주재했다. 그러나 리베라는 여전히 공산주의자였고, 마르크스주의의 이상은 그의 작품에서 핵심적인 소재였다. “나는 집이 없었다. 그 때까지 내 집은 당이었다.”

 

151 그는 어느때보다 열심히 일했다. 프리다와 결혼한 그 달에는 산카를로스 아카데미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곳은 그가 어릴 때 다니던 예술 학교였다.

 

151 프리다는 결혼 초기에는 별로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디에고와의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일이었다. 디에고가 과로로 병이 났던 9월에는 그녀는 의사의 처방을 열심히 따랐고, 남편이 의사의 지시를 따르게 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디에고가 회복된 후에는 말도 안 되는 굴욕적 당재판에거 스를 응원한 정신적인 지지자가 되었으며 그가 당에서 축출될 때는 함께 당에서 나왔다. 디에고의 초인적인 작업일정도 프리다의 예술적 야망을 자극하지 못했다. 천재의 엯할은 남편에게 맡기고 어린 아내 역할에 만족할 따름이었다. 그녀에게 남편의 기분을 맞추는 방법을 알려준 건 루페 마린이었다. 어느 날 루페가 찾아와서 집 안을 둘러보더니 시장에서 냄비와 프라이팬을 사오라고 하고는 디에고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답례로 프리다는 초상화를 그려주었다. 디에고의 점심을 챙기는 법도 루페에게 배웠다.

프리다는 결혼에 만족해서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자기 작업을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현재로서 매우 행복하기 때문이다. 결혼 초기의 내 모습과 매우 비슷하다. 내 개인적인 목표나 직업적인 것은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었다. 스스로에 의해서. 참 이상하기도 하지.

 

153 프리다는 디에고가 그림 그리는 걸 구경하기도 했다. 그녀의 비판을 그는 기꺼이 수용했다. 그녀는 사람에게 있어서나 예술에 있어서나 오류와 가식을 재빨리 간파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는 해가 갈수록 점점 더 그녀의 판단에 의지하게 되었다. 프리다는 재치가 있었다. 듣기 싫은 말을 해야 할 경우에는 불확실한 제안이나 질문의 형식으로 표현함으로써 비판의 충격을 완화할 줄 알았다.

구경하고 훈수만 두네. 여자들이 흔히 하는 일.

 

153 리베라 부부의 허니문에는 권태 같은 것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따. 예술사학자 루이스 카르도사 아라공에 따르면 쿠에르나바카에서의 나날은 잠 잘 새 없는 모험과 대화의 마라톤 경기였다. 디에고는 일찍 일어나 일하러 나갓고, 프리다와 손님은 늦잠을 즐긴 후 성대하고 느긋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 가까운 마을로 산책을 갔다. 저녁이면 둘이서 디에고를 데리러 갔다. 그는 지는 해의 마지막 빛을 빌려 그림을 그리거나 어두운 램프 불빛 아래서 작업을 하곤 했다. ..이야기는 집에까지 이어지고 넑은 잃은 손님은 그를 괴물이라 불렀다. 결국 프리다는 지친 손님을 괴물에게 맡겨두고 자러갔다.

한편 디에고는 작업 속도를 전혀 늦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열심히 일한다. 어째서 이런 걸까? 어째서 그들은 결혼 적응에 프리다, 나만큼 힘이 안드는 걸까?

 

154 세 번째 자화상에서 묘사된 유부녀는 정면을 응시하는 대신 비스듬히 옆을 보고 있고, 눈동자에는 우수가 어린 듯 하다. 프리다는 임신 3개월에 태아의 위치에 문제가 생겨서 중절 수술을 받았다. 프리다가 결혼한 첫 해에는 아기를 낳을 수 없다는 좌절감 외에도 불행한 일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리베라가 젊은 조수 이오네 로빈손과 연인 사이가 되었다. 프리다는 어른이 되어서 겪게 되는 불행이 어린 시절에 겪었던 불행보다 가혹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젠가 그녀는 나는 일생 동안 두 번의 중대한 사고를 겪었다. 하나는 전차 사고였고, 하나는 디에고였다.” 라고 말했다. 그들의 결혼은 맹수간의 결혼처럼 보였다. 그들의 사랑과 전투와 이별과 곹오에는 보통 사람들이 함부로 비난할 수 없는 뭔가가 있었다.

아기를 원하는 여자의 유산, 남편을 최고로 치는 여자에게 남편의 여자, 우울할만 하네.

 

154 결혼생활 에 생긴 문제는 거의 전부 결혼 초기부터 문제가 되었던 것들이었다.

 

155 그가 불성실한 남편이었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프리다가 디에고에게 어머니 역할을 했다는 것은 거의 모두가 동의하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디에고도 결혼 초기부터 그녀가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프리다에게 아버지 노릇을 했다. 진실은 어디에 있을까? 그녀는 디에고를 증오하고 있을 때조차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의 소망은 그에게 좋은 아내가 되는 것이었다.

자신이 좋은 아내 역할에 충실한 것 까진 좋은데 남편에게 반대급부, 성실한 남편 역할을 기대한다.

 

156 디에고는 강하고 독립적인 여자들을 좋아했고, 프리다가 자기만의 친구를 갖고 자기만의 생각과 활동을 하기를 바랬다. 그는 그녀의 작품 활동을 격려했고, 독특한 자기 스타일을 살리라고 독려했다. 그가 새로 지은 신혼집도 사실상 두 채로 분리되어 있었으며, 두 채를 연결하는 것은 다리 하나 뿐이었다. 그는 그녀가 경제적으로 독립하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이나 결혼 전의 성을 그대로 쓰는 것을 좋아했다.

 

156 그에게 있어서는 그림이 그녀보다 먼저였고, 혹은 자기 삶을 일련의 전설들로 각색하는 작업이 먼저였다. 그러나 그녀에게 있어서 그는 늘 최우선이었고 예술도 예외가 아니었다.

157 프리다는 점차 자신을 디에고에게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 만들어 나갔다. 남편에게 취약한 부분과 모자란 부분을 정확하게 알아차린 그녀는 이러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서 발 벗고 나섰다.

 

158 그녀가 결혼 예복으로 인디언 하녀의 옷을 빌려 입은 것은 자유분방하고 스스럼없는 성격 때문이 아니다. 프리다는 테우아나 의상을 입으면서 새로운 정체성을 선택한 것이며, 이러한 선택에는 수녀를 꿈꾸는 여자의 열렬한 믿음과도 흡사한 것이 있었다. 소녀 시절부터 프리다에게 옷은 일종의 언어였다.

 

158 그녀가 좋아했던 복장은 테우안테펙 여성의 복장이었다. 이들에 관한 전설 때문이었을 것이다. 테우안테펙의 여자들은 기품 있고 아름답고 감각적이고 지적이고 용감하고 강인하기로 유명했다. 전설에 따르면 테우안테펙은 모계 사회로서 여자들이 장사를 하고, 재정을 맡고, 남자들을 거느렸다. 복장 자체도 아름답다. 자수 블라우스와 긴 치마를 입었고, 옷감은 주로 보라색과 붉은색 벨벳이엇으며 치맛단은 흰색 면직으로 주름을 잡았다.

 

159 그녀는 인디언 샌들과 가죽 장화를 신었다.

 

159 프리다에게 의상은 일종의 파레트였다. 그녀는 날마다 세상에 보여주고 싶은 자기의 이미지를 선택했다. 그녀가 옷을 차려 입는 광경을 보았던 사람들은 그녀가 의상에 들이는 시간과 노력, 완벽주의와 꼼꼼함을 기억한다. ..이국적 복장과 함께 머리도 다양한 모양으로 꾸몄다.

