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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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별들이 내려와 창문 틈에 머물고
너의 맘이 다가와 따뜻하게 나를 안으면
예전부터 내 곁에 있는 듯한 네 모습에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네게 주고 싶었는데
골목길을 돌아서 뛰어가는 네 그림자
동그랗게 내버려진 나의 사랑이여
아--- 어쩌란 말이냐 흩어진 이 마음을
아--- 어쩌란 말이냐 이 아픈 가슴을
-강영철 작사 작곡 <가슴앓이>
한 때 나의 노래방 애창곡이었던 “가슴앓이”를 시론집에서 접할 줄은 몰랐다. 정재찬은 <시를 잊은 그대에게>에서 이 정도면 한 편의 시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 노래를 유치환의 애절함과 연결시킨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유치환, <그리움>2
청마 유치환은 같은 학교에 근무하던 정운 이영도를 연모하여 20년 동안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편지를 보냈다. 청마는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고, 정운은 남편과 사별하였으며 딸이 하나 있었다. 한복을 즐겨 입던 시조시인 정운의 단아한 아름다움을 흠모하는 문우가 많았다니, 청마는 나름 경쟁에서 이긴 것일 테다. 청마가 편지 속에서 그녀를 ‘정향’이라고 칭했다는 부분에서 나직한 한숨이 나온다. ‘정향’ 이란 프랑스 말로는 리라꽃이요, 영어로는 라일락꽃이요, 우리말로는 수수꽃다리라 부르는 그 꽃이니, 그들의 애절한 사랑이 보랏빛 향기 속에 어른거리는 기분이다.
문학과 낭만이 소용돌이치는 통영의 바닷가에서 그들이 나누었을 교감과 안타까움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우리는 이미 청마의 영롱한 싯귀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청마가 60세에 사고로 사망하자 정운은 그동안 모아두었던 5000통의 편지 중 200통을 추려 단행본을 출간한다. 그 책은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한다.
저자는 그 뜨거웠던 시인의 연정과 대중가요의 감성을 연결시키면서 청마의 부인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는다. 부인 역시 청마와 오랫동안 연서를 주고 받았고, 살림은 물론 남편의 문학적 인생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데, 남편의 사고사라는 불행만으로도 버거운데 거기에 20년 된 연인이 펼쳐낸, 사랑의 증거 앞에 여자로서 느꼈을 수치심을 어찌할 것인가!
가정 있는 남자가 부인 아닌 여성을 연모하는 안타까움, 만천하에 드러난 세기의 스캔들을 고스란히 견뎌야 하는 부인의 괴로움, 나를 내버려두고 골목길을 뛰어가는 네 그림자를 바라보는 마음... 모두 꺼이꺼이 목 놓아 울며 “어쩌란 말이냐!”를 외침직하다. 그러나 저자는 여기에 대해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삶이란 게 원래 그런 것이다. 안타까워도 어쩔 수 없으면 어쩌지 않으면 그만이다.” 저자의 냉정한 말에 피식 웃음이 나는 것을 보면 나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모양이다. “노래 <가슴앓이>의 원조가수인 ‘한마음’조차 부부에서 갈라져 남남이 되는 것을, 운명아, 사랑아,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
저자 정재찬은 한양대교수이다. 이런 식으로 순문학과 대중문화를 아우르고, 시와 노래와 영화, 광고를 종횡무진하며 공감각을 자극하는 수업에 학생들은 열광했다고 한다. 나도 학생들처럼 기립박수를 보내고 싶다. 입시교육에 묻혀버린 ‘시’를 되찾아준데 대해, 자신의 직업을 통해 이만한 기쁨을 선사한 데 대해 무한한 존경심이 솟는다. 세상만물을 시와 연결시켜 보는 한 국문학자의 네트워킹이 신선하다. 시와 교양수업에 대한 통념을 뒤집어버린 근성이 통쾌하다. 군데군데 저자의 능청스러운 해학과 “시간은 다 됐고 게임은 끝났다.”라는 식의 단호한 단문을 접하는 재미도 은근했다. 아아! 나도 이만한 직업세계를 갖고싶고, 이만한 책을 쓰고 싶다는 생각에 오랜만에 마음이 뜨거워진다.
한 교수의 반생에 걸친 연구가 집대성되어 교실 밖 제자들에게도 크나큰 울림을 주는, 이런 것이 바로 ‘책’이다. 독자가 그를 통해 ‘시’라고 하는 언어와 성찰의 무한한 샘물에 성큼 다가 서고, ‘시’ 하나에 한 가지 해석만을 강요하는 입시교육에도 우아한 똥침을 날려주었으니 이 어찌 보람차지 아니한가! 남의 일이라도 벅차다. 나도 시를 읽어야겠다. 유독 마음이 동하는 구절 앞에서는 저자처럼 추임새를 넣어가며.... “씨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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