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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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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7일 20시 21분 등록

 

"금요일 저녁에 시간 되나? <귀향> 안 봤으면 초대 티켓 하나 남았는데 같이 가자."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초대' 티켓이라는 말이 부담 되었다. 무료니까 어떤 행사가 덧붙여질 가능성이 있으리라. 위안부 실화를 담은 영화이니 공익 행사나 기부 순서가 있을지도 모르고. 나는 시간 내고 돈 낼 바에는 내 돈 들여 가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친구 지인들도 함께하는 자리라고 하니, 더욱 꺼려졌다.

 

나는 확인 문자를 보냈다. "영화만 딱 보고 오는 건가? 끝나고 모임에 참석해야 하는 건가 싶어서." 간단한 답변이 돌아왔다. "아직 정해진 게 없으니 너 편한 대로 하면 될 듯." 그다운 대답이었다. 나처럼 까탈스럽게 사전행사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여느 때와 달리 나는 초대에 응했다. "영화 보고 둘이서 차나 한 잔 하자."  누구나 때때로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고 싶은 날이 있기 마련이다.  

 

예상대로 영화를 보기 전, 15분 동안의 사전 행사가 있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는 집중이 안 될 것 같아 지금 이번 상영회에 관한 안내를 드리겠습니다." 몇 마디의 서론이 있어지만 기억나는 말은 "영화가 끝나고 나가실 때 기부를 부탁 드립니다" 였다. 아마 강제는 아닐 터였다. 예전의 나 같으면 분위기 상 내야 하면 내고, 자율적인 분위기면 내지 않았을 것이다. 기부를 하고 나면, 초대의 의미가 사라지고 마니까.

 

영화가 끝났다. 나는 지갑에서 1만원을 빼내어 바지 뒷주머니에 넣었다. 기부는 부담 없이 진행되었다. 기부함을 그냥 지나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나는 뒷주머니의 돈을 빼어 기부함에 넣었다. 안 하던 짓을 해서 나도 놀랐다. 이 변화는 H 덕분이다. H는 수억원을 버는 고소득자다. 나는 종종 그와 술을 마시거나 밥을 먹는데, 곁에서 그를 지켜 본 결론은 다음과 같다. '그의 수입은 부럽고 돈 씀씀이는 존경스럽다.'  

 

그는 젊은이의 거리 공연을 보며 즐거워하고 난 후에는 파란 지폐를 내어놓는다. 때로는 CD도 산다. 좋아하는 음악 장르여서가 아니다. 그들이 즐거운 시간을 선사했기 때문이거나 음악을 즐기는 열정에 감동했기 때문이다. 정직하게 장사하는 상인들을 만나면 흐뭇해하며 지갑을 연다. 성의 없이 호떡을 굽는 호떡장수를 만나면 인상을 찌푸리고 싱싱한 과일만 골라 내어놓는 젊은 과일장수의 열정에는 침이 마르도록 자랑한다.

 

교보문고가 오프라인 서점을 지켜가는 모습을 지지하며, 몇 백원 몇 천원 아끼려고 인터넷 서점을 옮겨 다니는 행태를 비난한다. 나는 H의 말을 들은 2013년 이후, 주 이용서점을 알라딘에서 교보문고로 바꾸었다. 종종 '교보문고라는 문화적 공간'을 누리면서도 집에 와서는 포인트나 사은품을 많이 주는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구입하는 모습이 부끄러워졌기 때문이다. 

 

오늘도 H의 영향을 느낀 날이다. 연구원 선배가 후배 10명을 식사 자리에 초대했다. 그의 초대 덕분에 오랜만에 사람들이 모인다 생각하니 감사했다. 나는 작은 선물을 사려고 백화점을 둘러보았지만 마땅한 것을 찾지 못했다. 결국 스타벅스 선불카드를 드렸다. 공짜 점심을 먹을 수 있는 날에 점심값보다 조금 더 많은 값을 치른 셈인데, 이러한 변화는 나도 낯설다. 역시 H 덕분이다.

 

H와 나의 연봉 차이는 6~7배다. 의식 있는 소비를 실천하는 규모의 차이도 클 테지만, 그 깨어 있는 의식 만큼은 본받고 싶다. 돈을 벌수록 현명한 소비, 따뜻한 소비가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는 것을 H는 가르쳐 주었다. 언젠가 H를 만나면 좋은 영향을 주어 감사하다고 전해야겠다. 식사를 파하고서 오늘 자리를 마련해 준 형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식사 맛나게 잘 먹었습니다. 불러주신 덕분에 이리 만나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형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어요. 작은 선물이라도 하고 싶어 돌아다녔는데 마땅한 걸 찾지 못하던 터에 스타벅스가 보이더군요. 제 밥값 낸다는 생각으로 구입한 선불카드입니다. 커피 한 잔의 여유라도 즐기시면 좋겠습니다. 형이 아니시면 형수님이라도 드시면 될 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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