 

160 프리다가 테우아나 의상을 선택한 것은 멕시코주의를 받아들인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다. 즉 디에고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서였다. 디에고는 테우아나 의상을 좋아했고, 종종 테우안테펙을 찾아가 사람들이 일하고 노는 모습을 그렸다. 프리다에게 구혼하는 와중에도 테우아나의 아리따운 처녀와 사귄다는 소문이 있었다.

에스파냐 인디언과 포르투갈계 유대인의 혈통을 물려받은 디에고는 프리다 가계의 인디언의 요소를 부각시키는 것을 좋아했으며, 그녀가 진정하고 순수하고 원시적이라고 칭송했다.

 

160 사실 프리다는 부르주아 가정에서 자라난 도시 소녀였고, 후에는 상류 보헤미안으로서 멕스코 인디언의 소박한 삶과는 무관한 환경에서 살아왔다. 원시의 가면 덕분에 여성들은 가혹한 부르주아 도덕률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물론 정치적인 의미도 있었다. 토착 의상을 입은 것은 민족에 충성을 표명하는 방법이었다. 디에고는 프리다의 의상을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161 프리다와 디에고는 결혼하는 순간부터 상대방의 인생 연극에서 중요한 역할을 연기하기 시작했다. 테우아나 의상을 입는 것은 프리다의 설정의 일부였으며, 이를 통해 저널적인 인물인 디에고의 완벽한 동반자로서의 자격을 확보했다.

 

161 프리다는 사람을 대신하는 옷의 마력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일기에서 테우아나 의상이 부재 중 초상화라고 말했다.

 

161 프리다의 의상은 언제나 사회적인 의사소통의 형식이었으며, 나중에는 고독의 해독제가 되었따. 말년에 병세가 악화되고 찾아오는 사람의 발길이 끊겼을 때, 그녀는 날마다 축제를 준비하는 사람처럼 단장했다.

 

161 의상은 가면인 동시에 뼈대였다. 옷은 외면적 정체성을 드러냄으로써 내면적 고통을 감추는 효과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상처와 불편한 다리를 숨기고 싶었다. 정교한 포장은 자신의 신체적 결함, 자시가 부서지고 무너지고 죽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보상받으려는 몸부림이었다.

 

 

그링고의 나라

디에고가 벽화를 의뢰받아 부부는 미국에 체류한다. 디에고는 벽화를 그리고, 미친 듯이 작업해서 전시회를 한다. 프리다는 파티와 리셉션에 참석한다. 프리다는 주치의가 된 의사에게 편지를 보내서 디에고를 위해 편지를 써달라고 한다.

 

173 <루터 버뱅크>는 프리다 칼로가 실제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화가가 아니라 판타지를 그리는 화가가 되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최초의 작품이다. 이런 변화를 촉발한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174 프리다는 <프리다 리베라와 디에고 리베라>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일종의 결혼식 초상화로 결혼하고 1년 반 만에 그리기 시작했다..정보는 리본에. 멕시코 식민시대에서 유래.

 

 

디트로이트와 헨리포드 병원

 

193 193274일 프리다는 유산했다. 6시에 구급차가 와서 산통을 겪고 있는 그녀를 실어갔다. 핏물이 흥건했고 계속해서 검붉은 핏덩어리를 쏟아냈다. 구급차로 헨리 포드 병원으로 실려갔다. 13일 입원

 

195 프리다는 죽은 아기를 그리고 싶었다. 유산되던 순간의 아기 모습을 정확히 보고 싶었다. 입원한 다음날 그녀는 한 의사에게 관련 삽화가 들어 있는 의학 서적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지만 거절당했다. 병원에서는 책 속의 그림이 환자에게 충격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의학서적 보는 것을 금했다. 프리다는 몹시 화를 냈다. “당신이 다루는 이 환자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오. 프리다는 그것을 가지고 할 일이 있어요. 그녀는 예술작품을 만들려는 겁니다.(디에고)” 결국 디에고가 의학 서적을 구해다 주었고, 그녀는 신중하게 남자 아기 연필화를 완성했다.

 

195 ‘자동기술이라는 초현실주의 기법을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이미지는 자유 연상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 같다.

 

197 ‘헨리 포드 병원에는 19327월이라고만 쓰여 있다. 이 그림은 프리다 칼로를 당대의 가장 독창적인 화가로 만들어준 끔찍한 자화상 연작 중 첫 번째 작품이다. 작품의 질이나 표현력에 있어서 그녀가 이전에 그렸던 모든 작품을 능가한다. 리베라는 유산 이후 그녀의 그림에 나타난 변화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프리다는 미술 사상 전례 없는 걸작들을 연달아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 작품들은 진리, 현실, 잔인함, 고통이라는 영원한 여성적 가치를 보여준다. 프리다가 디트로이트에 머물던 때만큼 고통에 찬 시를 화폭에 담았던 여성은 이제껏 아무도 없었다.” ...프리다는 병원 침대에 나체로 누워서 피를 흘리고 있다. 굵은 눈물이 뺨 위로 흐르고 아기를 가져서 배가 나와 있다. 자기 몸을 미화시키지 않는 것은 프리다의 특징이다. 그림의 육체는 여성이 바라본 누드이지 남성의 눈으로 이상화된 누드가 아니다. 그녀의 불룩한 배 위에는 여섯 개의 핏줄 같은 붉은 줄이 있는데, 유산할 당시의 그녀의 감정을 상징하는 사물들이 줄 끝에 매달려 있다. 태아, 유산으로 흘린 핏물 위에 아기를 놓았고, 남성의 생식기를 그려넣었다. 그녀는 아기가 작은 디에고이길 원했다. 태아를 포함하여 모성의 실패를 상징하는 모든 물체는 실제 크기와 상관없이 프리다와 거의 같은 크기로 그려졌다. 프리다에 따르면 분홍색 몸통과 받침은 나름대로 여성의 내장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다친 등뼈..척추 측만..상황을 바로잡고 싶었던 프리다는 유산의 주요 원인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정확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의학 서적의 골반 도판을 그대로 본떠 그렸다...달팽이가 더딘 유산 과정을 나타낸다고 언젠가 프리다는 설명했다. 유사은 달팽이처럼 부드럽고, 감춰져 있으면서 동시에 열려 있는 것이었다. ..줄기가 돌출된 섬뜩한 연보라색 난초는 적출된 자궁처럼 보인다. ..프리다의 병원 침대는 푸른 하늘 아래 광막한 들판 위에 떠 있다. 그녀는 고독과 외로움을 표현하기 위해서 침대 아래 지면을 흙색으로 칠했다고 말해 놓고...이불이 없는 채로 시뢰에 놓여 있는 침대는 그녀가 무력하게 노출되어 있는 느낌을 자아낸다. 많은 입원 환자들이 겪는 느낌이다. 픨다는 마음 붙일 곳 없이 떠다니고, 주위로부터 단절되어 있으며, 공허하고 무방비한 상태다.

199 우울증과 싸우는 프리다를 돕기 위해 뤼시엔고 디에고는 힘을 합해 그녀가 다른 일에 몰두하게 하려고 했으며, 기운을 차리는 즉시 아프트 밖으로 데리고 나가려고 했다.

 

200 팔레트를 들고 있는 세 번째 팔이 있다. 아마도 그림이 모성의 실패에 대한 해독제라는 것, 프리다에게 예술작품을 낳는 일은 아이를 낳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리라. 프리다는 (디에고의 계산에 따르면) 그 후로도 세 번이나 출산을 시도했다. 그녀는 남편이 더 이상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이를 가지면 그에 대한 영향력이 커질 거라고 확신했다.

