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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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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9일 12시 23분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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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로 따지면 세 번째고 딸이 성인이 되면서 다니기 시작한 여행으로는 일곱 번째인데 비로소 길의 맛을 알 것 같다. 그저께 이스탄불에서 터키의 저가항공 '페가수스' 편으로 시바스로 오는 길이었다. 꼬박 한 시간 동안 산악지대가 펼쳐지는데 장관이었다. 육안으로는 초록색깔 한 점이 없었다. 높으면 산이요, 낮으면 구릉이고, 골짜기가 모여드는 아늑한 곳에는 마을이 보이기도 했다. 제주도까지 30분이 걸리니 대략 길이로 남한의 두 배, 넓이는 또 몇 배가 될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광활한 대지를 보며 대륙이라는 말에 가슴이 떨렸다. 전부터 아나톨리아(보통 터키 중부지방을 일컬음)”라고 발음하면 거부할 수 없는 위엄이 느껴지곤 했는데 그 이유를 내 눈으로 확인한 것이다. 아나톨리아는 반도니까 "대륙"이라는 말을 붙이면 안 되는지 몰라도, 어떤 단어가 세포로 스며드는 느낌은 숙연했다. 때로 밋밋하고 때로 정교한 대지의 뼈대가  끝없이 펼쳐지는 평원을 날며 터키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한 듯하여 벅차고, 아직 내가 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경외심이 솟아났다. 인생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새로운 것도 없고, 감동할 것도 없다는 생각 따위 두 번 다시 못하지 싶다.

 

목적지인 시바스에 가까워오면서 구릉 위에 정교하게 나뉜 조각보도 볼만했다. 간혹 나무가 보일 뿐 여전히 초록색이 보이지 않는 것이 이상했는데, 내려서 보니 밀밭 같은데 다 베었더라. 시바스에서 하루를 묵고 버스로 에르진잔으로 가는 길, 이번에는 세 시간동안 똑같은 평원이 펼쳐진다. 하루 전에 창공에서 내려다 본 길을 버스를 타고 눈높이를 맞추니 이 또한 감격스러웠다. 맞아, 맞아저렇게 정교한 물결무늬의 산자락이 있었고, 이렇게 거친 구릉도 많았지. 간간히 보이던 마을은 이런 풍경이었구먼. 풍경이 3D로 보였다.

 

도시에 가까워 비행기에서 내려다 보던 것보다는  나무가 보이고, 마을도 자주 출몰하지만 여전히 드넓은 평원에 비하면 희소하기 그지없으니 한 집당 산등성이 하나씩이라도 경작하는지터키에 왜 그렇게 빵이 흔한지 알겠다터키의 식당에는 빵이 공짜다. 에크멕이라 불리는 터키 바케트에 한정되지만 그게 어디랴. 돈을 아껴주는 것을 넘어 "음식이 공짜"라는 현상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물신주의에 쩐 눈으로 볼 때 세상 어디에도 없는 파격이자 풍요이며, 이 땅의 사람들이 얼마나 넉넉한 성정을 가졌을지 눈에 콩깍지가 씌이게 하는 일이었다어떤 식당에서는 속이 비치는  플라스틱 박스에 가득 담기고, 어떤 식당에는 수북하게 돌려쌓아 놓은 빵을 볼 때마다 나는 마음이 푸근해지곤 했다. 가게에서 사자면 한 덩이에 1리라(500)이고 0.75리라까지 있다. 가끔 물건을 사다 보면 1리라 이하는 절사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게 따지면 여전히 에크멕은 공짜인 것이다

 

풍경 또한 에크멕 만큼이나 풍성해서 나는 3시간 동안 질리지도 않고 창밖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운좋게 앞좌석에 앉은지라 우등버스의 커다란 통창으로 온갖 형태의 산과 언덕과 평원이 지나갔다. 산 속에 외딴집을 보면, 사방으로 수백 킬로미터가 밀밭인 곳에서 사는 사람의 삶은 어떤 것일지 ...... 섣불리 쓸쓸하다거나 고달프다고 말해선 안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살던 사람들이 또 평원에 한 두 기의 묘로 남은 것을 보면 사는게 뭘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했다. 이렇게 풍요로운 땅에서 조금 다른 삶을 갈망하는 젊은이들과, 시간이 대폭 많아진 은퇴세대와 더불어 농장을 해도 좋겠다는 상상에 안타깝기도 했다.

 

인천에서 같은 비행기를 타고 온 A는 내가 엄마 세대라 편했는지, 해외여행이 처음이라며 몇 시간만 동행하기를 부탁했다. 대여섯 시간 만에 우리 모녀는 아직 혼자 다닐 준비가 안 된 듯한 그를 돌려세웠다. 시바스 호텔에서 리셉션을 맡은 친구는 영어에 능통했다. 비즈니스맨이 많이 이용하고 있는 곳이라 나름 역할이 있을 것이었다. 순한 목소리에 선한 웃음의 그가 마냥 편했는데도 나는 그에게 좀 더 말을 붙이지 않았다. 여기서 일한 지는 얼마나 되었는지, 하는 일에 만족하는지, 가족은 어떻게 되는지...

 

풍경도 사람도 스치듯 지나간다. 그런데 그것이 나쁘지 않다. A가 안쓰러웠지만 그와의 인연은 거기까지였다. 그는 길에서 혼자 배워야 했다. 호텔 직원과의 소통은 미진했지만 그와의 인연 또한 거기까지였다. 사람 귀한 줄 모르는 내 안에 서운함이 끼어든 것만으로 의미있는 변화였다. 이런저런 감정을 느끼되, 한계를 알고, 그리움을 품고 계속 나아가노라니 진짜 어른이 된 것 같다. 오직 길만이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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