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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네요. 뭐라 말할 수 없이. 전주 출장길 한옥마을 민박집에 짐을 풀었습니다. 문풍지 바람 서걱대는 방. 빠끔히 고개 내밀면 내 집 마냥 너른 마당이 펼쳐집니다. 오래된 우물과 나무 한그루. 여러 뽐내는 꽃들.
할 일없이 앉아있습니다. 잎사귀, 바람에 날리는 세월의 풍상들. 종일 이렇게 풍경만 내다보노라면 어떻게 될까요.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 지요. 잠시 스쳐가는 만남보다는 적지 않은 인연으로 자리하지 않을까 합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오래 익을수록 맛이 더합니다. 깊어지는 장맛처럼.
아이처럼 흐뭇한 웃음을 짓다 주인장에게 작은 소반 하나를 청했습니다. 보라색 노트를 펼쳐 글을 써봅니다. 세상이라는 무대. 나는 어떤 무기로 앞으로 살아갈 것인가요.
감탄사가 나옵니다. 여기서 머무름도 참 좋을 터인데 그사이 기억 하나가 비집고 일어섰습니다. 한량처럼 살고 싶었던 잊힌 소망 하나. 하지만 결코 그렇게 될 수 없는. 누군가 얘기합니다.
‘생각을 참 많이 하시네요. 잠시라도 생각 없이 살 수는 없는지요.’
답변을 미루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살수 있냐고요. 어쩌면 그 질문이 나에겐 요원한 과제인지 모릅니다.
형이란 존재. 그를 떠올립니다. 어머니 등골을 빼먹고 살았던 사람. 종내는 간암 말기 시한부 신분으로 다가왔습니다. 나는 그의 보호자 역할. 허한 웃음이 나옵니다. 꿈도, 가진 것도 없으면서도 허세와 날마다의 술을 안고 살았던 사람. 그렇게 되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그렇게 살아가기 싫었습니다. 목표가 없다는 건 방향성 부재이며 목적 없이 살아가는 건 무가치한 인간이라고 여겼습니다.
해마다 새해가 되면 해야 할 리스트를 설정합니다. 하나가 끝나면 다른 과제를 이어나갔습니다. 쉰다는 것은, 틈이 있다는 것은, 아무 할 일없이 누워 있다는 것은 어쩌면 좀비 같은 인간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일을 해야 합니다. 특히 남자는 밖으로 나다녀야 합니다. 집구석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TV 리모컨만 돌리는, 밤이 되면 자신의 즐거움을 찾기 위해 떠돌아 다녔던 그런 그를 멀리했습니다.
멍하니 있습니다. 마냥 느낌에 잠긴 채 기와지붕의 하늘 구름 손끝 내밉니다. 하품. 졸음이 밀려옵니다. 쉬는 것도 쉬어본 사람이 하는 법. 한낮 억지로 청해보지만 웬걸. 이리 두 척 저리 두 척. 정말 편안한 시간 꿀맛 같은 휴식을 가짐에도 평소 쏟아지던 잠은 온데간데없습니다. 낮잠이 사치라고 여겼던 터라 당연한 결과일수도 있습니다.
아무 일없이 있다는 것. 어쩌면 그냥 있는 게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현재의 상황에 즐겨 취한다는 것. 묵상이며 성찰이고 나에게로 향함입니다. 좋다는 감정은 무엇도 아닙니다. 그냥 가슴으로 전해져오는 묵직함. 더도 덜도 아닌 충만함. 행복하다는 것 지금 이것을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간직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즐겼으면 좋겠습니다. 조르바처럼. 자유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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