 

201 프리다가 간절히 아이를 원했다는 증거는 코요아칸의 푸른 집에서 발견된다. 그녀는 출산에 관련된 책을 많이 샀고, 1941년에 엘로에서 박사가 포름알데히드 병에 담긴 태아를 선물하자 침실에 잘 보관했다. 또 상당수의 인형과 인형 집을 수집했다.

 

202 프리다는 아이를 가고 싶은 소망을 다른 사람의 아이들에게 전이시켰다. 특히 디에고와 루페 마린의 두딸, 크리스티나의 두 남매를 사랑했다.

 

202 수많은 애완동물에도 따뜻한 관심을 쏟았다. 한 무리의 강아지와 여러 종의 원숭이, 고양이, 앵무새, 비둘기, 독수리 한 마리, 사슴 한 마리를 키웠다. 원숭이와 앵무새가 프리다의 자화상에 등장할 때는 아이들 대신인 것처럼 보였다.

 

202 그녀는 정원의 식물들을 갓난아기처럼 정성스레 보살폈다. 그녀의 꽃과 열매는 마치 살아 있는 것 같다. 왕성한 생식력에 대한 강박관념을 식물들에게 한껏 투사했기 때문이다.

 

202 그녀의 많은 그림이 생식에 대한 매혹을 표현하고 있고, 어떤 작품은 불임에 대한 절망을 직접 반영하고 있다.

 

202 그림은 불임이라는 강박관념에 대한 최고의 해독제였다. (불임은 그녀의 수많은 자화상의 배경으로 사용되는 사막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내 그림은 고통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림은 삶에 의해 완성된다. 나는 세 아이를 잃었다. 그림이 이 모든 것을 대신해 주었다. 일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203 프리다는 유산의 충격을 받은 데다 다시는 임신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는 죽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녀는 너무도 삶에 대한 집착이 강했고 불행에 유연하게 대처했기 때문에 비탄에 잠겨 있지만은 않았다. 그녀는 원기가 회복되자 매일 디에고의 도시락을 커다란 멕시코 바구니에 담아서 미술학교를 찾아갔다. 디에고는 엄격한 식단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프리다는 평소보다 그리고 디에고가 원하는 양보다 적은 양을 준비했다.

 

203 점심 식사가 끝나면 프리다는 그림을 그리거나 뜨개질 또는 독서를 했고 혹은 그냥 디에고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일을 잠깐 쉬는 동안 그녀는 디에고의 조수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 그들 모두는 프리다가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고 기억한다.

 

204 그녀는 아버지로부터 결벽증과 정리벽을 물려받았지만 훈련된 작업 습관을 물려받지는 못했다. 친구들이 찾아오면 그녀는 하던 일을 멈추었다. 손님이 진 와이트처럼 유행에 대해서나 떠들어 대며 자기를 지겹게 할 것을 이미 짐작하고 있는 경우라 해도 바쁘다는 말을 못했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는 오랜 시간 꼼짝 안했다. 이른 아침부터 디에고의 점심을 갖다 줄 때까지 작업에 열중했다. 하루를 잘 보낸 날의 프리다는 생기가 넘쳤다.

 

204 남서용 작업복을 입지 않았다. 주름 달린 앞치마 아래 장식 많은 멕시코 의상을 입었다. 유화작업보다는 축제에 어울리는 옷이었다. 하지만 일단 일을 시작하면 완전히 몰두했다. “나는 속도를 낼 때가 아니라 인내를 가질 때 잘 그린다. 나의 그림에 최소한 몇 명은 관심을 가져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205 리베라의 제안으로 프리다는 금속판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그녀의 그림은 멕시코 봉헌도 혹은 레타블로와 더 비슷해졌다.

 

205 <헨리 포드 병원>은 프리다가 처음으로 금속판에 그린 그림이며, 또 양식과 소재, 규모 면에서 처음으로 멕시코 봉헌도를 모델로 한 작품이다. 레타블로에서 재앙의 희생자가 살아남는 모습을 기록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프리다가 자신의 유산을 기록한 것 역시 리베라의 아이디어였을 것이다. 1932년부터 시작한 레타블로는 픨다의 그림이 원시성을 벗어나 사실주의적으로 변모한 후에도 여전히 그녀의 주요한 양식이 되었다.

 

206 프리다의 레타블로는 페타블로처럼 보이지 않는 지극히 독창적인 것이다. 자신과 세계의 내면을 동시에 그려내기 때문이다. .그녀가 사실과 환상을 결합하는 방식은 레타블로와 흡사하다. 또 밑그림에 소박한 정성을 들이며 기이한 색을 선택학, 원근법이 어색하고, 공간 구성이 초보적이고, 행위가 집약적으로 표현된다는 점도 레타블로의 분위기와 유사하다. ..프리다의 그림이나 레타블로는 육체적 고통을 여과없이 세밀하게 표현한다는 점에서도 공통분모를 갖는다....레타블로는 하늘에 감사하는 시각적 영수증 내지 감사편지인 동시에, 미래의 위험에 대비하는 방패이자 축복에 대한 보증이다.

 

207 해와 달의 병치는 그녀 작품 세계에 있어 가장 강렬한 상징 중 하나가 되었다. 그것은 하늘과 땅의 힘의 결합, 아스텍 사상에 나타나는 이중성(빛과 어둠, 과거와 현재, 낮과 밤, 남성과 여성)에 대한 관심을 표현한다. “고대 멕시코 신화 같은 대부분의 자연 종교에서 하늘이 주인은 해와 달이다. 해는 남성적 원리로서 다산과 생명을 주관하며, (일부 멕시코 전통에서는 대지)는 여성적 원리로서 신과 인간의 어머니다.”

 

212 <나의 탄생>은 멕시코 여행 전에 구상되었지만 디트로이트에서 돌아온 이후 완성했다. 디에고는 프리다에게 일생을 기록하는 연작을 그려보라고 권유했는데 이것은 그 첫 번째 작품으로 그녀의 표현에 따르면 내가 태어나는 장면을 상상한 것이다. 지금까지 만들어진 출산을 다룬 이미지 중에서 가장 압도적인 것의 하나다.

 

213 아스텍인들의 종교에서 분만 중인 여성은 희생 제물을 포획한 전사와 대등한 존재이다. 새 시대의 탄생을 알리기 때문이다.

 

214 스스로를 낳은 사람, 자기의 살을 가지고 가장 멋진 시를 쓴 사람 (프리다의 일기)

 

214 그녀는 자기를 낳은 어머니와 자기가 유산한 자식을 잃은 이중의 상실감을 견뎌야 했을 뿐 아니라 디에고의 신경질도 상대해야 했다. 디에고는 살이 빠지면서 육체와 정신이 황폐해졌다.

 

215 그는 자정에 작업을 시작할 때가 많았다. 조수들이 벽면 일부에 새로 회반죽을 바르고 안료가 스며들어 적당한 강도로 마를 때까지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우선 밑그림을 그리고 회색과 검정으로 하이라이트를 주었으며 첫 새벽 빛으로 채색을 시작해 점심 시간까지 작업이 계속되는 경우도 많았다. 얼마 되지 않은 자유시간도 늘 프리다와 함께 보내지는 않았다. 디에고는 디트로이트의 멕시코인 공동체에서 생활했다.

