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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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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19일 00시 47분 등록

태풍이 북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새벽부터 창가 나무 잎사귀가 바람에 심하게 날리더니 어느덧 출근길 빗방울이 시작됩니다. 유치원생이 태풍의 정의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죠. 지구를 청소하는 것이라고.

대청소가 일어나는 시각. 전철역에 내려 계단을 올라가노라니 알록달록 우산 행렬이 이어집니다. 비를 맞을세라 종종 걸음을 하는 와중 힘들게 책가방을 둘러맨 초등학생 소년이 눈에 띄었습니다. 우산도 없이 터덜터덜 걸음을 옮깁니다. 웬일일까요. 잊어버리고 챙기지 않았나요. 뒤따르던 나는 슬며시 우산을 씌어줍니다. 예상치 않은 행위에 아이는 눈동자를 크게 뜨고 올려다보았습니다.

“학교까지 바래다줄게.”

“고맙습니다.”

천진한 눈망울. 그때 나도 그러하였었지요.


수업을 마치고 나오니 시커먼 먹구름이 동반된 소낙비가 한창입니다. 언제쯤 그칠는지요. 시간이 지나면서 기다리던 동무들 앞에 가족이라는 이름들이 찾아와 하나둘 손을 잡고 떠나갑니다. 엄마, 형, 누나 ……. 빈자리 숫자가 늘어날 때마다 초조해집니다. 주눅이 듭니다. 행여나 하며 기대했던 이가 끝내 나타나지 않음에 원망스럽게도 하늘의 물보라는 더욱 기세가 등등합니다. 어떡하나요. 어깨의 쳐짐과 함께 집에 갈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선생님에게 부탁을 드려볼까요. 숫기가 없어 빌려달라는 그 말도 결국 하지 못합니다.

결심하였습니다. 마지막 혼자 남은 아이는 책가방을 머리에 둘러쓴 채 운동장을 냅다 뛰기 시작합니다. 다닥다닥. 따갑습니다. 싸라기눈이 내립니다. 물장구를 칠 때의 신났던 그 상황이 아닙니다. 서러움입니다. 외로움입니다.

이런. 언제나 그랬듯 시야가 좁아 재수 없게 물웅덩이를 밟았습니다. 첨벙. 덕분에 흙탕물이 금세 신발에다 오늘따라 새로 차려입은 바지를 적십니다. 쓴웃음이 나옵니다. 일진이 왜 이럴까요. 철퍼덕 철퍼덕. 신발 소리가 땅바닥에 팽개쳐옵니다.


요란한 천둥 번개. 아직도 집은 한참입니다. 가녀린 소년은 어느 가게 앞 처마에 기대서서 몸을 말릴 수밖에 없습니다. 부르르 떨리며 한기가 찾아옵니다. 불을 밝힌 채 지나치는 자동차와 무심한 어른들. 멍한 그 가운데 서있습니다. 나는 왜 이곳에 이러고 있을까요. 엄마는 아직 시장에 계실까요. 투정을 부리기도 어렵습니다.

드르륵 열리는 문. 주인아저씨가 얼굴을 내밀며 손에 쥐어줍니다.

“우산 쓰고 가.”

오늘의 그 아이처럼 나도 그를 쳐다보았습니다.


와이셔츠가 젖을 즈음 이제 현실의 소년에게 작별을 고해야할 시간입니다.

“잘가.”


누군가의 건넴이 가슴에 남은 것처럼 나도 누군가의 무엇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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