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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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닭도 없이 더 고요해지고 싶은 날이 문득 내 삶에 찾아올 때 내게는 홀로 고요히 찾아나서는 공간이 몇 곳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더 자주 나를 이끄는 한 곳은 제수리재입니다. 굽이치는 긴 계곡과 그것을 따라 이어진 도로를 거슬러 올라 재의 정상에 차를 세우고 그곳에 서면 나는 제일 먼저 하늘을 봅니다. 미세먼지 만연의 시대에도 구름만 끼지 않는 밤이라면 그곳의 별은 여전히 맑고 선명합니다. 밤이면 넘는 차마저 거의 없는 그곳에서 밤하늘을 보는 감동은 나의 은밀한 관음입니다. 그곳에서는 거의 매번 별똥별을 볼 수 있고, 그곳에서는 매번 내 삶의 시원과 종말을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재의 말랭이 위에서.
1,000m에 가까운 군자산과 버금가는 높이의 칠보산을 잇는 그 재는 나의 어머니가 소녀의 때에 시집 와 ‘관평’이라는 낯선 마을에서 시집을 살면서 ‘칠성’이라는 더 낯선 곳에 서는 장을 보고 돌아오기 위해 호랑이의 두려움을 견디며 넘고 다시 넘었다는 재이기도 합니다. 그 소녀와 또래의 소녀들은 이제 팔순을 바라보기에 그 밤에 재를 넘는 인적은 이제 더는 없습니다. 대신 바람이 그 재를 넘지요. 내가 태어난 마방집이 있었던 마을 ‘관평’을 정면으로 두고 서서 나는 팔을 벌려 바람을 맞는 습관이 있습니다. 겨울에는 북쪽인 칠성에서 관평으로, 여름에는 그 반대로 바람이 불며 나의 앞과 뒤를 씻어냅니다. 그때마다 나는 내 몸에 쌓여가는 세속의 때를 기꺼이 쏟아냅니다. 부끄러움을 생각하지 않고 그것들을 내놓을 수 있는 재의 말랭이 위에서.
또 어떤 날은 소리와 향기를 탐하는 데 집중하면서 그 재를 찾기도 합니다. 호랑이와 곰과 삵과 단비가, 고라니와 노루가, 멧돼지와 여우와 늑대와 두꺼비와 뱀들, 그리고 온갖 텃새와 철새들이 이 산과 저 산을 연결하는 이곳을 거쳐 한 평생을 지탱했을 것을 생각하며 삶을 지탱한다는 것의 눈물겨움을 생각합니다. ‘부스럭 사사삭’, ‘피우우 삐우우’ … 노래이며 슬픔이며 두려움인 것들이 빚어내는 소리를 들으며 내 삶의 기쁨이며 쓸쓸함이며 두려움인 것들에 대해 생각합니다.
재 위에 서서 나는 또한 코를 벌름이고 킁킁대며 숲을 채운 온통의 어둠 속에서도 잦아들지 않는 철마다의 꽃향기며 나무 냄새며 숲의 향기들을 마시고 내뱉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내 삶의 냄새에 대해 생각하고 돌이킵니다. 내가 내는 삶의 냄새는 저 숲과 같지 않고 혹시 썩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냐며 되묻고 또 부끄러운 마음에 홀로 얼굴이 화끈대는 적도 있는 것입니다. 그 재의 말랭이 위에서.
나는 내 삶의 시원과 종말을 떠올리며 살고 싶어서, 별
내 몸에 쌓여가는 세속한 때를 씻어내고 싶어서, 바람
내 삶의 기쁨이며 쓸쓸함이며 두려움인 것들에 대해 생각하며 살고 싶어서, 소리
그리고 이따금 부끄러움 없이 부끄러워하고 싶어서, 냄새
이제는 사람대신 별과 바람과 소리와 향기만이 넘고 넘는 그 제수리재를 찾아갑니다.
어느 날에는 그 제수리재에 당신과 함께 서는 날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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