 

216 그녀가 디트로이트에서 그림을 그린 것은 남편이 오랫동안 디트로이트 미술학교 정원에서 작업해야 하는 시간을 견디기가 너무나 힘들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와 혁명가들

 

218 디트로이트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냈다. 규칙적으로 그림을 그린 건 아니었다. 디트로이트에서 그림을 그린 건 다만 시간을 견디기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좀 더 가볍게 흘러가자 거의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그녀는 8개월 맨해튼 체류 기간 동안 단 한 작품밖에 그리지 못했으며, 그나마 그 한 점도 이곳에서 완성한 건 아니었다. 그림 그리는 대신 책을 읽고, 집안을 돌보고, 친구를 만나고 영화 보고 쇼핑을 했다. 놀이도 즐겼다.

 

221 넥슨 록펠러는 레닌의 초상을 익명의 얼굴로 대체해 달리는 편지를 보냇다. 레닌의 초상이 수많은 사람의 심기를 거스를 것이라고 주장했다...그 몫의 보수 총액 수표와 해고 통지서를 받았다.

 

227 루이스 네벨슨은 아름답고 쾌할하고 의지가 당한 삼십대 초반의 이혼녀로 열정적인 예술 숭배자 겸 남자 숭배자였다..곧 모든 조수들은 리베라가 루이스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27 프리다는 건강이 나빠졌고,(오른발에 마비) 외로웠다...저녁 내내 작은 푸딩 수천 개를 만들었다. 디에고가 돌아오면 먹이려는 것이었다. 디에고가 프리다에게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루페 마린과 ..에게 프리다가 그림을 그리도록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다.

 

231 프리다는 사람 대신 옷만 걸어둠으로써 옷은 맨해튼에 걸려 있을지 모르지만 자기는 다른 곳에 있다고 그링고의 나라에 속하기 싫다고 말한다. 옷은 아직 후기 작품에서처럼 고뇌 어린 상징은 어니지만 이미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프리다는 벗어놓은 옷이 일으키는 감정적 반향을 알고 있었다. ..프리다는 거대한 변기와 황금빛 골프 트로피를 단상에 올려 놓음으로써 북아메리카의 위생에 대한 강박과 스포츠에 대한 국가적 관심을 비웃는다.

 

작은 칼자국 몇 개

 

235 산앙헬 새로 지은 집. 두 채의 집은 디에고의 프리다의 색깔 (디에고의 집은 분홍색, 프리다의 집은 파란색)과 담장 대신 서 있는 오르간 파이프 선인장 덕분에 멕시코다워졌다.

 

236 프리다는 행복하지 않았다. 1934년에는 한 해동안 전혀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이듬해에는 단 두 작품을 완성했다. <작은 칼자국 몇 개>, <자화상>이다.

 

237 삶에 의해 살해당할 지경이라니? 리베라 부부가 멕시코로 돌아온 직후 몇 달 지나지 않아 단란한 새 생활을 시작하고 싶다는 프리다의 소망은 깨졌다. 디에고가 그녀의 동생 크리스티나와 연애를 시작한 것이다. 고통의 나날을 보내던 프리자는 디에고가 좋아하던 긴 머리를 잘라 버렸고, 테우아나 의상도 더 이상 걸치지 않았다. 닥쳐 온 고통이 너무 커서 도저히 가록할 수 없다는 듯, 그녀는 자기 경험을 그리는 대신 자신의 고통이 투사된 다른 여자의 불행을 모셔하 <작은 칼자국 몇 개>를 그렸다.

 

237 리베라는 멕시코로 돌아오고 싶어하지 않았으며 프리다에게 자기를 돌아오게 했다면서 골난 아이처럼 화를 냈다.

 

237 그는 화가 나고 의욕이 없어서 일을 하지 않았다. 건강 악화도 비참한 기분에 일조했다. 디트로이트에서 무리한 다이어트 때문에 몸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늘어져 버렸고, 내분비 장애와 우울증과 극심한 짜증에 시달렸다. ..“약하고 마르며 혈색이 나쁘고 도덕적으로 고갈된 상태라고 말했다.

 

238 그는 지금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다 내 탓이라고 생각해. 내가 그를 멕시코로 돌아오게 했으니까

아내 여동생과의 연애는 복수?

 

238 프리다 자신의 건강도 디에고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그녀는 1934년 한 해 동안 세 번이나 입원했다. 한번은 맹장수술, 한 번은 임신 석 달 째의 낙태수술, 세 번째는 발 때문이었다.

 

238 디에고가 우울증과 무력감에 시달려 일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재정 상태도 나빴다. 그러니 당연히 크리다는 동생 크리스티나에게 위로를 구했을 것이다. 크리스티나는 1930년에 아들을 낳고 남편에게 버림을 받았으며, 코요아칸의 파란담장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며 아이들을 키우고 있었다. 자매는 여러모로 보나 서로에게 보완적인 존재였다. ..크리스티나는 쾌활하고 인정많고 여자다웠다. ...크리스티나가 언니를 배신한 것은 경쟁심 때문일수도 있지만 악의가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디에고에게 압도당했으리라는 추측이 맞을 것이다. 리베라는 그녀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말하며 처제를 유혹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그녀를 필요로 했다. 프리다가 중절 수술을 한 후 의사로부터 성관계를 자제하라는 주의를 받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유야 어떻든 처제와 바람이 난 것은 파렴치한 행동이었다. 언제나처럼 무심코 저지른 일이었고 프리다에게 상처를 주려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여자를 사랑할수록 상처를 주고 싶어했다. 프리다는 나의 이런 못된 성격의 희생자일뿐이다.”

 

242 크리스티나와 리베라의 관계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오래간 것 같다. <작은 칼자국 몇 개>1935년까지 계속되었음을 말해주는 증거다. 그 해 초에 프리다는 산앙헬 집을 나와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거미 원숭이를 데리고 멕시코시티 중심가 인수르헨테스 거리 432번지 조그만 현대식 아파트로 들어갔다. 이것이 그들의 첫 번째 별거였다. ..이때부터 이상한 규칙이 생겼다. 프리다와 디에고는 따로 살았지만 계속 만났다. 그는 옷 몇 벌을 그녀의 아파트에 놔두었고 자매에게 똑같이 잘해주려고 애썼다.

 

242 프리다가 아파트를 구한 것은 디에고로부터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일 뿐 아니라 자기만의 인생을 창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242 그녀는 강한 모습을 보였다. 명랑하게 행동했고, 신랄한 유머로 남들을 즐겁게 만들기도 했다. 몇몇 친한 친구는 그녀가 어마나 힘든지 알았을 테지만, 새로 사귄 사람들은 그녀의 불행을 짐작도 못했다.

 

243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

우리가 함께 산 7년 동안 이런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울화가 치밀었지만 그 덕에 결국 나는 나 자신보다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당신은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만큼 나를 사랑하지는 않았지마, 그래도 금은 나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렇지요?”

 

244 <작은 칼자국 몇 개>는 상처가 아물지 않았음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한편, 고통 때문에 감상에 빠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245 희망과 마찬가지로 유머도 그녀가 인생이라는 전쟁터에서 살아남게 해 준 버팀목이었다.

248 <추억>은 프리다가 디에고와 크리스티나 사건으로 입은 상처를 통해서 좀 더 독립적이고 강인한 여성(자신의 약점을 드러냄으로써 강해지는 여자)으로 탄생했음을 보여주는 반면에 <벌어진 상처를 기억하며>는 프리다가 질투심과 배신감이라는 벌어진 상처를 가지고 새로운 개방성을 만들어냈음을 보여 준다.

