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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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일생에서 가장 기쁜 경험을 떠올려보면 그것은 늘 사랑이었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일처럼 설레는 일이 또 있을까요? 쉰 살을 몇 달 앞둔 나이이면서도 나는 사랑을 믿는 남자입니다. 오늘 나는 나의 사랑에 관한 내밀한 기억 하나를 편지에 담으려 합니다.
나는 아내와 긴 시간 연애를 했습니다. 그녀는 스물한 살, 나는 스물세 살에 서로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군더더기 없고 잔재미도 없는 편이긴 하지만 대신 그녀의 한결같음과 명석함을 나는 좋아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미래를 언약하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서로 함께 살게 되리라 믿는 관계로 나아갔습니다. 공부를 하던 나는 늦은 나이 스물일곱 살에 군대로 떠났습니다. 그녀는 이미 직장인이었습니다. 나는 동해안 바닷가에서 어둡게 푸른 군복 안에 확실할 것 하나 없는 내 청춘을 가둔 상태로 매일같이 그녀를 떠올리며 지냈습니다.
군 생활 중반 이후 나는 대도시에 있는 부대로 전출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한 여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녀에게로 향하는 넘실대는 마음을 느끼며 고뇌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여인과 나는 휴일에 만나 도시 근교를 걷고 함께 밥을 먹고 영화를 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몇 통의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습니다. 짧았지만 설렘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럴수록 고뇌는 깊어갔습니다. 결국 나는 전역을 앞두고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했고 전역과 동시에 그곳을 떠나 서울에서 신혼살림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나를 보내며 그녀가 겪었을 통증을 나는 다 헤아릴 수 없고 다만 짐작할 뿐이었습니다.
아내와 신혼을 보내던 어느 날, 먼저 퇴근한 아내가 집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내가 결혼 전 다른 여인과 주고받았던 편지를 아내가 발견했고 그것을 읽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미안하고 또 미안했습니다. 아내에게 백배 사과하고 그 편지를 없애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 편지를 버리지 않고 다른 곳에 숨겼습니다. 두어 달 뒤 그것을 다시 발견한 아내는 전보다 더 깊게 노여워하고 서러워하며 울었습니다. 나 역시 너무도 미안했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아내에게 다시 진심으로 사과하였고 아내는 어렵게 내 사과를 받아주었습니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아내가 조금 진정이 되었을 때 나는 뻔뻔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을 했습니다. “이 편지들, 다시는 볼 수 없도록 할게. 지난 시간들이 지금의 당신을 아프게 만들어서 너무 미안하고 미안해. 하지만 어렵더라도 내 시간을 인정해줬으면 좋겠어. 이 지나간 기억들을 내 살아온 삶에서 퍼내고 지우는 것은 불가능해. 내 삶의 소중한 기억 중에 하나니까 그냥 가슴에 묻고 살게. 그래서 그것이 우리 삶의 소중한 현재에 더는 혼입되고 개입하는 일이 없도록 약속할게”
그대는 나를 뻔뻔한 놈이라 할지 모르지만 나는 진심으로 그랬습니다. 아내를 설레게 하고 기쁘게 했던 누군가에 대한 기억이 있다면 나는 그것 역시 그녀의 것으로 온전히 지켜줄 자세가 있었습니다. 아내의 소중했던 시간을 내가 질투하거나 그것마저 소유할 마음이 내게는 없었습니다. 쉰 살을 앞둔 나이에도 나는 사랑이 사람의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 믿는 놈입니다. 내가 지금의 아내를 만나 사랑한 시간을 어느 누구의 사랑으로 대체할 수 있을까요? 어느 시인은 ‘사랑한다’는 말은 이미 그 말을 하는 순간 가장 오래된 표절을 행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절대 복제될 수도 대체될 수도 없다고 나는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지금 인간의 그 순수한 영혼을 훼손하는 말이 농담처럼 퍼지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돈 많은 상대면 최고지. 거기에다가 명(목숨)까지 짧으면 대박이지.’ 이 시대에게는 미안하지만 미련한 내가 한 사랑, 그리고 내가 하고 있는 사랑 그것은 그럴 수 없습니다. 내가 하는 사랑 그것은 절대 표절이 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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