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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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될 준비
성탄절 이브인데도 고3이 되는 나의 딸은 열 시에 야간자율학습을 마쳤다고 합니다. 형편이 그러하니 오늘 밤은 전화로만 목소리를 나눴습니다. 딸과 전화로 나누는 짧은 수다는 즐거웠습니다. 지난주 서울에서 있었던 한 아이돌 그룹 공연은 잘 다녀왔느냐 물었더니 재미있었다고 했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인데 오늘밤 과연 네게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선물을 배달할 것 같냐고 물었더니 “설마, 이젠 안 찾아올 걸? 안 찾아오실 거야. 난 이제 어른이 될 준비를 해야 하는 때가 됐으니까.”
전화를 끊었는데 그 말이 오래 머뭅니다. ‘어른이 될 준비’ … ‘그렇구나. 저 녀석이 스스로 어른이 될 준비를 해야 하는 때라고 생각하는구나.’ 나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저 녀석이 어른이 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일단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로부터 선물을 받지는 못하는 나이가 됐다는 말 속에 포함된 뜻은 그간 믿어왔던 어떤 존재가 허구라는 각성도 있는 것이겠지?’ 묘하게 서글픈 마음이 들었습니다. ‘불과 2~3년 전 까지도 그 존재를 분명하게 믿는다던 녀석이었는데…’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렇게 현실과 허구를 구분하는 일부터 시작되는 것일까?’ 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오늘 어느 초등학교 학부모 강연에서 만난 30대 후반의 어느 여성은 이제 이성에 대한 사랑조차 믿지 않는 눈치였는데, 우리 사회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꾸만 믿었던 무엇인가를 하나씩 버리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나 역시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믿음을 많이도 버리며 쉰 살을 앞두고 있다는 자각이 들기도 합니다.
생각은 꼬리를 물었습니다. ‘참 많은 믿음을 버린 나는 그렇다면 너무 어른이 된 것일까? 딸 녀석이 어른이 될 준비를 하고 있다는데, 녀석이 어른이 되면 나는 뭐가 되는 걸까? 제 말처럼 녀석이 소녀에서 어른으로 탈바꿈을 하면 쉰 살이 되는 나는 무엇으로 탈바꿈을 해야 하는 걸까?’
이런저런 상념이 들어찼지만 그렇다고 그 상념이 나를 괴롭히지는 않았습니다. 가만 생각해보니 지난해부터 무언가 내게도 꿈틀거리는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치가 나비로 탈바꿈하기 위해 고치 속의 몸이 꿈틀대듯 녀석에게도 지금 무언가 꿈틀대는 것이 있는 모양입니다. 많은 포기와 상실을 겪으며 어른이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슬픔에 휩싸이기보다 차라리 내가 안도하는 것은 이 나이가 된 내게도 무언가 안으로부터 움트고 꿈틀거리는 것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딸 녀석의 표현을 조금 바꿔 말한다면 나도 이제 ‘더 깊은 어른이 될 준비’를 해야 하는 때가 왔음을 본능처럼 느끼고 있나 봅니다.
마흔아홉 살의 유효시간이 이제 딱 일주일 남았습니다. 쉰 살을 하루 앞둔 다음 주 편지에는 그 꿈틀대는 무언가를 털어놓을 생각입니다. 오늘은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그대와 함께 축하하고 싶습니다. 그의 자애로운 사랑이 저 아름다운 달처럼 당신 계신 곳과 온 세상 널리 비추길 기도하는 밤입니다. Merry Christ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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