 

 

트로츠키

 

249 사고 이후 프리다가 말괄량이 소녀에서 벗어나 슬픔에 맞설 수 있는 강인한 의지와 깊은 우수를 간직한 여인이 된 것처럼, 디에고와 크리스티나의 연애 사건 이후에는 남편을 사모하는 신부에서 벗어나 보다 복잡한 여성으로 변해 갔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중요한배우자의 귀여운 부소물이 아니었고 그런 척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홀로 서는 법을 배워야 했다. (혹은 그런 척이라도 해야 했다.) 그녀는 한때 디에고의 영향권 안에서 그의 빛을 반사하며 그의 행복을 더해 주는 존재에 불과했지만, 이제 프리다가 발하는 빛은 디에고의 빛이 아닌 그녀만의 빛이었다.

 

249 리베라 부부가 살고 있던 두 채의 집과 이 두 집을 연결하는 다리는 상호 독립적인 동시에 상호 의존적인 그들의 독특한 관계를 상징한다. 두 집 모두 리베라의 소유였다. 프리다는 그에게 화가 나면 연결 통로를 잠가 버렸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계단을 내려와 정원을 지나서 그녀의 현관을 두드렸다.

소유가 그의 것인데 삐지면 가버리는 건 우습다. 의존적인 프리다.

 

249 돈은 디에고가 벌어왔고 프리다는 관리를 맡았다.

 

250 프리다는 최선을 다해 절약했고, 가계부를 꼼꼼하게 기록했다. 가계부는 프리다 칼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뜻밖인걸

 

254 그녀가 가방이나 속옷에 작은 술병을 가지고 다닌 것은 이 때부터였을 것이다. 그녀는 향수병에 술을 넣어다녔다. 향수를 뿌리려는 것처럼 블러우스 안에서 향수병을 꺼내서 재빨리 마셨다. 동작이 어찌나 빨랐는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가 무엇을 하는 지도 몰랐다.

 

255 프리다는 산앙헬로 돌아오고 몇 달 동안 디에고의 동지 겸 내조자로 입지를 굳혔다. 그의 응석을 받아주고 그가 아플 때 간호해 주었으며, 그와 싸우고 그에게 벌을 주고 그를 사랑했다. 그 또한 그녀를 후원했고 그녀의 재능을 자랑스러워했으며 그녀의 의견을 존중했고 그녀를 사랑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바람을 피웠다. 이제는 프리다도 바람을 피웠다. 프리다가 낮에 차를 사용하는 것은 남자 또는 여자 애인을 만나러 간다는 뜻이었다.

 

프리다는 국립예비학교 마지막 해에 동성애에 입문했고, 그 일로 큰 상처를 받았다. 그녀의 동성애는 디에고의 자유분방한 사상 세계에 발을 들인 후에 다시 나타났다. 여자 간의 사랑이 흔하고 용인되는 세계였다. 남자들은 작은집()’을 소유했고, 여자는 여자를 소유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프리다는 자신의 양성애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고 디에고도 프리다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255 디에고에 따르면 남자의 성기는 한 군데뿐이지만 여자의 성기는 온 몸에 있으니까 여자들끼리는 훨씬 더 특별한 체험을 할 수 있다.

 

255 프리다는 자신의 사생활을 은연중에 작품에 드러내곤 했으며, 동성애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두 명의 여자가 등장하는 일련의 자화상들은 그녀의 자기애와 정신적 이중성을 암시하는 동시에 동성애 성향을 드러낸다. 이는 전통적인 성별 구분이 사라질 정도의 깊은 관능 혹은 남녀를 불문하는 친밀함에 대한 절실한 갈망이다.

 

256 프리다는 디에고가 성적 만족을 주었는지 말하지 않았다. 자기들의 세계에 대해서 많은 말을 했지만, 그 부분에 관해서는 언급한 적이 없다. 하지만 그녀는 성욕이 아주 강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프리다의 강한 성욕은 동성애와 이성애를 막론하고 그녀의 모든 그림 표면에서 발산되고 있다. 그녀의 조야한 정물 속에도 깊이 스며 있다. 이러한 성 에너지가 정확히 어디서 감지되는 것인지는 알기 어렵다...그녀의 자화상은 아무리 소박한 것이라도 특유의 자장을 가지고 있어서, 지나가던 사람이 그녀의 활발한 모습에 끌리는 것처럼 관람객은 그녀의 초상 앞에서 걸음을 멈추게 되어 있다.

 

257 몸이 약해지고 이성애가 어려워진 말년에도 그녀는 여자보다 남자를 더 좋아했고 남자 애인들이 많았다. 자유연애를 신봉하는 리베라는 자신과 타인의 연애에 대해 허물없고 개방적인 태도를 취했고, 남성 우월주의적 성향도 없을뿐더러 여성을 존중하는 편이었지만, 그런 그도 아내의 이성애는 참아내기 어려웠다. 그래서 프리다는 이성 관계를 숨겼다.

 

258 노구치는 양말을 버리고 안뜰의 오렌지나무로 기어올라 지붕을 타고 도망쳤다. 물론 디에고는 양말을 발견했고 그런 상황에서 멕시코 마초에게 기대되는 수순을 밟았다. 노구치에 따르면 디에고는 총을 들고 쫒아왔다. 그 당시 리베라는 총을 일종의 신경 안정제로 사용했다. 총을 휘두르는 일로 마초로서의 자부심을 달랬을 뿐 아니라, 덕분에 정치적 자아도 지킬 수 있었다.

 

269 두 사람은 아가요 거리에 있는 크리스티나의 집에서 만났다. 다행히도 리베라는 이들의 관계를 눈치 채지 못했지만 6월 말이 되자 나탈리아가 질투로 깊이 절망에 빠졌다. 그녀는 열다섯 살에 트로츠키와 결혼해서 쉰 살이 되었고, 얼굴에는 지나온 세월의 흔적이 역력했다. ..트로츠키의 측근은 그의 연애 관계가 알려져 그가 세계적인 망신을 당할까봐 걱정했다.

 

273 브로통

이보다 더 철저하게 여성적인 예술은 없다. 최대한의 유혹을 위해서라면 극단적인 순수함과 사악함 사이를 기꺼이 오간다. 프리다 칼로의 예술은 폭탄에 두른 리본이다.”

 

화가로 홀로 서기

 

284 트로츠키와 프리다의 관게가 끝난 후 리베라 부부 사이에는 공존과 자유라는 생활 양식이 자리 잡았다. 프리다와 디에고는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놀았다. 연애 사건도 잦았다. 프리다는 디에고의 외도를 비웃으며 자기도 은밀하게 외도를 즐겼다. 또 그녀는 화가로서의 삶을 보다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고, 좀더 규칙적으로 작업하며 엄청나게 기교를 향상시켰다. 1937년과 1938년 사이에 지난 8년간 결혼 생활을 하며 그린 것보다 더 많은 그림을 그렸다.

 

287 프리다는 많은 작품을 그렸을 뿐 아니라 예술을 페르소나와 일치시키는 데에도 익숙해졌다. 또 기교도 더욱 향상되었고, 예술과 영감을 일치시키는 데도 훨씬 능숙해졌다. 세련된 기교로 삶에서 일어난 사건을 그리는 동시에 자신의 내면을 통찰했고, 내면과 세계의 관계를 인식하는 방식을 그렸다.

 

288 이 시기의 몇몇 작품은 프리다가 여전히 아이가 없다는 사실을 슬퍼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프리다는 1937년에 또다시 유산을 했거나 낙태 수술을 받은 것 같다.

 

290 어쩌면 <유모와 나><나의 탄생>과 마찬가지로 이중적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프리다의 한쪽이 다른 한쪽에 양분을 제공한다. 어른 프리다의 자아의 핵심이 이중성이라고 할 때 아기 프리다는 그녀의 생명을 유지하는 반쪽이다.

 

294 프리다의 정물화는 일종의 자화상이다.

