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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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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3일 13시 10분 등록

  

12, 졸립진 않지만 잠자리에 든다. 뚜렷한 목표도 없으면서 종일 모니터와 책을 오간 눈이 피곤했다. 요즘 잠을 못 이룰 때가 가끔 있는지라 오후에는 커피를 삼가고 있는데도 오늘도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아니다다를까 한동안 현안을 붙들고 씨름하다 보니 새벽 2, 뭐 이 정도야 껌이지 하며 또 뒹굴거리다 소변 보러 일어나니 3, 고양이가 와서 밥 달라고 하기에 핸폰을 열어 보니 4.... 모눈종이 칸처럼 정확하게 토막난 시간이 밀려가는 것이 신기하거니와 이런, 4시간이 눈 깜박 할 사이에 지난 것 같다.

 

이렇게 시간이 빠르다니! 새벽 4시까지 잠을 못 잔 것보다 시간이 너무 빠른 것에 놀란다. 치열하게 고민하긴 했다. 바이오리듬의 파동에 의한 것인지 주기적으로 다운되곤 하는데 요 며칠 하락기여서 자괴감에 시달린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긴 시간을..... 어떻게 그렇게 좁은 영역에 갇혀..... 어떻게 그렇게 얄팍한 성취에 머물러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내 삶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과연 나는 무엇을 향해 살아가고 있는가. 이런 큰 줄기부터 미칠 것 같이 심심한데 아직은 괜찮지만 이런 시간이 2,30년 계속된다면 대책을 강구해야 하리라는 것, 가을에 이사할 문제까지 어느 것 하나 준비가 탄탄하지 못해 베개를 껴안고 몸부림을 쳐야 했다.

 

4시부터는 눈이 뻑뻑하고 관자놀이가 따끔거리고 심지어 속까지 쓰려왔다. 그렇게 한 시간을 시달린 후에 5시부터 잠자기 시작해서 8시에 일어난다. 나이가 더 들면 이런 날이 잦아지는 것이 아닐까 걱정하며 화장실로 들어간다. 잠자는 일이 전투가 될 줄이야.  멍하니 변기에 앉아있자니 시선이 자연히 타일벽으로 간다. 타일에 습기가 맺힌 모양새가 의외로 멋져서 눈을 크게 뜬다. 어쩌다 둥근 형태도 있지만 물방울을 얇게 저민 모양의 물기가 닥지닥지 붙어 있는 모습이 일정한 패턴을 보여준다. 큰 것은 눈물방울 만한데 점점 작아지다가 좁쌀만해지고 이윽고 밋밋한 타일에 이르는 흐름들이 파충류의 가죽처럼 독특하다.

 

아하! 이래서 물방울만 그리는 화가가 있고, 물방울 속에 삼라만상이 들어있다며 물방울만 찍는 사진가가 있는 거구나 싶을 정도로 무심히 발견한 패턴은 아름다웠다. 그것이 겨우 볼일을 보던 중에 발견한 화장실 벽이라는 사실이 머리를 툭 치는 기분이었다. 문제는 나의 시선이고 발견일 뿐 곳곳에 숨어있는 아름다움의 단서를 엿본 것 같았다. 이 때 서로 합해져 무거워진 물방울이 주르륵 아래로 흘렀다. 정교한 패턴에 0.5cm 폭의 도로가 생겼지만 거기에는 어떤 법칙도 있어 보이지 않았다.

 

클리나멘! 순간 전에 읽은 철학용어가 떠올랐다. 에피쿠로스가 한 말로, 지극히 작은 편차 혹은 기울어짐을 의미한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세계가 형성되기 이전에 무수한 원자가 허공 속으로 평행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그러다가 원자 하나가 극히 미세하게 기울어 다른 원자와 부딪치고, 이 마주침이 또 다른 마주침을 유발하여 하나의 세계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부딪히는 수많은 일 또한 이런 우연에 기초하여 발생한다. 따라서 우리는 확고불변한 필연성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우발적인 만남의 결과물인 거고, 우리가 영위하는 인생도 마찬가지다.

 

멍하게 바라보던 물방울의 움직임에서 나는 우리 인생이 클리나멘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좀 더 나은 삶을 살아보겠다고 진을 빼도 잠자다가 돌연사를 맞이할 수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은 우연의 산물이다. 내 책임을 방기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 큰 흐름까지 내가 어쩔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세 가지 이상은 고민하지 말고, 10분 안에 해답이 나오지 않는 일은 그냥 흐름에 맡겨라. 이처럼 우연한 인생에 너무 심각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산발적으로 접한 말들이 동시에 울리며 나는 편안해졌다. 이런, 간밤에 너무 애를 썼구먼. 어디까지나 가볍게  할 수 있는 일은 하고, 할 수 없는 일은 잊어버리자. 바이오리듬이 상승기로 접어든 것이 느껴진다. 오늘 숙제는 했으니 마침  개봉하는 영화 <검사외전>을 보러 가야지.

 

우리는 우발적인 만남의 결과물이고, 결국 나는 이러저러한 존재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우리 존재는 확고불변한 필연성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괴로운 저주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이다. 전혀 다른 사람으로 생성될 수 있다는 축복, 수많은 클리나멘으로 여러분의 삶이 수놓아질 것이다. <강신주- “철학, 삶을 만나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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