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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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졌지만 이팝나무 꽃필 즈음 아까시나무 나란히 꽃피었습니다. 그들 꽃잎 사그라지고 나자 숲에는 잠시 색(色)의 정적(靜寂), 멀리서 볼 때 숲을 밝히는 큰 나무들의 개화는 없었습니다. 정적 이후 열흘 남짓 되자 드디어 색보다는 향기로 압권인 꽃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저기 부산에서 경기까지 산야에는 그 꽃들의 향기로 난리입니다. 짐작하셨나요? 그 꽃? 바로 밤나무의 꽃 잔치입니다.
여름입구에서 피는 이팝나무는 순백(純白)의 빛깔이 압권입니다. 나풀 촘촘 피어있는 모양새에서 옛사람들은 그리도 그리운 쌀밥(이밥)을 연상했다지요? 그래서 민중들이 부쳐준 이름이 이팝나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아까시나무는 노래와 씹는 검 때문에 아카시아나무로 잘못 불리고 있는 나무입니다. 이팝나무는 꽃 빛깔이 압권일 때, 아까시나무는 그 꽃 향기가 백미입니다. 밤나무 역시 긴 가락으로 피워내는 그 나무의 수꽃 향기가 너무도 특별하여 이 계절 들과 숲에서 곤충들의 관심을 단연 독차지 합니다. 양봉으로 생산하는 꿀 중에는 ‘아까시 꿀’과 ‘밤 꿀’이 따로 있을 정도니 그 향기 속에 얼마나 많은 꿀이 담겨 있는지도 쉬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팝은 그 빛깔이 압권이지만 향기는 미약합니다. 반면 아까시나무나 밤나무의 꽃은 그 색깔이 마치 때묻은 광목(廣木) 옷처럼 순백의 색에서는 멀어져 있습니다. 나는 이팝이 왜 그토록 희고, 아까시와 밤나무가 왜 그토록 특별한 향기를 만드는지 오랫동안 궁금해 왔습니다. 한 3년 전부터 내 삶에 찾아든 의도치 않은 시련을 마주하고 깨닫게 된 우주의 구성원리이자 운행원리의 하나인, 빛과 그림자(一陰一陽之謂道) 이치로부터 그 까닭을 짐작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 짐작은 이렇습니다. 이팝의 순백은 그가 놓인 처지의 절박함이 빚은 색이고, 아까시와 밤나무의 특별한 향기 역시 절박함이 빚어낸 모양이라는 것입니다. 위 언급한 세 종류의 꽃은 모두 주변이 녹음으로 짙어져 가는 때에 피어납니다. 봄날 피는 꽃들이야 아직 주변에 짙은 색 잎들이 별로 없을 때라서 피었다 하면 단박에 저를 드러낼 수 있고 매개자를 매혹하기에 쉽지만, 이팝이나 아까시, 밤나무가 꽃을 피울 때는 이미 숲이 충분히 푸르러 제 꽃을 드러내기 어려운 지경입니다. 그들이 피는 때는 봄꽃들보다 상대적으로 따뜻한 기온과 일조량과 강우량과 매개자 수가 많다는 점에서 안전합니다. 그 안전함이 그들이 누리는 빛이라면 치열함은 그들의 그림자입니다. 녹음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 절박함이 그들의 운명인 것이지요. 이팝은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운 나풀 촘촘한 모양에 순백의 빛을 토하는 것으로, 아까시나무와 밤나무는 그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특별한 향기와 꿀의 양으로 녹음의 절박함 속에서도 결실을 이뤄내는 것이지요.
꽃에서 쌀밥을 연상하고 풍년을 기원하고 싶었을 만큼 밥이 절박했던 시절 누군가는 그 절박함을 이팝나무라는 이름으로 남겼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팝나무의 그 빛깔과 모양은 치열함 속에서도 자신을 이루고자 한 그 나무의 절박함이 빚어낸 색일 것입니다. 누군가는 아까시나무의 꽃 향기에서 아가씨를 연상했을 테고, 다른 누군가는 밤꽃 향기에서 은밀한 어떤 향을 연상한다고 하지만 그들의 향기는 다만 그들의 절박함이 빚어낸 고유한 향기일 것입니다.
절박한 놈들에게는 모두 그 꼴과 향기가 있습니다. 우리 각자에게도 절박함이 있으니 우리 각자에게도 살아가며 표출하는 삶의 꼴이나 삶의 냄새에도 어떤 고유한 것들이 있을 테지요. 나는 다만 나의 그 꼴과 냄새가 누군가의 삶을 북돋우는 모양이고 냄새이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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