 

296 프리다의 그림은 최대한 생생하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그녀의 현실을 표현했다. 다시 말해 그림은 프리다 칼로를 연출하고 프리다 칼로가 되는 일의 일부일 뿐 그 이상은 아니었다.

 

301 프리다는 홀로 선 화가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녔다. 그러나 리베라의 아내라는 점이 프리다의 전시회에 인기를 더해 준 것은 사실이다. 브르통의 카탈로그 논문에서도 프리다는 괴물 같은 마르크스주의자 남편과 같이 사는 아름답지만 독성 강한 나비로 소개되었다. 프리다와 리베라의 관계를 어떻게든 홍보에 이용하려 든 것은 화랑 측도 마찬가지였다.

 

 

지긋지긋한 도시 파리

 

319 프리다는 파리가 퇴폐적인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유난히 싫어했던 것은 보헤미안의 공허한 포즈였다.

 

물이 준 것

 

329 초현실주의자의 창시자가 프리다를 자기의 계보안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을 때 그녀는 당혹스러워싸. “앙드레 브르통이 멕시코에 찾아와 나더러 초현실주의자라고 하기 전까지는 내가 초현실주의자라고 생각지 못했다. 내가 아는 것은 단지 나는 그릴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림을 그린다는 것, 다른 의도 없이 그저 머리에 떠오르는 것을 그릴 뿐이라는 것이었다.”

 

331 이 땅에는 예부터 전해 내려온 고유한 마력과 신화가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외래의 판타지 개념 같은 것은 필요 없었다. 무의식의 진리에 대한 자의식적 탐구가 유럽 초현실주의자들에게는 합리적 세계와 부르주아적 일상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는지 몰라도, 현실과 환상을 혼합하여 인지하고 기적이 일상적 사건으로 받아들여지는 나라에서는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던 것이다.

 

332 그녀는 초현실주의자라기보다는 초현실주의가 발굴한 작가였다.

 

332 악마적이고 여성적인 매력 대신 새로운 신비와 매력, 자기 인식의 심화가 나타난다. 프리다가 살아온 고통의 세월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초현실주의가 잠재 의식을 예술적 내용의 원천으로 삼았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336 디에고

프리다의 예술은 개인적인 동시에 집단적이다. 그녀의 사실주의는 기념비적이며, 따라서 모든 것에 ‘n’가지 차원이 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외면과 내면 그리고 세계를 동시에 그려낸다.

 

340 프리다의 작품 중 가장 초현실주의적인 것은 그녀의 일기장이었다. 1944년부터 죽을때까지 일기를 썼다. 병들고 외로울 때 일기를 쓰는 일이 위안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친구가 선물한 것이다. 사적인 기록이라 남들에게 이해시킬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회화가 의존하고 있는 사실주의의 토대는 찾아볼 수 없다.

 

가시 목걸이

 

344 프리다가 고향에 돌아간 것은 낯익은 환경이 필요했기 때문이지만 머레이가 그녀에게 깊은 상처를 준 것도 분명하다. 그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고 이 둘은 9월에 결혼했다. 미국 미남에게 잔인하게 차였을 뿐만 아니라, 그 이유라는 것이 자신의 신체적 질환 때문에 성애의 육체적 표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347 니콜라스 머레이의 사랑을 잃고 다른 여자에게 밀려난 일이 프리다에게 상처가 된 것은 머레이와의 관계가 특별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디에고와 헤러지려 하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한여름이 되기 전에 프리다는 디에고를 산앙헬레 남겨 둔 채 코요아칸의 파란 담장 집으로 들어갔다. 919일에는 이혼 절차를 밟는 중이었고, 10월 중순에는 코요아칸 법원에 합의 이혼을 신청한 상태였다. 그래 말에 이혼이 성립되었다.

 

348 10워 언론 보도에 의하면 프리다와 디에고는 이혼이 자기들의 우정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350 이혼한 후에도 프리다와 디에고는 여전히 함께 다니고, 공식적인 자리에도 함께 나타났다. 미수르이 전당 콘서트홀레 갈 때마다 좌중에 동요를 일으켰다. 이들은 언제나 늦게 도착해서 리베라 전용 좌석에 앉았으며, 디에고의 딸들과 현재의 정부, 그리고 크리스티나 칼로나 루페 마린이 동행했다.

 

352 1939년 말 프리다는 절망감에 휩싸인 나머지 날마다 브랜디 한 병씩을 마셨다. 그녀는 외로웠지만 사람들, 특히 디에고와 함께 만났던 친구들을 피했다.

 

353 디에고 우리가 떨어져 살았던 2년 동안 그녀는 최고의 작품 몇 점을 만들었다. 자신의 고뇌를 그림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353 이혼서류가 통과되던 날 프리다는 아마도 그녀의 가장 유명한 작품일 <두 명의 프리다>를 거의 끝마친 상태였다.

 

356 <두 명의 프리다>는 자기 양육의 이미지다. 프리다는 자기를 위로하고 자기를 보호하고 자기를 강하게 만든다. 다른 종류의 이중성도 작동된다. 프리다는 몇 시간씩 거울에 비친 자신의 영상을 음미하며 그림으로 재현했고, 그러는 동안 자기가 두 가지 정체성(관찰하는 자이자 관찰당하는 자, 내면에서 느껴지는 자아이자 외부에서 보이는 자아)를 가지고 있다는 느낌은 점점 강해졌을 것이다.

 

358 이혼한 해에 그린 모든 자화상에는 프리다의 동료들 (해골, 유다상, 조카 남매, 또 하나의 자아, 애완동물)이 나온다. 그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원숭이다. ..원숭이는 덩치크고 심술궂고 질투 많은 그녀의 아이 디에고의 빈 자리를 채워줄 수 있었다...그녀가 가질수 없게 된 아이들을 대신했다. ...그녀의 피부 뒤에 숨겨진 짐승같은 야만성 암시한다.

 

359 멕시코에서 벌새는 사랑에 행운을 가져오는 마법의 부적이다. ..벌새가 걸려있는 프리다의 벗은 목은 벌써 피를 흘리고 있다. 벌새는 프리다가 친밀감을 느끼는 종족을 상징한다.

 

360 이 시기에 프리다는 그림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박차를 가한다.

 

361 프리다가 나약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할 때 관람자는 무심한 표정의 가면 뒤에 가득찬 모종의 감정과 그녀의 고통을 느끼게 된다. 자기 신화화 작업을 정성들여 수행함으로써 그녀는 슬픔에 압도되는 대신 슬픔에 대한 심리적 거리를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363 이혼 하고 한 달 후 프리다는 1934년 리베라와 크리스티나가 연애 행각을 벌였을 때, 저절렀던 보복을 되풀이했다. 그녀는머리를 잘랐다. 디에고가 좋아했던 테우아나 의상을 벗어버리고 남성복을 입었다. 지나치게 큰 것으로 보아 디에고의 것인 듯 하다. 프리다는 자신의 여성적 매력을 파괴하는 것으로 보복을 가했으며, 이로 인해 외로움은 더욱 깊어졌다.

 

373 <도로시 헤일> 자살한 장소의 비현실적인 황량함은 프리다 작품의 특징이다. 그녀가 진짜로 그리려 했던 소재는 고독 혹은 절망이다....디에고에게 버림받은 프리다는 왜 버림받은 여자가 송별회를 열었는지, 왜 가장 예쁜 옷을입고 창문에서 뛰어내렸는 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프리다는 살아남았다.

