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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10일 21시 17분 등록

서울에서 네 시간여를 달려온 버스는 목적지에 다다릅니다. 터미널도 아닌 간이정류장. 논밭 개구리 소리만이 객을 반기는 가운데 내려선 이는 우두커니 서있습니다. 괜한 서러운 감정이 밀려옵니다. 담배를 필줄 알았으면 좋으련만. 걷고 싶은데 시골이라서인지 어둠이 일찍 시작됩니다.


한잔하지 않으면 흐트러지는 마음을 잡을 수 없는 그런 날입니다. 한 병 두병 어느새 빈 통이 쌓입니다. 그렇게 취기가 오르다 어슴푸레 잠이 들었습니다. 눈을 떠보니 손목에 느껴지는 무언의 통증. 손을 댈 수가 없습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어젯밤 상황을 헤아립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속이 거북해 게운 것 외에는 좀체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아침밥이 넘어가질 않습니다. 오전 내내 기분이 쳐집니다. 바닥을 친다는 게 이런 느낌인가 봅니다. 모든 것이 귀찮습니다. 이유 없이 짜증이 나고 분노가 턱까지 차오릅니다. 누군가 있었으면 괜한 시비조로 사달이 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


‘이러려고 내가 여기에 내려왔던가.’

‘노가다 하려고 온 것도 아닌데 뭘 하고 있는 건지.’

‘하고 싶은 일이 이런 게 아니었잖아.’


꽉 막힌 가슴을 주먹으로 내리쳐보지만 진정이 되질 않습니다. 이런 감정은 처음입니다. 웬만큼 씩씩대면 사라질 법도한데 그렇질 않으니.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의 증상이 이럴까요.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 보입니다.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아우성을 치고 싶은데 손을 잡을 이가 없습니다. 한없는 절망의 나락 속으로 추락중입니다. 극단적 선택을 하는 이의 심정이 이렇겠구나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연한 상황이 일어났습니다.


오월임에도 한여름 뙤약볕이 내려쬐는 오후. 밀짚모자에 손에 쥐어든 도구는 냉면사발 하나. 전사의 심정으로 장독대 앞에 섭니다. 나보다도 몸집이 큰 녀석. 뚜껑을 열자 퀴퀴한 냄새의 알록달록 해묵은 된장이 빠끔히 쳐다봅니다. 오늘 내가 해야 할 소임. 젠장. 입에서 육두문자가 절로 나옵니다. 단벌옷을 버릴세라 자세는 엉거주춤 입니다. 숨죽여온 시간만큼이나 묵직한 무게. 퍼 올린 된장은 빨간 대야에 담겨 다시 유리병으로 이어집니다. 숨이 가빠오고 모자를 썼음에도 비집고 들어오는 자외선. 맺힌 땀방울을 훔치다보니 바람이 흘러갑니다.


그 장면에 빠져들었습니다. 노를 젓는 모션으로 가락을 탑니다. 영차. 마음이 조금씩 풀리어집니다. 뭐죠. 평정심이 돌아오나요. 된장은 행사시 방문한 백여 명의 손님에게 나누어지는 내용물입니다. 그래서인가요. 뿌듯함이 밀려옵니다. 아이들의 재미난 놀이로 인식되어집니다. 우울하면 움직이라고 했던가요. 나는 그 순간 일련의 작업에 꽂혔고 그 동작은 대상물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콩이란 모습으로 태어나 적막의 공간속 얼마나 기다렸던가요. 나의 감정에 비길 바는 아니겠지만 억울하고 지루한 세월을 어떻게 감내할 수 있었던 지요. 그대 모습을 대면하여 손가락으로 찍어 맛본 아낙네는 환한 미소를 짓습니다. 잘되었네. 그러자 그대의 얼굴에도 복스러운 박꽃이 피어오릅니다. 발효라는 인내의 수고로움이 드디어 빛을 발하는 순간. 그 에너지가 닿았음인가요. 마음이 전해져서인가요. 나도 어느새 그 순간이나마 선한 성자로 돌변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수고로움이 선물로 생명의 먹을거리로 함께할 때 축복의 잔치가 됩니다.


노동이후 수돗물 한바가지를 목구멍으로 들이키며 구부렸던 허리를 펴 올리니 파란 하늘이 눈에 박힙니다. 아! 좋구나. 몇 시간 전과는 너무나 판이한 기분. 실제 환경은 변함이 없었음에도 나의 내면세계는 지옥과 천국을 들랑거렸습니다. 몰입의 힘인가요. 아니면 자연에 빠진 시늉을 낸 촌부의 덕인가요. 그 속에서 즐거움을 느낄 줄이야 어떻게 알았을까요. 배시시 웃음이 나옵니다. 이런 날도 있네요. 사는 게 그런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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