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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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도서관에 갔더니 “올해의 도서”를 선정해서 30권쯤 전시하고 있었다. 그 중에 읽으려고 하던 <용의자X의 헌신>이 있기에 집어 들었다. 구입할만한 책은 아닌 것 같고 가끔 확인해보면 늘 대출중이었던 터라 반가웠다. 문제는 도서관 로비가 춥다는 것이었다. 전시용으로 새로 구입한 듯 전부 새 책이라 열람실로 갖고 갈 수는 없고 그대로 로비에 있는 의자에 앉아 읽기 시작했다. 두 시간쯤 지났을까, 책을 다 읽고나서 있던 자리에 갖다 놓는데 어떤 감정 하나가 술렁였다.
눈코가 매울 정도로 춥다기보다는 천천히 파고드는 한기 수준이었지만, 머플러를 최대한 넓게 펴서 등에 두르고, 백팩을 무릎에 꼭 끌어안아 체온을 감싸며 행한 두 시간의 독서가 나를 뿌듯하게 만든 것이다. 책이 아니었다면 이런 수고를 할 일이 거의 없다는 생각이 “그래, 내게는 책이 이런 존재였어. 대단한 글쟁이가 아니면 어때, 기꺼이 마음을 다할 것을 갖고 있다는 게 중요하지. 이제부터는 좀 더 계획적으로 책을 가까이해야겠네” 하는 다짐으로 번지며, 한껏 고양되는 기분이었다.
글을 쓰기 시작한 지 꼭 10년이 되었다. 전형적인 문과 기질을 갖고 있어 읽고 쓰는 것에 부담감은 없었지만, 연구원이 되기 전까지는 독서력이 약했고, 더군다나 글 쓰는 사람으로 살 수 있을 꺼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글쓰기와 책쓰기를 가르치는 일로 먹고 살다보니 정작 내 책을 쓰는 일은 더디지만 갈수록 이 일이 좋아지니 이만하면 천직 아니겠나.
“아직도 그렇게 좋으세요?”
가끔 남들이 그렇게 묻는 것을 보면 이것이 흔한 상태가 아닐 수도 있겠다. 수강생 중에 글을 엄청 잘 쓰는 분들이 많은데 길게 갖고 가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만 봐도 그렇고. 문득 어디선가 본 대목이 떠오른다. 사진작가 윤광준이 구본형선생님과 책작업을 하고 나서 쓴 글이었나 보다. 구선생님께서 음악에 심취한 얘기라도 하셨는지? 오디오전문가이기도 한 윤광준이 “오디오 좋은 걸로 하나 구입하시라”고 권하자 구선생님께서 “글 못 쓸까봐 망설여진다”고 대답하셨다는 부분이다. 선생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자신을 글 안에 유폐시켰지만 별다른 취미가 없는 내게는 그저 당연히 책과 글 밖에 없다. 그런데도 10년간 걸어온 성과가 겨우 요거냐는 말은 말기로 하자. 성취적이기 보다는 직관적이고, “지금, 여기”에서의 만족을 구하는 내게는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인 것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이런 강도의 몰입과 만족은 내 생에 세 번째다. 20대의 농촌활동과 40대의 학원운영이 그랬는데, 농촌활동은 농사꾼과 결혼하는 일로까지 이어졌지만 농촌은 끝내 내게 관조의 대상이지 노동의 현장은 아니었다.(그 때의 경험이 있기에 최종적으로 자연을 선택한다면 좀 더 융통성있는 조율이 필요하다) 그리고 학원을 운영해 본 덕분에 규모에 대한 욕심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나는 온라인 위주로 활동하고 가끔 오프수업을 하는 내 프로그램이 너무 좋다. 사무실을 유지할 필요가 없고, 영화관이나 카페, 여행지 모두가 내 작업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한다.
아무래도 연말이다보니 지나온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 늘었는데, 인생이 길어졌기 때문에 내 것이 아닌 것을 하나하나 지워가며 진짜 내 것에 도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큰 일 작은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을 차지하는 소소한 일들이 곧 인생인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런 작은 일들에 대한 알아차림이 고스란히 글의 재료가 되니 이 얼마나 감사한가! 읽고 쓰는 일을 위해서는 어지간한 불편을 감수할 수 있다는 것, 이 일을 더 잘 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고도 두렵지 않다는 것, 내가 쓴 글을 고치기 위해 반복해서 읽을 때 가슴에 번지는 충만감...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새로운 10년의 문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 조금도 두렵지 않다. 읽고 쓰는 일만 제대로 하기에도 인생이 모자란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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