 

재결합

 

377 엘로에서 박사의 편지

디에고는 당신을 무척이나 사랑합니다. 당신도 그를 사랑하지요. 당신이 더 잘 알겠지만 그는 당신 외에도 엄청나게 사랑하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그림과 여자입니다. 그는 과거에도 일부일처제를 따르지 않았고 앞으로도 따르지 않을 거요. 일부일처제란 정신박약적이고 반생물학적인 제도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당신이 이런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따면, 이런 상황에서 그와 함께 평화롭게 살기 위해 작업에 몰두함으로써 질투심을 묻어 버릴 수 있다면,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가르치고 무슨 일이 있건 간에 밤마다 이레 지쳐 잠자리에 들 때까지 그림에 몰두할 수 있다면, 진실로 그렇다면 그와 결혼하세요. 잘 생각해보고 결정하세요.”

 

381 디에고는 여러 차례 그녀에게 청혼했고, 그때마다 엘로에서 박사가 다리를 놓았다. 박사는 프리다에게는 디에고가 변하지 않을 거라고 경고했고, 디에고에게는 이혼이 프리다의 병을 악화시켰으며 그녀와 다시 결혼하는 것이 그녀의 건강을 회복시키는 길이라고 말했다... 디에고는 이혼이 두 사람 모두에게 악영향을 끼친다고 말했다.

 

382 디에고가 당신에게 끌리는 이유는 당신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에요. 그가 완전히 당신을 구속하지 못한다면, 계속 당신을 찾아다니며 필요로 할 거예요. 물론 사람들은 그의 곁에 마물면서 그를 돕고 돌봐 주는 동반자가 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그는 바로 그런 것을 견디지 못해요. 그는 골목을 한 번 꺽을 때마다 사랑에 빠지는 인간이에요 당신이 계속 잡히지 않는 곳에 있다면 그는 당신의 사람이 될 겁니다. 당신이 계속 유혹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완전히 구속되지 말고 자신의 인생을 사세요. “이게 나다. 나는 가치 있는 인간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뭔가가 내면에 자리 잡고 있을 때 위기도 그자지 힘겹지 않을 거니다.

 

383 1940128일 디에고의 쉰네번째 생일에 프리다와 디에고는 두 번째 결혼식을 올렸다...언제나 그림을 사랑했던 리베라는 결혼식이 끝나자 트레이저 아일랜드로 그림을 그리러 가 버렸다.

 

384 리베라 부부의 화해는 안락하고 그런대로 행복한 일상으로 정착되었다. 이러한 생활은 더 이상 디에고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합의 내지 타협으로 이루어졌다. 그때부터 프리다는 어느 정도 자주적인 인생을 살게 되었다. 그녀는 전시회를 통해서 그리고 경제적, 성적으로 자율성을 고집함으로써 자신감과 독립심을 얻었으며 디에고에게 점점 더 모성적 애정을 느꼈다.

 

386 그는 언제나 프리다의 작품에 경외심을 갖고 있었다. 부정적인 말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그녀의 상상력에 끊임없이 경탄을 표햇으며 그녀는 나보다 훌륭한 화가다라고 말했다. (에미 루)

 

387 프리다는 집안일도 즐겼다. 디에고를 위해 집을 꾸미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 기쁨이었다. 디에고도 집안일에 자주 관여했다. 프리다는 디에고와 상의한 다음 부엌 벽면에 파란색, 노란색, 빨간색 타일을 붙이고 전통적인 시골 부엌처럼 개조했다. 부엌은 멕시코 느낌이 물씬 풍겼다. 커다란 토기 냄비가 타일 선반에 놓였고, 벽에 걸린 조금나 도자기 머그컵들이 프리다와 디에고라는 글자를 만들었다.

 

388 프리다는 디에고를 위해서 날마다 탁자를 한 폭의 정물화로 만들었다. 아침 시장에서 가져온 커다란 꽃다발을 포장지째 토기 꽃병에 꽂아 놓고 유리와 과일을 함께 배치해 놓았다. 디에고는 항상 감상하기 제일 좋은 자리인 탁자 끝에 앉았고 프리다는 식탁 풍경에 동물로 활기를 불어넣기를 좋아했다. 새장 속에는 줄무늬 다람쥐가 있었고 작은 앵무새 한 마리는 풀어놓고 키웠다.

 

390 디에고와 에미 루는 영화관 앞에서 인파에 밀려 프리다를 찾을 수 없었다. 디에고는 휘파람으로 인터내셔널가 첫 소절을 불렀다. 군중 속 어딘가에서 다음 소절이 이어졌다. 분명 프리다였다. 휘파람은 부부가 서로를 찾을 때까지 계속 되었다.

 

후원, 정치, 인기

 

401 세월이 흐르고 자식을 가질 수 없는 것이 기정사실이 됨에 따라 프리다는 자연에 대하여 점점 더 특별한 교감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402 자연의 다산성은 프리다에게 임신의 좌절을 가슴 아프게 환기시켰다. 실제로 그녀는 <태양과 생명>을 그릴 당시 또 한번의 유산을 경험했다. 리베라의 아이가 아닌 다른 애인의 아이였다.

 

402 프리다는 1944년 한 비평가에게 자기가 그림을 그릴 수 밖에 없는 세 가지 이유에 관해 얘기했다. 첫째는 어린 시절 사고 당시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를 생생하게 기억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녀가 탄생과 죽음, 그리고 생명을 이끄는 끈을 생각하기 때문이고, 셋째는 어머니가 되기를 소망하기 때문이다.

 

414 라에스메랄다의 교사들에게는 멕시코 전체가 화실이었다. 그들은 학생에게 석고상을 데생하거나 유럽 모델을 베끼게 하는 대신에 거리와 들판으로 내보내 자연을 보게 했다. 그들의 목표는 화가 양성이 아니라 개인의 창조적 개성이 후일 예술에 표현될 수 있도록지도하는 것이었다.

 

415 그녀는 걸어다니는 꽃과 같았다.

 

417 나라면 이렇게 하겠어. 하지만 나는나고 너는 너지. 내 생각은 하나의 의견일 뿐, 틀릴 수도 있어. 도움이 된다면 내 말대로 하고, 아니면 네 생각대로 해라.

 

 

작은 사슴

 

434 말년에 프리다는 자기가 1944년 이후에 장착했던 정형 장치들과 그것에 수반된 징벌같은 치료법들에 대해 설명했다. 정형 장치는 전부 스물여덟 개였고, 강철로 만든 것이 하나, 가죽으로 만든 것이 셋, 나머지는 석고였다. 프리다는 그중 하나가 특히 힘들다고 말했다.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없었다. 그녀는 너무 화가 나서 장치를 떼어버리고 허리띠로 상체를 의자 등판에 묶어서 척추를 고정했다. 언젠가는 3개월 동안 수직 자세로 발에 모래 자루를 매달아 척추를 곧게 폈다.

 

435 깁스가 굳으면서 프리다의 폐를 압박했다. 프리다의 몸에 주름이 생겼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의료진을 부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면도칼을 들고 가슴부분의 깁스를 도려내기 시작했다.

 

436 그녀는 고통을 외부로 투사하고 캔버스에 옮김으로써 자기 몸의 고통을 밖으로 빼낸다. 반영된 상이나 캔버스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상처 입은 자화상은 일종의 진통제 역할 또한 담당했다. 육체적 고통이나 정신적 고뇌의 눈으로 거울에 비친 자기의 영상을 바라본다고 해보자. 거울 이미지는 우리와 똑같이 생겼지만 우리의 고통을 공유하지는 않는다.

 

 

445 프리다가 척추 접합 수술을 받은 후에 화가 치민 나머지 자기 몸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서 접합이 풀려버렸다.

 

447 그녀의 병이 정신적 외상의 주기와 일치했던 것을 감안하면, 그녀가 병을 이용해서 디에고를 붙잡거나 되찾으려 했다고 생각할 수 있. 엘리 울프에 의하면 <작은 사슴>은 디에고와 함께 사는 고통과 관련된 그림이다.

