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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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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30일 13시 31분 등록

1.
소설과 에세이. 편하게 읽을 수 있는 문학의 두 양식.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과 에세이를 모두 잘 쓴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를 좋아한다. 아니, 아주 가끔 읽는다(는 표현이 맞겠다). 내가 좋아하는 공간에 앉아 책장에 꽂힌 하루키의 에세이집 『더 스크랩』을 꺼내 들었다. 하루키의 에세이, 2년 만이다.

 

『더 스크랩』은 제목 그대로의 책이다. 하루키가 1980년대에 <에스콰이어>, <뉴욕타임스> 일요판 등을 ‘스크랩’하여 일본 잡지 <스포츠 그래픽 넘버>에 연재했던 글을 엮었다. 하루키는 책을 여는 글에서 독자들에게 당부했다.

 

“미리 말해두고 싶은 것은 내가 스크랩한 글은 대부분이 아무 상관없는 사소한 화제뿐이다. 다 읽고 나면 시야가 넓어진다거나 인간성이 좋아진다거나 그런 유의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삿짐을 싸다 벽장에서 나온 오래된 졸업앨범을 무심코 넘겨보는…… 그런 기분으로 읽어주시길.”(p.6) 

 

2.
하루키 자신의 표현을 빌면, 그는 "어떤 글이든 일 년 이상 계속 쓰면 질리는 체질”이다. 그가 <넘버>에 4년 동안 글을 썼으니 예외적 글쓰기였다. 장기 연재를 했던 비결은 “글을 쓰는 것이 정말 즐거웠기 때문”이란다. 과연 『더 스크랩』의 어디를 펼쳐도 비장함이나 진지함 또는 무거운 책임감이 없다.

 

그는 쉽고 즐겁게 썼다. “한 달에 한두 번 <넘버>에서 미국 잡지며 신문을 왕창 보내준다. 나는 뒹굴거리며 잡지 페이지를 넘기다, 재미있을 법한 기사가 있으면 스크랩해서 그걸 일본어로 정리하여 원고를 쓴다. 이것으로 한 편 끝.”(p.4)

 

하루키의 연재는 즐거운 유희로 보였다. 글쟁이로서 살짝 부러웠다. (약이 올랐나?) 이어지는 말이 카운터펀치다. “어떤가요? 즐거워 보이죠? 솔직히 말해 정말로 거저먹기였다.” 하하하하. 약오름이 승화하여 웃음이 된 걸까? 나는 정말로 크게 웃었다. 거저먹기의 글쓰기가 무엇인지는 나도 알지만, 거저먹기의 대가와 입문자의 수준 차이가 느껴졌다. 오, 하루키 사부여!

 

3.
“저마다 외국 잡지를 읽는 법이 있다. 광고만 체크하는 사람도 있고, 서평만 읽는 사람도 있고, 레이아웃만 보는 사람도 있고, 최신 정보를 찾아 헤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핀업만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한때 미국판 <플레이보이>의 인생상담 코너만 읽었다.”(p.26)

 

물론 나처럼 외국 잡지를 거의 보지 않는 사람도 있다. 한국 잡지도 전혀 보지 않고 사는 사람들도 많다. 그래도 사는 데에 전혀 지장이 없다. 하루키가 읽는다고 해서 우리도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겐 두 가지의 자유가 있으니. 누군가를 추종할 자유 & 누군가와 전혀 다르게 살 자유. 그리고 연말에 읽고 싶은 책을 읽을 자유.

 

하루키는 카버를 좋아한다. “최근에는 <뉴요커>에 실린 레이먼드 카버의 <내가 전화를 거는 곳>과 도널드 바셀미의 <벼락>, 이 둘을 추천한다. 카버는 늘 그렇듯이 금세 반할 정도로 좋은 단편이다.”(p.27) 카버의 단편을 읽어보자고 생각했던 것이 벌써 여러 해 전인데, 아직 손에 잡지 못했다. 올 겨울에 재즈 캐롤을 들으며 읽을 책으로 카버(!)의 단편, 낙점이다.

 

4.
세상은 양면성 덕분에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하루는 빛과 어두움의 순환으로 운행되고, 삶은 인간 내면 속의 천사와 악마 간 힘겨루기로 펼쳐진다. 책읽기에도 양면성이 필요한 걸까. 나는 최근 벤야민과 아도르노 읽기로 힘겨운 독서를 했다. ‘시야가 넓어지는 책’이긴 했지만 다소 비장했고(읽어내고 말리라), 자주 진지했다(이것은 무슨 뜻일까).

 

가끔씩은 졸업앨범을 뒤적이는 느낌이 드는 책도 읽어야겠다. 정신에 백만 원짜리 수액을 맞은 느낌이다. 생기가 돈다. 세상이 즐겁게 보이는 것도 같다. 이런 책은 연말에 만나면 더 좋겠다. 새로운 것을 알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기에 어울리는 시즌이니까. 『더 스크랩』도 좋다. 감수성 충만한 10대에 1980년대를 보냈다면, 추억여행은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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