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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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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30일 17시 09분 등록

 

나는 그분을 형님이라고 부릅니다. 여든 살 가까이 되었으므로 그렇게 부르기에는 나이 차이가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10년 전 우리가 처음 대면했을 때 그분이 내 중학 시절 친구의 6촌 형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러므로 그렇게 부르는 것이 맞는다는 그분의 주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지난 편지에 소개한 나 오늘은 돈 안 벌래요!’의 정신으로 식당을 운영하시는 사장님의 남편입니다. 그 식당의 주력 메뉴는 버섯전골이고 함께 차려내는 반찬 대부분은 들나물·산나물입니다. 그 식당 음식의 대부분은 형님이 구해 오시는 자연산 재료로 만들어집니다. 집 뒤꼍으로 바로 연결되어 있는 해발 1,000m 높이의 뒷산에서 온갖 종류의 산채와 버섯을 형님이 직접 채취하여 그 자연산 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파는 식당인 것입니다.

 

10년 세월 왕왕 오가며 형님을 뵈었는데 나는 그 형님을 뵐 때마다 반갑고 기뻤습니다. 형님은 숲에 대해 나로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경지에 계시는 분입니다. 내가 그간 책으로 읽고 공부한 내용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실용적 지식과 지혜가 그 형님에겐 가득합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사약으로나 쓰는 풀을 방구석 한쪽의 화분에 키우고 있기에 내가 깜짝 놀라 형님에게 왜 이 풀을 키우시냐고 물었더니, “동상(동생의 충청도 사투리)이 그 풀을 알어? 그거 내가 약으로 쓰는 풀이여.” 내가 놀라서 다시 물었습니다. “형님, 이건 사약으로 쓰던 풀인데, 이걸 약으로 쓰신다고요?” 빙그레 웃으시며 형님이 말을 이었습니다. “아주 조심해서 조금씩 내 몸의 상태와 맞춰서 먹으면 망가진 관절을 말끔히 낫게 하는 풀이여.” 형님은 일생을 살며 가장 아쉬운 것이 배우지 못한 것이라 한탄하는 분이었지만 그렇게 도저(到底)한 경지에 계신 분이었습니다.

 

얼마 전 나는 운이 좋게도 형님이 운영하는 펜션의 뒤꼍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간 그렇게 들락거리면서도 본 적이 없었던 뒤꼍을 그날 처음 보게 된 것입니다. 뒷산인 비악산에서 옮겨 온 각종 야생초는 물론이고 우리 지역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귀한 식물들이 뒤꼍에 빼곡히 자라고 있었습니다. 형님이 한 종씩 짚어주시는 이름 중에는 내가 아는 도감 상의 이름과 너무도 다른 이름들이 넘치도록 섞여 있었습니다. 형님은 식물들을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향명(鄕名)으로 기억하고, 나는 책에 기록된 공식 이름으로 기억하는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나는 형님에게 이곳에서의 당신 일생에 대해 여쭈었습니다. “형님은 언제부터 산을 모시고 사셨어요?” 형님은 긴 세월의 삶을 참 간결하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열 살 때부터였어. 그때 어머니가 개가를 하셨거든. 나는 의부 밑에서 크게 됐지. 옛날 풍습에서 일가들 모여 사는 집성 마을에서 어머니가 겪어내는 마음의 고생을 아들인 내가 볼 수가 없었어. 내가 이사를 가자고 했지. 그렇게 이 골짜기로 흘러들어왔어. 산과 골이 너무 깊어 문전옥답은 고사하고 논뙈기 구경도 어려운 이곳에서 나는 자연히 산을 오르내리게 된 것이지.” 형님의 대답은 그토록 간결했습니다. 칠십 년 전 어린 소년이 겪었을 고초와 상실과 슬픔 따위가 그저 담담한 몇 마디의 대답으로 갈무리 되고 있었습니다.

 

나는 형님을 경외의 눈으로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주름진 이마와 미간과 눈꼬리, 그 아래로 이어지는 움푹 파인 얼굴과 깊은 주름보다는 형님의 미소가 더 도드라져보였습니다. 형님은 열 살에 스스로 삶의 길을 정한 사람이었습니다. 일부종사의 가치와 질서가 보편이던 시절, 세상 따위가 정한 그 질서로부터 핍박받는 자신의 어머니를 구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낸 소년이 그분이었습니다. 세상이 당연한 것이라고 그어놓은 질서의 금을 깨고 금 밖으로 뛰쳐나가 더 자유하게 살아야겠다는 본능적 판단과 선택이 열 살 소년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은 글 한 줄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무지로 산 것이 천추의 아쉬움이라 하시지만, 고백하건대 나는 그 형님을 존경합니다. 지금, 적당히 사는 것이 만연한 세상에서 나는 당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결정이 주는 고독과 가난과 아픔을 어루만지며 평생을 살아온 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 잘 알기에, 나는 그 형님을 존경합니다. 문득 그 형님 집에 들러 버섯전에 탁주 한 잔을 걸치고 싶은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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