 

454 그들을 이어준 가장 강한 끈은 서로의 예술에 대한 지대한 존경심이었다. 리베라는 아내의 직업적 성공을 자랑스러워했고, 아내의 예술적 기교가 숙련되어 가는 모습에 찬사를 보냈다. 그는 아내 자랑을 친구들에게 자주 했는데, 특히 자기나 자기 동료 중 아무도 루브르 박물관에 그림을 걸지 못했는데 프리다가 처음으로 그런 영광을 누렸다고 자랑하곤 했다.

 

결혼의 초상

 

459 디에고의 아내가 된다는 것은 세상에서 제일 엄청난 일이야. 나는 그가 다른 여자와 결혼 놀이를 하도록 내버려 두지요. 디에고는 누구의 남편도 아니라 앞으로도 결코 누군가의 남편도 될 수 없을 거예요. 하지만 그는 훌륭한 동지예요.

 

460 가까운 친구에게는 결혼생활의 어려움을 한탄했다. 단둘이 있을 때면 디에고와 함께 사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지 이야기했다. 그녀는 그의 연애 행각에 끝내 익숙해지지 못했다. 매번 상처를 받았고 고통을 겪었다. 디에고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섹스가 오줌싸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프리다에게는 질투를 느꼈다.

 

463 앞에서 보았듯 프리다는 결코 디에고가 뿜어내는 정욕의 수동적 희생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수많은 혼외정사를 통해서 남편의 부정을 상쇄했다. 그중에는 진지한 것들도 있었다.

 

472 리베라는 아기 취급 받는 것을 좋아했다. ..벽화에서 자신은 반바지 차림의 뚱뚱한 악동으로, 프리다는 그를 보호하듯 어깨에 한쪽 손을 얹고 있는 점잖은 부인으로 묘사되었다. 그가 하루 중 가장 행복을 느낄 때는 목욕할 때였다. 그의 전부인들처럼 그녀 역시 그에게 목욕을 시키기 위해서는 미끼가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여러 가지 장난감을 사서 욕조에 띄웠으며, 스펀지와 솔로 남편을 씻겨주는 것은 부부관계의 한 의식이 되었다. 디에고는 우너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여느 아이처럼 소란을 피웠다...“프리다는 나의 아이에게 아주 잘해 주었다.” ..대에고는 돌아와서 내 아들이 장난감을 갖고 있는 것을 보고는 어린 사내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릴 듯 인상을 쓰면서 프리다에게 왜 당신은 나한테 줬다가 뺏는 거야라고 했다. 프리다는 다른 것을 줄게, 또 하나 사 줄게라고 했다. 그러나 디에고는 다 필요없어.’ 라고 중얼거리며 방에서 나갔다. 그는 진짜 어린애 같았다.

 

474 프리다가 디에고에게 헌신한 이유는 괴팍한 유치함속에서도 탁월함의 증거를 보았기 때문이다. 프리다가 보기에 디에고는 정확한 욕망의벡터에 이끌린 비전을 가지고 우주를 끌어안는 사람이었다.

 

자연만세 : 살아있는 정물화

 

477 1946년 척추 접합 수술을 받은 것이 죽음에 이르는 고난의 시작이었다. 1950년 초에 건강이 악화되어 멕시코시티에 있는 병원에 가야했다. 1년간 입원했다.

 

482 프리다가 입원한 한 이유는 디에고의 편의를 위해서였다. 디에고는 자유연애를 원했다. 병원에서의 프리다의 상태는 디에고의 행동 여하에 달려 있었다. 그가 자상하면 그녀는 행복했고, 통증도 사라졌다. 그녀는 자신이 어느 정도 아프면 그가 옆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성모에게 자신의 고통을 맡길 수 없었기 때문에 디에고에게 의지했다. 그녀에게 그는 신이었다.

 

488 프리다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심리적 수술이다. 자기의 영혼을 절개하고 그 안을 들여다보기 때문이다.

 

498 프리다는 디에고와 라켈의 관게를 의심한 나머지 질투로 침대 천개에 목을 매려 했다. 간호사가 제때에 발견하고 끌어내리지 않았다면 그녀는 죽었을 것이다. 또 한번은 뇌수술을 받은 소녀가 프리다에게 접근했다가 딱지를 맞아서 자살했다. 그녀는 프리다의 후원자의 자매였다.

 

500 프리다와 디에고의 생활은 따로따로일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생활 시간대가 틀렸다. 그는 8시에 일하러 나가서 늦게, 보통은 프리다가 저녁을 먹은 후에 돌아왔다. 그들은 따로 잠을 잤다. 프리다는 위층의 현대식 공간에서 잤고, 디에고는 당연히 아래층 식당으로 통하는 방에서 잤다. 프리다는 환자였고, 디에고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녀는 오로지 자신의 고통을 호소함으로써만 그를 붙잡아 둘 수 있었다. 여러 번에 걸친 자살 시도는 자기가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삶의 모든 측면에 강렬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던 까닭에 프리다를 보살피는 일이 주가 될 수 없었다. 때로는 다정했고 때로는 무정했던 그는 한 번도 신뢰할 수 있는 존재였던 적은 없다.

프리다 칼로를 기리며

 

510 이 독창적인 인물의 삶과 작품을 분리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녀의 작품은 그녀의 전기다. (비평가 호세 모레노 비야)

 

나의 삶에 밤이 깃들고

 

512 19538. 의사들이 반 년 간의괴로운 망설임 끝에 프릳의 오른발을 절단하기로 했다.

이봐요. 프리다 발가락은 절단해도 소용없을 것 같아. 괴저가 심각해. 이제 다리를 절단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아.” 프리다는 비명을 질렀다.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창자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애처로운 소리였다.

 

517 전날 밤에 디에고가 병원에서 프리다와 함께 지냈다. 상태가 안좋은 날이었지만 디에고와 함께 있어 행복했다. 그러나 그때1층 간호사가 와서 리베라씨 누가 찾아왔습니다. 전시회 개막식에 가야한다고 합니다.” 찾아온 사람은 바로 그의 작업실 여자였다. 디에고는 프리다를 떠났다. 다음 날 아침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갔다. 그녀는 거기에 잠들어 있었다. 그날 아침 자살하여 했던 것이다.

 

530 그녀는 말년에 화장을 했지만 색조를 조절하지 못했다. 늙은 프리다 칼로의 끔찍한 위조품이었다.

 

532 그녀는 내가 건강해지면 무슨 상을 줄테야?” 하고 장난치듯 졸랐고, 대답을 듣기도 전에 인형이 제일 갖고 싶다고 말했다. 그녀는 친구들에게 지나친 요구를 하곤 했다. 예를 들어 전화 통화를 하게 되면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곧 가겠다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바로 그날 오후에 꼭 가겠다고 말해줘야 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자고 가라고 사정했다. 루페 마린까지 초대하며 눈물로 화해를 청했다. 루페는 초대를 거절했다.

 

인생 만세

 

544 프리다의 재는 몇 분 동안 해골 모양 그대로 있다가 바람에 흩어졌다. 리베라는 이 장면을 보고는 불끈 쥔 주먹을 천천히 풀고 오른쪽 윗도리 주머니에서 작은 스케치북을 꺼냈다. 그는 프리다의 은빛 해골을 그리는 일에 완전히 몰입했다. 그리고는 재를 모아 붉은 천에 조심스레 담아 삼나무 상자에 넣었다. 그는 자기가 죽으면 자기 재를 프리다의 재와 함께 넣어 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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