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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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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26일 12시 25분 등록

정유정, 종의 기원, 은행나무, 2016

 

닥치고 사 줘야 하는 책을 쓰는 작가, 닥치고 읽어야 하는 책을 쓰는 작가.... 내게 정유정은 그런 작가이다. 전작 <28>을 읽으며 너무도 치밀한 구조와 생생한 묘사에 감복해버렸다. 이만한 스토리를 구상하고, 인물을 창조하려면 도대체 얼마큼의 노고를 쏟아부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연이어 읽은 <7년의 밤>은 그만은 못했다. 구성이 작위적이고 스토리가 조금 늘어졌다. 물론 <28>에 비해서 그랬다는 얘기이고 소설가가 문장노동자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기에는 충분했다.

 

그런 정유정의 신간 <종의 기원>이 나왔다. 득달같이 주문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묘사가 지나치게 촘촘해서 가끔 건너 뛰었다. 듬성듬성 넘기면서 스토리를 파악한 후 아무 곳이나 펼쳐서 읽곤 했다. 그래도 된다는 것은, 작가의 인물묘사, 심리묘사가 고르게 출중하다는 뜻도 되겠지만, 눈을 떼지못할 만큼 무시무시한 흡입력을 요구하던 <28>만은 못 했다는 얘기가 되겠다.

 

작가는 이상심리를 가진 인간에게 관심이 많다고 한다. 작품마다 소름 끼치는 악인을 다루다 보니 독자들에게서 왜 그토록 인간의 에 집착하느냐는 질문도 자주 받나 보았다. 거기에 대답하기 위해 작가는 오래 전 스물세 살의 청년이 부모를 살해한 잔혹사건에 접했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직 사이코패스라는 용어가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절, 젊은 정유정은 강한 동기부여를 받았나 보았다. 그 때 <종의 기원>의 주인공 유진이 수정란의 형태로 자기 안에 착상되었다고 한다.

 

그 후로 오랫동안 작가는 프로이트에서 정신병리학으로, 뇌과학에서 범죄심리학으로, 진화생물학에서 진화심리학으로 관심범위를 확장시키며 이 수정란을 품어 왔다. 전작들에서 비슷한 악인들을 다루며 형상화시켰으나 늘 목이 말랐다고 한다. 그 이유를 작가는 이렇게 풀어낸다.

 

그들이 늘 였기 때문이다. 외부자의 눈으로 그려 보이는 데 한계가 있었던 탓이다. 결국 여야 했다. 객체가 아닌 주체여야 했다. 우리의 본성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을 어두운 숲을 안으로부터 뒤집어 보여줄 수 있으려면, 내 안의 악이 어떤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가, 어떤 계기로 점화되고, 어떤 방식으로 진화해 가는지 그려 보이려면.”

 

그래서 <종의 기원>1인칭으로 쓰여졌다. 작가가 사이코패스의 최상급 포식자로 태어난 유진이 되어 유진의 생애를 살아낸 것이다. 나도 인간성의 심연을 보여주는 사건사고에 민감한 편이다. 세상에 일어나지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보다 잔혹하고 소설보다 드라마틱한 사건들 앞에서 진저리를 친다. 내가 될 수 있으면 그런 사건들에 접하지 않으려고 피해 다닐 때 작가는 긴 시간 노고를 거듭하여 소설로 된 보고서를 또 한 편 세상에 내 놓았다.

 

특정한 개인이 특정한 분야에 꽂히는 것이 늘 경이로웠는데, 작가 또한 매서운 근성을 보여준다. 나는 뉴스에서 접한 사건이 가끔 생각나서 괴로운데, 소설의 얼개 자체를 세 번이나 고쳐 썼다는 작가는 소설 속에서나마 이상심리를 가진 주인공이 되어 살아가는 것을 어떻게 버티는 것일까?

 

주인공 유진의 이모는 정신과의사로서 유진이 일곱 살 때 그린 그림을 보고 그의 이상을 알아차린다. 유진이 조금 커서 본격적인 검사를 해 보았을 때 이런 표현이 나온다.

 

유진은....집중할 일이 생기면 오히려 호흡이나 맥박의 속도가 뚝 떨어졌다. 얌전하거나 유순하거나 참을성이 많아서가 아니라, 흥분의 역치가 보통 사람보다 훨씬 높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이는 유진의 심장이 뛰려면 특별한 것이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이런 경향은 대부분의 마니아층, 특정한 분야에 남다른 집중력과 승부근성을 보이는 사람들, 아마도 대다수의 예술가들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정유정만 해도 특정 주제에 매료되어 흔치않은 작품세계를 구축하지 않았는가. 조금은 불편한 스토리를 읽으며, 오히려 어떤 사람이 일생일대의 관심사에 천착하는 방식에 더 이끌렸다. 인간성 깊숙한 곳에 이런 이상심리가 들어 있다면, 요즘 세태는 깊이 잠복한 이상심리를 꺼내 보이라고 부추기는 듯 뒤틀려가고 있으니 이를 어찌할꼬. 지극히 단순한 나는 대답도 단순하다. 내 심장을 뛰게 하는 것이 있다면 맘껏 고마워하며 들이 팔 일이다. 주인공 유진처럼 적어도 살인만 아니라면.

 

나는 마침내 내 인생 최고의 적을 만났다. 그런데 그게 바로 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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